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소재(폴리우레탄) 도입 60년사(3) -PU 연질 스라브폼의 전개(A)-
1937년 독일 IG Farbenindustrie 연구실 Otto Bayer박사는 우연하게도 엄청난 대박을 터트렸다. 점심을 하려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와 보니 Table위에 흰 폼(Foam)을 발견하였다. 식당에 가기 전 실험하던 이소시아네니트 컵이 돌아다니던 쥐가 건드려 테이블 위 남아있던 물에 쏟아진 것이다.
바로 OH와 NCO의 결합에 의한 PU Foam을 쥐로 인해 발견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현존하는 가장 아름답고 안락하고 편안한 소재가 탄생하였다. 35세의 천재 Bayer박사는 그가 연구 개발한 여러 가지 화학제품 중 PU Foam을 가장 으뜸이라고 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잠수함, 군함, 탱크 등의 군사 장비에 그가 발명한 PU 폼과 PU elestomer의 적용으로 독일 군의 막강한 전력을 보였다. 그런 연유로 미국 등 연합군은 이 소재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Leverkusen의 Bayer공장을 폭격하지 않고 그 기술을 보호하기에 이르렀다. Bayer박사 연구팀은 계속 연구하여 1952년 PU폼을 Moltoprene으로 상품화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당시 기술은 Polyester Polyol을 base로 한 Prepolymer를 Hennecke의 연속발포기로 발포하는 System이었다. Bayer는 이 기술을 전 세계에 보급하기로 하였고 1955년에는 일본의 Inoue(MTP Kasei)가 아시아 최초로 도입하였고 2년 뒤에 우리나라 동신화학이 Moltoprene을 생산하였다.
처음에 생산된 이 PU폼은 높이 40cm, 폭 120cm로 매우 생산성이 낮은 System이다.
뿐만아니라 Polyester Polyol이 점도가 높아 온도를 높혀 발포하는 등 불편하였고 생산성이 지극히 낮었다.
Moltoprene의 특허로 자존심이 상한 미국의 Dow와 Union Carbide는 1958년에 Polyether Polyol을 Base로 하는 PU 폼을 개발하였다. 당시 고압 발포기는 Hennecke의 특허로 이를 사용할 수 없어 Admiral에서 저압 발포기를 개발하였다.
특히 Union Carbide는 각종 부원료들과 Polyol, TDI등 5-6 Components System에서 토출하는 One Shot System의 개발로 생산성이 용이하고 밀도의 조정으로 폭과 높이가 Moltoprene보다 훨씬 좋았다. 새로운 Polyether Polyol System은 1962년 Admiral 기계로 ㈜Lucky에서 시작하였으나 그후 유풍화학이 인수 가동하던 중 화재로 소실되었다.
1960년 대 중반 동신화학이 내 놓은 치약 생산라인을 구입코자 동신화학 공장을 방문한 당시 미원의 임대홍회장(1920-2016.4)은 이 공장 정문에 트럭이 줄지어 서있고 트럭들이 커다란 스포지를 실어 내가는 것을 보았다. 임회장은 ‘저 트럭에 실은 흰 덩어리가 뭐냐?’라고 물으니 수행원이 ‘스폰지 덩어립니다. 30배 100배 이상 튀겨집니다.’ 라고 설명하니 임회장은‘ 돌아가자. 그리고 당장 이 제품에 대해 보고하라’며 차를 돌려 회사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후 미원은 당시 1965년부터 Admiral 발포기를 사용한 대동화학의 설비와 기술자를 1969년에 인수하여 서울과 부산에서 PU 연질 스라브 공장을 시작하였다. 소재로서의 PU폼의 우수성을 인지하고 뿐만아니라 발포 폼의 수익성을 높이 평가한 임회장의 고단위 사업관이 아니겠는가?
부산에 신발공장을 갖춘 진양화학은 1965년 부산에 Admiral발포기를, 용인에는 1975년 생산 수율이 높은 일본 Toyo Rubber의 Draker System을 갖추어 PU 폼 생산에 들어갔다,
Admiral로 발포한 PU 연질폼은 Dome(식빵)형태라 상하좌우를 Slice, Cut하면 수율이 매우 떨어 지는 결함이 있다. Hennecke의 고압발포기는 수율이 좋고 매우 큰 스폰지 덩어리를 생산할 수 있으나 설비 투자가 비싼 단점도 있다. Admiral System의 결점을 보완하여 PE Sheet를 양편 사이드에서 끌어 PU Foam발포를 최대한 Square Type로 생산하는 방법으로 진양우레탄 용인공장의 Draka System은 매우 수율이 좋은 설비다.
1967년 군산 경성고무도 Admiral 설비로 생산하였으며 이 설비는 1976년 동생인 이용구 사장의 김포 한비산업이 인수하여 생산에 뛰어 들었다. 이에 뒤질세라 종합 플라스틱가공회사인 왕관표 삼영화학도 1968년 Admiral기계로 안양에서 생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회사는 최대한의 생산량 증가를 위해 Laaderburg의 Max Foam을 기계를 도입하였다.
이 Max Foam System은 단위 발포량이 크나 Foam의 Cell이 조악한 것이 결점이었다. 따라서 가구와 침대같은 용도로는 수율이 매우 좋았으나 의류와 신발 등 Fine Cell이 요구되는 용도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1990년대까지는 연질슬라브 폼의 수요는 신발공장이 70%가 넘었다. 당시에는 한국의 신발 생산량이 세게에서 제일 많았다. 뿐만아니라 최고의 PU연질폼 기술로 Made in Korea 신발의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
나이키, 리복, 아디다스등 세계 굴자의 회사들의 주문은 한국으로 몰렸고 우리나라 연질 PU폼의 Fine Cell에 저밀도이면서 표면 hardness가 높아 해외 Bayer들은 우리나라 신발 품질을 높이 평가하였다. 지금도 신발에 관한한 made in Korea, Designed by Nike 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품 신발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나라 PU연질폼의 기술이 월등 높아 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영화학의 Max Foam 발포기는 가구나 침대같은 소재로는 수율이 좋았으나 신발공장용 소재로서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