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인(호, 명) |
청인(호, 명) |
합계(호, 명) |
비중(%) | ||||||
호수 |
인구 |
호수 |
인구 |
호수 |
인구 |
조선인 |
청인 |
계 | |
北崗* |
1,993 |
11,399 |
1,906 |
15,266 |
3,899 |
26,665 |
10.3 |
13.8 |
24.1 |
西崗** |
1,665 |
9,104 |
777 |
4,694 |
2,432 |
13,798 |
8.2 |
4.3 |
12.5 |
南崗*** |
5,312 |
26,716 |
629 |
4,593 |
5,941 |
31,309 |
24.2 |
4.2 |
28.4 |
茂山間島 |
1,504 |
7,004 |
37 |
80 |
1,541 |
7,084 |
6.3 |
0.1 |
6.4 |
會寧間島 |
1,895 |
9,115 |
8 |
17 |
1,903 |
9,132 |
8.3 |
0.0 |
8.3 |
鍾城間島 |
3,345 |
16,674 |
23 |
81 |
3,368 |
16,755 |
15.1 |
0.1 |
15.2 |
嘎呀河流域 |
368 |
2,888 |
428 |
1,916 |
796 |
4,804 |
2.6 |
1.7 |
4.3 |
穩城間島 |
29 |
99 |
92 |
724 |
121 |
823 |
0.1 |
0.7 |
0.8 |
합계 |
16,101 |
82,999 |
3,900 |
27,371 |
20,001 |
20,370 |
75.1 |
24.9 |
100.0 |
자료 : 김춘선, ‘북간도’지역 한인사회의 형성연구, 국민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8, p.88.
* 북강은 연길시 북부의 의란구(依蘭溝) 부근을 지칭함.
** 서강은 해란강 상류지역을 지칭함.
*** 남강은 해란강 하류 용정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지칭함.
당시 북간도지역의 한인 총 수는 82,999명에 달하는데, 그 중 두만강 연안인 무산간도, 회령간도, 종성간도, 온성간도의 한인 이주민 수는 32,892명인데 비해 내지인 남강, 북강, 서강, 가야하 유역의 한인 이주민 수는 50,107명으로서 전체 하인 수의 60%를 점하였다.
광서시기(1875~1908년)에 설립된 조선인마을의 분포는 그림 5와 같다.
이 그림에서 알 수 있는 바, 함풍-동치시기에 비해 1875년 광서시기에에 이르러서는 조선인 마을의 수가 증가되고 분포 범위가 훨씬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인의 분포는 주로 회령, 종성 대안과 용정, 연길지역에 집중하였고 화룡현 중부와 왕청현 남부 및 훈춘현 남부에는 상대적으로 적게 분포하였으며 그 외의 지역에는 거의 없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주 : 이 그림은 심혜숙, 상게논문, 1992를 참조하여 재구성하였음.
< 그림 5. 1875~1908년에 북간도지역에 설립된 한인촌 >
1905년 11월 일제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고 1910년에 대한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농토를 빼앗기고 탄압에 시달리던 파산된 농민들의 간도로의 이주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광복과 국권을 회복하려는 반일인사들과 민족독립운동가들의 집단이주가 활발해졌다. 여기에 1909년 청ㆍ일 양국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을 통하여 북간도 잡거구(雜居區)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은 거주권과 토지 및 가옥의 소유권을 인정받게 되면서 조선인의 북간도 이주는 더욱 보편화되었다. 한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세계시장에서의 곡가인상으로 만주의 관리와 지주들이 벼농사에 능한 조선인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벼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1915년 일제가 중국의 동북지역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북양정부를 강박하여 21개 조항을 체결한 후 동북지역의 토지를 마구 약탈하고 한인을 고용하여 논을 개발하게 함으로써 조손인은 급격히 증가되었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 세계 시장의 쌀값이 상승되자 중국의 지주와 관료, 일본의 동척, 동아권업주식회사 등 독점 자본가들이 동북지역의 농산물을 약탈하기 위하여 토지를 점령하고 인력확충을 위해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이주시켜 토지를 개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동북지역 특히 북간도지역으로의 중국인 이주자가 폭증하였다.
주 : 이 그림은 심혜숙, 상게논문, 1992를 참조하여 재구성하였음.
< 그림 6. 1909~1930년에 설립된 북간도지역의 한인촌 >
그림 6에서 알 수 있듯이 선통~민국시기에 새롭게 설립된 조선인 마을은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연안에 집중되었다. 이는 이들 지역은 벼농사에 적합한 기후조건과 지형조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 조선인 마을의 분포는 멀리 안도현으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을 나타내어 조선인 분포가 더욱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1930년까지 북간도지역의 조선인 분포 상황은 두만강 대안과 해란강 및 부르하통하 유역에 집중되었으며 화룡과 안도 및 왕청과 같은 외곽 지역에는 비교적 적게 분포되었다(그림 7 참조).
주 : 이 그림은 심혜숙, 상게논문, 1992를 참조하여 재구성하였음.
< 그림 7. 1851~1930년간 북간도 지역의 한인촌 분포 >
그림 7에서 알 수 있는 바, 1851~1930년간 북간도지역의 조선인은 주로 연길과 용정을 중심으로 한 연길현의 동남부와 화룡현의 동북부에 가장 집중되었고 왕청현과 훈춘현에는 매우 적게 분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출신지를 보면 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함경도와 평안도 주민이 대부분이었다. 1894년에 실시한 재만 조선인 출신지 조사에 의하면 간도 지역 조사대상 65,000명 가운데 함경도 출신이 32,000명, 평안도 출신이 14,400명이었고 1904년에는 78,000명 가운데 함경도 출신이 32,000명, 평안도 출신이 23,500명이었다. 그리하여 두만강 이북은 함경도, 압록강 이북은 평안도 출신이 대부분을 점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Ⅳ. 연변지역 불교의 시ㆍ공간적 분포
1. 1909년 이전 시기
현재까지 밝혀진 역사기록에 의하면 청조에 들어서서 연변지역에서 가장 일찍 세워진 사찰은 曹洞宗파의 승려들이 乾隆 8년(1743년)에 현재의 훈춘시 서쪽에 설립한 靈寶寺이다. 이 사찰의 설립시기에 대해서는 1711년, 1714년, 1743년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그 중 대부분은 1743년이라고 기록하는 것으로 보아 이 설이 정확하다고 사료된다. 영보사가 설립된 후 훈춘시에는 불교신도들이 급증하여 반 이상의 사람들이 부처를 믿었으며 불향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1875년에 祖師廟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훈춘은 연변지역에서 불교가 가장 일찍 발전한 지역의 하나로 되었다. 무엇 때문에 훈춘에 불교사찰이 이토록 일찍 들어섰을까?
현재의 훈춘은 중, 북, 러 3개국이 접경한 지역에 속해 있지만 영보사가 설립될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은 두만강을 사이 두고 조선과 인접한 2개국의 접경지역 이었다. 1714년 청조는 변경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훈춘에 협령(協領)을 파견하여 영고탑 부도통에 예속시켰다. 그리하여 훈춘에는 처음으로 이 지역의 군사와 행정을 관장하는 기구가 설치되게 되었다. 당시 훈춘협령의 관할범위는 동북쪽으로 러시아 연해주 시호테알린(Sichote Alin)산맥과 영고탑이 만나는 곳까지; 동쪽과 남쪽은 바다에 인접해 있는데 수분하 하구에서 두만강 하구사이의 해안과 도서; 서쪽은 현재 和龍市 崇善鎭에서 두만강 하구까지; 서북쪽은 할바령까지; 북쪽은 현재 흑룡강성 寧安시까지의 광활한 범위이다.
그렇다면 청조는 왜 훈춘에 군사와 행정중심을 설치하였을까? 그 원인에 대해 顧松潔(2007)은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첫째는 훈춘은 청조 조상의 발상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여기에 관리 기구를 설치하였다. 훈춘지역은 당시 봉금구 내의 3개 지역의 하나인 南荒圍場에 속했다. 康熙帝 시기에 국내 정세가 안정 되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자연재해가 빈번하면서 많은 내지인들이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들의 유입을 방지하고 또한 이 지역의 진귀한 특산물 채취를 저지하기 위해서도 관리기구가 필요하였다. 둘째는 당시 조선인의 범월(犯越)을 저지하기 위해서이다. 청조에 이르러 조선인들이 빈번히 월경하여 수렵하고 약탈하는 사례가 증가하면서 청조는 변경에 근접한 훈춘에 관리 기구를 설치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로부터 당시 훈춘은 현재의 연변지역보다도 훨씬 넓은 지역을 관장하는 군사요충인 동시에 행정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훈춘에는 비록 봉금을 실시하는 지역에 속해 있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인가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며 이들 때문에 사찰 등의 종교 시설이 생겼다고 사료된다. 당시 불교는 관내에서 이주해 온 한족들 속에서 먼저 전파되었다가 점차 만주족에게도 전파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연변지역의 군사·행정중심지로서의 훈춘에는 당연히 만주족이 많이 분포되어 불교가 성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봉금령이 해제되기 전인 1870년대 이전까지 훈춘을 제외한 여타 지역에는 사찰이 거의 없었다. 봉금령이 해제되어 이주민이 증가하면서 점차 사찰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구체적인 상황은 다음의 표 2와 같다.
표 2. 연변지역에 설립된 사찰의 시·공간적 분포
지역 |
1909년 이전 |
1909-1931 |
1932-1949 |
총계 | |||||||||
조선 |
중국 |
일본 |
합계 |
조선 |
중국 |
일본 |
합계 |
조선 |
중국 |
일본 |
합계 | ||
연길시 |
- |
- |
- |
- |
1 |
2 |
- |
3 |
- |
- |
- |
- |
3 |
용정시 |
- |
1 |
- |
1 |
6 |
7 |
3 |
16 |
- |
- |
1 |
1 |
18 |
화룡시 |
1 |
- |
- |
1 |
4 |
4 |
1 |
9 |
1 |
- |
- |
1 |
11 |
도문시 |
- |
- |
- |
- |
2 |
2 |
- |
4 |
2 |
- |
9 |
11 |
15 |
훈춘시 |
- |
2 |
- |
2 |
- |
1 |
- |
1 |
- |
1 |
- |
1 |
4 |
돈화시 |
- |
2 |
- |
2 |
- |
- |
- |
- |
- |
- |
- |
- |
2 |
안도현 |
- |
- |
- |
- |
- |
4 |
- |
5 |
- |
- |
- |
- |
5 |
왕청현 |
- |
- |
- |
- |
3 |
3 |
- |
6 |
- |
- |
- |
- |
6 |
계 |
1 |
5 |
- |
6 |
16 |
23 |
4 |
43 |
3 |
1 |
11 |
15 |
64 |
자료: 부록1 참조
위 표에서 알 수 있듯이 1909년 이전에 설립된 사찰은 도합 6개인데 그중 중국사찰은 5개로서 83.3%를 점하여 대부분을 점하였고 조선사찰은 1개로서 16.7%밖에 안되었고 일본사찰은 없었다. 이는 청조시기부터 개척된 연변지역의 최초의 개척자들은 만주족과 중국 내륙에서 이주해온 한족으로서 당시의 사찰은 대부분 이들에 의해 설립되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청조 말기에 이르러 조선인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당시 연변지역의 총 인구에서조선인이 비록 대부분을 점하였지만 대부분이 생계를 위해 이주한 서민들이어서 불교와 같은 종교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당시 연변지역에는 아직 일본의 세력이 뻗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사찰은 없었다.
이시기 사찰의 지역별 분포를 살펴보면 용정, 화룡, 훈춘, 돈화 등의 지역에 분포되었다. 그 중 훈춘은 앞에서도 지적하였지만 연변 지역에서 가장 일찍 개척된 지역이었기 때문이고 용정과 화룡은 조선인에 의해 일찍 개척된 지역이며 돈화는 한족에 의해 일찍 개척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그리하여 훈춘과 돈화에는 중국사찰이 각각 2개, 용정에는 1개 설립되었고 화룡에는 조선사찰이 1개 설립되었다.(표 1 참조)
연변지역에서 조선사찰 중 가장 일찍 설립된 사찰은 현재까지 거의 전부 1911년에 김본연 스님이 설립한 雲興寺로 보고 있다. 그러나 화룡시 선경대에 위치한 칠성사에 대한 유연산의 소개에서는 이 사찰이 일찍 1777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물론 학술 서적이 아닌 기행문이어서 신빙성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1911년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서 적어도 1911년에 설립된 운흥사보다 먼저 설립된 것은 확실하다.
2. 1909-1931년 시기
1909년부터 1932년 사이의 두 번째 시기에 설립된 사찰은 도합 43개로서 3개시기 중 가장 많이 설립되었다. 그 중 중국사찰은 23개로서 전체의 53.5%를 점하였고 조선사찰은 16개로서 전체의 37.2%를 점하였으며 일본사찰은 4개로서 9.3%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중국사찰은 여전히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중국사찰은 주로 인구가 조밀한 부르하통하와 해란강 유역에 집중되었다. 조선사찰은 비교적 빠른 증가세를 보였는데 그 분포범위는 중국사찰과 비슷하지만 중국사찰에 비해 확장되는 추세를 보였다(그림 8과 표 2 참조). 이는 조선인의 분포범위가 급속히 확대되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이시기 사찰의 지역적 분포를 살펴보면 돈화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모두 사찰이 설립되었다. 그중 용정에는 조선, 중국, 일본 사찰이 각각 6개, 7개, 3개 설립되어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는 용정은 당시 연변지역의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이외에 화룡, 왕청, 도문 등의 지역에도 비교적 많은 수를 보이고 있다.
이 시기에 일본사찰이 설립되기 시작한 것이 눈에 뜨이는데 가장 일찍 설립된 사찰은 1921년에 일본 淨土宗과 禪宗派에서 용정에 설립한 本愿寺間島布敎所이다. 1907년 용정에 통감부간도파출소가 설립되고 1909년에 간도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연변, 특히 총영사관이 설치된 용정에 뻗치면서 이곳에도 일본사찰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일본 불교의 연변 침투에 대해 연변문사자료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찍이 금세기 20년대 초부터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연변 땅에 저들의 불교사찰을 애써 운영하며 조선불교도들을 “무마하는 정책”으로써 조선인들의 반일투지를 마비시키려고 시도하였지만, 그 음험한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그것은 용정, 도문, 팔도구 등지의 조선불교계인 “귀주사파”가 광범위한 조선인들의 지지를 얻었고 연변불교계서 언제나 우세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 이었다.
따라서 연변지역에도 일본사찰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 표 3. 연변지역 사찰의 해발고도별 분포 >
단위: m, 개(%)
해발고도 |
1909년 이전 |
1909-1931년 |
1931-1949년 |
합계 |
600이하 |
5(83.3) |
38(86.3) |
13(92.8) |
56(87.5) |
600-1200 |
1(16.7) |
5(11.4) |
- |
6(9.3) |
1200-1800 |
- |
- |
1(7.2) |
1(1.6) |
1800-2400 |
- |
1(2.3) |
- |
1(1.6) |
2400이상 |
- |
- |
- |
- |
합계 |
6(100.0) |
44(100.0) |
14(100.0) |
64(100.0) |
3. 1932-1949년 시기
1932-1949년에 설립된 사찰은 도합 15개로서 두 번째 시기에 비해 훨씬 적은 수를 나타내었다. 그 원인은 20년대 말부터 연변지역은 무신론을 주창하는 공산주의 사조가 점차 서민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신자들이 줄어든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진다. 그중 조선사찰은 3개로서 전체의 20%를 점하였고 중국사찰은 1개로서 전체의 6.7%를 점하였고 일본사찰은 11개로서 나머지 73.3%를 점하여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이 시기 연변지역 사찰의 설립에 있어 가장 뚜렷한 것은 일본사찰이 급속히 증가한 것이다. 1931년 9.18사변 후, 만주국은 불교를 민중들의 사상을 마비시키는 도구로써 인식하고 용정과 도문 등의 지역에 “불교부녀회”와 같은 사회단체를 만들고 “금연운동”과 “금주운동”과 같은 활동을 조직하여 사람들의 인심을 사서 사회영향력을 확대함으로서 열세에 처한 교세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조치는 만주국의 지지를 얻었고 조선인 불교계의 재정 사정이 어렵고 불교 신자들의 생활고 등의 원인으로 일본 불교가 비교적 빠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중 도문에 10개의 일본사찰이 설립되어 이시기에 설립된 사찰 총 수의 66.7%를 점하는 것이다. 이는 만주국 시기에 들어서서 철도와 같은 대규모 인프라가 건설 되었는데 도문이 그 중심선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1932년부터 일제는 선후로 만주지역의 철도망과 한반도의 철도망을 연결시키는 주요한 철도간선인 돈도(돈화-도문)철도와 도녕(도문-영안)철도를 건설하였다. 이 두 철도 간선의 시발지가 곧 도문이었다. 그리하여 도문은 인적이 드문 작은 마을로부터 일약 동북이 조선과 일본과의 무역 중심지로 급부상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모여들어 약탈적인 상품거래의 거점으로 되었다. 이와 같은 원인으로 당시 도문에 일본사찰이 많이 설립되었다고 사료된다.
< 그림 8. 연변지역 사찰의 분포도 >
Ⅴ. 대각교회의 설립과 위치 비정
현재까지 대각교회와 그의 설립자인 백용성스님과 관련하여 적지 않은 연구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여기에서 대각교회의 설립시기와 위치 및 선농단의 위치 등에 관련해서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그동안 이미 알려진 자료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발굴한 일부 자료를 바탕으로 상기 문제들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분석을 하고자 한다.
1. 대각교회의 설립 시기와 관련하여
대각교회의 설립시기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1927년 3월 설이다. 한보광은 중국에서 입수한 자료에 의해 대각교회가 1927년 3월에 건립되었다고 하면서 “이 점은 朝鮮の類似宗敎에서 밝힌 바와 같이 ‘丁卯年 春에 吉林省 延邊地方에 大覺敎堂을 건립하였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고 하였다.
둘째는 1927년 9월 11일 설이다. 여기에서는 佛敎 40호의 「大覺敎堂奉佛式」이라고 하는 기사 중 ‘용정의 대각교당은 1927년 9월 11일 봉불식을 거행했다고 하였다’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한보광은 이와 관련해서 ‘이 기사에 의하면, 1927년 3월에 시작한 용정의 대각교당은 그 동안 불사를 진행하여 동년 9월 11일에 봉불식을 가졌던 것 같다’고 추론하고 있다. 봉불식이란 부처님을 새로 모셨을 때 삼심불에게 생명력을 갖춘 불상으로서의 증명을 받아 귀의의 대상으로 모시는 의식이고 불교의 불구를 신앙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의례임을 감안할 때 사찰을 먼저 설립하고 후에 봉불식을 가지는 것이 합리적인 수순이기에 한보광의 추론이 맞는다고 사료된다.
셋째는 1927년 4월 8일 설이다. 이 설은 저자가 처음으로 발굴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昭和二年二月に京城の白相奎, 高鳳雲, 崔昌雲三氏が來龍して本佛寺事業を永久鞏固にすべく土地および山林、家屋等を寄與して右三氏と信徒代表者間に誓約書を作成して今日に至つたのです、同年四月八日に奉佛開敎式を擧行し白相奎氏は施主高鳳雲崔昌雲兩女史より喜捨金一萬餘圓を得て明月溝と太平洞に土地を買收して龍井大覺敎に寄附したもので...
이 기사의 내용은 ‘1927년 2월에 서울의 백상규(백용성을 가리킴), 고봉운, 최창운 3명은 용정으로 와서 본 불사 사업을 영구적으로 공고히 하기위해 토지 및 삼림과 가옥 등을 기여하여 상기 3인과 신도 대표자 사이에 서약서를 작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년(1927년) 4월 8일에 봉불개교식을 거행하였는데 백상규씨는 시주 고봉운과 최창운 두 여사의 희사금 1만 여원을 받아 명월구와 태평동에 토지를 매수하여 용정 대각교에 기여한 것으로서…’ 이다. 이 기사는 1927년 봄에 설립된 대각교회의 정확한 설립일을 기록한 것으로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까지 미스테리로 남았던 대각교회의 설립일을 1927년 4월 8일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1922년 서울에 대각교가 설립될 당시 정확한 시간이 역시 4월 8일인 점을 감안 할 때 용정의 대각교회 설립일도 4월 8일이라는 점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어렵다. 즉 1927년 4월 8일이 용정 대각교회의 설립일임을 더욱 뒷받침한다고 하겠다.
2. 선농단의 설립지와 관련하여
백용성은 용정에 대각교회를 설립한 뒤 선농불교의 실천의 장으로서 자급적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선농단을 건설하였다. 선농단의 설립지(혹은 토지 매입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옹성랍자(翁聲磖子)와 명월구(明月溝)라는 설이다. 이와 관련된 근거자료는 다음과 같다.
① 중외일보 1928년 1월 12일자의 “대각교설법회 성황리에 폐회”라는 기사에서는 “룡뎡에서 오륙십리되는 운출(?)나자(雲出磖子)라는 곳에다가 수 만평의 토디를 사서”라고 적고 있다. 여기에서 지칭하는 운출(?)나자(雲出磖子)는 옹성랍자(瓮聲磖子)의 오기로 보인다. 왜냐면 연변지역에 운출(?)나자(雲出磖子)라는 지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옹성랍자란 현재 안도현 명월진의 옛지명이다. 명월진 중심의 작은 산줄기(이룡산)를 따라 부르하통하가 흐르는데 하천 연안은 절벽이 이어진다. 절벽이 굽이치는 곳에 높이 속은 암석이 하나 있는데 이를 옹성랍자라고 한다. 옹성(瓮聲)이란항아리 소리라는 뜻이고 랍자(磖子)란 바위라는 뜻이다. 즉 부르하통하가 바위를 굽이치며 흐를 때에 항아리 소리가 난다고 하여 옹성랍자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점차 이곳의 지명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밝은 달이 뜨면 마치 대낮처럼 밝아진다고 하여 명월구라고도 불렀다. 1933년 3월 15일에 돈도철도(돈화-도문)가 개통되어 亮兵台, 明月溝, 茶條溝, 楡樹川 등의 철도역이 설치되면서 翁聲磖子를 明月溝로 공식적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② 동아일보 1938년 4월 3일자의 “龍井大覺敎會에 突然解散通告”라는 기사에서는
지금으로부터 十二年전에 경성에 잇는 백상규, 고봉운, 최창운(白相奎, 高峰雲, 崔昌雲)三씨가 三萬三千원의 대금으로 명월구급 용정에 토지건물을 매입하여 용정대각교회를 창설하고...
라고 적고 있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백용성 등은 선농단을 건설하기 위하여 명월구에는 토지를, 용정에는 건물을 매입하였다.
이상의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백용성 스님은 당시 명월구(옹성랍자)에서 토지를 구입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명월구(옹성랍자)의 관할범위 내 모 처에 구입했는지 아니면 명월구(옹성랍자) 자체에 구입했는지는 알 수 없다.
두 번째는 영봉촌이라는 설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間島의 延吉 明月村 寧鳳村에 七十餘 晌의 田地를 買得하고 敎堂을 設立하여 僧侶의 半農半禪 生活의 嚆矢를 作한지 벌서 十五年이라 하니...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선농단의 설립지를 명월촌과 영봉촌 두 곳으로 보거나 혹은 연길현 명월촌 소속의 영봉촌 한곳으로 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든 후자의 경우든 우리는 여기서 영봉촌의 위치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봉촌이라는 지명은 당시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안도현에는 鳳寧村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만약 영봉촌이 봉영촌의 오기라면 봉영촌은 곧 선농단이 위치했던 곳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면 봉영촌은 현재의 어느 곳일까? 이와 관련해서 龍井縣志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용정현지에 이르기를 1936년 연길현의 街村名 속에 鳳寧村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여기서 街村이란 당시 현급 행정구역 바로 하위의 행정단위로서 현재의 읍·면에 해당된다. 당시 봉영촌의 소재지는 양병태(亮兵台)라고 적혀있다. 때문에 봉영촌은 현재의 안도현 소재지 명월진에서 서북쪽으로 13킬로 떨어진 亮兵鎭 소재지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선농단은 현재의 양병진 소재지에 있었을까? 이는 다음의 “용산촌 설”을 통하여 확인하고자 한다.
세 번째는 용산촌이라는 설이다.
백용성이 중앙행정에 대한 희망 사항을 적은 글에는 다음의 내용이 있다.
아-우리는 광이들고 호무가지고 힘써 勞動하여 自作自給하고 他人을 依賴치 말자. 余는 此를 覺悟한 제가 二十年 前이나 勢 不得已 하지 못하고 잇다가 五六年 前에 中國 吉林省 瓮聲磖子 龍山洞에 數千日耕 土地를 買收하여 吾敎人으로 自作自給케 하여 쓰며 또 果農을 從事하야 五六年 間을 勞力中이다.
여기에서는 길림성 瓮聲磖子 龍山洞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용산동은 위에서 말한 봉영촌과 동일한 지명일까? 아니면 또 다른 곳일까? 다행히 안도현 지명지에는 龍山村이라는 지명이 존재한다. 이 지명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용산촌에 관해서는 다음의 소개가 있다.
龍山村距鎭駐地明月溝北4.6公里. 民國初年卽有住戶, 其西有石砬子似龜頸, 俗稱“王八脖子”. 1935年建屯, 原名不雅, 視其屯后山形如龍, 故更爲“龍山”. … 1935年日僞幷屯時爲延吉縣鳳寧區龍山屯, 1949年爲安圖縣鳳寧區龍山村.
위의 내용은 “용산촌은 명월구 북쪽 4.6킬로 떨어진 곳에 있는데 민국 초기부터 이미 사람이 살고 있었다. 촌의 서쪽에 있는 바위는 마치 자라목처럼 생겨서 “王八脖子”라고 불렀다. 1935년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 이름이 너무 속되어 마을 뒤편에 있는 용처럼 생긴 산을 본따서 龍山이라고 고쳐 불렀다.… 1935년에 일제시기 연길현 봉영구 용산툰으로 되었으며, 1949년에는 안도현 봉영구 용산촌으로 되었다.”는 뜻이다.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사항은 용산촌은 봉영구 소속의 구체적인 마을이라는 것이다. 위의 두 번째 설에서 지칭하는 봉영촌은 용산촌 상위의 마을로서 구체적인 마을보다도 街村과 같은 일정한 범위를 지칭하는 지명으로서 선농단이 구체적으로 봉영촌 관할 하의 어느 곳인지를 판단하기 어려웠으나 위의 글에서 용산촌은 봉영구 소속의 마을이라고 하였으므로 선농단은 구체적으로 용산촌에 위치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네 번째는 太平洞이라는 설이다.
위의 대각교회 설립시기와 관련된 間島新報 1938년 4월 12일자의 「龍井大覺敎に對し京城本府から解散命令」이라는 기사에서는 太平洞이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다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同年四月八日に奉佛開敎式を擧行し白相奎氏は施主高鳳雲崔昌雲兩女史より喜捨金一萬餘圓を得て明月溝と太平洞に土地を買收して龍井大覺敎に寄附したもので...
즉 백상규는 시주 고봉운과 최창운으로부터 희사금 1만원을 얻어 명월구와 태평동에 토지를 매입하여 용정대학교에 기부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는 선농단의 위치와 관련해서 새롭게 등장하는 지명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백상규는 명월구와 태평동 두 곳에 토지를 매입했다. 한곳은 명월구에 구입한 토지로서 구체적으로 앞에서 분석한 명월구 용산촌일 것이고 다른 한곳은 태평동이라는 곳이다. 태평동이라는 곳은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킬까? 간도지역 개척 당시도 그렇고 현재도 그렇고 연변지역에 태평이라는 염원을 반영한 지명은 매우 많다. 때문에 위의 기사만으로는 태평동이라는 곳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다만 당시에 관리의 편의를 위하여 명월구와 가까운 부근에 토지를 매입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도현 명월진 島興村과 명월진 시가지 내의 九龍街道일 가능성이 높다(그림9 참조). 만약 명월진 시가지 내의 구룡가도가 맞다면 위에서 제시한 명월촌에서 매입했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 그림 9. 옹성랍자부근의 지도 >
3. 선농단의 면적과 관련하여
선농단의 면적에 대해서는 다음의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째, 수천일경이라는 설
한보광의 논문에서는 다음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五六年 前에 중국 吉林省瓮聲磖子 龍山洞에 數千日耕 土地를 買收하여 吾敎人으로 自作自給케 하였으며, 또 果農을 從事하여 五六年間을 勞力中이다.
내용인즉, 5, 6년 전에 중국 길림성 옹성랍자 용산동에 수천일경의 토지를 매입하여 교인들이 자작자급하게 하였으며 또 과농에 종사하여 5, 6년 동안 노동중이다. 여기서 1日耕은 10만 勺이고 1勺은 0.011坪이다. 이로부터 1日耕은 1,100坪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수천 일경은 2천 일경에서 9천 일경에 해당될 수 있어 평수로는 220만평에서 990만평에 달할 수 있다. 이정도로 큰 면적은 표적이 커서 일본인들의 주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고 또한 당시에 대각교회의 설립을 위해 2만3천원의 대금을 지원받았다는데 이만큼의 돈으로 용정 시내에 대각교회 부지와 건물을 사고 나서 나머지로 이토록 큰 면적의 토지를 구입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둘째, 70여 상이라는 설
龍城禪師語錄에는 다음의 내용이 실려 있다.
間島의 延吉明月村 寧鳳村에 七十餘晌의 田地를 買得하고 敎堂을 建立하야 僧侶의 半禪半農生活의 嚆矢를 作한지 벌서 十五年이라하니…
위의 글에서는 간도의 연길 명월촌과 영봉촌에 70여 晌의 밭을 매입하여 교당을 건립하여 승려의 반선반농 생활을 한지 15년이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1晌은 2,172.6평으로서 70여 晌이면 152,082평에서 171,635평 사이로 추측할 수 있다. 현지답사에 의하면 명월구와 용산촌에 이와 같은 큰 면적을 경작할 수 있는 평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수 만평이라는 설
중외일보 1928년 1월 12일자의 “대각교설법회 성황리에 폐회”라는 기사에는 다음의 내용이 실려있다.
룡뎡에서 오륙십리되는 운출(?)나자(雲出磖子)라는 곳에다가 수 만평의 토디를 사서…
위의 글에서는 용정에서 오륙십리 되는 안도에다가 수 만평의 토지를 샀다고 한다. 수 만평이라면 2만에서 9만평 사이의 면적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적은 위에서 지적한 수천일경과 70여 晌보다는 적은 면적으로서 현실성이 있어 보인다.
Ⅵ. 나오는 말
본 연구에서는 연변지역 불교관련 문헌들에서 등장하는 사찰을 조사․정리한 것을 바탕으로 시공간적 차원에서 사찰의 분포 특징에 대해 살펴보았다. 아울러 현재까지 대각교회의 설립시기와 선농단의 위치 및 규모에 대한 연구 결과와 새롭게 발굴한 자료를 바탕으로 보다 진일보한 해석을 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연변지역에서 가장 일찍 설립된 사찰은 중국인들이 1743년에 훈춘시 서쪽에 설립한 靈寶寺이다. 이를 시효로 훈춘은 당시 연변지역에서 불교가 가장 성행한 지역으로 되었다. 그 원인은 훈춘이 처한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연변에서 조선인이 가장 일찍 설립한 사찰은 현재까지 연변지역에서 조선인에 의해 설립된 사찰 중 가장 일찍 설립된 사찰은 현재까지 거의 전부 1911년에 김본연 스님이 설립한 雲興寺로 보고 있다. 그러나 화룡시 선경대에 위치한 칠성사는 그보다도 훨씬 이전인 1777년에 설립되었다. 일본인이 가장 일찍 설립한 사찰은 1921년에 일본 淨土宗과 禪宗派에서 용정에 설립한 本愿寺間島布敎所 이다. 연변지역 사찰 중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 가장 일찍 설립한 사찰은 각각 1743년에 훈춘에 설립한 영보사, 1777년 화룡 선경대에 설립한 칠성사, 1921년 용정에 설립한 본원사간도포교소이다.
2. 1909년 이전에 설립된 사찰은 도합 6개인데 이중 5개는 중국사찰이고 1개는 조선사찰이며 일본사찰은 없다. 이들은 각각 훈춘, 돈화, 용정, 화룡에 분포되었다.
3. 1909-1931년 사이에는 가장 많은 수의 사찰이 설립되었다. 이시기 사찰의 분포 특징은 평야가 많아 경작에 유리한 부르하통하와 해란강 및 가야하 유역에 사찰이 많이 설립되었다. 그중 중국사찰과 조선사찰의 수는 급증하였고 일본사찰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4. 1932-1949년 사이에는 도합 15개의 사찰이 설립되어 두 번째 시기에 비해 훨씬 적은 수를 보였다. 그 원인은 20년대 말부터 연변지역은 무신론을 주창하는 공산주의 사조가 점차 서민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신자들이 줄어든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진다. 그 중 도문에 일본사찰이 11개 설립되어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였다. 이는 30년대에 일제에 의해 연변지역에 부설된 2갈래의 간선철도의 종착역이 모두 도문이 되면서 이곳이 급성장함에 따라 일본의 세력이 급팽창하게 되어 일본사찰도 덩달아 이곳에 급증하게 되었다고 사료된다.
다음으로 대각교회의 설립시기와 선농단의 위치 및 면적을 추정한 에 대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대각교회의 설립 시기는 1927년 봄, 1927년 4월 8일, 1927년 9월 11일 등 다양한 설이 있다. 그중 날짜가 확실한 것이 1927년 4월 8일과 1927년 9월 11일이다. 전자는 대각교회 개교식을 한 날이고, 후자는 대각교회 봉불식을 거행한 날로서 양자 모두 중요한 기념일이다.
2. 선농단의 위치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현재까지는 옹성랍자 혹은 명월촌과 봉영촌이라는 설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필자는 옹성랍자와 명월촌은 구체적인 지명보다도 관할 범위를 지칭한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봉영촌도 구체적인 지명보다도 관할범위를 지칭한다고 사료된다. 때문에 선농단의 구체적인 위치로 보기 어렵다. 봉영촌은 명월촌의 관할 하에 있었고 용산촌은 봉영촌의 관할 하에 있는 구체적인 마을이기 때문에 용산촌이 선농단의 구체적인 위치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태평동이라는 지명은 비슷한 곳이 너무 많아 현재까지 발굴된 사료로는 판단키 어렵지만 명월진에서 비교적 가까운 안도현 명월진 도흥촌 혹은 명월진 시가지 내의 구룡가도라고 판단된다.
3. 선농단의 면적에 대해서도 다양한 설이 있는데 수천일경과 70여상은 너무 큰 면적으로서 현실적으로 어렵다. 용산촌 현지답사에서도 이 지역에는 수천일경과 70여 상 정도에 달하는 규모의 평지가 없었다. 명월촌과 봉영촌(양병진)에도 마찬가지로 그만한 면적의 대지가 없다. 그러나 수만 평이라는 설은 비교적 현실에 가까운 면적이라고 사료된다.
상기 문제들과 관련하여 지속적인 사료 발굴을 통하여 선농단과 대각교회의 위치를 더욱 정확히 비정해야 할 것이다. 이는 앞으로 연변지역 불교의 발전과 관광자원 개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부록 1. 연변지역 사찰 개황
개설 |
명칭 |
종파 |
당시위치 |
현재위치 |
비고 |
청나라 乾隆 8년 (1743년) |
靈寶寺 (혹은 西大廟) |
중국 |
琿春 |
琿春 市內 서쪽 |
출전: 政協吉林省琿春縣委員會文史資料委員會編, 琿春文史資料第3輯, 1990, 124;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延邊文史資料第8輯/宗敎史料專輯, 1997, 65;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編纂, 吉林省志卷44/宗敎志,吉林人民出版社, 2000, 58 등. 주: 政協吉林省琿春縣委員會文史資料委員會編, 琿春文史資料第3輯, 1990, 124에서는 康熙53年(1714年)에 설립되었다고 함.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編纂, 2000, 상게서, 95에서는 1714년 혹은 1743년에 설립되었다고 함. 琿春市地方志編纂委員會, 2000, 琿春市志, 吉林人民出版社, 160에서도 1743년에 설립되었으며 면적은 250方丈이고 佛殿 3칸, 關聖殿 3칸, 곁채 8칸, 門樓 3칸, 鐘鼓樓 2동 있었고 승려는 6명 있었다고 함. |
1777 |
仙景臺寺 |
조선 |
和龍 仙景臺 |
和龍市 南坪鎭 興進村 |
출전: 류연산, 혈연의 강들, 연변인민출판사, 1999, 283-291. 주: 北斗七星佛廟, 七星庵 등으로도 부름. |
淸朝初期 |
三寶寺 |
중국 |
敦化 |
敦化 |
출전: 연변불교개황, 8-9 |
光緖初年 (光緖元年1875년) |
祖師廟 |
중국 |
琿春 |
琿春 市內 |
출전: 政協吉林省琿春縣委員會文史資料委員會編, 1990, 상게서, 124; 琿春市地方志編纂委員會, 琿春市志, 吉林人民出版社, 2000, 160 등. 주: 면적은 80方丈, 太上神殿 3칸, 山神殿 3칸, 東廊房 5칸, 포교도 2명 있었음. |
光緖18年 (1892年) 8月 18日 |
銅佛寺 |
중국 |
延吉縣 銅佛寺 |
龍井市 銅佛寺鎭 |
출전: 政協吉林省延邊朝鮮族自治州委員會文史資料委員會編, 延邊文史資料第2輯, 延邊人民出版社, 1984, 175-176; 政協吉林省延邊朝鮮族自治州委員會文史資料委員會編, 延邊文史資料第12輯, 民族出版社, 2006, 361-372 등. |
清光绪年间(1900- 1908) |
正覺寺 |
중국 |
敦化敖東古城東關 |
敦化 市內 |
출전: 정각사 홈페이지: http://www.dhzjs.org 주: 처음에는 娘娘廟로 불리다가 20세기 30녀대 말에 正覺寺라고 개칭함. 면적은 2헥타르, 도합 32개 칸이 있었음. 1994년에 돈화시 육정산 저수지 동쪽에 새로 開光하였음. 면적은 20여만 ㎡, 건축면적은 2만 ㎡임. |
1911.3 |
雲興寺 |
조선 |
龍井村 |
龍井 市內 |
출전: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編纂, 2000, 상게서, 95.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상게서, 1997, 65 주: |
1911 |
新興寺 |
조선 |
汪淸縣 蛤蟆唐 |
汪淸縣大興溝鎭新興村 |
출전: 汪淸縣地方志編纂委員會編, 汪淸縣志(1909~1985), 2000, 478. 주: |
1911 |
靑雲寺 |
조선 |
汪淸縣 羅子溝 |
汪淸縣 羅子溝鎭 |
출전: 汪淸縣地方志編纂委員會編, 2000, 상게서, 478-479. 주: |
1915 |
布敎堂 |
조선 |
龍井村 |
龍井 市内 |
출전: 불교개황, 10 주: 龜山 스님이 설립했다고 함. |
民國初期 |
老道溝寺 |
중국 |
安圖縣松江鎭勝利村 |
출전: 연변박물관《연변문화유물략편》편집소조, 연변문화유물략편, 연변인민출판사, 1989,306-307. 주: 이 사찰의 건축연대에 대해서는 기재가 없지만 민국초기에 왕지정이 설립하고 스님 10여 명에 밭까지 있었으며 만주국 시기에 폐쇄되었다고 함. | |
1918年 以前 |
미상 |
중국 |
延吉縣 延集崗社 北營下村 |
延吉 市內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間島事情, 1918, 877 주: 승려 1명 있었음. 위의 책이 1918년에 출판되었으므로 이 책에서 소개된 사찰들은 적어도 1918년이나 그 이전에 설립되었음. |
동상 |
미상 |
중국 |
延吉縣 延集崗社 臥龍洞於口 |
延吉 市內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1명 있었음. |
동상 |
金佛寺 |
중국 |
延吉縣 門樓溝社 北大溝 |
龍井市 老頭溝鎭 金佛村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2명 있었음. |
동상 |
興天寺 |
중국 |
延吉縣 門樓溝社 天寶山 |
龍井市 老頭溝鎭 老新村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1명 있었음. |
동상 |
미상 |
중국 |
延吉縣 東盛湧社 長境 |
龍井市 東盛湧鎭 長境村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1명 있었음. |
동상 |
미상 |
중국 |
延吉縣東盛湧社柳亭村 |
龍井市 東盛涌鎭 龍泉村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1명 있었음. |
동상 |
미상 |
중국 |
延吉縣 頭道溝 上場里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2명 있었음. | |
동상 |
미상 |
중국 |
延吉縣 平崗上里社 西古城子 鶴山洞口 |
和龍市 頭道鎭 西古城 부근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2명 있었음. |
동상 |
미상 |
중국 |
延吉縣 春陽社 北蛤蟆塘 |
汪淸縣 大興溝鎭 後河村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1명 있었음. |
동상 |
미상 |
중국 |
延吉縣 春陽社 南蛤蟆塘 |
汪淸縣 大興溝鎭 新興村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1명 있었음. |
동상 |
미상 |
중국 |
和龍縣 平崗上里社 三道溝 同信場 |
和龍 市內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1명 있었음. |
동상 |
德興寺 |
중국 |
和龍縣 和龍社 下新興坪 |
和龍市 龍城鎭 淸湖村 부근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2명 있었음. |
동상 |
慈興寺 |
중국 |
和龍縣 智豊社 南陽坪 |
龍井市 德新鄕 南陽村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2명 있었음. |
동상 |
普興寺 |
중국 |
和龍縣 龍池社 松田場下村 |
龍井市德新鄕松田屯附近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1명 있었음. |
동상 |
미상 |
중국 |
和龍縣 崇化社 下天坪 |
龍井市 開山屯鎭 船口村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1명 있었음. |
동상 |
미상 |
중국 |
汪淸縣 春明社 柳樹河於口 |
汪淸縣 汪淸鎭 柳樹河子村 附近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1명 있었음. |
동상 |
미상 |
중국 |
汪淸縣 春華社 合水坪 |
圖們市 石峴鎭 合水村 |
출전: 東洋拓植株式會社, 1918, 상게서, 877 주: 승려 2명 있었음. |
1920년 |
華嚴寺 |
조선 |
汪淸縣 羅子溝 太平村 松林山 |
汪淸縣 羅子溝鎭 太平溝村 松林山 |
출전: http://www.yanbian.gov.cn/yanbian/board.php? board=zhengwuxinxi&act=view&no =36930 |
민국12년 (1923) |
鎭蛟寺 |
중국 |
安圖縣 松江鎭 老偏坡 부근 |
출전: 安圖縣地方志編纂委員會編, 安圖縣志, 吉林文史出版社, 1993 151;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編纂, 2000,상게서, 60 등. 주: 王圓洞, 俉圓慧가 天明山 鎭蛟寺를 설립했다고 함. | |
1915 |
靜水庵 |
중국 |
琿春 |
琿春 市內 |
출전: 政協吉林省琿春縣委員會文史資料委員會編, 1990, 상게서, 124; 琿春市地方志編纂委員會, 2000, 상게서, 160 등. 주: 琿春市地方志編纂委員會,2000, 상게서, 160에서는 1915년에 설립되었다고 하지만 政協吉林省琿春縣委員會文史資料委員會編, 1990, 상게서, 124에서는 1921년에 설립되었다고 함. 그러나 같은 책 162에서는 1915년에 설립되었다고 함. 면적 160方丈, 菩薩正殿 3칸, 동서 곁방 6칸, 승려 4명 있었음. |
1920년초 |
奉靈寺 |
조선 |
和龍縣 月晴 立峰 |
圖們市 月晴鎭 笠峰村 |
출전: 불교개황 12 주: 백기원에서 설립 |
1920.7 |
新興寺 |
조선 |
和龍縣 月晴 龍岩洞 |
龍井市 德新鄕 龍岩村 |
출전: 吉林省圖們市地方志編纂委員會編, 圖們市志, 吉林文史出版社, 2006, 535; 龍井縣地名委員會編, 龍井縣地名志, 龍井縣人民政府, 1985, 78; 圖們市地名委員會編, 圖們市地名志, 圖們市人民政府, 1984, 95;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66 등. 주: 1925년에 별원을 지었고 1928년 3월에 仁壽寺로 개칭하였음. |
1920년대 |
미상 |
중국 |
曲水 |
圖們市 長安鎭 和平村 |
출전: 불교개황, 20 주: 현지주민의 증언에 의했다고 함. |
1920년대 |
미상 |
조선 |
龍城 |
圖們市 石峴鎭 龍城村 |
출전: 불교개황, 20 주: 현지주민의 증언에 의했다고 함. |
1921.9 |
本愿寺間島布敎所 |
日本淨土宗,禪(神)宗派 |
龍井 |
龍井 市內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67; 延邊大學民族硏究所, 朝鮮族硏究論叢第1輯, 延邊大學出版社, 1987, 265; 현규환, 한국유이민사상, 어문각, 1967, 567 등. 주: 일부 연구(차차석(2010))에서는 “일본불교계의 정토종계와 조선인 중심의 선종계 사칠”이라고 하지만 중국 자료의 의미로 볼 때 이는 “일본불교계 정토종과 선종파의 조선인 승려들이 설립한 사찰”이다. |
1922.2 |
普照寺 |
日本 禪家派 |
龍井 |
龍井 市內 |
출전: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
1923.5 |
曹洞宗間島別院 |
日本 禪宗派 |
龍井 |
龍井 市內 |
출전: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
1923.7 |
龍珠寺 |
조선 歸珠寺派 |
延吉縣 符岩村 |
延吉市 朝陽川鎭 長勝村 |
출전: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龍井縣地名委員會編, 1985, 상게서, 193;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67 등. 주: 일본지도오호정자폭(부암동) |
1923 |
龍華山淸王寺 |
조선 大乘佛敎禪宗派 |
和龍縣 三道溝 |
和龍 市內 |
출전: 吉林省和龍縣志編纂委員會編, 和龍縣志, 吉林文史出版社, 1992, 568. 주: 대승불교 선종파에서 설립했는데 포교자는 禹德民이고 승려 6명이 있었으며 면적은 2,000㎡에 달했고 방이 12칸 있었음. |
1923 |
鶴龍寺 |
조선 |
三道溝 松林坪 |
和龍市 龍城鎭 松月村 부근 |
출전:吉林省和龍縣志編纂委員會編, 1992, 상게서, 568;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등. 주:현규환, 1967, 상게서 567에서는 1933년 4월에 설립되었다고 함. 9명의 승려가 있었고 면적은 4000여 ㎡에 달하며 방이 17칸 있었음. |
1924 |
延明寺 |
조선 귀주사파 |
頭道溝 |
和龍市 頭道鎭 |
출전: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67; 延邊大學民族硏究所, 1987, 상게서, 265; 吉林省和龍縣志編纂委員會編, 1992, 상게서 568-569;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등. 주:현규환, 1967, 상게서, 567에서는 1930년 8월에 설립되었다고 함. |
1924.5 |
法王寺 |
조선 |
三道溝 太平溝 |
和龍市 龍城鎭 太平村 |
출전: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
1925.2 |
靜水庵 |
중국 |
安圖縣 縣城南門外 |
安圖縣 松江鎭 |
출전: 安圖縣地方志編纂委員會編, 1993, 상게서, 151; 陳國鈞修, 孔廣泉纂, 松江省安圖縣志, 1974, 中國地方志叢書東北地方第38號(影印本), 284 등. 주: 승려 6명이 있었음. |
1925.6 |
泰安寺 |
중국 |
松江鎭 縣城南門外 |
安圖縣 松江鎭 文昌村 |
출전: 安圖縣人民政府, 安圖縣地名志, 1989, 71;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46; 陳國鈞修, 孔廣泉纂, 1974, 상게서, 284 등. 주: |
1927.3 |
大覺寺 |
조선 대각사파 |
龍井村 |
龍井 市內 |
출전: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
1928 |
宗德寺 |
조선 |
백두산 천지가 |
天池 주변 |
출전: 연변박물관《연변문화유물략편》편집소조, 1989, 상게서, 308-309. 주: |
1929.3 |
普興寺 |
조선 귀주사파 寶庵스님 |
龍井 |
龍井 市內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67;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
1931.7 |
國生寺 |
조선 |
延吉 |
延吉 市內 |
출전: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
1932.10 |
峰靈寺 |
일본불교계조선승려 |
灰幕洞 |
圖們 市內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3 |
1933.1 |
間島佛敎布敎所 |
일본 禪宗派大本山流 |
龍井 |
龍井 市內 |
출전: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
1933.8 |
甘露寺 |
조선 |
和龍縣 藥水洞 |
和龍市 頭道鎭 龍門村 藥水洞 |
출전: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4; |
1934 |
地藏庵 |
중국 |
琿春 |
琿春 市內 |
출전: 政協吉林省琿春縣委員會文史資料委員會編, 1990, 상게서, 124; 琿春市地方志編纂委員會編, 琿春市志, 吉林人民出版社, 2000, 160등. 주: 면적 144㎡, 승려 2명 있었음. |
1930년대이후 |
西本源寺 |
일본 |
圖們 |
圖們 市內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4; 吉林省延吉市地方志編纂委員會編, 延吉市志, 新華出版社, 1994, 493 등. 주: 吉林省延吉市地方志編纂委員會編, 1994, 상게서, 493에서는 “西本顧寺”라고 적었음. |
東本源寺 |
일본 大谷派 |
圖們 |
圖們 市內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4; 吉林省延吉市地方志編纂委員會編, 1994, 상게서, 493 등. 주: 吉林省延吉市地方志編纂委員會編, 1994, 상게서, 493 에서는 명칭을 “東本顧寺”로 적고 “원연길영화관에 위치했다”고 적고 있음. | |
日光寺 |
일본 神宗派 |
圖們 |
圖們市 日光山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4 | |
間島寺 |
일본淨土宗 |
圖們 |
圖們 市內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4 | |
圖們市敎所 |
일본 日蓮宗久遠宇派 |
圖們 |
圖們 市內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4 | |
布敎所 |
일본禪宗曹洞宗 |
圖們 |
圖們 市內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4 | |
八葉山江獄寺 |
일본臨濟宗派 |
圖們 |
圖們 市內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4 | |
圖們支部 |
일본眞言宗 |
圖們 |
圖們 市內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4 | |
大原寺 |
조선 禪宗派 |
圖們 |
圖們 市內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4 | |
1932.10 |
華嚴寺 |
조선 禪宗派 |
圖們 灰幕洞 三兄弟峯 |
圖們市 日光山 |
출전: 延邊政協文史資料委員會, 1997, 상게서, 164; 현규환, 1967, 상게서, 5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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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은 자료가 너무 커서 안 올라가져서 별도 보관합니다...다경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