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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2:11-19, 나의 모습 나의 소유]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겉과 속이 같은 신앙을 가지라
갈 2:11-19
[토마토와 빨간 사과] ‘빛으로 소금으로’라는 책으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는 ‘레베카 피펏’이 저술한 책입니다. 이 책의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빨간 사과, 용감히 껍질을 벗고, 진정한 토마토가 되기 위한 여행을 떠나다. 천사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당신, 진정한 토마토가 되기 위한 여행을 떠나라!’. 이 책은 이 시대 크리스천들이 겉과 속이 알차고 투명한 신앙인이 되기를 당부한 책입니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것처럼, 인간의 영혼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참된 삶의 길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즉 ‘인기, 돈, 명예, 연애, 일, 건강’으로 텅 빈 마음을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영혼에 참된 기쁨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은혜와 진리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겉은 늘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착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살지만, 속은 여전히 썩어 있고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점점 외식된 신앙인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겉과 속이 같은 토마토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 이 책의 앞의 부분에서는 ‘빨간 사과, 껍질을 벗다', 그리고 뒤 부분에서는 ‘토마토 되기'라는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겉과 속이 다른 빨간 사과의 껍질을 벗고, 겉에서 봐도 속이 투명하게 보이는 토마토 같은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성화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책은 자신이 죄인임을 부인하는 사과 같은 크리스천들에게, 껍질 속 죄성을 인정하고, 껍질을 벗고, 토마토가 되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가 바라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진실성이 결여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신앙의 모습을 ‘토마토와 빨간 사과’를 비유로 들어 나타냈습니다.
‘토마토와 빨간 사과’는 진실한 크리스천과 가식적인 크리스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토마토와 빨간 사과는 빨갛다는 데에는 동일하지만, 그 속은 전혀 다릅니다. 즉 토마토는 겉과 속이 동일하게 빨간 색이지만, 빨간 사과는 겉은 빨간 색이지만 속은 전혀 다른 하얀 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저자는 이 두 과일을 통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은 겉과 속이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 토마토처럼 겉과 속이 한결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이며,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약함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나 세상의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어디에서나 참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을 위장하는 ‘가면’이 있습니다. 자신의 약점이나 못난 것을 감추고, 좀 더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지지 못했으면서도 가진 척하고, 착하지 않으면서도 착한 척하고, 힘들면서도 행복하게 잘 사는 척 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오게 되면, 지금 믿음이 흔들리고 어려움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것처럼, 신앙이 좋은 척하며, 자신을 위장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면, 본인이 행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전달할 수가 없고, 더욱 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삶이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리아 앤더슨] ‘마리안 앤더슨’은 ‘콘트랄토’ 즉 여성 최저음 영역의 가수로 역사상 위대한 여자 성악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가난한 가정 형편과 흑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1925년 28세의 나이에 '뉴욕 필하모닉 주최 신인 콩쿠르’에서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승했습니다.
1935년에는 흑인 최초로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섰고, 이 공연을 본 거장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한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목소리’라고 칭찬을 하면서 극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39년 워싱턴 링컨 기념관 광장에서 열린 무료 야외 연주회에서는, 7만 5천여 명의 청중이 몰릴 정도로, 그녀는 유명해졌습니다. 그녀가 불러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그 찬송가는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입니다. 이 찬송가의 가사는 그녀의 생애를 그대로 고백한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가 연주하는 곳마다 참석해서 취재하던 기자가,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당신의 인생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입니까?’ 기자는 그녀가 공연을 마친 뒤,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모든 순간을 함께 했었기 때문에,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할지 대충은 짐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는 뜻밖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제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늙으신 어머니에게 이제는 피부색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릴 때였습니다.’ 그녀는 검은 피부를 감추기 위해서 밤마다 피가 흘러나오도록 자기 몸을 닦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검은 피부를 닦아내기 위해 몸을 씻지 않아도 된다고, 어머니께 말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때로는 실수하고 다른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러한 연약한 모습마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 연약함 마저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주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있는 그대로 나가면 됩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속은 힘들고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잘 믿는 척, 신앙이 좋은 척하면, 진짜 일어나야 될 변화를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무엇인가를 과장하고 거룩한 것처럼 포장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참된 회복과 변화, 그리고 성장이 주어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신앙 자세는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을 버리고 ‘토마토처럼 겉과 속이 같은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해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 사도가 보여 주었던, 이중적인 행동이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11절]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게바 즉 베드로가 안디옥을 방문했습니다. ‘안디옥’은 당시 ‘로마,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가장 크고 중요한 3대 도시 중의 하나였으며, 특히 고대 세계에서 근동과 아시아 및 유럽을 잇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역의 중심지로서 발달하였습니다. 헬라인들이 대거 밀집한 이곳은 결국 강력한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안디옥의 성도들이 가장 먼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곳은 이방인 교회의 총본부와 같은 역할을 함으로써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의 선교 사역의 기지가 되었습니다.
[12절]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그런데 오늘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성만찬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 기독교인들과 함께 한 식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주의 만찬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성도들이 함께 떡을 떼며 나누는 ‘아가페’라고 불리는 만찬을 매주 행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성도들이 각자 집에서 가지고 온 음식들을 다 모아서 함께 식사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식사는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가 함께 떡을 떼며 교제하는 아주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도착하자, 베드로 사도가 자리를 피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낸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주의를 신봉하고, 극단적인 율법주의적 성향을 가진 할례당이 안디옥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이 야고보에게서 사람들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베드로가 급히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베드로가 식탁에서 물러난 이유는 순간적인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바울과 1차전도 여행을 함께 한 바나바 조차, 다른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물러날 정도로 할례당은 교회에서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그러나 식탁 교제는 교회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식탁 교제에서 배제되는 것은 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식탁에서 물러남으로 간접적으로 이방인 성도들을 벌한 셈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참으로 베드로답지 못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그 당시 초대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이 방 전체를 통틀어서, 베드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최고의 수제자였습니다. 지도자라면 지도자답게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비겁하고 부끄러운 행동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의심의 여지 없이 베드로가 잘못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베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공개적으로 그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얼핏 보게 되면, 이것은 좀 과한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였고, 사도 중에서도 사도라고 불리는 그런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렇게 한 것은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복음을 지키기 위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것은 다 용납할 수 있지만, 복음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13절]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베드로의 이러한 외식적 모습에, 같이 식사하던 다른 유대인들과 바나바까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가 버린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다른 사람을 미혹하게 하여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베드로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이런 행동을 ‘외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외식이 무엇입니까? 바깥에서 먹는 식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외식(外飾)’이란 ‘겉을 꾸민다’는 뜻으로, 원어로는 ‘휘포크리시스’입니다. 여기서 영어 ‘히포크러시’ 즉 ‘위선’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는 ‘연극 배우가 연기를 한다’는 뜻으로 당시 헬라 시대에는 연극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연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연기는 현실이 아니라, 대본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결코 이러한 가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연기를 하듯이, 가면을 쓰고, 거룩한 척 하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위선과 외식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있는 영역이 사라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이중적인 역할을 하며 살면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는 가로막히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외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착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거룩한 척 하는 삶을 가장 경멸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에 가장 강력하게 책망한 대상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바라새인의 외식을 가장 싫어하셔서, 그들에게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회칠하다’라는 헬라어 ‘코니아오’는 ‘먼지’를 뜻하는 ‘코니아’에서 파생된 동사입니다. 보기 흉한 무덤을 깨끗이 단장하고, 또 무덤을 만져서 의식적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는 경고로서, 무덤 입구에 석회칠을 하는 행동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무덤에 회를 칠한다고 해서 그 속에서 나오는 악취가 없어지거나,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단장을 했다고 할지라도, 무덤은 역시 무덤일 뿐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라는 옛말이 있듯이 각 사람의 내면의 세계는 다른 사람이 쉽게 알아 볼 수가 없습니다. 누가 보아도 아름답게 보이지만, 내면을 바라보면 송장 냄새가 나는 삶을 살고 있을 때, 이것을 ‘외식, 위선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예수 앞에 나오기 위해서는 이러한 외식,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도 모른 척 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회복과 성장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내 삶의 앞을 위장하는 가면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한 모습, 즉 겉과 속이 같은 신앙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겉과 속이 같은 신앙을 가질 수 있는 원리에 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들어가며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 1889∼1977)이 하루는 잠시 머리도 식힐 겸해서 시골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을 지날 때였습니다. 때마침 그 곳에서는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채플린은 그 현수막을 보고서 흥미를 느끼고서는 그 대회에 참관했습니다.
모두 외모부터 진짜 채플린처럼 분장하고 나와서, 채플린 특유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채플린은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신분을 속이고 그 대회에 출전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평소에 하던 그대로 그 곳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심사 결과가 재미있게 나왔습니다. 놀랍게도 채플린은 1등을 못한 것입니다. 그는 그 대회에서 겨우 3등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대회에서는 진짜 채플린보다 더 실감나게 연기를 한, 가짜 채플린이 두 사람이나 더 있었던 셈입니다.
세상에는 가짜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진짜보다 가짜가 더 진짜 같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대문 시장에 있는 어떤 참기름 가게에 가면 ‘정말로 진짜 순 참기름만 판매합니다.’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정말로, 진짜, 순 참기름’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데, 누가 진짜 그리스도인 줄 알기가 힘듭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하는데, 오히려 썩은 냄새를 풍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직하고 착한 일을 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했는데, 어느 순간에 보니 우상 앞에 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간고사] 어느 대학교에서 중간고사를 앞두고 학생들이 밤새 시험 준비를 하고 왔는데, 교수님이 시험을 며칠 뒤로 미루겠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한 학생이 일어나서 대표로 교수님께 항의했습니다. ‘교수님, 진작 말씀하셨어야죠, 오늘 시험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제 얼마나 열심히 시험 준비를 했는데, 이러면 다른 시험에도 차질이 생깁니다.’
그랬더니 교수님은 그 학생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네 이름이 뭔가?’ 하면서 출석부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갑자기 목소리가 확 작아지면서 ‘김철수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은 출석부를 펼쳐 보면서 말했습니다. ‘김철수? 자네는 용감하군.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하네, 자네는 시험 안 봐도 A 학점이야.’
그러자 그 학생이 너무 당황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 아까는 당황해서 제 이름을 잘못 말했습니다. 제 이름은 이영길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드러날 때 거리낌이나 부끄러움이 있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부끄러운 삶을 살아갑니다. 자기는 선한 척 하지만, 막상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드러날 때 떳떳하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겉과 속이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면 겉과 속이 같은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까?
1. 확실한 믿음을 가지라.
2. 바른 기준을 가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