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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飄雲旅情 2)
가사(歌辭) 물화의 원류를 찾아서(2) 윤 고산 편 -정 송강과 윤 고산-
2. 자연(自然) 속의 풍류객(風流客) 고산(孤山)(녹우당과 보길도)
전라남도 해남은 남서부지방 관광지역을 연결하는 관문과 같은 교통 요충지로서 서(西)로는 조용하고 운치있는 진도섬, 동(東)으로는 남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완도섬을 거느리고 있는,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을 잇는 길목이다. 가물가물한 땅끝이기에 윤선도를 비롯한 숱한 사람들이 숨어 살았거나 귀양살이를 했던 곳, 한과 기다림이 쌓인 곳이다.
내 버디 몃치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학창시절,오우가를 읊으시며 자연을 기린 국어담당 정철(鄭哲) 선생은 고산의 종손(從孫)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는 말씀을 하면서 고산의 종손을 제자로 두었음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필자의 7년 선배이신 고산의 14대 종손 윤형식(尹亨植) 선배를 찾아뵙고 고산과 해남 윤씨의 문화유적(文化遺蹟)을 살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주)뉴욕에 있는 윤 영돈 동문이 고산의 후손이 아닌가.
해남시내에서 대둔사(舊 대흥사) 가는 길로 3.2km 쯤 가다보면 ‘고산 윤선도(尹善道) 고택(古택)’이라는 표지판이 나오고, 왼편으로 들어가면 소로길 양편으로 펼쳐지는 잘 정돈된 논밭은 그 옛날부터 해남 윤씨가 소유한 기름진 논밭과 들판으로서, 이것을 거치면서 약 1km를 달려가면 깊숙이 자리잡은 연동마을에 ‘윤고산유적지’라고 씌어진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이곳이 바로 고산 윤선도의 고택인 녹우당(綠雨堂)이다.
녹우당 앞에 있는 은행나무 녹우당 앞마당에 들어서면 왼편에 고산유물관리소와 윤고산 시비(詩碑)가 있으며 오른편의 유물전시관은 최근에 지어 고산과 공재 등의 유물을 항상 전시하고 있다. 마주 보이는 곳에 수령 5백여년 이상 되고, 높이가 20m 정도의 커다란 은행나무가 녹우당 앞에 있어서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한껏 돋보이게 한다. 녹우당은 해남 윤씨의 종가이다. 고산의 4대 조부인 이정(李貞,호 어초은(魚樵隱)) 1467~1543)은 해남 윤씨의 득관조(得貫祖)로서 해남의 거부 초계(草溪) 정씨의 외동따님과 결혼하여 그 재산을 잘 관리하였으며, 이 곳 연동에 삶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이집 사랑채는 효종이 왕세자 시절의 스승인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경기도 수원집을 현종 9년(1669)에 해상 운송하여 이곳에 이전한 것이다. 이집의 건축은 풍수지리에 따라 뒤편의 덕음산(德陰山)을 진산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자형으로 구성되고, 행랑채가 갖추어져 있다.
고산 윤선도가 사색당쟁의 정치싸움에서 밀려나와 은거생활을 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시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풍류객과 교유하던 곳을 더 알려진 이 집은 대문, 안채, 사랑채, 어초은과 고산의 사당들을 두루 갖추고 있어 그 규모로 보나 형식으로 보나 호남지방의 양반층의 집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평가를 받아 사적 167호로 지정돼 있다. 특히 이 사랑채를 녹우당이라고 부르는데, 이 사랑채 앞에는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소낙비 쏟아지듯이 우수수 떨어진다고 하여 녹우당으로 불리운다는 설(說)과 뒷산의 5백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서 바람에 스치면 우수수 가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렸다고 해서 붙인 설이 있다. 이 녹우당 편액은 공재 윤두서(정다산 외증조부)의 친구이자 실학자 성호 이익의 이복형인 당대 명필이며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원조인 옥동(玉洞) 이서(李敍)의 글씨이다.
14대 증손인 초로의 신사 윤형식 선배로부터 윤고산과 해남윤씨의 역사를 듣고 이 집안의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해남 윤씨의 대대로 전해오는 문화적 유물, 특히 이중에는 국보 240호인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보물인 ‘윤씨가전고화집’(482), ‘고산수적관계문서’와 ‘노비문권’(483) 등을 보았다. (고산 유물관, 마당의 동백곷이 우리를 반긴다)
해남윤씨 특히 윤고산은 덕을 베풀고 노비를 자립시키는 등의 인본(人本), 애민주의(愛民主義) 사상을 펴왔고, 이러한 사상은 3대 환란인 동학란, 한일합방 후 일제치하 및 6.25동란을 무사히 지낼 수 있게 하였다. 동학란때에는 동학군이 이 집을 보호하였으며 6.25동란때에는 호재집(종의집) 20여집을 없애버린 덕을 베푼 결과 이들이 해남윤씨 가족을 보호하는 의리를 지켜줌으로써 무사할 수 있었다.(삼개옥문:三開獄門 적선지가:積善之家).
고산은 서울 연화방(현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났고, 8세때 큰 집에 입양하여 해남윤씨의 대종을 이었다. 윤고산은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성격이 강직하여 불의와의 타협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남인의 거두인 그의 일생은 서인들과의 당파싸움에서 희생이 된 적이 많아 오랫동안의 유배생활과 낙향생활에서 그의 문화적 배경이 이루어졌으며 현실 도피와 같은 선계(仙界)의 추구 등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유물전시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윤고산이 자연을 벗한 노래, 오우가의 친필 책자인 산중신곡(山中新曲), 국어미(國語美)의 극치 어부사시사를 볼 수 있고, 금쇄동기(金鎖洞記) 고산 양자입문서, 장원급제 답안지 등 각종 서적, 문집, 문서가 잘 보관, 전시되어 있어 이 유물을 보고 있으면 마치 윤고산이 살아 있는 듯 하다. 또 하나의 자랑은 국보 240호로 지정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보물로 지정된 윤공재와 그의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의 3대 작품을 모은 〈가전화첩(家傳畵帖)〉이다. 공재는 조선시대 후기 화가의 백미로서 삼재(三齋:공재 윤두서, 겸재 정서, 현재 심사정) 중의 한 분이다. 공재선생은 그림 외에 수학, 지리, 금석학, 병서 등에 밝은 실학적인 사상을 갖고 있었고, 임진왜란을 겪은 후의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일환으로 군사용으로 일본지도를 완성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사실이다.
윤고산의 유물관은 잘 보관 정리된 상태에서 우리 후손에서 주옥같은 문화적 유산으로 깨우침을 주고 있다. 종손 윤형식 선배는 이곳을 찾아온 손님을 위하여 녹우당 정원을 개방하고, 뒷산에서 재배하고 있는 녹차를 이번 가을부터는 대접하겠단다. 그 흐뭇한 말씀을 뒤로 고 윤고산이 신선과 같이 살고 떠난 보길도로 향하였다.
녹우당을 떠나 해남 갈두부락 토말까지 달려오면 이곳이 우리 한반도의 제일 끝이라는 설레임과 그 옛날 보길도를 여러 번 드나들며 스쳐간 고산의 체취를 맡을 수 있다. 이어 눈앞에 펼쳐지는 산줄기와 바위섬, 조용하고 아담한 어촌풍경을 만끽하면서 보길도로 향하는 금영호에 나그네의 몸을 싣는다. (해남 땅끝마을 선착장에서 보길도로 가는 뱃길의 아름다운 경관) 운설과 함께 편안함을 주는 남해 다도해상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남은 인생여정도 이와 같이 편안하기를 기원하며 다정히 손잡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보길도 청별선착장에 이르게 됐다. 이곳은 윤고산이 신선과 같이 지내고 떠난 보길도 부용동의 입구로서, 이 일대 앞바다는 「어부사시사」배경의 현장으로 고산 문학의 산실이 되는 곳이다.
춘가(春訶)
하가(夏訶)
추가(秋訶)
동가(冬訶)
보길도 기행은 윤고산의 생애와 사상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 섬이 갖고 있는 천해의 아름다움이 평범한 다른 섬의 아름다움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고산의 보길도와의 첫 인연은 51세 되던 해인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이 일어난 다음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고, 빈궁(嬪宮)과 원손(元孫)이 강화로 내려가자, 해남 연동의 고향에 돌아와 있던 고산은 자제(子弟)와 집안의 노복 수백명을 모아 배를 타고 밤낮을 무릅쓰고 북상하여 정월 29일 강화에 이르렀으나 때가 늦어 강화가 이미 적에게 함락된 후였다.
이 섬은 산과 내가 아름답고 아늑하여 사람의 마음을 매혹시킬 만한 곳이다. 고산은 탐라로 가는 것을 멈추고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이곳을 「산들이 둘러 있어 바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맑고 소쇄하고 절승(絶勝)하니 이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 있는가」라 하여 이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밑에 낙서제(樂書濟)를 세워 본격적인 은둔생활을 하며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윤고산의 지역별 거주를 살펴보면 서울에서 40년, 유배지에서 14년 양주, 수원에서 1년, 해남 연동 6년 7개월, 성산 2년, 해남금쇄동 9년, 보길도 12년 8개월을 보냈고, 관직은 광해군, 인조, 효종조를 거치면서 효종의 사부, 승지, 공조, 예조 참의에 봉직하였다. 남인의 거두로서 서인과의 정치적 논쟁에서 3회에 걸쳐 유배를 갔고, 그 유배생활이 14년이나 되었다. 특히 효종 승하 후 서인들의 득세로 73세의 나이에 험한 함경도 삼수에 귀양을 가게되고, 80세가 되어서야 유배에 풀려 꿈에 그리던 부용동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84세인 현종 9년(1671)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후 고산은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와 같이 유배와 은둔을 번갈아 하며 세월을 보내온 고산은 이곳의 정착을 계기로 평소 동경했던 주자의 은둔자적 생활을 실현하게 된다. 해남 윤씨 집안의 장자 상속으로, 또한 풍부한 재력으로 진도 굴포리와 완도군 도화도에 약 330여 정보의 간척사업을 한 대지주로서, 효종의 사부시절, 궁중에서 보고 느낀 조원(造園)의 안목으로 보길도의 천혜적 자연경관을 살려 나름대로의 이상향을 꾸몄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시름 많은 정치권과 발을 끊고, 강호(江湖)에 묻혀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며 살고자 했다. 이 골짜기에 무려 25개의 정자를 짓고 연못을 만들어 온 섬을 뜨락으로 삼아서 자유분방하면서도 은밀한 자기 공간을 만들어냈다. 비록 자연을 개조하여 재구성했지만 전혀 인공의 티를 드러내지 않고 자연속에서 하나가 된 훌륭한 건축문화, 조경 예술을 보여주고 있다. 고산의 풍류와 유홍이 이와 같다면 현재의 우리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조선시대 최고의 풍류객이라 할 수 있다. (세연정: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정원)
첫째, 고산이 거처하던 락서제(樂書濟)와 곡수당(曲水堂)이다.
지금이야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대로로 변했지만 당시에는 좁다랗고 꼬불꼬불한 세로길을 세연장에서 3km 쯤 더 올라간 격자봉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풍수지리설로서는 보길도에서는 가장 손꼽히는 명당으로서 좌청룡, 우백호가 호위를 하는 연꽃과 같은 지역, 이곳에 낙서재, 곡수당이 있다. 지금은 집터밖에 없지만 고산은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며 책이나 보고, 시심(詩心)을 달래보고 즐기면서 살겠다던 의지가 담겨있다. 이곳을 사람들은 ‘큰 터’라고 부르고 있다.
둘째, 낙서재 건너편 바위산 중턱에 있는 석실(石室)이다. 해발 100여m쯤 올라가면 산중턱에 천여평 공간에 돌계단과 석문, 반석, 정자 등이 있는데, 이곳은 고산이 다도(茶道)를 즐기고 신선과 같이 살면서 부용동 전경을 바라보며 인생을 조감한 곳이다. 당시에는 낙서재와 석실간에 요즘의 케이블카와 같은 도르레식 줄을 연결하여 음식을 이곳까지 운반하였다고 하니 그 풍류를 가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동천석실)
셋째, 석실에 감도은 저녁연기(부용동 팔경중 하나)속을 바라보며 고산이 심혈을 기울여 자연과 인공미를 조화하여 만든, 조선시대 전통 민간 정원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정원인 세연정이다. 세연정은 부용동 계곡을 돌로 판석을 세우고 만든 계곡정원으로, 이름 그대로 주변경관이 물에 씻은 듯 깨끗하고 단정하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고산은 세연정을 “번화하고 청정(淸淨)하여 일국의 재상의 그릇이 될 만한 곳”이라고 했다. 이곳에 정자를 지어 세연정이라고 부르고, 이곳에서 고산은 음악과 춤과 시와 인생을 관조하였다.
고산과 송강은 조선시대 시가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다. 우리들은 흔히들 이 두분의 위치를 당나라의 이백과 두보(杜甫)에 견주기도 한다.
먼저 공통점을 보면 첫째, 고산과 송강은 호남의 토양에서 문학적 성장을 한 분들이다. 그들은 각각 해남과 창평(담양)에서 명작을 만들었고 생애의 중요한 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현재까지 전라도를 “예향” 또는 “문향”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두 분이 이 곳 문학의 정신적인 지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둘째, 고산과 송강은 다같이 한 많은 유배생활을 통해 문학적 금자탑을 이룩해 냈다. 정치적 좌절을 극복하고 유배생활을 통하여 진정한 예술혼을 발휘하였다. 이들이 순탄한 관직생활을 하였다면 이와 같이 화려한 문학적 성취는 가능하였겠는가.
셋째, 고산과 송강은 서울에서 태어나서 소년기에 뜻하지 않은 일로 남도에 오게 되었고, 쟁쟁한 문장가들에 사사하여 20대에 정계에 나가서 각각 남인과 서인의 맹주로서 용맹한 투쟁력을 발휘했으나 결국 반대세력에 떼밀려 불우한 말년을 보내야 했던 사실 등 전체적인 생애의 흐름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이처럼 비슷한 삶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인생은 너무나도 달랐다. 고산은 모든 면에서 유복하였고, 송강은 생활이 가팔랐다. 둘다 10대 이전에 서울에서 남도로 옮겨갔지만 고산은 갑부인 해남 윤씨 종가의 양자로 입적되어 귀하게 자랐고, 송강은 창평의 외갓집에서 드난살이를 해야 했다. 유년시절의 환경이 두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미쳐 정치활동이나 작품세계에서 이질성을 나타낸 것이다.
송강은 관직을 떠나 초야에 머루르면서도 끝까지 충군(忠君)에의 연심을 강조하여 기회가 닿는 대로 정계에 복귀할 것을 기대하여 한결같이 군왕에 대한 사모의 정을 작품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고산은 송강의 이념적 태도와는 달리 산수에의 향수에 바탕을 두고 자연에 대한 시인적 감동과 그리고 예술가적 우수성을 보여주는 한극에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다.
고산은 피를 피했고, 송강은 피를 불렀다. 고산이 그의 호처럼 고고한 스타일을 유지했다면 송강은 그의 호마냥 도도한 강물의 돌아감이 있었다.
우리들은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쌍벽인 고산의 잔잔하고 섬세한 작품을 통하여, 송강의 화려하고 대담한 어법을 통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표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