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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 한서교회는 1918년 12월 20일 남궁억 선생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이다. |
기념관은 독립운동가, 근대교육가로서 남궁억 선생의 발자취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도록 잘 꾸며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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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남궁억(1863~1939년)선생은 고종황제 영어통역관, 황성신문 주필, 독립협회 활동 등 일제 시대 많은 정치, 교육활동을 했다.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개혁운동에도 참여하였으나 독립협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남궁억은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독립신문을 편집한 경험을 살려서 황성신문 사장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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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념관 옆으로 말끔히 복원된 옛 모곡교회당 건물이 있다. 이곳에는 남궁 선생의 정신이 표현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는데, 가운데 흰 천을 중심으로 남녀가 따로 앉아 예배를 드리던 모습이 인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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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 선생의 지치지 않는 민족혼은 1922년 9월 마태복음 9장 35∼38절을 묵상하고 드린 기도문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주여, 이 나이 환갑이 넘은 기물이오나 이 민족을 위해 바치오니! 젊어서 가진 애국심을 아무리 혹독한 왜정 하 일지라도 변절하지 않고 육으로 영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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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곡교회 학생들의 만세운동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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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남궁 선생이 지은 <무궁화 동산>이란 노래가 학생들 사이에 불러지게 되자, 일제는 보안법 혐의로 남궁 선생을 체포한다. 1936년 옥중에서 병들어 보석으로 석방된 74세의 남궁 선생은 결국 1939년 4월 5일 소천 하였다.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수나무 밑에 심어 거름이 되게 하라”라고 남궁 선생은 유언했지만 후손들은 그가 늘 새벽기도 하던 유리봉에 무덤을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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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기념관과 복원된 옛 교회당, 넓은 무궁화 묘포장, 그리고 1998년 7월에 신축된 기념교회 건물이 나란히 들어서있는 한서교회는 그 자체로 한국교회 민족운동의 교육관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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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억 선생은 무궁화를 뽕나무 묘목으로 위장해서 심고 가꾸어 1922-30년까지 십년동안 사립학교와 교회로 보냈다. 지금도 연세대 캠퍼스 안에 해마다 피어나는 무궁화가 이때의 무궁화요 남원의 무궁화와 안동의 무궁화로 알려진 우리나라 최장수 무궁화가 이때의 무궁화이며 서대문 석교감리교회 마당에 피어나는 무궁화가 이때의 무궁화이다. | |
* 한서초등학교 * 남궁억 선생 묘소 | |
* 현재 한서교회 예배당 내부 |
* 한서 남궁억 기념관에는 무궁화 십가당 사건 취조 장면 재현, 보리울 모곡학교 모형, 남궁억 선생의 붓글씨와 저서, 독립신문 영인본, 황성신문 영인본 등이 전시돼 있으며 그가 작사한 노래 중 10여곡을 청취할 수 있는 코너가 마련돼 있다.
* 주소: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38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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