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의 역사
문화인류학과 202011167 최상원
철원의 지명 유래
- 철원이라는 이름은 쇠두레라는 말을 한자로 표기한 지명으로서 쇠가 많이 나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선사시대
선사시대 때부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이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1978년에 이웃 지역인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굴, 조사되어 수십만 년 전에 한탄강을 끼고 인류가 거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최근에는 철원군 내의 한탄강변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신석기 시대
신석기시대에도 사람이 거주했음은 당시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고 있음을 보아 짐작할 수 있으며, 청동기시대에는 토성리의 토성(土城)과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고인돌을 통해 이 지역에 성읍국가(城邑國家)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유물로 민무늬토기·간돌도끼·간돌칼·돌화살촉·별도끼·돌창 등이 철원읍·동송읍·원남면 등에서 출토되었다. 철기문화가 싹트기 시작한 초기철기시대에는 연맹왕국을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이 곳에는 진국(辰國)이 형성되어 그 속에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로 둥글 ‘원(圓)’ 자를 써서철원(鐵圓)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라 칭하다가, 통일신라에 흡수된 뒤 경덕왕 때에는 철성군(鐵城郡)으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
이후 901년(효공왕 5년)송악(松嶽)에서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가 905년에 이 곳으로 도읍을 옮겨 풍천원(楓川原)에서 13년간 통치를 하였다. 상술했듯이 후삼국시대에는 궁예가 태봉의 수도로 삼았으나 이 시기의 유적지들은 대부분 현재 비무장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쉽게 갈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태봉국 철원성은 성 가운데에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기 때문에 조사도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정확한 위치는 경원선 월정리역 정면으로 안보관광으로 갈 수 있는 월정리전망대에서 원래 보이는 위치지만 2022년 기준으로 69년 간 자란 무성한 숲에 가려져 못 보는 상황이다.
고려시대
그리고 918년에는 왕건(王建)이 이 곳에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였다. 고려 태조 때 동주(東州)라고 하였고 1254년(고종 41년)에 이르러 철원현으로 개편되었다. 후에 철원목으로 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년)에 철원부로 되었고, 1390년(공양왕 2년)에 경기좌도에 속하였다.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에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434년(세종 16)에 강원도에 편입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1432년 호구수 351호 770명, 시위군 62명이었다. 군사제도에 있어서는 오위도총부 예하 의흥위(義興衛)의 좌부(左部)에 속한 회양진(淮陽鎭) 내에 편입되어 있었다.역마제(驛馬制)에 있어서는 《증보문헌비고》 여지고(輿地考)에 의하면 전국의 역로 중 제2로로서, 양주의 누원(樓院), 포천의 파발막(擺撥幕)·만세교(萬歲橋), 영평(永平)의 양문역(梁文驛), 철원의 풍전(豐田)을 거쳐 김화로 이어지며, 연천·철원·평강으로 연결되는 길도 있었다.
봉수로(烽燧路)는 김화의 소이산(所伊山)에서 봉수를 올리면 철원의 적골산(適骨山)에서 받아 경기도 영평의 미로곡(未老谷)을 거쳐 서울남산으로 전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서울을 점령한 왜군의 제4진이 동두천을 거쳐 철원·평강·김화를 점령한 뒤 함경남도 안변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피해가 극심했으나 곧 관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수복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적이 서울을 침입하는 통로가 되었는데, 당시 철원지역 옆의 김화 자모산성(慈母山城)에서 적과 대치하던 관찰사 홍명구(洪命耉)가 순절했으며, 철원의 정방산성(正方山城)에서는 성이 함락되자 김응해(金應海)가 분을 못 이겨 자결했다가 부하들의 응급구호로 소생했으니, 모두 이 지방과 관계 있는 충신들이다.
1746년(영조 22) 춘천부에 있던 강원도병마방어사부(江原道兵馬防禦使府)를 철원으로 옮기고 관하에 3부(춘천·회양·이천)·6현(금성·김화·낭천·평강·양구·안협)을 두었다. 1778년(정조 2)에 편찬된 《철원군읍지》에 의하면 행정구역은 동변면 등 9개 면으로 호구수 3,604호 1만5147명(남자 8,101명, 여자 7,046명)이었다.
4. 근대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철원군으로 고쳐 춘천부에 속했다가 다음 해 강원도에 소속되었다. 1907년 군대해산과 함께 전국에서 의병봉기가 일어나자 철원에서는 김규식(金奎植)·안상근(安尙根)·유학근(兪學根) 등이 활약하였다. 이들은 다른 의병군과 협조해 1907년 9월 20일 의병 100여 명이 갈말면 지포리에서, 3월 16일 철원 서북 10리 지점에서, 4월 1일 의병 50여 명이 지포리에서, 1910년 8월 10일 의병 13명이 토성리에서 각각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1907년 11월 14일에 일본군은 철원군 지방에서 의병들과 관계된 마을의 집 22채를 소각시키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군에서는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3월 10일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날 철원읍에서 박연서(朴淵瑞)·박용철(朴容喆) 등을 중심으로 2,0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했으며, 3월 11일에는 갈말면 토성리와 문혜리에서 1,000명이, 4월 8일에는 내문면 독검리에서 최재명(崔在明)·최재청(崔在淸) 등이 주동이 되어 700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시위에 대해 일본헌병과 보조원들의 발포로 많은 주민이 죽임을 당하거나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1년 4월 철원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41년 10월에는 경기도 삭녕군 내문면·인목면·마장면이 철원군으로 편입되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철원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관북 지방과 기호 지방, 관서 지방과 강원도 영서 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원래의 지역 특성에다가 경원선과 금강산선이 분기되는 교통이 요지라 엄청나게 발전했으며, 특히 철원 평강 평야의 젖줄로 불린 봉래호저수지가 1923년 완공되면서 강원도를 대표하는 곡창지대이자 경원선 연선의 주요 대도시로 거듭났다.
실제로 1935년까지는 도내 최대의 도시였고, 해방 직전인 1944년 당시까지만 해도 당시 철원읍은 춘천읍에 이어 강원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다. 만약에 분단과 전쟁이 없었으면 1950~1960년대에 군에서 시로 승격하거나 강릉시, 원주시, 춘천시와 함께 강원도 4대 도시로 발전하거나 강원도 북부권(이천군, 평강군, 회양군, 김화군 등)의 중추도시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잠재력이 높은 곳이다.
5. 현대
광복과 함께 38선 이북지역으로 들어갔다가북한이 남침을 준비하는 지역인 철의 삼각지대에 속했으며, 북한 강원도의 도청 소재지이기도 했으나, 1946년 함경남도 원산시, 문천군, 안변군을 강원도로 편입하면서 원산시로 도청이 옮겨가고 북한 입장에서 최전방 지역에 해당되어 몰락하기 시작했다.
1950년 끝내 6.25 전쟁이 터지면서 폭격을 받게 되었고, 전쟁이 중반을 넘어가자 북한군과 국군은 철원·김화·평강 일대,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를 벌였다. 이로 인해 철원역과 당시의 시가지는 흔적만 남기고 모두 파괴되었으며, 지금은 폐허가 된 철원 노동당사만이 지키고 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면서 이전의 1읍 9면 중 지금의 철원읍·동송읍·갈말읍·신서면(연천군)은 수복되었으나 어운면의 일부는 비무장지대로 들어갔고, 북면·묘장면은 일부가 북한으로, 내문면·인목면·마장면은 일부가 비무장지대로 있고, 대부분은 북한지역으로 되었다.
첫댓글 상원아
수고했다.
철원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농촌 지배와 그에 따른 마을 변화를 보는 데 매우 중요한 곳이다. 내일 보자.
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