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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암(鐵岩)
마을 북쪽 백산과 경계부근의 철도(鐵道)변에 높이 20여m, 넓이 30여m되는 큰 바위가 서 있는데 그 바위에 쇠(鐵)성분이 많아 쇠바위라 한다. 그바위에서 돌을 떼내어 녹여 쇠를 얻기도 하였는데 그 바위 때문에 마을 이름을 쇠바위마을이라 하였다.
‘쇠바위마을’을 한자로 표기하니 쇠 철(鐵) 바위 암(岩) 마을 리(里) 하여 철암(鐵岩)으로 부르게 되었다. 새뜨리(間坪) 부근에 기차역이 생기면서 갑자기 마을이 커지자 그곳을 철암의 본 마을로 착각하여 본래의 마을(새터부근)은 웃철암(上鐵岩)으로 부르고 새뜨리부근을 철암이라 부른다. 시 승격이후 철암1,2동으로 나누었다가 철암동으로 통합되었다.
새뜨리(間坪), 피내골, 좁씨골, 매산골, 버들골, 새터등 6개 자연부락을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로 태백시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였다.
마을의 북쪽은 백산에 동쪽은 삼척시 가곡면과 접경을 이루고, 남쪽은 동점에 서쪽은 문곡과 접하고 있다. 마을의 동쪽은 태백산맥의 원줄기가 가로막고 서쪽은 연화산의 남쪽 줄기가 감싸고 있으며 동쪽의 유목산(柳木山)과 남쪽에 두골산(頭骨山)이 솟아 있으며 서쪽에는 피난산(避難山)이 중앙에는 시루봉(甑峰)이 솟아 있다.
백산에서 내려오는 하천 물이 머리골과 피내골 물과 합쳐저 동점으로 흘러간다.
호구수는 단기4092년(서기1759년)에 17호 70명, 단기4249년(서기1916년)에 60호 313명, 단기4295년(서기1962년)에 1,418호 11,530명, 단기4313년(서기1980년)에 3,007호 15,378명이며 시 승격 이후 단기4320년(서기1987년)에 3,050호 13,508명이고 단기4335년(서기2002년)인 현재는 1,639호 4,377명 이다.
도로는 백산에서 내려오는 423번 지방도로가 포장되어 마을을 관통하여 동점으로 이어진다.
단기4273년(서기1940년) 개업한 철암역(鐵岩驛)이 있어 백산과 동점을 이어주며 영동선과 영암선의 기점이 된다. 철암역은 국내 최대의 석탄 수송기지로서 장성지역에서 캐낸 석탄을 산속 운반굴(運搬窟)을 통해 철암역으로 운반되어 각지로 수송되고 있다.
농산물은 고랭지 채소를 많이 심는데 골짜기 안쪽에서는 아직도 옥수수, 콩, 감자 등을 심고 있으며 옛날엔 메밀, 조, 귀리 등을 심었으며 삼(麻)도 재배하였다.
새뜨리에는 단기4272년(서기1939년) 역을 만들기 전에는 4∼5가구가 사는 마을이었는데 하천을 메우고 시장을 개설하고 저탄장을 만든 것이다.
피내골에는 옛날 변란을 피하여 사람들이 피난을 하였다고 하며 한말에 의병들이 주둔하였었다고도 한다.
단기4300년대까지만 해도 새뜨리에서 장성으로 통하는 새재가 큰길이었고 버들골 안쪽의 토산령(兎山領)은 원덕으로 통하는 큰 고갯길이었다.
단기4271년(서기1938년) 상장서당으로 출발한 철암초등학교가 단기4274년(서기1941년)에 개교하였고 단기4297년(서기1964년)에 개교한 철암중학교와 단기4307년(서기1974년)에 개교한 철암고등학교가 금뎅이버덩과 두둑평지에 있다.
버들골에 금광(金鑛)이 있었고 철암역 뒤편에 석공 장성광업소 철암갱(鐵岩坑)이 있다. 철암역 뒤편의 폐석장은 국내최대의 석탄광 폐석장이다.
▣ 상철암, 그리고 머리골 지역
◎ 새터
상철암 아파트와 철도 아파트가 있는 지역 전체를 새터라 한다. 옛날 이곳은 강가의 새(갈대)가 많은 곳이었다. 장마때는 철암천 물이 범람하는 곳이었는데 일제때 제방을 겸한 철로의 둑을 쌓았다. 새가 많은 곳이라고 새터라 한다. 단기4278년(서기1945년) 음력 8월에 새터에 시장을 개설하며 별신굿을 한적이 있다.
◎ 갈골
새터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지금의 상철암아파트 뒤편골짜기).
새터에도 갈대가 많았지만 이 골짜기에도 갈대가 많았다. 그래서 갈골이다. 새터(갈대가 많은 터)뒷쪽에 있다고 갈골이라 한다고 한다. 갈골은 큰 갈골과 작은 갈골이 있다.
◎ 시루봉(甑峰)
새터 건너편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이다. 석회암으로 된 이 산은 보는 방향에 따라 산의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새터나 갈골 부근에서 보면 죽순(竹筍)처럼 보이고, 좁씨골 방향에서 보면 사모(紗帽)처럼 보이며, 철암초등학교 근방에서 보면 여인의 누워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산중턱에 올라가면 약간의 평지가 있는데 석회암으로 된 바닥 가운데 감자 구덩이를 파놓은 듯 둥글게 파인 곳이 있다. 다른 곳은 모두 석회암인데 그곳만은 누런 진흙으로 되어 있다. 이곳의 지형이 시루처럼 생겨 풍수학설로 시루형국의 명당이라 하여 예부터 이름난 명당으로 소문이 난 곳이다.
그래서 산이름도 시루봉이라 부르는 것이다. 옛날 김씨네가 이곳에다 묘를 썼는데 밤만 되면 새터 마을의 개들이 그곳을 쳐다보고 짓는 바람에 마을의 여론이 좋지 않아 묘를 파 버린 적이 있었다. 이곳은 금시 발복의 천하명당으로 묘를 쓰고 3년만 지나면 최하 국회의원 정도는 집안에서 나오는 자리라 한다.
◎ 서낭당(城隍堂)
시루봉 아래 개천가에 있다. 시루봉이 석회암으로 된 산인데 그 산 아래에 큰 석회동굴이 있다. 동굴의 높이는 6m 정도이고 넓이는 7m 정도이며, 깊이는 10m 정도되는 삼각형에 가까운 굴이다. 그 굴 속에 당집을 지어 상철암 주민들이 서낭신을 모셔 놓고 있다. 이곳 서낭당이 있는 굴은 시루명당의 아궁이에 해당된다고 한다.
◎ 머리골
새터 뒤에 있는 철암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쪽은 버들골과 매산골로 갈라지며 골짜기에서는 맑은 계곡물이 쉴새없이 흘러 수원지로 이용하고 있다(북동, 교동사택의 수원으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폐쇄 되었다).
여름철이면 철암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되고 있다. 머리골에 대한 유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가 두골산(頭骨山) 아래에 있다고 머리골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골짜기 안에서 바깥으로 내다보면 시루봉이 머리만 보이므로 머리골이라 한다고 한다. 또 다른말에 의하면 버들골과 매상골로 들어가는 골짜기 머리(어귀)에 해당되므로 머리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 금광골(金鑛谷)
머리골 입구 수원지를 지나서 한참 올라가다가 왼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이다. 옛날 골짜기 어귀에 금광(金鑛)이 있어 많은 금을 캐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버들골을 금광골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 두둑평지
철암중·고등학교가 있는 부근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동지역이다) 그곳의 지형이 전체적으로 두둑하며 산중턱에 평지를 이루고 있기에 두둑평지 혹은 두둑번지라 한다. 두둑평지에는 석공 장성광업소 북동사택이 있다.
◎ 금뎅이 버덩
철암초등학교가 있는 부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동지역이다) 옛날 학교를 짓기 전에 그곳에서 사금채취를 하느라 곳곳에 금구덩이를 팠다. 금구뎅이버덩이 금뎅이버덩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 두골산(頭骨山)
두둑평지 뒤쪽에 있는 해발 1,044m의 산으로 동점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삼방동 뒤편 산이다. 일명 두구리산으로 알고 있다.) 옛날 이 산에는 범이 많이 살고 있어서 철암과 동점에 사는 사람들이 범에게 많이 물려가 죽었다. 범이 사람들을 잡아 먹고 이 산봉우리 부근에 사람의 두개골(頭蓋骨)만 남겨 두므로 두골산(頭骨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두골산 8부능선에는 범에게 물려가 죽은 사람의 무덤인 호식총(虎食塚)이 남아 있다.
◎ 매산골
머리골로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가라지는 큰 골짜기가 매산골 이다. 옛날 골짜기 안쪽에서 매를 날려 꿩사냥을 많이 하던 곳이라 하여 매사냥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매로 사냥을 하기에 매사냥골이며 매사냥골이 변해 매산골 혹은 매상골로 부른다. 일설에는 사냥에 쓰는 매를 이 골짜기에서 많이 붙들어다가 길을 들였다고 해서 매산골 이라 하기도 한다.
◎ 버들골
매산골과 갈라져 왼쪽으로 뻗은 깊은 골짜기 전체를 이르는 말이다. (우리는 이곳을 금광골로 잘못 알고 있다) 골짜기 안쪽에 물버들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 하며 일설에능 버드나무에 꾀꼬리가 집을 지은 형상의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의 명당이 있어서 버들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골짜기 안쪽에 금광이 있었으나 지금은 휴광 상태이다. (이곳은 현재 태백시에서 자연휴양림으로 개발을 하고 있다.)
◎ 유목산(柳木山)
버들골과 매산골 사이의 산이다. 버드나무가 많아서라 하고 또는 유지앵소형(柳枝鶯巢形)의 명당이 있는 산이라서 유목산이다.
◎ 토산령(兎山嶺)
버들골 끝에 있고 삼척시 가곡면 풍곡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이다. 지금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오솔길이 되었으나 옛날에는 큰 길이었다. [兎]는 [卯]와 같은 뜻으로 12지(十二支)에서 동쪽을 의미한다. [兎山]은 [卯山]이니 [東山]이요 [兎山嶺]은 동쪽으로 넘어 가는 고개라는 뜻이다. 철암이나 태백에서 동쪽에 있는 고개라는 뜻이다. 어떤 지도에 [土山]으로 표기된 것이 있으나 잘못 기재된 것이다.
▣ 좁씨골, 그리고 백산일대, 피내골지역
○좁씨골
새터의 갈골 다음에 있는 큰 골짜기로 골짜기 어귀에 상철암 아파트가 있다. 옛날 칠년 가뭄에 곡식 씨앗을 구하기 어려워 사람들은 애가 탔다. 그러다가 이 골짜기에 와 보니 좁씨(서숙)가 남아 있어 그 씨앗을 구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좁씨골이라 한다. 일설에는 골짜기 안쪽에 좁씨 형국의 묘자리가 있어서 좁씨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좁씨는 좁쌀 즉 서숙이라고 하는 조(粟)를 의미하는 것이다.
○고터실
좁씨골 어귀를 지나 백산쪽으로 조금가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쪽에 옛날 사람이 살던 고터(古基)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실은 골에서 변형된 말이고 골과 같은 말이다.
○영모재(永慕齋)
남양 홍(洪)씨네 재실이다. 고터실과 새경이터 사이의 철로 앞쪽에 있다. 단기4247년(서기1914년)봄에 새운 건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방구쏘 앞에 있는 사당이며 약10여년전에 재실을 새로 신축했다.)
○새경이터
고터실 다음 골짜기이다. 옛날 그곳에 쇠경(봉사)이 살았던고로 쇠경이골이라 하였으며 그 말이 변해 새경이골로 변했다. 새경이터 윗쪽산이 삿갓봉이다. 백산의 봉등과 삿갓봉 사이로 길이 있어 백산과 철암으로 통하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
○쇠바우
백산과의 경계지점인 철로가에 있는 거대한 바위로 철암동의 지명을 낳게 한 바위이다. 높이 20여m, 넓이 30여m쯤 되는 큰 바위로 쇠성분(鐵成分)이 많아 쇠바위라 부르고 있으며 그 바위를 떼내어 녹여 쇠를 얻기도 했다. 새터 부근에 사는 마을사람들이 그 바위 아래에 사는 고로 쇠바우 마을이라 하다가 한문표기를 하니 쇠 철(鐵) 바위 암(岩)하여 철암리(鐵岩里)가 되었다.
○늪밭
시루봉 북쪽의 넓은 들을 늪바다 혹은 늪밭이라고 한다. 옛날 그곳은 농사가 잘되지 않는 곳으로 갈대와 버드나무 등이 무성한 늪지대였다. 그후 차츰 늪을 메우고 농토를 개간하여 현재와 같이 되었다. 늪으로 된 밭이라고 늪밭이다.(현재는 철암농공단지가 있는 지역이다.)
○신배나무골
철암갱(鐵岩坑 철암항) 뒷편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안에 큰 신배나무가 있어서 붙은 이름인데 안쪽에 몇 채의 민가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배나무골이다 지금은 민가가 거의 없다.)
○장군뫼께
철암항 옆 철암교회가 있는 자리이다. 옛날 교회를 짓기 전 큰 무덤이 있었는데 장군뫼라 하였다. 집을 짓기 위해 그 무덤을 파는데 누런 뼈골이 고리뼈로 되어 있어서 머리뼈를 들으니 나머지 뼈들이 함께 달려 나오더라고 하였다.
○피내골
옛날 난리 때 이 골짜기 안의 피난산(避亂山)에서 난리를 피했다고 피난골이라 하였는데 그 피난골이 변해 피내골이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피난산에 피난한 사람들이 적이 쳐들어와 무참히 죽여 피가 내를 이루며 흘렀다 하여 피냇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골짜기 안쪽에 흥복사(興複寺)라는 절이 있고 산림과 하천물이 깨끗하고 조용하여 철암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피난산(避亂山, 避內山)
피내골 안쪽 흥복사 뒷산이다. 옛날 난리때 이곳에서 사람들이 피난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구한말 때 의병들이 이곳에 은거하며 일군(日軍)들과 교전을 하였다고 하며 문곡쪽의 피아골과 철암의 피내골을 오고가며 싸웠다고 한다.
○마산등(馬山嶝)
피내골 어귀의 오른쪽에 솟은 산등이다. 피난산에서 뻗어온 산줄기가 이곳에 와서 불끈 솟으며 끝이난 곳인데 흔히 말하는 원동 뒷산이 된다. 산등 꼭대기에 올라가면 약간의 분지가 있고 분지 가운데에 묘가 여럿 있다. 경북 법전 강씨네 묘라고 하며 새재를 넘어 오다가 발견한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라고 한다. 마산등(馬山嶝)이란 이름은 거기에서 나온 것이다.(우리가 알고 있는 피내골재가 있는 산이다.)
○방장골
피내골로 들어가서 왼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 골짝기 안에 작은 암자가 있어 방장스님이 계셨기에 방장골이라 한다고 하며, 일설에는 그 골짜기가 몹시 추운 곳이라 집집마다 문에 방장(房帳)을 치고 살아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피내재
백산과 늪밭에서 피내골로 오는 고개이다. 피내골로 넘어오는 고개라서 피내재 이다. 마산등 중허리에 있는 고개는 아래 피내재라고 하는데 그것은 장성광업소의 북동사택과 철암초등학교가 생기면서 확장되어진 고개이다.
▣ 철암 그리고 돌구지
◎ 새뜨리(새뜰 : 間坪)
철암역과 남동, 시장 일대를 통틀어 새뜨리라고 한다. 철암(상철암)과 동점 사이에 있는 들이란 뜻으로 사이뜰(間坪)인데 그 말이 새뜰로, 새뜨리로 부르게 되었다. 옛날에는 이곳 일대에 3~4집이 살았고 바위가 많은 하천부지가 대부분인 땅이었는데 일인(日人)들이 장성광업소의 석탄을 이곳으로 운반하여 통리까지 가져가기 위해 기차역을 만들면서 하천부지를 메우고 돋우어 오늘날과 같이 되었다.
지금은 이곳이 철암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웃철암(上鐵岩)이 중심지였다. 기차역이 생기고 시장이 서면서 본래의 철암(웃철암)은 변두리로 밀려나고 철암하면 새뜨리 부근이요 본래의 철암은 웃철암 또는 상철암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 새재
새뜨리에서 장성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철암과 장성 사이에 있다고 새재(間峙)라 하는데 흔히 장성쪽에서는 철암재라하고 철암쪽에서는 장성재라고 한다. 장성읍사무소가 하장성에 있고 태백시 일원에 중고등학교가 태백중고등학교 밖에 없을 때는 하루에도 천수백명의 사람이 걸어서 넘어 다녔다. 그때는 버스도 없었고 마이크로버스는 있었으나 타고 다닐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개를 넘는 사람중에 학생이 가장 많았고 일반인 장사꾼들이 넘어 다녔다. 삼척지방에서 올라온 해산물을 이고 지고 걸어 넘는 생선장수도 있었고 멋모르고 외지에서 사람 찾으러 온 굽높은 신발을 신은 여자도 울며 넘었던 고개이다.
단기4300년대(서기1965~1970년대) 이후 완행버스가 생기면서 고개를 넘어 다니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지금은 오솔길에 잡초만 무성히 자라 일년에 한두 사람이 넘을까 말까한 길로 변해버렸다. 새뜨리 뒤에 있는 재라서 새재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 똥골
새재 밑에 있다. 새뜨리에서 새재로 올라가는 골짜기이다. 새뜨리쪽이 갑자기 커지며 새재 아래 산 밑 골짜기에 사람들이 몰려와 살게 되었다. 다닥다닥 붙은 판자집들 사이로 좁은 골목길이 있어 그리로 사람들이 지나서 새재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30여년 전 변소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 마을 어린아이들이 골목길 여기저기에 함부로 똥을 누어서 길가는 행인들이 밟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불미스럽게도 똥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 월천동(越川洞, 月川洞)
남동 건너편의 마을이다. 철암 우체국이 있는 동네인데 남동에서 보면 하천건너에 있는 마을이라 월천동(越川洞)이라 한다. 「月川洞」이라고도 쓰는데 하천물이 빙돌아 흐르며 마을이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해서이다.
◎ 삼방동(三芳洞)
철암시장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삼방산(三芳山)줄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서 삼방동이라 한다. 사실 삼방산은 풍곡에 있는데 그 당시 착각을 한 것이다. (삼방동 뒤편의 산은 두골산(頭骨山)이다)
◎ 신촌동(新村洞)
철암역 뒤쪽의 마을이다. 새로이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장성광업소의 폐석장이 생기면서 함께 생긴 마을인데 속칭 「보다바」라고 부른다. 폐석장을 일본말로 「보다바」라고 하는데 일제때 생긴 말이다. 과거 수십년 전 보다바 밑에 사는 사람들은 장성광업소의 폐석장(보다바)에 몰려가 괴탄(塊炭)을 주워 모아 팔아서 생계를 잇기도 하였다. 자연히 폐석장 밑의 마을도 보다바로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거의 없어진 마을이다)
◎ 임기동
철암갱(鐵岩坑, 철암항) 뒤쪽 폐석더미 위에 있던 마을이다. 지금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 남동(南洞)
철암역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일제때 장성광업소 사택을 지으면서 남쪽에 있다고 남동이라 했다. 그때는 이곳에 집이 없는 벌판이었고 새로이 집을 짓자 일인(日人)들이 임의대로 마을 이름을 붙였다.
◎ 중동(中洞)
남동과 북동 중간에 잇는 마을이란 뜻인데 마산등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 북동(北洞)
철암중고등학교 부근의 장성광업소 사택마을이다. 북쪽에 있다고 북동이라 한다. 과거에는 북동사택을 양반사택이라고 한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석공의 간부들이 사는 곳이라서 그러했다.
◎ 기타지역 : 저자의 편집에 없는 지역임
신설동(철암역 맞은편 철암극장이 있던 곳), 원동, 교동, 후미끼리(건널목의 일본식 발음)등은 정확한 유래는 알수 없으나 지역의 특성에 따라 일제시대 혹은 일본식 영향을 받아 붙여진 지명으로 추정 할 수 있다.
◎ 돌꾸지
소복단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강원탄광의 사택이 있는 곳을 돌꾸지라 한다. 돌꾸지의 지형이 풍수학적으로 보면 돌개(실감는 기구)처럼 생겼다하여 돌개치라 하였는데 그 말이 돌꾸지로 변했다고 한다. 또는 그곳에 돌이 많아 돌고지라 하였다 하며 돌고지가 돌꾸지로 변했다고 한다. 돌꾸지에 아홉 개의 돌샘이 있어서 돌구지라 불렀다고 하는 말도 있고 한자로「石九池(돌구지)」라고 기록한 문헌도 있다.(강원산업 사택이 있을 때에는 1000여세대 약3~4000명이 살았으나 1993년도 강원탄광 폐광이후 사택들이 철거되면서 지금은 단 한사람도 거주하지 않는 없어진 마을이다)
<출처: 1989년 12월 태백문화원(김강산) 태백의 지명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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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방동(三方洞)이라면 남동,중동,북동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