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울트라-노마드 (울노, 鬱老)
상식과 논리
Common Sense & Logic
"크메르의 세계" 탄생 2주년을 기념하여, 잠자고 있던 "철학적 탐구" 게시판을 가동하고자 합니다. 이 게시판은 원래 일반적인 분과 학문이나 세세한 전문지식을 탈피하여, 인간의 사고과정과 세계에 관한 보다 폭넓고 보편적인 대화를 나눠보는 곳으로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최근에 세계체제론과 음모론, 한국정치 같은 주제들을 다루면서 회원님들과 토론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외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논리적 대화에서 많은 부분들이 쉽사리 간과되고 만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철학적 탐구"는 당분간 논리적 대화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토론 참여자 개개인들이 자신의 토론 방식 자체에 대해 반성해볼 수 있는 주제들을 조금씩 다뤄보고자 합니다.
먼저 여기서는 그 첫번째 주제로 "상식"(Common Sense)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타인과 대화를 나눌 때, 특히 논리적 토론을 전개할 때는 "상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논리적 과정"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을 사용하게 됩니다. 다만 그러한 과정에서 얻게 될 "설득력"에 있어서 그 구사능력의 개인적 차이만 존재할 뿐이지, 이러한 단계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상식"을 바탕으로 순차적인 논리적 전개를 보여주지 않는다면, 타인을 설득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것은 "대화"(dialogue)가 아니라 일종의 "독백"(monologue)으로 전락하면서, 최대로 잘 해보아야 "선동", "홍보", "세뇌", "정서적 호응 유도", "선교", "포교" 활동 같이 설득력의 범위나 설득 대상이 되는 공동체의 규모가 제한되는 행위에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상식과 논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아도 타인과 대화를 나누거나 공감을 나눌 수는 있지만, 그 내용의 진리값을 보다 다양한 범위의 사람들과 공유하는 데는 한계를 보이게 됩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계속해서 공감을 강요하거나, 반복적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습니다만.... 그 경우 어떤 이들은 공감해서 수용해줄 것이고, 인자한 사람들은 공감은 안 되지만 크게 의견충돌을 하지 않으려고 화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유연하게 피해나가 줄 것이며, 조금 과민한 사람들은 언쟁을 벌이거나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상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순차적 단계"를 거쳐 대화와 토론을 진행하는 방법이, 가장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가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도 "사실"(fact)에 부합하는 "참"(truth)이라면, 대체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또한 한계는 존재합니다. 상대방이 머리(이성)로는 수용하면서도, 말하는 이를 개인적으로 싫어한다든가 하여 가슴(감성)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경우도 빈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비논리적인데도 많은 이를 공감시키는 경우도 존재하고, 논리적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세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정도에만 차이가 있을 뿐, 상식을 바탕으로 논리적 단계를 거쳐 타인을 설득하려는 의지를 본능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이들은 자신이 판매하는 물건을 파는 단계까지만 그렇게 하고, 또다른 이는 자신의 삶과 인생 전체를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려 할 정도로 강박적 수준에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또 혹자는 자신이 호감가는 결과가 나올 때만 논리적 태도를 유지하다가, 자신이 원치 않는 결과가 예측되면 논리적 태도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정말 천차만별인 것이죠. 하지만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자신이 논리적 태도를 견지하는 단계에서는 <상식을 바탕으로 한 순차적인 논리전개>를 본능적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만일 내가 상식을 바탕으로 논리적 전개를 해나간다면, 상대방 역시 자신의 상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나의 논리적 모순을 발견해서 지적해줄 수 있을 것>이란 믿음(신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신념이야말로 정상적인 정신기능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무언의 약속이자 "최후의 상식"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을 철학적 전문용어로 표현하자면 <間-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확보> 혹은 <상호-주관성의 확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령 우리가 일상에서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하는 행위야말로 상호 주관성을 전제로 한 행위의 대표적 형태라고 할 수가 있죠.
그러므로 우리가 "상식"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논리적 대화나 토론에 대해 참으로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상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그 답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고활동의 규칙과 전제들에 관해 가장 전문적으로 사색했던 사람들은 아마도 철학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동, 서양의 방대한 철학사를 살펴보아도 "상식"에 대한 정밀한 탐구가 의외로 드물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간략하게나마 철학의 역사에서 "상식"에 대해 사색하고 그에 대해 언급했던 철학자들의 학설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즐겨 이용했던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도움을 받아, 그 내용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그래왔듯이, 이하의 철학사전급 내용들은 잘 이해가 안 될 경우엔 대충 훓어보기만 해도 좋다는 점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상식 Common Sense
엄밀한 방식으로 용어를 구성하자면, "상식"(common sense, 커먼 센스)은 사람들이 공통으로(in common) 동의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센스"(sense: [역주] 직역은 '감각')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천부적인 오성(understanding: [역주] 여기서는 정보를 인식하는 감각적 인식능력)을 말한다.
전자사전인 <메리암 웹스터 온라인>(Merriam-Webster Online)의 저자를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커먼 센스[common sense]"(상식)란 용어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견 속에서 --- 비전적(秘傳的, esoteric: 밀의적, 신비적) 지식이나 연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통으로' 지지한다고 여기는 --- 적법하며(prudent) 건전한(sound) 판단(judgment: [역주] 문장의 구조를 가진 진술을 말함)이라 여겨지는 신념들(beliefs)이나 명제들(propositions)을 지칭하는 데 사용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는, "상식"이란 용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갖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말하거나, 혹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가 그렇게 사용하거나 사용돼야만 한다고 믿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상식"이란 용어의 또다른 의미로는 실생활의 문제들에 관한 "분별력"(good sense, 양식)과 "건전한 판단력"(sound judgment)을 가리키기도 한다.
어떤 정의를 적용한다 할지라도, 어떤 특정한 지식을 "상식"으로 구분짓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의 경우엔, 엄밀한 언어적 구사를 행할 때는 "상식"이란 용어의 사용을 피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식론(epistemology) 분야에서 "상식"이란 주제는 오래된 과제로서 남아있는 상태이고, 여러 철학자들이 "상식"이란 개념을 폭넓게 사용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 개념을 지칭(언급)해보려고 시도해왔다. "상식"과 관련 있는 개념들에는 "직관들"(intuitions), "前-이론적 신념"(pre-theoretic belief), "일상언어"(ordinary language), "프레임 문제"(frame problem, 틀문제), "근원적 신념들"(foundational beliefs), 분별력(good sense), "검증된 의견"(endoxa), "공리들"(axioms) 등이 있다.
상식적 관념들은 --- 선[善]의지(good will)와 같은 --- 인간 경험 안에서의 사건들과 관련을 맺으려는 특성을 보여주며, 따라서 "인간적 척도"(Human scale)로써 "측량가능한"(commensurate)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 예를 들어 [양자역학에서] 아원자 단계의 움직임이나 빛의 속도 같은 현상에 대해 --- 상식적 직관을 결여하고 있으며, 상식적으로 사실로 여겨지는 일들이 실제로는 오류인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1. 아리스토텔레스와 고전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에 따르면, "상식"이란 ----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 등] 외부 지향적인 5종의 감각(sense)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 외적 감각기관들을 하나로 통합시켜 판단하는 내부적 감각활동(sensation)의 실제적인 능력을 의미한다(Aristotle: 영혼론[De Anima], Book III, Part 2). 이러한 내적 감각활동에 의해 다양한 내재적 속성을 현존하는 실체로 파악할 수 있다. 가령 양의 경우 늑대 털의 색깔이나 울부짖는 소리, 냄새, 그리고 여타 감각적 속성들을 각각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 전체를 한 마리의 늑대로서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상식"은 후대의 철학적 개념 발전과는 달리 합리성의 단계를 설정한 것은 아니었다. 후대의 발전된 개념은 상식이 동물에게는 존재하지 않고 인간에게만 존재한다고 보았다. 동물들의 불합리한 특성은 그들이 합리성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동물들은 단지 감각을 위해서만 상식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다양한 개별적 감각기능의 결과로부터 "쾌락"과 "고통" 같은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의 차이를 구분한다든지 하는 일이다(토마스 아퀴나스, 영혼론 주해, Book II, Chapter 2, Lectio Three). 이러한 측면은 스콜라 철학자들의 "오성"(understanding) 개념에도 도움을 주었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다양한 감각적 현상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감각하는 것을 "오성"이라 보았다.
이러한 관점의 "상식"이란 후대의 관점과 차이가 있다. 후대의 관점에서 "상식"은 감각활동이 획득되는 방식과 관련되며, 다수가 지지하는 신념이나 지혜를 통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상식은 "공통적인" 것으로서, 개인들 사이에만 공유되는 감각이나 특별한 감각능력을 지닌 천재만 가지는 종류가 아니다. 그것은 외적 감각들을 통제하는 하나의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Thomas Aquinas: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Pars I, Q. 78 A. 4 Ad 1)
2. 로크와 겸험론자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인간오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상식"의 의미를 제안했다. 그의 해석은 현상적 경험에 기반한 것이었다. 각각의 감각들은 입력(input)이고, 이후 감각 자료들(sense-data)을 단일한 인상(impression)으로 통합시켜주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로크는 바로 이것을 "상식"(common sense: [직역] 공통적 감각)이라 보았고, 이 "상식"은 분절된 인상들 사이에 공통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사물을 분절적 요소들로 나누는 "판단"(judgment)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상상"(fancy)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프랑스의 신학자 보쉬에(Jacques-Bénigne Bossuet)는 로크보다 앞서서 이와 같은 이론을 10년 동안이나 발전시켰다(http://www.rosmini-in-english.org/NewEssay_01/NE1_Sect3/NE1_S03C05.htm).
경험론 철학자들은 모두 감각자료들의 통합 문제에 관해 각자의 의견들을 내놓았고, 이러한 기능에 대해 다양한 명칭들을 부여했다. 하지만 모두들 인간 오성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감각이 공통성(commonality)을 보는 것이며 "결합적 산물"(combining)을 인식하는 것이라 했다. "상식"은 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3. [현대의] 인식론
상식에 대한 호소는 "인식론적 특수주의"(epistemological particularism)라고 불리는 특정한 "인식론적 지향성"(epistemological orientation)으로 특성화됐는데, "인식론적 특수주의"란 용어는 로데릭 치즘(Roderick Chisholm: 1916-1999)이 사용한 말이었다. 이러한 지향성은 "인식론적 방법주의"(epistemological Methodism)에 대비되는 용어이다.
(해설) 인식론적 특수주의와 인식론적 방법주의
"인식론적 특수주의"는 어떤 것(대상)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과정]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 어떤 것(대상)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belief)이다. (J.P. Moreland. Duhemian and Augustinian Science and the Crisis in Non-Empirical Knowledge) 이러한 이해를 통해 그러한 믿음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알지 않더라도, 인간이 가진 지식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입장을 철학적 접근방법으로 채택하면,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이 용어는 로데릭 치즘의 <규준의 문제>(The Problem of the Criterion)에 등장했고, 이후 그의 제자인 어네스트 소사(Ernest Sosa)의 저서 <뗏목과 피라미드: 지식론에 있어서의 일관성 대 토대의 문제>(The Raft and the Pyramid: Coherence versus Foundations in the Theory of Knowledge)에 등장했다. 특수주의는 방법주의와 대조적인 입장으로, 방법주의는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우선시한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아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특수주의는 근본적으로 반(反) 회의주의적 입장으로 간주되면, 칸트(I. Kant)가 <순수이성비판>(Prolegomena)에서 조롱했던 입장이기도 하다.
인식론적 방법주의: 지식(knowledge)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방법주의"(Methodism)는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우선시하는 인식론적 접근방법을 가리킨다. 이 용어 역시 "특수주의"와 마찬가지로 치즘의 저서 <규준의 문제>와 그 제자 어네스트 소사의 <뗏목과 피라미드>에 등장했다.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아는 것"을 미리 상정하지 않기 때문에, 특수주의는 회의주의(skepticism)에 대해 수용적 태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네스트 소사는 이런 방식을 예로 들면서, 데카르트(Descartes)가 인식론적 방법주의자였던 것 못지 않게 데이비드 흄(David Hume) 역시 방법주의자였다고 주장했다. |
[인식론적] 특수주의자들은 명백하며 공격 불가능한 명제들(propositions)의 목록을 나열한 후, 어떤 추상적인 철학적 이론에 적정한 조건으로서 이러한 명제들의 목록에 대해 일관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특수주의는 외관상 보다 확실해보이는 명제라 할지라도, 여타 명제들과 일관성을 결여한다면 그 명제를 목록에서 배제하는 일을 허용한다.
인식론적 방법주의자들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어떤 인지이론(theory of cognition) 혹은 정당화 이론(theory of justification)을 출발점으로 삼은 후, 우리가 가진 "전(前)-이론적 믿음들"(pre-theoretical beliefs) 중 여전히 지속되는 것들에 적용시킨다.
토마스 리드(Thomas Reid)와 무어(G. E. Moore)는 전형적인 특수주의자들인 반면, 데카르트와 흄은 전형적인 방법주의자들이다. 방법주의자들의 방법론은 대체로 회의주의적 경향을 수용할만한 것으로 보게 되며, 매우 제한적인 합리적 믿음으로 경도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는 의심의 제거를 요구했고, 흄은 인상들(impressions)이나 관념들(ideas)로부터 완전하게 수용할만한 믿음의 구성(construction)을 요청했다. 반면 특수주의자들의 방법론은 보수적 경향을 띤다. 아마도 이들은 우리가 확신을 갖는 믿음들에 과도한 우선권을 부여할 것이다.
인식론적 사색에 방법론적 혼용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흥미로운 질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경우, 논리학(logic)이나 형이상학(metaphysics), 혹은 인식론(epistemology)을 상식에 기반을 둔 원래의 가정들(assumptions)을 결여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인가?
윤리학(ethics)이나 정치학(politics)에 적용되는 특수주의는 "사회적 가치주입"(social inculcation)에 의한 예단이나 우연적 산물에 단순하게 의존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상식적 명령에 대한 신뢰가 --- 필연적이어서 --- 적법한 것처럼 보이는 부분을 탐구하는 영역들과, --- 예를 들어 지적, 실천적 발전과정의 장애처럼 --- 적법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영역들 사이의 원칙에 기반한 구분은 가능한 일일까?
"상식"(common sense)에 대한 메타-철학적 논의는 실제로 더욱 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즉, "상식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이다.
상식에 대해 엄밀하게 특성짓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상식에 호소하는 일은 철학의 접근금지 영역으로 남아야만 한단 말인가? 어떤 믿음이 상식적인 것인지 아닌지 분멸해야만 할 필요는 무엇인가? 그리고 만일 어떤 환경이 존재한다면, 정녕 어떤 조건들 하에서 상식에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견해를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상식에 대한 고려가 철학에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든"(any)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인식론이란 "철학적 출발점" 철학적 출발점을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만일 그래야 한다면, 그러한 출발점들을 어떤 방식으로 특성지울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기꺼이 "어떤 것이 나타나든 고수하기"(hold come what may)를 해야만 할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정해보자. 그 경우 우리가 "최소한 보다 완고하게 고수하기"(Hold more stubbornly at least)를 해야만 할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용어해설)
"어떤 것이 나타나든 고수하기"(Hold come what may)는 하버드대학의 철학교수 콰인(W. V. Quine: 1908-2000)이 대중화시킨 표현이다. 어떤 것이 나타나든 고수하는 믿음들이란, 제시될 수도 있는 어더한 증거에도 상관없이 포기하기를 원치않는 믿음들을 말한다. 콰인은 --- 아마도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해석"(simplistic construal)에 근거하여 --- 어떤 것이 나타나든 고수해야만 하는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달리 말하면, 모든 믿음은 "이성적으로 수정 가능하다"(rationally revisable)는 것이었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은 콰인과는 다르게 믿었다. 가령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조지 불(George Boole: 1815-1864)의 저서 <논리와 확률의 수학적 이론을 정초하는 사고의 법칙에 관한 탐구>(An Investigation of the Laws of Thought on Which are Founded the Mathematical Theories of Logic and Probabilities)의 내용은 수정이 불가능하며, "어떤 것이 나타나든 고수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최소한 보다 완고하게 고수하기"(Hold more stubbornly at least) 역시 콰인이 대중화시킨 표현이다. 콰인이 말한 바, "솔기(바늘땀) 없는 그물망"(seamless web)과 같은 방식인 한 인간이 가진 믿음들의 집합이란 개념은, 원칙상 그 사람이 포기할 수 없는 명제들의 결여상태가 있는 것이다. 만일 포기할 수 없는 명제들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믿음들의 그물망에는 솔기([역주] 이어붙인 접합점)가 있어서, [그러한 명제들의] 수정이나 거부당함을 보호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즉 "어떤 것이 나타나든 고수하기"(Hold come what may)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떤 믿음들은 여타 믿음들보다 더욱 유용할(useful) 수도 있으며, 더 많은 믿음들을 통해서만 [그 특정한 믿음의 의미가] 함축될 수도 있다. 가령 논리학의 규칙들이 그러한 사례가 될 수도 있으며, 혹은 물리적 대상으로 구성된 [내면의 세계와 대비되는] "외적 세계"(external world)에 대한 믿음도 한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물망의 그러한 부분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엄청나게 분화하는 결과들을 갖게 될 것이다. 차라리 한 사람이 가진 중심적인 원칙들에 우호적이지 못한 새로운 증거가 출현할 경우, 그물망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보조적인 믿음들을 개정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 나타나든 고수할 수 있는 믿음이 없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이, 최소한 보다 완고하게 고수할만한 보다 풍부한 실용적 토대가 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도 있는 것이다. |
|
이상에서 대략 살펴본 바와 같이, 철학사에서도 "상식"에 관한 탐구는 줄곧 존재해왔습니다. 그러나 철학의 다른 분야나 개념에 대한 탐구보다는 양적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점은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더불어 상식에 관한 철학적 담론은 20세기 현대철학자들, 특히 분석철학 계열의 철학자들이 논의를 보다 심화시켰다는 점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에서 살펴본 서양철학사에서의 "상식"에 관한 논의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혹은 사고) 메카니즘에 있어서 상식이 차지하는 역할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위에서 나타난 철학자들이 다룬 "상식"은 "지식"(knowledge)으로서의 --- 보다 엄격하게는 인식활동의 대상이 되는 지식결과물로서의 --- 상식으로, 이미 일정 부분 "나"라는 인식주관과 분리된 외적 대상화 차원에서 논의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저는 아직도 "상식" 그 자체에 대해서는 철학적 논의가 가야할 길은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러한 미해결의 과제로 인해, 상식적 내용을 다루는 사회적 담론이나 토론에서 본말이 전도되거나, 오도된 태도에 근거하여 타인을 압도하거나 조롱, 혹은 단순히 승리하거나 혹은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갖가지 부작용들도 나타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러한 점은 특히 한국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더 심각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우리는 향후의 철학적 탐구들을 통해 구체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보게 될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상식은 어디서 기원하는가" 하는 문제는 철학적 난제 중 하나입니다만, 대략적이나마 이 부분부터 시작하지 않고서는, 보다 넓은 범위의 담론이 될 사회철학이나 정치철학 같은 차원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기에, 제가 가진 사고를 간단하게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상식"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대부분 "나"라는 인식주체와 인식활동을 통해 얻어진 "지식"(상식적 믿음들도 포함됨)이라는 2분법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개별적 인간의 사고구조를 분석한다는 관점을 가진 것이기도 합니다.
이에 반해, 제가 생각하는 상식은 "공동체적 기반"에서만 성립하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에 단 한사람만 존재한다면, "인간사회"의 상식은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단 한사람만 존재한다면, 그 한사람의 인간과 그가 살아가게 될 자연환경 사이의 생존규칙이라는 대화방법 외에, 또다른 인식주체(타인)와 공유할 필요가 있는 관념이나 믿음들은 존재할 필요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상식"이란 "최소 2인 이상의 사람들로 구성되는 언어적 공동체 속에서 상호 용인하는 전제들 혹은 믿음들"이란 말로 정의하고자 합니다. 동시에 "2인 이상의 언어적 공동체"는 "상식"이 발생할 수 있는 필수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상식이 이렇게 공동체를 기반으로 발생한다는 전제를 수용할 수 있다면, 이제는 "공동체는 가변적이다"라는 또 하나의 명제에 대해 고민해 봐야만 합니다. 우리는 "2명 이상의 사회"를 "공동체"라고 생각하므로, 세상에는 수많은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존의 2명에다 1명이 추가되어 3명이 되면, 그 사회는 어떤 때는 3인 공동체였다가 --- 만일 1명이 잠이 든다든지 하면 --- 어떤 때는 사실상의 2인 공동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3인 공동체는 이미 2종류의 공동체를 내포하고 있는 보다 복잡한 공동체가 됩니다.
가령 3인 공동체에 A, B, C라는 3인이 살고 있다고 하면, 여기에는 A, B, C 각자 혼자만 깨어있는 시간의 공동체로서 3종류의 성격이 발생하고, AB, AC, BC와 같이 2명만 깨어있는 경우 역시 3가지, 그리고A, B, C 모두 깨어있는 경우가 1가지가 있으므로, 겨우 3명이 사는 공동체도 무려 7가지의 분화된 공동체 성격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일 A, B, C 3인이 기초적인 상식이나 취향이 약간씩만 다르다고 해도, 최대 7가지 상식이 실천되거나 공유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 A, B 2인은 기본적 인식을 공유하고 있고 C만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면, 공동체 내에 분란이 발생하거나 C가 왕따를 당하게 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어서 더욱 복잡해집니다.
이상에서 단 3명만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조차 이러한 인식론적 다양성이 발생한다면, 50억명이 살고 있는 지구상에서 한 지역의 상식과 다른 지역의 상식이 충돌하는 경우는 무수한 사례를 보여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이성적으로 타인을 설득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차원의 "상식"에 의지해야만 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가장 "넓은 범위"의 공동체에서 통용될만한 종류의 상식에 근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넓은" 범위라는 것은 공간적으로는 인류 전체의 거주지역 즉 세계가 될 것이고, 시간적으로는 과거에서 미래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존속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범위에서 무엇이 최고로 설득력의 범위가 넓은 상식이 될 것인지는 여전히 규정짓기가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다만 자신의 주장이나 이론이 그렇게 되길 희망하면서,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노력을 할 뿐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논리적"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제3의 관찰자를 전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논리학이란 것이 "나 혼자 내 머릿 속에서 검토하는 일"로 보았던 플라톤 등의 실재론자들과 달리, 저는 논리학 혹은 논리적 대화란 "나의 논리적 주장을 타인들이 관찰하는 게임"으로 파악합니다.
이러한 "관찰가능한 게임"은 심지어 일대 일로 토론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대화 상대방을 설득시키려는 시도이기보다는 관람을 하는 제3의 군중들에게 설득력을 갖는 노력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제3의 관찰자들이 한국인 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심지어는 미래의 후손들까지도 염두에 둔 노력이 돼야만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장 "보편적인" 상식에 의존하려는 노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상식과 논리에 관한 초보적인 사색을 잠시 해보았습니다만, 이제 우리가 걸어갈 길에서 많은 이슈들이 다뤄지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는 한국인들에게 주요한 문제인 "민족", "국가", "통일"과 같은 문제들도 포함될 것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본대로, "가장 폭넓은 범위의 공동체에 호소한다"는 언명을 염두에 둔다면, "민족"이란 관념이 가지는 협소함에 대해 이미 약간은 감지하실지도 모릅니다. "민족"이란 "핏줄로 이어진 확장된 가족"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사적인 개념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친인척의 수가 100명이 되었든 1억명이 되었든 여전히 사적(private)인 개념으로 남는 것이지, 결코 공적(public) 개념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종친회와 같이 사적 공동체 내에서 제한적 성격의 공적 활동은 가능할 것입니다만, 본격적인 의미에서 공적 개념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확장된" 사적 차원의 관점들이 국가라는 공적 개념에 개입하면서, 인류가 많은 문제들에 직면했던 사례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다뤄나갈 철학적 탐구는 "한국인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상식을 "지구 공동체"의 상식적 관점에서 파괴하는 작업이 될 것임을, "크메르의 세계" 탄생 2주년을 맞이하여 예고해두고자 합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인도차이나라는 제3세계를 공부하는 가운데, 그 공부를 우리 자신들의 정체성과 결부시켜 체화시킬 수 있는 공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도차이나를 살펴보면서 한국사회를 성찰할 수 있어야만 하며, 한국사회의 아픈 부분들을 성찰하는 가운데,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그냥"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인도차이나 공부가 단순히 인도차이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사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주체적 해석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
첫댓글 급하게 작업해서 썩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만
일단 <오픈 2주년 기념> 게시물이니 시간에 맞춰 공개합니다..
상식과 논리 사이에 이런 많은 생각들이 존재할수 있다는게 참 대단합니다. 저의 생각을 넓히는데 쓰도록 하겠습니다.
크세의 귀염둥이 보아즈 올림
어느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죠. 한국인의 언어가 이중성 혹은 다중성 때문에 토론이 잘 이루어지질않는다.
하나의 단어를 명료하게 하나의 뜻으로 쓰이면 다른 해석을 할 수 없는데, 이렇게도 저렇게도 다양하게 해석될 언어가
많아 토론이 쉽게 결론에 도달하지 못 한다.
아마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원래 일상언어(자연언어)는 의미가 좀 유연하지요..
그렇게 유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의사소통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의미가 가장 딱딱한 언어는 인공언어인데..
가령 수학의 기호 같은 것이나, 연산식 같은거죠...
이런 언어의 경우 명료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용도가 제한을 받게 됩니다.
가령 인공언어로 예술적 표현 같은 것은 안되니까요..
또 컴퓨터가 감정을 갖지 못하게 되는 이유도 되는거죠..
하여간 자연언어(=일상언어)의 의미가 유연한 것은
한국어 말고도 다른 외국어들도 나름대로 다 유연성을 갖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한국인들이 가진 사고방식에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기에 토론의 수준은 곧 한 사회의 문화적 수준과 비례하게 되는데...
그래도 이제는 사업관게의 협상 같은 데서는
나름 한국인들도 많이 변화됐다고 보는데...
그러한 태도가 정치나 사회현상과 같은 부분을 논의하거나 할 때도
적용될 수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일단 <논리적일 것>이란 조건이야말로
그간 한국인들에게 부족했던 태도로 생각이 되고..
따라서 그 부분을 좀 치중해서 고민을 해보는 것이 좋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어의 의미가 이런 저런 의미로 사용되는 것과 별개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나름 명료하게 사용하고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하는 점입니다.
결국 사람들의 태도가 문제인데
그것을 적당히 둘러대려다 보니
애꿎은 "국어"의 책임론이 등장하는거죠.. ^ ^
오늘 다시 읽어보니..
이때만 해도 제가 참 희망에 넘쳐 있었다고 생각되네요...
4년 사이에
그 무엇이 세상을 이토록 바꿔버린 것일까요...
혹시 세상은 그대로인데..
제가 바뀐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