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잃어버린 소나무
전 세 준
늙은 소나무는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하늘은 온통 별들로 가득 차 있고 저만치 떨어져 있는 멋진 집에서는 바이올린 소리가
오늘도 밝은 창문 틈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늙은 소나무가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이 한 달 전쯤 되었습니다. 그동안 소나무는 마음 편하게
하루라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늙은 소나무의 고향은 산골 마을에서 한참 들어간 아담한 산 속 골짜기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개울가 옆이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산새들이 조잘조잘 노래하고 겨울이면 거울같이 맑게 얼음이 얼고 그 밑으로 졸졸졸
노래 부르며 흐르는 시냇가 옆에 자기보다 훨씬 키가 큰 아기 소나무들이 쏴아 쏴아 노래 부르는
예쁘고 다정한 마을이었습니다.
늙은 소나무는 그곳에서 수 십 년을 살아오면서 자기 보다 더 큰 아기 소나무들과 행복하게 살아 왔습니다.
눈비를 맞으며 수 십 년을 살아오는 동안 소나무는 나이를 먹으며, 더 키는 자라지 않았고
몸둥아리는 점점 거무스름하고 두껍게 변해 갔습니다. 그 뿐 아니었습니다.
온 사방으로 뻗은 다리들은 점점 힘이 없어졌고, 하늘 향해 옆으로 뻗은 팔들이
위로 크지 못하고 옆으로 옆으로 비틀어져 바람에 흐는적 거렸습니다.
늙은 소나무는 이제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고향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간 어느 날 한 나절이었습니다.
늙은 소나무가 늦잠을 자고 긴 하품을 하면서 눈을 떴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야! 여기야, 여기 그렇게 하면 않되지......그래 .그래 더 올려!”
그 순간 늙은 소나무는 땅속으로 뻗은 다리가 조여 오고 온 몸이 칼로 몸을 베어오는 아픔을 느꼈습니다.
“아야!..... 왜 이러냐?”
늙은 소나무는 비명을 지르며 골짜기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부르릉! 덜컹!”
지금 까지 듣지 못했던 소리가 골짜기를 울렸고 바위 구르는 소리와 함께 온 몸이 흔들렸습니다.
‘무슨 일이람?’
너무나 놀란 늙은 소나무는 골짜기 아래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온 몸이 핑그르 돌면서 늙은 소나무는
쾅 소리를 내면서 졸졸졸 흐르는 골짜기 아래로 우지직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습니다.
“엄마야!”
늙은 소나무 보다 더 큰 아기 소나무들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야! 그래 되었어! 이 정도 소나무는 정말 찾기 힘 든 것인데....”
“응, 정말 잘 생겼네! 아주 정원에 심기에는 멋진 소나무야! 어서 계속 작업을 하세!”
잠시 기계소리가 멈 춘 골짜기에 사람들이 웅성이고 있었습니다. 엄마 둘레에 있던 아기 소나무들의 외침이 점점 아득하게 들려오면서 늙은 소나무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늙은 소나무가 다시 정신이 든 것은 한나절이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야! 정말 멋진데.... 아주 우리 정원에 잘 어울려! 모두 수고 했어요!”
어디선가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늙은 소나무는 너무나 놀랬습니다.
쓰러져 있던 자신이 우뚝 서 있고, 꽁꽁 묶였던 두 다리는 땅속 깊숙이 묻혀 있었습니다.
‘아! 내가 살아있구나!’
소나무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뜰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놀랍게도 산골짜기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
지은 이층집이 보였고, 고향 산골짜기에서만 볼 수 있었던 큰 바위들이 동그란 연못 둘레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아기 소나무들과 같이 소나무들의 고향 여기저기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 옹기종기
이층 양옥집과 새로 만든 연못 주위로 가득 심어져 있었습니다.
늙은 소나무는 그때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양지바른 이곳에 새로 이층집을 짓고 나무를 심어
집 둘레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어느듯 정원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하나 둘 언덕 아래로 내려갔고 이층집에는 환하게 불이 들어 왔습니다.
주인인듯한 사람들이 집 안에서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였고 산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피아노 소리도 흘려 나왔습니다.
아마 이곳으로 이사 온지가 얼마돼지 않은 듯 싶었습니다.
늙은 소나무는 슬펐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웃에서 같이 살아 온 아기 소나무들이 보고 싶었습니다. 산 새 들의 노래 소리도 없었고, 골짜기 시냇물 소리도 없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가끔 집 주인인듯한 아저씨가 넓은 정원을 삥 둘러보면서 늙은 소나무 아래까지 왔고 고개를 들어
“음. 정말 잘생긴 소나무야! 죽지말고 잘 커야할텐데.....”
이렇게 한마디 하면서 소나무를 어루만지곤 했습니다.
늙은 소나무는 온 종일 심심했습니다. 언제나 내려다보이는 연못 속 비단잉어들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밤이면 꼬마 아가씨가 치는 피아노 소리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가끔 여러 사람들이 정원에 모여 술잔을 나누며 높다란 불판 위에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들과 아주머니들이 연기를 피우며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곤 했습니다.
늙은 소나무는 뜨거운 불판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가 싫었습니다.
그리고 이상야릇한 고기 냄새도 싫었습니다.
산골짜기에서 숨 쉬던 그 맑은 공기가 그리워졌습니다. 그 때마다 늙은 소나무는
울퉁불퉁 생긴 자기의 모습을 원망하였습니다.
아기 소나무들처럼 하늘로 쭉쭉 뻗어 날씬하게 자랐으면 이곳까지 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못 생긴 것도 억울한데 이곳까지 와서 고통을 받는 것이 싫었습니다.
“애들아! 너희들도 답답하지?”
하루 종일 좁다란 연못 속에서 빙빙 도는 비단 잉어들도 불쌍했습니다. 늙은 소나무는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정원에는 밝은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고기 굽는 연기는 정원 하늘을 타고 하늘로하늘로 솟아올랐습니다.
“애그그.... 저 밤하늘에 반짝이고 있는 별들도 이 냄새 때문에......”
유난히 반짝이 별들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연기 때문에 하나 둘 그 모습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늙은 소나무에게는 아름다운 밤이 아니었습니다.
골짜기에서 보던 그 아름다운 밤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늙은 소나무는 차라리 눈을 감고 잠을 청했습니다. 연못 속 비단 잉어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원에서 떠들썩하던 등산객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게 들려오면서 늙은 소나무는
아이들이 자고 있을 골짜기를 생각하며 깊은 잠이 들었습니다.
솔바람이 살랑살랑 늙은 소나무를 잠재웠습니다.
......................
“어머나! 어쩜 그렇게 잠을 잘 자요? 무척 부럽군요!”
어디서 들려오는 속삭임에 늙은 소나무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피아노 소리도, 등산객들의 떠드는 소리도,
솔바람의 자장가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 었습니다.
정원에서 피어오르던 연기도 사라졌고, 하늘에 다시
별들이 소곤거리고 있었습니다.
“누구세요?”
늙은 소나무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안녕하세요? 우리 오늘 처음 만났구만요! 저는 달님이에요....”
“네? 달님이!”
늙은 소나무는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둥근 달님을 보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여길?”
“아! 놀랬어요? 미안해요... 저는 한 달에 한 번씩 둥근 예쁜 얼굴로 별들의 나라로 여행을 다니지요....
어두운 길도 밝혀 주고.... 어디서 오셨어요? 지금까지 못 보던 얼굴이기에 지나다가 잠깐 쉬어가려고....”
달님은 늙은 소나무에게 소곤소곤 정답게 말 해 주었습니다.
“아! 그러세요? 저는 이곳에 처음 왔어요. 깊은 산골짜기에서 살다가 갑자기 이곳으로... 억지로 끌려 왔답니다.
내가 뭐 아름다운 정원수라나.......”
늙은 소나무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 무척 반가왔습니다.
“그렇군요! 여기 새로 지은 별장 같은 집 뜰 앞이군요. 아. 저기 비단 잉어들이 사는 연못도 있지요”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둥근 달님은 이곳 사정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동차 소리로 무척 시끄러웠는데..... 옛날 살던 곳이 그립지요?”
달님은 늙은 소나무가 가여워 따뜻한 손으로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달님은 참 좋겠어요. 별나라 여행도 하고 온 동네 구경도 다 할 수 있어서.......”
“그래요. 저는 한 달에 한번 씩 얼굴을 크게 가다듬고 세상 구경을 다니지요.
산속을 지나고 강을 건너고, 온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즐겁게 산답니다..”
“어머나!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나는.....”
늙은 소나무는 두고 온 아이들 생각에 목이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것이 더욱 슬펐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이 이젠 이곳에 정붙이고 살아야지요.
그런데 언제나 이곳에만 있어야하니......”
달님은 늙은 소나무가 불쌍했습니다.
“..................”
소나무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대로 밤마다 여행을 떠나 다니는 달님이 무척 부러웠습니다.
“ 이제 꽃피는 봄이나 매미들이 노래하는 여름과, 빨간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는 가을,
그리고 하얀 겨울을 지내다 보면 이곳도 정이 들거에요.”
“그래도 내가 살던 고향이 좋은데..... 그곳엔 내 아이들도 있고.... 사람들은
왜 좋은 집을 새로 지으면 우리들을 괴롭히는지....... 우리가 아름다우면 찾아와서 보면 될 것을......”
늙은 소나무는 긴 한숨을 내 쉬었습니다.
“그래도 이곳에 와서 굿굿하게 잘 살아야 해요.
이곳으로 이사 온 예쁜 나무들이 오래 살지 못하고 죽어서 버려지는
것을 몇 번 보았어요. 산골짜기에다 버리고 다시 또 옮겨 심고.....”
달님은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본 듯 싶었습니다.
“..............”
늙은 소나무는 꼭 살아야 했습니다.
“옛날부터 산이나 들, 바위 하나라도 모든 자연과 사람들은 친한 친구였지요.
해님도, 시냇물도, 바다 그리고 산과들, 산토끼와 노루.... 모두가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 같이 뛰놀고
서로 도와가며 살아왔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우리들을 헤치기 시작 했어요. 자기들 욕심을 채우고 자기들 편하고 아름다움을 혼자 갖고 싶은
그 욕심 때문에....... 우리들을 괘롭히기 시작한 것이지요....”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나무가 파헤쳐지고 산이 무너지고.... 강물이 넘쳐흘러 마을이 물에 잠기고....”
늙은 소나무도 산골짜기에 있을 때 너무나 많은 일들을 보았던 기억이 떠 올랐습니다.
“아이쿠! 내가 너무 오래 있었네! 내일 또 놀러 올게요! 우리 자주 만나요!”
달님은 나뭇가지에서 일어나며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가시게요? 자주 놀러 오세요. 기다릴게요...”
늙은 소나무가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합니다.
달님은 차츰차츰 별들의 마을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소나무는 너무나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그러나 새 친구 달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것이라는 큰 꿈을 가슴에 가득가득 채웠습니다.
달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엄마! 어디있어요? 보고 싶어요.... 저도요...저도요....___
산골짜기에서 같이 살던 아기 소나무들이 엄마를 찾는 소리가 늙은 소나무의 귓속을 파고 들었습니다.
“아기들아! ....얘들아!...”
늙은 소나무는 ‘쏴아-- 쏴아---’ 들려오는 솔바람 소리 쪽으로 두리번 거리며
살폈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늙은 소나무는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멀리 여행하고 있는 하늘 높이 뜬 달님이
따뜻한 손으로 소나무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내려다 보이는 방 안에는 전기가 모두 꺼지고, 정원을 지키는 둥근 외등이
늙은 소나무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끝)
-2015. 4. 제6회 아름다운글 문학상 수상작품-
지은이; 강원일보 신춘문예 소설. 한국아동문학연구. 동화신인상
<교육신문>꽁트입선.<동도신문>꽁트연재작가
한국문인협회.강원문인협회.관동문학회. 강릉솔바람동요
강릉문학상 수상
지은책; 동화집 <잘 키워드릴게요><아빠를 찾았어요>
꽁트집 <비틀거리는 바다>
동요가사집 <시골장터><기다림>
회고록<회상의 문턱에서>
장편소설<벽화 지우기>외 중단편 소설 다수
문학회: 한국아동문학연구회.강릉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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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전세준 선생님의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주름으로 새겨져 있지만
아직도 소년의 해맑은 웃음과 눈빛을 간직하신 것은
아마 이렇게 순수한 글을 쓰시는 그 무구한 마음 때문일 겁니다.
부회장님!
우리 선생님의 긴 글을 이렇게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은 강릉 모임에 가지 않지만, 전세준 선생님의 인자하고 건강하신 모습 오래도록 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