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6:9-13)
목사님들은 설교를 준비하실 때 ‘시작을 어떻게 할까?’ 하는 것을 가지고 고심을 많이 하십니다. 담임목사님도 그러시지요?
문학가들도 글을 쓸 때 첫 줄을 잘 작성하기 위해서 애를 많이 씁니다. 예전에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백설부”라는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김진섭이라는 분이 쓴 수필인데요, 배운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그 글이 시작이 아주 잘된 글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되지요.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뭐가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란 말인가?’ 저절로 다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응, 나도 그래’, 또는 ‘요즘은 안 그래’하면서 또 저절로 다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작이 이렇게 중요한데, 주기도문은 어떻게 시작될까요? 아니,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를 어떻게 시작하라고 가르치주셨을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시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 먼저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런데, 찬양하며 불러야 합니다.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하나님을 어떻게 찬양해야 할까?’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라앉히고 잘 생각하면,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입니다.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로 찬양해도 부족하게 여겨지는 분입니다.
무엇보다도 나같은 죄인 구원해 주신 것,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예수 믿게 해 준 것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지옥 가지 않게 해 주신 것,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이 찬송의 4절이 어떻게 끝납니까?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예수 믿다가 중간에 믿음의 길에서 빠져나간 사람들 참 많습니다. 지금까지 잘 믿고 있는 사람들보다 믿음을 버린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믿음의 길을 걷게 하고 있는 것,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이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코로나 사태, 그 어려운 가운데서 2월을 잘 지나게 주신 것,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일은 삼일절 102주년 기념일입니다. 삼일절은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해야 하는 날입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잘 인도하시고 복 주셔서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삼일운동은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일으켰다’ 이런 말을 많이 들으실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말을 좀 강하게 하면 교회가 없었으면 삼일운동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또는 일어났더라도 그렇게 왕성하게 퍼져 나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민족을 위해 그렇게 크게 봉사할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기도문,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찬양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더욱 더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이름을 말할 때 앞에 꼭 찬양하는 말을 꼭 붙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크게 혼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해진 탈북민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다 좋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라니까 마지못해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마지못해,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서는 안 됩니다. 진심으로 담아,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지요, 우리 교회에서는 매주 주일예배를 드릴 때 주기도문송을 부릅니다. 오늘도 불렀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이렇게 시작되는 주기도문송을 부를 때, 뜻을 생각하지 않고 건성으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 가득 차야 됩니다. 그래야 그 찬양이 살아있는 찬양이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주기도문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이거, 부끄러운 이야기인데요, 저는 오랫동안 “하늘에 계신” 이 말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 멀리 계시네. 나는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있는 곳이 다르네.’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거리가 먼 것을 말할 때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라는 말을 씁니다. 시편 103편 12절 “동시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하늘과 땅은 동이 서에서 먼 것보다 더 멀지’ 했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나와 거리가 있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관계가 그렇게 밀접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여러분,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할 때 “하늘”은 공간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말입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경주석을 보았는데 거기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은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다시 한 번 읽어 드립니다. “하늘은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을 당신의 권능과 지혜로 통치하시며 심판하시는 초월적인 분임을 강조하는 이름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 무슨 뜻입니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니까 “무소부재, 하느님의 적극적 품성 가운데 하나로, 그 존재와 섭리가 있지 않는 곳이 없이 어디에나 다 있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더군요.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하늘에만 계신 분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그 다음에 “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 아버지여” 주기도문에는 “우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지요. 9절, “우리 아버지여” 11절,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세 번이나 나옵니다. 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모두 여섯 번 나옵니다. “나”라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나의 이익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럴 때가 많습니다. 지나치게 그렇게 하는 것을 이기주의라고 하지요.
신학생 때 기독교교육학 시간에 사용한 참고서적 가운데「My Dear Ego」라는 영문서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나‘라고 번역할 수 있겠는데요, 그 책의 앞부분에 이런 그림이 있었습니다. 가운데 원을 중심으로 지면이 네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 네 칸에 각각 그림이 하나씩 그려져 있었는데 별, 뿔 달린 황소 머리, 넝쿨, 거북이였습니다. 그리고 가운데 원에는 개집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별은 인기입니다. 자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인기를 아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뿔 달린 황소 머리는 폭력입니다. ‘왜 나를 따르지 않는 거야?’ 하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많다는 것이지요. 넝쿨은 남을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넝쿨은 줄이나 막대기가 없으면 올라가지 못하지요. 거북은 기회주의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면 머리를 쏙 내밀고, 불리하면 얼른 들여밉니다. 모두 건강하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가운데 있는 개집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그렇게 하다보면 결과가 모두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기 좋아하던 사람, 인기 떨어질 때 정말 견디기 힘들지요. 그 때문에 마약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학생 때 그 그림을 보면서 ‘아, 나는 나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남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 조심해야 하겠구나!’ 느꼈습니다. 깊이 느꼈기 때문에 그것이 50여 년 전 일인데 다시 생각나서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나 대신 우리’ ‘나 보다 우리’,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심리학자들이 ‘이 사람의 심리상태가 얼마나 건강한가?’ 판단하기 위해서 쓰,는 방법들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상담대상자가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하도록 아주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 줍니다. 심리학자는 상담대상자를 잘 응대를 해 주면서 ‘이 사람이 나라는 말을 몇 번 사용하나?’ 그것을 셉니다. 그 숫자에 따라 ‘이 사람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위험한가?’ 등급이 정해지는 데요, 지금까지 제일 위험한 기록은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될 수 있으면 ‘나’ 대신에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세요.
하나님은 분명히 ‘나의 하나님’입니다.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니고 나의 하나님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형편을 아시고, 나를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우리 모두의 형편을 아시고, 우리 모두를 불꽃 같은 눈으로 살피시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 “아버지” 신약성경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곳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모두 열다섯 번 나오는 데요, 특히 바울 서신에 많이 나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3절,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빌립보서 2장 11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2서, 유다서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경주석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데 아버지란 말이 아주 적합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부 여성신학자들이 반발을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어머니여’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국에 그렇게 하는 여성신학자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선교방송의 영어 프로그램에서 어느 여자분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란 일이 있습니다. 영어 주기도문은 “Our Father in heaven”, 이렇게 시작되는 데요, “Our Father & Mother in Heaven”라고 하더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뭐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소망과 깊은 신뢰가 담겨 있는 말입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6.2 5때 일이 생각났습니다. 6.25 때 저희 집은 피난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 때 서울을 너무 빨리 빼앗겼고 한강 다리를 일찍 끊어 놓았지요. 피난 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바로 이 동네에서 지내면서 인민군에게, 그리고 팔에 빨간 완장을 찬 동네 좌익들에게 참 많이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1.4 후퇴 때는 얼른 피난을 나갔습니다. 우리집이 오형제이고 제가 둘째인데 1951년 겨울이 엄청나게 추웠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의논하기를 이 추위에 저 올망졸망한 다섯을 모두 데리고 나갔다가는 모두 얼어죽거나 굶어죽기 쉽다고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피난을 나가고, 어머니는 나머지를 데리고 남기로 했습니다. 어느 한쪽이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집안은 이어져야 한다고 그런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둘이서 피난을 나갔습니다. 첫날, 꽝꽝 얼어붙은 한강을 얼음 위로 건너서 과천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계속해서 남쪽으로 걸어 내려갔습니다. 추위 속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어요? 그러나 저는 염려할 것이 없었습니다. 잠자리, 아버지가 해결하고, 먹을 것, 아버지가 구해오고, 저는 그저 아버지 손만 꼭 잡고 있으면 되니까요. 그렇게 해서 충청북도 옥천까지 내려갔다가 서울이 다시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그 때 일을 돌이켜 볼 때마다 저는 ‘아, 아버지와 같이 가니까, 아버지 손을 잡고 가니까 피난길도 소풍길이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믿고, 하나님 의지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면 인생길도 소풍길입니다. 왜 천상병 시인의 잘 알려진 “귀천”이라는 시가 있지 않습니까?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렇게 끝나는 시인데요. 하나님 꼭 잡고 걸으면 이 시 그대로 이 세상살이가 아름다운 소풍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기도문을 드릴 때마다, 주일예배에서 주기도문송을 부를 때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할 때, ‘하나님, 나는 하나님 손을 꼬옥 잡고, 하나님 의지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겠습니다.’ 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평안해질 것입니다. 든든해질 것입니다. 하나님 손을 더 꼭 잡고 싶어질 것입니다.
여기 계신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온라인으로 예배 드리고 있는 성도 여러분, 한 분도 빠짐없이 그런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은 기도의 순서를 가르쳐줍니다. 그 순서는 찬양, 간구,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입니다. 찬양에 대해서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간구인데요, 보세요, 하나님을 위한 간구가 먼저 나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기를 바랍니다’는 뜻이지요.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뜻이지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당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한 간구가 나오고, 그 다음에 우리의 필요가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샆하여 주수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미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십소서“
주기도문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무심히 외우다가, 주기도문은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간구하고, 그 다음에 우리를 위하여 간구한다, 주기도문의 순서가 이렇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의 기도생활을 돌아보세요. 우리의 기도는 그저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이것도 주세요’ ‘하나님, 저것도 주세요.’‘ ‘하나님, 그것도 주세요.’ “하나님, 저 멀리 있는 그것도 주세요.
여러분, 그렇게 하지 마시고요, 하나님이 필요한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그것을 위해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님에게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합니다. 어른이 되면 아니지요, 부모님이 무엇이 필요한가 살펴서 그것을 해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의 기도를 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필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채워드리려고 하는 어른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첫 번째 간구는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성경과 찬송가 표지 바로 다음에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있는데요, 밑부분을 보면 ‘새번역 주기도문’ ‘새번역 사도신경’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너무 옛날 문장으로 되어 있다. 손질할 필요가 있다.’ 해서 손질을 한 것인데요, 일부 교회들에서는 이 새번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새번역 주기도문은 시작 부분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밑에 작은 활자로 ‘이것은 이런 뜻이다’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버지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 부분은 우리에게 엄숙한 질문들을 던져줍니다. 어던 질문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감리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김을 받게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또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이 일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일인가?’ 물어 보야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절에는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15장, 16장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시고 17장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셨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인데 모두 사순절에 힘써 읽어야 할 말씀들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요한복음 17장의 1절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최후의 기도를 이렇께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제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며 마칩니다.
저는 라디오 PD 생활을 오래했는데, 1960년대에 방송에 대한 교육을 받을 때 “무슨 프로그램을 만들든지 1분 안에 청취자의 마음을 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청취자는 다이얼을 돌린다.” 이렇게 배웠습니다. 시작이 매우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1980년대에 와서는 “무슨 프로그램이든지 30초 안에 청취자의 마음을 끌어야 한다”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급해졌으니까요. 지금은 ‘10초 안에 마음을 끌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시작 부분에서 PD가 청취자들의 마음을 꽉 잡으려고 애쓰듯, 하나님의 마음을 꽉 잡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시작 부분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꽉 잡으면 하나님이 그 다음 부분도 잘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빨리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목사님, 기도는 꼭 그렇게 해야 해요? 그저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입에서 나온 대로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아요?“ 하실지 모르겠는 데요, 어느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잘 들어 보세요. “설교는 어렵고 기도는 쉬운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나는 반대입니다. 설교보다 기도가 훨씬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고,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준비 보다 기도준비를 더 세심하게 합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둘째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에 담임목사님께서 사순절 첫째 주일 설교 중에 사순절에 힘써야 할 것이 둘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절제입니다. 도 하나는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가? 기도라고 하셨습니다. 절제와 기도에 힘쓰면서 사순절을 보내는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모범답안, 주기도문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는 기도에 힘써서 기도생활의 진보, 기도생활의 성숙을 이루는 사순절이 되기를 우리를 위하여 고난의 길을 가고 계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 저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잊었던 것을, 그래서 빼놓았던 일이 많았던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더욱 힘써 찬양하게 하옵소서. 주님, 나 보다 이웃을, ‘우리’를 먼저 생각하며, 중요하게 생각하며 기도하게 하옵소서. 내게 필요한 것,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먼저 구하게 하여 주옵소서. 오 주님,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할 우리가 그 반대의 일을 많이 했음을 또한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힘쓰는 저희가, 그리고 굪회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