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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지역개관 |
전라남도 남서부에 위치한 군. 동쪽은 강진군, 서쪽은 신안군․진도군, 남쪽은 완도군, 북쪽은 영암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6°18′~126°44′, 북위 34°18′~34°42′에 위치하며, 면적 859.87㎢, 인구 10만 792명(1999년 현재)이다. 1개 읍 13개 면 177개 이로 되어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해남읍 성내리이다.
(1) 지리․자연환경
이 군은 전라남도의 남서단 해안에 위치한 관계로 해남반도․화원반도와 섬들로 이뤄져 있다. 북쪽에 월출산(月出山)에서 뻗은 줄기가 두억봉(斗億峰, 529m)․흑석산(黑石山, 650m)을 이루고, 강진군과의 경계에 서기산(西基山, 515m)․석문산(石門山, 272m), 남쪽에 두륜산(頭輪山, 703m)․대둔산(大屯山, 672m)․도솔봉(兜率峰, 421m)․달마산(達摩山, 481m), 중북부에 금강산(金剛山, 481m) 등이 있다.
특히 우리 나라의 맨 끝에는 사자봉(獅子峰, 110m)이 있는데 일명 갈두산(葛頭山)이라고도 하며 사자봉의 남사면 해안이 한반도의 맨 끝이다. 산꼭대기에 오르면 보길도(甫吉島)․어룡도(魚龍島)․흑일도(黑日島)․백일도(白日島)․당인도 등의 크고 작은 섬이 보인다.
북쪽의 금강산에서 발원한 금강천(일명 해남천)이 해남읍을 가로질러 복평만(竇坪灣)에 이르고, 두륜산에서 발원한 삼산천(三山川, 일명 어성천)이 삼산평야를 지나 화산면 해창만(海倉灣)에 이른다. 북쪽에는 옥천천(玉泉川)․계곡천(溪谷川)이, 남쪽에는 고현천(古縣川)․구산천(九山川) 등이 흐르고 있다.
토양은 화강암․반암․응회암 등의 충적층이나 잘 풍화되어 있어서 토양층이 깊다. 연평균기온 13.2℃, 1월 평균기온 0.9℃, 8월 평균기온 25.1℃이며, 연강수량은 1,330.8㎜이다.
(2) 인문환경
1) 유물․유적
신석기시대 후기 유적인 현산면 두모조개무덤을 비롯해 북평면을 제외한 전지역에 지석묘군이 분포되어 있고 마제석촉 등이 출토되었다. 송지면에 해남군곡리패총(전라남도 기념물 제129호)이 있다.
고분으로는 북일면에 해남방산리장고봉고분(海南方山里長鼓峰古墳, 전라남도 기념물 제85호)과 해남신월리방대형고분(전라남도 기념물 제102호), 화산면에 해남방축리지석묘군(전라남도 기념물 제115호), 삼산면 창리에 해남용두리고분(전라남도 기념물 제121호), 현산면에 해남월송리조산고분(海南月松里造山古墳, 전라남도 기념물 제86호) 등이 있다.
성지로는 문내면 선두리에 전라우수영성지(전라남도 기념물 제139호), 해남읍에 해남읍성․금강산성․옥산고현성, 삼산면에 녹산성, 마산면에 죽산고현성․산막리성지, 북평면에 만호성․달량진성지와 이진리의 이진성지(전라남도 기념물 제120호)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삼산면 구림리 대흥사(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8호) 경내에 대흥사응진전전삼층석탑(大興寺應眞殿前三層石塔, 보물 제320호), 대흥사북미륵암삼층석탑(大興寺北彌勒庵三層石塔, 보물 제301호)이 있다.
대흥사 안에는 대흥사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보물 제48호)․탑산사동종(보물 제88호)․대흥사천불전(大興寺千佛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8호)․대흥사천불상(大興寺千佛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대흥사서산대사부도(大興寺西山大師浮屠,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대흥사용화당(大興寺龍華堂,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3호)․대흥사대광명전(大興寺大光明殿,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94호)․대흥사서산대사유물(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6호)․대흥사정조친필서산대사화상당명(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67호)․대흥사관음보살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79호)․북미륵암동탑․대흥사사적비․침계루(枕溪樓)․초의선사부도(草衣禪師浮屠) 등이 있다.
송지면 서정리 미황사에는 미황사대웅전(보물 제947호)․미황사응진당(보물 제1183호)․미황사부도군․석조(石槽)가 있다. 그리고 마산면 장촌리에 은적사철조비로자나불좌상(隱跡寺鐵造毘盧舍那佛坐像,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6호), 화원면 금평리에 서동사대웅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74호) 등이 있다. 절터로는 계곡면 성진리에 별진사지(別津寺址)와 여수리에 흑석사지(黑石寺址)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해남읍 수성리에 해남향교대성전(海南鄕校大成殿,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7호), 대흥사 안에 표충사(表忠祠, 전라남도 기념물 제19호), 마산면 화내리에 영산사소장문서일괄(英山祠所藏文書一括,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59호), 계곡면 방춘리에 방춘서원(芳春書院)이 있다.
그리고 여수리에 용연사(龍淵祠), 해남읍 용정리에 용정사(龍井祠)․오충사, 구교리에 해촌사(海村祠), 연동리에 죽음사(竹陰祠), 화산면 금풍리에 금성사(琴城祠), 옥천면 대산리에 삼충사(三忠祠)․충절사(忠節祠)․정운충신각(鄭運忠臣閣, 전라남도 기념물 제76호) 등이 있다.
이 밖에 윤선도의 고가인 해남읍 연동리에 해남윤씨녹우단(海南尹氏綠雨壇, 사적 제167호)․윤두서상(尹斗緖像, 국보 제240호)․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 보물 제481호)․지정14년노비문서(至正十四年奴婢文書, 보물 제483호)․윤고산수적관계문서(尹孤山手蹟關係文書, 보물 제482호)가 있다.
이 밖에 문화재로 옥천면 송산리에 옥산서실소장품일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1호), 문내면 학동리에 명량대첩비(보물 제503호), 산이면에 해남진산리청자요지(사적 제310호), 마산면에 해남맹진리암각매향비(전라남도 기념물 제137호)가 있다.
그리고 삼산면 구림리에 대둔산 대흥사일원(大屯山大興寺一圓, 명승 제9호), 해남읍 성내리에 해남수성송(海南守城松, 전라남도 기념물 제94호), 현산면 초호리에 해남윤탁가옥(海南尹鐸家屋, 중요민속자료 제153호), 백포리에 해남윤두서고택(중요민속자료 제232호), 황산면 우항리에 해남정명식가옥(海南鄭明植家屋,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8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강강술래(중요무형문화재 제8호)와 우수영부녀농요(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0호)가 있다. 그리고 계곡면 덕정리에 해남진양주(海南眞釀酒,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5호), 삼산면 구림리에 탱화장(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1호)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삼산면 구림리에 대둔산왕벚나무자생지(천연기념물 제173호), 화산면 해남방축리에 백로 및 왜가리서식지(천연기념물 제210호), 해남읍에는 해남연동리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제241호) 등이 있다. 화산면 관동리에는 제주도와 중국을 내왕했던 무역항인 관두량이 있다.
2) 민 속
〔민속놀이〕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와 농악을 들 수 있다. 줄다리기는 보통 정월 초에 당산굿을 끝마친 뒤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거행한다. 아름드리 굵기로 동아줄을 감아 암수 두 개를 만든 뒤, 양쪽 줄 머리에 고를 달고 비녀목을 끼워 사용한다. 이 줄다리기는 풍년을 기원하고 재액소복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다.
이 곳의 농악은 호남우도농악의 특징을 그대로 지녀 쇠가락이 구성지며 흥겹다. 농악의 구성은 상쇠와 부쇠․종쇠․징잽이․장구잽이․북잽이․소고잽이 등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도 강강술래와 윷놀이․그네뛰기․달맞이․씨름 등 세시 민속놀이가 전한다.
〔동 제〕 마을 단위로 산신제․당제․도제․거리제․중구제․짐대제 등 다양한 동제가 거행된다. 제일은 정월 초하루가 가장 많으며 정월 대보름이나 초사흘, 2월 초하루인 경우도 있다. 제신은 주로 산신령․당할아버지․당할머니 등으로 마을 뒷산 당집이나 당나무에 모시는데, 때로는 상당과 하당이 있어 각기 다른 신을 모시기도 한다.
화산면 해창마을의 산제에서는 큰당에서 산신령을 모시는 제를 지낸 뒤 작은당에서 당주할머니에게, 처서님당에서는 처서님에게 제를 따로 지낸다. 송지면 동현마을에는 마을 뒷산에 상당과 하당이 있는데, 상당은 웃당산 또는 할아버지당이라 하여 천제신․지신․용왕신을 모시는 제를 지내며, 하당은 할머니당이라 하여 주로 제를 준비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이와 반대로 산이면 예정리 예동마을에서는 하당인 옥령당의 당할머니에게 먼저 제를 지내고, 상당으로 올라가 옥수봉 산신령에게 제를 지낸다. 제의는 보통 유교식 절차에 따라이뤄지며 마을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한다. 이 때 펼쳐지는 농악놀이 등은 마을민들의 화합과 단결에도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3) 역 사
〔고 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신석기시대 후기유적인 두모(斗毛)조개무덤을 비롯해 청동기시대․철기시대․고분시대에 걸치는 유물․유적이 고루 분포한다. 마한 54국 가운데 구해국(狗奚國)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뒤로는 새금현(塞琴縣)과 황술현(黃述縣), 고서이현(古西伊縣)이 이 곳에 설치되었다.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 새금현은 침명현(浸溟縣, 또는 投濱縣)으로, 고서이현은 고안현(固安縣, 또는 同安縣)으로, 황술현은 황원현(黃原縣)으로 개칭되어 양무군(陽武郡 : 지금의 강진)의 영현이 되었다. 통일신라 말기에 대흥사(大興寺)와 미황사(美黃寺)가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서산대사의 의발이 대흥사에 유탁되면서 두륜산 일대가 조선조 불교문화의 요람이 되었다.
〔고 려〕 고려 초에 침명현은 해남현(海南縣)으로, 고안현은 죽산현(竹山縣)으로, 황원현은 황원군으로 개칭되어 영암군의 임내가 되었으며 뒤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행정제도는 변경 없이 지속되었다. 제주도와의 내왕은 물론 송나라와의 무역항으로서 관두량(館頭梁 : 지금의 화산면 관동리)이 이용되었다.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탑산사동종(塔山寺銅鐘)이 대흥사에 보존되어 전한다.
〔조 선〕 1409년(태종 9) 왜구 때문에 육지부로 옮겨온 진도현(珍島縣)과 병합해 해진군(海珍郡)으로 개편되었다. 1412년 읍치를 당악(棠岳 : 지금의 현산면 고현리)에서 영암군의 임내인 옥산현(玉山縣) 땅으로 옮겼다.
1437년(세종 19) 진도와 분리되어 현감이 부임하였다. 1440년 무안 대굴포(大掘浦)에 있던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황원곶(黃原串 : 지금의 문내면 선두리)으로 옮겨와 전라우수영이 되었다. 1448년 황원현(黃原縣)과 옥산현․죽산현 등 영암의 임내지역이 해남으로 이속되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이 곳 달량진(達梁鎭 : 지금의 북평면 남창리)에 왜구가 내습했으나 격퇴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이 곳 주민 정운(鄭運)․이유길(李有吉) 등은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큰 공을 세웠다. 윤현(尹俔)․윤검(尹儉) 등의 의병은 강진 병치(兵峙)싸움과 장흥 석대(石臺)싸움에서 적을 물리쳤다. 또한 대흥사의 승려들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승군에 참여해 크게 활약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12척의 전함으로 130여 척의 왜군선단을 격파한 명량대첩(鳴梁大捷)이 있었으며, 1688년(숙종 14) 명량대첩비가 우수영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표해록 漂海錄≫ 등을 저술한 최보(崔溥), 가사문학의 대가 윤선도(尹善道), 그의 후손이며 화가인 윤두서(尹斗緖) 등이 있다.
〔근 대〕 1895년 나주부 해남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개편되어 부근의 섬을 나누어 완도군으로 이속시켰다. 1906년 진도군 삼촌면과 영암군 옥천면․송지면․북평면 등을 병합하였다. 191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완도군․강진군․영암군의 일부 지역을 조절해 13면으로 편성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3월 10일 해남 장날을 기해 김동훈(金東勳)․김흥봉(金興鳳) 등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또한 학생들의 주도로 4월 6일과 4월 22일에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921년 완도군 군외면 어불도를 송지면에 병합시켰다. 1942년 일본 총독부는 명량대첩비를 철거해 경복궁 뜰에 옮겨놓았다.
〔현 대〕 1947년 철거된 적이 있는 명량대첩비를 되찾아 비각을 세우고 옮겨놓았다. 1948년 11월 1일 대구폭동의 영향을 받은 해남폭동이 발생해 큰 피해를 끼쳤다. 1955년 7월 1일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에는 육지의 최남단이라는 뜻을 가진 토말비(土末碑)가 세워졌다. 1983년 2월 15일 북평면이 북평면과 북일면으로 나눠졌고, 마산면 맹진리 일부가 계곡면 덕정리에 편입되었다. 1990년 8월 1일에 옥천면 봉황리가 강진군 도암면에 편입되었다.
※ 조선시대의 해남
해남이 백제에서 고려까지의 분립되었던 행정체계를 청산하고 하나로 묶어지는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다. 그 모체가 해남현으로 고려때에는 지금의 현산면 일평리에 현읍을 두었던 해남현은 이때 잠깐 고현리로 옮겨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구의 침탈로 영암 땅에 피난하던 진도를 합하여 해진군이 된 해남현은 1409년 갑자기 확대된 영역을 다스리는 관부로서 그 중심치소를 지금의 삼산면 나범리인 구 녹산역지에 새로 성을 축조하여 옮기게 된다. 해진군에 합한 땅은 해남에서 해남현과 죽산현, 그리고 이때에 죽산현에서 분립한 진산현이며, 진도에서 진도군과 가흥현, 임준현이 들어왔다.
AD 1412년 해진군의 치소를 영암땅 옥산현에 옮겨 영읍(營邑)한다. 이것이 지지류에 보이는 "옥산폐현고지사라향"으로 지금의 삼산면 계동리 뒷산인 성뫼산 토성이다. 1437년 해남과 진도를 다시 나누어 해남현으로 복구하고 현감을 두었다. 해남이 현재의 위치인 해남읍성으로 옮긴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체로 해남과 진도가 다시 나누어지는 시기에서 읍성의 남문루(정원루)가 완성된 1469년 사이의 어느 때로 추측하고 있다.
해남군의 시기와 때를 같이하여 지금의 삼산면 서쪽지역인 송정리 중심에 진도민의 거류지가 생기는데 이것이 진도의 삼촌면으로 육지속의 섬과 같은 지역이 된다. 1440년에는 1432년부터 서서히 이동을 시작한 대굴포의 수군처치사영이 완전히 옮겨와서 황원 주량(우수영)에 전라수영의 본영이 정식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1447년에는 신갈부곡이,1448년에는 옥천현과 황원현이 영암에서 해남으로 들어와 대체로 지금의 해남지역과 거의 같은 모습이 되어 조선말기까지 큰 변화없이 존속하였다. 조선후기의 면리체계는 임란이후에 마련된 것으로 <여지도서>와 <호구총수>에는 현일면, 현이면, 녹산면, 현산면, 산일면, 산이면, 파일면, 화이면, 은소면, 황일면, 황이면, 마포면, 청계면, 비곡면, 장목면, 장서면의 16개면이 나타난다.
1895년의 전국적인 행정개편으로 해남현이 해남군으로 승격되면서 그동안에 해남에 딸려있던 완도의 서쪽지역을 완도군에 내어주고 현일.현이면을 군일.군이면으로 황일면을 황원면으로, 황이면을 문내면으로 고치고 혁파된 황원목장의 자리에 새로 관저면을 만들었다. 또 다음해에는 도서지방을 완도군에 이속시켰는데 1906년 월경지인 진도 삼촌면, 영암의 옥천시면, 옥천종면, 북평시면, 북평종면, 송지시면, 송지종면 등 6면을 합하여 23면이 된 것이다.
해남윤씨가의 개관 |
(1) 유래 및 전개
1)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始祖) 유래
해남윤씨(海南尹氏)의 시조(始祖)는 윤존부(尹存富)이다. 그러나 시조(始祖) 윤존부(尹存富)는 고려 중기 때 사람으로 알려졌으나 그 출생과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상고(詳考)할 수 없다. 또한 선계7세(先系七世)까지도 관력(官歷)과 배위급묘소(配位及墓所)를 거의 잃어 버리고 휘(諱:이름)자만 전해오고 있다. 개인적인 기록이 보이고 있는 것은 7대 녹화(祿和) 이후 부터이다.
해남윤씨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사온직장(司倍直長 : 궁중의 술을 맡아보던 사온서에 속한 정7품 벼슬)을 지내다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아들 단봉(丹鳳)․단학(丹鶴) 형제를 데리고 해남(海南=당악棠岳)으로 은둔(隱遁)하여 이 곳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한 8세손 영동정공부군(令同正公府君)광전(光琠)을 이후에 후손들이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본관을 해남(海南)으로 삼게 되었다.
2) 발상지(發祥地) 및 본관(本貫) 유래
선대조(先代祖)의 묘소(墓所)가 모두 강진 해남관내에 있음에 비추어 우리의 선대조(先代祖)의 세거(世居)가 강진․ 해남임을 말하는 것이기에 우리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발상지(發祥地)는 곧 강진(康津)과 해남(海南)인 것이다. 그러나 여지승람 인물권 해남조(與地勝覽 人物卷 海南條)에는 해남윤씨(海南尹氏)가 없다. 그러고보면 해남윤씨의 성관(姓貫)을 해남(海南)이라 함은 어느 시대부터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3) 해남윤씨의 중흥
족보에서 중시조 광전(光琠)의 아들은 단봉(丹鳳)과 단학(丹鶴)이며, 단학(丹鶴)은 차자(次子)인데 부친 광전(光琠)으로부터 봉사조(奉祀條)의 노비(奴婢)를 받은 것으로 보아 제사가 단학(丹鶴)에게 물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때에 장자(長子) 단봉(丹鳳)은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사료된다. 단학(丹鶴)은 다시 사보(思甫)와 사서(思瑞) 두 아들을 두었다. 사보(思甫)께서는 종(種), 경(耕)의 두아들을 두었는데 이후 경(耕)은 강진 덕정동에 살며 효인(孝仁), 효의(孝義), 효례(孝禮), 효지(孝智), 효상(孝常), 효원(孝元),효정(孝貞)의 일곱 아들을 두게 되었다.
그중 막내아들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1476-1543)이 당시 해남의 강력한 재지적(在地的) 기반을 가졌던 대부호 정귀영(鄭貴瑛)의 딸과 혼인을 하게되고 과거에 합격함으로써, 윤효정(尹孝貞)은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가문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어초은(漁樵隱)이란 호처럼 물외한정(物外閑情) 탈속의 경지에서. 번거로운 세속에 쫓김이 없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자연을 벗할 뿐, 자신을 보다 깊고 넓은 세계로 인도하여 국가에 세금을 못내고 옥에 갇혀 신음하며 죽어가는 八道의 불쌍한 백성들을 국가에 막대한 세금을 세 번이나 대납하여 救濟(開獄門)하였던 寬仁厚德한 積德의 유교적 덕치(德治), 인정주의(仁政主義)를 펼쳤다.
또한 그는 학문적으로는 자신의 처사촌 동서인 영남 사림파의 김종직(金宗直)의 門人 최부(崔溥 1454 - 1504)와 師承 관계를 맺으면서 사림으로서 입지를 넓혀 양반가로서 정계 당파성을 확보함과 아울러 해남 윤가라는 본관을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후 그의 자손들은 사림의 주류를 이루는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인 정몽주로부터-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굉필-조광조-이황으로 이어지는 문적계통을 확보함으로서 양반가로서의 맥을 확실하게 이루게되었으며,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의 장자 구(귤정공)와 복(행당), 손자 홍중, 의중과 증손자 유기, 유심 고 손자 선도로 이어지는 자손들이 학문과 벼슬이 출중해 짐으로 인해 그의 선대에까지 나라에서 벼슬이 추증되는 영광을 입게 되었으며 아울러 재지사족 호남 명문가로서의 해남 윤가의 입지가 이루어 졌다.
※ 해남윤씨가 고문서의 특징 |
1. 恩賜狀
다른 가문의 고문서에서 찾아 보기 힘든 은사장이 많다. 은사장이라 함은 왕 및 왕실이나 관부에서 받은 선물의 물목을 적은 것이다. 이 은사장은 윤선도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전으로 있었을 때에 받은 것으로 1628년으로부터 1660년가지 발부된 92통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물품을 누가 보내느냐에 따라 문서양식이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왕이 직접 보낸 은사장에는 使命을 띤 관료의 표시로 奉使之印이 찍혔는 바 30건이 전하며, 왕이 공식적으로 內需司를 통하여 보낼 때에는 內需司印을 찍었으며 이 은사장은 13건이 있다. 世子 등이 보낼 때에는 大君房의 掌務官이 착명서압하였다. 이 문서로는 90건이 전하며 大妃 등의 內殿에서 보내는 경우에는 國文으로 쓰여졌다. 이 문서에는 印이나 착명서압이 없다. 이 문서가 11건이고 기타의 은사장이 19건이 있다.
2. 土地 및 奴婢文記
토지문기는 토지 매득시에 판 사람으로부터 받은 문기로서 일단 토지를 사게 되면 그 이전에 거래된 토지매매문기가 전부 첨부되어 오기 때문에 이를 고찰하는 데에는 地目과 面積 등에 대한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 토지문기는 총 661매가 실려 있는데 17세기의 것이 465건, 18세기의 것이 105건이나 되어 17,8세기에 많은 토지를 매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집에 토지의 매득문기가 이처럼 다량으로 전하고 있는 것은 토지를 매득한 이후에 적어도 상당기간 그 토지를 팔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비문기도 매득한 문기가 55건이 있는데 18세기의 것이 41건, 19세기의 것이 13건이 전한다. 노비를 매득한 경우에는 국가에 등록하는 입안조처를 하였기 때문에 등록 절차상 필요한 소지와 증인들의 조회서 등이 매득문기와 함께 전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토지나 노비의 매득문기는 대체로 매득자인 주인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戶奴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였으며 某宅戶奴로 기록되어 있어 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택명을 알 필요가 있다. 그 宅名은 다음과 같다.
「윤유기 - 감사댁, 윤선도 - 참의댁, 윤인미 - 생원댁․정자댁․별좌댁, 윤이석 - 전부택․니산댁,
윤두서 - 진사댁, 윤현서 - 성산댁, 윤주흥 - 감역댁」
또한 노비성택이 전하고 있는데 이에는 노비의 연령에 따라 老(50세이상)壯(15-49세)弱(14세이하)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奴婢成冊 또는 奴婢案에는 지역별로 파악된 것, 연령별로 파악된 것 등 상당히 이질적인 문기가 포함되어 있다.
3. 分財記類
고려말 1354년의 허여문기, 16세기 3건, 17세기 17건, 18세기 6건이 전하고 있다.
4. 簡札
해남윤씨 고문서에는 659통의 간찰이 실려 있는데, 이중에서 서울에 사는 아버직가 시골에 있는 아들에게 가사의 처리를 당부한 편지는 상당히 중요한 내용을 전해주고 있으며, 특히 40통의 언문간찰이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집안에서는 윤선도 이후 子婦들에게 國文敎育을 시켰던 것 같으며 18세기 이후에는 장문의 국문편지도 있다.
5. 禮曹立案
이 집안에는 여러 번의 입양 조처가 있었다. 해남윤씨 고문서에는 입양하여 예조의 입안을 받은 문서가 연동종가의 경우 1602년에 윤선도를 입양한 입안문기가 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적실과 첩실에서 아들이 없을 경우에만 입양을 허락하도록 되어 있으나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입양관례에는 경국대전의 이 규정은 사문화되었다. 그래서 서자는 종가를 잇지 않게 하는 일반적인 관계이었다. 또한 경국대전의 규정에는 양자로 들어오는 자는 반드시 次子이하이어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섹기 후반부터는 종가의 입양에는 생가의 장자를 입양시키는 사례가 일부의 추세가 되었다. 그러나 해남윤씨의 경우에는 경국대전의 해당규정을 철저하게 지킨 것으로 보여진다.
(3) 해남윤씨가의 주요인물 소개
(1) 윤존부(尹存富)
1世 시조(始祖). 고려(高麗)때 분으로만 알려져 있으며, 관력(官歷)과 배위급묘소(配位及墓所)가 거의 실전(失傳)되었다.
(2) 윤광전(尹光琠)
8世 중시조(中始祖). 영동정공(令同正公). 고려(高麗) 공민왕때 사온직장(司醞直長:궁중의 술을 맡아보던 벼슬)을 지냄. 고려가 망하자 단봉,단학 두아들과 함께 해남(海南)으로 낙향하여 해남윤씨의 터전을 세웠다. 윤광전이 해남의 이웃 고을인 강진에 살았던 것은 노비 증여를 입안한 관아가 耽津(오늘의 康津)縣으로 되어 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문서를 통하여 그의 선대에는 강진지역에 살았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 윤광전은 1354년, 그의 아들 단학에게 노비 1구를 허여하고 이를 입안 조처한 고문서가 전하고 있다. 이 고문서는 보물 483호로 지정되었다. 소지 6장, 입안 2장 모두 8장으로 된 문서인데, 오랜 연대를 내려오는 동안 좀이 먹어서 훼손된 것을 영조20년(1755)에 다시 6장을 한 製帖으로 다시 꾸며 ‘傳家古跡’이라고 표제를 붙여서 간수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 공민왕 대의 윤광전이 그의 적장자인 윤단학에게 노비를 상속해 주는 증서이다. ‘소지’는 윤광전이 사유를 상세히 적고 끝에 財主․訂保․筆執, 곧 현 노비의 소유자․보증인․대서인의 성명과 수결을 붙여서 작성한 것이다. ‘입안’은 당시에 담당 구역의 지방관인 耽津監務가 이를 확인하여 上司의 결재를 신청하는 문서이다. 문장의 내용은 이두문으로 되어 있다. 고대의 문서가 매우 희귀한 오늘날 이 문서는 송광사의 노비첩과 함께 현재 알려진 고려시대의 유일한 문서이다. 윤광전은 해남윤씨의 선조이며 윤선도․윤덕희 등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를 다시 꾸민 사람은 윤광전의 12세손인 윤덕희이다. 노비첩 끝에 덕희가 쓴 발문에 “종중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다시 첩으로 꾸며 놓았으니 후손 등은 傳家之寶로 소중히 여겨야 된다”라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박병호, 한국법제사고 참조)
(3) 윤단봉(尹丹鳳)
9世 대호군공(大護軍公). 고려말(高麗末) 우왕(禑王) 때 대호군(大護軍)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낙향하여 해남(海南)에 은거하였다. 위 윤광전의 노비증여문서상에 장자인 윤단봉이 봉사조의 노비를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것을 미루어 노비증여문서 작성이전에 윤단봉은 이미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윤단학(尹丹鶴)
9世 소윤공(少尹公). 고려때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낙향하여 해남(海南)에 은거하였다.
(5) 윤효정(尹孝貞)
12世 어초은(魚樵隱) 윤효정은 학문에 힘쓰고 농업경영을 부지런히 하였다. 1501년 생원에 합격한 후 관계 진출을 포기하고 제자 교육에 힘써서 학문을 모르는 해남지방을 文獻, 禮義之鄕으로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康津 德井洞에 살 때 당홀를 友愛堂이라 하였다. 그는 中宗期에 소학을 실천한 실천윤리가인 慕齋 金安國(1478-1543)과 同年友이며 交分이 퍽 가까웠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海南鄭氏로 정씨는 麗末이래로 戶長職을 지내었다. 夫人의 증조 정재전은 태종 12년(1512)에 진도와 해남을 함께 쳐서 된 海珍郡의 관아와 객사를 지을 때에는 私財를 대었으므로 鄕役을 면제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함경도에 入役할 鄕吏 십여구를 면제 받아 本縣에 入役하였으며 海珍郡이 다시 해남, 진도현으로 나뉘자 해남현 官奴婢로 자신이 陳告하여 받은 62구를 바쳐 그 功으로 그의 자손은 鄕吏役에서 완전히 면제받았다. 그 후 그의 자손은 해남의 鄕族이 되었다. 錦南 崔溥와는 사촌 동서간이었다. 윤효정은 그의 처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해남의 갑부가 되어 그때부터 해남 윤씨의 경제적 기반은 튼튼해졌다.
(6) 윤구(尹衢)
13世 1495(연산군 1)~? 조선의 문신. 자 형중(亨仲), 호 귤정(橘亭), 생원(生員) 효정(孝貞)의 아들. 1513 (중종 8) 생원이 되고 , 151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다음해 주서에 이어 홍문관의 수찬․지제교(知製敎)․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되었다. 주서로 있을 때 왕에게 거짓말을 한 사실이 드러나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윤구는 문장과 절행이 뛰어나 광양의 崔山斗, 해남에 살았던 최부의 외손자인 柳希春(1513-1577)의 형인 柳成春과 더불어 당대 湖南의 三桀이라 칭하였다. 그의 강직한 기상은 14세 때 科場에서의 物議를 自擔하여 관찰사 앞에 가서 당당히 그의 시재를 발휘하는데서 볼 수 있는데, 이 때 그는 義帝發喪論을 지어 세조의 왕위 찬탈이 부당함을 논하였든데 당시 선비들 사이에 傳誦되었다고 한다. 그가 교유한 名士에는 訥齋 朴祥, 服齋 奇遵, 河西 金麟厚 등이 있었다. 1538년에 복직되었으며, 남해향사(南海鄕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귤정유고》가 있다.
(7) 윤복(尹復)
13世 1512(중종 7)~1577(선조 10).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원례(元禮), 호는 석문(石門) 또는 행당(杏堂). 생원 효정(孝貞)의 아들이다. 1534년(중종 29) 생원이 되고, 1538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547년(명종 2) 부안현감으로 부임하여 백성들의 굶주림을 보고 구휼에 진력하였다. 그뒤 전라도사를 거쳐 1552년 낙안군수가 되었다. 이때 왜구가 쳐들어와 인근 여러 성들을 함락하여 노략질하자, 성과 무기들을 보수하여 방비를 철저히 하였다. 한산군수․광주목사(光州牧使)․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등을 역임하고, 1565년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예안에 거주하던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1573년(선조 6) 승정원 좌․우부승지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다.
학문이 깊었고 곧은 성품으로 선정을 베풀었으며, 하서 김인후(1510~1560), 미암 유희춘(1513~1577)과 동연배로서 교류를 하였다. 호남사림의 한 축을 형성한 인물군에 든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관인의 생활사 자료를 기록(『전라도도사시일록(全羅道都事時日錄)』,『은대일록(銀臺日錄)』)으로 남기기도 한다. 특히 안동도호부사로 재임할 때에는 도산에 퇴휴하여 강학하고 있던 퇴계선생과 학문적 교류를 하였다. 퇴계선생도 국상시의 의례에 관해서 토론을 하고 자신의 저서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등 나이차를 떠나 도의교를 하였다. 퇴계선생이 행당 선생에게 보낸 서찰 26편과 시1수가 퇴계의 문집에 등재되어 있다.
행당의 신도비(강진윤복신도비)는 원래 1698년경에 세워지는데 그의 현손인 윤주미(1641~1698)가 안동에까지 가서 예조판서를 지낸 하계 권유(1633~1704)에게 비문을 받아 온다. 전서는 사헌부 대사헌 권규(權珪), 비문은 이조판서를 지낸 오시복이 썼다.
현재의 비는 원래 비문에 내용을 추기하여 1822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때 비문은 행당의 10대손인 윤종겸(1793~1853)이 쓰고 9대손인 윤규로(1769~1837)가 전서를 써서 세운다. 그리고 원래의 신도비문 외에 새로 세우게 된 연유와 원 비문 이후의 후손록을 추기하였다. 추기문은 비문 글씨를 쓴 윤종겸이 지었다. 신도비의 내용은 앞부분에 선대와 행당의 행적, 후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비좌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일반형의 석비인데 이수에 새겨진 문양들도 특징적이다.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그리고 원래의 비문은 전면과 후면에 새기고 추기한 내용은 좌측(향좌)면과 우측면에 새긴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행당 윤복의 신도비는 인물의 역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있고, 건립의 절대연도(1828년)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래의 비문과 추기되는 과정을 알 수 있어 학술적 가치도 부여할 수 있다. 또한 후손들의 분파를 알 수 있어 향토문화사적 가치도 있다. 저서로 《행당선생유고》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8) 윤홍중(尹弘中)
14世 1518-1572 윤홍중은 을묘사변으로 왜적이 침입하자 해남현감을 찾아갔더니 현감이 孤山弱卒로 어지 固守하겠느냐고 하자 칼을 빼어 만약 성을 버리고 도망간다면 내가 공의 머리를 참하겠다고 하여 둘이 협력하여 성을 지켜냈다. 그 결과 현감 邊協은 공을 세우게 되었다.
(9) 윤의중(尹毅中)
14世 1524(중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치원(致遠), 호는 낙천(駱川) 또는 태천(태川). 정랑 구(衢)의 아들이며, 선도(善道)의 할아버지이다.
1548년(명종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정원주서․저작 등을 거쳐 1553년 부수찬이 되고, 이듬해 검토관을 역임하였다. 1540년 부교리로서 제주선로사(濟州宣勞使)가 되어 다녀왔으며, 이해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이조정랑에 올랐다. 1557년 의정부검상․사인을 거쳐, 집의․응교․직제학․형조참의․예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62년 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도승지에 이어 대사간․이조참의․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566년 호조참판에 올라 이듬해 안주영위사(安州迎慰使)가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으며, 그해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이조참판이 되어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겸직하였고, 아울러 《명종실록》의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1572년(선조 5) 평안도관찰사, 이듬해 병조참판․대사헌을 거쳐, 1574년 대사간․예조참판․대사헌․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581년 형조판서에 올랐는데, 재산을 많이 모아 호남에서 제일 가는 갑부라는 탄핵을 받았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일어나자 동인의 지도자로서 정여립과 친하고, 또 이발(李潑)의 외숙이라고 하여 전라도 유생 정암수(丁巖壽)가 축재를 비난하는 탄핵상소를 올리자, 이에 연좌되어 벼슬에서 삭출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 복관되었다.
< 贈龍門山僧 >
복사꽃 비에 젖어 약한 가지 처졌는데 (桃花雨濕弱枝低)
산승과 마주 읊어 해질녁이 되었네 (吟對山僧到日西)
머리를 돌이키면 용문산 그어딘고 (回首龍門何處是)
저녁구름 머니 꿈속에서 헤메인 듯 (暮雲초遞夢依迷)
※ 윤의중이 살던 시대는 당쟁의 시대로서 관료사이에서 모함이 횡행하던 때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가치판단이나 사실설명을 어느 한 편만의 사료를 가지고 단정할 수는 없다. 윤의중의 형 홍중에게는 嫡室의 아들 思悔가 있었다. 사회가 父에게 悖倫을 저지르자 弘中은 아들을 削籍시켰고 그 후에 사헌부에 구집되어 杖殺되었으며 弘中은 동생 毅中의 次子 唯幾를 入後시켰다. 윤의중이 1586년에 올린 상소문에는, 執義 辛應時와 그의 丈人 丁璣의 모함과 꾀로 조카가 장살되었는데 오히려 숙부인 자기의 증언으로 조카가 죽었다는 모함함에 대한 억울함, 또 형의 재산을 차지하려고 자기 아들을 입후시켰다는 모함과 鄭澈과 奇大升을 제거하려 하였다는 모함 등을 받았다고 썼다. 그의 당색은 東人으로 한국인명사전에 기록되어 있으나 色에 대한 의식이 약하였던 것 같다. 단지 그의 생질인 李潑이 동인의 領首이었기 때문에 동인으로 지목되었을 뿐이다. 여기서는 이와 같은 사실을 언급만하도록 한다.
(10) 윤유기(尹唯幾)
15世(1554-1619) 윤유기는 관찰사를 지냈기 때문에 토지매매문기에 監司宅으로 기록된 것은 그와 관련된 것이며, 1596년의 和會文記는 그가 分財받은 상황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윤유기에게는 嫡室의 所生이 없으므로 同腹兄 唯深의 次子 善道를 입후시켰다.
(11) 윤광계(尹光啓)
15世 1559(명종 14)~?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경열(景說), 호는 귤옥(橘屋). 목사(牧使) 행(行)의 손자이며, 화중(和中)의 아들이다.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1585년(선조 18)에 생원이 되었고, 15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1년 주서․세자시강원설서를 거쳐, 1603년 호조정랑으로서 지제교 겸 춘추관기주관이 되어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역대실록의 재간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예조정랑을 거쳐 1606년 평안도도사가 되고 다음해 공조좌랑이 되었다. 조헌의 문인이었기 때문에 시론의 배척을 받았다. 광해군 때는 말단의 관직을 전전하다가 고향 해남에 은퇴하여 있었다. 그의 시는 시격이 정련(精鍊)되었고 율조(律調)가 청아한 것으로 일세(一世)를 풍미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귤옥집》이 있다.
(12) 윤이경(尹履慶)
16世 1550(명종 5)~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사영(士瑩), 호는 서정(瑞亭). 아버지는 군수 용(容)이며, 어머니는 영광김씨(靈光金氏)로 현감 석주(錫柱)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가학을 이어받아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벼슬이 군수에 이르렀다. 1597년(선조 30) 양근군수로 있을 때 정유재란으로 왜적이 양근을 공격하였다. 그는 자기가 지키는 양근은 적에게 한치도 물러설 수 없다 하여 사질(舍姪) 동로(東老)로 하여금 성 밖에 나가서 싸우게 하고, 그는 성내에서 백성들과 힘을 합하여 싸웠으나 결국 전사하였다. 이 사실을 알리는 홍문관전한 윤규백(尹奎白)의 장계와 도유(道儒)들의 정성으로 전라남도 강진군 화암사(花巖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서정일고》가 있다.
(13) 윤익경(尹益慶)
16世 1554(명종 9)~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탁영(卓榮), 호는 경산(慶山). 아버지는 군수 용(容)이며, 어머니는 영광김씨(靈光金氏)로 현감 석주(錫柱)의 딸이다. 일찍이 가업을 이어받아 학업을 닦았으며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다. 정유재란 때 성전(城田)에 이르러 적의 대부대와 만나 종일토록 결사적으로 싸워서 적병이 후퇴할 무렵 다시 적의 후속부대를 맞이하여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결국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그의 충렬을 기리는 홍문관전한 윤규백(尹奎白)의 장계와 유림들의 건의에 의하여 강진 화암사(花巖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경산유고》가 있다.
(14) 윤동로(尹東老)
17世 1579(선조 12)~1660(현종 1).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군수(君수), 호는 당림(棠林). 아버지는 판관 익경(益慶)이며, 어머니는 장흥임씨(長興任氏)로 제남(悌男)의 딸이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큰아버지 양근군수(楊根郡守) 이경(履慶)과 함께 왜병과 싸우다 큰아버지가 전사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보니 아버지도 의병장으로서 왜병과 싸우다 순절하고 없었다. 그뒤로 과업(科業)을 전폐하고 무예를 닦는 데 전념하였다.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조달하여 북상하던 도중에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통곡하며 북쪽을 향하여 숙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한 일념으로 문자질(門子姪)의 교육에 힘썼다. 이 사실을 어사 민정중(閔鼎重)이 장계로 올렸으나, 등용되기 전에 죽었다. 뒤에 도사로 증직되었고, 도유(道儒)들의 주선과 성균관의 통문으로 강진의 화암사(花巖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당림유고》가 있다.
(15) 윤검(尹僉)
15世 ?~1597(선조 30). 자(字)는 이소(而素), 아버지는 공중(恭中)이며, 어머니는 남원윤씨(南原尹氏)이다. 조선 선조(宣祖) 때 목포수군만호(木浦水軍萬戶)․흥양현감(興陽縣監)을 지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兄) 윤현(尹俔)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병치(兵峙)에서 왜병(倭兵)과의 격전중 순국(殉國)하였다.
(16) 윤기(尹琦)
15世 ?~1597(선조 30). 임진공신(壬辰功臣), 湖南節義錄靖難後功臣. 자(字)는 여온(汝溫), 아버지는 의국(義國)이며, 조선 때 목포만호(木浦萬戶)를 거쳐 당진현감(唐津縣監)을 지낼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왜구(倭寇)와 맞서 싸우다 순절(殉節)하였다.
(17) 윤륜(尹綸)
15世 ?~1597(선조 30). 원종공신(原從功臣). 자는 사언 (士言), 아버지는 천문습독관(天文習讀官) 경우(景佑)이며, 어머니는 나주나씨(羅州羅氏)이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때 선조 (宣祖)를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윤신(尹紳)․윤치경(尹致慶)․윤동철(尹東喆)과 함께 병치(兵峙)에서 순국하였다.
(18) 윤신(尹紳)
15世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의병장. 자는 사진(士縉), 호는 지석(支石). 아버지는 천문습독관(天文習讀官) 경우(景佑)이며, 어머니는 나주나씨(羅州羅氏)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아버지에게서 학업을 닦았고, 벼슬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의주로 파천하였다는 소식이 전하여지자, 그는 격문을 띄워서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가산(家産)과 자질(子姪)들의 사재를 털어서 병기를 만들고 군량을 마련하여 가동(家僮)수십명과 의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강진 동령리(東嶺里)뒷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왜병의 침입을 저지하였다.1597년 정유재란 때는 중형(仲兄) 윤(綸), 아들 동철(東喆), 조카 치경(致敬)과 함께 재침하는 적을 무찔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그뒤 그 격전지를 병치(兵峙)라 하며 지금도 그 유적이 남아 있다. 강진의 화암사(花巖祠)에 봉안하였다. 저서로는 《지석일고》가 있다.
(19) 윤부(尹溥)
15世 자(字)는 자건(子建), 조선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좌랑(佐郞)․정랑(正郞)을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20) 윤치경(尹致敬)
16世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자는 일지(一之), 호는 경림(敬林). 아버지는 참봉 강(綱)이고, 어머니는 광산이씨(光山李氏)로 판결사 변(邊)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전념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향천(鄕薦)이 있었으나 오직 제가(齊家)에만 힘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白衣)로서 창의(倡義)하여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인 계부(季父) 신(紳), 종제 동철(東喆)과 더불어 가동(家僮) 수십명과 의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태안일대의 왜적을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중부(仲父) 윤(綸), 계부 신, 종제 동철과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 대교야(大橋野)에서 어란진(於蘭鎭)에서부터 추격하여온 왜적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네 사람이 다같이 전사하였다. 강진군 화암사(花巖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경림유고》가 있다.
(21) 윤동철(尹東喆)
16世 ?~1597(선조 30).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길로(吉老), 호는 호산(壺山). 아버지는 군자감주부 신(紳)이고, 어머니는 해주오씨(海州吳氏)로 문경(聞慶)의 딸이다. 중부(仲父)인 도사(都事) 약(約)에게 입양되었으며, 양모는 영광김씨(靈光金氏)로 진사 구명(龜命)의 딸이다.
가업을 이어받아 문장․절행(節行)이 일찍이 사림에 알려졌으며, 또한 활쏘기를 좋아하였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백의(白衣)로서 창의(倡義)하여 아버지 신과 종형 치경(致敬)과 함께 가동(家동)수십명과 의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무수한 왜적을 무찔러 해안일대를 안정시켰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아버지 신과 중부 윤(綸), 종형 치경과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해남군 옥천면 성산리대교야(星山里大橋野)에서 적을 맞아 종일토록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강진 화암사(花巖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호산유집》이 있다.
(22) 윤선도(尹善道)
16世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 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 했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 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 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 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 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 문제(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해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 가문에 태어나서 집권 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 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 ≪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 가인(三大歌人)으로 일컬어지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 또한 그는 양대군의 師傳으로 있었기 때문에 왕실로부터 선물을 10일 간격으로 받은 恩賜狀이 다수 남아 있으며, 그가 물려받은 분재문서는 그의 당대의 경제적 여건을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는 선대의 墓所를 海南으로 移葬하는 데 주력하였고 각 묘의 위토답을 마련하여 종통을 유지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윤선도가 자손에게 내려 준 家訓이 전하고 있다. 이 가훈은 우선 修身勤行하고 積善行仁할 것을 강조하고, 첫째 자신에 관계되는 것은 검소하게 하라, 둘째 노비의 신공을 정식대로 받도록 하라, 셋째 仰役奴婢는 厚恤하여 노비의 의식을 항상 넉넉하게 해주고 혹 잘못이 있으면 가르쳐 깨우치게 하고 심한 형장을 하지 말라, 넷째 큰 일이 아닌 작은 일에는 가내노비를 부릴 것이며 戶奴는 부리지 말라, 다섯째 後嗣를 구하되 무당이나 점장이 말은 듣지 말고 眞詮을 主로 삼아라 등등이었다.
(23) 윤인미(尹仁美)
17世 1607-1674 윤선도의 長子로서 도량이 넓고 박식하여 천문․지리․의약에 無所不通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禮論으로 인하여 13년간이나 禁錮되었다. 그는 적실에 독자인 爾錫을 두었고, 이석의 적실에 아들이 없으므로 생가로 삼촌인 인미의 둘째아들 爾厚가 인미의 동생인 禮美에게 出系하였다. 그리고 爾厚의 넷째 아들인 斗緖를 爾錫에게 입양시켰다.
(24) 윤두서(尹斗緖)
19世 1668(현종 9)~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자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다. 장남인 덕희(德熙)와 손자인 용(敖)도 화업(畵業)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정을 이루었다. 정선(鄭敾)․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다. 1693년(숙종 1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집안이 남인 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1712년 이후 만년에는 해남 연동(蓮洞)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다. 그리고 그는 初娶와 再娶에서 9남 3녀를 두었는 바, 長子 德熙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림에 전념하여 이름을 떨쳤다. 죽은 뒤 1774년(영조 50년)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선 중기와 후기의 변환기에 활동한 그는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 산수화를 비롯해서 회화 작품은 대체로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지녔다. 그의 말 그림과 인물화는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보여 준다. 해남에 종손이 소장하고 있는 〈자화상 自畵像〉이 대표작으로 지목된다. 해남의 종가에는 〈자화상〉 외에도 그의 유묵과 서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유작들은 보물 제4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가 소장 유작들 가운데에는 목기 깎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 旋車圖〉와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 採艾圖〉 등 풍속화가 포함되어 주목된다. 이는 김홍도(金弘道) 등에 의하여 유행하는 18세기 중․후반의 풍속화를 예시하여 준 것이다. 아들 덕희가 쓴 행장에도 나타나듯이 그의 실학적 태도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실학적 학문에 대한 취향은 그가 남긴 ≪동국여지도 東國輿地圖≫나 일본 지도(日本地圖),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서적 그리고 이잠(李潛)․이서(李森) 등 이익(李瀷) 형제들과의 교분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또한 그의 유품에는 중국 남종 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수용에 중요한 지침서인 ≪고씨역대명화보 顧氏歷代名畵譜≫도 끼어 있어서 그가 남종화풍(南宗畵風 :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비직업적으로 수묵과 담채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현에 치중한 그림의 경향)과 접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종가 소장의 화첩에는 남종화풍의 산수화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중국적이거나 전통성이 강하지만 18세기 중․후반 이후의 화단을 풍미한 남종화풍과 풍속화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와 손자인 용에게 계승되었다. 조선 말기의 허련(許鍊)도 해남의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에 와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전통 화풍을 익혔다. 그리고 그의 사실주의적 태도와 회화관은 정약용의 회화론 형성에 바탕이 된다. 학자로서의 뚜렷한 업적은 남기지 않았지만, 풍부한 지식과 실학적 태도는 이익 형제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품으로는 〈자화상〉․〈채애도〉․〈선차도〉․〈백마도 白馬圖〉 등이 ≪해남윤씨가전고화첩≫에 전하고 있다. 이 화첩은 산수(山水)․산수 인물(山水人物)․영모(翎毛)․화조(花鳥)․초충(草蟲)․도석 인물(道釋人物)․화훼도(花卉圖) 등 60여 점의 소품으로 꾸며져 있다. 〈노승도 老僧圖〉․〈심득경초상 沈得經肖像〉․〈출렵도 出獵圖〉․〈우마도권 牛馬圖卷〉․〈심산지록도 深山芝鹿圖〉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는 ≪기졸 記拙≫과 ≪화단 畵斷≫이 있다.
(25) 윤덕희(尹德熙)
20世 1685(숙종 11)~1776(영조 52).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경백(敬伯), 호는 낙서(駱西)․연옹(蓮翁)․연포(蓮圃)․현옹(玄翁). 선도(善道)의 현손으로, 두서(斗緖)의 맏아들이며, 용(敖)의 아버지이다. 1748년 화명(畵名)으로 삼성진전(三聖眞殿) 모사중수도감(摸寫重修都監)에 조영석(趙榮例)․심사정(沈師正)과 함께 감독격인 감동(監董)으로 참여하였다. 그 공으로 6품으로 승진하여 정릉현감을 지냈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두서의 영향으로 화업을 계승하였으며 아버지의 화풍을 전수하여 전통적이고 중국적인 소재의 도석인물(道釋人物)․산수인물․말그림을 잘 그렸으나, 두서의 탁월한 필력과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산수화를 비롯한 그의 작품은 두서의 화풍보다는 당시 화단에 만연하였던 남종화풍(南宗畵風)을 비교적 깊게 수용한 면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화풍을 적극적으로 따른 연유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느낌을 준다. 현재 해남의 연동 녹우당(綠雨堂)에 종손이 소장한 윤두서 작품 ≪해남윤씨 가전고화첩≫(보물 제481호)은 그가 정리해서 꾸며놓은 것이며, 윤두서의 행장 역시 그에 의하여 쓰여졌다.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 〈월야송하관폭도 月夜松下觀瀑圖〉(개인 소장), 〈산수도첩 山水圖帖〉(국립중앙박물관 소장)․〈마상부인도 馬上婦人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마도 馬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송하인물도 松下人物圖〉(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있다.
(26) 윤용 (尹忄容)
21世 1708(숙종 34)~1740(영조 16). 조선 후기의 화가. 자는 군열(君悅), 호는 청고(靑皐). 윤선도(尹善道)의 후손 두서(斗緖)의 손자이며, 덕희(德熙)의 차남이다. 1735(영조 1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할아버지 두서와 아버지 덕희로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이어받고 문장에도 뛰어났으나 33세로 요절하였다. 술을 좋아하였으며 기품이 있고 맑은 성격에 용모가 단려(端麗)하였다 한다. 그림은 집안의 가풍을 계승한 흔적이 역력하며 또한 화조나 나비․잠자리 등의 초충도(草충圖)에서도 대상의 미세한 부분까지 자세하게 살핀 다음 꼭 같도록 그렸다는 정약용(丁若鏞)의 화평이 전한다.
산수화는 가법(家法)으로 정착된 남종화풍(南宗畵風)을 따랐고 풍속화에서는 할아버지의 회화세계를 연상하게 하는 〈채애도 採艾圖〉(간송미술관 소장) 등을 남겼다. 이밖에 유작으로 〈수하필서도 樹下筆書圖〉(海南宗家 소장)․〈홍각춘망도 紅閣春望圖〉(간송미술관 소장)․〈연강우색도 煙江雨色圖〉(개인소장) 등이 있다.
(27) 윤규범(尹奎範)
22世 1752(영조 28)~1846(헌종 12). 조선 후기의 문신. 초명은 지범(持範), 자는 이서(彛敍), 호는 남고(南皐). 선도(善道)의 7세손으로, 두서(斗緖)의 증손이며, 위(위)의 아들이다.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1768년(영조 44)해남으로 낙향하였다.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나 윤선도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벼슬에 오르지 못하다가 왕의 특명으로 서용되어 성균관전적․병조좌랑․지평․정언을 지낸 뒤 1797년 임천군수(林川郡守)가 되었다. 1800년 정조가 죽자 사직한 뒤 12년 동안 은거하면서 지내다가 1812년(순조 12) 용양위부호군(龍양衛副護軍)이 되고 7년 후 첨지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 1819년에 병조참의, 1821년 오위장을 지냈다.
(28) 윤지눌(尹持訥)
지눌은 윤지범과 같이 다산 정약용의 평생의 벗들이었다. 윤지눌은 문과에 급제하여 같이 벼슬하던 이로서 시 동인 모임인 '죽란시사(竹欄詩社)'의 일원이었다. 초계문신제명록(抄啓文臣題命錄 : 抄啓文臣에 뽑힌 人物의 題名錄이다. 抄啓文臣은 正祖가 文風을 진작키 위해 37세 이하의 年少文臣을 뽑아 月講․旬製로 經書와 詩文을 익히고 시험을 보여 그 殿最로 상벌을 내리게 한 제도이다. 庚戌年(正祖 14) 左議政 蔡濟 恭의 所選:趙得永 尹持訥 金憬 崔璧 申星模 宋知濂 李羲甲 鄭魯榮 金履載 李明淵 徐有 거 朴鍾淳 韓用鐸 嚴耆 丁若銓 金達淳 洪秀晩 尹行直 朴宗京) 에 등재되었다.
(29) 윤서유(尹書有)
23世 자(字)는 개보(皆甫), 호(號)는 옹산(翁山), 1756년(영조32)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예조 정랑(禮曹正郞) 등을 거쳐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이르렀다.
(30) 윤정기(尹廷琦)
25世 1814(순조 14)~1879(고종 16). 조선 말기의 학자. 자는 경림(景林), 호는 방산(舫山). 아버지는 참봉 영희(榮喜)이며, 어머니는 나주정씨(羅州丁氏)로 약용(若鏞)의 딸이다. 어려서는 할아버지인 서유(書有)에게서 학문을 익히고 장성하여서는 외할아버지 정약용으로부터 수업하였다. 정약용의 학문적 영향을 받아 당대에 문명을 날렸으며, 특히 그의 시는 연경(燕京)의 학자 주당(周棠)이 평하기를 백홍(白虹)의 기상이 있다.고까지 극찬하였고 방산이라는 호까지 지어 보낼 정도였다.당시의 거경(巨卿)․석학(碩學)들이 그와 종유하기를 원하였는데, 권돈인(權敦仁)․이명적(李明迪)․한계원(韓啓源)․최우형(崔遇亨)․김병학(金炳學)․윤정현(尹定鉉) 등이 모두 그의 문우이다.주위에서 여러 차례 사진(仕進)을 권하였으나 이에 불응하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저서로는 《역전익속 易傳翼續》․《시경강의속집 詩經講義續集》․《물명고 物名考》․《방산유고》․《국풍론》등이 있다.
고산윤선도 녹우당유적지 |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살았던 집으로 선생의 4대 조부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1476~1543)이 해남 연동에 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고택이다. 그리고 효종(孝宗)이 고산선생에게 하사한 수원집의 일부를 해남으로 귀향하면서 차마 그곳에 내버려둘 수 없어 일부를 뜯어 옮겨온 것이 현 고택의 사랑채로 원래 이 사랑채의 이름이 녹우당이나, 지금은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그렇게 부른다. 집터 뒤로는 덕음산을 두고, 앞에는 벼루봉과 그 오른쪽에 필봉이 자리잡고 있으며, 어초은사당, 고산사당, 추원당과 옆 터에는 고산선생을 비롯한 선조들의 문적(文籍) 문서 및 고화(古畵) 등을 고루 갖추어 놓은 고산유물관이 있다.
종 목 사적 167호
명 칭 해남윤씨녹우단 (海南尹氏綠雨壇)
분 류 사묘,제단
면 적 14,268㎡
지정일 1968.12.19
소재지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 사유
해남 윤(尹)씨 녹우단은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선생의 고택이며 현재 고산사당 및 어초은사당(漁樵隱祠堂), 고택이 모두 잘 남아 있고 여기에는 가전고화첩(家傳古畵帖) 및 윤고산 수적(手蹟), 관계문서 등이 보물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다.
고산 윤선도 선생은 선조(宣祖) 20년(1587)에 출생하여 현종 12년(1671)에 죽었으며 조선왕조 중기의 시조 작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또한 경사백가(經史百家) 에 통달하였고 의약, 음양지리에도 정통한 학자였다. 사화(士禍)에 의해 유배 당하기도 하였으나 효종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傳)가 되기도 하였으며 사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주택은 서향하여 대문은 남쪽에 남향하고 있다. 안채는 세칸의 대청과 그 북단에 서향하는 두칸의 마루방이 있고 마루방 서쪽에 작은 온돌방이 두칸 계속되어 안방이 되고 그 끝에 큰 부엌이 연결된다. 대청의 남단에는 한칸의 웃방이 있어 서절(西折)하여 작은 부엌 그리고 두칸의 건너방이 연결되고 그 끝은 개조된 창고가 있으나 원래는 마루가 놓인 광 인듯하다. 사랑채는 안채 앞에 있으며 역시 서향하여 남단에 두칸의 대청 그 옆에 두칸의 온돌방이 계속되고 이 온돌방 옆에 서쪽으로 돌출한 작은 온돌방이 있어 그 옆에 다시 한칸의 대청이 있고 이들 앞에는 마루가 달렸고 돌출한 온돌방 뒤에 아궁이가 있다. 사랑채 서쪽에는 작은 못이 있고 그 앞에는 개조된 창고가 있고 그 남쪽 끝에 온돌방 두 개와 부엌이 있어 하인들의 거처였던 것 같다.
이 집 부지(敷地)는 매우 넓고 안채 뒤쪽에 큰 대밭이 계속되고 부지 동남 귀쪽에 안 사당 즉 선조의 신위를 봉사(奉祀)한 사당이 있으며 외장(外牆) 바깥에 고산사당과 중조(中祖)인 윤효정(尹孝貞)의 사당인 어초은사당은 역시 담장을 돌렸으나 한칸 문에 정측면(正側面)이 단칸으로 된 건물이다. 이밖에 동북쪽에 떨어져 어초은의 제실인 추원당(追遠堂)이 있고 북쪽에 좀 멀리 떨어져 고산제실인 녹우당(綠雨堂)이 있다.
이 유구(遺構)는 근세의 선비 주택 시설을 고루 잘 갖추었고 고산선생을 비롯한 고인들의 문적(文籍) 문서(文書) 및 고화(古畵) 등을 고루 갖추어 근세의 주택사 뿐만 아니라 사회사, 미술사, 문학사 등에 관한 여러 자료들이 남아있다.
綠雨堂 |
지정번호 : 사적 제167호
지정일시 : 1968. 12. 29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윤씨종가
시 대 : 조선시대
크 기 : 14,268㎡
종 류 : 건물
대표적인 전통고가 녹우당 |
녹우당(綠雨堂)하면 해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대표적인 전통고가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어서 하루에도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와 고택과 해남윤씨가가 남긴 유물들을 감상하고 돌아간다. 녹우당 앞에 들어서면 먼저 5백여년 된 은행나무가 이 집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듯 찾는 이를 압도한다. 해남윤씨가의 역사를 혼자서 묵묵히 지켜본 나무다.
연동마을의 녹우당이 처음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고산 윤선도 선생의 4대 조부인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1476~1543)님이 600여년전인 1501년 덕정동에서 友愛堂이란 집을 짓고 사시다 당시 도강 김씨와 탐진 최씨들이 세거(世居)해 살던 현재의 마을 터를 사들여 이주하면서 부터이다. 처음의 집자리는 현재의 사랑채 남측의 빈터였으나 2차례에 걸친 화재가 있었다고 한다. 이때 어초은공의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자리는 산강수약(山强水弱)하여 좋지 않으니 현재의 안채 자리로 옮기고 물을 만들어 흰 연꽃을 심으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어초은공이 연못을 만들자 이후로 화재가 없었다고 하며, 이곳의 지명도 백련동(白蓮洞)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고산선생까지 5대에 걸쳐 연속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일대의 명문가문으로, 최고의 재력가로 부상하게 되었고, 급제한 종손들은 서울에 자리잡고 벼슬길에 올랐기 때문에, 해남의 재산은 부재지주로서 관리하게 되고, 종가인 녹우당은 아직 소박한 시골집으로 있었다.그러나 남인 세력의 선봉이었던 고산선생은 당시의 격변하는 정치상황에 회의를 느끼자 벼슬에 미련을 버리고 해남으로 귀향하게 된다. 이로써 녹우당은 고산선생에 의하여 한차례 변화를 거치게 된다. 수원으로부터 사랑채를 옮겨오고, 마을 입구의 백련지를 보다 큰 규모로 개수한 것이다. 그리고 역시 정치에 뜻을 접은 윤두서의 귀향과 종손들의 대이동 이후에 녹우당은 본격적인 살림집으로 집을 개수하게 된다.
그 이전에 있었던 종가집은 재실 형태의 건물이었으며, 1821년 가묘 중건을 시작으로 3개의 사당이 중건되고, 19세기 말에는 행랑채를 신축하고, 1938년에 녹우당 뒤에 있는 재각인 추원당을 신축함으로써 주요한 건축과정을 마무리 짓는다. 길게는 400년 간, 본격적으로는 200년 간에 걸친 오랜 증축과 개수의 과정을 겪은 결과가 현재의 녹우당이며, 지금도 녹우당의 내부는 계속 변화하고 있다.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 |
우리 조상들은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집을 지을 때 집터를 잘 잡아야 집안이 번성한다고 하여 이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이곳 연동은 풍수지리상 최고의 길지로 꼽고 있다.
연동의 형국은 덕음산을 주봉으로 배산(背山, 玄武)하고 좌우에 그 지맥이 안아 싸고 있는 듯한 형상일 뿐 만 아니라 동쪽 계곡에서 원류된 작은 개울이 마을앞 들판을 흘러 임수(臨水)하고 있으며, 들판 건너 안산(말매봉, 문필봉)이 원경(朝山)으로 펼쳐져 있어 풍수가 수려한 형국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 들판이 너무 넓고 막힘이 없어서 허해짐을 막으려고 작의적인 안산(案山)으로 동산과 연지를 만들어 조성한 원림이다.
진산과 안산을 잇는 지형체계의 자연축이 동서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녹우당의 구성축도 동서로 놓인다. 동서축선상의 앞으로는 맘무덤과 연동마을이, 뒤로는 재실과 입향조의 묘소가 놓인다. 동서축은 마을과 종가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고 공간적 위계를 정하는 매우 중요한 축선이다. 여기에는 일상적인 기능보다는 공동체적 장소와, 종가라는 중심과, 묘소와 재실이라는 극히 신성한 의례의 공간이 놓이게 된다. 녹우당에서 서향을 하고 있는 부분들은 사랑채 전부와 안채의 제례청 부분, 그리고 뒷편의 산신단과 사당들이다. 남향을 하고 있는 부분이 더욱 기능적이고 일상적인 공간들이라면, 중심축선상의 공간들과 서향한 건물들은 상징적이고 규범적인 것들이다. 특히 안마당의 정면을 형성하는 안채 제례청은 그 놓인 위치나 규모로 보아 안대청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제사 때만 사용하는 의례적인 장소다. 평시에는 항상 닫혀 있고, 북서쪽 모퉁이 놓인 두칸의 '못마루'가 안대청의 역할을 한다. 상징성과 일상성의 공간이 하나로 통합되지 않고 서로 분리된 채 직교하도록 구성된 것이다.
비록 동서로 놓인 상징적인 축이 집의 구성축을 이루고 있지만, 일상생활의 실용적 행위를 담기 위한 공간들은 모두 남북으로 놓였다. 우선 주요한 출입구들-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과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모두 남향하고 있다. 또한 행랑마당으로 들어오는 협문도 남향이다. 출입구를 남쪽으로 냄으로써 양지바른 곳에서 출입할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담장을 휘어 골묵을 만들고 깊은 곳에 대문을 위치시키는 수법으로 은밀함도 얻고 있다. 주요 출입구를 남쪽에 냈다는 사실은 주요한 마당들의 방향성을 남북으로 생각했다는 점과 일치한다. 특히 동서로 긴 안마당의 비례는 남쪽의 햇빛을 더 받기 위해 남쪽 면을 늘인 결과일 수 있다.
안채의 주요한 방들-안방과 안대청(못마루), 며느리방과 시할머니방 모두가 남향하고 있다. ᄃ자 안채는 동서 상징축을 따라 놓여졌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방들은 남북으로 놓였다. 오직 제사용의 제례청만이 서향으로 놓여 종가집 안마당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ᄃ자 안채의 두날개는 중심의 제례청보다 그 폭이 두껍다. 날개채의 앞뒤로 퇴간을 만든데다가, 뒤편에 다시 쪽마루를 가설했기 때문이다. 몸채보다 날개채가 더 두꺼워진 것은 남향한 날개채를 중심으로 일상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한다.
효종이 하사한 사랑채 '녹우당' |
먼저 은행나무 뒤로 높다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녹우당이 나온다. 이곳의 가장 상징적인 고건축물이다. 현재 이곳의 고택을 보통 녹우당이라 한다. 녹우당 하면 고택 전체를 뜻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할 수 있으나, 사랑채인 녹우당은 고산선생이 수원에 있을 당시 효종이 스승이었던 고산에게 하사한 집으로 고산선생이 82세되던 1669년에 그 일부를 뱃길로 해남까지 옮겨와 다시 지은 집이다.
현재 사랑채 현판으로 걸려있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는 고산선생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가 녹우당이라는 현판을 써줌으로 인해 이 집의 공식적인 명칭이 됐다. 이곳 녹우당은 조선후기 공재 윤두서의 학문과 예술의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쟁쟁한 문인예술가들이 머물거나 교류한 곳이 되어 해남의 문예부흥이 이곳 녹우당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건물의 배치와 구조 |
녹우당은 덕음산을 뒤로 서향을 하고 있다. 먼저 남동향으로 낸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 나온다. 이곳에 들어서면 전면에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사랑채는 침방, 사랑방, 대청이 ㅡ 자로 늘어선 형태로 전면처마에 햇빛을 차단하는 차양이 달려있다. 사랑채 전면에는 방형의 연못이 파여져 있고 각종 수목이 잘 가꾸어져 있어 조선시대 사랑채의 남성공간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랑채 뒤 동쪽으로 난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의 안마당이 나온다. 안채는 ᄃ자형 평면을 이루고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사랑채와 안채가 하나를 이룬 ᄆ'자형의 구조를 이룬다.안채 좌측 편에는 별도의 담장으로 둘러진 곳에 장독대와 곳간들이 있어 여성만을 위한 공간이 형성되어 있으며, 안채 뒷편에는 과실수가 심어져 있는 넓은 후원(後園)이 형성되어 있다.
사랑채가 남성들의 공간이라면 안채는 안주인과 여성들의 공간이다. 따라서 이곳 녹우당도 안채의 각 방의 용도에 따라 기거하는 신분이 달랐는데 안방은 안주인이 차지하고 나이가 들어 며느리에게 실권을 넘기면 건너방으로 가서 기거했다고 한다. 또한 집의 모서리에 위치하여 못방'이라는 방은 며느리가 거처하였다. 현재는 옛날의 생활방식과는 달라져 집의 주인인 종손내외가 안채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랑채는 상량문에 철종 9년(1858)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지금 전면 해체된 후 복원을 통해 건물을 다시 지어졌다. 해체되기 전 사랑본채는 4간집으로 좌․우측에 각각 2간씩 사랑방과 대청을 배치하고 있었다. 또한 특이한 것은 건물의 전면에 사랑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차양을 설치하고 있는데 이는 어초은 추원당을 비롯하여 고산 제각 등 해남윤씨가 관련 건물에서 볼 수 있다. 사랑채는 아랫방 웃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성들의 공간답게 아랫방은 밤에 가장의 침실역할을 하였고 웃방은 외부의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잠자리로 사용되었다.
또한 골방은 옷을 갈아입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약을 집적 조제, 처방할 수 있는 약을 보관해둔 약장이 있는 등 다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이와 함께 작은 사랑방이 있어 이곳에 장남이 기거하였고, 옆방에는 책이나 중요한 문서를 보관해 두었다고 하며 윤씨가의 고문서나 화첩 시문 등이 이곳에 잘 보관되어 내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해남윤씨 종부들의 지극한 공이 숨겨있다.
유교생활의 중심 사당 |
조선시대 유교생활의 가장 큰 덕목중에 하나가 조상숭배로 그 흔적을 잘 엿볼 수 있는 곳이 사당이다. 이곳 녹우당의 사당은 고산 사당이 영조 3년(1727년)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지정되어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사당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불천지위는 보통 국가의 공이 인정될 때 불천지위로 지정되어 모시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곳은 입향조인 어초은공과 불천지위인 윤고산의 사당을 따로 지었다. 그리고 집안 동쪽에 사대조를 받드는 안사당이 있다.
현존 5대봉사를 하고 있는 안사당은 순종21년(1821)에 세웠으며, 그 1년 뒤인 순조 22년(1822)에는 어초은 사당을 중수하였다. 이와 함께 행랑채는 보통 주인의 집안 일을 도우며 사는 하인들이 살던 곳으로, 녹우당은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ᄀ'자형의 문간행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방과 곡간, 마굿간, 부엌등을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다.
백련지와 맘(마음)무덤 |
연동마을 입구의 백련지(白蓮池)는 어초은공께서 양음(陽陰)과 풍수(風水)에 맞추어 左靑龍 右白虎 南朱雀 北玄武 사이에 안산(案山)겸 백련지(白蓮池)와 동산을 만들어 조성한 원림이다. 전통 풍수적인 의미에서는 장풍득수(藏風得水)로 그 뜻은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 이치로 만들어 졌다고도 볼 수가 있다. 현재 주차장 아래에 있는 연못은 평범한 형태의 연못이었으나, 이후 백련지는 풍수지리에도 신안을 가졌던 고산선생에 의하여 탁월한 원림조성솜씨로 이곳 연못 가운데에 큰섬과 작은 섬을 만들고 작은 섬에는 소나무를 심고 큰섬에는 정자를 지어 멋스런 연못으로 만들어졌다.
백련지(白蓮池)의 특징은 방형(方形) 연못, 구체적으로는 변형된 방지(方池)인데, 이것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연못형태이다. 연못의 형태가 직선으로 구성된 것은 음양설로도 설명될 수 있다. 네모난 형태의 연못 윤곽은 땅, 즉 음(陰)을 상징하고, 연못 중앙의 둥근 섬은 하늘, 즉 양(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고대 우주관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지 속 네모진 섬에 정자가 있었다. 방문 앞과 옆 좌와 우에는 마루가 깔린 대청이 있는 정자였으나, 현재는 소실되고 없다. 마을에는 蓮池에 물이 가득 차 그 물 속에 덕음산의 산 그림자가 비추어야만 집안이 펴고 마을이 번성한다라는 선조들의 말씀이 전해오고 있다.
마을에서 '몰(말)무덤'이라고도 부르는 이 맘무덤은 어초은공께서 연지(蓮池)를 조성하면서 백련(白蓮)를 심고 퍼낸 흙으로 마음 심(心)자의 형태로 만든 동산이었다. 공께서는 '學問'과 '行道'를 선비의 긍정적인 면으로 보았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현실적인 마음의 상념체(想念體:喜怒哀樂愛惡慾)를 순리의 삶으로 바꾸어, 후손들이 흰 연꽃이 물에서 나서 물에서 자라지만 물 위에 나와 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이, 세간에서 나서 세간에 살지만 세간을 벗어나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 범인(凡人)으로서의 욕심이 없는 각위(覺爲)와 지행(知行)이 합일(合一)된 지혜로운 유교적(儒敎的) 군자(君子)로서의 삶을 살기를 꿈꾸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자가 있던 섬과 여름철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달고 시원한 물이 힘차게 솟아 연지에 맑은 생명의 힘을 대주던 우물(井泉) 그리고 우물아래 봄이면 푸른 미나리꽝과 그 사이에 놓였던 돌다리, 돌다리 우측 옆에서 봄이면 붉디붉은 꽃송이가 피어나 한없는 소박함으로 어린 가슴을 물들이던 동백섬, 그리고 샘터 주변의 오래된 버드나무 등 지금은 소실된 이 모든 흔적들이 복원될 때 비로서 연동의 참모습을 찾게 될 것이다.
오늘날 녹우당은 어초은공(漁樵隱公)의 정신과 철학이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를 비롯한 자손들에게 면면이 이어져 격변하는 시대의 부침 속에서도 사람들의 신뢰와 존경으로 녹우당(綠雨堂)의 역사가 훼손(毁損)됨이 없이 600餘年의 긴 역사로 보존되어 내려오게 되었다
녹우당 현판 |
녹우당(綠雨堂)의 당호(堂號)는 부귀와 영화를 뜬구름같이 여기고, 남을 지배하는 데서 얻는 쾌감보다는, 도의로서 인간의 경지를 승화하여 모두가 정당한 삶을 누리게 하며, 자신의 생명보다는 도덕적 명예를 중시하는 선비로서의 공재 윤두서의 도덕적 용기와 의지를 4월과 5월의 대지에 영양분을 흠뻑 적셔주는 푸른 비(綠雨)로 그 기상과 정신을 기려 옥동 이서(玉洞 李敍:1662-1723)께서 綠雨堂이란 현판을 표현한 것이다.
녹우당의 현판은 옥동 이서(玉洞 李敍)의 글씨이며, 그의 글씨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원조이다.
운업 현판 |
운업(芸業)이란 운(芸)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하다의미와 업(業)은 일, 직업, 학문, 기예의 뜻으로 늘 곧고 푸르며 강인한 선비이자 충신 열사의 정의로운 적극적 행위 개념을 실현하고자 하는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녹우당 당호를 설명하고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추원당 |
산소 북쪽으로 추원당이 보인다. 어초은공의 재실인 추원당의 규모는 여러 칸으로 당당한 체격이다. 역시 서향이며 일곽은 낮은 담장을 반 듯한 윤곽에 싸서 정리되어 보이며 앞으로 대문채가 자리 잡았다. 여러 칸의 대문채 중간에 솟을대문이 섰다. 건물의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이다. 좌우로 삼각상의 합각이 있고 박공판이 설치되었다.
어초은 사당 |
안채 담장과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울린 멋진 풍광이 어우러져 있다. 사당은 신문과 담장과 사당채로 이루어졌는데 역시 채색하지 않은 질박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어초은 윤효정의 묘 |
사당 뒷산에는 중조(中祖)인 어초은 윤효정과 부인을 합장한 묘가 있다. 오석으로 다듬어 글자를 새겨 가첨석을 씌운 묘표석과 상석과 망주석 그리고 키가 작은 석인상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 사당 |
사당은 나지막한 담장과 역시 서향한 지극히 소박한 신문(神門)이 설치되고 그안통에 3칸의 단청하지 않은 건물로 조성되었다. 신문은 솟을 삼문형식이긴 하나 좌우에 문짝을 다 만들지는 않았다.
가묘(안사당) |
4대 조상들의 신위를 모신 가묘이다. 안채 남쪽으로 열린 편문을 열고 나서면 뒤울타리가 된다. 뒤울타리의 동남편 담장안에 3칸 규모의 건물이 외딴 자리에 담장을 따로 두르고 독존해 있다.
앞퇴에 마루를 깔고 중앙칸에는 띠살무늬 사분합을 달고 좌우협칸에는 외짝만을 설치하였다. 홑처마에 채색은 없고 지붕은 맞배이다.
비자나무숲 |
명 칭 : 해남연동리의비자나무숲(海南蓮洞里의비자나무숲)
분 류 : 학술림
수 량 : 29,700㎡
지정일 : 1972. 07. 31
소재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산27-1
소유자 : 윤형식
관리자 : 해남군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 등지에서 자란다. 잎은 두껍고 작으며 끝이 뾰족하다. 꽃은 봄에 넓게 피고 열매는 가을에 길고 둥글게 맺는다. 나무의 모양이 아름다워 관상용으로 많이 이용되며, 열매는 구충제 및 변비 치료제나 기름을 짜는데 쓰인다. 해남 연동리의 비자나무숲은 우리 조상들이 조성한 인공숲으로 문화적․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해남(海南) 윤씨(尹氏) 어초은(漁樵隱) 선생(先生)의 사당이 있는 뒷산에 있다. 현소유자(現所有者)의 17대조(代祖)께서 심었다고 하므로 수령(樹齡)은 530年정도 되었을 것이고 높이 20m, 지름이 1m, 수관폭(樹冠幅) 15m정도인 것이 가장 큰 것에 속한다. 사당 앞에는 4그루의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다.
어초은(漁樵隱) 선생의 아들 4형제(兄弟)가 각각 한 그루씩 심은 것이 자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 앞에는 연못이 있고 연을 가꾸고 있어 연동리(蓮洞里)라는 마을 이름이 생겼다. 뒷산에서 자라는 비자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윤씨(尹氏)의 선조(先祖)께서는 다음과 같은 유훈(遺訓)을 남겼다. "뒷산의 바위가 노출(露出)되면 이 마을이 가난하여진다." 후손(後孫)들은 뒷산의 나무가 무럭 무럭 자랄 수 있도록 보호하여 온 결과 오늘과 같은 임상(林相)으로 되었다고 한다.
비자나무 숲으로 올라가기 전의 산록(山麓)에는 곰솔나무숲 속에서 소나무가 몇 그루 자라고 있다. 밑에는 사스레피나무, 참식나무, 마삭덩굴, 개비자나무, 남오이자, 송악, 모새나무, 보리밥나무, 자금우, 및 동백나무 등의 상록수종과 더불어 맥문동, 실맥문동 및 춘란이 여기 저기서 자라고 있다. 비자나무 숲의 위가장자리에는 참식나무 등의 큰 나무가 보이고 곰솔 중에서 가장 큰 나무는 높이 25m, 지름 2m정도 이다.
비자나무숲 좌우에서 흔히 나타나는 수종은 굴참나무, 상수리, 갈참, 졸참, 서어나무, 개서어나무, 말채나무, 노린재나무, 작살나무, 말오줌때, 노간주나무, 청미래덩굴, 댕댕이덩굴, 조록싸리, 길마가지나무, 진달래, 감태나무, 및 철쭉 등이며 그 밑에서 구절초, 새 개솔새, 개억개, 신감채, 며느리밥풀, 반디지치, 싱아, 네잎갈퀴, 활량나물 등이 자라고 있다.
은행나무 |
보호수
지정품목 및 번호 : 도나무 10-96
지정년월일 : 82. 12. 3
구 분 : 정자목
수목및본수 : 은행나무 1본
과 명 : 은행나무과
학 명 : ginkgo biloba linnaeus
소재지 및 위치 :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고산유물관앞 90
수 령 : 500년
수 고 : 20m
흉고나무 둘레 : 4.8m
수관직경 : 19m
소유자 : 해남읍 연동리 윤영선
관리자 : 해남군 성내리4 해남군수
지정사유 : 보호수, 규격에 미달되지 않고 희귀목이며, 고산윤선도 유물관앞에 생립되어 지정
나무의특징 : 수목이 오래되어 웅장하며 은행나무로서의 가치가 돋보임.
연혁 및 전설 : 1543년경에 고산 윤선도가 거주 하면서 식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유적지에 대표적인 나무로서 고산선생의 전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해 송 |
보호수
지정품목 및 번호 : 마을나무 10-18-1-35-10
지정년월일 : 82. 12. 3
구 분 : 정자목
수목 및 본수 : 해송1본
과 명 : 소나무과
학 명 : pinus thunbergii parlatore
소재지 및 위치 :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수 령 : 300년
수 고 : 24m
흉고나무 둘레 : 3.4m
수관직경 : 18m
소유자 : 해남읍 연동리 윤영선
관리자 : 해남군 성내리4 해남군수
지정사유 : 유적지 주위에 생립하여 풍치목으로서 보호할 가치가 있으므로 지정
나무의특징 : 해송으로서 가치가 매우 좋으며 유적지에 위치하고 생육상태가 양호함.
연혁 및 전설 : 유적지 뒤에 천연기념물인 비자나무숲과 같이 식재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통적인 사당의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윤두서상 |
지정번호 : 국보 제240호
지정일시 : 1987. 12. 26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윤씨종가
시 대 : 조선시대(1710년대)
크 기 : 가로 20.5 ㎝ 세로 38.5 ㎝
재 료 : 한지
종 류 : 자화상
윤두서(尹斗緖)는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으로서 호를 공재(恭齋)라 하였다. 1693년(숙종 19)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집안이 남인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다. 47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사는동안 2권의 문집(文集)과 화첩(畵帖)을 남긴 조선중기의 학자겸 화가였다.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공민왕조경자사도(恭愍王照鏡自寫圖)」가 허목(許穆)의 「미수기언(眉 記言)」에 보이고 김시습(金時習)에게도 「매월당집(梅月堂集)」에 자화상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자화상이 있었던 듯 하며, 18세기에 들어와 이광좌(李光佐)․강세황(姜世晃)․윤두서(尹斗緖)의 자화상 등이 작품으로 전해오고 있다.
윤두서 자화상은 종이 바탕에 엷은 채색을 한 것으로 1710년(숙종 36) 제작된 것으로 전하며 다른 자화상과는 달리 상용형식이나 표현기법에 있어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이성을 성찰(省察)하는 철학적인 짙은 훈기를 느끼게 하고, 그 털끝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은 정기(精氣)어린 그의 선묘(線描)된 모습에는 사실(寫實)을 초월한 인간 본연의 공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자신을 스스로 정시(正視)하는 자세로 오랜 준비 끝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공재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 화폭 가득히 안면만을 사출하였는데 자아인식이 매우 수준높게 묘사되어 있다. 우선 안면은 보는 사람이 정시할 수 조차 없으리만큼 화면위에 박진감이 들어차 있는데, 자신과 마치 대결하듯 그려져 있다. 화법은 당대의 기법을 응용하여 안면은 깔끔한 구륵(鉤勒)보다는 오히려 무수한 붓질을 가하여 그 붓질이 몰리는 곳에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게끔 하였다. 또한, 이 화상에서는 점정(點睛)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데, 그다지 많지 않은 연발수(蓮髮鬚)형태의 수염이 안면을 화폭위로 떠밀 듯이 부각시키고 있다. 윤두서는 그의 친구 심득경(沈得經)의 초상화를 추화(追畵)한 바 있으며, 그때 화폭 속에 그 인물이 지닌 특징적인 분위기 표출에 성공함으로써 전신사조(傳神寫照)에 뛰어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자화상에는 심득경상에서 표현하였던 분위기 이상의 핍진력이 유감없이 발휘됨으로써 탁월한 가작으로 남게되었다.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의 변환기에 활동한 윤두서는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으며, 산수화를 비롯하여 회화작품은 대체로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지녔다.그는 말그림과 인물화는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기타 그림에서 실학적인 태도도 엿볼 수 있어 16~8세기 중․후반이후의 화단을 풍미한 남종화풍과 풍속화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 |
지정번호 : 보물 제481호
지정일시 : 1968. 12. 19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윤씨종가
시 대 : 조선시대
크 기 : 크기 19 x 18.5 cm
재 료 : 종이․비단․무명 바탕에 수묵․채색
종 류 : 화첩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 윤두서(尹斗緖 : 1618~1715)가 그린 산수․인물․풍속․화조․동물화 등 지본수묵(紙本水墨)과 담채(淡彩)한소품들을 모아 꾸민 서화첩(書畵帖)으로 크기․소재․기법이 다양다종하고 공재화풍의 이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해남읍 연동리(蓮洞里)의 해남윤씨종가에 보존되고 있다. 서화첩의 내용을 보면 <자화상 自畵像>과 <송하처사도 松下處士圖>, 그리고 <윤씨가보 尹氏家寶>라 표제를 적은 화첩 두권, <가전유묵 家傳遺墨>이라고 꾸며진 서첩 세권 등 총 76점의 작품이 모아져 있다.
윤두서의 대표작은 물론 한국회화사에서 가장 빼어난 초상화로 지목되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유하백마도 柳下白馬圖〉․〈나물캐는 여인〉․〈짚신삼기〉․〈경답목우도 耕沓牧牛圖〉․〈송하관폭도 松下觀瀑圖〉등 그의 유작들을 모은 화첩은 윤두서의 다양한 회화세계와 그림 솜씨를 보여준다. 이들 그림과 글씨들은 윤두서가 세상을 떠난 1719년 8월 아들인 윤덕희(尹德熙)에 의해 꾸며졌음이 후기(後記)에 밝혀져 있다. 이 화첩 중 제작연대가 밝혀져 있는 작품은 모두 10점으로 1704년 이후의 연기를 지니고 있다. 이들 작품은 그의 다양한 회화세계와 화풍적 특징을 이해하는 데는 물론,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바뀌는 전환기의 회화 상황과 함께 새로운 남종화법과 풍속화의 선구적 흐름을 파악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윤고산수적 및 관계문서(尹孤山 手蹟 및 關係文書) |
지정번호 : 보물 제482호
지정일시 : 1968. 12. 19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윤씨종가
시 대 : 조선시대
재 료 : 한지
종 류 : 필사본기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인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직접 손으로 쓰거나, 엮어 펴낸 수적들과 선생과 관계된 여러 문헌들이다. 윤선도는 8살되던 해에 큰아버지에게 입양되어 해남으로 내려가 살았다. 20세에 승보시(升補試)에 1등으로 합격하여, 1616년 성균관유생으로서 집권세력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벼슬을 버리고 내려온 후에는 조상이 물려준 엄청난 재산으로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찾은 금쇄동에 여러 정자와 각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수적으로는 『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금쇄동기 金鎖洞記』․『산중신곡 山中新曲』이 있다.
『금쇄동집고』는 윤선도가 금쇄동에서 지내면서 도연명(陶淵明)․이백(李白)․백거이(白居易) 등 중국의 여러 시인들의 시구를 모아 손수 쓴 것과, 그가 쓴 한시, 그리고 우리말로 된 단가를 모아 한 첩으로 묶은 것이다.『금쇄동기』역시 금쇄동에 지내면서 지은 한시를 묶은 것이며,『산중신곡』은 자신이 보길도와 금쇄동에서 있을 때 그의 힘든 생활을 풍자섞인 내용을 담아 지은 단가를 모아놓은 것으로 「만흥 漫興」․「조무요 朝霧謠」․「오우가 五友歌」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국문학적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윤선도와 관계된 문서 가운데『은사첩』2권은 인조와 봉림대군(후의 효종)이 선생의 집에 여러 곡식을 내린 것을 기록한 송장을 모아 엮어 첩으로 만든 것이며,『예조입안』은 윤유심의 둘째 아들인 선도를 윤유심의 형인 윤유기에게 양자로 들이는 것을 예조에게 허가하는 문서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가족제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금쇄동집고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인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쓰거나, 엮어 펴낸 수적들 가운데 하나인『금쇄동고집』이다.
이 책은 선생이 금쇄동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도연명, 이백, 백거이, 의응물 등 중국시인들의 시구를 모아엮어 손수 쓴 것과, 자기가 지은 한시(漢詩)와 우리말로 쓴 단가(短歌)를 합하여 첩으로 꾸민 것이다. 고산 윤선도 선생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문학을 연구하는데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금쇄동기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인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쓰거나, 엮어 펴낸 수적들 가운데 하나인『금쇄동기』이다.
선생이 금쇄동에 은거하면서 지은 한시(漢詩)를 모은 것으로 직접 손으로 쓴 것이다. 고산 윤선도 선생의 시세계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산중신곡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인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쓰거나, 엮어 펴낸 수적들 가운데 하나인『산중신곡』이다.
선생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금쇄동에서 불우한 자신의 생활을 풍자섞인 내용을 담아서 지은 단가(短歌) 20편을 모아 엮은 것이다. 고산 윤선도 선생의 시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며, 국문학상에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은사첩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인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과 관계된 문헌 가운데 하나인『은사첩』이다.
책은 2권으로 되어 있으며, 인조와 봉림대군(후의 효종)이 유성룡 선생의 집에 여러 곡식과 잡물을 내린 것에 대한 송장을 모아 첩으로 엮어만든 것이다. 윤선도는 봉림대군의 스승을 지낸 적이 있었다.
예조입안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작가인 고산 윤선도(1587~1671) 선생과 관계된 문헌 가운데 하나인『예조입안』이다.
이 문서는 선조 35년(1602) 6월 초 2일에 윤유심의 형인 윤유기에게 윤유심의 둘째아들인 윤선도를 양자로 들이는 것을 예조(禮曺)에서 허락하는 결재문서이다. 양쪽 집안의 동의서와 동성 및 이성권의 보증서를 확인하고『경국대전』『입후』의 규정에 의하여 이를 허가하여 달라는 청원서에 대하여, 이를 결재한 좌랑, 정랑, 참의, 참판, 판서의 수결이 찍혀있다.
지정 14년 노비문서(至正十四年 奴婢文書) |
지정번호 : 보물 제483호
지정일시 : 1968. 12. 19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윤씨종가
시 대 : 고려시대
재 료 : 한지
종 류 : 노비문서(소지류)
1354년(공민왕 3) 8월에 직장동정(直長同正) 윤광전(尹光琠)이 그의 차남(次男)으로 소윤(小尹)의 관직을 가진 윤단학(尹丹鶴)에게 노비 1구를 봉사조(奉祀條)로 물려주는 문서이다.
고려시대 노비의 양여와 이의 입안하는 절차를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이다. 구성을 보면, 「소지(所志)」는 재주(財主)인 아버지 윤광전(尹光琠)이 노비 1구를 아들 단학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그 사유를 상세히 적고 끝에 재주(財主)․정보(訂保)․필집(筆執) 곧 현노비(現奴婢)의 소유자․보증인(保證人)․대서인(代書人)의 성명과 수결(手決)을 붙여서 작성한 허여문기(許與文記), 단학이 받은 노비 1구에 대한 입안을 위하여 당시에 담당구역의 지방관인 탐진감무(耽津監務)에게 올린 입안신청소지(청원서), 증인과 필집이 탐진감무에게 올린 입안신청소지 등 소지(所志)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입안(立案)」은 입안신청소지에 대해 탐진감무(耽津監務)가 이를 확인하여 상사(上司)의 결재를 신청하는 문서로 입안(立案) 2장 모두 8장으로 되어 있다. 문장의 내용은 이두문(吏讀文)으로 되어 있다.
오랬동안 전해내려 오면서 크게 훼손된 것을 윤광전의 12대손 윤덕희가 1755년(영조 31)에 다시 6장을 한 장첩(粧帖)으로 다시 꾸며서 《전가고적(傳家古跡)》이라고 표제(表題)를 붙여서 간수하고 있다.
고대(古代)의 문서가 매우 희귀한 오늘날 이 문서는 송광사(松廣寺)의 노비첩(奴婢帖)과 함께 현재 알려진 고려(高麗)시대의 유일한 것이다. 윤광전(尹光琠)은 해남(海南) 윤씨의 선조(先祖)이며, 윤선도(尹善道)․윤덕희(尹德熙) 등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이를 다시 꾸민 사람은 윤광전(尹光琠)의 12세손(世孫)인 윤덕희(尹德熙)이다. 노비첩(奴婢帖)끝의 덕희(德熙)가 쓴 발문(跋文)에 「종중(宗中)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다시 첩으로 꾸며 놓았으니 후손들은 전가지보(傳家之寶)로 소중히 여겨야 된다.」는 내용이 기술되었다.
해남고산유고목판일괄(海南孤山遺稿木板一括) |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219호
분 류 목판류
수 량 고산유고268판외37판
지정일 1999.07.05
소재지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82
소유자 윤고산유물전시관
관리자 윤고산유물전시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조 작가인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시문집을 새긴 목판이다.『고산유고』의 목판 268매,『고산유사』의 목판 7매,『고산선생연보』30매 등이다.
정조 20년(1796)과 19세기 말에 각각 새겨진 것으로, 빠진 목판이 없고 유고집 안에 한글가사가 실려있다. 현재 전라남도 해남에 있는 윤고산 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산윤선도 금쇄동유적지 |
명 칭 해남윤선도유적 (海南尹善道遺蹟)
분 류 기타유적지
지정일 2001.08.17
소재지 전남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산181 외
시 대 조선시대 후기
소유자 해남윤씨고산공파종중 외
관리자 해남군
"千年의 비경(秘境)이 어찌 나를 위해 열려서 나로 하여금 날로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게 하는가"
고산선생이 금쇄동을 얻고서 이른 말이다.
금쇄동은 고산선생이 54세되던 1640년에 '금제석궤'를 얻는 꿈을 꾸고 몇일이 안되어 꿈과 부합된 곳을 찾았다하여 금쇄동이라 이름하였다. 선생은 수정동, 금쇄동, 문소동을 일동삼승(一洞三勝)으로 여기고 10년동안 은거하였는데, 고산선생은 이 곳에서 산거생활을 하면서 금쇄동기와 금쇄동집고 그리고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등의 작품을 지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금쇄동의 위치가 해남군 현산면 상구시리 병풍산 무명봉 산성안인 것이 확인되고 지도에 표기됐다. 금쇄동은 해남 향토사연구회 조사를 거쳐 해남문화원에서 책자<孤山文學現場調査報告書(고산문학대축제 총서 제1집), 孤山文學現場圖錄(고산문학대축제 총서 제2집), 孤山文學과 海南(고산문학대축제 총서 제3집)>까지 발간되고, 사적지(사적 432호)로 지정되었다.
금쇄동은 고산 선생이 원림(園林)을 조성한 고성(固城)안과 『금쇄동기』에서 명명한 22개의 지명 등이 있으며, 선생이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개척한 문학산책로로서 건물지와 연못지의 유구가 남아 있고, 금쇄동내에 위치한 현산고성(懸山固城)은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동문, 서문, 북문 등 3곳의 문지, 수구의 성곽시설과 망루지, 건물지, 제방 등의 성내시설이 남아 있다
이곳은 고산 선생의 시문학 창작의 산실로서 국문학상의 학술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옛성이 잘 남아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큰 유적이다.
금쇄동(金鎖洞)의 위치와 원림터 |
고산선생의 연보(年譜)에 이 금쇄동을 발견한 것은 쉰네살이던 인조18년(1640)이었다고 하였다. 처음에 연동이 있는 덕음산에서 멀지 않은 수정동(水晶洞)에 머물다가 문소동(門簫洞)을 얻고는 그리로 거점을 옮겼었다. 보길도 부용동을 얻은 뒤에 고향에 머물다가 꿈에 보았던 자리인 금쇄동을 발견하고는 문소동, 보길도의 부용동과 더불어 금쇄동에 터를 잡고 은둔의 생활을 하였다.
금쇄동 입구는 해남군 현산면 상구시리에서 하구시리 저수지쪽으로 약 1km쯤 가면 금쇄동이라는 초라한 푯말이 세워져 있다. 현산고성과 그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금쇄동은 문소천을 둘러싼 고산분지형으로 산성의 동북편은 고산 윤선도선생이 22개의 비경을 노래한 자연으로, 맞은편에 병풍산과 마주보고 있다.
산성의 남쪽편은 소봉을 이루며 절벽으로 접근이 어렵고 멀리 남해의 가련봉, 향로봉, 도솔봉을 관망할 수 있다. 금쇄동으로 들어가는 계곡은 동북쪽으로 길게 놓여 있어서 약 4km의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금쇄동은 고산 선생이 54세되던 1640년에 '금제석궤'를 얻는 꿈을 꾸고 몇일이 안되어 꿈과 부합된 곳을 찾았기 때문에 금쇄동이라 하였다. 금쇄동 원림의 공간구성은 양몽와, 회심당, 불원요, 휘수정, 교의재 등의 건물과 인공으로 만들어진 연못에 물을 공급하는 석천(石泉), 그리고 물이 폭포를 만드는 석병 등 자연 및 인공구조물로 구성되었다.
이와같은 고산 선생의 원림구성은 보길도의 원림이나 수정동 원림과 유사성을 보이는데 자연적인 바위나 석대, 연못의 조경 그리고 이에 알맞은 건물을 축조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수정동의 지형과 지세는 병풍산을 좌측에 두고 계곡안으로 진행하다가 천(川)이 갈라져 오는 우측에 위치한다. 지형은 평탄한 편이나, 큰 바위가 단을 지어있고 인근 산세에 비해 협곡으로 산정상의 평지가 암반을 만나 협곡으로 변화한다. 수정동 유적은 정지된 연못으로서의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을 가두거나 흘려서 상하연지를 조성함으로서 보다 극적인 공간 구성을 하였다. 계곡에 연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상하연지의 석축과 그것을 조망하고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한 정자터의 석축, 또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물길을 유도하며 조성한 석담 및 동백, 난, 대나무 등을 조성하기 위한 소단석축 등을 들 수 있다. 수정동에 발견되는 유적은 비교적 원형을 추정할 수 있도록 보존되어 있다.
* 금쇄동은 해남현의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산세는 면곡(面曲)하고 험령(險嶺)을 넘으면 그 위에 고성지(古城址)가 있다. 인조때 현사람 윤선도가 산의 높은 곳을 금쇄라고 이름지었다.-(동국여지지:유형원,1656년)
* 구시리(九市里)는 본래 해남군 현산면의 지역으로서, 아흐렛날에 서는 시장이 있었으므로 구시라 하였다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원천리, 김진리, 영흥리, 선적리, 중촌리, 강구리, 오십리, 고현리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구시리라 했다
* 금쇄-동(金鎖洞) 【골】→ 금쇗골
* 금쇗-골〔금사동, 금쇄동〕【골】오시밋재 밑에 있는 골짜기
* 영모-재(永慕齋) 【집】구시리에 있는 해남 윤씨의 재실
* 윤고산-묘(尹孤山墓) 【묘】금쇗골에 있는, 조선 인조 때의 학자 윤선도의 무덤
* 추모-당(追慕堂) 【집】금쇗골에 있는, 해남 윤씨의 재실
금쇄동의 산중신곡 |
고산선생은 금쇄동에 전후 세 차례에 걸쳐 약 9년의 세월을 지내면서 '산중신곡(山中新曲)'19수, '속산중신곡(山中續新曲)'2수, 기타 5수와 '금쇄동기(金鎖洞記)', '금쇄동집고(金鎖洞集古)'를 지었다. 산중신곡은 山中生活에서 촉발된 감흥을 읊은 시가이고 금쇄동기는 아름다운 금쇄동의 산수 경관을 술회한 한문 수필이다. 고산 선생의 나이 쉰 여섯 살에 유명한 '오우가'와 더불어 시조 '만흥', '조무요', '하우요'등이 창작된다. 이상향을 얻은 만족스러움에서 발로된 창작활동인 듯이 느껴진다.
금쇄동기의 내용에 따르면, 고산 선생은 금쇄동의 중심을 회심당으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이곳에 ‘회심이라고 붙이게 된 이유를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여러 가지 근거를 열거 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금쇄동기에 千年의 비경(秘境)이 어찌 나를 위해 열려서 나로 하여금 날로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게 하는가라고 서술한 것으로 보아 고산 선생은 금쇄동을 신선이 사는 이상향(理想鄕)으로 여겼던 것 같다.
아래의 시는 고산선생께서 금쇄동을 얻고나서 지은 것이다.
하늘과 神이 몹시 아껴 한 구역을 숨겼으니
뉘라서 작은 선경이 眞景圖錄임을 알리.
만길 신선의 굴 옥으로 깎아 세운 듯 하고,
山海는 천 겹 수묵도를 펼쳐 놓은 듯 하네.
조수들은 가파른 봉우리에서 자유로이 노닐고
비 비람은 잡초 우거진 들에 어둡게 깔려있네.
이곳에 오르니 전날밤 꿈 생생하구나
하느님은 무슨 공으로 金鎖의 궤를 나에게 주셨나요.
고산 윤선도선생의 묘 |
현종 12년(1671) 6월 11일, 고산 선생은 85세의 나이를 일기로 보길도 낙서제(樂書齊)에서 세상을 하직하였다. 시신을 운구하여 9월 22일, 금쇄동 옆 문소동에 장사지냈다.
금쇄동은 산성과 같이 축조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고 , 산소는 거의 서북향을 향하고, 거의 정상이여서 뒤로 배산이 높지 않다. 산소 좌우로만 약간의 평지가 있는데 이는 가봉(加封)하여 조성되었다. 산소의 앞은 얼마 머지않아 다시 떨어지는데 마치 두 손바닥을 나란히 모으고 그 중앙에 묘를 쓴 듯이 하였는데 묘의 좌향이 형국 전체와 약간 그 축을 달리하고 있다.
묘 앞에 숙종 1년(1675) 2월에 이조판서에 추증하였다는 묘표석이 있고 망주석과 석인상(石人像)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신도비 |
상당히 큰 백일홍 나무가 있는 쪽(좌측)으로 약 50m쯤 가면 신도비(碑)가 서있다. 대를 모으고 비석을 세웠는데 지붕돌 가첨석(加첨石)에는 드물게도 기왓골과 서까래 부연을 갖춘 겹처마의 표현이 완연하다. 비문의 전서를 미수(眉수) 허목(許穆: 1595-1682) 선생이 썼다고 한다. 이조판서에 추증된 일과 영조 3년(1727)에 불천지위(不遷之位:큰 공훈이 있어 영구히 사당에 모시는 것을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하도록 하명된 사적 등이 기록되어있다고 한다.
영모당 |
골짜기 산기슭에 동향하고 터를 잡은 대지에 건물이 한채가 있다 생전에 고산 선조께서 기거하시던 집을 후인들이 고쳐 영모당(永慕堂)을 만들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기거하였던 집이다.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뒷간이 오솔길 옆에 있다. 조금 비껴 오르면 기슭의 옹색한 지대를 통과하게 하려 산석(山石)을 큼직하게 떠다가 길을 만들엇다. 그 길이 작은 사주문(四柱門)에 이른다. 산기슭에서 내려오는 토담과 계곡 편으로 쌓은 담장이 문 좌우로 이어지고있는데 매우 고졸하다. 집은 후인들이 다시 지었는지 몰라도 이담장의 일부는 고산 시대의 유물인지 모르겠다.안채는 정면 5칸에 측면이 2칸인 규모이며 -자형이다. 그 2칸을 칸반의 방에 반칸의 앞퇴를 두는 분할법을 써서 독특한 성정을 보였다. 집은 가운데로 대청이 있고 좌우로 방이 있는 배치법을 따르고 있는데 집은 빈 집이어서 그런지 도비는 다 찢어졌고 방 천장의 반자틀은 뼈대를 드러낸 채 앙상한 몰골을 하고 있다. 건물 앞에 예의 사랑(斜廊), 퇴가 부설되어 있다. 석탑의 개석 하나가 주춧돌로 이용되어 있다. 녹우당에서나 어초은공의 제실에서, 어쩌면 보길도 건물들에서도 볼 수 있었을 그런 퇴, 사랑의 구조물이 여기에도 있다는 점이 놀랍다. 일종의 일관성인데 좀처럼 관철되기 어려운 의도가 존중되어 있다. 이 점이 일관되고 있는 고산 선생 유적의 정신인지도 모른다. 안채 앞으로 감싸듯이 ┌자형의 부속건물이 한채 더 있다. 그 건물에도 편문이 있어서 뒤로 드나들기 편리하게 하였다. 건물의 상태가 좋지 않다.
수정동 원림 |
수정동은 현산면 만안리 미세마을 건너편 만인저수지 윗쪽에 위치한 계곡이다. 수정동은 지난 87년 전남대 박준규 교수에 의해서 그 터가 밝혀졌다. 고산연보에 나오는 인소정터와 수정암, 그리고 두 곳으로 추정되는 연못터까지 모두 밝혀졌다. 기록에 따르면 고산 선생은 이곳에서 1년 밖에 거주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고산 선생은 금쇄동에 거주하면서 이곳을 수시로 왕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산 선생은 영덕의 귀양에서 풀려 은거지로 처음 찾은 곳은 수정동이요 그 곳에 인소정(人笑亭)을 비롯하여 몇 개의 집과 정지(亭池)를 구축하고 원림을 이루었다. 수정동 원림을 이루면서 비폭(飛瀑)이 날리는 병풍 바위 아래에 정자를 지었다. 이곳이 병풍 바위가 수정암(水晶岩)이다. 수정암에서 날려 떨어지는 폭포수는 아래의 너럭바위 위로 흘러 내린다.
이 널따란 반석이 요석암(瑤席岩)이다. 인소정 아래에는 물이 흘러 고이게 하는 정지를 마련하였다. 이 연못 가운데에도 입석(立石:선 바위)을 두었다. 이 바위가 지중암(池中岩)이다.
고산 선생의 원림을 말할 때에 흔히 보길도의 부용동만을 내세워 왔지만, 수정동과 금쇄동도 그에 못지 않은 원림의 하나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수정동 원림은 규모로 보면 부용동 보다 작지만 닫혀진 산중에 조경된 원림의 맛이 더 아기자기한 느낌을 준다. 더구나 이번에 확인된 금쇄동 원림은 규모나 형태가 부용동 원림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까지 문소동은 고산의 제각(추원각) 근처로 추정하고 있을뿐 정확한 위치를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하고 있으나, 이곳까지 밝혀지면 고산이 해남 현산에서 경영했던 원림의 특징과 함께 이곳에 지은 작품의 특징을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산고성 |
현산고성은 총 길이 1,472m의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서 고려 때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조성된 산성으로 추정된다. 동문․서문․북문 등 3곳의 성문터와 수구(水口)․망루지․건물지․제방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해남 윤두서 고택(海南 尹斗緖古宅) |
지정일시 : 1996. 2. 9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 372
시 대 : 조선시대
분 류 : 가옥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인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잠시 머물렀던 집이라고 전한다.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3재로 일컬어지며,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증손자이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큰아들인 윤인미(尹仁美)를 분가시키고 자신도 거처하기 위해 지었으나 해변에 위치하여 해풍이 심해 고산은 해남읍 연동에 기거하고 뒤에 증손인 윤두서가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건립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안채의 종도리 장여밑에 중수상량명문 '경술후백사십이년신미운운(庚戌後百四十二年辛未云云)'이 있는데 윤두서의 생존연간과 비교해보면 현종 11년(1670)에 지어 후에 윤두서가 살게 되었고, 순조 11년(1811)에 수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안채지붕의 회첨골 암막새에 적힌 명문 '동치십년신미구월중수(同治十年辛未九月重修)'를 근거로 할 경우 동치 10년은 1871년(순조 11) 신미(辛未)에 해당되므로 이 '신미'년이 안채 장여의 명문중의 '신미'년과 같은 해라면 현 건물의 건립연대는 윤두서의 사후(1715)인 1730년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
건물의 위치는 뒤로 북쪽의 망매산을 주봉으로 하였고 앞으로 남쪽의 바다로 훤히 트이며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뚜렷한 풍수지리상의 명당터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건립 당시에는 동쪽으로 지은 문간채로 들어가면 우측에 사랑채가 놓인, 전체 48칸 규모였다고 전하나 지금은 문간채와 사랑채는 없어지고 안채 13칸, 곳간채 3칸 및 사당과 헛간 등이 남아 있다. ᄃ자형의 안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고, 동쪽 광의 남측지붕은 앞면이 사다리꼴 모양인 우진각지붕이다.
바닷바람의 영향을 막고자 지붕을 높이 쳐들지 않고 푹 덮었으며, 벽은 방의 용도에 따라 회벽과 판자벽을 조성하였다. 조선 후기인 1700년대의 건축수법이 잘 보존되고 있으며 평면구성, 두리기둥과 구부러진 퇴보나 대들보의 견실한 결구등이 특이하다.
또 곳간채와 안채 사이에 출입통로가 나 있으며 안채의 한가운데에는 쌍여닫이 정자살문을 댄 대청을 두고 좌우익사(左右翼舍)에는 방과 주방들을 두어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문인화가의 옛집으로 조선 후기의 건축수법이 잘 남아있는 유서깊은 전통주택이며, 인근마을에 해남 윤씨의 기와집 10세대가 있어 더욱 옛스러운 정취를 풍기고 있다.
해남 윤탁 가옥(海南 尹鐸 家屋) |
지정번호 : 중요민속자료 제153호
지정일시 : 1984. 1. 10
소 재 지 : 전남 해남군 현산면 초호리 276
시 대 : 대한제국
종 류 : 전통건축
나지막한 야산을 뒤로하고 앞으로 들이 펼쳐진 남향 땅에 자리하고 있는 기와집으로 조선 말기의 호남지방 상류주택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안채에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에 광무10년 병오11월 경신 수주 동 12월 초3일 을축 신사시 상량 축좌(光武十年 丙午十一月 庚申 竪柱 同 十二月 初三日 乙丑 辛巳時 上樑 丑坐)'라는 기록이 있어 광무10년(1906)에 지었음을 알 수 있고, 사랑채와 별당채도 이 시기에 지었다고 한다.
ᄀ자형의 문간채, 안채, 별당채와 一자형의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동네길과 이어진 낮은 터에 一자형 대문간채가 있고, 대문간을 들어서면 문간마당에서 곧바로 사랑마당에 이르게 된다. 문간마당보다 높은 터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으며 사랑 뒷쪽으로 중문간채가 있다. 그 안에 안채와 별당채가 마주 보고 있다. 안채는 ᄀ자형으로 중부지방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ᄀ자로 꺾인 평면 중 남쪽 끝칸과 다음칸이 부엌이며 그 윗쪽에 2칸의 안방이 있고, 위로 마루방이 있다. ᄀ자로 꺾여서 3칸의 대청이 있고, 그 옆에 작은방 1칸이 있다. 사랑채는 一자형의 집으로 서쪽으로부터 약방과 골방이 앞뒤로 있고 그 옆에 사랑채 2칸, 대청 2칸, 방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약방 앞쪽에는 쪽마루가 있다. 별당채는 뒤집은 ᄂ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앙에 2칸의 대청이 있고, 대청을 중심으로 위․아래에 방이 1칸씩 있다. 또한 ᄂ자형으로 꺾인 부분에 방 1칸이 더 있다. 대문간채는 ᄀ자형 집으로 동쪽에 화장실이 있고, 그 옆에 2칸의 광과 솟을대문간, 광 그리고 헛간이 자리잡고 있다.
집에는 사랑마당과 안마당에 각각 정원이 꾸며져 있으며, 사랑채 앞의 석축(石築)은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장대한 맛을 풍기어 뛰어난 경치를 엿볼 수 있다.
대흥사(大興寺) |
대흥사는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번지에 위치한 유서깊은 사찰로 신라 진흥왕 5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문화재 자료 제 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흥사는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로 조선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었다. 지금은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로 해남․목포․영암․무안․신안․진도․완도 등 8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한다.
백두산의 영맥이 남으로 뻗어 내려 소백산맥 자락에 지리산을 만들더니 영암의 월출산을 지나 한반도의 최남단에 이르러서 융기한 두륜산 중턱에 이 가람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흥사는 대둔사(大芚寺)라고도 불리었으나 각종 사료에 근거 대흥사로 정착되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게 한 최대 원동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 수 존재한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제 4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 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 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 320호), 천불전(전남유형문화재 제 48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 52호), 서산대사 부도(전남유형문화재 제 57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 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 94호), 서산대사 유물(전남유형문화재 제 166호), 정조친필 서산대사화상당명(전남유형문화재 제 167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 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 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그 외 성보 문화유산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또한 서산대사를 비롯한 여러 명승의 부도(浮屠)와 탑이 있으며, 특히 서산대사의 유물과 이광사(李匡師)․김정희(金正喜)․이삼만(李三晩) 등 역대 명필들의 필적으로 된 각종 현판도 남아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 대흥사는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뭇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다
西山大師 遺物 중 敎旨 |
보물 135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의 여러 유물들 중에서 교지류도 2종 2점으로 2002. 12. 07일에 지정되어 있다. 이것은 임진왜란때 승군(僧軍)으로 나선 서산대사를 승군 대장 도총섭(都總攝)으로 임명한 교지와 정조가 서산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내용을 친히 적은 서산대사화상당명 총 2점이다. 하나는 1602년 선조가 묘향산으로 돌아가는 서산 대사에게 '일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자(一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者)'라는 최고의 칭호를 내린 것인데 이때에 정이품의 품계도 하사하여 그의 충절을 치하 하였다. 교지는 임진왜란 초 발급되었다가 화재로 소실된 서산대사의 도총섭 교지를 만력 30년, 즉 선조 35년(1602)에 재발급한 것이다. 또 하나는 1788년 대둔사 스님들이 서산, 유정, 처영 동 삼대화 상의 진영을 모시고 영혼을 제향할 사우의 건립을 건의하였을 때 정조가 내린 교지로서 이전에 선조가 내린 칭호에 더하여 '표충선사(表忠禪師)'의 칭호를 증여한 것이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을 받아 팔도도총섭이 되어 73세의 노령으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승군 1,500명을 모아 활약하는 등 전쟁에 공을 세웠다.
고산윤선도 보길도유적지 |
종 목 사적 368호
명 칭 보길도윤선도유적(甫吉島尹善道遺蹟)
분 류 원지
면 적 83,532㎡
지정일 1992.01.11
소재지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리 595외
소유자 완도군외3명
지금 보길도는 완도 군에 속해 있다. 완도는 삼국시대엔 백제 땅이었다 후에 신라가 점령하게 되는데 신라 흥덕왕 3년(828) 4월에 장보고(張保皐)장군이 지금의 완도읍 죽청리(竹靑里)와 장좌리(長佐里)청해진을 설치하면서 본격적인 해상 활동의 거점이 된다. 보길도는 노화읍 소속이었고 노화읍은 고려 현종 시절엔 영암군(靈巖郡)에 예속되어 있었다. 보길도는 완도에서 남서쪽으로 18.3km, 노화도에서 남서편으로 3. 8km떨어진 자리, 동경 126도 37분, 북위 34도 06분에 위치해 있다.
숙종 20년에는(1694)이래 영암군 소속이다가 고종 7년(1870)에 삼도진(三道鎭)이 설진(設津)되면서 보길도는 삼도진 소속이 되었다가 , 광무 원년(1897)에 완도군에 예속되는데 노화면, 보길면, 임도면으로 분할된다. 광복이후에 3개면은 노화면으로 1982년에 읍으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생김새가 쟁기에 끼우는 보습 형상이어서 보습의 어원인 '보고래 섬'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곳에 산이 빙 둘러싸여 있어 푸른 아지랑이가 어른거리고, 무수한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벌여 있는 것이 마치 반쯤 핀 연꽃과도 같아 부용동(芙蓉洞)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곳. 파도를 따라 한수 한수 떠밀려와 어부사시사로 머문 곳, 고산 윤선도 선생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곳.
보길도 12경
孤山 洗然池 : 부황리 / 月峰望遠雪 : 선창리
月松 廣寄巖 : 월송리 / 尤庵 嘆時巖 : 백도리
千丈壁 : 큰기미 / 甫玉 尖怪山 : 보옥리
松磯 黑鳴石 : 예송리 / 雪中山 冬柏 : 부용리
亭子動鼓岩 : 정자리 / 中里 白精砂 : 중리
卜生 風蘭香 : 예송리 / 松島 日沒海 : 정동리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선생(1587-1671)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치적 다툼으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선생이 고향인 해남(海南)에 있을 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강화도(江華島)에 이르렀으나, 인조(仁祖)는 이미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옮겨 적과 대항하다가 항복한 후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선생은 세상을 등지고 탐라(耽羅:제주도)로 가는 길에 이곳 보길도(甫吉島)의 산세가 수려함에 매혹되어 머물게 되었다 한다.
보길도는 선생이 인조(仁祖) 15년(1637) 51세 때 이곳에 들어와 여러 차례 출입을 하면서 별서(別墅)를 짓고 13년간 글과 정서를 닦으며 어부사시사(漁夫四時詞) 등 시가를 창작한 국문학의 산실(産室)이기도 하다. 격자봉(格紫峰) 밑에 낙서재(樂書齋)를 지어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고, 이 일대에 소은병(小隱屛), 낭음계(朗吟溪), 오운대(五雲臺), 독등대(獨登臺), 상춘대(賞春臺), 언선대(偃仙臺) 등 바위에 이름을 붙여 자연에 묻혀 자연과 대화하는 조경(造景)을 경영하였다. 또 낙서재의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곡수당(曲水堂)이라 하고, 낙서재 건너 산 중턱 절벽 위에 한칸 집을 짓고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하여 독서하며 선경(仙境)에 노닐었다.
계곡을 따라 동북쪽으로 내려가면 계간(溪澗)을 판석보(板石洑)로 막아 계담(溪潭)을 조성하고 물을 돌려 방지(方池)를 이룩하고 방지 옆에 단(壇)을 쌓고 세연정(洗然亭)을 지었다. 이곳이야말로 조선시대(朝鮮時代) 별서조원(別墅造園)의 아름다운 조영(造營)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문화재청)
보길도와의 인연 |
보길도에 고산 윤선도선생이 정착한 해는 1637(인조 15)년 선생의 나이 51세때였다. 당쟁에 밀려 향리인 해남에 낙향하여 있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우국충정에 불타던 선생은 임금을 돕기 위해 향리자제와 의병, 가복(家僕) 등 근왕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배편으로 강화도로 향했다. 그러나 수일이 안되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선생은 생각하기를, 호남으로 급히 돌아가면 영남으로 통할 수 있을 것이고 조정의 명령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었다.
그렇지 못하면 백이(伯夷)처럼 서산(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서산지미(西山之薇)>, 기자처럼 은둔하여 거문고를 타며 <기자지금(箕子之琴)>, 관녕처럼 목탑에 앉아 절조를 지키는 <관녕지탑(管寧之榻)>것이 나의 뜻이라 하고 급히 영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성하지맹(城下之盟, 남한산성 아래 삼전도에서 항복한 일)의 치욕이 있었다. 선생은 충분(忠憤)에 복받치어 다시는 육지에 오르지 않으려고 배를 띄워 남쪽을 향해 내려가서 탐라(耽羅:제주도)로 들어가려 하였다. 가는 길에 심한 풍랑으로 배를 보길도에 대고, 그 수려한 봉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배에서 내려 격자봉에 올랐다.
그 영숙(靈淑)한 산기(山氣)와 기절한 수석을 보고 탄식하기를,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이 족하다하고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 짓고 그대로 살 곳으로 잡았다.
부용팔경(芙蓉八景) |
고산 선생은 부용동 곳곳에 팔경을 선정하고 낙서재에서 글을 읽고 시를 짓는 틈틈이 부용동 산야를 소요했다. 부용팔경은 격자봉 기슭에서부터 청별 앞바다까지 내려오면서 산재해 있다.
제1경 곡수당의 연꽃(蓮塘曲水)
제2경 은병 석벽에 부는 맑은 바람(銀甁淸風)
제3경 세연정의 홀로선 소나무(然亭孤亭)
제4경 곡수당터의 늙은 동백(水塘老柏)
제5경 석실에 감도는 저녁 연기(石室暮煙)
제6경 격자봉을 두른 해운(紫峰歸雲)
제7경 솔재에 둥우리를 튼 갈가마귀 떼(松峴捷鴉)
제8경 미산에 뛰노는 푸른 사슴(薇山遊鹿)
유 적 지 |
고산선생은 일찌기 섬 속의 모든 경치를 평하기를 석실(石室)은 신선(神仙)에 비교한다면 당연히 그 중에 제일이 되고, 세연정(洗然亭)은 번화하면서도 청정한 낭묘를 겸비한 기구이며, 곡수(曲水)는 정결하여 스스로를 지키는 자라고 하였다.
유적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이 '가장유사(家藏遺事)'와 '보길도지(甫吉島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유적지에는 정자 등의 건물터와 대(臺 : 고산 선생은 바위 등 자연의 경승에 대의 명칭을 붙였음)가 25여개소에 이른다.
- 건물터
: 세연정(洗然亭), 낙서재(樂書齋), 무민당(無悶堂), 동와(東窩), 서와(西窩), 곡수당(曲水堂),
회수당(回水堂), 동천석실(洞天石室), 정성암(靜成庵), 서재(書齋), 연정(蓮亭)
- 대(바위)
: 승룡대(升龍臺), 하한대(夏寒臺), 혁희대(赫羲臺), 동대(東臺), 서대(西臺), 옥소대(玉簫臺),
오운대(五雲臺), 독등대(獨登臺), 상춘대(賞春臺), 언선대(偃仙臺), 곡수대(曲水臺), 석전대(石田臺)
, 곡산대(曲山臺), 유선대(遊仙臺),
- 바 위
: 소은병(小隱屛), 귀암(龜岩), 옥소암(玉簫岩), 혹약암(或躍岩), 사투암(射鬪岩), 무도암(舞跳岩),
유도암(遊跳岩),
- 다 리
: 비홍교(飛虹橋), 희황교(羲皇橋), 일삼교(日三橋), 유의교(有意橋), 상루교(上樓橋)
- 기 타
: 미전, 석애, 낭음계(朗吟溪), 격자봉(格紫峰),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목욕반(沐浴盤), 조산(造山),
석문(石門), 석제(石梯), 석난(石欄), 석정(石井), 석천(石泉), 석교(石橋), 석담(石潭),
황원포 (潢源浦) |
고산(孤山) 선생이 제주도로 항하던중 심한 풍랑(風浪)을 만나 처음으로 보길도에 배를 정박(碇泊) 했던 곳으로 어떤 바람이 불어도 맞지 않는 팔풍지대(八風之席)이다.
부용동원림 지역 |
부용동 일대는 파란 많은 정치사의 굴곡 속에서 고산 선생이 자신의 이상향으로 꾸민 천혜자연의 별세계였다. 이 아름다운 골짜기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가꾸며 누구도 부럽지 않은 풍류객의 삶을 누렸다. 이 원림의 복원을 위해 1989년 발굴조사를 실시, 세연정 부근과 동천석실(洞天石室)이 복원(1992년)되었다.
우리 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부터 신선사상을 배경으로한 별서정원이나 원림문화가 등장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국적인 양식으로 정착하였는데 남원의 광한루 원과 무등산 기슭에 자리잡은 양산보의 소쇄원, 그리고 고산 윤선도 선생이 은거한 보길도 부용동(浮蓉洞)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부용동원림은 자연을 개조하여 꾸몄지만 전혀 인공의 치를 드러내지 않고 자연 속에 하나가 된 조선원림의 백미로 꼽힌다.
세연정(洗然亭) |
세연(洗然)이란 기분이 매우 상쾌하고 단아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세연정은 회수담과 세연지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정방형 정자로 난방시설까지 갖추었으며 사방으로 문을 열어 젖힐 수 있는 개방된 구조였다. 세연정의 편액을 칠암헌(七岩軒)이라 하고 사방에 각기 다른 편액을 걸었는데 중앙엔 세연정(洗然亭),남쪽엔 낙기란(樂飢欄),서편엔 동하각(同何閣),동편엔 호광루(呼光樓)라 하였다. 세연정은 낙서재 터, 곡수당, 석실과 함께 보길도에 남아 있는 네 개의 고산선생유적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원형이 비교적 잘 보전된 대표적인 것이다
세연지(洗然池) |
우리나라의 정원유적중에서 조형처리가 가장 화려하고 광대한 연못으로 계곡의 물을 잘 이용한 연지(蓮池)이다. 세연지는 담(潭)을 이루고 있는데 연지(蓮池) 북(北)쪽의 인공적인 직선형과 남(南)쪽의 자연적인 곡선형으로 나눌수 있으며 연지(蓮池) 내부에는 암석과 축판등을 볼 수 있다. 세연지의 바닥은 모두 암반으로 처리해서 항상 맑은 물이 찰랑거리게 하였고 뱃놀이를 즐겼던 곳이다.
회수담(回水潭) |
세연정(洗然亭) 정원(庭園)의 일부(一部)로서 인공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네모꼴의 연못이다. 지중(池中)에는 인공축도(人工築島:방도)가 있고 무도암(舞跳岩), 유도암(遊跳岩), 자라바위(귀암:龜岩)가 있다. 5입3출(五入三出)의 수량조절물막이라는 독특한 흡수구,배출구가 있어서 수량을 알맞게 조절하였다.
동대(東臺) |
세연정의 좌측에 위치해 있는 축단으로 어부사시사가 불리워지면 여러사람이 어울려 군무(群舞)를 즐겼던 곳.
서대(西臺) |
동대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동대에서 행했던 군무(群舞)행위를 했던 곳으로 나선형의 3단이 남아 있다.
무도암(舞跳岩) |
회수담의 중앙에 신선의 세계를 상징하는 작은 섬과 춤바위가 배치되어 있다. 이 춤바위가 다름 아닌 아름다운 무녀가 긴 소매 깃을 너울거리며 춤을 추었다는 무도암이다.
사투암(射鬪岩) |
세연지의 가장자리에 있으며 이곳에서는 활을 쏘았던 곳으로 활을 쏠 때 용이하도록 발걸이를 만들어 놓았다.
혹약암(或躍岩) |
세연지에 있는 칠암 중 하나로, 『역경(易經)』의 건(乾)에 나오는 '혹약재연(或躍在淵)'이란 글에서 따온 말이다. 이는 "뛸 듯 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연못에 있다."라는 뜻으로 혹약암이 마치 뛰어나가는 힘찬 황소의 모습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고산선생은 이 바위위에 올라 (洗然池)를 두루 바라보며 시가를 읊었다 한다.
판석보(板石洑, 물막이석축) |
우리나라 조원 유적중 유일한 석조보로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다. 평소에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수면이 일정량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 세연지의 가장 기발한 특색은 계간에 판석을 축조하여 보를 막아 계담을 이루게 하고 그 물을 돌려 인공 연못으로 넣었다가 배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착상은 농민들이 개울에 보를 막아 논에 물을대는 방법을 이용한 것이다.계간을 막은 판석보의 길이는 약11m, 폭 2.5m, 높이1m쯤 되며, 활처럼 굽은 곡선을 이루고 있다. 축조된 판석 중 큰 곳은 길이 2.4m, 폭1.5m, 이고 작은 것은 길이 1.2m. 폭1.3m정도이다. 전체 두께는 약 30cm정도이다. 보의 구조는 양쪽에 벽처럼 판석을 견고하게 한 다음, 판석으로 위에 뚜껑 돌을 덮었다. 판석의 이음새는 ]형과 [형으로 판석 연결부분을 쪼아내어 결합시키고 구멍을 판 후 판석과 같은 재질의 돌 족을 박아 고정시켰다. 그래서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계원 공간 속의 돌다리가 되어 아름다운 조형을 이루고, 폭우가 와서 개울의 물이 넘칠 때는 폭포가 되었다. 우리 나라의 조원유적 속에 이와 같이 기발한 석조 보는 세연지에 있는 보가 유일하다. 허나 지금은 활처럼 굽은 곡선은 거의 일직선으로 되었다. 문화재관리국의 설계에 따라 완도군에서 보수공사를 주관하면서 이렇게 되었다.
비홍교(飛虹橋) |
정자 서쪽에 약간의 물이 고여 있는 곳에 거북 같은 암석(귀암:龜岩))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 비홍교(飛虹橋)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비홍교는 세연정에 이르게 하는 다리로 현재는 터만 남아 있고 잡석을 쌓아 세연정의 방단(方壇)과 연결해 놓았다.
동천석실 지역 |
동천석실(洞天石室) |
낙서재로부터 정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1km지점 해발 100~120m에 위치하고 있다. 동천석실로 접근하는 석문(石門), 석제(石梯), 석천(石泉), 석폭(石瀑), 석대(石臺) 및 희황교(복희씨) 등의 유적이 있다. 동천석실은 아슬아슬한 절벽 위에 세운 한 칸짜리 정자로 서책(書冊)을 즐기며 신선처럼 소요하는 은자(隱子)의 처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낙서재터를 잡던 처음에 안산(案山)을 마주하고 앉아 있다가 한참 뒤에 가마를 타고 곧바로 석실로 향해가서 황무지를 개척했다. 기교하고 굉한한 석문(石門), 석제(石梯), 석난(石欄), 석정(石井), 석천(石泉), 석교(石橋), 석담(石潭)은 모두가 인공의 손이 닿지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으로 그 모양에 따라 명명되었던 것이다. 이곳에 한간 집을 석함(石函)속에 짓고 명명하기를 동천석실(洞天石室)이라 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이곳을 사랑하여 부용동 제일의 절승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수시로 찾아와 골짜기와 격자봉 낙서재의 건물이 환하게 펼쳐지는 것을 구경하였고, 무릇 사건이 있으면 무민당에서 기를 달아 서로 호응하기도 하였다.
용두암(龍頭岩:삭도설비) |
용두암(龍頭岩 : 용두는 도르레의 방언)은 동천석실 앞에 있는 바위로, 두 바위 사이의 홈에 도르레 같은 시설을 설치하여 통속에 넣은 음식을 줄에 매달아 산 밑에서 손쉽게 날라다 먹었다고 한다.
차바위 |
동천석실 앞에 움푹 패인 바위는 윤선도선생이 차를 끓이던 장소라고 전한다. 그래서 이곳을 차바위라고 하는데 차상 다리를 고정할 수 있도록 몇 개의 홈을 파 놓았다. 선생은 이 곳에서 다도를 즐겼다고 한다.
석담(石潭) |
석담(石潭)은 부정형 연지(蓮池)로 암석을 파서 인공으로 만든 것이다. 석천과 석담 사이의 바위에 구멍을 뚫어 물이 통하게 하였다. 현재 발굴중이다.
희황교(羲皇橋) |
석담 위쪽에 8단의 계단이 조성되어 있는데, 석천과 석담 사이의 구멍이 뚫린 바위가 그 돌계단으로 올라가는 통로가 된다. 이곳을 희황교(羲皇橋)라고 하는데 희황은 중국의 황제 복희씨를 말하는 것으로 동천석실(洞天石室)을 천자가 사는 곳을 비유한 것이다.
낙서재 지역 |
낙서재(樂書齋)는 윤선도선생이 보길도에 정착하기 위해 제일 먼저 지은 살림집이다. 현재는 집자리와 무너진 돌담만이 남아 있는데, 발굴 조사 결과 사방으로 퇴를 단 큰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본채인 낙서재와 별도로 옆에 사랑채를 두고 두 건물 사이에 2개의 부속채를 지어 튼 ᄆ자형의 주거를 만들었다. 낙서재 뒤에는 소은병(小隱屛)이라고 이름 붙인 바위가 있다.지금은 낙서재, 무민당, 동와, 서와의 흔적만 남아 있고 귀암(龜岩)의 자리에 민묘 2기만 자리잡고 있다.
낙서재터(樂書齋) |
혈맥이 격자봉에서 세 번 꺾어져 내려오면서 소은병(小隱屛)이 있고 소은병 아래가 낙서재 터가 되었는데, 그 혈전(穴田)은 꽤높고 크다. 왼쪽은 양(陽), 오른쪽은 음(陰)에 속한다. 입술은 다소 끝이 뾰족하고, 오른쪽에는 맑은 물이 감돌아 흐르고 있다. 처음에는 초가를 짓고 살다가 그 뒤에는 접목을 메어 거실을 만들었으나 견고하기는 하였으나 새김질은 하지 않았다.
낙서재는 3칸에 사방으로 퇴(툇마루)를 달았으며, 칸살이는 매우 컸다. 방실(房室)에는 조정(藻井)을 갖추었다. 이 조정의 속명은 반자 이다.
이 곳에 앉아 골짜기를 내려다보면 절승한 모든 봉우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옛날에는 뜰 앞 섬돌과 약간 떨어진 거리에 조그만 연못이 있었는데, 공이 세상을 떠난 뒤 학관(學官)이 옮겨다 파서 지금은 난간 아래 위치하게 되엇다. 연못 좌우에는 화단을 쌓아 온갖 화초를 줄지어 심고 그 사이사이를 기암괴석으로 꾸며 놓았으며, 뜰 아래에는 화가(花架)가 있었다.
옛날의 낙서재는 소은병 아래 있었다 지금은 함몰되거나 없어진 자리에 흐릿하게 터전만 남아 있어 옛모습을 다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돌로 쌓은 석축이 있고 그 중심부에 돌층계 흔적이 남아 있고 반듯한 터전과 기단과 주초석 일부가 보여 어느 정도 윤곽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춧돌 한편에 기와편이 상당히 모아져 있다.
무민당터(無悶堂) |
무민당(無悶堂)은 낙서재의 남쪽에 지은 1칸의 사랑채로 '세상을 피해 산다.'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져 있다. 무민당 옆에는 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다고 한다. 현재는 연못지와 건물만이 남아 있다.
낙서재의 남쪽에 외침(外寢)을 짓고<한 간으로 사방에는 퇴를 달았으며, 간살이 매우 컸다.> 두 침소 사이에 동와(東窩)와 서와(西窩)를 지었다. (각기 한 간식인 데 사방으로 퇴를 달았다.) 그리곤 늘 외침에 거처하면서 세상을 피해 산다(遯世)는 뜻으로 무민(無悶)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공은 늘 무민당에 거처하면서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경옥주(瓊玉酒)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세수하고 단정히 앉아 자제들에게 각기 배운 글을 읽고 토론케 했다.
소은병(小隱屛) |
소은병은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고 4,5인이 앉을 만한 넓이의 바위다. 주자(朱子)가 은거한 무이산(武夷山)의 대은병(大隱屛)과 견주어 고산선생이 붙인 이름.
여기에 앉아 있으면 한 골짜기의 크고 작은 것부터 모든 것이 눈앞에 펼쳐지는데, 고리처럼 두른 병풍과 우거진 장송, 풍백들은 공이 가장 아꼈던 것들이다. 비록 차가운 엄동설한이라도 옷깃을 헤치고 북쪽을 향해 앉아 있노라면 가슴이 활짝 열리는 느낌을 갖게 하는 곳이다.
곡수당터(曲水堂) |
학관이 지은 것으로 남쪽 난간은 취적(取適), 서쪽 난간은 익청(益淸)이라는 편액을 달았는데, 정자는 세연정보다 다소 작지만 섬돌과 초석을 놓은 데는 정교함을 다했다. 초당 뒤에는 평대(平臺)를 만들고 삼면으로 담장을 둘러 좌우에 작은 문을 두고 있다. 그 중간에는 꽃과 과일나무를 심고, 담장 서쪽 끝에는 물이 흐르고 있는데 삼층의 층계는 지형에 따라 만들어졌으므로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다. 담 밑에 흐르는 물은 낙서재 오른쪽 골짜기에 정자 십여 보 아래 조그만 연못으로 흘러내리는데 이곳에 일삼교(日三橋)가 가설되어 있다.
부용동 팔경중의 一景인 「연당곡수」가 이곳이다. 지금은 논밭으로 변해버려 옛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곡수당 유적지는 개울가에 축조한 석축과 구 뒤편 언덕 아래로 쌓은 돌각담들이다. 개울가로 물을 담아 두었던 것으로 보이는 시설이 지표 아래로 조성되어 있다. 계곡 상류의 물이 수로를 따라 바로 흘러들게 되었는데 그렇더라도 연못으로는 너무 깊다. 현재 발굴중이다.
석전대(石田臺) |
고산 선생은 자연의 경승에 대(臺)의 명칭을 여러개 붙였다. 격자봉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등성이에 밭이랑 같이 생긴 암석을 말한다.
혁희대(赫羲臺) |
혁희대는 하한대보다 조금 높은데, 안으로는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밖으로는 황원포(黃原浦)를 대하고 있다. 이는 격자봉 다음가는 가장 높은 봉우리로서 정북을 향해 멀리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높은 곳에 올라 고향과 임금을 바라본다(陞皇倪舊)는 뜻을 취하여 명명하고, 궁궐을 연모하는 마음에서 붙인 것이다.
승룡대(升龍臺) |
승룡대(升龍臺)는 동천석실이 위치한 안산 동쪽 기슭에 있는 암석으로, 암석 위가 평평하여 수 십 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한다. 윤선도선생이 이 바위에 앉아 시를 읊곤 했다고 한다.
하한대(夏寒臺) |
하한대(夏寒臺)는 곡수당 북쪽의 작은 봉우리로, 큰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어 여름에 피서지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여름에 서늘한 곳이라는 뜻에서 하한대란 이름을 지어진 듯하다.
옥소대(玉簫臺) |
옥소대(玉簫臺)는 세연지 남쪽 산중턱에 있는 흰 바위이다. 이 바위 위에서 풍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면 세연정(洗然亭)에 앉아서 세연지(洗然池)에 비친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낭음계(朗吟溪) |
격자봉 서쪽 세 번째 골짜기로 심원(深遠)하게 돌고돌았는데, 수석이 더욱 기절하다. 옛날에는 술잔을 흘려보내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과 목욕반(沐浴盤)이 있었고, 송삼(松杉)이 울창하고 암벽(岩壁)이 깨끗하다. 공은 여가가 있을 때마다 죽장(竹杖)을 끌고 소요하고 영가(詠歌)하면서 돌아오곤 하였다 한다. (보길도지) 현재는 저수지 건설로 일부가 수몰됨
길이가 3.5km에 달하는 보길도 내에서 가장 긴 하천이 해발 430.3m의 격자봉과 동편의 406m 고지의 300m 높이로부터 발원하였다는 점과 개천의 물길은 곡수당과 방연지를 거쳐 흘러 내린다. (보길도 윤고산 유적 조사보고서)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란 왕희지(王羲之)가 문인들과 모여 술잔을 물에 띄워 놓고 시를 지으며 놀았던 놀이로, 경주의 포석정과 창덕궁 후원의 옥류천도 유상곡수연을 즐겼던 곳이다. 이 낭음계 골짜기에도 그러한 곳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저수지 건설로 수몰됨
목욕반(沐浴盤) |
목욕반(沐浴盤)이란 윤선도선생이 목욕하기에 적당한 암반을 골라 목욕반(沐浴盤)이라 이름을 짓고 종종 목욕을 하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는 저수지 건설로 수몰됨
서재(書齋) |
곡수 남쪽 두 골짜기 안에 옛부터 서재가 있었는데 지금은 빈터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에 학유공 정유악과 심진사 단, 이처사 보만, 안생원 서익이 학관 등 수명과 더불어 같이 고산선생에게 과업을 강학받던 곳이다.
연정(蓮亭) |
조산 안에 옛부터 연정이 있었는데 어느 때에 헐었는지는 모르나 지금은 그 지형이 낮아 논이 되었고, 희미하게 토대(土臺)가 있을 뿐이다.
조산(造山) |
주산에서 떨어져 내려온 은은한 산맥은 들판을 건너면서 차츰 날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안산봉인 중만 아래에 해당하는 것으로 높이는 두어 길에 지나지 않고 길이는 수십보이다. 사초가 매우 깨끗하고 위편에는 소나무, 노나무가 있어 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은연히 조그마한 병풍이 되어 안산의 기슭을 가리고 있어 인공으로 축조한 것 같다하여 조산이라고 하였다.
- 참고자료 -
해남군청 홈페이지(http://haenam.go.kr/)
문화재청 홈페이지(www.ocp.go.kr/)
해남윤씨가 홈페이지(http://my.dreamwiz.com/dangmea/)
고산 윤선도 홈페이지(http://myhome.naver.com/dangmea/)
고문서집성 三 - 해남윤씨편 (영인본 및 정서본) -
해남군, 해남군사, 1995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1, 창작과 비평사, 1997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5 「전남」, 돌베개
정구복, 고문서와 양반사회, 일조각, 2003
박준규, 유배지에서 부르는 노래(고산 윤선도), 중앙 M&B, 1997
박병호, 한국법제사고, 법문사, 1974
한국고문서학회, 고문서연구(학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