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인플루엔자(독감) 바이러스를 확인한 이후 세계 보건 당국이
오랜 기간 숙원으로 삼아온 ‘범용 인플루엔자 백신’ 개발의 돌파구가 열렸다.
2009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신종플루 백신.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한겨레
코로나19 대응에서 큰 성과를 거둔 메신저RNA(mRNA) 백신 기술이 돌파구를 여는 수단이 됐다. 메신저RNA란 바이러스의 유전 정보를 세포의 단백질 생산공장인 리보솜에 전달하는 RNA 유전물질을 말한다. 세포가 메신저RNA에 담긴 유전 정보에 따라 바이러스의 항원 단백질을 생산해 면역체계의 반응을 유도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이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한 인플루엔자 백신이 생쥐와 흰족제비 실험에서 현존하는 20가지의 모든 독감 유형에 강력한 효능을 보였다고 최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펜실베이니아대는 메신저RNA 백신의 원천기술을 개발한 헝가리 출신의 생화학자 카탈린 카리코 박사가 몸담고 있는 곳이다. 인플루엔자 연구의 권위자인 존 옥스퍼드 런던퀸메리대 교수는 ‘비비시’ 라디오에 출연해 “이번 연구는 진화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부터 인류를 보호할 수 있는 중대한 돌파구”라며 이 백신이 임상시험을 거쳐 2년 안에 사용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고 영국 언론들이 전했다. 현재 독감 백신은 세계보건기구 주관 아래 해마다 유행이 예상되는 3~4가지 바이러스 변종을 대상으로 한 백신을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예측이 들어맞으면 백신은 60% 정도의 감염 예방 효과를 발휘하지만, 예측이 틀리면 10%에 그친다. 그러나 이번에 연구진이 개발한 백신은 현존하는 인플루엔자 A형 18가지와 인플루엔자 B형 2가지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는 4가지 유형(A, B, C, D)과 그 아래 다양한 하위 변이들이 있다. 그 중 인간 사회를 순환하는 것은 A형과 B형이다.
연구진은 동물 실험에서 예방 접종 후 4개월 이상 강력하고 안정적인 항체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다만 20가지의 표적을 모두 포괄하는 관계로 특정 변종을 표적으로 한 백신보다는 항체 수치가 다소 낮았다. 연구진은 이 백신이 사람한테도 강력한 효능을 보이는지, 부작용은 얼마나 일으키는지 확인하기 위한 임상시험을 설계하고 있다. 옥스퍼드 박사는 “1상 임상시험에 30~40명의 지원자가 필요할 것이며 향후 6개월 안에 시험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왼쪽)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둘 다 RNA 바이러스로 구조는 비슷하지만 표면에 난 단백질 종류가 다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표면의 붉은 돌기는 스파이크 단백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표면의 옅은 파란색은 헤마글루티닌, 짙은 파란색은 뉴라미니다제다. 스파이크 단백질과 헤마글루티닌은 세포 침투 도구, 뉴라미니다제는 세포 탈출 도구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 제공© 제공: 한겨레 바이러스 표면의 헤마글루티닌이 표적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RNA 바이러스다. 단일 가닥의 RNA 유전물질을 단백질 껍데기가 감싸고, 그 표면에 세포 침투 도구로 사용하는 단백질이 박혀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DNA 같은 이중가닥이 아닌 단일 가닥이어서 변이가 쉽게 일어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표면에는 헤마글루티닌(HA)과 뉴라미니다아제(NA) 단백질이 있다. 바이러스는 세포에 침투할 때는 헤마글루티닌을, 증식 후 세포에서 빠져 나올 때는 뉴라미니다아제를 도구로 쓴다. 인플루엔자 A형 바이러스에는 18개의 헤마글루티닌 하위 유형, 11개의 뉴라미니다아제 하위 유형이 있어 이론상 198개의 조합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것은 131개이다. 세포 침투 도구인 헤마글루티닌이 바로 인플루엔자 백신의 항원 표적이다. 연구진은 무차별대입접근법을 이용해 20가지 계통 각각의 대표적인 헤마글루티닌 단백질 분자를 선택한 뒤, 이를 토대로 백신을 설계했다. 백신을 맞은 세포는 20가지 헤마글루티닌의 복제본을 만들어, 면역체계가 이 모두에 대응하는 항체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했다. 반면 실제 바이러스 단백질을 쓰는 기존 백신에서는 4가지 이상의 항원을 담아낼 수 없다.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이 개발한 메신저RNA 백신은 20가지의 모든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강력한 효능을 보였다. 사이언스© 제공: 한겨레 새로운 세계적 유행병 발생시 기본면역 작용 펜실베이니아대가 개발한 범용 백신이 임상시험에 성공한다 해도 모든 인플루엔자의 감염을 예방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 백신의 가장 큰 강점은 아직 인간에게 전파되지 않은 인플루엔자 항원이 포함되어 있다는 데 있다. 20가지의 항원 표적 중 상당수가 현재 동물에서만 유행하는 인플루엔자 유형이다. 캐나다 서스캐처원대 앨리슨 켈빈 교수(백신학)는 뉴욕타임스에 “이 백신이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작용한다면 계절 순환 독감뿐 아니라 미래에 세계적인 유행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새로운 동물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도 통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새로운 대유행 인플루엔자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을 가정해 20가지가 아닌 다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백신의 효능을 시험했다. 그 결과 감염을 예방하지는 못하지만 감염으로 인한 중증과 사망을 방지하는 효과는 확인했다.
연구를 이끈 스콧 헨슬리 교수(미생물학)는 특히 이 시험 결과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이는 대유행 상황과 유사하며 이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말했다. 이는 다양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대해 기본적인 면역 기억을 제공함으로써 다음 인플루엔자 대유행이 발생할 때 중증 감염자와 사망자를 훨씬 줄여줄 수 있는 백신을 확보하게 된다는 걸 뜻한다. 예컨대 2009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신종플루(H1N1)의 경우 기존 백신은 거의 무력했지만 어린 시절에 H1N1 변이에 노출된 적이 있던 노인들은 감염이 돼도 증상이 가벼웠다. 펜실베이니아대의 범용 백신이 바로 이와 같은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헨슬리 교수는 범용 인플루엔자 백신을 코로나19의 1세대 메신저RNA 백신에 비유했다. 1세대 코로나19 백신은 오미크론 같은 최신 변이의 감염을 차단하지는 못하지만 중증으로 발전하거나 사망하는 것은 막아준다. 이는 제약업체들의 메신저RNA 인플루엔자 백신 개발과는 다른 방식이다. 모더나, 사노피 등 제약업체들의 메신저RNA 인플루엔자 백신은 가장 많이 유행하는 4가지 또는 특정 변종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