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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쌍리
법정스님 작사, 홍쌍리 선생 작곡
홍쌍리 : 청매실 농원 대표, “밥상이 원래 약상이니 농사를 작품하듯 정성스레 지어야 하는데 이렇게 농약도 쳐요? 내 코, 내 눈, 내 입으로 들어갈텐데…….”
만병은 잘못된 음식에서 비롯되므로, 옛날로 돌아가 자연에 가까운 우리 음식을 먹어야 건강하다고 말씀하는 건강 전도사. 아픈 사람이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는 쉼터를 만들어 유기농 곡식으로 지은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는 농부.
梅花本瑩然(매화본형연) 매화는 본디 환한데
映月疑成水(영월의성수) 달빛이 비쳐 물결 같구나.
霜雪助素艶(상설조소염) 서리 눈에 흰 살결 곱게 드러나
淸寒徹人髓(청한철인수) 맑고 차가움이 뼈에 스민다.
對此洗靈臺(대채세령대) 마주 보며 마음 맑히니
今宵無點滓(금소무점재) 이 밤 찌꺼기 하나 없네.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매화梅花가지에 걸린 밝은 달梅梢明月(매초명월)"
“매화나무 밑에 보리를 심었어요. 파릇파릇한 보리치마폭에 송골송골 맺힌 이슬 위로 하얀 매화 꽃잎이 날려서 곱다라니 왕관을 씌워요. 하얀 매화저고리와 파란 보리치마 사이를 하얀 티셔츠 차림으로 거니는 법정스님은 그대로 ‘학’이셨어요.”
법정스님을 그리는 청매실농원 홍쌍리 선생 말씀을 듣다 보니 마치 선화 한 폭과 마주 선 느낌이다. 애틋하게 스님을 추억하는 선생 눈매가 달빛 받은 매화 같다.
매실농축액은 만병통치약
약이 되는 밥상을 찾아 셀 수 없이 해외 나들이를 한 홍쌍리 선생. 우리나라 흙은 밥이고 산천초목이 반찬이며 산에 흐르는 물이 승늉이란다.
“우리나라같이 산에서 도라지나 더덕 뿌리를 쑥 뽑아 바짓가랑이에 쓱쓱 문질러 흙이 반이나 묻은 채로 그냥 먹어도 탈이 없는 곳이 없어요. 맵고 짜고 쓰고 떫고 신 오미(五味) 오색(五色)이 산에 다 있어서 된장 한 가지만 달랑 들고 가서 나물들을 뜯어 씻지 않고 쌈을 싸 먹어도 탈이 없고, 철철 흐르는 개울물을 손으로 떠 마셔도 탈이 나지 않는 데가 우리나라뿐이더라고요.”
사람들은 매실나무를 관상용으로 썼지 먹을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선생이 1966년도 처음, 매실을 먹을거리로 만들었다. 시아버지한테서 매실 농축액, 매실술, 매실김치 담그는 법을 이어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배가 아프다고 올라오면, 아버지는 얼른 물부터 끓이래요. 따끈따끈한 물에다가 매실농축액을 풀어서 먹이면, 몹시 체한 사람은 토해요. 두 번 먹여서 토하고 나면 세 번째는 토하지 않아요. 그런 뒤에 오뉴월에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있으라고 해요. ‘더위 죽겠다는데 웬 이불을 덥습니까?’물으면 ‘춥든지 기분이 나쁜 때는 꼭꼭 씹어도 잘 얹히지 않아? 한번 보래. 동네 제사가 언제인가. 거의 다 겨울이다. 늦가을에서 이듬해 초봄까지 아픈 사람이 많다. 탁한 피가 추우면 뭉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이 사십이 넘으면 몸을 따뜻하게 하고 차가운 것을 멀리해야 한다.’고 그러셨어요.
겨울 감기에 걸리면 밤이나 대추, 파뿌리나 생강, 팥을 함께 푹 삶은 물에 찹쌀 한 주먹 넣고 죽을 쑤어서, 매실농축액 먹이고 난 뒤에 먹여요. 그리곤 또 이불 덮고 누워 있게 해요. 따신 것은 몸을 데워주고 매실은 소화를 시키니까. 아버지가 산꼭대기 의사입니다.”
시아버지를 스스럼없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홍쌍리 선생 말씀을 들으니‘겨우 살아내기에 겨울’이라는 말씀이 실감난다. 229쪽
매화꽃 송이송이 눈물이 방울방울
선생이 처음 시집왔을 땐 둘레 45만평이 다 시댁 땅이었다. 시집 온 이듬해(1966) 스물네 살 먹은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밤나무를 베어내고 매화나무를 심자고 했다.
“아버지 진해 벚꽃은 4월에 피는데요. 여긴 2월 매화꽃 아닙니까? 꽃 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고 싶습니다.”
돈도 되지 않는 매화나무를 심는다니까, 시아버지는 “매실은 아무도 주워 먹지 않고 사 가는 사람도 없다. 굶어 죽으려고 그러냐. 저 많은 일꾼들을 어떻게 먹일거냐.”고 역정을 냈다. 며느리는 끈질겼다. 시아버지 모르게 밤나무를 베다가 들키기도 여러 번.
“아버지를 붙들고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을게요. 아버지 대를 잘 이을게요. 지켜봐 주세요. 아무리 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어서, 아침저녁으로 머리도 감겨 드리고 세수도 시켜 드리고 손발도 씻겨 드리고 팔다리도 주물러 드렸어요. 우리 아버지가 딸같이 잘 보듬어 주셨어요. 그렇지만 며느리가 밤나무를 베고 매화나무를 심으려 드니까. 내를 붙들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대통령훈장 받은 사람도 우리 집뿐이라네요. 아직까지는.”
눈이 내려 매화나무에 소복이 쌓이면 사람들은 설중매라고 모두 탄성을 지른다. 그러나 선생은 그런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얗게 지새웠다.
“방안에서 왔다갔다 했어요. ‘이 딸내미는 손 시리고 발시려 죽겠는데, 엄마 니는 따뜻한 방에서 포근한 이불 덥고 자나?’그럴까봐 애가 쓰여 죽겠어요. 새벽에 나가서 매화꽃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입김을 ‘호호’쐬면, 눈 녹은 물하고 내 눈물이 매화꽃 가슴이랑 내 가슴을 다 적시더라고요. 그러다가 또 바람이 세게 불면 지들끼리 ‘얘들아. 이 강풍에 우리가 떨어져 죽으면 내년 봄에 엄마 못 만난다. 열두 달 새 우리 엄마 흰머리 더 나고 주름 더 깊어져서 엄마 얼굴 못 알아보면 어쩔끼고. 그러니까 눈 감고 입 꼭 닫아. 절대 떨어져 죽으면 안돼.’하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이 젖어요.”
매화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선생 눈물을 밥인 양 먹고 자랐다.
섬진강가 돌맹이 보석을 베개 삼고, 새벽안개를 요와 이불 삼아 자고 일어나는 이 여인보다 더 행복한 여자기 있으면 나와 보라는 홍쌍리 선생도, 이 찬란한 아침을 맞기까지 폭풍우 몰아치는 혹독한 시련을 넘어서야만 했다. 경기도 수원 밑에서 광산을 차린 부군이 1969년부터 4년 동안 45만평에 이르던 많은 재산을 더 털어 없앴기 때문에.
“그때는 이자가 개인 돈은 45에서 50프로, 농협 돈은 35프로였어요. 살 수가 없는 기라예. 날마다 쥐어뜯겨 싸서. 국산 옷은 확 잡아당기면 잘 뜯겨싸서 철없이 미제 스모투바지(미군 스물사이즈 바지)에 야전잠바를 입고 다녔어요. 45만평이 빚에 다 넘어가고 요 뒤 약산만 하나 달랑 남았습니다.”
하도 머리채를 쥐어뜯기다 보니 나중에는 빚쟁이들이 쥐어뜯을 머리카락도 없을 지경이었단다.
빚진 사람은 울지도 웃지도 못한다. 하루는 일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하하 웃었더니 지나가는 사람이 빚진 놈이 뭐 좋다고 웃느냐고 을러댔다. 한번은 울다가 들켰다. 이번엔 저렇게 청승을 떠니까 집구석이 그리된 게 아니냐며 끌끌 혀를 찼다. 그 뒤로 입을 닫았다.
(중략)
사람들이 마음찌꺼기를 버리고 가도록
메화천국을 만들어 보라
그때 법정스님이 오셨다.
“스님이 ‘저 가파른 산비탈에다가 매화를 심어서 꽃 천지를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고 말씀했어요. ‘못해요.’그랬더니 ‘후회하지 않을 텐데’그러세요. ‘그대로 난 못해요’그랬지요. 빈몸으로 다녀도 힘든 곳이거든요. 얼마나 경사가 졌는지 떨어진 밤이 골짜기로 다 모여서 따로 주우러 갈 필요 없이 소쿠리에 쓸어 담기면 하면 될 만큼 가파른 곳인데, 거기다 매화나무를 심을라 카면. 아휴, 그래서 ‘빈몸으로도 못 다니는 데 거기다 심으면 매실을 딸 수도 없습니다.’그랬더니 ‘가팔라서 매실은 못 따니까 꽃 천지를 만들어 도시 사람들이 마음 찌꺼기를 버리고 갈 수 있도록 천국을 만들어 보라.’고 거듭 말씀을 하세요.
스님이 오시면 그냥 앉아서 이야기나 나누고 가는 성질이 아닙니다. 자꾸 같이 댕기재요. 나이 차는 그렇게 나지 않지만 스님을 아버지마냥으로 졸래졸래 따라다녔어요. ‘따습기로 친정아버지보다 낫네.’그러면서.
일년에 서너 번, 적어도 두 번은 꼭 오셨어요. 꽃이 한 송이씩 필 때면 말씀 안 드려도 오세요. 그리고 꽃이 만개해서 바람에 휘날려 떨어질 때도 우찌 그리도 잘 아시는지 꼭 때맞춰 오셨어요. 그날 스님을 따라 모두 둘러보고는 ‘스님 내 할게요.’ 약속을 드렸어요. 그렇게 시작했어요.”
봄이 되면 온 나라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드는 매화 천국이 움틔운 지 어느덧 서른 일곱해가 지났다.
“정채봉이하고 동기간처럼 지낸 지가 20년이 넘지요. 채봉이도 스님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나도 스님을 시아버지처럼 따랐어요. 돌아보니까 세 사람이 다 엄마를 일찍 잃었더라고요. 나는 촌놈이라 채봉이 글을 발바닥만큼이나 따라갈까요? 우리 형제들이 문장력이 참 좋았어요. 40년대 말 마을에 대학생이 네 명 밖에 없을 때였는데 삼촌이 대학을 가고 오빠가 대학을 갔어요. 그런데 팔 남매 가운데 유독시리 나만 가르치지 않았어요.”
배우지 않았어도 입을 열면 술술 나오는 말씀이 바로 시요, 노래다.
“이름을 지으러 갔더니 작명장이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복이 없으면
(이런 대단한 사주를 가진) 사내애를 못 낳고 계집애를 낳았나. 얘는 글을 가르치지 말고, 기를 못 피우게 눌러 키워라.’라고 했대요.”
그러면서 이름을 상의(相議)라고 지어 줬다. 그런데 호적계에서 그만 두 쌍(雙)에 다스릴 리(理)자를 써서 ‘쌍리’라고 올렸다. 뒤에 그 사실을 알고도 가시내니까 그냥 내버려두라고 해서 이름이 되었다. ‘홍쌍리 청매실농원’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홍쌍리에 있는 청매실농원이라고 오해를 하기도 하는 선생 이름은 이렇게 지어졌다. 쌍(雙)자는 둘이라는 뜻이지만 밭을 가리키기도 한다. 너른 흙을 다스리는 선생에게 걸맞은 이름이다. 작명가가 지어준 이름 또한 넓을 홍(洪), 서로 상(相)에 옳을 의(義)자이니, 넓은 세상에 의롭고 선량하게 어우렁더우렁 어울려 살라는 뜻을 지녀 그 이름 또한 홍쌍리 선생 삶과 잘 어울리는 훌륭한 작명.
“산을 까서 이 집을 지을 때 스님들 다섯 분이 와서 기도를 했어요. 내 손에 밤 가시 하나 찔려도 너무 아픈데, 포클레인으로 땅을 팔 때 지신(地神)님이 얼마나 아플까. 길을 낼 때도 날마다 ‘흙아! 미안하다, 고맙다.’이게 내 노래에요. ‘천국을 만들려고 그러니까, 상처가 나도 지신님이 좀 이해를 하이소.’용서를 구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홍쌍리 선생 말씀에, 길상사를 일굴 때 경내에 있는 나무를 꼭 베어내야 할 사정이 생기면 당신과 먼저 상의를 한 뒤에 나무에게 베어야 하는 사연을 말하고 용서를 빌고 나서 베라고 했던 법정스님 말씀이 떠올랐다. 237쪽
3층을 올리면
알이 부화되지 않고 썩는다
“법정스님은 마음에 들게 해 놓으면 잘했다고 칭찬을 하시고, 마음에 안들게 해 놓으면 마구 야단을 치세요. 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만큼.”
선생이 공장을 옮기려 할 때 스님이 오셨다. 스님에게 공장 터를 보여 드리면서 공장을 이리로 옮기려고 한다고 말씀드렸다. 선생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법정스님은 낙엽이 수복이 모여 쌓이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지금 서 있는 곳이라고 말씀드리니, 그러면 창고가 아니냐고 말씀하고는 “내가 어디 가서 뭘 봐주는 사람이 아닌데, 아무리 봐도 여긴 창고.”라면서 공장 있던 자리에 가 보자고 했다.
공장 있던 터에 간 스님은 기계는 이미 새 공장 터로 옮겨놓았는데도 “이곳에서 기계 소리가 나지 않나. 절대로 공장을 옮기지 마라.”고 말씀했다.
그렇게 터를 잡아준 법정스님은 뒷산을 가리키면서
“쯧쯔, 좌청롱 우백호에 코가 있고 입이 있는데 턱이 없구나.”하며 혼잣말하듯이 말씀을 던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한번 물어볼 법도 한데 묻질 않았어요. 그 뒤로도 오실 때마다 가끔 그러셨어요.”
그러고 한참이 흐른 뒤에 광양시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청매실농원에 가실 테니 헬기 앉을 자리를 만들라고 했다. 홍쌍리 선생(70)은 전시관 앞 비탈에 흙과 돌을 트럭 3,700대 분을 부어 메웠다. 지금 장독대 자리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까 법정 스님이 오셨다.
돋워진 자리를 본 법정스님.
“잘 했다. 이제 턱이 있어 됐다”며 “돈 많이 들었지? 빚 많이 졌지? 그래도 앞으로 괜찮을 것이다”고 했다.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느냐는 선생 말에
“그땐 보살이 빚에 깔려 죽을 판인데 그 소리를 어찌 하겠나”고 말씀했다. 그때 일을 벌인 김에 전시장 올라가는 왼쪽 축대도 새로 쌓았다. 그 모습을 본 법정스님이 축대 위에다 항아리를 한 줄로 나란히 놓으라고 이르시기에 그대로 했다.
“그 뒤에 웬 스님이 한 분 오셔서 누가 저렇게 항아리를 일자로 놓으라고 했느냐고 물어요. ‘법정 스님이요.’그랬더니 무릎을 치는 기라. 햇빛나면 항아리가 얼마나 번쩍거립니까? 그 스님이 용비늘이 번쩍거린다고 하더군요.”
암컷 학이 부화하려고 알을 품고 앉았는데
수컷이 섬진강 먹이를 끝없이 물어다 준다
어느 해 법정 스님은 섬진강 건너 산을 가리키면서
“저 앞산을 봐라. 수놈 학이고 이 뒷산은 암놈 학이다. 암컷이 부화하려고 알을 품고 앉았는데 수컷이 섬진강 먹이를 끝없이 물어다 준다. 그러니 이곳에 집을 2층 이상 올리지는 마라. 3층 높이로 지어버리면 알이 부화가 되지 않고 썩는다.”고 말씀했다.
그러고 한참 뒤에 장독대 아래 집을 짓는데 집 골조가 장독대보다 더 올라왔다.
마침 그때 법정 스님이 오셨다. 차를 대어 놓기가 무섭게 건물 골조가 솟아 있는 걸 보시더니 두 말도 하지 않고 도로 차에 오르셨다.
느닷없는 스님 모습에 당황한 선생이 쫓아가서 차 문고리를 잡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스님! 와예?’ 하니까. 내리시더니 아따, 눈에 불이 번쩍이시면서
‘저 건물 누가 저렇게 높이 지으랬어!’ 아이고, 너무너무 화를 내세요.
‘생각 해 봐라. 코앞에 키 큰 사람이 앉아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러지 않았나, 지어도 절대 2층 이상은 짓지 말라고. 어쩌자고 저렇게 큰 건물을…’
스님이 말을 잇지 못하셔예. 그걸 뜯어내는데 5천만원도 더 들었어요.
그나마 지붕도 안 덮고 뼈대만 세워놨을 때니까 망정이지.
뒤에 오셔서 ‘이제 됐다’그러시더라고. 스님은 좋은 말씀을 하셔도 부드러운 인상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화가 나시니까 무섭데예. 평생 잊히지 않는 기라예.”
뒷이야기지만, 홍쌍리 선생은 2층 이상 짓지 않으려 했는데 장성한 아들 고집을 꺾지 못해 생긴 일이었다.
▲ 생전의 법정 스님은 홍쌍리 선생으로 하여금 지금의 청매실농원을 이루기까지 많은 조언을 했다. 스님은 홍쌍리 선생을 "내가 한마디 하면 둘, 셋을 하는 보살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변택주의 <가슴이 부르는 만남> 중에서
뒷부분 내일 이어집니다. 너무 길어서요. ^^
첫댓글 도인들께서는 풍수에도 능하신 모양이십니다. 감히 추측컨대 산과 땅과 물의 불성 기운이 보이시나 봅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들리는 말로 법정스님께서 풍수에 일가견이 있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참으로 억척스러운 홍쌍리 보살이십니다.
홍쌍리 보살과 법정스님의 인연은 처음 듣는 소식입니다.
dalma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