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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초반에 걷게될 마루금을 서원봉에서 앵글에 담아 보았습니다
서원봉 ㅡ 회엄이재 ㅡ 안부 ㅡ 554봉 ㅡ 산불감시 무선중계국 ㅡ 561봉 ㅡ (말티재는 안보임) ㅡ 580봉으로
오늘 걷게되는 한남금북 2구간은
갈목재에서 ㅡ 서원봉(545.7m) ㅡ 회엄이재 ㅡ 450봉 ㅡ 545봉 ㅡ 531봉 ㅡ
말티고개 ㅡ 580봉 ㅡ 592봉 ㅡ 새목이재 ㅡ 591봉 ㅡ 구룡치 ㅡ 수철령 ㅡ 600봉 ㅡ 백석리고개까지
한남금북정맥 이어가기를 위해 보은군 속리산면 갈목리터널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갈목터널이 개통된 이후로는 갈목재를 넘던 차량은 완전히 시라지고~
정맥꾼들만 가끔 옛 도로를 오가는 길로 변했습니다
갈목재는 속리산 국립공원 지역 입니다
좌측 마루금은 속리산 천왕봉으로 이어지며, 오늘은 오른쪽 마루금따라 서원봉 ㅡ 회엄이재 ㅡ 말티고개로 진행하게 됩니다
성급한 몇 사람은 천왕봉으로 진행하고자 하였습니다
갈목재에서 본격적으로 마루금 이어가기를 시작 합니다
뒤돌아 서서 갈목재를 내려다 보고~
낑낑대며 능선으로 오릅니다
12분 걸려 갈목재에서 능선 마루금에 올라섰습니다
배낭이 있는
저쪽 능선은 100% 엉뚱한 방향 입니다
모자와 스틱 그리고 배낭의 임자는 누굴까??
진행 방향이구요
인기척에 뒤돌아 보니 배낭의 주인이 청마님이였군요
청마님은 오늘 저의 산행기에 여러번 출연할 수 있도록 포섭되였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갈목재에서 서원봉에 도착하는군요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에서 지명을 따와 서원봉이라 하는가봐요
별 특징도 없는 서원봉 입니다. 그러나
진행 방향 왼쪽으로 눈길을 살짝 돌리면 절벽을 이루는 암벽이 있으며~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 황해동 마을이 가물가물하게 내려다 보인답니다
사회복무연구센터 곁에는 축구 시합이 벌어지고 있군요
현재 스코어 3대2 입니다
경기 후엔 삼겹살 꾸워 놓고 권커니잣거니로 거나하게 마시겠지요. 우리네 산행꾼들이 하산주로 진탕하게 마시는것처럼 똑 같겠지요
요로분, 서원봉에서 바라보는 사진속 서원교를 눈여겨 보십시요. 서원리마을회관 앞쪽에 흐르는 냇가(삼가천)를 건널 수
있는 다리인데 아주 중요한 다리랍니다. 중요한 다리라니까?? 괜히 궁금해지지요
서원교는 충북알프스의 시작점이기도 하며 또는 끝점으로 마루금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원교 ㅡ 구병산 능선 ㅡ 형제봉 ㅡ 천왕봉 ㅡ 석문 ㅡ 거북이바위 ㅡ 비로봉 ㅡ 고릴라바위 ㅡ 신선대 매점 ㅡ 문수봉 ㅡ
(세조가 피부병을 곤치기 위해 속리산에 왔다가 간밤에 꿈을 꾸고 문장대에 올라 삼강오륜을 다 읽었다는) 문장대 ㅡ
관음봉 ㅡ 북가치 ㅡ 속사치 ㅡ 묘봉 ㅡ 상학봉 ㅡ 토끼봉 ㅡ 미남봉 ㅡ 활목고개
세조대왕이 어느날 꿈속에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이며, 세조의 형수)가 나타나 나쁜ㅈㅅ 왕위에 오르기 위해 내 귀한
아들을 죽여 하고 세조의 몸에 침을 파편 튀듯이 뱉었는데 그 침맞은 자리에 종기(피부병)가 돋아나
말년엔 피부병을 곤치기 위해 온양온천이며 속리산 등 산사를 찾아 다녓는데 오대산 상원사에 얽힌 전설이 유명하지요
결국은 피부병으로 이승을 떠나게 되지만~
한강기맥 오대산 2구간 2부 산행기에서 옮겨 왔습니다
오대산에서 가장 높다는 비로봉 1,563m 입니다
가시거리가 좋은 땐 비로봉에서 멋찐 풍경을 바라볼 수 있은텐데
오늘은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날씨 입니다
오대산에는 오대 암자가 있습니다. 그 중 중대사자암에는 비로전이 있습니다
사자암 비로전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셨다고 합니다
비로봉 역시 사자암 비로전에서 따온 명칭이라 합니다
오늘은 비로자나불의 원력이 비로봉에 미치지 않았는지 조망이 꽝이군요
오후 4시 52분
상원사로 하산을 서두릅니다
가파른 계단을 내려 갑니다
비로봉에서 700m를 하산하였습니다
비로봉에서 700m를 하산한 위치 입니다
하산 시간이 너무 늦어 어두워 지고 있습니다. 적멸보궁은 그냥 지나처서 중대사자암에 왔습니다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암자 이름도 사자암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사자암 비로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기 때문에 비로전이라 합니다
지금부터 중대 사자암 비로전 측면 후면 외벽에 그려진 벽화들을 올려 볼까 합니다
상원사의 역사가 담겨있는 벽화랍니다
오대산의 유래는 비로봉(1,563m)을 주봉으로 하여 호령봉(1,561m), 상왕봉(1,491m), 동대산(1,434m), 두로봉(1,422m)등
다섯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처져 있다 하여 오대산이라 불리기도 하며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 자장율사가 왕명을 받아 당나라에서 유학하였던
중국의 상서성 청량산의 별칭인 오대산과 매우 유사하다하여 오대산이라 명명하였다고도 합니다
오대산의 오봉과 오대 암자가 그려진 비로전 측면 외벽의 벽화을 촬영하였습니다
오대산의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년)에 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이라 불렀습니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 효명왕자가 신문왕의 뒤를 이어 성덕왕으로 왕위에 오름)
고려시대에는 상원사가 어떠한 중창의 발자취를 걸어왔는지 밝히는 자료는 없으나 고려 말부터 일기 시작한 척불(斥佛)
정책은 조선시대에들어 더욱 거세어져 박해를 받으며 태종(이방원 조선 제3대 왕)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기도 하는등
척불정책에 대표적인 왕이었던 태종은 1401년(태종 1) 봄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할 것을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그 해 겨울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왕림하여 성대한 법요식(法要式)과 낙성식을 베풀었다 합니다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이된 세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기 위해 많은 불사를 행하였으며 세조는
오대산에서 두 번의 이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지병을 고치려고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나서
괴질(怪疾)병이 나았고, 상원사 참배 중애 고양이의 도움으로 자객의 습격을 피해 목숨을 건진 일화가 서려 있는
(이적(異跡) :
세조의 원찰(願刹)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깊은 인연 속에서 세조는 신미(信眉)와 학열(學悅)의 권유로 1465년(세조11)에
상원사 중창하여 1466년 상원사의 낙성식을 가지게 됩니다
예종(세조의 둘째 아들)은 세조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예종 1년에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삼고, 태종 1년부터
배불정책을 펴온 조선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되어 온 이 절은
1946년 선원 뒤에 위치했던 조실(祖室)에서 시봉(侍奉)의 실화(失火)로 건물이 전소되어
1947년 당시 월정사의 주지였던 지암스님에 의해 금강산 마하연(摩訶衍)의 건물을 본떠서 중창을 하였다 합니다
1951년 6·25전쟁 때에는 상원사를 화재로부터 지켜낸 일이 한암스님에 얽힌 일화가 유명하지요
1.4후퇴로 국군이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북한 게릴라군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월정사에 불을 질러 태운 국군이
상원사까지 불태우려 하자 군인들 앞에서 가사를 갖추어 입고 법당에 정좌해 "내 몸을 함께 태워 부처께 공양하겠다"는
불심에 감명을 받은 국군은 문짝만 떼내어 불태운 뒤 절을 떠났다 합니다. 그리하여 오대산 입구에 있는 월정사는
소실되었으나 상원사만은 불타지 않고 보존할 수 있었으며, 한암스님은 1951년 2월 14일 입적하셨습니다
한암스님이 중대사자암으로 오르실 때 짚고 다니시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사자암 비로전 앞마당에 꽂아 둔것이
어느날부터 싹이 돋아나 지금은 큰 단풍나무로 자랐다고 합니다
2006년 비로전 앞에 요사체와 공양실 등 건물을 지으며
비로전 앞에 있는 한암스님의 단풍나무 지팡이를 산신각 가는길 옆에 옮겨 심었는데 안타깝게도 죽어버렸답니다
그런데 죽었던 단풍나무 밑둥치에서 새 가지가 자라고 있다고~
스님께서 설명을 해 주십니다
한암스님의 수제자이신 탄허스님께서 인재양성과 역경불사로 한국불교를 중흥시키고 있는 벽화 입니다
세조는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며 단종의 심복인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단종 복위운동에 가담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
이른바 여섯신하(사육신)들이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는 사태가 벌어 집니다
좌의정 김종서의 두 아들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것에 반발한 친동생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귀양보내고 단종 복위를
계획하던 친동생 금성대군을 안동 순흥으로 귀양 보내 사사 시키며, 사육신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죽었고 처나 딸들은
공신들에게 여종으로 주어졌다고 합니다. 성삼문의 아내 차산은 박종우에게 주어졌고, 박팽년의 아내 옥금은 정인지에게 주어졌지요.
이렇게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 왕위에 오른 후에도 단종 복위 꾀하는 충신들의 목숨을 잔악하게 살육하는 악한 업을 쌓은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훼손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했다 합니다
세조는 어느날 잠자리에서 악몽을 꾸게 됩니다
현덕왕후(단종의 어머니, 세조의 형수)의 혼백이 나타나 세조의 몸에 침을 뱉는 꿈을 꾸웠다고 합니다
현덕왕후가 뱉은 침자리마다 종기가 돋고 차츰 온몸으로 퍼지더니 고름이 나는 등 점점 악화되며 잘 낫지도 않고
견디기가 무척 힘든 피부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세조는 명의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백약이 무효하니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병이 낫기를 발원하였다 합니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할
그 때 숲속에서 놀고 있는 한 동자승이 세조의 눈에 띄었습니다.
세조는 동자승에세 등을 밀어 줄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동자승이 내려와 등을 다 밀자 임금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단단히 부탁의 말을 남깁니다
"그대는 어디 가서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 고 하자 동자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도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동자승은 홀연히 사라졌다 합니다
왕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이 없고 어느새 자신의 몸을 보니 몸의 종기가 씻은듯이 나은 것을 알게 돼고서
왕은 크게 감격하며 환궁하자마자 화공을 불러 그 때 만난 문수동자의 모습을 그리게 하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 문수전에 봉안된 목각문수동자상 입니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으나,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아래 벽화는 중대사자암 후면 외벽에 그려저 있으며
세조가 문수동자를 친견하고, 문수동자가 세조 등을 밀어 주고 있는 모습을 그린 벽화 입니다
국보 제36호 지정된 동종 용뉴 좌우에 오목새김된 명문에 의해 이 종이
725년(성덕왕 24=성덕왕은 신문왕의 둘때 아들 효명)에 주성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처음에 어떠한 목적으로 주성되어
어느 절에 보관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안동의 『영가지(永嘉誌)』에 의하면
안동루문(安東樓門)에 걸려 있던 것을 1469년(예종 1) 국명(國命)에 의하여 현 위치로 옮겨 보관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종구(鐘口) 일부에 작은 균열이 생겨 수리를 거친 뒤 보존하고 있으며 이젠 종은 사용하지 않으며
모작품(模作品)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답니다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신라 신문왕의 두 왕자인 보천, 효명으로부터
서대우통수로 끓인 차를 공양을 받고 있는 벽화 입다
조선 세조 왕실이 적멸보궁에서 삼배하며 참회로 마음의 수양을 쌓는 벽화 입니다
신라 자장율사(590~658)가 중국 오대산에서 부처님 진신 사리를 받아 643년 귀국한 뒤
오대산 적멸보궁에 봉안하는 그림이 그려저 있습니다
중대사자암 비로전 앞 계단 좌우에는 문수보살이 타고 다닌다는 사자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비로나자불을 모시는
중대 사자암은 적멸보궁을 지키기 위한 암자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어두워지는 시간 오후 5시 59분이 되어서야 상원사에 하산을 하게 됩니다
문수보살을 본존불로 모신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 입니다
오대산은 문수보살의 성지 이지요
문수전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고양이 석상이 있습니다
묘상(猫像) 즉 고양이 모양의 석물 한 쌍이 있습니다. 이 고양이 석상은 세조와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불치의 병을 고친 세조는 이듬해 다시 이적의 성지를 찾아갔습니다
상원사에 당도한 세조는 곧바로 법당으로 올라가 예배를 올리고자 하자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물고 잡아당겼다 합니다
(이적(異跡) :
마치 법당에 들어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이였죠
이상히 여긴 세조는 병사들을 시켜 법당 안팎을 샅샅이 살펴보도록 하였습니다. 뜻밖에도 부처님을 모신 불단 밑에
한 자객이 숨어 있었다 합니다. 그 고양이가 아니였더라면 세조는 꼼짝없이 자객의 칼에 비명할 뻔 했던 것입니다
세조는 자기의 목숨을 구해 준 고양이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에 고양이를 위한 밭 묘전(猫田)을 하사하고,
한 쌍의 묘상을 석물로 만들어 안치하였으며, 고양이를 죽이지 말고 잘 보호하라는 왕명을 내렸다 합니다
서울 근교에도 여러 군데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다 하는군요
지금도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봉은사에 있는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합니다
순금으로 도금된 극락조라고 합니다. 월정사 주지 스님께서 찬조하셨다 합니다
상원사 문수전 측면 외벽에도 문수동자가 세조 등을 밀어 주고 있는 벽화와
보천, 효명(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 효명 왕자는 성덕왕이 됨) 두 왕자가 서대 우통수 물을 길어와
차를 끓여서 문수보살에게 공양하는 벽화가 그려저 있습 니다
관대걸이 입니다
세조대왕이 목욕할 때 의관을 걸어둔 곳이라 하여 관대걸이라 합니다
걸맞지 않게 잠시 외도를 하였다가
한남금북정맥 본궤도에 재 진입하였습니다
서원봉을 지나 피톤치드를 많이 뿜어 낸다는 솔밭길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습니다
서원봉을 지나서 진행 방향 오른쪽으로 조망되는 암봉 능선을 구병산이라며
앞서 걷고 있는 일행에게 똑똑한척 혼자만이 아는체 얘기를 하였는데 컴퓨터 앞에 앉아
산행 때 찍었던 사진들을 들어다 보니 <속리산 서북능선>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에구~ 쥐구멍 없나~
상주(지금은 영덕) ~ 당진간 고속도로 구간 중
속리산휴게소 앞을 수없이 다니며 볼 수 있었던 구병산 능선(속리산휴게소에서도 볼 수 있음)을 3번 산행하였는데~
지금부터 걷게되는 마루금은
서원산에서 ㅡ 회엄이재 ㅡ 안부 ㅡ 554봉 ㅡ 산불감시 무선중계국 ㅡ 561봉 ㅡ (말티재는 안보임) ㅡ 580봉으로
561봉과 580봉 사이에 말티고개가 있지요
호사다마라고 꼭 훼방꾼이 있어요. 먼곳에서 말티재를 바라보면 어디 아니꼽나요
속리산 서북능선의 상학봉과 묘봉(묘봉은 봉우리 넘어에 넓직한 암봉이 있음)
속리산 국립공원 구역은 회엄이재 이곳까지 입니다. 이제부턴 빨간모자 쓰고 완장차고 산불감시원 단속을 받지 안하겠지요
보은군 장안면 서원리에서
보은군 속리산면 갈목리로 넘어 갈 수 있는 고갯길 회멍이재 입니다
뒤돌아 보고~
화엄이재에서 낮은 봉을 올라 서서 진행을 하니~
꼴찌팀(키맨 대장님, 권짱님, 계명산님, 백운산님)이 산상에서 막걸리 파티를~
531봉에서~
내리막을 내려 가다 만난 묘지에서 바라본 534봉과 545봉
위 사진과 동일한 장소에서 앵글을 왼쪽으로 약간 옮겨서~
545봉으로 오르는데 솔밭에 이름 모를 화초들이 심겨저 있군요
뒤돌아본 화초밭~
현재는 볼품없이 자란 소나무들이만 수십년 후에는 어떤 모습으로 보여줄까
545봉 바로 아래쪽엔 <속리산숲체험 휴양마을>로 한옥 10여 채가~
오늘 산행 틈틈히 보여주는 속리산 서북능선과 속리산 주 능선~
속리산 서북능선의 상학봉과 묘봉
545봉(554봉)에 도착 합니다
한남금북정맥 마루금 방향은 정상을 가리키는 쪽 입니다
정상이란 곳은 말티재를 말하지요
545봉(554봉)에서 말티고개까지 거리가 500m라 합니다
왜~ 545봉과 554봉을 같이 표기하였나 하면~ 선답자의 지도에는 545봉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다음과 네이버 지도 등고선은 554봉이며, 고도계도 554봉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554봉에서 출발하여 말티재로 진행 합니다
2부에서는
말티재에서 ㅡ 580봉 ㅡ 구룡치 ㅡ 수철령 ㅡ 600봉 ㅡ 백석리고개까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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