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3장 1절-18절
우리는 어제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수많은 우연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대할 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책의 결말을 다 알기에 제법 자라나서는 두 번 다시 그 책을 들춰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대다수 결말을 알기에 쉽게 읽고 지나쳐버릴 때가 있든지 아니면 아예 들춰보지도 않을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룻의 이야기의 절정부분도 쉽게 지나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룻은 이방여인이며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유대땅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자신들의 땅도 또한 그 땅을 일구어낼 힘도 없는 유약하고 가련한 여인에게, 시어머니 나오미는 본문 1절을 통해 새로운 삶을 이룰 것을 확언합니다. 1절입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여기서 안식이라고 표현된 말은, 결혼을 통해 주어지는 휴식과 안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건 취급받던 여인들에게 집안에 남자의 부재는 그 자체가 치욕이요, 공포요, 좌절이었기에 룻에게 주어질 새로운 삶은 온전히 자신의 존재의 재확인이며, 살아갈 의미를 부여받는 유일한 방법이 가정을 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앞서 말씀 드린대로, 성경의 많은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기에 룻 이야기를 그저 이스라엘판 신데렐라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갈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우리와 동떨어진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닌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편안하게 본문을 대하지만, 룻의 삶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매일 남의 밭에서 떨어진 낱알을 모을 때의 비참한 심정과 연로한 시어머니를 홀로 집에 두고 온 마음, 모압 땅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육체 가운데 오는 고통으로 인해 얼마나 복잡하고 힘든 심정이었겠습니까. 6,7 절입니다. “그가 타작 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의 명령대로 다 하니라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보아스의 침실에 들어가기 전 정갈하게 준비한 룻이, 보아스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의 침실에 등장했다고 합니다.
이제 룻은 보아스의 발치에 몸을 누인 가련한 여인 룻의 심정은 여성으로서 얼마나 수치스럽고 가슴이 뛰고 신세가 한탄스럽기도 하고 또한 자존심이 상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룻의 절박한 심정과 무너지는 가슴은 오늘 우리의 삶으로 연장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세상 가운데 가슴 무너지고 가슴 쓸어내리는 일이 많습니까. 자존심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은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마치 룻의 삶처럼 저희들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삶은 쉽지 않습니다. 삶이란 매순간이 결코 핑크빛 해피엔딩의 동화가 아닙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발치에 누운 그녀를 발견하고 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가련한 모습 속에 숨겨진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고 칭찬하며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을 이행하겠다고 약조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타인들에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속을 시킵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 앞에 가련한 모습으로 나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삶에 찌들고 죄에 넘어져 두려워하는, 성도가 가야할 곳은 오직 유력자 보아스로 대변되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는 가슴이 떨리고 두렵고 자존심이 상해 몸부림칠지도 모릅니다. “나는 가련한 자입니다. 나의 형편과 사정은 이렇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떠벌리며 공개적으로 질타하지 않습니다. 오직 조용히 일을 처리하십니다. 모든 것을 근원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인간의 얄팍한 위로와 경청이 아닌 우리의 깊은 속내까지도 이해하고 저희들을 품어주십니다.
오늘의 본문 마지막은 저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18절입니다.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단지, 룻은 보아스 앞에 나아가 자신의 연약함을 보였을 뿐인데, 이제 모든 책임과 의무는 보아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앉아 있으라고 명하며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란 우리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드러내는 것임을 재차 확인했습니다. 보아스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낸 룻이 해야할 것은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저희가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순간 하나님께 모든 바톤이 넘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말입니다. 성경을 세심히 보십시오. 기독교의 역사를 세심히 살피십시오. 아니 모든 인류의 역사를 세심히 살펴보십시오.
인류가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며 자신들의 유토피아를 건설했다고 오판하는 순간, 인류는 좌초했으며
인류가 자신의 연약함을 토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간, 하나님께서 신묘막측한 방법으로 인류에게 평화를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련한 여인, 룻입니다. 여전히 우리 속에 우리의 삶 가운데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정결하게 그분 앞에 가져가십시다. 문제만 맡길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맡깁시다. 그분의 발치에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누입시다. 그분께서 쉬지 않고 일하실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121:1-3
주님...
가련한 룻이 보아스의 발치에 누울 때 자존심이 무너지고 인생이 막막했겠지만,
비로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처럼
저희들 오늘 아버지의 제단에 저희들의 영혼을 고스란히 누입니다.
세상에서 놀란 가슴 진정시켜주시고 저희들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하찮게 여기는 세상에서
저희들의 보호자가 저희들의 주인이 되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방여인 룻이 새로운 삶,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는 안식과 평화를 누린 것처럼
오늘 저희들도 진정한 평안과 존재의 변화를 허락하여주옵소서.
주님만이 저희의 도움이시오 저희의 구원자이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오늘도 저희의 치부를 드러냅니다.
우리의 유일한 도움이 되시는 주님 불쌍히 여기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