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관 들어서면 초입
임진왜란 1592 ~ 1598
"사천해전"
1592년 음력 5월 29일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해전"
3일 후 당포해전에서도
거북선의 활약으로 일본수군 파괴
조선군 피해 : 이순신, 나대용, 이설 부상
일본군 피해 : 13척 파괴
조선수군을 보다
조선 수군의 조직
● 일본과 가까운 경상도와 전라도는
좌도와 우도로 나누어 수사를 2명씩 두었다.
한양에서 보았을 때
왼쪽인 동부가 좌도, 오른쪽인 서부가 우도였다.
●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는
임진왜란 중에 처음 만들어졌다.
초대 통제사는 이순신이었으며, 1895년까지 계속되었다.
● 경기, 강원, 평안, 함경도에도 수사가 있었으나,
경기도만 제외하면 수군위 숫자도 적었고
관찰사가 수사를 겸하고 있었다.
전시된 유물들은
조선 수군이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다.
군령서 역할을 했던 각종 패(牌)를 비롯하여
역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
통영선생안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조선 수군이
체계적인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여 유지되고 관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판옥선의 구조와 생활
판옥선은 갑판이 1개인 평선 위에
판옥을 설치하여 2중 갑판 구조로 되어 있었다.
1층은 수군들의 침실과 각종 창고로 이용되며,
2층은 격군과 방포장(화포장)이
적군에게 방해받지 않고
판옥 안에서 노를 젓거나 포를 쏘는 곳이다.
3층은 노천 갑판이며
사부들이 방패에 의지하여 활이나 개인화기 등으로
전투를 수행하는 곳이다.
또한 3층 갑판에는 따로 장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선장이 장대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배 뒷부분의 고물꼬리에는
널판을 깔지 않고 난간 없이 비워 두었다.
이 곳을 통해 대서변을 보거나 육지로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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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의 어두운 그림자
강제 징집
병력이 부족했던 조선 수군은 젊은 남자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병력을 보충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기근과 역병
조선 수군은 군량이 부족하여
굶주림에 시달렸고,
굶주려 체력이 약해진 병사들이
병에 쉽게 걸리는 악순환을 겪었다.
도주와 처형
수군 생활이 힘들어 병사들이 탈영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잡혀온 탈영병들은 처형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무기
조선 수군
조선 수군은 기본적으로 모두 칼(환도)을 지녔다,
적군과 1:1로 싸울 수 있는 상황을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제일 많이 쓰인 무기는 역시 활과 화약무기였다.
특히 길이가 30cm 정도밖에 안 되는 편전(애기살)은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조총과 중국의 창법, 조선의 편전을
천하제일로 꼽았다.
일본 수군
일본 수군 역시 기본적으로 모두 칼(일본도)을 지녔다.
제일 많이 쓰인 무기는 조총이었다.
그 외에 대형 조총 격인 오오쓰쓰나,
특이하게 긴 모양인 일본 장궁 등이 쓰였다.
칠천량 해전의 배경
일본 복수를 준비하다
전투를 피하는 일본
일본의 복수 준비
일본군의 반간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제1군 대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제2군 대장 가토 키요마사는 매우 사이가 나빴다.
그들의 사이는 조선 조정과 명나라까지 알고 있을 정도였다.
고니시는 그러한 상황을 오히려 역이용하여
이순신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1597년 1월은 강화협상이 결렬되고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공해 정유재란이 발발하던 때였다.
일본에 있던 가토도 다시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1월 11일 고니시는
자신의 부하 요시라를 통해
조선 조정에게 조선 수군을 시켜
가토를 공격하라고 권유한다.
이 권유는 1월 19일에 조선 조정에 도착하는데,
가토는 이미 1월 13일에 부산에 도착해 버렸다.
원균 선무공신교서
보물 제 1133호, 임진왜란이 끝난 뒤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선무공신 1등으로 봉해졌다.
칠천량 해전의 수장, 원균
칠천량 해전의 수장_원균의 딜레마
원균(1540~1597)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수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라는
선조의 명을 받게 되었다.
원균도 통제사가 되기 전에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수군이 단독으로 바다에 나아가
일본군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원균은 통제사가 되고 난 뒤
수군 단독으로 일본군을 제압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원균은 조선 육군을 동원하여 앞세우고
수군이 그 뒤를 따라 진격하자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선조는 원균에게
계속 수군이 단독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원균은 조선 수군울 이끌고 바다로 나아갔으며,
칠천량의 패전은 그렇게 비롯되었다.
선조의 어긋난 판단
통제사 이순신을 하옥하라 명하고, 원균으로 대신하였다.
이보다 앞서 평행장과 경상 우병사 김응서가 서로 통하여,
요시라가 그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그가 말한 바가 마치 가등청정과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해서
우리 나라는 그걸 믿었었다.
이때에 왜적이 재침을 모의하면서
우리 나라의 수군을 꺼려했고,
그중에서도 더욱더 순신을 꺼렸다.
이에 요시라를 보내서 말하기를
"강화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실로 가등청정이 주장하고 있어서이다.
만약 그를 제거하면
나의 한이 풀리게 되고 귀국의 근심도 제거될 것이다.
모월 모일에 가등청정이 어느 섬에서 잘 것이니,
귀국에서 만약 수군을 시켜 몰래 잠복해 있다가 엄습하면
결박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응서가 이로써 보고하니,
상이 황신을 보내 순신에게 비밀히 유시하였다.
... (후략)
이순신을 견제하고 있던 선조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요시라의 반간계를 알고서도 속아주었다.
조선 조정은 요시라의 보고를 곧이돋대로 믿지는 않았다.
요시라가 거짓 정보를 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1월 21일에는 가토의 부산 상륙이 조선 조정에 알려졌다.
따라서 요시라의 반간계는 그냥 해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조가 갑자기 이순신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가토를 잡을 수 있었는데도 싸우기 싫어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왕인 선조가 이순신을 비난하자 신하들이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결국 이순신은 1월 28일에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2월 26일에 한산도의 통제영에서 한양으로 잡혀오게 되었다.
이순신의 후임에는 원균이 임명되었다.
새로 온 통제사
원균은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이순신을 견제하려던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하옥된 이순신
이순신은 선조의 명을 충실히따라
부산포에 진격하고서도 억울하게 하옥되었다.
이순신을 견제하고 있던 선조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요시라의 반간계를 알고서도 속아주었다.
불길한 전조
칠천량 해전이
일어나게 되기까지
조선과 일본의 군선
칠천량에서의 패배
칠천량 패전의 현장
당시 모형도
동국신속 삼강행실도 중 열녀도
일본군의 만행에 죽기를 결심한 여성들은
강, 절벽, 언덕, 바위 등에서 뛰어내리거나
패도를 사용하거나
스스로 목을 매어서 자결하였다.
칠천량 해전의 결과
유린당하는 백성들
다시 쳐들어온 일본군은
발길을 디디는 곳마다 대량 살육과 약탈을 일삼았으며
많은 조선인을 포로로 잡아갔다.
특히 조선 군사와 백성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가지고 가는
잔인한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
조선 여성들 중에는
일본군의 만행을 피해 자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조경남의 (난중잡록)
히데요시가... (중략) ...
사람이 귀는 둘이 있고 코는 하나뿐이니
코를 베어 한사람 죽인 것을 표시하여 바치고
... (중략) ... 하였으므로,
이번에 나와서는 사람만 보면 죽이건 안죽이건
번번이 코를 베었으므로
그 뒤 수십 연간에 본국 길에서
코 없는 사람을 매우 많이 볼 수 있었다.
요시히로 등의 군사는
곤양의 금오산과 노량 등지에 배를 대고
산중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고,
관청과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적병 50여명이 운봉현에 가 분탕질을 치고 산을 뒤져 가면서
사람을 죽이고 노략질하였다.
히데이에와 유키나가 등의 군대가
임실로부터 남원을 지나 원천 원평에 진을 치고
산골짜기를 대수색하며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
적병 만여 명이 우도로부터 남원에 이르렀다가
다음날 운봉으로 향하였는데,
산을 수색하여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곤 하였다.
케이넨의 (조선일기)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 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 죽여 갈라놓는다.
성내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사람이 없다.
칠천량해전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죽었고,
여러 장수와 군사가 죽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해전도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입구 한켠에 수유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