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기>의 글을 쓴 학자의 주장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옳은 것은?
-----------------<보기>--------------------
검소하다는 것은 물건이 있어도 남용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물건이 없다 하여 스스로 단념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안에는 구슬을 캐는 집이 없고 시장에 산호 따위의 보배가 없다. 또 금과 은을 가지고 가게에 들어가도 떡을 살 수 없는 형편이다. …… 이것은 물건을 이용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용할 줄 모르니 생산할 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니 백성은 나날이 궁핍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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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균전론을 내세워 사농공상 직업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여 자영농을 육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② 상공업을 육성하고 선박, 수레, 벽돌 등 발달된 청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제안하였다.
③ 처음에는 여전론, 이후에는 정전제를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 개혁을 주장하였다.
④ 통일 신라와 발해가 병립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설정하여 발해를 우리 역사의 체계 속에 적극적으로 포용하였다.
정답: ②
* 소비를 강조한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
박제가(1750~1805)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 무역선을 파견하여 청에서 행해지는 국제무역에도 참여하는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 등을 역설하였다. 또,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① 중농적 실학의 선구자 유형원(1622~1673)은 ‘반계수록’에서 사농공상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골고루 토지를 나누어 주어 자영농을 육성하자는 균전론을 내세웠다.
③ 정약용(1762~1836)은 한 마을을 여(呂) 단위로 토지를 집단화하여 공동 경작하고 그 수확량을 노동량에 따라 공동 분배하는 일종의 공동 농장 제도인 여전제를 주장하였다가, 후에 정전제(井田制, 사전 8결과, 공전 1결)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④ 정조 때에 유득공(1748~?)은 발해고(1784)를 저술하여 남의 신라와 북의 발해를 남북국 시대라 부를 것을 처음으로 제안하고,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