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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라일락
by. 얼음빙수
대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실랑이 소리에 더 볼 것도 없이 몸을 돌린다. 집구석에 발 한번 들여보지 못하고 다시 길가에 나왔다. 하염없이 걸었다.
땡전 한 푼 없는 꼴에 신세 지는 건 또 싫어해서 빌붙을만한 친구를 두지 않았다. 고로 갈 곳이 없었다. 지긋지긋해도 이곳 아니면 거처가 없으니 부부싸움 일어나는 집 주위를 맴맴 돌았다.
눈만 가리면 다 숨은 줄 아는 꿩 마냥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어떤 진창이 벌어지고 있을지 다 알면서도. 대문 옆에 등을 기대고 서 쿵쿵 소리를 들었다. 차라리 알아듣기 싫은 욕지거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찔끔하기 싫어서 눈을 더 크게 떴다.
저 집엔 불쌍한 괴물들이 산다.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부수고 부서지고 반복하는, 저딴 식으로밖에 못 구는, 불안과 무기력이 짙게 밴, 어딘가 망가진. 나는 괴물들의 산유물이었다. 확률적으로 저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익숙한 소란에 문밖을 나와 본 앞집 아주머니와 두 눈을 마주쳤다. 아주머니가 손에 쥔 전화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현관문이 부서질 듯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단숨에 대문까지 걸어 나온 아버지가 차갑게 언 몸을 잡아끌었다. 멍청하게 굳은 채 현관으로 빨려들어갔다.
유일한 둥지 속이 엉망이다. 두 걸음 만에 깨진 유리조각을 밟고, 세 걸음 만에 피로된 발자국을 남겼다.
술 냄새가 진동했다. 새하얀 알약들이 바닥을 굴렀다. 아버지가 억지로 끌어다 놓은 방구석에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나의 엄마가 있다.
이렇게 최악인데 나는 더한 나락이 남은 지옥도를 본다. 그런 기분이었다. 등신같이, 등신처럼 굳어서 몸을 발발 떨었다.
네 엄마 깨워. 언제나 그랬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등신들 사이에서 등신같이, 등신처럼 몸을 발발 떨었다.
두꺼운 손바닥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미와 같은 게. 지 애미랑 똑같애.
흔들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울음이 번들대는 눈으로 생지옥을 담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질에 뇌수가 터져 나오지 않은 것을 원망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술 냄새만으로 늘 나를 처부수고 관통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신발도 없이 어두운 골목을 전전하고 있었다. 지 애미랑 똑같애. 거꾸러져 있던 엄마의 모습이 발바닥 깊은 곳에 박혀 사라지질 않는다. 오른발에 신은 양말이 붉게 절어 있었다. 걸음마다 춥고 쓰리고 축축했다. 나는 그만 걷고 싶었다.
그만하고 싶은데 더 그만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말단이 떨어져 나갈 듯 차가운 발끝만 바라보며 계속해서 걸었다. 계속해서 걷다가 마주 오던 사람과 부딪혀 크게 넘어졌다.
넘어진 김에 쓰러져 누웠다.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세게 받았으나 창피해서 웃거나 아파서 울진 않았다. 그저 멍청한 얼굴로 하늘만 바랐다. 옆에선 짧게 앓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싸늘한 한마디가 떨어져 내렸다.
“등신 같아.”
사과를 해야 하는데 일어날 수도, 실은 일어날 생각도 없었다. 간신히 고개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봤다. 오렌지 빛 가로등 아래 길게 선 인영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낮은 빛마저 등진 어둠 속에서도 알았다.
“거기서 그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아. 일어날 생각 없음 계속 그러고 있어.”
그 애는 박지연이다. 우리 반에서 제일로 예쁜 애, 성격 더러운 애, 발랑 까진 애, 싸가지 없는 애, 무서운 애, 또 ......
“미안.”
참 빠르게도 지나쳐 갔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긴 했을까. 뒤늦은 사과 따위 듣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재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를 것이다. 알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학교에서 마주칠걸 껄끄러워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이대로 죽는다.
등 뒤로 닿아오는 아스팔트의 찬기를 따라 미련도 없이 식어버렸으면 했다. 나를 죽게 하는 건 불우한 과거도 지독한 현실도 캄캄한 미래도 아닌 차가움이어야 했다. 두 눈을 꼭 감았다. 아랫입술이 달달 떨렸다.
차가운 골목에 사이렌 소리가 가득했다. 차 문을 세게 닫은 경찰이 달려와 목에 걸린 학생증을 확인하고, 식은 몸을 단번에 안아 올렸다.
응급실로 옮겨져 발바닥을 꿰매고, 머리통에 붕대도 감았다. 수액을 맞는다. 기력 없는 몸에 훈기가 돌았다. 그대로 눈 감았으면 했는데 살았다. 기어코 살려냈다. 나를.
나를 살게 한 것들은 나를 책임져야 한다.
나는 나를 살게 만든 사람이 박지연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개 라일락
by. 얼음빙수
파고드는 바람을 어쩌지 못하고 걸었다. 숨끝마다 아쉬웠다. 호흡이 멀쩡하니 괜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현실은 이렇게나 턱턱 막히는데 저녁 공기가 푸르기라도 한 것마냥 청량하다는 게. 말도 안 됐다. 자꾸만 숨을 크게 쉬고 싶어졌다.
담배를 추구하진 않았다. 위독한 연기치고 값비쌌던 까닭이다. 진부한 탈선으로 수명을 갉아먹지 못한 이유에도 돈이 끼어있었다. 구질구질했다.
지금 손에 들린 담배는 아버지가 버린 담뱃갑 속 찌그러져 있던 돛대였다. 디스. 담뱃갑은 쓸데없이 예쁘게 생겨서 내다 버리지 못했다. 누가 구질구질한 애 아니랄까 봐. 고작 한다는 짓이 쓰레기를 주워다 피우는 일이었다. 자기 혐오를 넘어 연민에 빠져들기 전에, 열여덟다운 추잡한 짓거릴 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했다.
나는 지옥 같은 곳에서 단 십 미터도 벗어나지 못한다. 다 무너져가는 집 근처 놀이터를 찾았다. 동네 밤이 길어지던 순간부터 이곳은 나쁜 놀이의 공간이 됐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정글짐 뒤에서 못된 연기를 피워냈다. 못된 짓을 했다.
불을 붙이기 위해 담아낸 첫 모금에도 화산재를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홧홧했다. 눈가에 닭똥 같은 눈물을 매달고 연신 콜록댔다. 결국 불 붙은 담배를 쥐고도 간접흡연밖에 못 했다. 아버지가 있는 집에서 썩어가는 폐를 부여잡던 순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직접 겪지 않는 담배는 한없이 같잖았다.
담배가 걸린 손가락 사이로 반항의 온도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더는 비참하지 않았다. 슬슬 웃음도 다 났다. 담배에 취할 수 있나. 그렇다면 다음번에는 술을 피워봐야겠다고.
어째 하는 짓이 절대로 애증하는 이의 것을 닮아가고 있었다. 생각을 가려야 했다. 방금의 수모를 잊은 것처럼 더한 고통이 필요해졌다. 나는 내가 조금 더 해로웠으면 했다.
담배를 다시 무려는데 가치가 미끄러지듯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하얀 손가락을 따라 고개 들었다. 한 치 앞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쁜 놀이가 잘 어울리는 어둠 속에서도 알았다.
박지연이 정면으로 다가와 서 있다.
“둘 중 하나만 해.”
새빨간 입술이 자연스레 담배를 물었다.
“이런 거 할 거면 그렇게 생기지 말든가.”
두 볼이 패일 정도로 숨을 깊게 마시고
“그렇게 생겼으면 이런 거 하지 말든가.”
내게는 매캐한 향기만 돌려준다.
회빛 장막이 걷히고, 조명 하나 없는 달 아래 시선을 마주했다. 지독했다.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언제가 되더라도 방금의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는 너도 한 가지만 해.”
잃었던 담배를 되찾아 쥔다.
“그렇게 생겼으면 울지 말든가,”
왼손가락에 끼워진 담배가 그냥 그렇게 타들어갔다.
“울 거면 그렇게 생기지 말든가.”
박지연이 담배 연기처럼 찰나를 홀리듯이 웃었다. 아는 척은. 차갑게 쏘아붙이고 뒤돌아 걸었다.
어둠에 익은 초점이 그 애 뒷모습을 좇았다. 반이 넘게 타들어간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역시나 한 번의 연기를 들이쉬고 한참을 콜록댔다.
립스틱. 드디어 걸러지지 않은 탈선의 맛이 났다.
일개 라일락
by. 얼음빙수
재앙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긋지긋한 동네를 맴돈다. 익숙한 밤이 찾아온 것처럼 속절없는 아침이 올 테다. 쳇바퀴 같은 생에 마음 붙일 곳이라곤 빈 깡통 나동구는 골목거리밖에 없었다.
걷고 걸었다. 걷고 걷다가 박지연을 마주했다. 박지연은 나이가 찰 대로 찬 아저씨와 팔짱 낀 모습을 하고 나를 지나쳐갔다.
언제나 남들 같지 않았다. 같은 학교, 같은 책상,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책을 보고 있어도 박지연만은 달랐다. 교복을 벗어던진 박지연은 세상 누구보다 남달랐다.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애, 성격 더러운 애, 발랑 까진 애, 싸가지 없는 애, 무서운 애, 또.......
닫을 수 없는 귀로 흘러들었던 소문이 실체가 되어 덮쳐 드는 순간이었다. 눈을 마주친 것 같다. 감당 못할 비밀이 생긴 기분이었다. 나는 이 비밀이 재앙 같았다.
박지연이 나를 살린 것처럼 나도 그 애를 살려야 하나. 이제는 둘의 그림자 조차 남지 않은 골목을 돌아봤다. 불편한 마음에 머리가 돌 것 같았다. 불편함 속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도망칠 수 없었다.
무작정 달려가 둘의 앞길을 막아섰다. 박지연의 얼굴은 언제나 싸늘했지만 이 순간 더없이 싸늘했다. 앞에 선 순간을 후회하게 만들 만큼.
할 말이 있어. 얼토당토않은 핑계로 대치상태를 만든다. 비켜. 한마디에 비켜날 수밖에 없었는데도. 나는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둘이 사라진 건물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 애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긴 싫었으니까. 그 겨울 그 날씨 그 시간 그 바닥에 남아 그 애를 기다렸다.
자정이 다 된 시각에는 마주할 수 있었다. 향기가 묻는다는 표현을 난생처음 실감했다. 그 애에게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차가운 냄새가 났다. 나는 이미 차가웠고, 우리는 차가운 골목을 걸었다.
“할 말은.”
고개 저었다. 봤을까? 박지연은 입김만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나에겐 시선 한번을 안 주고 앞길만 바랐다. 박지연은 안개 같은 숨을 뱉으며 나에게 어디로 갈 거냐 물었다. 나는 가방끈만 꼭 쥔 채 또 고개 저었다. 봤을까?
“하긴. 갈 데가 집 밖에 더 있을까.”
박지연이 한숨을 쉬듯이 말했다. 한숨이 유일한 숨인 것같이. 살기 위해 한숨하는 것같이. 당연하다는 듯 비참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그 애가 나 같았다.
처박았던 시선을 들어올리며 질문했다. 아까 내가 할 말 있다고 했을 때 왜 그냥 가라고 했어? 급한 일이라고, 나랑 꼭 해야 할 얘기가 있다고 하고 같이 나왔으면 됐잖아.
“되긴 뭐가 돼.”
불길에서 사람을 구하지 못한 소방관처럼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박지연을 살리고 싶었다. 화려한 얼굴을 하고 처연하게 울던, 소리도 없이 아우성치던 그 애를 살려주고 싶었다. 그 애가 식어가는 나를 구한 것처럼. 꼭 자기 같은 방법으로. 그러나
“다시 들어가 봐야 돼.”
우리는 제 코가 석 자다.
“...... 왜?”
위로를 받는 것도, 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나도 갈 데가 거기밖에 없으니까.”
말을 아끼고 아끼다 결국엔 아무런 말도 해주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어떤 짓거리를 해도. 포장될 것 같지 않았다. 쓰레기통 속 쓰레기를 정리하는 일처럼.
“왜. 더러워?”
극렬히 고개 저었다. 봤니? 이건 꼭 봐야 돼. 박지연의 팔꿈치 언저리를 건드렸다. 우리의 걸음이 멈추어 섰다.
그 애는 여전히 내쪽으론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주제도 모르고 박지연을 동정하게 될 것 같았다. 동정만큼 모호하지 않은 감정이 또 어디 있다고. 아마도 그 애를 명확히 감정하게 될 것 같았다.
집이 가까워 왔다. 박지연이 나를 살린 게 구원이 아니었던 것같이, 나의 고갯짓도 끝내 그 애를 구하지 못했다.
지옥으로 들어가기 위해 대문을 잡았다.
“맞을 것 같으면 뛰어나와. 기어이 맞지 말고.”
재앙을 만난 게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작은 동네는 소문이 무성하고 재빨랐다. 그러니까 나보다 먼저 그 애는, 그래서 나를.
소문의 실체를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부터 우리는 재앙을 맞바꾸어 잡고 서 있었다.
“꼭 다시 들어가고.”
충분히 어두운 골목에서 서로가 빛이 되어주진 못할망정 더 큰 어둠이 되어 시야를 흐려놓는다.
다시 들어가, 지옥 속으로. 박지연의 갈라진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일개 라일락
by. 얼음빙수
죽음의 낌새에 민감한 소동물이 그럴듯하게 꾸며진 덫으로 다가섰다. 작은 목숨을 틀어쥐고 천천히 죽여 갈, 악독한 덫이었다. 알면서도 배가 너무 고팠던 소동물이 먹이를 취하기 위해 덫으로 들어섰다. 소동물이 서서히 죽어간다. 고통하면서. 지켜보던 숲이 어리석은 소동물을 비난했다.
악몽이었다. 나는 소동물도 덫도 비난하던 숲도 아니었으나 기분이 참담했다. 찬 물로 잠을 씻어내는 중간 중간에도 자꾸만 생각났다. 학교 가는 길에도. 학교에서도.
소동물과 덫과 비난하는 숲. 소동물과 덫과 비난하는 숲. 소동물과 덫과 비난하는 숲.
전부 나빴다. 가장 나쁜 건 악몽을 꾼 자신이었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다. 내가 아닌 것들은. 그런 데 마음 쓸 여유가 없었다. 결국은 자초였을 무의식을 탓하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보다 덜 불행한 사람에게 팔아치우고 싶은 꿈이었다. 이런 게 속 뒤집어놓지 않아도 나는 충분히 불안했다.
실체 없는 상처가 자꾸만 욱신댔다. 몸에 든 멍을 다 합쳐도 병든 마음만 못했다. 괴로웠으나, 구체적으로 어디가 괴로운지 잡아낼 수 없었다. 무너진 도미노처럼 뭉뚱그린 부위가 괴사 되어 아팠다. 첫 번째로 쓰러져버린, 원흉과도 같은 실수를 추적한다. 아마도 탄생 정도가 될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겁이 많기 때문이었다. 맞기 전에 곧잘 도망쳐 나왔고, 소동이 끝나면 착실히 기어들어갔다.
요즘 들어 통 멍들지 않음에도 나는 괜찮지가 않았다. 눈을 집에 두고 온 것처럼 선연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불쌍한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귓속에 갇혀있다. 아직도. 지금도.
떠돌이 개 신세를 자처하며 익숙한 동네를 발걸음하다 보면 박지연을 만나게 됐다. 우리는 일관성 없이 행동했다. 서로를 못 본 척 지나치기도, 동네를 같이 걷기도 하고, 놀이터에서 나란히 그네를 타기도, 담배를 태우기도 하고, 차마 말은 못 하고. 어떤 날은 맛도 없이 달기만 한 사탕을 깨뜨려 나눠먹었다.
악몽 같은 하루가 기어이 꼬였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고. 아버지는 쥐새끼처럼 밖으로 도는 부속물을 단단히 벼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길에서 머리채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갔다. 앓는 소리 한 번 안 내고 머릿 가죽을 다 뜯겼다.
철썩 소리마다 섬광이 일었다. 통각에서 기인한 빛이 눈알 뒤로 번쩍였다. 이대로 눈이 멀 것 같았다. 실명하기 전에 대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래 봤자 아버지도 나도 잘 아는 골목거리였다.
지겨운 술래잡기를 반복하다 잘 모르는 동네에 숨어들게 됐다. 여기저기 쥐어뜯긴 꼴을 하고 하필이면 박지연을 만났다. 그 애는 영하의 날씨를 더욱 시리게 할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은색의 원피스가 갈치처럼 빛났다. 예쁘다고 말해주려는데 입을 떼기도 전에 풀이 죽었다.
“등신아. 맞기 전에 뛰어나오랬지.”
너 모르지. 나 되게 잘 도망 다녔어. 볼품없이 떨릴 목소리를 통째로 감춘다.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중력이 안구를 끌어당기려고 했다. 혼자서는 잘 울지 않는데 박지연이 앞에 있으니 조금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애는 입김인지 담배인지 모를 연기를 뱉으며 네온사인을 흘겼다. 나는 그 손에 구겨진 담뱃갑만 뚫어져라 봤다. ‘라일락’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애는 라일락을 태웠다.
“담배 갑이 예쁘네.”
“예뻐할 것도 셌다.”
연보라색 꽃그림에 한참을 예스러운 폰트. 어울리지 않는 담배 취향이 할머니 같다고 말을 건 적 있었다. 맞아. 할머니가 피우던 거. 하는 대답에 다음 말을 잃고 헤맸었다. 박지연과 만나 규칙 없이 떠돌던 어느 날에는 그 애가 라일락을 피웠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돼. 돛대거든.”
하나 남아서 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른 척 참 아쉬운 척 입맛을 다셨다. 목구멍을 헤집어 놓는 연기 뭐가 좋다고. 하나도 좋지 않다고.
“돛대를 빼앗아 피면 재수가 없다는데.”
돛대 같은 인생. 방향(方向) 키 아닌 동음의 해로움 외로움을 닮은 인생.
“그러니까.”
그 애 손가락에 걸린 라일락을 물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방향(芳香)이 되지 못하고, 동음의 해로움 괴로움이 되어버린 라일락을 피웠다.
매캐한 연기를 들이키며 예감했다. 냄새는 묻는 것이니까. 이곳에선 진한 화장품 냄새와 눈물 냄새가 묻어나겠구나. 그래서 콜록대면서도 쉽게 뱉어내질 못했다.
확신한다. 생이 이 지경으로 꼬인 것은 마침내 반항하듯 주워다 핀 돛대 때문이 아니다. 그거 하나 피웠다고 열여덟 겨울이 이토록 시릴 리 없었다. 그냥 올해 추위가 유독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얼지 말라고 틀어놓은 수도마저 동파시키고 마는 혹한이었다. 그 애를 들여보내야 한다. 우리는 지옥 속으로,
“또, 다시 들어가 봐야 해?”
건물이라기보단 소굴 같은 곳으로, 안식처라기엔 불지옥 같은 곳으로, 가야지. 가지 마. 나는 두 눈만 일렁이며 서 있다.
“잠깐 나온 거야. 담배 피우러.”
춥겠다. 들어가면 더 헐벗어야 할지 모르니 정말 추울 것이다. 아. 그냥 가지 마. 나랑. 나랑. 우리는 두 눈만 일렁이며 서 있다.
박지연이 덫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박지연도 덫도 비난하는 사람들도 아닌데 기분이 참혹했다. 그 애가 죽으러 들어간다. 천천히. 고통하면서. 발을 뺄 수 없다는 점에서 같았다. 네가 사는 곳이 덫이라는 게, 내가 돌아갈 곳이 늪이라는 게.
어쩌면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고통이다. 태어난 이상 우리에게는 상처가 늘어가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일개 라일락
by. 얼음빙수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으나 봄을 바라진 않았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스물에 가까워진다는 게 결코 달갑지 않았다. 스무 살이 탈출구가 될 수 있음에도 겁이 났다.
겨울 방학이 시작된 이후 이불을 뒤집어쓴 채 내리 잠만 잤다. 걷어차여도 발로 밟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지루한 시간이 계속되길 바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흘러버린 것들이 때를 가져온단 사실이 죽기보다 싫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간과 시간 사이도 시간이겠지만.
밥 먹어. 힘없는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못 들은 척 몸을 더 말자 두터운 이불이 들춰졌다. 억지로 붙들려 밥상머리에 앉았다. 동태눈을 한 채 녹조 같은 국을 내려다봤다.
오늘은 누군가의 생일이다. 엄마와 마주보고 미역국을 삼켜낼 자신이 없었다. 나는 오늘 같은 아이. 따뜻하면 형체도 없이 녹아버릴 걸 알았다.
미역국을 본체만체하고 일어서 화장실로 향했다. 파리한 면상 위로 차가운 물을 계속해서 끼얹었다. 녹아내릴 뻔한 눈시울로 자꾸만 눈물이 고였다.
해가 지지 않은 동네는 한 층 한 층이 모두 회색이었다. 보드라운 시림이 내린다. 오늘 밤 얼겠지. 닳아빠진 신발 밑창으로 새 눈이 스며 발바닥을 적셨다. 걸음마다 자박자박 소리가 났다.
일찍 져버릴 해를 기대하면서, 늘 같은 동네를, 어김없이 서러운 마음으로 걸었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빤했다. 이제는 익숙한 장소 아닌 사람을 찾는 것이다. 보이는 곳마다 사연이 있는데 그 애가 없었다.
걸음을 열로 쪼갠 것 마냥 잘고 느리게 걸어 불 꺼진 유흥거리에 도착했다. 채색되지 않은 풍경이 폐허와 다름없었다. 빛나지 않는 네온사인은 뼈가 그대로 내비치는 투명 물고기처럼 기괴하고 처량했다.
아직인 간판들을 읽어 나갔다. 이브, 파라다이스, 아몬드와 베짱이, 하프클럽, 업 앤 다운, 키스 앤 크라이. 그럴듯한 이름이 무색했다.
무색한 거리에서 박지연을 찾는다. 우연처럼 그 애를 만나게 되었으면 했다. 찾아 나선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우연일 수 없겠지만 오늘 같은 날이면 특별히 슬퍼지곤 하니까. 내리는 눈도 날 위한 것 같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생일이니까.
눈은 끊임없었다. 어느새 가로등이 켜졌다. 오렌지 빛 아래로 나리는 눈발이 꼭 그림 같았다. 구슬 안에 갇힌 눈꽃 마을처럼 아름다워 보이기까지 했다. 오늘은 이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 만큼.
해가 지자, 붉고 노르스름한 불빛이 거리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날은 색감과 반대로 더욱 싸늘해졌다.
눈 정돈 녹일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었나. 털어내지 못한 눈이 체온에 녹아 몸을 적셨다. 머리칼을 쓸어 올리다 스친 이마는 생각보다 더 뜨끈했다. 시선이 핑 돌았다. 들숨과 날숨이 힘에 부쳤다.
아무 상가 계단에 앉아 무릎 위로 고개를 묻었다. 이대로 잠들면 입이 돌아가거나, 죽거나.
이마를 짚어내는 손이 눈처럼 차갑고 보드랍다. 가위에서 깨어나듯 힘겹게 눈을 떴다. 고개를 들었다. 박지연이다.
“여기서 뭐 해. 너 열 나.”
“나 맥주 한 캔만 사주라.”
박지연이 가지가지한다는 눈을 하고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것쯤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우리는 눈 오는 거리를 같이 걸었다.
“비행은 혼자 다 하지. 아주.”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올라 낡은 동네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에 기대섰다. 익숙한 풍광을 바라보며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생각보다 맛이 없었다. 삼켜야 할 게 많아서 속만 아팠다.
“오늘은 안 맞았네.”
그런데 왜 울었냐고 묻는 것이다.
“생일이야.”
축하한다는 말이 없었다. 생일이니 눈물 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침묵할 뿐이었다. 맞다.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안 울고 넘어간 생일이 없었다. 어쩌면 너도. 참았던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서둘러 맥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우리 그냥 여기서 구를까?”
난간 밑으로 조금도 다듬어지지 않은 돌계단이 보였다. 한 번 부딪힐 때마다 살을 전부 짓이겨 놓을 것 같이 뾰족한 층계였다. 끝도 없이 까마득한 낭떠러지에서 박지연은 내게 죽자고 말했다.
“그럴까?”
서슴없는 대답에 황량한 웃음만이 돌아왔다. 박지연은 금세 비운 맥주 캔을 난간 밑으로 집어던졌다. 텅텅거리며 굴러간 캔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입을 뗐다.
“개학하면 이제 못 보겠다.”
언제는 학교에서 마주친 적 있었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넋이 나간 얼굴로 되물었다. 왜?
“서울로 가게 됐어.”
눈앞이 흐릿했다.
“어차피 이 짓거리하는 거 큰 물에서 놀아야지.”
그랬다.
아무도 떠밀지 않았으나 시작부터 절벽 그 끝이었다. 절벽에서 아슬아슬함이 아닌 것은 모르고 살아야 하는 게, 나락으로 떨어져도 세상은 있는 게, 그래서 결국 또 살아간다는 게, 비참했다. 또 비참할 우리의 생애를 생각하니 뇌가 엉망으로 뜨거워졌다.
처절하게 울고 싶었다.
“나도 데려가.”
박지연이 반 넘게 남은 나의 맥주를 빼앗아 계단 밑으로 던져버렸다. 맥주 캔이 우리를 대신해서 구른다. 둔탁한 소릴 내며 구른다. 캔에서 탄산이 흘러나와 흙바닥에 스며드는 소리가 났다. 언뜻 들으면 파도가 물러가는 것 같은. 박지연이 눈썹을 구겨가며 웃었다.
“넌 못생겨서 안 돼.”
마주 보는 눈이 너나할 것 없이 일렁였다.
어딜 가나 진창이겠지, 우리는. 그래도 안 돼.
서글픈 눈동자를 마저 읽지 못하고 고개 돌렸다. 떨리는 손을 들어 눈가를 세게 문질렀다. 더 감을 수도 없는 눈을 꼭 감았다. 박지연이 웃는 목소리로 물었다.
“울어?”
사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 나와 그 애는 두 달 남짓한 시간을 같이 걸어본 것이 다였다. 그럼에도 당연하고 소중한 것을 빼앗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실감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갈피를 잃은 원망이 그 애를 향하지 못하고, 늘 그렇듯 누구에게도 향하지 못했다. 봄이 오지 않길 바랐다. 그럼에도 봄은 오고, 봄을 맞고, 너는 가고, 라일락이 피겠지.
봄은 오고, 봄을 맞고, 너는 가고, 진짜 라일락이.
라일락 꽃말 / 친구의 사랑, 젊은 날의 추억
-일개 라일락 끝-
*일개 라일락은 2017년도에서 2018년도 넘어가는 겨울에 썼던 글입니다. 너무 추워서 모든 게 다 얼었던 때로 기억하는데, 올해 겨울이 꼭 그때처럼 추운 것 같습니다. 겨울이 지나기 전에 일개 라일락을 다시 올리려고 했는데 때마침 지연 님의 결혼 소식이 들려와서 재빨리 소환합니다.
가장 추웠던 겨울에 이렇게 공들여 슬픈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저의 학창 시절 배경음악을 장식해준 가수 중에 티아라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일 거예요.
날씨가 많이 풀렸지만 방심하는 순간 눈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 옷을 따뜻하게 챙겨 입으시길 바랍니다. 이불도 잘 덮으시고, 이불속에서 티아라의 노래를 들으시면 좋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2022년 흑호랑이의 해, 용맹하고 시크하고 복슬복슬한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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