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앞에 바라 보이는 흑성산 바로 넘어엔 1987년 8월 15일 개관한 독립기년관이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에서 찻길로 11km 거리에 유관순 열사 생가가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에서 찻길로 7km 거리(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45)에 어사 박문수 생가 있습니다
은석산 정상 부근엔 박문수 묘가 있습니다
어사 벅문수 생가터(천안시 동남구 북면 은지리 45번지)
어사 박문수 생가터에 고령 박씨 종중재실 입니다
어사 박문수 동상(생가터 알)
1285년에 편찬된 삼국유사에 기록된 백제의 첫 도읍지 천안 직산읍
오늘 걷는 금북정맥 산행은
1285년에 편찬된 삼국유사(
기록된 역사의 현장 ---위례산성---을 찾아서 걷는 뜻깊은 산헹이 될것으로 생각 됩니다
부소령(扶蘇嶺)(또는 부수문이 고개,서낭당이 고개,부소문령(扶蘇門嶺), 부소치(扶蘇峙)은
천안시 동남구 북면 운용리와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를 연결하는 고개(부소문이 고개)는 해발 280m로
백제 온조왕이 처음 도읍한 위례성에 대해서 광주 위례성설과 직산 위례성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직산 위례성설의 위례성과 가까운 곳으로 온조왕이 처음 도읍하였을 때
이곳에 문을 세웠기 때문에 부소문이 고개라고 한다고 합니다.
부소령 표지석 아랫 부분에
백제 첫 도읍지
하남 위례성
직산 백제시대
(BC 18~6년 13년) 이라고 쓰여 있군요
BC 18~6년 13년이란 온조왕이 직산에서 13년을 머물렀다는 내용 입니다.
과연 온조왕이 백제의 첫 도읍지라하는 직산에서 13년을 머물렀을까요
부소령 고갯마루에 위례성에 관련된 안내글이 있군요
안내글 끝부분에
삼국유사와 조선시대 역사서에는 백제의 초도지로 직산의 위례성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를 근거로 위례성을 백제의
초도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고고자료로서 확인이 불가능한 실정이며 위례성은 주변에 위치한
성거산성 등과 함께 직산일대를 방어하는 배후산성으로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다고 고고학계에서는 정설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1145년부터 136년이 흐른 1281년에 편찬된 ---삼국유사---에서는
지금의 천안 직산읍이 위례성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례산(위례산성) 정상에 설치한 안내문 입니다
백제의 건국에 관한 내용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온조왕조의 온조와 비류 설화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부여계(夫餘系)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의 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건국한
근거지가 위례성이라고 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하남의 땅은 북쪽은 한수(漢水)가 흐르고, 동쪽은
고악(高岳)을 의지하고 있으며, 남쪽은 기름진 옥토를 바라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건국한지 13년만에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므로 처음에 정착한 위례성의 위치는 하북, 즉
한강 북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 위치는 서울 북한산 동쪽 산기슭이나,
북한산을 배경으로 한 세검동·평창동계곡 일대 또는 상계동·중랑천 방면을 비정(比定)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
하북위례성에서 한강 남쪽으로 천도한 곳이 하남위례성이다. 천도 시기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전 6년(온조왕 13)이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후대의 일로 보인다
B.C. 18년, 백제 온조왕은 한강 유역에 국가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으며, 온조는 B.C. 5년(온조왕 14)에 도읍을
한수 이남인 하남 위례성으로 옮겼습니다
처음 정했던 도읍은 동으로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이들이 영토를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없어 도읍을
옮길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B.C. 6년 7월에 한산의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겼으며 9월에 궁궐을 세운 후 이듬해인 B.C. 5년 정월에 천도하였다고 한다.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가장 오래된 설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에
근거한 직산설(稷山說) 등 여러 견해가 제기되었지만 백제초기의 도성과 연
관된 유적·유물의 조사가 빈약하므로 아직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은 백제 초기 고분밀집지대인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가락동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몽촌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비정하였다. 몽촌토성은 남북 길이 750m, 동서 길이 500m, 전체 둘레
2,285m, 넓이 약 44만㎡에 이르는 토성이다. 성은 본성(本城)과 이보다 작은 외성(外城)으로 되어 있다.
성 외곽 둘레에는 방어용 하천인 해자(垓字)시설과 성의 방비를 위한 목책(木柵) 구조물이 있음이 밝혀졌고,
내부에는 백제 초기의 움집터와 기와 및 토기를 비롯한 각종 생활도구들이 출토되었다
1979년, 1983년, 1989년, 2012년, 석촌동고분군의 항공사진
석촌동고분군
풍납토성의 항공사진(1972년)
웅진시대의 관련 탐방 자료는
(역사유적지를 찾아서~ 공주편에 많은 자료가 올려저 있습니다)
사비시대의 많은 관련 자료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웅진시대(부여)편에 많이 올려저 있습니다)
고려 인종 23년인 1145년 김부식 외 10인에 의해 편찬된 삼국사기 기록에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한수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히를 보좌로 삼아 나라이름을 십제라 하였다 합니다
고려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위례성---이란 이름만 있고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1145년부터 136년이 흐른 1281년에 편찬된 ---삼국유사---에서는
지금의 천안 직산읍이 위례성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초도지에서 13년을 보내고 온조왕 14년에 도읍지를 천도하였다고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무너진 풍납토송의 서성벽에서 ---청동세발솥--- ---금귀걸---이 등이 출토되면서
땅속에서 숨쉬고 있던 백제의 윤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 냅니다
초도 위례성은 한강 이북에 위치한 대체로 중랑천 일대로 추정하고 있으며
하남 위례성은, 475년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 왕도로서 기능하였다.
오늘은 금북정맥 3구간을 걷는 산행 입니다
2구간엔 부소산이 있습니다. 부소산 해서 부여의 부소산과 혼돈을 하게 됩니다. 금북정맥에 소재한 부소산은
천안시 서북구 입장면 양대리, 도림리와 동남구 북면 대평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천안 시가지를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해발 459m의 산 입니다
조선 지형도(朝鮮地形圖)에 북면 운용리와 입장면 양대리 경계에 부소령이 위치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부소산이라는 명칭은 백제 시조 온조가 도읍지인 위례성이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에 있었다는
직산 위례성설과 관련하여, 이 산이 위례산 바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 합니다
금북정맥 2구간은 결석으로 산행을 쉬는 바람에 부소산엘 가보지는 못하였지만 선답자의 산행기에
부소산 정상엔 아래 사진속 정상처럼 백제에 관련된 아무런 안내 표지판도 없이
잡나무와 잡초로 뒤덮여 초라한 봉우리라고 합니다
천안 직산읍이 백제의 초도지라 입방아 찌으며
산봉우리에 부소산이라 명칭을 갔다 붙이면서 어쩌고저쩌고하면서 혼란만주는군요
1285년에 편찬된 삼국유사에 기록된 백제의 첫 도읍지 천안 직산읍
금북정맥 3구간 출발지 부소령(부소문이 고개)을 출발 합니다
이정표 기둥에 부소령을 부소문이 고개라 부르기도 한다는군요
부소령의 사각정자의 쉼터와 여러 안내문들~
부소령 터널이 개통되면서 끊어졌던 금붇정맥은 다시 맥을 이어지게 되었군요
금북정맥 마루금 안내판
금북정맥 마루금에 오르기 위해 부소령에서 완만하게 오름막을 오릅니다
부소령을 뒤돌아 보고~
뒤돌아본 부소령 사각정자 쉼터 입니다
부소령 터널 위로 이어지는 금북정맥 마루금 입니다
진행 방향~
또 부소령을 뒤돌아 보고~
진행 방향~
뒤돌아 보고~
진행 방향~
힘들지 않는 산행길 육산을 걷고 있습니다
목계단을 오릅니다
뒤돌아 보니~
금북정맥상에 소재한 부소산이 거무스레하게 조망되는군요
백제 초도 도읍지는~
백제 온조왕은 B.C. 18년 한강 유역에 국가를 세우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 이때 백제의 도읍으로 삼은 곳은
위례성이었다. 그런데 온조는 B.C. 5년(온조왕 14)에 다시 도읍을 하남 위례성으로 옮겼다. 따라서 초도
위례성은 한강 이북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체로 중랑천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직산
위례성설이 삼국유사(三國遺事)등에 기록되어 있어 초도지를 직산에 위치한 위례산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하남위례성은 이후 한성으로 불렸으며 475년ㅜ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길때까지 왕도로 기능하였다
백제의 건국에 관한 내용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온조왕조의 온조·비류 설화 속에 기록되어 있다.
온조왕이 B.C. 18년 한강 유역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으로 삼은 곳은 위례성이었다. 내용을 보면, 온조가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도읍지를 물색하였는데, 온조는 한수의 남쪽, 즉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미추홀(인천)에 도읍을 정했던 비류의 세력이 결국 온조에 합류하여 백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도읍의 형세는 북으로는 한수(漢水)를 띠고, 동으로는 고악(高岳)을 의지하였으며,
남으로는 옥택(沃澤)을 바라보고, 서로는 대해(大海)로 막혀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온조는 B.C. 5년에 도읍을 한수 이남으로 옮겼다. 처음 정했던 도읍은 동으로 낙랑이 있고,
북에는 말갈이 있어 이들이 영토를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없어 도읍을 옮길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B.C. 6년 7월에 한산의 아래에 책(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民戶)를 옮겼으며,
9월에 궁궐을 세운 후 이듬해인 B.C. 5년 정월에 천도하였다고 한다.
백제가 처음 도읍으로 하였던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온조가 초기의 도읍을 위례성에
정했다가 다시 한수(漢水) 이남으로 옮겼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슷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다만 이들
도읍이 있었던 각각의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지역이 거론되고 있다. 먼저, 처음 도읍을 두었던 곳으로
비정되있는 지역을 살펴보면, 직산과 한강 이북 지역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온조왕이 처음
도읍으로 삼았던 위례성을 한강 이북에서 구하고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중랑천 일대로 보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리고 B.C. 5년에 한강 이북에서 한강 이남으로 왕도를 옮겼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때 하남 위례성은 한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는데, 그 위치는 경기도 광주를 비롯해 남한산성, 풍납토성,
몽촌토성 등에 비정되고 있다. 이 외에 한산을 도읍지의 하나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이 견해에서는 남한산
또는 남한산성에 비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풍납토성의 발굴 성과를 근거로 볼 때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또한 왕도 안에 남성(南城)과 북성(北城)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풍납토성이 북성,
몽촌토성이 남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이 왕이 일상적으로 거처하였던 왕성이고,
몽촌토성은 군사적 목적이나 별궁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위례성의 명칭은 천안 성거산에 위치하고 있는 위례산성에 남아 있다. 그로 인해 오래 전부터
이곳 위례산성은 백제 온조왕 대의 초도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직산 위례성설의 근거가 되는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 삼국유사의 기록에 처음 보인다. 왕력표의 백제 온조왕조에서 도읍이 위례성인데 사천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직산이고, 온조왕 14년에 도읍을 한산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광주라는 것이다. 기이편(紀異篇) 남부여
전백제 북부여 조에서도 미추홀은 인주이며, 위례성은 직산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 시대에 들어서
1429년(세종 11)에는 온조왕의 사당이 직산 지역에 지어지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지역 주민들을 중심으로
온조왕에 대한 다양한 추모 행사가 행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직산 위례성이 백제 초도지인가, 아니면 백제가 언제인가 이곳에 도읍을 옮겼던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그리고 직산 초도설을 실증적으로 확정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논증이
필요하다. 백제는 B.C. 18년에 위례성에 처음 도읍을 정한 후 다시 B.C. 5년 정월에 하남 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따라서 직산 지역이 초도지일 경우 도읍으로서 기능한 기간은 불과 13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기원 전후한 시기에 백제 지역에는 마한 54국이 존재하였으며, 천안 지역의 경우에도 유력한 마한의 한
소국(小國)이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고 있다. 천안 지역에 비정되는 소국으로는 마한 연맹체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目支國)이 있다. 그리고 목지국이 백제에 병합된 시기는 대개 고이왕 대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왕 26·27년 조에 마한을 병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병합된 마한은
사실은 목지국이며, 그 시기도 고이왕 대라는 것이다. 즉,
온조왕 대의 기록이 후대 사실의 소급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B.C. 5년의 천도 이유가 낙랑과 말갈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그렇다면 남쪽에서 오히려 그들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북쪽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다. 따라서 초도로서의 직산설을 제기하는데 있어서는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과제를 지니고 있다.
천안 향토 사학계에서는 직산 초도 위례성설을 정립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여 왔다. 직산 초도 위례성
인정하는 근거는 삼국유사를 비롯해 조선 시대 각종 지리지 등에 기록된 직산 초도에 관한 내용, 위례성의 명칭
가진 산성의 존재, 백제 건국의 10대 공신으로 일컬어지는 조성과 전섭의 후예가 천안 지역에 거주하였다는 점,
여러 고고학적인 사실[유물, 적석 유구 등] 등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온조왕조의 위례성 주변 지형지세에 대
설명이 직산 지역과 부합된다는 점도 주목되었다. 또한 온조왕이 도읍을 정할 때 올랐던 부아악은 용인의
부아산이며, 한수는 안성천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천안시에서는 초도지로 전해지고 있는 위례산성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학술 조사와 고고학적인 조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위례산성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989년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때 간단한
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1995년 5월부터 7월에 걸쳐 본격적인 시굴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그 결과를
토대로 1996년 9월부터 11월에 걸쳐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위례산성의 축조 시기는 대략 4세기
말에서 5세기 전반 경으로 비정되었으며, 내부에서 삼족 토기편 등 다수의 백제 시대 유물이 확인되었다. 그러
당시 조사를 통해 성벽의 초축 시기나 산성의 운용 시기 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확보되지 못했다. 이후
추가로 2009년 11월 5일부터 2010년 5월 20일, 그리고 2010년 9월 10일부터 2011년 1월 9일 두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조사 결과 성벽의 초축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되었으며, 고려 시대에
수축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렇지만 내부에서 백제 시대 유물이 다수 확인되었기 때문에 백제 시대 건물지 등
관련 시설이 분포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발굴 조사 결과로 볼 때 석축성벽의 초축 시기는
통일 신라 시대로 확인되었지만 위례산성이 언제부터 조영되어 사용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리고 산성으로서의 위례산성과 도읍으로서의 위례성을 동일지역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풀어야 할 과제이다.
현재 지역 연구자들이 천안 위례성을 백제 초도지로 비정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학계에서는 위례성이
초도지(初都地)로 불리게 된 배경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천안 지역에 위치한 위례성이 실제 백제 초도지일 가능성이다. 다만 백제 초도가 13년간 경영되었다고
할 경우 고고학적인 자료를 찾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할 수 있는 문헌 기록도 미흡하여 추가적인
자료의 확보가 필요하다. 둘째, 목지국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다. 실제로 안성천 주변에는 소국의 도읍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명 등이 남아 있다. 셋째, 공주 천도 과정에서 문주왕이 일시적으로 이곳에 머물렀을
경우이다. 문주왕은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사망한 후 왕위에 올랐는데, 문주왕이 즉위한 지역이 한성이
아니라 직산 위례산성이며, 이곳에서 한성의 상황을 살피면서 웅진으로 천도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아신왕 대에 고구려 광개토왕에 밀려 일시적으로 이곳으로 도읍을 옮겼을 가능성인데,
구체적인 자료는 제시되고 있지 않다. 끝으로 사민(徙民)과의 관련성이다. 웅진 천도 이후 문주왕은 한강 북쪽의
민호(民戶)를 웅진 북쪽에 사민시켜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였다. 이때 사민된 한성인들이 정착하게 되면서,
백제 초기의 왕도명이었던 위례성을 지명으로 칭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직산 위례성설의 배경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 분명한 기록이나 고고학적인
자료가 확인되고 있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직산 위례성설이 증명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료의 축적과 연구가 필요하다
1285년에 편찬한 삼국유사(지은이, 일연)에 기록된 백제의 첫 도읍지로 알려진
천안 성거산 위례산성을 걷는 금북정맥 구간 2부로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