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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걷게될 영암지맥 마루금 입니다
영암지맥 (鈴岩枝脈)은 백두대간 대덕산(1290.9m)과 마주보고 있는 초점산에서 남쪽으로 분기한 수도지맥이 18.1km를 내려가 수도산(1317m)에서 동북으로 금오지맥을 분기하고,
금오지맥은 다시 47.6km를 동진하여
금오산에 이르기전 능밭재 북쪽 400m지점인 약 550m봉에서 남동방향으로 다시 한 가지를 쳐
영암산(785m) 선석산(742m) 비룡산(579m) 각산(468m)을 지나 백천이 낙동강에 합수하는 성주군
선남면 선원리 선원교 아래 백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5.3km
되는 산줄기로 백천의 우측 분수령이 된다. (퍼온 글)
암벽 로프 지점에서 ㅡ 536봉 ㅡ 돌문이고개에서 탈출 ㅡ 용봉리 905번도로 ㅡ 세종대왕자 태실까지
3부 입니다
대다수 산꾼들은 안전한 우회로를 헌고무신짝 버리듯 버리고 스릴을 즐기듯 암벽을 이용하고 있지요
현재 시간 오후 2시 57분 입니다. 오후 4시 30분까지 선석산과 태봉바위를 거처서 세종대왕자태실을 둘러 보고 하산을 종료하여야
하는데 남은 시간 1시간 33분으론 나에겐 불가능할것 같습니다
월명성모의집 정문부터 영암산 북봉까지 오르면서 진을 빼듯 체력이 다 소진된듯 합니다
영암산 북봉부터는 체력이 딸려 오늘 구간 완주를 포기하고 세월아네월아 걷고 있는 실정 입니다
돌문이고개에서 나머지 구간을 포기하고 탈출할려고 합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가다가 가다가 힘들면 숲속 아무곳에서나 쉬었다 가는 것~
로프잡고 암벽을 내려온 곳을 올려다 보고~
방금전 로프잡고 내려온 암벽 입니다
로프구간 암벽에서 1분거리에 우회로가 있군요
암벽(로프구간) 우회로가 시작되는 이정표 입니다
위 사진과 동일한 위치 입니다
위 사진과 동일한 위치 입니다
칠곡군 북삼읍 보손리의 보손지로 갈 수 있는 갈림길 쉼터 입니다
징검다리님이
산행 지도를 펼처보며 탈출 위치를 찾고 있습니다
위 사진의 이정표와 동일 합니다
영암산 정상에서 600m온 위치이며, 선석산까지는 2.2km 거리라 합니다
이정표 팻말엔 서진산(棲鎭山) 또는 누진산(樓鎭山) 이라고도 불리는 선석산(禪石山)은 높이는 742.4m 입니다.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과 칠곡군 약목면·북삼읍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영암산(鈴岩山, 784m), 비룡산(飛龍山, 546m), 시묘산(侍墓山, 367m)과 능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선석산에는 사적 제444호로 지정된 성주 세종대왕자태실(星州世宗大王子胎室)’을 비롯하여 천년고찰 선석사(禪石寺)와
자연 전망대 역할을 하는 용바위, 태봉(胎峰)바위가 있습니다
위 이정표와 동일한 위치에서 뒤돌아 보고~
536봉엔 산꾼들이 쉬었다 갈 수 있는 벤취 2개가 있습니다
536봉에서 통나무 계단을 내려 갑니다
통나무계단을 내려와서 뒤돌아 보고~
536봉에서 통나무계단을 내려와 2분만에 벤취 2개가 설치된 쉼터로, 이곳에서
성주군 초전면 용봉리 영암산 등산로 입구까지 거리가 1.38km라 합니다
영암산 정상에서 1.1km온 위치 입니다.
선석산까지는 1.7km 남겨두었으며, 여기서부터 선석산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라 합니다
536봉을 지나오기전 쉼터에서도 보손지를 갈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칠곡군 북삼읍 보손리에 있는 보손지와 중리지를 갈 수 있군요
산행할적마다 항상 꼴찌로 동행하는 징검다리님과 오늘 걸어야 하는 나머지 구간을 포기하고 여기에서 탈출하기로
하고 오룩스 GPS를 켜보고 이곳에서
오늘 하산 지점인 선석사와 태종대왕자태실로 갈 수 있다고 징검다리님이 일러 줍니다
징검다리님이 오룩스GPX로 정확한 탈출로를 확인을 거듭하고~
성주군 초전면 용봉리 방향인 영암산 등산로 입구쪽으로 하산을 합니다
이때 시간이 오후 3시 18분 입니다
하산 종료 시간인 오후 4시 30분까지 1시간 12분 남았습니다
부지런히 하산을 서두르면 세종대왕자태실을 둘러 보고도 여유 시간이 있을듯 합니다
탈출을 시작한 돌문이고개를 뒤돌아 보고,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하산을 하고 있는데 뒷따르는
징검다리님이 뭐라고 자꾸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 옵니다
탈출로로 하산을 하다가 다시 오룩스GPX를 켜보고선 탈출로를 잘못 선택하였다네요
오늘 하산 지점과 탈출로 하산 지점은 엄청나게 동떨어진 거리라 하면서 다시 돌문이고개로 빠꾸해서 올라가자고 합니다
가파른 통나무계단을 내려오고 또 엄청나게 내려왔는데 또다시 올라 가자고 하니 힘이 쭈~욱 빠집니다
나는 되돌아 오르는 것은 힘들다면서 계속 하산을 하여 차량으로 이동을 하겠다고 하니
징검다리님은 100m정도만 오르면 된다면서 아니면 하산방향 왼쪽 50~60m 거리에 보이는 능선이
세종대왕자태실로 갈 수 있는 능선이라 하여 50~60m 이동하였는데 이동하기전 보였던 능선에 도착하니 별볼일 없는
능선으로 앞의 계곡 넘어에 있는 능선으로 가야만 하던군요. 징검다리님은 위쪽으로 100m만 오르자며 오르는데
내는 더 이상 오르는 것을 포기하고 길도 없는 벌목된 나무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저있는 곳을 10분정도 내려오니
탈출을 시작하였던 돌문이고개에서 용봉리 등산로 입구로 이어지는 등산로에 접속을 합니다
되돌아 올라 가자고 할때부터 28분이 허비되고 현위치에 왔습니다
뒤돌아 보고~
꿀밤나무들이 군락으로 쭉쭉뻗어 자란 모습이 멋찝니다
목교를 건너는데 등산객도 별로 다니지 않는지 등산로가 흐릿하여 길 찾기도 힘이 드는데
예산을 낭비하면서 아무짝에도 필요치 않은 목교 입니다
뒤돌아본 목교
계곡물로 세수라도 할까 하는데 올겨울부터 현재까지 가뭄이 얼마나 심하였으면
계곡물을 찾을수가 없습니다.
아까 목교를 건너고 3분만에 또 목교를 건너는군요
뒤돌아 보았는데, 계곡에는 물기 하나없이 바짝말라 있었습니다
2번째 건너던 목교에서 1분만에 영암산으로 오를 수 있는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 도착 합니다
이곳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서 905번도로까지는 중형차(25인승 승합차) 이하는 진입이 가능 합니다. 거리는 1.0km 입니다
탈출을 하였던 돌문이고개에서 처음 만나는 이정표 입니다
위 이정표와 동일 합니다
새골지 못뚝에서 탈출하였던 돌문이고개를 바라 보고~
뒤돌아 보고~
차량 진입을 못하도록 쇠줄을 처둔 이곳까지 경운기를 몰고왔던 마실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주민분에게 여쭤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세종대왕자 태실까지 거리를 여쭤보았던 것입니다. 제가 10리(4km)라고 들었는지, 10km로 들었는지 헷갈리네요
뒤돌아 보고~
김천과 성주를 이어주는 905번도로 입니다. 돌문이고개에서 905번도로까지 2.36km를 이동하여 왔습니다
위 이정표와 동일 합니다
905번도로에서 등산로 입구 주차장까지 임도 거리는 980m 입니다
김천과 성주를 연결시켜 주는 905번도로 김천과 구미로 갈 수 있는 방향 입니다
따갑게 쏟아지는 뙤약볕 아래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가로수 하나 없군요
에구구~ 덥다 더워~
어느 지역 낮 최고 기온이 32도였다나요
성주쪽 방향인데 이쪽으로도 가로수 하나 없어 쉴 수 있는 그늘을 찾을수가 없습니다
세종대왕자태실로 이동을 하여야 하는데
어떤 방법이 좋을까 잠시 생각을 하는데, 마을 주민이 있어 거리를 다시 여쭈어 보았습니다
거기까지 10km라 하면서, 조금전 등산객 다섯명이 바깥아저씨차로 갔다꼬 합니다
다섯명이라면 누구 누구일까
민사장님, 옥경이님, 유경태님, 그리고 2명은 누구일까?
who are you? who are you?(트럭으로 이동한 교통 비용은 5명이 20,000원이라고 함)
태실까지 10km나 된다하는데 택시를 부를까 어쩔까 하다가, 나홀로 여럿 지맥, 기맥을 할적에 주 특기가
히치하이크(hitchhike)였지요
처음에는 승용차는 무조검 그냥 통과 시키고 트럭이 다가오면 예를 갖춰 태워달라고 손을 들어도 모든 차량이 그냥 지나칩니다
그러다가 태워주는 차가 없어 어떤차고 보면은 몸짓손짓하면서 태워달라 하여도 씹팔대가 본체만체하고 그냥 지나 갑니다
할 수 없이 편도 중앙까지 기다란 스틱을 쭉뻗어 위아래로 흔들며 태워달라고 몸부림치니 예쁜 morning승용차가
기다란 스틱을 살짝비켜 가다가 저만치 지나처서 멈춰 섭니다.
히히~ Ok, OK~ 됐따~ 됐어~
드디어 세워주는구나, 젊은 아주머니가 핸들을 잡고 있었습니다
세종대왕자태실까지 가야 하는데 방향이 같으면 신세좀 지자고 하니, 방향이 조금 틀리다면서 일단 타라고 합니다
땀을 많이 흘려 꾸릿하게 시크무레한 땀냄새 풍기면서 뒷좌석에 탑니다.
어디까지 가시느냐고 여쭤보았습니다
성주군네까지 간다고 합니다.
아하~ 성주군네라~
나의 절친한 친구가 성주경찰서 옆에서 파크랜드 옷장사를 하는 아무개 누구라고 통성명을 알려주니
젊은 아줌마는 바깥아저씨랑 옷사러 여러번 가봐서 그사람을 잘안다고 합니다
내가 손가락, 발가락 다 뻗지면 다 친구고 다 친척이랍니다. ㅋㅋ
그 친구는 지금은 옷장사 때리집어치우고 김천에서 음식점을 한다고 하니
젊은 아줌마는 그사람이 김천사람 맞다며, 김천에서 뭐한다는 소리를 듣었다 합니다
그라고 보니
오늘 산행을 마치고 김천으로 이동하여 하산식을 하게될 식당(콩마당)의 주인이 바로 옷장사하던 그 사람이군요
젊은 아줌마는 충남 영동 친정에 갔다 오는길이라면서 시간이 되면은 태실까지 태워줬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그르질 못하여 미안하다면서 차를 갑자기 세우면서 태실로 갈 수 있는 진입로 입구를 가리켜 줍니다
녹음기 틀어 놓은듯 수없이, 수없이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뒷좌석엔 무엇인가 꽉차게 잔뜩실려 있는 것을 보고
시간이 부족하도록 바쁜 일정이 짜여저 있다는 것을 감으로 느꼈습니다
4km 요금은 얼마를 줬냐구요, 무임승차하였습니다. 헤헤~
905번도로에서 태실로 가는 입구에서 영암산이 멋찌게 조망되어 앵글에 담고 있습니다
금오산 산줄기도 함께 조망되는군요
금오지맥 마루금은 부상고개에서 데크전망대 2곳을 지나 887봉까지 이어지지요
영암산 정상을 땡겨보았습니다
영암산 정상을 더 더 땡겨 보고~
또 더 더 더 땡겨 보고~
905번도로에서 오늘 산행 하산 지점인 세종대왕자 태실까지 거리상으로 걸어서 가기엔 불가능하겠지요
또 나의 특기 히치하이크를 하여 이동해야 할것 같습니다
헌나, 두이, 스이, 너이, 닐곱, 너들 대가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다가
늘씬한 차 한대가 나의 앞에 스르르~ 멈춰 섭니다. 침을 질질흘리듯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하니 타라고 합니다
젊은 부부였습니다. 대구에서 교육차 현장학습을 위해 왔다고 합니다. 태실 주차장에 다다르니 중간팀 멤버인지 3명이
산행을 마치고 BUS가 기다리고 있는 하산 지점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태실 주차장에서 젊은 부부에게
허리가 활보다 더 휘도록 굽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느라 허리가 뚝 하고 뿌러질뻔 했습니다
905번도로에서 태실 주차장까지 거리는 5.1km였습니다. 또 꽁짜로 승차였습니다
관광안내소 옆의 항아리 조형물은 태실에 태를 담아 묻어두는 용기 입니다
사진속 관광안내소 앞의 젊은 부부가 여까지 태워 주신 고마운 분입니다
대구에서 여까지 현장 학습을 위해 오신 것을 보니
훌륭하고 뛰어난 학자가 될 예감이 듭니다
용바위와 태봉바위에서 세종대왕자 태실이 있는 태봉(胎=아이 밸 태, 封=봉할 봉) 바라보았을 때 풍수적으로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합니다. 오늘은 어쩌다가 체력이 딸려 선석산과 용바위, 태봉바위를 거처 구간 산행을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여짓껏 30여년을 산행을 하다가 오늘 처음으로 탈출을 하였습니다
거듭 사진속 젊은 부부에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며~
개별적으로 꼭 선석산을 오른 후 태봉바위를 거처 태실문화관과 태실을 둘러볼 생각 입니다
징검다리님은 나와 헤어진 그곳에서 위쪽으로 100m를 치고 오른 후 능선따라 내려오다 임도를 만나고부턴 임도따라
내려왔지만 태실 주차장을 통과 하면서 하산 시간에 쪼들려서 태실을 둘러볼 생각도 못하고 하산을 맞쳤다고 투덜투덜~
주차장에서 태실로 가는 돌계단 입니다
뒤돌아 보고~
세종대왕자 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을 합처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는 태실이며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합니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에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여겨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합니다
민간에서는 출산 후 태를 땅에 묻는다거나 또는 마당을 깨끗이 한 뒤 왕겨에 태를 묻혀 태운 뒤에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합니다
그러나 왕족의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태를 항아리에 담아 길지로 선정된 전국의 명당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는데 이 시설을 태실이라 합니다
세종대왕자 태실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세종대왕과 정비(正妃) 소현왕후 청송심씨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난 안평대군은 친형인 세조(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였다 하여 안평대군의 태실 석물은 세조에 의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안평대군은 세조에 의해 강화도로 귀양보내진 뒤 다시 교동도로 유배된 후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지요
금성대군은 세종대왕(소현왕후 청송심씨)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금성대군의 태실 석물도 세조에 의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산우님^^
백두대간 하실적에 고치령하면 금방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시죠.
좌석리 마을회관 앞에서 마을 이장님 트럭타고 고치령으로 4.7km를 이동하던 곳 말입니다
단종과 금성대군의 슬픈 사연이 서려있는 고치령 얘기를 여기 옮겨 볼까 합니다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서 마락리로 넘어가는 고갯길 고치령(760m)은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는 고개로 소백산 구간과 태백산 구간 사이에 있다 하여 양백지간(兩白之間)이라고도 하지요
단종과 금성대군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험준한 고갯길 고치령 입니다
고갯마루에는 단종의 위패와 금성대군의 위패를 모신 산신각이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를 숙부에게 빼앗기고 유배에 오른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소백산 너머 영월군 청령포 적소에
안치 됩니다. 세종대왕의 여섯째 아들이며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본명 이유)은 계유정난이 발생하자 형(수양대군)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단종)를 보호하기로 결심 합니다. 금성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위해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고을 군사들과 선비를 모으고, 영남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의 복위를 꾀하게 됩니다.
그러나 밀고로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면서 그에게 동조하던 흥주도호부(순흥의 옛 이름) 지역의 수백 명 선비들과 가족은
물론, 흥주 30리 안에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죽임을 당합니다.
이 사건을 영주지방에서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는 역사의 슬픈 이야기이지요
순흥사람들은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을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고 믿고 남쪽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을 "소백산 신령"이 된것으로 믿고서 금성대군(삼촌)과 단종(조카)이 영혼이 되어 만날 수 있도록 고치령에
산신각을 짓고 위패를 함께 모셔 영주민들은 정월 열 나흗날이면 어김없이 산신제를 지내며 그들의 넋을 달래고 있다 합니다
(왼쪽으로 산령각과 장승 입니다)
고치령 표지석 옆엔 어떤 동물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있습니다
"태백산 신령이된 단종"과 "소백산 신령이 금성대군" 위패를 모신 산신각을 보호하기 위한 호랑이 조형물이랍니다
고치령에서 좌석리 마을회관 앞까지 4.8km 이동하기 위해
표지석 앞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좌석리 마을이장 1톤짜리 트럭을 기다리고 있는 산우들 입니다
좌석리 마을회관 앞에서 고치령까지 4.8km는
좌석리 마을이장 1톤짜리 화물차로 이동하는 것이 관례화 되어있답니다
세종대왕의 첫째 후궁인 영빈 강씨 사이에서 세종대왕의 9남으로 태어난 화의군도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였다 하여 태실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화의군 태실 오른쪽 귀부(
세조가 왕위에 즉위한 이후 왕의 격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귀부를 마련하여 태실비 앞에 가봉비를 세웠다 합니다
세종대왕의 셋째 후궁인 혜빈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세종대왕의 16남인 한남군도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였다 하여 세조에 의해 태실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세종대왕의 16남인 한남군의 태실 석물이 파손되어 없어진 모습 입니다
세종대왕의 후궁 혜빈 양씨 사이에서 18남으로 태어난 영풍군 태실 석물도
세조(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여 태실 석물도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남군과 영풍군의 어머니는 세종대왕의 후궁인 혜빈 양씨 입니다
조선 제3대 왕 태종(1차,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던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난
세종대왕이 조선 제4대 왕 입니다
세종대왕과 소현왕후 청송심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문종이 제5대 왕 입니다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단종이 제6대 왕으로 등극하자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세조(제7대 왕)가 왕위에 오른 조카 단종의 왕권을 찬탈하게 되지요
세조는 1417년(태종 17)에 조선 제4대 왕 세종대왕과 정비(正妃) 소현왕후 청송심씨 사이에서 태어난 8남 2녀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문종이 형이고,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동생이며, 단종은 조카 입니다
1428년(세종 10)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고쳐서 함평대군(咸平大君)으로, 다시 진양대군(晉陽大君)으로
봉해졌습니다. 세종 말년인 1445년(세종 27)에는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쳤습니다
사람들은 남을 얘기할 때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많이 화두가 되어 입방아질을 하곤 하지요
아무리 좋은 업보의 업적도 결국 나쁜 업보에 눌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성지라하지요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이된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까지 내리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충신들의 목숨을 잔악하게 살육하는 악한 업을 쌓은 세조는 말년에는
피부병에 걸려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며 오대산 상원사를 찾게 되지요
한강기맥을 할적에 오대산 상원사 산행기록을 여기 옮겨볼까 합니다
~ 중략하고 ~
하산 시간이 너무 늦어 어두워 지고 있습니다. 적멸보궁은 그냥 지나처서 중대사자암에 왔습니다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암자 이름도 사자암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사자암 비로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기 때문에 비로전이라 합니다
지금부터 중대 사자암 비로전 측면 후면 외벽에 그려진 벽화들을 올려 볼까 합니다
상원사의 역사가 담겨있는 벽화랍니다
오대산의 유래는 비로봉(1,563m)을 주봉으로 하여 호령봉(1,561m), 상왕봉(1,491m), 동대산(1,434m), 두로봉(1,422m)등
다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처져 있다 하여 오대산이라 불리기도 하며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자장율사가 왕명을 받아 당나라에서 유학하였던
중국의 상서성 청량산의 별칭인 오대산과 매우 유사하다하여 오대산이라 명명하였다고도 합니다
오대산의 오봉과 오대 암자가 그려진 비로전 측면 외벽의 벽화을 촬영하였습니다
오대산의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년)에 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이라 불렀습니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 효명왕자가 신문왕의 뒤를 이어 성덕왕으로 왕위에 오름)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고려 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들어 더욱 거세어져 박해를 받으며 태종(이방원 조선 제3대 왕)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기도 하는등
척불정책에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그 해 겨울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합니다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이된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괴질(怪疾)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 중애 고양이의 도움으로 자객의 습격을 피해 목숨을 건진 일화가 서려 있는
(이적(異跡) :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1465년(세조11)에
상원사 중창하여 1466년 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지게 됩니다
예종(세조의 둘째 아들)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예종 1년에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태종 1년부터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이 절은
1946년 선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어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지암스님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을 하였다 합니다
1951년 6·25전쟁 때에는 상원사를 화재로부터 지켜낸 일이 한암스님에 얽힌 일화가 유명하지요
1.4후퇴로 국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북한 게릴라군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월정사에 불을 질러 태운 국군이
상원사까지 불태우려 하자 군인들 앞에서 가사를 갖추어 입고 법당에 정좌해 "내 몸을 함께 태워 부처께 공양하겠다"는
불심에 감명을 받은 국군은 문짝만 떼내어 불태운 뒤 절을 떠났다 합니다. 그리하여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는
소실되었으나 상원사만은 불타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으며, 한암스님은 1951년 2월 14일 입적하셨습니다
한암스님이 중대사자암으로 오르실 때 짚고 다니시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사자암 비로전 앞마당에 꽂아 둔것이
어느날부터 싹이 돋아나 지금은 큰 단풍나무로 자랐다고 합니다
2006년 비로전 앞에 요사체와 공양실 등 건물을 지으며
비로전 앞에 있는 한암스님의 단풍나무 지팡이를 산신각 가는길 옆에 옮겨 심었는데 안타깝게도 죽어버렸답니다
그런데 죽었던 단풍나무 밑둥치에서 새 가지가 자라고 있다고
오대산 남대지장암에서 수양하고 계신다는 스님께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한암스님의 수제자이신 탄허스님께서 인재양성과 역경불사로 한국불교를 중흥시키고 있는 벽화 입니다
세조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며 단종의 심복인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이른바 여섯신하(사육신)들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 집니다
좌의정 김종서의 두 아들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것에 반발한 친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보내고 단종 복위를
계획하던 친동생 금성대군을 안동 순흥으로 귀양 보내 사사 시키며, 사육신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처나 딸들은
공신들에게 여종으로 주어졌다고 합니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은 박종우에게 주어졌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정인지에게 주어졌지요.
이렇게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왕위에 오른 후에도 단종 복위를 꾀하는 충신들의 목숨을 잔악하게 살육하는 악한 업을
쌓은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훼손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합니다
세조는 어느날 잠자리에서 악몽을 꾸게 됩니다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 세조의 형수)의 혼백이 나타나 세조의 몸에 침을 뱉는 꿈을 꾸웠다고 합니다
현덕왕후가 뱉은 침자리마다 종기가 돋고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는 등 점점 악화되며 잘 낫지도 않고
견디기가 무척 힘든 피부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세조는 명의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백약이 무효하니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병이 낫기를 발원하였다 합니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할
그 때 숲속에서 놀고 있는 한 동자승이 세조의 눈에 띄었습니다.
세조는 동자승에세 등을 밀어 줄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동자승이 내려와 등을 다 밀자 임금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단단히 부탁의 말을 남깁니다
"그대는 어디 가서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고 하자 동자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도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동자승은 홀연히 사라졌다 합니다
왕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이 없고 어느새 자신의 몸을 보니 몸의 종기가 씻은듯이 나은 것을 알게 돼고서
왕은 크게 감격하며 환궁하자마자 화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 문수전에 봉안된 목각문수동자상 입니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으나,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아래 벽화는 중대사자암 후면 외벽에 그려저 있으며
세조가 문수동자를 친견하고, 문수동자가 세조 등을 밀어 주고 있는 모습을 그린 벽화 입니다
국보 제36호 지정된 동종 용뉴 좌우에 오목새김된 명문에 의해 이 종이
725년(성덕왕 24=성덕왕은 신문왕의 둘때 아들 효명)에 주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처음에 어떠한 목적으로 주성되어
어느 절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안동의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루문(安東樓門)에 걸려 있던 것을 1469년(예종 1) 국명(國命)에 의하여 현 위치로 옮겨 보관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종구(鐘口) 일부에 작은 균열이 생겨 수리를 거친 뒤 보존하고 있으며 이젠 종은 사용하지 않으며
모작품(模作品)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답니다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신라 신문왕의 두 왕자인 보천, 효명으로부터
서대우통수로 끓인 차를 공양을 받고 있는 벽화 입다
조선 세조 왕실이 적멸보궁에서 삼배하며 참회로 마음의 수양을 쌓는 벽화 입니다
신라 자장율사(590~658)가 중국 오대산에서 부처님 진신 사리를 받아 643년 귀국한 뒤
오대산 적멸보궁에 봉안하는 그림이 그려저 있습니다
중대사자암 비로전 앞 계단 좌우에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닌다는 사자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비로나자불을 모시는
중대 사자암은 적멸보궁을 지키기 위한 암자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어두워지는 시간 오후 5시 59분이 되어서야 상원사에 하산을 하게 됩니다
문수보살을 본존불로 모신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 입니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성지 이지요
문수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고양이 석상이 있습니다
묘상(猫像) 즉 고양이 모양의 석물 한 쌍이 있습니다. 이 고양이 석상은 세조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불치의 병을 고친 세조는 이듬해 다시 이적의 성지를 찾아갔습니다
상원사에 당도한 세조는 곧바로 법당으로 올라가 예배를 올리고자 하자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합니다
(이적(異跡) :
마치 법당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이였죠
이상히 여긴 세조는 병사들을 시켜 법당 안팎을 샅샅이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뜻밖에도 부처님을 모신 불단 밑에
한 자객이 숨어 있었다 합니다. 그 고양이가 아니였더라면 세조는 꼼짝없이 자객의 칼에 비명할 뻔 했던 것입니다
세조는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고양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에 고양이를 위한 밭 묘전(猫田)을 하사하고,
한 쌍의 묘상을 석물로 만들어 안치하였으며, 고양이를 죽이지 말고 잘 보호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합니다
서울 근교에도 여러 군데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다 하는군요
지금도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에 있는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극락조 입니다
순금으로 도금된 극락조라고 합니다. 2017년 7월 02일 일요일 EBS1TV에서 극락조가 방송되었는데
극락새 숫컷은 놀라울 정도로 화려하게 아름답던군요
방송에서 극락새를 처음봤습니다
극락조 제작 비용은
월정사 주지스님께서 100% 찬조하셨다고 옆에 계시던 스님께서 일러 주셨습니다
상원사 문수전 측면 외벽에도 문수동자가 세조 등을 밀어 주고 있는 벽화와
보천, 효명(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 효명 왕자는 성덕왕이 됨) 두 왕자가 서대 우통수 물을 길어와
차를 끓여서 문수보살에게 공양하는 벽화가 그려저 있습 니다
관대걸이란
세조대왕이 목욕할 때 의관을 걸어둔 곳이라 하여 관대걸이라 합니다
세종대왕(소현왕후 심씨)의 네번째 아들로 태어난 임영대군 입니다
세종대왕(소현왕후 심씨)의다섯째 아들 입니다
세종대왕(소현왕후 심씨)의 일번째 아들 입니다
세종대왕(소현왕후 청송심씨)의 여덜 번째 아들 입니다
몸이 허약한 문종이 1450년 왕위에 오른지 2년 3개월만에 경복궁 천추전에서 1452년 5월 승하하자
문종의 외아들 단종이 경복궁 근정전 1452년 5월 즉위한지 1년만에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자 숙부(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게 되지요
세종대왕의 후궁 신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세종의 열다섯번째 아들 입니다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산 65번지에 있는 조선 제3대 왕 태종태실은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에 있다는 단종태실 위치 찾기가 힘이들어 성주군청 문화관광과에 전화로 문의하였드니
곧바로 성주지역 해설사를 연결시켜 주셔서 다음의 내용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에 있는 태종태실은 개인 사유지를 무단으로 점용하여 봉안한 태실 석물을 비롯하여
석물을 받치고 있던 대석(
성주군청 문화재를 관리하는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하며
태실의 위치는 표식을 해 두지 않아 육안으로는 찾을 수 없다 합니다. 지금은 박씨들 묘지들이 여럿 있다고 합니다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에 있는 단종태실도 개인 사유지에 무단으로 점용하여
현장에 가서 보면 대석이며, 태실비, 태실 석물들이 훼손된체 태실 주변에 흩어저 있다고 해설사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태실에서 주차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태봉바위에서 바라본 세종대왕자태실이 있는 태봉(胎封) 입니다
주산인 선석산에서 용(龍)이 흘러 내려 혈이 맺힌곳
태봉은 엄마의 유방처럼 팽팽하게 봉긋 솟아 오른 명당 입니다
태종태실이 있었던 성주군 용암면 대봉리 태봉이 그러하며, 충남 가야산을 산행해 보셨지요.
그곳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28번지에 터를 잡고 있는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묘가 명당으로 알려진 길지이며
경남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438번지의 단종태실지가 길지로 알려저 있지요
주차장에서 태실로 가는 돌계단 입니다
태실 주차장의 관광안내소와 태실 항아리 조형물 그리고 태실 안내문
태실 주차장에서 대형버스 주차장으로 가고 있습니다
태실문화관 뒷쪽으로 선석산이 조망 됩니다
오늘 영암지맥 구간 코스가 선석산도 포함되어 있는데 중간에 탈출하는 바람에 선석산과 용바위, 태봉바위를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개별적으로 태실문화관도 둘러볼겸 선석산 산행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산 시간 오후 4시 30분보다 17분이 늦었습니다
곧바로 32km를 이동하여
김천시 교동 콩마당 식당에서 하산식을 하게 됩니다
월명성모의집 ㅡ2.4kmㅡ 영암산 북봉 ㅡ 0.2kmㅡ 영암산 정상 ㅡ1.1kmㅡ 돌문이고개 ㅡ 1.7kmㅡ 선석산
ㅡ0.3kmㅡ 용바위 ㅡ 0.2kmㅡ 태봉바위 ㅡ 0.9kmㅡ불광교 ㅡ0.8kmㅡ 세종대왕자 태실
산행거리 약 7.6km
영암지맥 1구간 산행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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