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김영삼대통령시대의 정치상황
3당합당이라는 큰 정치적인 승부수를 던지면서까지 대통령의 꿈을 키우던 김영삼 민자당대표는 심각한 당내갈등을 겪는 등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민자당의 제14대 대통령후보가 되어 1992년 12월 18일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총유효투표 42%의 지지를 얻어2)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선서를 함으로써 32년 만에 새로운 문민시대를 열었다.
김영삼정부는 '변화와 개혁'을 통치지표로 내세워 32년간의 군사통치기간동안에 누적된 각종 정치적인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과감한 사정활동을 펴는 등 집권초기에는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앞선 군사정부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문민정부'(Civilian Government)라고 자처하면서 신군부세력이 저지른 제5공화국탄생 초기의 헌정문란에 대한 사법적 심판을 강행했다.
이 과정에서 12·12군사반란 및 5·18광주내란사건을 주도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과 그 추종세력들을 단죄하는 데 법리적인 걸림돌로 작용한 공소시효문제를 특별법제정으로 극복했다.3) 그런데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두 사람의 천문학적 금액의 부정축재사실은 모든 국민을 분노하게 했다.
1)김대통령은 부정한 숨은 지하금융자금을 양성화하기 위해서 1993년 8·12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동해서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2) 그러나 금융실명제는 금융거래의 실명화보다는 부정한 자금의 색출·응징에 무게를 두고 실시함으로써 모든 숨은 지하금융자금의 양성화 내지 생산자금화라는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김영삼정부는 1995년 6·27지방선거를 통해서 지방의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을 주민이 직접 선거하게 함으로써 지방자치를 전면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6·27지방선거에서 서울을 비롯한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집권여당이 참패하고 야당이 승리하는 선거결과가 나타났다. 1996년 4·11 제15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는 여당인 신한국당3이 원내 다수당의 자리는 지켰지만 과반수의석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4) 그래서 총선거 후에 야당과 무소속의원을 빼가는 방법으로 국민이 정해 준 국회의 세력구도를 인위적으로 바꾸어 여당이 원내과반수를 확보하게 만들었다.
1)김영삼정부는 집권초기의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청사진 없이 일과성으로 추진한 개혁정책과 공정성을 상실한 지연·학연중심의 인사정책, 대통령 차남을 포함한 측근인사들의 대형부정·비리사건, 연속적으로 발생한 각종 대형인명피해사고,집권초기 사정처벌인사를 모두 복권시킨 사면권의 남용,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게 만든 경제정책의 완전실패 등으로 인해서 날이 갈수록 지지율이 떨어져 1997년 12월의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일까지 생겼다.2) 김영삼대통령의 정치적인 실패는 그의 임기중에 여당의 당명이 민자당에서 신한국당으로 그리고 김대통령의 탈당을 계기로 다시 한나라당(1997. 11. 24.) 으로 바뀔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김영삼대통령시대는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선거문화가 다소 개선되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은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경제파국을 초래해서 국민에게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남겨준 무능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