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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자애경
Metta Sutta
1. 자애경 원문
1. 얏사-누바-와또- 약카-
네-와 닷센-띠 비-사낭
얌히 쩨-와-누윤잔또-
랏띤디와 마딴디또-
수캉 수빠띠 숫또-짜
빠-빵낀찌 나 빳사띠
에-와마-디 구누-뻬-땅
빠릿땅땅 바나-마 헤-32)
자애경의 힘으로 야차들은
무서운 형상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밤낮으로 자애관을 닦는 수행자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잠들며
잠들었을 때 악몽을 꾸지 않습니다.
수행자들이여!
이런 이익이 있는 자애경을 독송합시다.
2. 까라니-야 맛타꾸살레-나
얀따 산땅 빠당 아비사멧짜
삭꼬- 우주-짜 수후주-짜
수와쪼- 짯사 무두아나띠마-니-33)
완전한 고요함인 닙바나를 얻으려는
자신의 이익에 능숙한 자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 계·정·혜를
닦아야 합니다.
능력 있고 정직하며 매우 정직하고
타이르기 쉽고, 온화하고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3. 산뚯사꼬-짜 수바로-짜
압빠낏쪼-짜 살라후까웃띠
산띤드리요-짜 니빠꼬-짜
압빠갑보- 꿀레-수와나누깃도-
나 짜 쿳다 마-짜레-낀찌
예-나 윈뉴-빠레- 우빠와데이융34)
주어지는 대로 만족하고
까다롭지 않아 뒷바라지하기 쉽고
분주하지 않고 간소한 생활을 하고
고요한 감관을 가지고
성숙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무례하고 거칠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집착하지 않고
현명한 이들에게 비난받을 만한
사소한 허물도 일삼지 않습니다.
4. 수키노-와- 케-미노- 혼-뚜
삽바삿따- 바완뚜 수키땃따-35)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위험이 없기를!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5. 예-께-찌 빠-나부-땃티
따사-와-타-와라-와- 나와세-사-
디-가-와-예-와 마한따-
맛지마-랏사까- 아누까툴-라-36)
살아 있는 생명이면 예외없이,
아라한이건 아라한이 아니건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작거나 뚱뚱하거나,
6. 딧타-와- 예-와 아딧타-
예-와두-레- 와산띠 아위두-레-
부-따-와 삼바웨-시-와
삽바삿따- 바완뚜 수키땃따-37)
눈에 보이는 존재이건
보이지 않는 존재이건,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태어날 일이 끝난 아라한이든,
태어날 일이 남은 성인들과 범부이든,
이 세상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7. 나빠로- 빠랑 니꿉베-타
나-띠만녜-타 깟타찌
뱌-로-사나- 빠띠가산냐-
난-냐 만냣사 둑카밋체이야38)
어느 누구이든 서로 속이지 않고,
어디서나 다른 이를
조금도 무시하지 않으며
증오와 적개심을 가지고
몸과 입으로 다른 이를 괴롭히지 않고,
서로서로 다른 이의 고통을
바라지 않아야 합니다.
8. 마-따- 야타- 니양 뿟따
마-유사-에-까 뿟따 마누락케-
에왐삐 삽바부-떼-수
마-나상 바-와예- 아빠리마-낭39)
어머니가 하나뿐인 자식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보호하듯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향하여
무량한 자애의 마음을 많이 쌓아야 합니다.
9. 멧딴 짜 삽바 로-까스밍
마-나상 바-와예- 아빠리마-낭
웃당 아도-짜 띠리얀짜
아삼바-당 아웨-라 마사빳땅40)
온 세상의 위로 아래로 옆으로
원한도 적의도 넘어선
무한한 자애를 널리 펼치십시오.
10. 띳탕 짜랑 니신노- 와-
사야-노와- 야-와땃사 위따밋도-
에땅 사띵 아딧테이야
브라흐마메-땅 위하-라 미다마-후41)
서거나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깨어있는 동안 언제 어디서나
자애의 마음을 닦아가는 삶을
‘고귀한 삶’이라 붓다께서 설하셨습니다.
11. 딧틴 짜 아누빡감마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까-메-수 위네이야게-당
나히자-뚝 갑바세이야 뿌나레-띠-42)
계행과 지혜를
완벽하게 지니는 수행자는
잘못된 견해에 얽매이지 않으며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고
모든 번뇌를 소멸하여
다시는 잉태되어 윤회하지 않습니다.
2. 서론
11가지 보호경43) 가운데 「자애경」이 있습니다. 미얀마 불자들 대부분이 매일 독송하는 경입니다. 이렇게 매일 독송하는 불자들이 다들 자애경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른 법문은 하지 않고, 이미 익숙히 알고 있고 매일 독송하며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보호경 중의 하나인 자애경에 대해 간략히 설하겠습니다.
오늘날 불자들 대부분이 자애경을 독송하고 경청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들 있는데, 자애경 원전의 내용을 공부해 보면 독송하라는 말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독송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독송해야 합니다. 듣지 말아야 하느냐 하면, 아닙니다. 들어야 합니다. 어떤 경이건 독송하고 경청한 이익은 분명히 있습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보호경들이 힘을 발휘하는 원동력은 ‘자애’이거나 ‘진실’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핵심입니다. 위험을 막아낼 때, 자애를 이용하여 막아내는 방법 그리고 진실을 이용하여 막아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방법을 이용하여 중생들이 보호받고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호경을 설해 두었습니다.
자애라는 법은 독송해야 하는 법이 아닙니다. 증장시키고 실천해야 하는 법입니다. 자애는 명상(수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위빳사나 수행하는 것만을 명상이라고 여기는데, 자애관 명상을 하는 것도 수행입니다. 사마타 수행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자애경은 독송만 하거나 경청만 하는 경이 아닙니다. ‘매일 독송하고 경청하면 위험에서 멀어진다.’ 이런 말은 자애경 안에는 단 한 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 쓰시는 말을 빌리자면 우리들은 마시는 약을 바르는 약으로 알고 바르기만 하고 있습니다. 마셔야 효과가 나타나는 약을 바르고만 있으니 약효가 미약할 것은 당연합니다. 복용약은 복용해야 약효가 드러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자애란 수행으로 증장되어야 하는 법입니다.
자애란 몸으로 짓는 자애, 말로 짓는 자애, 마음으로 짓는 자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길 가면서 길가의 쓰레기, 가시덤불이 눈에 보이면 지나는 행인의 발에 차일까 봐, 가시덤불에 찔릴까 봐 치워 주는 것도 자애의 특성입니다. 대중이 편안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길을 비질하는 것도 자애의 하나입니다. 절에 들어온 지네가 보이면 부드럽게 빗자루질 해주는 것도 자애입니다. 이는 몸으로 짓는 자애입니다. 자애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애를 말로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로 표현할 때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중생들이 건강하기를’ 이렇게 말로써 자애를 보낼 수 있습니다. 이런 자애를 말로 짓는 자애라고 합니다. 이보다 더 효과적인 말로 짓는 자애는 서로서로 대화할 때 정말 자애의 마음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나쁜 마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험담하지 않습니다. 상대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말을 합니다. 좋은 아이디어, 좋은 지혜를 줍니다. 이것은 말로 짓는 자애입니다.
마음으로 짓는 자애란 수행 차원에서 자애의 마음을 증장시키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3. 자애경의 네 부분
1) 자애경의 이익(게송 1)
1. 얏사-누바-와또- 약카-
네-와 닷센-띠 비-사낭
얌히 쩨-와-누윤잔또-
랏띤디와 마딴디또-
수캉 수빠띠 숫또-짜
빠-빵낀찌 나 빳사띠
에-와마-디 구누-뻬-땅
빠릿땅땅 바나-마 헤-
여기까지는 붓다께서 설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애경을 독송하고 싶도록 하기 위해 후대의 사야도(큰스님)들께서 덧붙인 내용입니다. 자애경의 이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행복하게 잠든다.
2) 행복하게 깨어난다.
3) 악몽을 꾸지 않는다.
4) 천인들이 보호한다.
5) 선한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6) 무기와 독의 해를 입지 않는다.
7) 하는 일이 잘 마무리된다.
8) 얼굴이 맑고 깨끗하다.
9) 평화로운 마음으로 지낸다.
10) 죽을 때 청명한 정신으로 죽는다.
11) 죽은 뒤에는 범천계에 태어난다.
이렇게 자애관의 이익 11가지를
설명하십니다.
‘얏사-누바-와또- 약카-
네-와 닷센-띠 비-사낭’
(자애경의 위력으로 천인들도 도깨비들도 어떤 존재들도 두렵고 끔찍한 것을 보여 주지 않는다. 위협을 줄 수 없다.)
‘얌히 쩨-와- 누윤잔또-
랏띤디와 마딴디또-’
(이 자애관을 끊임없이 열심히 정진한다면)
‘수캉 수빠띠’
(행복하게 잠든다.)
‘숫또-짜 빠-빵낀찌 나 빳사띠’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나쁜 꿈을 꾸지 않는다.)
이러한 이익이 있는 자애관을 닦는 방법을 이 자애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2) 자애관을 하기 전에
갖추어야 할 소양(게송 2&3)
자애경을 독송할 때, 뜻을 이해해서 알고 독송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습관 들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단지 암기하고 있기 때문에 독송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자애의 마음 없이 소리만 내고 있기도 합니다. 자애의 마음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애관을 열심히 닦기 위해 필요한 소양들을 붓다께서 먼저 설하십니다.
2-1. 까라니-야 맛타꾸살레-나
얀따 산땅 빠당 아비사멧짜
평화로운 열반의 공덕을 떠올리며 지내고 싶다면, 이 일을 하라고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면, 지계에 흠이 없도록 사마디가 충분하도록 그리고 지혜가 가득 차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잘하지 못합니다. ‘앗타꾸살라atthakusala(자신의 이로움에 능숙한 이)’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자신의 이로움과 번영을 꾀할 줄 모릅니다. 이런 이들은 이익 없는 일만 하고 삽니다. 예를 들자면 알코올중독자들은 술 마시는 일이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손해 볼 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일이 번영과 행복을 가져오지는 않습니다.
『넷띠netti』 경전에 ‘우물을 파는 이는 파면 팔수록 아래로 내려간다. 담을 쌓는 이는 일을 하면 할수록 점점 올라간다” 이렇게 예를 들었습니다. 우물 파는 이는 우물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낮아져 갑니다. 어떤 일은 우물 파는 일과 같습니다. 이처럼 점점 퇴보하는 일을 하는 이는 ‘앗타꾸살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자신에게 도리어 고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래로 내려가게 합니다. 이런 이들이 의외로 세상에 많습니다. 담을 쌓는 일을 보십시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올라갑니다. 담이 높아질수록 자신도 올라갑니다. 이처럼 스스로 퇴보하도록 하지 않고 스스로 고귀해지도록 해야 ‘앗타꾸살라’입니다.
그래서 생에서 이로움이 있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면 할 만하고 하기에 마땅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어떤 소양이 필요할까요? 자애관과 관련하여 요구되는 소양들을 붓다께서 계속해서 설하십니다.
2-2. 삭꼬- 우주-짜 수후주-짜
수와쪼- 짯사 무두아나띠마-니-
‘삭꼬-’
능력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성공하는 이의 조건 5가지’44) 중에서 처음 4가지가 ‘삭꼬’를 설명합니다. 첫째,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갖는다. 둘째, 건강하다. 셋째, 열심히 노력한다. 넷째, 자기가 하는 일에 관련하여 숙고하며 개선하기 위한 궁리를 쉼 없이 한다. 이런 조건들을 갖춘 이를 ‘삭꼬’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런 소양들이 자기 자신 안에 있는가? 아직 없다면 생겨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다. 몸으로 하는 운동도 반복할수록 능숙해집니다. 예를 들자면, 걷는 것조차도 반복 연습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공차기도 연습하면 됩니다. 다른 스포츠도 반복 연습에 의해 노련해집니다. 반복된 연습이 없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도 대상과 연결 지어서 반복 연습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처음엔 어렵지만 연습하다 보면 나중엔 쉬워집니다. ‘삭꼬(능력 있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주-’
곧은 이(정직한 이)가 되어야 합니다. 곧은 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미얀마에서는 정직한 사람을 ‘바보’라는 뜻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곧은 이란 앞과 뒤가 다르지 않은 사람, 속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성공하는 이의 조건 5가지’ 중 마지막 항목이 ‘우주’(정직함)에 대한 설명입니다.
첫째, ‘자신에게 없는 공덕을 있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아사토asaṭho)’입니다. 과장하고 부풀려서 자랑하는 것, 타인이 과대평가하도록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것, 내게 돈이 없는데 돈이 있는 척하는 것, 지혜가 없으면서 지혜 있는 척하는 것, 지계가 없으면서 지계가 있는 척하는 것, 이런 것들을 삼가야 합니다.
둘째, ‘자신이 지은 허물(불선업)을 없는 것처럼 가장하지 말야야 한다(아마야위amāyāvī)’입니다. 내게 없는 것은 없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아사토’, ‘아마야위’ 이 두 가지를 유념해 곧고 정직한 이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하는 이가 정직하지 않으면 사마디가 없는데도 사마디가 있다고 보고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면 스승이 무슨 수로 그 수행자의 실태를 알겠습니까? 인터뷰를 할 때 ‘우주’(정직)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후주-’
매우 곧아야 합니다. ‘우주’는 행위와 말이 정직하다는 의미입니다. ‘수후주’는 마음까지 곧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매우 곧아야 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몸·말·마음까지 정직하고 곧은 이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곧고 바름이 없다는 그 자체가 자애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곧음과 정직함이 없다면 그 마음 안에 자애를 지니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타인에게 자애를 두기도 아주 어려워집니다. 다른 이들도 그 사람에게 자애를 보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 ‘우주- : 정직하라’, ‘수후주- : 매우 정직하라’고 하십니다.
‘수와쪼-’
충고해줄 때, 아이디어를 제시할 때, 타이르기 쉬운 이가 되어야 합니다. 고집 세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주 고집이 세서 황소고집입니다. 누가 말해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자애가 가지 않습니다. ‘이 사람 고집 세다’ 하고 한두 번 말해 보고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 둡니다. 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타이를 때, 충고할 때, 가르치기 쉬운 사람(수와쪼)이 되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르치기 쉬운 사람을 더 사랑합니다. 선우들도 이 사람은 말하면 잘 듣는다고 더 아낍니다. 그렇지 않고 ‘저 사람은 말해 봐도 안 돼’라고 하면 자애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애를 받고 자애를 주기 위해서는 가르치고 타이르기 쉬운 사람(수와쪼)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의견을 들으면 그 생각이 맞는지 아닌지 스스로 사고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고 받아들일 만한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으면 버리면 됩니다. 이러한 ‘수와쪼’ 공덕으로 가득 차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지 않고 충고를 해주는데 시비를 따지며 달려들면 서로 간에 자애가 파괴됩니다. 자애가 말라 버립니다.
‘무두’
무두란 ‘부드럽고 섬세함’을 말합니다. 부드럽고 섬세해야 합니다. 서로 간에 대화할 때 예의 발라야 합니다. 예의가 필요합니다. 예의가 없으면 사람들의 미움을 받습니다. 나 자신이 무례하면 주변 사람들이 미워합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자애의 마음을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섬세함, 예의 바름도 중요한 조건입니다.
‘아나띠마-니-’
지나친 교만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서 붓다께선 ‘교만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설하지 않으시고, ‘지나친 교만이 없어야 한다’라는 의미로 설하십니다. 교만이란 있어서 좋은 교만과 있어선 안 되는 교만 두 종류가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 과장하는 것은 있어선 안 되는 교만입니다. 그러나 배움에 있어서 ‘그런 사람조차도 하는데 나도 잘하도록 해야지’, 이런 생각은 이로운 교만입니다. 이런 교만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업에 관련해서도 ‘그런 사람도 성공했는데 나도 성공하도록 해야지.’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도 ‘그 사람도 해냈는데 나는 어떻게 하면 될 수 있을까?’ ‘그런 분도 아라한이 되었는데 나도 되어야지.’ 이런 종류의 교만은 있으면 바람직한 교만입니다.
보디삿따이신 수메다 존자는 교만이 있어서 붓다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교만이 없었다면 붓다가 될 수 없었습니다. 왜 이 말을 하는가 하면 디빵까라 붓다를 친견하실 때 아라한이 될 소양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선정과 신통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디빵까라 붓다로부터 주제를 받아 수행을 하셨다면 단번에 아라한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처럼 출중한 인간이 나 혼자만 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나 스스로 붓다가 되어 중생을 구제해줄 것이다. 바른 법을 내가 직접 설하리라. 다른 이가 설한 법을 듣고 아라한이 되어, 나 혼자만 탈출하는 이는 되지 않으리라’라고 맹세하십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교만입니다. 이 바람직한 교만이 있어서 붓다가 됩니다.
경전에는 자비를 원인으로 성불한다고 합니다. 자비가 분명 필요합니다. 하지만 디빵까라 붓다를 친견한 그 순간 생겨난 ‘나도 붓다가 되겠다’라고 하는 서원은 교만이 아주 크게 원인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이로움이 없는 아주 큰 자만을 가진 이는 어르신들조차도 업신여깁니다. ‘내가 가장 똑똑하다, 내 위에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학식이든 재산이든 용모든 명예든 이런 것들에 대하여 거만해선 안 됩니다. 거만하면 주변 사람들이 그를 기피합니다. 꺼리는 마음이 있으니 자애가 생겨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나띠마니’입니다. 즉, 교만이 지나쳐선 안 됩니다.
3-1. 산뚯사꼬-짜 수바로-짜
압빠낏쪼-짜 살라후까웃띠
‘산뚯사꼬-’
‘산뚯사꼬’란 ‘있는 것에 만족함’입니다. 있는 것에 만족한다는 뜻을 어떤 이들은 잘못 해석하기도 합니다. 한 달 월급으로 천 원을 받아도 이것에 만족해야 한다, 이렇게 이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산뚯사꼬’란 까탈스럽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이들은 입맛이 까다롭습니다. 좋아하겠다 싶어서 요리해주면 아니라고 합니다. 신맛을 좋아하려나 싶었는데 아니라고 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기 것에 만족하지 못하다 보면 타인의 것을 원하게 됩니다. 이것도 위험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자신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의 것을 탐낸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쉽게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산뚯사꼬). 그렇다고 발전을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발전하도록 하는 것과 까다로운 것은 다릅니다. 까다로우면 요리해주는 사람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반찬 해라 저 반찬 해라 하면 부엌에서 싸움이 날 수 있습니다. 이때 어찌 자애가 생겨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래서 있는 것에 만족하라고 하는 겁니다. ‘산뚯사꼬 : 있는 것에 만족함, 자기 것에 만족함’. 이 소양은 매우 중요합니다.
‘수바로-’
먹여 살리기 쉬워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수월해야 합니다. 남이 나를 돕고 보호해줄 때도 쉽게 만족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쉽다는 뜻은 ‘무엇을 해서 먹든지 만족해야 한다. 있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이는 먹여 살리기 어렵습니다. 자기 혼자서도 싸우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아마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남이 해주는 것도 마음에 안 듭니다. 이렇게 되면 자애가 생겨날 리 만무합니다. 그러므로 ‘수바로 : 스스로 먹여 살리기 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압빠낏쪼-’
자애를 증장시키려면 꼭 필요치 않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이 적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애가 자라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면 일이 적어야 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살면서 해야 하는 일들은 너무 많습니다. 하지만 이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과외의 일을 많이 하며 살기도 합니다. 과외의 일을 하지 마십시오. 꼭 해야 하는 일만 하고, 남은 시간에는 자애관을 닦고 실천하는 데 시간을 써야 합니다. 해야 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살라후까웃띠’
가볍게 생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근사하게, 화려하게 사는 이들은 과외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습니다. 먹을 때도 근사하게, 화려하게 먹는 이들은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집니다. 단순하게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심플 라이프(a Simple life)’여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부자이면서도 한평생 간소하게 살기도 합니다.
3-2. 산띤드리요-짜 니빠꼬-짜
압빠갑보- 꿀레-수와나누깃도-
‘산띤드리요-’
‘산따santa’ + ‘인드리요indriyo’ ‘감관이 고요해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인드리요(감관)’가 고요하다는 것은 단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보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드리요’가 무엇이냐 하면 눈·귀·코·혀·몸·마음입니다. 사람들의 의식 안에서 눈으로 보고 탐욕이 생기고 성냄이 생기면, 이를 고요하지 못하다고 합니다. 즉, 여기저기 두리번거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마음에서 탐·진·치가 일어나지 않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눈으로 볼 때 탐욕이 생기고 성냄이 생기면 ‘인드리요’가 고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는 이런 것들에 탐욕과 성냄이 생기면 ‘인드리요’가 고요하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고 화를 냅니다. 원합니다. 귀로 듣고 짜증냅니다. 갈구합니다. 코로 냄새 맡고 성을 냅니다. 탐심을 냅니다. 혀로 맛보고 화를 냅니다. 원합니다. 몸으로 접촉하고 화를 냅니다. 더 원합니다. 상상하고 기억하는 것만으로 화가 납니다. 이런 식으로 성냄이 생겨난다면 이건 ‘인드리요’가 고요하지 못해서입니다. 가능한 한 ‘인드리요’가 고요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드리요’를 다스린다 함은 이런 뜻입니다.
‘니빠꼬-’
지혜가 무르익도록 정진해야 합니다. 법과 관련된 지혜가 무르익으려면 그만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지혜란 어떤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가? 법문을 들어서 얻습니다. 들은 법문을 숙고해 봄으로써도 얻습니다. 실제로 실천해 보는 위빳사나 명상을 통해서도 얻습니다.
• 수따마야냐나sutamaya-ñāṇa: 법문을 듣거나 책을 읽어서 지혜를 얻는 것.
• 찐따마야냐나cintāmaya-ñāṇa: 타인에게 전혀 들어보지 못했지만 자신의 지혜로 생각해 지혜를 얻는 것. 법과 관련해서는 보디삿따 정도만이 이 ‘찐따마야냐나’가 있습니다.
• 바와나마야냐나bhāvanāmaya-ñāṇa: 법문을 들은 뒤 실제로 수행해서 지혜를 얻는 것.
이렇듯 노력해야 무르익은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제 무슨 내용이 이어지는가 하면,45)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말하십니다. 수행을 한다는 사람들이 가끔은 허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들을 하기도 합니다.
3-3. 나 짜 쿳다 마-짜레-낀찌
예-나 윈뉴-빠레- 우빠와데이융
지혜로운 이들의 비난을 들을 만한, 꾸중을 들을 만한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때 아주 사소한 허물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쁜 이들이 하는 허물 되는 일들을 하며 산다면 위험이 닥쳐올 것인데 무슨 수로 자애가 내게 오겠습니까? 나 자신도 타인에게 자애를 두기 어렵습니다. 자애란 타인과 나의 자애를 서로서로 주고받음입니다. 이것도 붓다께서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지혜로운 이들이 비난할 만한 그릇된 일들은 피하라’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미리 갖추고 있어야 할 소양’입니다.
붓다께서는 자애관을 시작하기 전에 앞에 설명한 것들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소양이 자기 자신에게 생겨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소양이 갖추어져 있을 때에야 자신이 하는 일이 성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세간의 일을 보십시오. 소양이 갖추어지도록 먼저 닦아야 합니다. 그 뒤에 기술을 가르쳐 줍니다. 소양을 갖추지 못한 채 재주를 익히면 어떤 일도 성공할 리 없습니다.
3) 자애관 하는 방법 (게송 4~10)
앞에서 소양 설명이 끝났습니다. 이제 자애를 증장시키는 방법과 관련하여 설하십니다.
4. 수키노-와- 케-미노- 혼-뚜
삽바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자애관을 할 때 이 단어들 또는 이런 의미가 있는 말로써 자애를 보냅니다.
‘삽바삿따-’ 모든 존재들이
‘수키노-’ 몸의 행복과 마음의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케-미노-’ 위험이 없기를
‘수키땃따-’ 마음의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를 써서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항상 끊임없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을 ‘바와나bhāvanā(수행)’라고 합니다. 한 번만 생기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1초 생겨납니다. 다시 두 번째 1초, 다시 세 번째 1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초들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을 ‘바와나(수행)’라고 합니다. 이런 자애의 마음이 자신 안에서 거듭 생겨나도록 노력하라고 합니다.
마음을 훈련시켜 모든 중생을 향해 ‘행복하기를…’ 또는 ‘위험에서 벗어나기를…’ 하는 이 마음을 증장시키는 것입니다. 자애의 대상을 점점 더 넓혀 가야 합니다. 자신의 주변에 먼저 보냅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들에게 가리지 않고 보냅니다. 이렇게 보내는 것입니다.
5. 예-께-찌 빠-나부-땃티
따사-와-타-와라-와 나와세-사-
디-가-와-예-와 마한따-
맛지마-랏사까- 아누까툴-라-
여기서는 중생의 종류에 따라서 자애관 하는 방법을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게송 4) 모든 중생을 하나로 보고 자애관을 했습니다. 여기서는 지구 위에 사는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수천 수백만 마리를 대상으로 봅니다. 생명이 있는 중생 모두, 육지에 있는 중생이든 물속에 사는 중생이든 하늘에 사는 중생이든, 생명 있는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께-찌 빠-나부-땃티’
‘세상에 있는 중생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이후부터는 중생들을 종류에 따라 둘 혹은 세 부류로 나누어 자애를 보냅니다.
‘따사-와- 타-와라-와 나와세-사-’
‘따사tasā’란 ‘두려워하는, 깜짝 놀라길 잘하는 중생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는 범부들과 ‘배움이 남은 성인들(아라한 되기 이전의 성인인 수다원, 사다함 그리고 아나함)’이 포함됩니다. 이들에겐 성냄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46)
‘타-와라-’
다시 태어날 생이 없는 성인들, 생으로부터 안전해진 존재들, 즉 아라한을 의미합니다. ‘따사’와 ‘타와라thāvarā’는 이렇게 구분됩니다. ‘따사’와 ‘타와라’를 합치면, ‘두려워 떠는 중생들도 행복하기를’, ‘두려움과 떨림에서 벗어난 아라한들도 행복하기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유의해야 할 다른 해석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따사’와 ’타와라’라는 단어는 불교에서만 쓰는 게 아닙니다. 붓다께서 살아계시던 그 당시의 다른 종교인들도 쓰던 단어입니다. 그들에게는 ‘따사’가 생명이 있는 존재를 말합니다. ‘타와라’는 무정물을 의미합니다.
내가 스리랑카에서 석사 코스를 밟을 때 교수님 한 분이 자애경에 관하여 수업을 해주셨습니다. 그 수업에서 그 교수님은 ‘따사’를 생명 있는 존재, ‘타와라’를 산, 숲, 나무라고 말했습니다. 무정물에게 어떻게 자애를 보냅니까? 나무에게 어떻게 자애를 보냅니까? 이런 해석은 ‘자이나교’의 교리입니다. 자이나교는 지금까지도 인도에 있습니다. 이 자이나 교단은 나무, 숲, 산, 이런 모든 것을 유정물로 봅니다. 불에도 생명이 있다. 물에도 생명이 있다. 불이 장작을 태우면 불이라는 생명 있는 존재가 장작이라는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 됩니다. 불을 끄면 불을 죽인 것이 되어서 살생업을 짓게 됩니다. 물도 마시면 안 됩니다. 물을 마시면 이것도 허물이 됩니다. 그들은 생수를 사용하면 허물을 짓는다고 봅니다. 먼지조차도 목숨이 있다고 봅니다. 이런 해석은 자이나교의 견해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견해와 맞지 않습니다.
불교의 견해에서 보자면 ‘따사 : 놀라고 두려워하는 중생들’, ‘타와라 : 번뇌를 소멸시켜 매우 고요해진 존재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중생을 세 가지로 나눕니다.
‘디-가-’ : 긴 존재
‘맛지마-’ : 중간 길이의 존재
‘랏사까-’ : 짧은 존재
중간 길이의 존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존재입니다. 긴 존재란 뱀처럼 길이가 긴 중생입니다. 사람들 중에도 키가 큰 사람이 있습니다. 키가 작은 사람도 있고 중간 키의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긴 길이의 중생이건, 짧은 길이의 중생이건, 중간 길이의 중생이건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기를…’이라고 자애를 보내야 합니다.
‘아누까툴-라-’ ‘마한따-’
중생들 가운데서 어떤 존재들은 개미나 진드기처럼 작고 미세합니다(아누까aṇuka).47) 코끼리처럼 큰 덩치의 중생도 있습니다(마한따mahantā). 작지도 크지도 않은 중생도 있습니다(맛지마majjhimā). 이렇게 중생을 크기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누어 ‘크건 작건 중간 사이즈의 중생이건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기를…’이라고 자애관을 합니다.
6. 딧타-와- 예-와 아딧타-
예-와두-레- 와산띠 아위두-레-
부-따-와 삼바웨-시-와
삽바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딧타-와- 예-와 아딧타-’
내 눈에 보이는 존재가 있듯이, 보이지 않는 존재 역시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매우 많습니다. 삼장법사 사야도께서 이 자애경에 대하여 설명해 두신 것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몸과 마음이 항상 행복하기를…, 내 눈에 보이는 중생이든 보이지 않는 중생이든 어떤 중생이든 행복하기를…’이라고 자애를 펼치라 하셨습니다.
‘예-와두-레- 와산띠 아위두-레-’
나와 멀리 있는 존재이든 가까이 있는 존재이든 자애를 보내야 합니다. ‘멀리서 살든 가까이서 살든 이 두 종류의 중생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자애를 펼쳐야 합니다.
‘부-따-와 삼바웨-시-와
삽바삿따- 바완뚜 수키땃따-’
여기서는 ‘부따bhūtā’라는 중생과 ‘삼바웨시sambhavesī’라는 중생 두 종류로 나뉩니다. ‘부따’는 다 자라난, 나이가 충분히 들어서 분명하게 모양을 갖춘 존재입니다. 입태된 지 얼마 안 되어, 어미의 자궁에 착상된 지 얼마 안 되어, 사지가 다 갖추어지지 않은 존재를 ‘삼바웨시’라고 합니다. 또 다른 해석으로 ‘삼바웨시’란 입태 중에 있는 중생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자면, 병아리로 깨어나지 않은 아직 달걀 안에 있는 존재이면 ‘삼바웨시’ 단계입니다. 병아리로 태어났으면 ‘부따’입니다. 이처럼 모든 존재를 아울러서 ‘부따’와 ‘삼바웨시’ 두 가지로 나눕니다. 또한 완성된 존재인 아라한을 ‘부따’라고 합니다. 이때 ‘삼바웨시’란 범부인 중생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존재들을 의미합니다. ‘다 자란 존재(부따)이건 자라야 할 존재(삼바웨시)이건 행복하기를…’ 이라고 자애를 보냅니다.
이렇게, 자애를 증장시키는 수행은 중생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어떤 중생에게든 자애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기를…’ 이라는 단어 외의 다른 표현을 써서 할 수도 있습니다. 게송7에서는 다른 표현을 써서 자애관을 합니다.
7. 나빠로- 빠랑 니꿉베-타
나-띠만녜-타 깟타찌나깐찌
뱌-로-사나- 빠띠가산냐-
난-냐 만냣사 둑카밋체이야
‘나빠로- 빠랑 니꿉베-타’
세상 사람들은 서로서로 속이며 삽니다. 한 사람이 와서 거짓말하고 사기를 칩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피해자들은 마음이 괴롭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자애관을 할 때도 ‘나 빠로- 빠랑 니꿉베-타 : 서로서로 속이지 않기를… 거짓말하지 않기를… 정직하기를…’ 이렇게 자애관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띠만녜-타 깟타찌나깐찌’
그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지 업신여기지 마라. 사람들이 서로서로 업신여기며 다른 사람을 과소평가하기도 합니다. 학식이 부족해서든 가난해서든 자기 직업에 능숙하지 못해서든, 무시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일로든 그 누구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업신여김 당하는 사람은 참으로 견디기 어렵습니다. 자애의 마음이 말라 버립니다. 다시 자애를 두기 힘들어집니다. 무시하는 사람도 그 자신이 자애가 없어서 남을 무시합니다. 업신여기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자애가 파괴될 원인이 되기에 이런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에서 서로 간에 무시하는 경우는 절대 있어선 안 됩니다. 학식과 관련해서든 경제력 때문이든 어떤 이유로든 ‘사람들이 서로서로 업신여기지 않기를…’ 이라고 자애를 보내야 합니다.
‘뱌-로-사나- 빠띠가산냐-’
‘뱌로사나byārosanā’란 화나게 부채질하는 것. ‘빠띠가산냐paṭighasaññā’란 미워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자극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난-냐 만냣사 둑카밋체이야’
누군가에게 고통이 생겨나도록 일조하지 마라. 세상에는 다른 이의 고통을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고통에 빠지도록 해야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고통에 빠지도록 하겠다.’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매우 저급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제거하라는 뜻입니다. 미워해서든 어떤 이유로든 서로를 고통에 빠지도록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선 안 됩니다. 중생들에게 자애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이 시대에는 테러리즘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이들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누가 죽든 상관 않고 죽이는 무리들입니다. 매우 무서운 일입니다. 이것은 자애가 마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들은 지구의 온도가 오르고 있는 것만 압니다. 세상의 자애가 마르고 있는 것은 모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자애가 메말라서 화로 불타오르고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을 해결하고자 회의를 개최하는데, 누구도 마음이 말라가는 일에 대해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불타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평화롭고 시원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자애의 마음을 자신 안에 생겨나게 해야 한다고 붓다께서 설하십니다. 자애관의 의미는 매우 훌륭합니다. 독송할 때 이 뜻을 새기면서 독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직접 실천해야 합니다. 우선 뜻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그 뒤에는 실천해야 합니다.
8. 마-따- 야타- 니양 뿟따
마-유사-에-까 뿟따 마누락케-,
에왐삐 삽바부-떼-수
마-나상 바-와예- 아빠리마-낭
붓다께서 이번에는 사람들이 자애의 특성을 이해하도록 설명하셨습니다. 외동아들을 가진 어머니는 그 아들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합니다. 자신의 목숨은 개의치 않고 아들을 살리려 합니다. 이를 목숨을 던져 보호한다고 합니다.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자애가 얼마나 큽니까? 이처럼 큰 자애를 모든 중생들에게 둘 수 있도록 하라 합니다. ‘마-나상 바-와예- 아빠리마-낭 : 한계가 없는 자애를 모든 중생에게 둘 수 있도록 하라’ 합니다. ‘바와예bhāvaye’란 생겨나도록 하라, 증장시키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더 이어서 설하십니다.
9. 멧딴 짜 삽바 로-까스밍
마-나상 바-와예- 아빠리마-낭
웃당 아도-짜 띠리얀짜
아삼바-당 아웨-라 마사빳땅
‘모든 세상 위에 그런 마음을 둘 수 있도록(멧딴 짜 삽바로-까스밍 마-나상 바-와예 아빠리마-낭), 방향으로 말하자면 위에 있든 아래에 있든 어디에 있든(웃당 아도- 짜 띠리얀짜)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이렇게 자애의 마음을 증장시켜야 합니다.
‘아삼바-당’
좁은 마음을 가지지 않아야 합니다. 자애의 마음은 매우 광활한 마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자애를 두고 다른 이에게는 자애를 두지 않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에게 고르게 자애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아웨-라’
적이 없어야 합니다. 자애에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자애경에서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세상의 누구나 위험 없이 지내고 싶어 합니다. 원수 없이 살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적이란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적을 외부 존재로만 봅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오는 적만 막으려 합니다. 하지만 바깥의 적은 내게 올 수도 있고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게 정말 와서 위험을 주는 사람도 이 생에서만 해를 끼칠 뿐입니다. 진정 무서운 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미워하는 성냄이라는 적입니다. 외부의 원수는 부부가 헤어지도록 할 수 없습니다. 내부에 있는 미움이라는 원수가 이혼에 이르게 합니다. 사람들은 미움이라는 성냄 그 자체가 원수인 줄 모릅니다. 마치 자기 자신인 양 한평생 가슴 안에 품고 지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냄을 자랑하기조차 합니다. ‘내가 이렇게 성질이 있다.’ 스스로 자랑스레 떠벌리기도 합니다. 나의 진짜 원수는 내 안의 성냄입니다. 자신의 가슴 안에 있는 미움이라는 적이 없도록(아웨라avera) 해야 합니다.
자, 그래서 이렇게 원수로부터 멀어지도록 자애의 마음을 증장시켜야 합니다. 언제 증장시키는가 하면,
10. 띳탕 짜랑 니신노- 와-
사야-노와- 야-와땃사 위-따밋도-
에땅 사띵 아딧테이야
브라흐마메-땅 위하-라 미다마-후
‘띳탕’ : 서 있는 동안에도 자애관을 해야 합니다.
‘짜랑’ : 걷는 동안에도 자애를 증장시켜야 합니다.
‘니신노-’ : 앉아 있는 시간에도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어야 합니다.
‘사야-노-’ : 누워 있는 시간, 아직 잠들지 않은 시간에도 자애를 증장하게 해야 합니다. 행·주·좌·와 네 가지 어떤 자세에서건 자애가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에땅 사띵 아딧테이야’
이 자애의 마음을 두라. 이 자애를 밥할 때도 지니고 있고, 직장에서도 이 마음으로 일하라.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으라 합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지내는 것을 ‘고귀한 삶(브라흐마 위하라)’이라고 부릅니다. ‘브라흐마메-땅 위하-라 미다마-후’는 이 불법 안에서 가장 고귀하게 사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게송 4~10) 자애관 하는 방법이 끝났습니다. 붓다께서 어떤 시간에 자애관을 해야 하는지까지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자애관 독송을 마치고 잠들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삽베삿따 아웨라 혼뚜(모든 존재들이 적이 없기를)’라고 자애관을 하고 난 뒤에 잠들면 끝이라고 여깁니다. 자애의 마음이란 거듭해서 생겨나도록 해야 합니다. 들숨날숨을 쉬듯이 자애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 안에 계속해서 생겨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행 정진입니다.
자애관을 훈련함으로써 선정까지 얻을 수 있습니다. 자애관으로 선정을 얻으려면 누군가 한 명에게 집중해서 해야 합니다. 그 뒤에 자애의 대상을 늘려 갑니다. 선정을 얻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하나, 단지 선업을 지을 목적으로 하는 자애관이 또 다른 하나입니다.
선정을 얻기 위한 자애관을 할 때는 이성을 대상으로 두고 해선 안 됩니다. 남성은 남성에게만, 여성은 여성에게만 자애를 보냅니다.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자애와 매우 밀접해 있는 적이 ‘애착’입니다. 남성이 여성을 향해 집중적으로 자애를 보내면, 또는 여성이 남성을 향해 몰입해서 자애를 증장시키면 심경의 변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성 간에 집중적으로 자애를 증장시켜서는 안 됩니다. 한 명에게 집중적으로 자애관을 한다면 남성은 남성에게, 여성은 여성에게만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사진을 보고 하든지, 마음속으로 떠올려서 하든지 ‘행복하기를…’ 이런 마음을 한 시간이 채워지도록, 두 시간이 되도록, 세 시간이 되도록, 네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마음이 사마디를 생겨나게 합니다. 선정을 생겨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애의 마음이 얼마나 한정 없이 확장되는가 보겠습니다.
1. 자기 자신
2. 자신과 친한 친구
3.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
4.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불특정한 사람
사람을 이렇게 네 종류로 나누었을 때, 이 네 사람의 구분이 없어집니다. 나 자신을 따로 우선에 두지 않습니다. 나의 절친이라고 더 배려하지 않습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의 원수라고 따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이 네 사람이 한 사람처럼 되면 이 자애가 아주 견고해진 것입니다.
봅시다! 나 자신과 주변인 세 사람, 이 네 사람 가운데에서 한 명을 죽여서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합시다. 이때, ‘내가 갈게’ 하면 자기 자신에게 자애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나와 맞지 않는 나의 원수를 보낸다면, 원수에 대한 자애가 파괴됩니다. 다른 사람 말고 내 친구를 보내면 내 친구에 대한 자애가 파괴됩니다. 나와 아무 상관없는 누군가를 보낸다면 그 사람에 대한 자애가 파괴됩니다. 그래서 누구도 보낼 수 없습니다. 만약 네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한 사람처럼 여긴다면, 그 사람의 가슴 안에 매우 큰 자애가 생겨난 것입니다.
4) 위빳사나로 넘어감(게송 11)
자! 이렇게 자애를 증장하여서 자애의 기초가 다져졌다면 위빳사나 수행으로 갑시다. 붓다께서는 자애경에서 아라한 과까지 얻을 수 있도록 법문을 설하십니다.
자애관도 명상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 사마타 수행법에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넘어간다면 대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자애관으로 자애의 마음을 증장시키는 것은 중생들, 존재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위빳사나는 중생을 대상으로 해선 안 됩니다. 중생, 존재가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견해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을 유아견(앗따딧티attadiṭṭhi)이라고 부릅니다. 자애관은 중생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중생이 있다는 견해가 생기곤 합니다. 그래서 이 견해를 제거해야 합니다. 제거한다는 것은 물질과 마음 두 가지만을 대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11. 딧틴 짜 아누빡감마
실-라와- 닷사네-나 삼빤노-
까-메-수 위네이야게-당
나히자-뚝 갑바세이야 뿌나레-띠-
내가 자애를 보내는 이도 몸과 마음만이 있을 뿐, 자애를 보내는 나도 몸과 마음만이 있을 뿐입니다. 유아견을 제거(딧틴 짜 아누빡감마)해 버려야 합니다. 중생이란 없습니다. 이 관념을 없애지 않고는 위빳사나를 할 수 없습니다. 위빳사나의 대상은 물질과 마음뿐입니다. 존재가 아닙니다. ‘유아견을 뽑아 버려라(딧틴 짜 아누빡감마)’라는 뜻은 ‘물질과 마음을 볼 수 있도록 관찰하라’는 뜻과 동일합니다.
수행을 한다면 내 안에 있는 물질과 마음, 타인에게 있는 물질과 마음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중요한 것이 실라(지계)입니다. 지계가 왜 필요한가 하면 사마디가 생기기 위해 필요합니다. 지계가 갖추어지면, 지계를 바탕으로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흐뭇함을 바탕으로 즐거움이 생깁니다. 즐거움을 기반으로 기쁨(삐띠pīti)이 일어납니다. 기쁨으로 인하여 마음의 평화로움(빳삿디passaddhi)이 밀려옵니다. 평화로움이 있으면 몸과 마음에 행복(수카sukha)이 생겨납니다.
이 수카가 생긴 뒤에는 사마디라는 마음의 고요함이 쉽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의 고요가 있으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혜(야타부따 냐나닷사나yathābhūta-ñāṇadassana)’가 들어옵니다. 지계가 청정하지 못하면 앞에 열거한 이 재산들을 모두 잃어 버립니다. 그래서 5계를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지계를 바탕으로 치열하게 노력한다면 위빳사나 지혜가 점점 올라가서 열반을 보게 됩니다. 상카라(물질과 마음)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난 뒤에, 상카라(물질과 마음)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을 보게 됩니다.
‘닷사네-나 삼빤노-’
‘봄으로(닷사네나) 완전히 채워졌다(삼빤노)’라는 의미입니다. 이 봄으로써 완전해진다는 뜻은 수다원이 된다는 뜻입니다.
‘딧틴 짜 아누빡감마’
‘유아견을 뽑아버린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로써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남을 설하셨습니다.
‘까-메-수 위네이야게-당’
‘감각적 욕망을 제거한다’는 의미입니다. 감각적인 대상(까메수)에 들러붙는 마음을 제거한다(위네이야 게당)는 말은 ‘아나함’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나함이 되면 감각적인 대상에 집착함이 없습니다.
‘나히자-뚝 갑바세이야 뿌나레-띠-’
‘어미의 자궁에 입태되지 않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감각적인 대상의 집착에서 멀어진 뒤에 위빳사나의 속력이 한층 더 올라가면 다시는 절대 태어나지 않는 단계에 이릅니다. 다시는 자궁(갑바세이야)에 입태하지 않습니다. 즉, ‘아라한’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자애를 시작으로 해서 위빳사나 지혜를 닦으면 아라한이 될 수 있습니다. 자애를 증장시켜서, 자애의 마음을 대상으로 관찰합니다. 그 마음이 머무는 자리, 심장은 물질로서 관찰합니다. 이렇게 관찰하다 보면 위빳사나 지혜가 점점 무르익어서 수다원이 됩니다. 더 익으면 사다함이, 더 익어지면 아나함이 됨과 동시에 5문(눈·귀·코·혀·몸)으로 들어오는 대상들에 대한 갈애가 떨어져 나갑니다. 여기서 더 올려서 수행할 때 번뇌가 완전 소멸하여 다음 생에 입태함이 없어집니다. 아라한이 됩니다. ‘나히자-뚝 갑바세이야 뿌나레-띠- : 어미의 자궁에 절대 입태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애경이 끝납니다.
법을 사랑하는 불자들이, 자애를 바탕으로 하여 위빳사나 지혜까지 이르게 하는 이 자애경의 핵심을 듣고 난 뒤에, 이 자애경대로 정말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야 합니다. 이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여 자애관을 닦고, 자애를 증장시킨 뒤에 위빳사나를 닦아서 열반의 행복을 누리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주해]
32) Yassā’nubhāvato yakkhā, nevadassenti bhīsanaṁ;
Yamhi cevānuyuñjanto, rattindiva’matandito.
Sukhaṁ supati sutto ca, pāpaṁ kiñci na passati;
Evamādi guṇūpetaṁ, parittaṁ taṁ bhaṇāma he.
33) Karaṇīyamatthakusalena, yanta santaṁ padaṁ abhisamecca;
Sakko ujū ca suhujū ca, suvaco cassa mudu anatimānī. (「자애경」, Sn1:8)
34) Santussako ca subharo ca, appakicco ca sallahukavutti;
Santindriyo ca nipako ca, appagabbho kulesuva’nanugiddho.
Na ca khudda’mācare kiñci, yena viññū pare upavadeyyuṁ;
35) Sukhino vā khemino hontu, sabbasattā bhavantu sukhitattā.
36) Ye keci pāṇabhūt'atthi, tasā vā thāvarā vā navasesā;
Dīghā vā ye va mahantā majjhimā rassakā aṇukathūlā.
37) Diṭṭhā vā yeva addiṭṭhā, ye va dūre vasanti avidūre;
Bhūtā va sambhavesī va, sabbasattā bhavantu sukhitattā.
38) Na paro paraṁ nikubbetha, nātimaññetha katthaci na kañci;
Byārosanā paṭighasaññā, nāññamaññassa dukkhamiccheyya.
39) Mātā yathā niyaṁ putta māyusā ekaputtam’anurakkhe;
Evampi sabbabhūtesu, mānasaṁ bhāvaye aparimāṇaṁ.
40) Mettañca sabbalokasmiṁ, mānasaṁ bhāvaye aparimāṇaṁ;
Uddhaṁ adho ca tiriyañca, asambādhaṁ averaṁasapattaṁ.
41) Tiṭṭhaṁ caraṁ nisinno vā, sayāno vā yāvatā’ssa vitamiddho;
Etaṁ satiṁ adhiṭṭheyya, brahma’metaṁ vihāra’midha māhu.
42) Diṭṭhiñca anupaggamma sīlavā, dassanena sampanno;
Kāmesu vineyya gedhaṁ, na hi jātu’ggabbhaseyya punaretīti.
43) 가장 많이 독송되는 보호경(빠릿따paritta)이 11가지가 있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망갈라숫따maṅgala-sutta(축복경. Sn2:4), 라따나숫따ratana-sutta(보배경. Sn2:1), 멧따숫따metta-sutta(자애경. Sn1:8), 칸다숫따khandha-sutta([위험에서] 멀어짐 경. J203, A4:67), 모라숫따mora-sutta(공작새 경. J159), 왓따숫따vaṭṭa-sutta(메추라기 경. J35), 다작가숫따dhajagga-sutta(깃발 꼭대기 경. S11:3), 아따나띠야숫따āṭānāṭiya-sutta(D32), 앙굴리말라숫따aṅgulimāla-sutta(M86), 봇장가숫따bojjhaṅga-sutta(깨달음의 요소 경. S46:14~16), 뿝반하숫따pubbaṇha-sutta(아침 경. A3:150).
44) 「보디 왕자 경」(M85), 「정진의 요소 경」(A5:53) 참조.
45) 이 다음에 ‘압빠갑보- 꿀레-수와나누깃도-’에 대한 설명이 나와야 하지만 법문에 이 부분이 빠져 있다. ‘무례하고 거칠지 않으며 사람과 신도들에게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46) 이중 아나함은 감각적 욕망과 성냄을 완전히 제거했으나 아직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갈애’가 남아 있기에 ‘따사’에 포함됐다.
47) ‘아누까툴라aṇukathūlā’에서 ‘아누까aṇuka’는 아주 작고 미세한 존재들을 말하며, ‘툴라thūlā’는 거칠고 두툼한 존재들을 말한다. 난다말라 사야도는 여기서 ‘아누까’를 대표로 설명했다.
- <난다말라비왐사 큰스님 가르침> 中, 위뿔라냐니 식카와띠님 옮김
(2023년 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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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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