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왕후 한씨 태조의 첫째 부인이자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의 본관은 안변이며 증영문하부사 한경의 딸이다. 그녀는 이성계가 아 직 벼슬을 하지 못하던 때에 영흥으로 시집와서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씨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등의 6남과 경신, 경선 등 2녀가 있었다 조선이 개국된 다음날 한씨의 시호는 절비로, 능호는 제릉으로 추존되었고 1398년 정종이 즉위한 후에는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다. 신의왕후의 제릉은 현재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있다. 능을 개성에 둔 것은 그녀가 조선 개국 이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신덕왕후 강씨
태조의 둘째 부인이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본관은 곡산이며 판삼사사 강윤성의 딸이다. 그녀는 신의왕후 한씨 와는 달리 권문세가에서 태어났으며, 태조의 집권 거사에도 참여했을 뿐 아니라 조선 개국 이후에도 배후에서 막강 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태조는 그녀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삼기까지 한다. 강씨 소생으로는 '제1차 왕자의 난'때 방원에게 살해당한 방번, 방석 형제와 경순공주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뒤에는 강씨는 현비로 책봉되었으며 1396년 사망 후에 시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하지만 이성계가 죽은 후에 태종은 몇 차례에 걸쳐 이장을 단행했으며 그녀에 대한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2백년 뒤인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강씨는 다시 종묘에 배향되고 왕비의 기신제도 복구되었다. 송시 열이 명분주의에 입각한 유교 이념을 강조하면서 강씨가 이성계에 의해 정비로 책봉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릉이 왕비 의 능으로 조성된 점을 일깨웠던 까닭이다.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 있는 정릉은 현재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안암동이었으나 묘역 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릉동 자리로 정해지게 되었다. 능이 정릉으로 이장된 것은 이성계가 죽은 후 태종9년 때의 일이다. 태종이 강씨의 무덤을 여러 차례 이장한 것은 이성계가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한 분풀이 였다.태종은 능을 옮긴 뒤에도 정자각을 헐고 십이지신상 같은 석물을 실어다 돌다리를 만드는 등 강씨에 대한 노골 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1차 왕자의 난, 그때문에 정릉은 현종때 복구될 때까지 2백여 년 동안 주인 없는 무덤으로 버려져 있어야 했다. 태조 이성계의 아들은 모두 8명으로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이 6명,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 2명이다. 이들 8명의 형 제들은 조선 개국 이후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벌여 노년의 이성계를 아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한씨 소생의 형제들이 단합하여 강씨 소생의 왕자들을 참살한 '제1차 왕자의 난'은 조선 개국의 역 사를 피로 얼룩지게 만든 첫번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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