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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시사뉴스에서는 늘 독도문제를 다뤄왔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중점으로 알찬 내용을 독자여러분께 바르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 하던 중 이번에 전 국민에게 애국심을 심기위해 새롭게 말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런사람’을 통해서 애국자(독립운동가)를 소개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기획 독립운동가 세 번째 이야기
독립운동가 윤동주 신앙과 민족정신
일본 유학 중이다가 귀국했던 때의 윤동주와 송몽규 등 사진. 뒷줄 맨 오른쪽이 윤동주.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입니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어머니 김용(金龍, 1891-1947)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년 2월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남종구(南宗九)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金河奎) 네 가문의 식솔 140여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이었습니다.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인 명동소학교 입학…손수 <새 명동>이라는 잡지 펴내
아름다운 자연과 기독교신앙, 그리고 민족주의가 삼위일체로 어우러진 기름진 토양 속에서 풍요롭게 자라난 시인 윤동주는 1925년 만 8세의 나이로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3.1운동 이후 북간도 대한국민회가 조직되고, 국경선 일대의 봉오동․청산리 등지에서 치열한 독립전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명동학교 출신들이 보여준 활약상에 잘 나타나 있듯이, 그가 다닌 명동학교는 수많은 민족지사를 배출한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이었습니다. 그래서 1920년 10월 ‘간도 대토벌’에 나선 일본군에 의해 1918년 신축된 양옥 벽돌교사가 불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아이생활>> <<어린이>> 등의 잡지를 구독하며 문학소년의 꿈을 키우던 윤동주와 동기들은 5학년 때인 1929년 손수 원고를 모아 편집해서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등과 함께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해 1년을 더 다녔습니다. 대랍자는 명동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화룡현 현청 소재지였는데, 윤동주와 송몽규는 명동에서 대랍자까지 십 리 길을 날마다 걸어서 통학했다고 합니다.
윤동주가 대랍자 소학교에 다니던 1931년 늦가을 윤동주의 집은 명동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해란강 하류의 소도시 용정으로 이사했습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무장단의 출몰이 잦아지자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신변안전이 보장되는 도회지로 이주한 것입니다. 용정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거점도시로 일본 간도 총영사관이 위치해 있었습니다.
용정에서 윤동주는 1932년 4월 명동소학교 동창인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16세 때의 일인데, 이름을 아명인 해환 대신 ‘윤동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습니다.
자신이 지은 시에 날짜를 적어 보관하며 작품 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습니다. ‘1934년 12월 24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초한대>를 비롯한 세 편의 시가 그것인데,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사와 한문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에게서 받은 감화였습니다. 명 선생은 학생들에게 불굴의 독립의지와 치열한 역사의식을 일깨워주는 한편으로, 중국 군관학교 등에 입교를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초한대>에 나오는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 나의 방에 풍긴 /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는 시 구절은 그 같은 가르침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었습니다. 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깨끗한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던 윤동주 자신 또한 뒤에 그 제물로 바쳐졌으니, 시인의 범상치 않은 예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1935년 봄 고종사촌 송몽규가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상급학교 진학에 대비해 5년제인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해 가자,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한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그 해 여름 숭실중학교 가을학기 편입시험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한 학년 아래인 3학년으로의 편입자격밖에 얻지 못하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1935년 9월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객지생활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 해서 무려 15편의 시를 쏟아냈습니다. 숭실중 학생청년회에서 발행하던 <<숭실활천>>(1935. 10)에 실린 <공상>은 그의 시 가운데 최초로 활자화된 작품이었습니다. 이 무렵 윤동주는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세계를 열어나갔습니다. 1935년 12월에 쓴 <조개 껍질>을 시작으로 1938년 연희전문 1학년 때까지 계속된 그의 동시 쓰기는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습니다.
1936년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용정에서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습니다. 광명중학에 재학하던 2년 동안 윤동주는 동시에 더욱 몰두하여 연길에서 발행되던 월간잡지 [가톨릭소년]에 모두 5편의 동시를 발표하였습니다.
1938년 2월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1938년은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해 한민족 전체를 전시총동원체제의 수렁으로 몰아넣던 때였습니다. 때문에 그의 고뇌와 번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희전문의 기숙사를 나와 하숙생활을 시작한 2학년 때부터 동시 쓰기를 아예 그만두었습니다. 1939년 한 해 동안 그가 쓴 시는 6편에 불과했는데, 그나마도 9월에 가서야 쓴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때 쓴 <자화상>에는 전쟁에 광분한 일본 군국주의가 단말마적 발악을 하는 속에서 식민지의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이 짙게 배어 있고, <투르게네프의 언덕>에는 기만적인 싸구려 이웃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겨있어 당시 그의 내면풍경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이후 윤동주는 1940년 12월까지 1년 이상 절필을 합니다. 1940년 12월경에 쓴 <팔복>의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는 시 구절처럼, 이 기간에 그는 민족의 처절한 수난에도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을 지키는 신에게 대들었습니다. 1939년 가을 용정 정안구(精安區) 제창로(濟昌路) 1-20호, 캐나다 선교부 경내 경치 좋은 언덕에 세워진 큰 집으로 집안이 이사하고 나서 방학 때 집을 찾은 윤동주에게 예전에 보았던 신앙의 열성을 찾을 수 없었다는 동생 윤일주의 회고처럼 이 무렵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었습니다.
이런 오랜 고뇌와 번민의 터널을 지나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이 되는 1941년 그 모든 내적인 방황과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무서운 시간>, 1941. 2)라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다시금 확인하며, 나라 잃어 <간판 없는 거리>의 “모퉁이마다 /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 불을 켜놓고” 어진 사람 사람들의 손목을 잡고 보듬는 따뜻한 민족 사랑을 시로 녹여 나갔습니다.
졸업을 앞둔 그 해 11월 윤동주는 그 때까지 써놓은 시중에서 18편을 뽑고 여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집 원고를 3부 필사해 1부는 자신이 갖고, 1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또 1부는 함께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습니다. 1부를 이양하 교수에게 바친 것은 출판을 주선해달라는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이 교수의 답변은 출판을 보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일제 관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뿐더러 신변에 위험도 따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던 듯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첫 시집 출판은 해방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立教大学]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하였습니다. <쉽게 쓰여진 시>(1942. 6)의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라는 구절에 나와 있듯이, 유학 초기 윤동주는 이국 땅에서 적잖이 향수병에 시달렸습니다.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특고경찰은 여기에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해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불명의 주사를 놓아 이 모양이 되었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그 같은 증언을 한 송몽규 또한 20일 남짓 지난 3월 7일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중 순국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유해는 3월 6일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 해 6월 그의 무덤 앞에는 집안 사람들의 정성으로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윤동주의 유시는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유고와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 시집 등 31편의 시를 모아 1948년 1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1968년 11월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가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건립되었습니다.
우리 후손들에게는 한맥이 흐르고 있습니다. 민족의 시인 윤동주의 정신을 이어 받아서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이 사랑이 민족의 평화까지 이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자료발췌
[네이버 지식백과] 윤동주 [尹東柱] - 순결한 희망 (독립운동가, 장규식, 이달의 독립운동가)
제공처 국가보훈처 http://www.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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