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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1984년 1월4일)
우리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님의 상호相好룰 보면 오른 손을 이렇게 들고서 바깥쪽으로 손바닥을 향하고 있고, 왼편은 아래로 바깥으로 손바닥을 향해 계십니다. 이러한 것은 어떠한 것인가 하면 무외시인無畏施印이라, 우리는 부처님 모습 가운데서 몇 가지 정도는 알아 두는 것이 참 편리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법계정인法界定印이라,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일체 모두를 하나의 법으로 통일시키는 그런 한 가지 비밀 밀인密印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라는 것은 우리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하면, 이와 같이 법계정인을 항시 부처님께서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 같은 모양이 아니라 천지 우주 기운, 부처님 기운이 이와 같이 법계정인 같은 상징적인 모습으로 있는 것입니다.
헌데 그와 같은 모습도 있고, 또 어떤 모습은 설법인說法印 이라 이렇게 감입嵌入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은 설법說法한다는 중생에게 모든 의문을 다 풀어주고서 오직 부처님에게로 나아가게 하는, 즉 의단疑團을 풀고서 성불하게 하는 그러한 모양 그 인계가 손 모습이 설법인說法印 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관세음보살님의 무외시인無畏施印이라 불교가 한자가 돼서 어렵습니다만, 풀이해서 그때그때 말씀합니다.
이런 시간에는 여러분이 긴장을 풀고서 편한 자세로 좌담座談하는 그런 기분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외시無畏施이것이 무엇 인가 하면 보시를 하는데 재물로 보시하는 재시財施가 있고 법문으로 해서 보시하는 법시法施가 있고 그다음으로 무외시가 있는데 무외시는 없을 무無자 두려울 외畏자 베풀 시施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두려움이 없게 한단 말입니다. 어느 한 스님은 무외시를 “두려움 없이 보시한다.”라고 말씀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잘 못 판단하신 말씀입니다. 무외시라는 것은 두려움 없이 남한테 보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의 마음에 두려움을 없게 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역시 중생심衆生心인지라 자기한테 기분이 좋을 때는 미소도 띄우고 하면서 굉장히 부드럽게 대합니다만, 조금 기분 나쁘게 하면 얼굴에 핏기를 올리면서 성내고 궂은 말로 응수를 합니다. 또는 자기한테 기분 나쁜 정도가 도가 지나치면 그때는 때리기도 하거든요, 더 미워지면 그때는 저놈을 죽이려 하며 죽이기도 한단 말입니다. 싸우는 것은 우리가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극도로 차올라서 싸우고 죽이고 전쟁이 나고 하겠지요. 이러한 것은 무외시 이것과 정반대입니다.
무외시는 중생한테 어떠한 경우도 중생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말입니다. 어떠한 경우도 중생을 헤치지 않는단 말입니다. 어떤 경우도 물건을 빼앗지도 않고 헤치지 않고 그렇게 하려면 먼저 계행戒行을 지켜야 합니다. 계행 없이 무외시 보시는 절대 못합니다. 계행을 바로 지키려면 우리 마음이 공空의 지혜, 제법공諸法空이라는 공에 통달을 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아시는 바와 같이 제바달다提婆達多는 부처님의 종제從弟아닙니까. 종제인 그 사람도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약간의 신통神通을 한다 말입니다. 허나 ‘나’라는 아상我相을 못 끊고는 신통을 좀 한다 하더라도 나를 못 끊으면 신통을 바로 못 씁니다.
같은 통도 도통道通하면 그땐 나를 끊고 또한 거기에 곁들여 역시 무아의 경지에서 신통을 자제하지만, 도통이 안 되고 그냥 외도라는 것은 약간 재주를 부려서 축지縮地도 하고 남 마음을 헤아리기도 하지만 그때는 아我를 못 끊어서 신통을 바로 못 쓰는 것입니다.
제바달다는 부처님의 종제從弟인지라 어떻게 들은풍월風月로 해서 신통을 좀 하나 ‘나’라는 아상我相을 못 끊어서 신통을 바로 못 쓴다 말입니다. 그렇게 그냥 아사세왕은 세속의 왕이 되고 자기는 부처님 대신 법왕法王되어서 진리의 왕이 돼서 명리名利를 얻어서 지내보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가서 몇 번 말씀 했어요,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미 나이도 많으시니까 그만 은퇴하시고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헌데 부처님께서 제바달다를 보건데 아직도 아상이 탱천撐天한데 그 사람한테 대법을 인계하겠습니까, 불법佛法이란 것은 결국은 무아無我의 도道내가 없고 일체만유一切萬有가 제법諸法이 공하다는 그런 도인데, 그런 도를 자기한테 얽매이고 명예에 얽매이고 이익에 얽매이고 그 사람한테 아무리 자기 종제일망정 허락하겠습니까.
“할 수 없다 네가 다시 들어가서 공부해야 한다. 네가 무학도無學道인 더 배울 수 없는 최상의 그런 진리를 네가 성취하면 그때는 내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대체로 부처님 전기를 보면 아시는 바와 같이 별별 수단으로 부처님을 방해하고 나중에는 시해하려 했습니다. 한번은 아주 영악스러운 코끼리한테 독주毒酒를 먹여서 부처님께서 오시는 길에다 부처님 저만치 앞에 코끼리를 몰아 세웠단 말입니다. 더구나 영악스러운 훈련을 잘 받은 코끼리에게 독주를 먹여놨으니 단박에 쫒아가 부처님을 유린할 수 있겠지요, 짓밟아 버릴 수가 있겠다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종지一切種智라 일체를 다 굽어보시고 통달通達하신지라 다 아시고 이렇게 손짓을 했습니다. 이것이 아까 말씀한대로 무외시인無畏施印이라 어떠한 경우도 난 그대를 해치지 않는다 말입니다. 우리 같은 중생들은 말로는 쉽게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비슷한 마음을 품겠지요.
허나 우리 마음의 번뇌煩惱가 다 뽑혀서 어떠한 경우도 조건 없이 남을 해치지 않고 그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공에 사무치고 우리가 도에 통달하지 않으면, 어떤 경우도 남을 해치지 않고 나쁜 말하지 않고 안색을 굽히지 않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자광삼매慈光三昧라 벌써 몸 전체에서 자비로운 광명이 풍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악한 사람도 자광삼매에 들어버리면 그 앞에서 자비스러운 광명 때문에 조복調伏을 당하고 맙니다. 어찌 그런가 하면 코끼리 본성도 불성이지요, 나의 본성도 불성이지요, 겉의 마음끼리는 안 통한다 하더라도 내내야 그 저변底邊의 마음은 하나인지라 불심은 하나인지라 불심에 사무치면 그땐 통한단 말입니다.
그전에 저는 탁발생활을 좀 했습니다, 동냥할 때 남의 집 들어갈 때 먼저 게송을 탁발이라는 게송이 있어요, 게송을 외운 다음에 『반야심경』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만, 때때로 더러 비판적으로 말합니다. 일반 속가 사람들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어떻게 아느냐 염불念佛을 쉬운 말로 하지 그렇게 하냐고 말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탁발托鉢을 하러 시골에 가면 주인이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농번기 때는 다 나가고 없다 말입니다, 그러면 닭이나 개가 있겠지요, 그래도 우리는 염불을 하고 나옵니다.
그런 경우에도 비판을 합니다. 사람도 없는데 그런 어려운 난해한 염불을 뭐하려고 하고 오냐고요. 그러나 그런 것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찌 그런가 하면 비록 닭이나 개라 하더라도 중생은 미쳐 안 보인다 하더라도 집이 있으면 집을 지키는 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무가 있으면 나무를 지키는 목신木神이 있고, 물이 있으면 물에 곁들인 순수한 그런 신인 용왕龍王이 있습니다. 허나 사람끼리의 번뇌에 어두운 겉으로 부동浮動의 그런 들뜬 마음은 안 통합니다. 그러나 저 저변은 똑 같습니다. 마치 무한無限의 저변底邊을 가지고 있는 삼각뿔 모양으로, 삼각뿔의 뾰족한 초점부분은 작다 하더라도 아래는 무한의 저변을 가지고 있는 삼각뿔 모양으로 말입니다.
갑이란 사람이나 을이란 사람이나 김이란 사람이나 박이란 사람이나 저변은 모두 무한합니다. 무한의 불성佛性과 통해 있습니다. 빙산의 일각이라, 우리는 나 개인 강청화姜淸華도 그렇게 생각하면 빙산의 일각이라, 저 한없는 저변을 갖고 있는 삼각뿔의 조그마한 하나의 뿔입니다. 그러나 저 밑에 가서는 한도 끝도 없이 불성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성과 나는 둘이 아닙니다. 아무리 못났다 하더라도 잘났다 하더라도 내내야 바로 불성과 딱 닿았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기독교 하나님처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서 인간 따로 있고 하나님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바로 나하고 직결되어 있습니다. 색즉공色卽空이라 색과 공이 둘이 아닙니다. 색 바로 그대로 공이요 또한 동시에 공 그대로 색입니다. 부처님 그대로 중생이요 중생 그대로 부처입니다. 다만 문제는 우리가 부처인지를 미처 모른단 말입니다. 문제는 그뿐입니다.
부처님이 이와 같이 무외시인無畏施印을 하시니까 그렇게 영악스러운 코끼리가 마치 서리 맞은 꽃 모양으로 시들어 버리고 무릎을 꿇고서 법문 듣는 자세로 눈물을 흘린단 말입니다. 코끼리라 하더라도 역시 과거 전생에 사람도 되었다가 개가 되었다가 뭣도 되고 했던 것입니다. 가장 근원은 부처입니다. 따라서 코끼리의 업식業識과 사람의 업식과는 미처 안 통하겠지요. 겉에 뜬 업식은 안 통하나 저 저변의 불심은 통한단 말입니다.
우리 같은 중생들이 이렇게 백번 들어본들 통하겠습니까마는, 부처님의 자광삼매慈光三昧라 조금도 한계가 없는 어떠한 경우도 그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벌써 불심에 사무치니까 그땐 어떠한 경우도 가사 애매하게 자기 목에다 칼을 들이대도 동요를 않겠지요. 그런 자비심慈悲心!
『아함경阿含經』에 말씀한 것처럼 애매하게 아무 이유 없이 양날톱으로 자기 목을 친다 하더라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 것이 불자佛子라고 말입니다. 그런 정도가 되면 정작 자광삼매라 자비로운 순수한 광명이 빛나서 이렇게 조복調伏을 시킨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에 사인관세四人觀世란 법문이 있어요. 이런 말씀을 굳이 한 것은 우리 인연 도반道伴들이 공 소식을 보다 철저히 알기위해서 제가 말씀 하는 것입니다. 사인관세 넉 사四자 사람인人자 볼 관觀자 인간 세世자 사람의 차원이 사람이 마음을 공부하는 차원이 네 단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들이 관세라 인간세상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 네 가지 차원의 사람이 인간 세상을 보는 각각의 견해를 말했다 말입니다.
일반 중생은 탐심貪心진심嗔心치심癡心과 같은 그런 삼독심三毒心에 가린 그런 중생衆生은 인간을 본다 할 때에 안락安樂이라 아주 안락스럽게 봅니다. 삶이란 그야 말로 재밌고 잘 쓰고 잘 먹고 지위가 올라가거나 이성간에 좋아하고 그렇게 한다 말입니다. 또한 잘 입고 잘 살고 그렇게만 인간을 보는 것이 범부凡夫입니다.
그렇게 보니까 못살면 성도 내고 이상한 짓도 그냥 해버린단 말입니다. 일단 범부라는 것은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즉 말하자면 오욕五慾을 충당하려는 것이 인간이다. 오욕은 재미있는 것이다, 이것이 범부입니다. 그다음은 이승二乘이라, 이승이란 것은 좋은 것들을 공부해서 무상無常도 느끼고 합니다. 무상을 느끼는 이승은 불교말로 말하면 성문聲聞연각승緣覺乘이죠. 완전한 도인은 못 되었어도 말입니다.
무상을 느끼는 단계인 이승들은 어떻게 보는가, 이승은 고苦로 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낳을 때나 자랄 때나 늙을 때나 아플 때나 죽을 때나 그것을 떠난다 하더라도 고가 얼마나 많습니까! 쥐꼬리만한 낙樂이 있다 하더라도 내내야 고가 원인되어 서 안락이 있습니다. 부자가 그냥 부자가 되는 것 아닙니다. 얼마나 애쓰고 고생하고 저축하고 절약하고 계획도 세우고해서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겠지요.
물론 숙세宿世의 복도 있는 것이지만, 숙세역시 과거세의 영향을 닦고 닦고 과거세도 못 닦았으면 금생今生에 부자가 못 됩니다. 금생도 마찬가지지만 아무튼 낙樂이라 하는 것이 아픈 고생 늙는 고생 죽는 고생 그런 고생은 떼버린다 하더라도, 안락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참 허망합니다. 그것은 따지고 보면 다 고생이지만 그러기 때문에 일체개고一切皆苦라 다 개皆자 괴로울 고苦자 일체가 다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만나면 헤어져야 하고 누군가는 낳게 되면 죽어야하고 있으면 잃어버려지는 것이고 만나면 헤어져야하고 낳으면 죽는 것이고 말입니다. 이것이 고苦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같이 무상無常을 느낀다하면 그때는 인생은 고로 본단 말입니다. 인생을 고苦로만 본다 하면 ‘인생을 안락한 대로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한다.’ 그런 인생관을 세울 수가 없겠지요.
그러면 한 단계 더 올라간 단계는 보살菩薩이라 보살은 어떻게 보는가? 보살은 인생과 우주를 공空으로 봅니다. 종단에 공이라는 것은 현대 물리학은 증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공이 되고 만다 말입니다. 방사放射광선이 비치건 말건 플러스마이너스 음전자陰電子양전자陽電子가 합치면 그땐 공이 되고 맙니다.
가사 원자핵原子核이 어느 조건 밑에서 분열하면 그땐 원자폭탄이 되었다 공으로 변해 버리지요. 또한 핵융합核融合도 그것이 수소폭탄이 되어 공이 되어버리지요. 아무튼 일체 물질이, 내 몸뚱이 세포나 모든 물질의 근원이 하나의 원자다 뭐다 생각할 때에 일체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도 공인지라 다른 것은 다시 말 할 수 없겠지요. 현미경을 끼고 예쁜 미인을 본다합시다. 미인을 보면 마치 어레미 같이 보일 것입니다. 구멍이 송송한 어레미 말입니다.
아까 말처럼 ‘일체 만유萬有가 내 인식주관認識主觀에 의존해 있다 말입니다’ 궂다 좋다 예쁘다 밉다 검다 희다 모두가 다 ‘나’라 하는 인식주관에 의존해 있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상대相對해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이란 것은 참 과거 마음은 이미 죽어버리고, 미래 마음은 아직 오지도 않고, 현재 마음은 순간순간 변화되고 말입니다.
그러기에 『금강경金剛經』에서 과거심過去心 불가득不可得과거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 불가득이라 미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또한 현재심 불가득이라 현재 마음도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다만 우리가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에 희망을 품고하는 것에서 과거 미래라 하는 것이지, 바른대로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을 한계를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보든지 간에 원래 주관 객관이 한계가 없는 것이지만 우리
가 보는 주관이나 객관은 따지고 바로 보면 볼수록 모두 공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제법공諸法空의 실상實相’이라,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제법공諸法空의 실상實相에서 본다면 만물의 실상實相은 제법공諸法空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망상妄相 가상假相이고 바른 것은 결국은 공空입니다.
지금 이 가운데도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이나 그런 방편을 공부 하신 분들이 몇이나 계신 모양입니다만, 보리방편문을 하도 어렵다 합니다. 해봐도 뭣이 뭣인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탐구력探究力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보리방편문을 보면 그것 참 쉬운 것입니다. 내용을 보신다면 내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도파(설파)한 법문입니다. 거기다 살을 좀 더 보태서 내 마음자리 체體는 법신法身이요, 내 마음자리 거기에 들어있는 일체 공덕은 보신報身이요, 작용은 화신化身이요. 그것이 셋이나 둘이 아니고 오직 하나인데 하나지만 그것도 구분을 해보면 선공덕善功德으로 보면 체體는 법신法身이요, 거기에 들어있는 일체 공덕功德은 보신報身이요, 작용 활동活動은 화신化身이란 말입니다.
대도大道는 평이간명平易簡明이라 진리眞理라는 것은 원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누누이 제가 말씀드렸지만 제법공諸法空이 안 되면 공空소식을 모르면 우리 공부가 진전이 안 됩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은 공空으로 해서 휴거혈거休去歇去라, 다 털어 버려야지 모습이 있으면 자꾸만 걸려 버립니다. 내 코에 걸리고 내 눈에 걸리고 그것이 걸림입니다. 자기 옷에 걸리고 말입니다, 나한테 걸리고 남한테 걸리고 걸릴 것뿐입니다. 걸릴 것뿐이면 우리가 어떻게 해탈解脫하겠습니까.
걸려야 할 것이 있으면 모르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본래 공인 것을 우리가 잘 못 봐서 걸린 것입니다. 지금 비록 납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없고 네가 없고 일체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자꾸만 느껴야 됩니다.
우리 주지스님은 압니다만 제가 그전에 백장암百丈庵에 토굴을 치고 한철을 지냈어요. 한 십 오년 남짓 될란가요. 겨울에 혼자 토굴에 있는데 이놈의 ‘나’라는 것이 분명히 있는데 어째서 무아無我인가 어떻게 해도 무아 내가 없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된다 말입니다. 머리를 제아무리 찌어 봐도 결국은 납득이 안 되거든요 그것이. 그때 그냥 사방 벽에다 무아無我무아 공空공을 수천 번을 썼습니다. 이놈의 ‘나’가 하도 안 떨어지니까 말입니다. 물론 지금도 다 떨어졌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만.
우리 이번에 모인 선禪도반道伴들 역시 나를 떼어내야 합니다. 원래 내가 분명히 없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물리학적으로든 기타 여러 가지 방편方便을 총동원해서 기어코 나를 떼어내야 합니다. 그놈을 못 떼어내면 결국 공부를 못하고 맙니다.
헌데 공은 공이더라도 그게 다만 공은 즉 단공但空이 아닙니다. 다만 공 같으면 그것은 허무虛無가 되어 버리지요. 공즉색空卽色이라 공空의 내용이 바로 색色입니다. 색의 본질本質본바탕은 공입니다. 그러나 공에서 공을 깨달은 색은 그것은 다만 색이 아니라 그때는 묘색妙色입니다. 즉 말하자면 묘유妙有입니다.
공을 깨달은 사람들은 나무를 봐도 보통 사람이 보는 나무로 안 보는 것입니다. 깨어나서 번뇌의 떼를 벗어버리면 그야말로 참! 참다운 나무로 본다 말입니다. 사람을 보더라도 역시 그냥 사람이 아니라 본래 부처인 사람으로 본다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부처의 화신化身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선參禪을 하는 것은, 지금 우리는 공에 꼭 들어가야 합니다. 공을 깨달아야 합니다. 공을 깨닫고서 공의 공덕, 다만 공이 아닌 묘유妙有의 공덕功德 그걸 우리가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때 부처의 힘을 내지요. 그 공空가운데는 단공이 아니라 다만 텅 비어서 허무의 공이 아니라 일체공덕一切功德이 다 들어있습니다.
자비慈悲나 재주나 지혜智慧나 하여튼 행복幸福이나 일체가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우리가 생각 할 수 있는 우리 생각으로도 다 할 수도 없는, 부처님 말씀에 ‘부처님의 공덕은 부처님의 지혜는 이것은 불가설不可說불가설전不可說傳이라’ 어떻게 다 말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도道를 통한 아라한阿羅漢들이 몇 수 만년 몇 억겁을 두고서 부처님의 공덕功德을 헤아린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공덕을 이루다 말할 수가 없이 부처님의 공덕은 원만圓滿하고 행복스럽고 한도 끝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공덕이 공空 속에 들어있습니다. 공 이것이 내 본질本質인 동시에 우주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들어있는 무한공덕을 파내고파내고 쓰고쓰고 하는 것이 우리가 참선參禪을 하는 목적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아난존자阿蘭尊者얘기 했습니다만,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으신 뒤에 오백 나한羅漢오백의 성중聖衆들이 칠엽굴七葉窟에 들어가서 부처님의 여러 가지 말씀 교리를 정리하는데, 오백 선승禪僧들은 모두가 멸진정滅盡定인번뇌의 뿌리를 다 뽑으신 분들입니다. 불성의 공덕을 그분들은 발휘하고 자재롭게 하는 분들입니다.
아난존자는 이십 몇 년을 부처님을 모신지라, 마땅히 그 자리에 들어가야겠지요. 들어가려 하는데 마하가섭摩訶迦葉이 딱 막는단 말입니다. 그대는 못 들어온다. 얼마나 그것이 화가 나는 일입니까.
부처님을 그렇게 시봉侍奉하고 그렇게 했던 아난존자인데 법문法門은 유창해서 막힘없이 통달通達무애한 사람이고, 허지만 결국은 그대는 못 들어온다고 딱 틀어막는다 말입니다. 내가 왜 못 들어가느냐고 하니 그대는 미리욕자未離慾者라 그대의 마음은 오욕五慾을 미처 못 끊었다.
제아무리 별소리를 다 해도 오욕의 뿌리를 못 끊으면 신통神通을 못 내는 것입니다. 부처님 불성의 힘을 못 내는 것입니다. 오욕의 뿌리를 뽑으려면 오랫동안 보임補任에 잠겨서, 구생기俱生起번뇌煩惱라 잠재의식에 들어있는 번뇌 종자를 뽑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난존자는 못 들어갔다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얼마나 한탄스러웠겠습니까, 한탄스러우니까 식음을 전폐하고 좌선坐禪으로 밀었단 말입니다. 역시 좌선坐禪이것이 불도佛道의 첩경捷徑이고 정문正門 아닙니까,
부처님 법문도 많이 듣고 숙세에 닦아온 분이라서 일주일 동안 하다가 몸이 피로하니까 좀 누워야 되겠구나! 이렇게 막 누우려다, 베개에다 머리를 미처 대기도 전에 활연대오豁然大悟문득 깨달아버렸단 말입니다. 그러고서 칠엽굴의 육중한 석문石門을 조금도 건들지 않고서 신통으로 석벽을 그냥 통과해서 오백성인과 부처님 법문을 외면서 경전을 결집結集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신통의 시대입니다. 원자나 원자력이나 그런 것이 신통한 시대입니다. 원자가 신통한 그런 물리적인 여러 가지 기묘奇妙한 일이 다 있는데, 원래 신통의 본가本家가 본고장이 불법인데 불법 중에 있는 우리들은 신통을 못합니다. 신통을 말하면 신통은 외도外道나 하는 것이지 정도正道가 무슨 신통을 해야! 허나 아까 말씀처럼 우리마음의 번뇌 종자만 뽑으면 바로 신통하는 것입니다.
또는 신통을 못 하면은 생사의 해탈을 못 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못 하는 것인가, 생사해탈生死解脫은 과거에도 안 막히고 미래에도 안 막혀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에 막히고 인과율因果律에 막히면 그땐 해탈을 못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를 통달하면 숙명통宿命通을 하고, 미래를 통달하면 천안통天眼通을 하고, 현재 모든 번뇌뿌리를 뽑는 누진통漏盡通을 하고, 이런 통이 없으면 절대로 생사해탈을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통을 못하고 내가 생사해탈을 했다.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들은 비록 금생에 성불을 못 한다 하더라도 목적만은 바른 목적을 세우고 바른 길만을 바로 가야합니다. 여러분들 부처님 경전을 보세요. 그 신비神祕부사의不思議한 기기묘묘奇奇妙妙한 신통神通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마음이 교만憍慢스럽거나 강강强强할 때는 신통으로 먼저 조복을 시킵니다.
교만 중생은 말로는 안 듣습니다. 위엄을 부리면 그때는 듣습니다. 지금 이런 때 그런 신통을 나투어서 교만한 사람을 조복을 좀 해보세요. 저 같은 중도 육십을 넘어 가는데 너무나 공부를 게을리 해서 그런 힘을 못내는 것
을 한탄해 마지않습니다. 허나 아까 말씀처럼 바로 깨달으면, 즉 말하면 우리 번뇌의 종자만 뿌리 뽑아버리면 즉시에 바로 신통을 하는 것입니다. 신통은 원래 불공덕佛功德인지라 원래 불성에 갖추고 있는지라, 바로 즉시에 발휘가 되어서 자기도 빛내고 우리 불가도 빛내고 우리 민족도 빛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공空을 공인 것을 모두가 공 밖에 아닌 것을 분명히 느끼고 말입니다, 다만 공이 아니고, 공은 바로 묘유란 말입니다. 손은 무엇인가 바로 그때 손 그것은 불佛이란 말입니다. 불은 무엇인가? 불은 손인 동시에 발이요 사람이요 개요 예쁜 나무란 말입니다. 어떤 색色이나 내내야 물질이 색 아닙니까, 어떤 색이라도 색즉공色卽空이라 색은 분석해서 공이 아니라 색을 바로 보면 색 그대로 공이라 말입니다. 공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건 불성佛性이지요. 불성은 생명인지라 인격화人格化시키면 그때는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의 대명사가 아미타불阿彌陀佛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입니다.
따라서 공만 깨달아 버리면 화두를 하던 아미타불을 하던 부처님이라 하던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공을 깨달아서 어느 한 가지 국집局執하지 말고서 내내야 바로 보면 부처님이니까 말입니다. 그러기에 ‘똥 마른 막대기’나 다 부처라고 하지 않습니까, 또는 ‘뜰 앞의 잣나무’나, ‘삼 세근이나 말입니다, 조주스님한테 가서 여하시如何是 서래의西來意잇고, 달마스님께서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본 뜻이 무엇인가, 내내야 부처를 깨닫게 하는 것이죠.
삼 세근이라! 마치 그때 조주스님께서 삼을 다듬고 있었겠지요. 밥을 먹고 계셨으면 밥 한 그릇이라 해도 그것은 무방한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든 간에 상관이 없어요. 다만 문제는 바로 보면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가 다 부처인 것을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놈을 깨달아서 모두가 다 부처인 것을 모두가 공인 것을 안 다음에는 그 생각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밀어 나가야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위 일행삼매一行三昧죠. 마치 앞서서 말마따나 암탉이 계란을 품어서 병아리를 낳게 하듯이 공을 고이 간직해서 공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만 보임수행保任修行이 되어서 번뇌의 종자가 녹아진다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무한의 힘이 있습니다. 우리 힘이란 것은 자꾸만 파내면 파낼수록 커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상하게 가만두면 왜소화矮小化되어 가지고 의식화意識化된다 말입니다. 무한 힘이 있어놔서 여러분이 안 누우신다 하더라도 건강에 절대로 큰 훼손이 안 됩니다.
모든 행복스러운 그런 불성 말입니다. 행복과 자비 지혜를 갖춘 불성, 그런 불성을 갈앙渴仰하시길 바랍니다. 역시 우리가 흠모추구欽慕追求하는 간절히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있어야 만이 빨리빨리 불성하고 자기하고 계합契合됩니다.
그런데 우리 불자는 그리워하는 흠모 추구하는 갈앙하는 마음이 부족하다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성이 단순히 하나의 원리적인 어떤 이론이 아니라 생명인 것을 우리가 느끼고서 생명 그 가운데는 아까 말씀처럼 일체 행복이나 일체 공덕이 깃들여 있습니다. 이것을 찾고자 해서 우리가 매진하는데 우리 참선의 공덕이 있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너무 지나가고 해서 이만 말씀 드리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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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무외시, 어떠한 경우에도 중생을 해치지 않고 중생마음을 편하게 한다.
계행을 바로 지키려면 제법공의 지혜에 통달해야 하고
계행없이 무외시 보시는 절대 못한다.
색즉공, 부처님 그대로 중생이요 중생 그대로 부처, 다만 우리가 부처인지를 미처 모르는 것이 문제다.
사인관세 :
범부는 오욕을 충당하고 오욕을 재밌는 것으로 본다.
성문 연각 이승은 무상을 느끼고 고로 본다.
보살은 인생과 우주를 공으로 본다.
일체만유가 내 인식주관에 의지해 있다. 원래 주관 객관이 한계가 없는 것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망상 가상.
허무한 단공이 아닌 일체공덕 다 들어있는 모유의 공을 얻어야 한다.
신통은 원래 불성에 갖추고 있는 불공덕이다.
색즉공, 공의 내용은 불성, 불성은 일체공덕 갖춘 생명이고 인격화해서 부처님, 부처님 대명사가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소중한 법문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