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보스니아의 보고밀인들
프랑스와 사부아의 대 평원 지역은 이미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를 자처하는 세력에게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보고밀인들에게는 오히려 박해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보고밀인들이 가장 활동적이었던 지역은 보스니아였다. 이후 12세기에는 ‘스플리트’(현재 크로아티아 지역)와 ‘달마티아’로 확산되었다. 이 시대 보고밀인들의 가장 유명한 지도자는 벤 쿨린(1180-1204)이었다.
쿨린은 세르비아 왕 스테판 네마냐의 박해를 피신해 온 보고밀인들과 이탈리아의 파타린인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기에 로마 교회와 마찰을 빚게 된다. 그레고리우스 9세가 새로운 교황이 되면서 1232년에 쿨린의 아들 스테판을 폐위시키고 보고밀인들을 옹호했던 보스니아 주교도 해임시킨 후 보스니아 십자군 결성을 요구하였다. 항가리 왕 안드라시 2세는 보스니아를 장악하기 위하여 보고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유럽의 국가들이 대거 참여하게 된다.
학살로 인하여 보고밀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지방의 보고밀인들을 개종시킬 수는 없었고, 전쟁 이후에도 보고밀인들은 건재하였다. 그리고 근면하고 도덕적인 보고밀인들의 노력으로 그 지역들에는 다시 산업이 재건되었고 과거와 같은 상태로 급속히 회복되었다. 이렇게 되자 교황은 1325년 보스니아 지방의 보고밀인들을 진멸하고자 항가리만이 아닌 전 세계의 로마 카톨릭이 참여하는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 로마 교회는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운용하였다. 많은 보고밀인들을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고발한 뒤 거짓 증언자의 증언만을 채택하는 방식으로 재판하여 아무런 변호인의 변호 과정도 없이 곧바로 처형시켜 버렸다.
8) 보스니아의 발도인들
동방의 참 교회는 소아시아에서 일어난 이후 바울인들을 통하여 어어져 오다가 박해와 강제적 이주로 인하여 서유럽으로 진출하면서, 서유럽의 개혁 운동을 주도하던 발도인들과 합류하게 된다. 발도인들이 동방의 보고밀인들이 지역으로 피신하였던 것은 단순히 그곳이 안전한 지대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그 지역에서 신앙적 동질성을 발견하였던 것이 대규모 이주의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 두 신앙 공동체는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하나의 교회가 되어 가는 동화의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이런 동화 과정을 전후하여 보고밀인들이 다시 서방 지역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므로, 서방으로 나아간 그들이 ‘카타르인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을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보스니아의 보고밀인들 공동체 안에서 두 공동체가 하나의 교단으로 공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두 공동체 사이에 어떤 결정적인 교리적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음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당시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 확인해 보자. 동부 지역에서 두 공동체가 이미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고밀인들이 서방에 정착했을 때 큰 갈등이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이들은 서로 어떤 이름으로 불렸던 간에 발도인들, 카타르인들, 보고밀인들은 이미 서로를 형제로 여기고 있었으며, 그 형제들의 합류와 정착을 돕기 위하여 기꺼이 그들의 처소나 삶의 터전들을 내어 주고 나누어 줄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사실을 엿볼 수가 있다.
- 권현익,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참 교회의 역사', pp 422-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