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불대왕전(乙弗大王傳)
약로대왕(藥盧大王) 9년 춘정월. 왕은 모든 비빈(妃嬪)들과 단림지궁(檀林之宮)에서 야연을 베풀었는데 홀연 벽력소리가 나고 하늘로부터 화광이 내려와 작은 개같은 것이 돌고(咄固)태자(咄固太子)의 침전으로 날아드는 것이었다.
왕은 크게 놀라 급히 침전으로 가서 안을 살폈는데 별다른 불빛은 없었고, 다만 돌고태자(咄固太子)와 다비(茶妃) 을씨(乙氏)가 교합을 하고 기식이 엄엄하여 용보(龍步)가 지척에 이르도록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비(茶妃) 을씨(乙氏)는 주통태후(酒桶太后)의 서자인 을보(乙寶)의 딸이니 현상(賢相) 을파소(乙巴素)의 증손이다.
(주: 주통태후는 서천왕의 조부 동천왕의 어미입니다. 음란하여 남편 산상왕이 죽은 후 여러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고 고구려사략에도 나와있습니다. 즉 을씨는 서천왕의 사촌누이 뻘입니다. 돌고는 아버지의 아내이자 자기 숙모뻘 되는 여자와 간통하는 것이고, 을불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아름답고 지혜영민(慧敏)하므로 왕이 그를 아끼어 후궁에 들이고 누차 총애를 받아 차비(次妃)의 지위에 올랐던 것인데,
언제부터 돌고(咄固)와 밀통했는지 알지 못했다. 왕이 노하여 을씨(乙氏)를 주살하려하자 태사(太史) 우선(于先)이 상주하였다. “천랑성(天狼星)이 궁중에 떨어졌으니 반드시 귀한 자식이 태어날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길 기다렸다가 주살함이 가할 것 입니다.” 왕은 노여움을 가라앉혔다.
과연 열달에 이르러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풍준(豊雋)하고 기걸(奇傑)찼으며 또 오색구름이 산실을 에워싸고 감돌았다. 왕은 하늘이 정한것이라 여기고 마침내 을씨(乙氏)를 돌고(咄固)의 처(妻)로 삼고 아기의 이름을 을불(乙弗)이라 지었다. 때는 황구(黃狗/무술-278)의 10월(孟冬)이었다.
왕은 을불(乙弗)을 아끼고 사랑해서 을씨(乙氏)에게 내리는 작록이 예전과 다름없었다.
을불(乙弗)은 3살에 능히 길흉(吉凶)을 말할 수 있었다. 왕제(王弟) 달가(達賈)가 숙신(肅愼)정벌을 떠나기에 앞서 왕에게 입사(入辭)했는데 왕은 을불(乙弗)을 무릎위에 안고있다가 물었다 “이번 출행이 길(吉)하겠느냐?” 을불(乙弗)은 “길(吉)”이라 답했다. 과연 대승을 거두었다. 왕은 이에 첫승을 올린 땅을 을불(乙弗)의 식읍(邑)으로 삼고 돌고(咄固)에게 명하여 그곳으로 나아가 다스리도록 하였다.
왕은 다시 을씨(乙氏)를 총애하여 딸 단씨(丹氏)를 낳았는데 을불(乙弗)이 단씨를 몹시도 아껴서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왕은 을불(乙弗)을 놀려서 말하되 “단씨는 내 딸이고 너는 곧 내 손자이니 네가 그 아이를 누이로 할 수 없다.” 을불(乙弗)은 울면서 “나도 왕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하였다. 왕은 측은히 여겨서 그를 허락하고 봉하여 태자로 삼았다.
그때의 궁중은 엄하지 않아서 후비(后妃)들이 행실이 없었다. 돌고(咄固)의 어머니 고씨(高氏) 또한 소후(小后)로써 치갈태자(雉葛太子)와 밀통하고 있었다.
(돌고의 어미는 의붓아들 치갈과 밀통하고 있었음.)
을불(乙弗)이 이를 간하되 “할머니는 어찌하여 치갈(雉葛)과 함께 어울리십니까?”하자 고씨는 말했다.
“치갈(雉葛)은 후일의 천자(天子)이다. 어찌 교태를 부려 잘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너는 이를 말하지 말라.” 을불(乙弗)이 말했다 “나 또한 태자이니 이는 훗날의 천자가 아닙니까?” 고씨는 크게 놀라 그를 제지하며 말했다. “천위(天位)는 이미 정해졌다. 너는 망령된 말을 하지마라.”
을불(乙弗)은 불복하며 스스로 나는 천자가 될것이라고 자인하였다.
치갈(雉葛)은 다시 을씨(乙氏)와도 밀통하였다.
(치갈은 을씨와 간통)
을씨가 울면서 말했다 “대왕이 이를 알면 반드시 나를 호음(好淫)한다 하여 주살할 것입니다.” 치갈(雉葛)이 말했다 “심야지사를 대왕이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때 을불(乙弗)이 일어나 말했다. “태형(太兄)은 이미 내 조모와 통하고 다시 내 어머니를 핍박했으니 죄가 큽니다. 내가 마땅히 이것을 부왕께 아뢸 것이오.” 치갈(雉葛)은 크게 놀라 차고 있던 옥도(玉刀)를 끌러주며 말했다. “네가 만약 이 일을 아뢴다면 네 어머니는 주살되고 나는 마땅히 태형을 받을 것이다. 그리 되느니만 못하거든 말을 말거라.” 을불(乙弗)은 어머니가 죽을까봐 두려워서 이를 숨겼다.
뒤에 왕은 옥도를 발견하고 물었다. “이것은 곧 사군의 보물(嗣寶)인데 어찌하여 네가 이것을 차고있느냐?” 을불(乙弗)이 말했다. “나는 연(鳶)이 끈떨어졌는데 그것을 이을수 있어 차지한다면 천명이 없는것도 아니지 않습니까?(飛鳶落之無乃有可嗣之天命乎)???” 왕은 그말을 기이하게 여기고 은밀히 을씨에게 이르되 “네 아들이 식우(食牛:호랑이새끼)의 기상을 가지고 있으니 천명(天命)이 있는게 아닌지 몰라 두렵구나.” 이에 방회(方回)와 대발(大發)을 좌우스승(左右師)으로 삼아 기사(騎射)와 병진(兵陣)의 학문을 가르쳤다. 9세에 능히 3대의 화살을 쏴서 명중시키니 왕은 그에게 상을 내렸다.
그 때에 왕제(王弟) 일우(逸友)와 색발(索勃)이 반란을 일으키다가 복주(伏誅)되었다. 을불(乙弗)이 왕에게 아뢰었다. “두 숙부는 무(武)를 숭상해서 예양지학(禮讓之學)을 모른 까닭에 저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臣)은 좋은 스승에게 예양을 배우기를 청하옵니다.”
왕은 그를 옳게 여겨 우선(于先)에게 명하여 효경(孝經)으로 가르치게 했다. 을불(乙弗)이 마침내 왕에게 상주했다. “신이 어리고 예(禮)를 몰라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고, 아버지를 형으로 삼았으니 지금에야 그 잘못됨을 알았습니다. 청컨대 신의 태자 작위를 삭제함으로써 명분을 바로 잡으소서.”
왕이 말했다. “네 말이 비록 옳다마는 이미 봉한 작위를 어찌 빼앗을 수 있겠느냐? 남의 아들도 내 아들로 삼을 수 있거늘 하물며 내 아들의 아들이겠는가? 다만 네 아비는 돌고(咄固)이니 너는 그 아비를 따름에 네 소원대로 하라.”
이에 을불(乙弗)이 아버지를 섬김에 지성으로 효도하니 돌고(咄固) 또한 인효우애(仁孝友愛)하였다. 국인(國人)들이 이를 우러러 “현태자(賢太子)가 현태자(賢太子)를 낳았다.”라고 하였다.
치갈(雉葛)은 성품이 교만방자(驕逸)한데다 호색(好色)하고 패덕한 소행(悖行)이 많아 국인들이 이를 근심하였다.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가 일찌기 왕에게 조용히 상주하되 “나라가 의지하는 바는 사군(嗣君)에 있습니다. 이제 을불(乙弗) 부자는 모두 어질고 현명하나 치갈(雉葛)은 불초하니 형왕(兄王)은 모름지기 이를 유념하소서.”하였다. 왕은 말했다. “짐도 그것을 알지만 어찌 차마 장자를 폐하고 소자를 세우겠는가? 네가 그를 잘 가르칠지어다.” 이에 치갈(雉葛)을 불러 꿇어 앉히고 경계하여 말했다. “국인들이 너의 무도함을 근심한다. 안국군은 네가 아버지로 섬김에 나와 같이 할지니 대소사를 막론하고 모두 (그에게) 묻고나서 행해야 가할 것이다.(安國君汝其父之事之如我事無大小皆咨而行之可也)”
치갈(雉葛)은 내심 불평을 품었으나 애써 노력하여 그를 좇았다. 이로부터 안국군이 규제하고 간하는 것이 많았다. 치갈(雉葛)은 이를 괴롭게 여겨 돌고(咄固)에게 말하기를 “내가 천자가 되면 마땅히 먼저 달가(達賈)를 죽이리라.”하였다. 돌고(咄固)가 그 말을 달가(達賈)에게 고하며 이르되 “숙부는 스스로 위태롭게 하지 마소서.”하였다. 달가(達賈)는 말하였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爲國之心)에 어찌 스스로의 이해를 돌보겠는가?” 돌고(咄固)는 탄식하며 말했다 “군자의 말씀입니다!”
치갈(雉葛)의 어머니 우씨(于氏)는 아름답고 요염 간교(奸姣)하니 왕이 그를 가장 아껴서 정후(正后)로 삼고 그녀가 말하는 바는 모두 들어 주었다. 때문에 치갈(雉葛)의 불초함을 알면서도 그를 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우씨(于氏) 또한 국인들이 돌고(咄固)를 많이 추앙함을 알고 돌고(咄固)가 후계(嗣)를 뺏을까 두려워했다. 그의 행실을 훼손코자 거짓으로 부스럼(瘡)이 있다 칭하고 돌고(咄固)를 불러 같은 수레에 타고 온탕(溫湯)으로 들어갔다. 은밀히 돌고(咄固)에게 말하기를 “나의 부스럼은 옥문(玉門)의 해심(荄心)에 있으니 너는 마땅히 양경(陽莖)에다 이 유약(油藥)을 발라서 넣어라.”고 하였다.
돌고(咄固)가 이를 어렵게 여겨 말했다. “신이 어찌 감히 성후(聖后)를 증(烝) 하오리까?” 우씨는 노하여 말했다. “네가 을씨의 젊음은 사랑해서 통하고 나는 늙었음으로 해서 통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네가 나와 더불어 알몸으로 탕에 들어왔으니 비록 통정하지 않았다 해도 남이 어찌 알겠는가? 내 당장 네가 나를 핍박하여 간음했다고 성언하여 주살할 것이다.” 돌고(咄固)는 어찌할 수 없어 그를 증(烝)하였다.
(돌고는 치갈의 어미와 간통)
이로부터 우씨는 누차 돌고(咄固)를 이끌어 은밀히 그에게 총애를 주고 치갈(雉葛)로 하여금 오게해서 그것을 보게했다. 치갈(雉葛)이 이에 돌고(咄固)를 꾸짖어 말했다. “국인들이 너를 현명하고 호색하지 않는다 하는데 현자(賢者) 역시 모후(母后)를 치붙는가?” 돌고(咄固)는 고개를 숙인채 말을 못했다.
우씨는 또 달가(達賈)의 옹병군권(擁兵)을 두려워해서 늘 달가(達賈)에게 교태를 부려 말했다. “부왕(夫王)의 천추후에 아즈반(叔)은 마땅히 산상왕(山上王)이 될 것이니 첩은 마땅히 그를 따를 것입니다.” 달가(達賈)가 말했다. “왕위를 이을 사군(嗣君)이 수후(嫂后)마마에게 있는데 이 무슨 어지러운 말씀입니까?” 우씨는 즐거워 하지 않고 오히려 왕에게 그를 참소하였다. “달가(達賈)가 나를 유혹해 말하기를 ‘형왕은 머지않아 죽을 것이고 나는 마땅히 산상왕이 되어 형수를 후(后)로 삼을 것이니 이제 먼저 통하여 결친(結親)함이 옳을 것이오’하기에 내가 그 뺨을 때리고 피했습니다.” 왕은 우씨의 거짓말을 알고 웃으며 “네가 달가(達賈)의 처가 되고 싶다면 내 죽음을 기다릴게 무엇이냐? 지금이라도 그에게 갈 수 있다.” 우씨는 울며 말하기를 “그대는 아우는 아끼면서 처는 아끼지 않으니 내가 비록 죽는다 해도 어찌 달가(達賈)의 처가 되겠습니까?”하였다. 왕이 말하였다 “달가(達賈)와 나는 한 몸이니 네가 끼어들 바가 아니다.” 우씨는 참소할 수 없음을 알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왕은 달가(達賈)에게 말하였다. “네 형수 우씨가 내게 너를 참소하니 이는 필시 네가 그 청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무릇 형제동처(兄弟同妻)는 고금에 있어온 것이니 하물며 한 어머니의 아우이겠는가? 아(私)다이 통정하여 그 마음을 즐겁게 함이 가할 것이다.” 달가(達賈)가 대답하되 “남녀의 예(禮)가 무너집니다. 어찌 도(道)로써 남을 책망받도록 하겠습니까?(어찌 남을 책망받도록 하는게 도(道)이겠습니까?”(何以責人爾乎)???? 왕은 그말에 탄복하여 말했다. “어질도다! 나의 아우여. 내가 미칠 수 없구나!”
달가(達賈)의 처 음씨(陰氏)는 상국(相國) 음우(陰友)의 딸이다. 신장이 7척이요 얼굴은 붉은 대추(重棗)와도 같았는데 능히 장창(長槍)을 쓸 수 있었다. 일찌기 달가(達賈)를 따라 출전(出戰)하여 적을 베고 공을 세워서 봉작(封爵)을 받고 장군(將軍)이 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늘 베치마(布裙) 차림으로 노복 무리들과 더불어 밭에 종자를 심으며 집안에 말하기를 “농사란 천하의 근본이다. 비록 재상의 처(妻)라 해도 알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왕이 일찌기 미행(微幸)하여 그 장원에 이르렀는데 하늘에서는 바야흐로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달가(達賈)와 음씨는 진탕에 서서 맨발에 헝크러진 머리로 종묘(種苗)를 하느라 분주하여 어가(駕)가 이르른 것도 알지 못했다. 왕은 웃으면서 말했다. “국왕의 제매(弟妹)가 어찌 수고가 이와 같은가?” 음씨가 말했다.“천자도 친히 밭을 갈아(親藉) 백성에게 보이는데 하물며 제매(弟妹)이리까?” 왕은 음씨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궁중에 비록 미인이 많으나 너와 같은 자는 없다. 이 저녁에 한번 행(幸)할 수 있겠느냐?” 음씨가 말하되 “여자는 정절을 귀하게 여기니 비록 천자라 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형제의 처(妻)이겠습니까?”라고 했다.
왕은 크게 부끄러워 말하되 “내가 특별히 농담한 것 뿐이니 누이는 용서하라.”하였다. 음씨 가로되 “천자는 농담(戱言)이 없습니다. 만약 왕명을 좇는다면 부정(不貞)이고, 왕명을 좇지 않는다면 불충(不忠)이니 이것이 첩의 어려움입니다. 만약 행(幸)한다면 난륜(亂倫)이고, 행(幸)하지 않는다면 식언(食言)이니 이것이 왕의 어려움입니다. 어찌 말하기가 쉽겠습니까?”
달가(達賈)가 말했다. “불충(不忠)이 부정(不貞)보다 크니 너는 마땅히 수행(幸)을 받으라.” 왕이 말했다 “내가 차라리 식언(食言)을 할지언정 어찌 난륜(亂倫)의 이름을 받겠는가?” 달가(達賈)가 말했다.“왕(王)이라 함은 참말(信)인 것으로 식언(食言)은 중대합니다.” 끝내 음씨로 하여금 목욕하고 수행(受幸)토록 하였다. 왕이 탄식하여 가로되 “말 한마디의 어려움을 이제야 비로소 알겠다. 누이에게 무슨말을 하겠는가. 형제의 정은 사사로이 다를 바 없고, 누이는 난륜한 것이 없으니 나를 꾸짖으라.”(兄弟之情無所私異妹無以亂倫責我)(何言妹乎)???
음씨가 말했다. “한번 동침은 백년부부입니다. 지금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첩은 이로부터 부왕(夫王)을 섬길 것입니다. 폐하는 마땅히 미녀를 택하여 달가(達賈)의 처로 삼아야 옳을 것입니다.”
왕은 이에 장녀 다씨(多氏)를 달가(達賈)의 처로 하였다. 다씨(多氏)는 돌고(咄固)의 포매(胞妹)였다. 어질고 아름다운 까닭에 치갈(雉葛)이 첩으로 삼고자하여 여러차례 고씨에게 말을했었다. 이제 달가(達賈)의 처가 되기에 이르자 더욱 질투심을 갖고 불령지도(不逞之徒)와 더불어 은밀히 죽여 없앨 것을 모의했다. 급기야 왕이 병질로 눕게되자 그 모의는 더욱 급박해졌다.
달가(達賈)의 신하 선옹(仙翁)이 달가(達賈)를 설득해 말했다
(선옹은 주유의 손자 주선의 아들입니다. 달가의 모사 노릇?)
“지혜로운 자는 선제(先制)합니다. 지금 치갈(雉葛)이 무고히 우리 군(吾君)을 죽이려하고 대왕은 병질에 빠진지가 수삭(數朔)이니 위태롭기가 누란(累卵)과 같습니다. 우리 군(吾君)은 이때로써 군사를 이끌고 입궁하여 군측(君側)의 간신을 제거하고 돌고(咄固)태자를 세우지 않는다면 가히 국가로 하여금 근심을 없애고 오군(吾君)이 안전할 수 없습니다.” 달가(達賈)는 말하되 “내가 천하에 중시되는 까닭은 장의충군(仗義忠君)하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스스로 역모를 꾀한다면 위로는 형왕(兄王)의 병을 더하고 아래로는 국민(國民)의 의를 저버림이니 나는 차마 할수 없다.” 선옹은 탄식하여 말하되 “다만 선(善)으로써 악(惡)을 도울뿐이니 저는 떠납니다.”하고는 마침내 처자를 거느리고 달아났다.
치갈(雉葛)의 신하 원항(猿項)이 기뻐하며 말했다. “안국군에게 선옹이 없으니 쉬워졌을 따름입니다.” 왕은 병이 매우 깊어지자 달가(達賈)를 부르도록 명하였다. 돌고(咄固)태자가 입내(入內)하였으나 우씨가 그를 저지하였다. 거짓으로 조서(詔)를 칭탁하여 달가(達賈)의 병권을 남김없이 우씨의 형제 평자(枰刺?)에게 옮기게 했다. 달가(達賈)의 신하 이경(以竟)이 달가(達賈)에게 간했다 “지금 왕의 병이 깊어 정사를 돌보지 못하는데 홀연 병권을 외척에게 옮기니 필시 속임수가 있는 것입니다. 청컨대 스스로 쥐고 있으면서 변황을 기다리소서.” 달가(達賈)가 말하되 “내가 병권 때문에 수후(嫂后)에게 밉보인 까닭이다. 만약 지금 주저하며 물러나지 않는다면 그 노여움을 더욱 크게 할 뿐이다.”하고는 즉시 인수(印綬)를 풀어서 넘겨주었다. 이경(以竟)은 통곡(哭)하며 “호랑이가 이와 발톱이 빠지면 사람들 모두가 잡아 묶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달가(達賈)의 입내(入內)를 기다리며 여러번 재촉을 했으나 오지않자 마침내 “달가!”“달가!”하고 부르짖다가 붕하였다. 춘추 53세에 재위는 23년이었다.
우씨(于氏)는 이에 치갈(雉葛)을 세워 대맥대왕(大貊大王)으로 삼았다. 때는 수서(水鼠/임자-292)의 중추(8월)였다. (임자 3월에 문천(門天)을 태보(太輔), 상루(尙婁)를 우보(右輔), 가?방(稼?方)을 좌보(左補)로 삼았다)
치갈(雉葛)은 이에 우씨(于氏)를 태후(太后)로 삼고 연씨(緣氏)를 후(后)로 삼고, 5부(部) 37국(國)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3월에 달가(達賈)에게 죽음을 내리되 “안국군(安國君)은 오래도록 병권을 장악하면서 안으로 불궤지심(不軌之心)을 품고 당을 결성해 나라를 위태롭게한 까닭에 대의멸친(大義滅親)한다.”라고 하였다. 이경(以竟)은 달가(達賈)에게 출분(出奔)할 것을 권하였으나 달가는 말하되 “나는 형왕(兄王)을 따라 순사해 죽는것이 진실로 소원이다.”하고 곧 조용히 자진하니 사자(使者)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왕은 달가의 처 다씨(多氏)를 소후(小后)로 삼고 그 전처 음씨(陰氏)를 원항(猿項)의 처로 하였다. 음씨(陰氏)가 말했다. “나는 선왕(先王)과 안국군(安國君)의 대은(大恩)을 받았다. 이제 두 지아비의 상(喪)을 입어 빈소를 지키는 몸이니 다시 결혼할 수는 없다.” 원항이 협박하여 말했다. “네가 만약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마땅히 안국군의 모든 자식들을 죽일 것이다.”.
음씨(陰氏)의 아들 숙(菽)이 권하여 말했다. “성인 또한 시변을 추찰한다하니 무의(毋宜)하더라도 권도를 좇아 원수를 갚으소서.” 음씨(陰氏)가 이에 원항(猿項)에게 시집가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음씨(陰氏)의 탈절(脫節)을 애석히 여겼다.
상국(相國) 상루(尙婁)는 음씨(陰氏)의 형이다. 사람됨이 온근(溫謹)하고 규각(圭角)이 없었으며 사람을 잘 영접하여 그 뜻을 주재하니 우태후(于太后)와 왕(王)의 신임을 받았다. 그가 음씨(陰氏)에게 힘써 권하며 “안국군(安國君)의 모든 자식들과 우리 집안의 안위가 너의 한 혼사에 달려있다.”하니 음씨는 흐느껴 울면서 그를 따랐다.
원항은 크게 기뻐하여 상루에게 말했다. “이로부터 형제가 되어서 천하를 함께합시다.” 상루가 말하기를 “우리 장군(將軍)은 좋은 아우이니 믿고 의지하겠습니다.”
원항은 본시 미천한 사람으로서 오로지 권도와 속임수(權詐)로 발신(拔身)한 자이니 상루(尙婁)와 더불어 결친(結親)을 하게되자 비로소 그 마음이 흡족하였다.
안국군(安國君)의 옛 신하(舊臣)들과 돌고태자(咄固太子)의 가인(家人)중에 많은 이들이 원항과 척을 지어 원수가 되니 상루는 그들을 어루만지며 다독거렸다.
상루(尙婁)의 아들 상보(尙寶)에게 딸이 있어 이름을 초랑(草娘)이라 했는데 매우 아름답고 노래를 잘하였다. 을불(乙弗)이 사냥을 나왔다가 우연히 냇가에서 만나보고는 기뻐하여 함께 상루(尙婁)의 집에 이르렀다. 상루(尙婁)의 처 현씨(玄氏)를 보고 처(妻)로 맞게 해줄 것을 청하자 현씨(玄氏)는 어리다하여 그를 사양했다. 을불(乙弗)은 연모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고 매일같이 와서 놀며 혹은 날이 저물어서 돌아가고, 혹은 밤이 깊어 이르기도 했다. 초랑(草娘) 역시 을불(乙弗)을 사랑하여 서로 끌어안고 떨어지길 싫어했다. 현씨(玄氏)는 이를 민망히 여겨 초랑(草娘)의 어머니 부씨(芙氏)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했다. 부씨(芙氏)는 부드럽고 어질어서 그들의 정분을 금할 수 없자 마침내 밀통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로부터 을불(乙弗)은 초랑(草娘)과 공모하여 담장 밖에 사다리를 내리고 밤이면 와서 자곤했다. 부씨(芙氏)는 이를 알았으나 차마 금하지 못했다.
이때에 모용외(慕容廆)는 왕(王)이 새로 서서 숙부 달가(達賈)를 죽여 국인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침공해 왔다. 장군(將軍) 우평(于枰)이 싸웠으나 패배하자 경도(京都)의 민심이 흉흉해졌다.
왕은 신성(新城-國之西北大鎭)의 군사가 정예하고 양곡이 풍족하므로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했다. 출행하여 곡림(鵠林)에 이르렀는데 모용외는 왕이 나온것을 알고 경도를 핍박하지 않고 곧장 정기(精騎)를 이끌고 왕을 추격했다. 뒤쫓아 장차 미치게 되었다. 왕은 화가 임박하자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홀연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가 있어 왕을 마중하기위해 5백기를 영솔하고 나왔다가 적과 조우하자 일제히 그들을 분격(奮擊)하였다. 모용외는 대비가 있는 줄 알고 후퇴하였다. 돌고태자(咄固太子) 또한 우자(于刺)등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모용외의 후미를 쳐서 대파(大破)하니 모용외는 마침내 퇴각하여 물러갔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고노자(高奴子)의 작위를 더하여 대형(大兄)으로 하고 곡림(鵠林)을 하사하여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군신(群臣)들이 우평(于枰)의 군사가 패한 죄(罪)를 묻고자하며, 또 돌고태자(咄固太子)의 공(功)을 표창할 것을 청하자 왕이 말했다.
“승패는 일시의 운(運)이요, 충심(忠心)의 다과(多寡)에 있는것이 아니니 다시 복론하지 말 것이다. 또 돌고(咄固)는 내가 일찌기 그에게 준 바 없는 병력을 거느렸노라. 창황한 시기를 맞아 제군(諸軍)이 추대한 바 그리 되었다하나 나는 과연 그것이 충심(忠心)을 가지고 그런 것인지 아직 모르겠다. 돌고(咄固)를 추대한 장수들은 모두 대사(臺司)에 내려 이를 심문하라.”
돌고(咄固)가 방회(方回)에게 물었다.
“형왕(兄王)이 병력을 거느린일로 나를 의심하니 나는 어찌 처신해야 마땅하겠소?” 방회(方回)가 말했다. “마땅히 두문사객(杜門謝客)하고 들어앉아 삼가고 조심하십시오.”
그때에 돌고(咄固)의 어머니 고씨(高氏)와 처 을씨(乙氏), 누이 다씨(茶氏)는 모두 총애가 쇠하고 오직 우태후(于太后)가 낳은 돌고의 딸 탐씨(耽氏)만이 그를 구하고자 힘써 우태후에게 탄원하고 있었다.
(돌고와 치갈의 어미 사이에 딸까지 낳았군요. 후에 그녀는 을불이 취하게 됩니다)
상국(相國) 상루(尙婁) 또한 말했다.
“돌고(咄固)는 난국(難)에 임하여 위급(急)을 구하느라 미처 명을 받들지 못하고서 기병(起兵)한 것이니 사사로운 뜻은 없었습니다. 공은 크고 죄는 적으니 청컨대 우애지정(友愛之情)으로써 그를 관대히 용서하소서.”
왕은 노하여 말했다.
“앞서 달가(達賈)가 불궤(不軌)할 때 경(卿)은 주살해야 된다는 말 한마디 없다가 이제 돌고(咄固)를 위해 변호하니 경 역시 달가의 부류(流)가 아닌가? 돌고는 겉으로 꾸미고 안으로 음험하여 내 모후를 증(烝)해서 딸 탐씨(耽氏)를 낳았건만 국인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그를 어질다고 한다. 달가의 무리가 나를 폐하고 그를 세우려한지가 오래 되었도다. 지금 달가가 비록 주살되었다하나 그 무리들이 산재하여 언제 변을 일으킬지 몰라 짐은 마음이 불안하다. 화근을 제거하지 않고 어찌 그 재앙을 멈춘단 말인가?”
상루는 황공하여 땀을 흘리며 바닥에 이마를 두드려 사죄하였다. 원항이 말했다.
“상국의 충심은 신(臣)이 명백히 아는 바 입니다. 폐하의 우애지도(友愛之道)를 위해서 특별히 돌고(咄固)를 구하고자 했을 따름이니, 만약 달가(達賈)와 같은 마음이라면 신의 처(妻)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왕은 “상국의 마음은 내가 태자 때부터 알고있으나 오늘의 말은 뜻밖에 나온고로 특별히 그를 시험했을 따름이다.”하며 술을 내리도록 명하고 그를 위로하고서 나갔다.
그 때에 을불(乙弗)은 집안의 화(禍)가 임박했음을 모르는 채 초랑(草娘)에 대한 애정에 빠져서 매일 밤으로 상국(相國)댁의 담장을 넘고, 부씨(芙氏)의 침방(寢房)에 들어가서 초랑(草娘)과 더불어 무산(巫山)의 운우를 희롱하고, 어수(魚水)의 동락을 탐닉하였다.
이날 밤에 성긴 비가 흩뿌리며 가을 바람소리가 정원 나무에 소란스러웠고, 이따금씩 뇌성(雷聲)소리가 은은히 원근에 울려퍼졌다.
부씨(芙氏)는 당(堂)안에 비단 금침을 깔고서 초랑(草娘)의 머리를 빗기고 연지(臙脂)를 바르며 그를 기다렸다. 갑자기 을불(乙弗)이 언손에 입김을 불며 들어서는데 얼굴에는 우울한 기색이 서려있었다. 초랑(草娘)이 좇아나가 그를 안고 당(堂)안으로 맞아들이며 물었다. “낭군은 무슨일로 근심합니까.”
을불이 말했다.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하여 나의 부군(父君)을 참소하니 화(禍)가 멀지않은 곳에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즐길 날이 많지 않은듯하여 두렵구나.”
부씨(芙氏)가 잔에 술을 따라 내밀며 그를 위로하였다.
“태자는 근심하지 마시오. 우리 아버지 상국(相國)이 반드시 그를 구할 겁니다.”
을불(乙弗)은 저으기 마음이 풀어져서 초랑을 안고 금침으로 들어갔다. 혹은 희롱하며 혹은 농탕하였다.
부씨(芙氏)는 등불을 돋우고 그 앞에서 을불(乙弗)의 옷을 마름질하며 말했다.
“이옷을 다 만들면 마땅히 좋은 사위, 좋은 딸과 더불어 수왕(樹王)께 빌러 갈 것이로다.” 을불(乙弗)이 물었다. “무슨 일을 빌러갑니까?”
부씨(芙氏)가 말하길 “좋은 손주 낳기를 빌지요.” 초랑이 말했다.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합니까? 시작해야 할 일이라면 나는 부군(父君)의 무사를 빌고 또 한가지 일을 빌고 싶습니다.” 부씨가 “무엇이냐?”하고 묻자 초랑은 말하지 않았다. 을불이 “장모(妻母)는 곧 내 어머니인데 말하는데 무얼 꺼리는가?”하자 초랑이 이에 기원하여 말했다. “우리 낭군 빨리 왕위(王位)에 올라서 이몸을 후(后)로 봉하소서.” 을불이 이어서 말했다. “장모(妻母)를 태후(太后)로 봉하소서.”
부씨(芙氏)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남들이 들을까 두렵습니다.”
그때 갑자기 차마(車馬)의 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시비가 들어와 상국(相國)이 돌아왔음을 고했다. 부씨는 당황하여 급히 나가서 현씨(玄氏)와 더불어 상루(尙婁)를 당(堂)으로 맞이해 들이며 조복관대(朝服冠帶)를 벗기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상루가 말했다. “초아(草兒)는 어디에 있길래 나와서 할애비를 보지 않느냐?” 부씨가 말했다. “갑자기 이처럼 추워져서 일찍 재운 까닭에 미처 데리고 나오질 못했습니다.” 상루가 말하기를 “늙어가며 유일한 낙이라고는 초아(草兒) 하나뿐인데 어째서 나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재웠단 말이냐? 오늘 밤 늙은 애비는 마땅히 초아(草兒)와 함께 자야겠노라.”
현씨가 웃으며 말했다. “초아는 이미 젖먹이가 아닌데 그대는 무슨 말을 하는가? 밤낮으로 생각하는 바는 오직 을불(乙弗)태자일 따름이니 속히 혼사를 치르어 그 마음을 편케 해야 할 것이다.”
상루는 무연(憮然)히 말하였다. “을불의 혼사는 깨졌으니 말하지 마라. 오늘 밤 황상(皇上)은 돌고(咄固)태자에게 죽음을 내리고, 을불(乙弗)은 삭탈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을불의 어머니 을씨(乙氏)를 우탁(于卓)의 첩으로 삼고, 돌고의 어머니 고씨(高氏)를 내 첩으로 삼은 까닭에 내가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사태가 이미 이지경에 이르러서 을불(乙弗)의 목숨이 심히 위태롭거늘 어찌 한가하게 혼사를 말하겠는가?”
부씨(芙氏)는 이 말을 듣고서 실신(失神)하여 바닥에 엎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현씨(玄氏)가 말하였다. “그대는 상국(相國)이 되어서 어찌 죄없는 태자를 죽게했는가?”
상루는 말했다. “내가 비록 힘써 구하고자 했으나 황상이 불허하니 어찌하랴. 내 달가(達賈)가 제거되는 것을 보았을 때 부터 상국이 되고싶은 뜻이 없었으나 한번 스쳐본 화(一流目之禍???)의 불측(不測)함이 두려웠던 까닭에 사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오늘 밤에 이르러 이러한 대참사를 보게되니 내 마음은 재가 되고 혼백은 죽노라. 내 어찌 녹을 탐하는 자이겠는가? 초아(草兒)를 생각하면 사랑스런 모습이라, 능히 순국(殉國)하여 아이를 버리지 못하는 부류인 것이다.”
현씨(玄氏)는 다만 “네!” “네!”하면서 부씨(芙氏)를 부축해 일으키고 말했다.
“마땅히 이때는 밖으로 기색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지니 너는 자중하고 네 아버지께 술을 내어가야 옳을 것이다.”
부씨는 눈물을 수습하며 술상을 차려 올렸다.
상루는 술에 취하자 부씨의 등을 어루 만지며 말했다. “만사는 재천이니 억지로는 할 수 없다. 을불의 일은 모름지기 네가 초아에게 좋게 말해서 끊도록하라.”
부씨는 울며 말했다. “초아는 이미 스스로 사사롭게 기혈(氣血)을 교합하여 농밀하게 되었으니 끊기가 어려울까 두렵습니다.” 상루는 놀라서 말했다. “네가 내 며느리가 되어서 어찌 아이를 이와같이 가르쳤더냐?” 부씨가 말하길 “금지해도 듣지않으니 어찌합니까? 현사(玄事)가 어렵다는 것은 반드시 이를 말함입니다.”
상루가 말했다. “주상이 이를 알면 우리 가족들은, 마땅히 을불을 멀리 도피시켜 소재를 모르게한 연후에야 안전하리라.”
이에 심복 종(奴) 두사람을 불러세우니 그 한사람은 북부(北部)에서 죽을 죄를 지은 것을 상루(尙婁)가 숨겨줘 살아난 까닭에 이름을 ‘재생(再生)’이라 했고, 또 한사람은 그 어머니를 토호(土豪)에게 빼앗기고 그 아버지가 장차 살해당하려는 것을 상루가 구하여 살려준 자로서 이름을 ‘담하(談河)’라고 했다.
두 사람은 명을 받들어 을불(乙弗)을 유배인으로 변장시키고 비류(沸流)로 달아나 상루의 먼 친족인 음모(陰牟)의 집에 이르르자 거짓말로 상루(尙婁)집안의 죄인이라 칭하고 그를 맡겼다.
때는 수우(水牛:계축293)의 9월 추(秋) 5일의 심야(深夜)였다. 하늘은 칠흑같이 어둡고 궂은비는 쏟아지듯 내리고 있었다. 초아(草兒)는 을불(乙弗)을 안고서 호곡하다가 이별을 참지 못하고 난간에 쓰러지니 을불이 말했다. “십년만 나를 기다리면 다시 아내로 맞을수 있으리라.” 초아가 말했다. “비록 백년이라해도 기다릴 것이니 심려말고 가소서.”
이튿날 왕은 을불을 찾다가 행방이 묘연하자 그를 수색하고자 했다.
때에 우탁(于卓)은 을씨(乙氏)의 미색을 기뻐하여 그녀를 찾아 첩으로 삼고 함께 동침하려 하였다. 을씨가 노하여 말했다.
“나는 종실(宗室)의 딸이다. 오직 두 왕과 태자에게만 소천(所薦)되었을 따름이다. 지금 비록 몰락했다고 하나 어찌 너에게 더럽힘을 당하겠느냐? 조속히 죽여야 가할 것이다.”
우탁은 그 굽힐수 없음을 알고 후(后)의 예로써 배알하였다.
“신이 어찌 감히 강압하겠습니까? 다만 현사(玄事)에는 귀천이 없다하니 소후(小后)께서는 신의 연모지정을 가엾이 여기고 한번의 동침을 허락해 주신다면 물불속이라도 뛰어들겠습니다. 어찌 을불태자의 장래는 생각지 않고 헛되이 죽으려 하십니까? 신이 만약 그를 구하여 안전해질 수 있다면 그 장성함을 기다렸다가 설욕할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자복(雌伏) 회계(會稽)는 이를 비유해 이르는 말이니 소후(小后)께서는 이를 생각하소서.”
을씨(乙氏)가 말했다.
“네가 만약 그 아이를 구해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가히 더불어 동침하리라.”
우탁(于卓)은 이에 힘써 왕에게 간하였다.
“을불(乙弗) 꼬마가 비록 달아났다하나 무엇을 두려워 하십니까? 하늘(天)은 진살(盡殺)함이 없고, 일(事)은 지나치게 궁지로 모는 것(太窘)을 꺼린다 했습니다.”
왕은 그말을 그럴듯하게 여겼다. 이에 대연(大宴)을 설(設)하여 군신(群臣)들을 향응하고, 대신(大臣)과 내외친척들을 내정(內庭)에 불러들여 또한 가무(歌舞)를 설(設)하고 5일동안 야연(夜宴)을 베풀었다.
왕은 상루 집안의 초랑(草娘)이 있다함을 듣고 사람을 시켜 정연(庭宴)에 참석할 것을 재촉했다. 초랑이 병질로 사양하자 왕은 어의를 보내어 치료하고 억지로 일으켜 연회에 나오도록 했다. 왕이 그 가희(歌姬)를 보내어 함께 반주하고 노래를 시키니 초랑이 억지로 추스리고 발성(發聲)을 하였다. 왕이 듣고서 아름답게 여기고는 가까이 오도록하여 손을 잡고는 “상국에게 이처럼 고운 아이가 있으면서 어찌 일찍 궁중에 들이지 않았는가.”하며 금과 비단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초랑은 사은(謝恩)하고 귀가했으나 을불의 소식을 몰라 즐거운 기색이 없었다. 부씨(芙氏)가 위로해 말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지나치게 상심할 것 없다.”
그 후 며칠 안돼서 홀연 왕이 미행(微行)하여 상루의 집에 이르렀다. 상루는 크게 놀라서 나와 맞으며 안팎으로 허둥거렸다. 왕이 말했다.
“짐이 초랑이 보고 싶어 왔으니 경은 이를 허물치 말라.”
상루는 이마를 조아리며 “천한 여식이 추한데다 창졸간에 예를 차릴 줄 몰라 성지(聖旨)를 저버릴까 두렵습니다.” 왕은 웃으며 말했다.
“한번 본 이래 마음속에 잊을 수가 없었다. 속히 보기를 청하노라.”
상루는 어쩔 수 없이 왕을 내당(內堂)으로 맞이하고 부씨(芙氏)로 하여금 초랑(草娘)을 단장시켜서 나와 절하게 하였다. 왕은 초랑을 이끌어 무릎위에 안고서는 마치 옥(玉)과 같이 아꼈다. 상루는 부씨로 하여금 술을 내오게하고 왕에게 말했다.
“천한 여식이 성은을 입음이 이와같으니 신의 집안에 복(福)이옵니다.”
왕이 술잔을 잡으며 부씨에게 묻기를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하자 부씨가 대답했다. “첩은 상루(尙婁)의 아들 보(寶)의 처(妻)이니 곧 초랑의 어미입니다.” 왕은 또한 그녀를 끌어 안으며 “그대의 아름다움이 이와같은 까닭에 이렇게 좋은 아이를 낳았구나!”하고는 상루에게 물었다. “상보(尙寶)는 어디에 있는가?” 상루가 대답했다. “신의 아들은 서토(西土)로 출정하여 지금은 우자(于刺)의 군중(軍中)에 있습니다.”
왕이 말했다.
“경의 부자는 짐에게 큰 공이 있으니 덕으로 보답하지 않을 수 없구려. 짐은 초랑을 후(后)로 삼아서 경의 외손을 빛나게 하고자 하니 경은 그 한아비(祖)가 되어서 나라를 지켜주시오.”
상루는 이마를 조아리며 사은(謝恩)하고 부씨에게 명하여 이불을 깔게하니 곧 을불(乙弗)과 더불어 운우를 즐기던 그 금침이었다. 초랑은 꿈속처럼 황홀하여 상루가 물러가고 부씨가 옆에 시측하여 하의를 벗기는 것도 몰랐다. 왕이 손으로 초랑의 치마와 띠(裙帶)를 풀고 금침속으로 안아들이니 마치 미친 나비가 화심(花心)을 탐하는 듯 백가지 애정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초랑(草娘)은 다만 푸주에 들어온 소처럼 희노(喜怒)의 감정을 끊었다.
삼십대왕(三十大王)의 장양지경(壯陽之莖)이 이칠(二七)의 소문지애(小門之艾)를 상봉하니 구름은 짙고 비는 진했으며 파도는 높고 소리는 세찼다. 왕은 보고 또 얼우고, 얼우고 또 보거늘 초랑은 다만 기식이 엄엄해 할 따름이었다.
왕은 행(幸)을 마치자 부씨(芙氏)에게 향탕(香湯)을 내오도록하여 옥체(玉體)를 닦으며 부씨를 끌어안고 희롱하였다. “경은 나이가 몇인가?” 부씨가 “첩은 이제 설흔 한살입니다.”하자 왕은 “나보다 네 살이 적다, 만남이 뒤늦은 게 한스럽구나!”하고는 그대로 부씨의 붉은 치마를 헤치고 옥문을 만지려 하였다. 부씨가 이를 거부하며 “첩은 마침 더러운 것이 있어 성수(聖手)에 누를 끼칠 수 없습니다.”하자 왕은 강제로 그것을 취하여 어루만지며 “꿩(치갈?)을 생각하여 알을 얻는 정의 원인??이 그러하다(得卵思雉情因然也)???”하고는 입을 맞추며 색정을 도발하였다.
부씨는 얼굴이 불같이 달아올라 크게 콧숨을 토해내며 “바라건대 폐하는 첩을 용서하소서.”하였으나 왕은 강제로 부씨의 옷을 벗겨 알몸을 안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또한 통하였다. 초랑은 망연자실하여 묵묵히 그것을 바라 볼 따름이었다. 왕은 연달아 모녀를 행하고는 피로하여 쓰러졌다.
부씨는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비녀에게 명해서 치란탕(雉卵湯)을 짓게하여 이를 진공하니 왕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부씨에게 입마추며 “경은 진정 사랑스럽소!”하였다. 부씨는 입으로 불어 받들어 올리며 “모녀의 동방성은(同房聖恩)이 하늘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했다. “초처(草妻)는 오히려 어리니 경이 먼저 내 알(子)을 낳으시오.” 부씨는 웃는 눈으로 끄덕거렸다.
왕은 꿩(雉)을 씹어 초랑에게 먹이고, 알(卵)을 씹어 부씨에게 먹이며 “알처(卵妻)는 꿩(雉)을 먹고, 꿩처(雉妻)는 알(卵)을 먹으니 가히 정이 균등하다.”라고 했다.
왕은 다시 초랑을 안고 운우를 행하였다.
새벽이 되자 닭은 ‘꼬꼬댁. 꼬꼬댁(喔)’ 울어대고 비온 땅은 미끌 미끌하였다. 왕은 부씨에게 말했다. “국인이 이를 알까 두렵다. 내일 밤 다시 오겠노라.”
부씨는 시비에게 명하여 탈것(駕)을 내오게하고 이마를 조아려 사은(謝恩)하였다. 왕은 초랑을 안아 일으키고 서로가 옷을 입혀주었다.
밖으로부터 상루가 들어와 사은숙배하니 현씨(玄氏) 또한 절하고 옆에 시측하였다.
왕은 초랑을 안고 문을 나서다가 현씨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좋은 할머니(好祖母)이니 가히 좋은 할아비(好祖父)를 붙들 수 있겠소.” 현씨는 이에 상루를 붙들고 웃으며 말했다. “첩의 남편은 늙고 박정하여 폐하가 천녀를 아끼심만 못합니다.”
왕이 초랑을 남겨두고 수레로 들어가자 상루가 그 옆에 참승하였다. 수레가 출발하려하자 부씨는 초랑과 더불어 차전(車前)에 부복하여 “성은이 하늘과 같사옵니다(聖恩如天)”라고 제창하였다. 왕은 차마 곧장 출발하지 못하고 다시 초랑을 끌어당겨 안고 입맞추며 “나의 처(吾妻)! 나의 처(吾妻)!”라고 불렀다. 상루가 말했다. “하늘이 밝아오니 출발해야 합니다.”
왕의 어자(御者)가 마침내 말을 채찍질하여 궁(宮)으로 돌아갔다.
부씨(芙氏)는 초랑을 안고서 입맞추며 말했다.
“우리 딸이 복이 많아 성천자가 강림하셨도다.”
초랑이 웃으며 말했다. “구왕(仇王)이 나를 적셔놔서 걷자니 양다리가 축축한데 어머니는 무엇이 그리도 기쁩니까?” 부씨가 말했다. “주상의 나이 한창이고 양기위강하여 한번 동침하니 혼이 흩어지고 은공이 깊거늘 너는 어찌 구왕(仇王)이라 하느냐?”
초랑이 말했다.
“나의 남편은 을불태자입니다. 구왕(仇王)이 비록 장양(壯陽)해도 내가 어찌 동(動)하겠습니까?”
부씨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왕의 처가 되게 해 달라고 빌은 까닭에 신(神)이 왕경(王莖)으로써 너에게 주었거늘 너는 어찌 감사하지 않고 곡정(曲情)하느냐? 구사지중(九死之中)의 을불태자를 구하는 것은 오직 왕에게 어떻게 교태를 부리느냐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초랑은 이내 크게 깨닫고 말했다.
“과연 어머니 말과 같습니다. 내 마땅히 왕에게 교태를 부려 나의 남편을 구할것이로다.” 부씨는 웃으면서 초랑을 끌어당겨 그 옥문을 만지며 말했다.
“이 문이 왕경(王莖)을 머금고 천음(濺淫)할 시에 또한 미상불 환희하였으렸다!”
초랑이 웃으며 어머니를 때렸다. “무슨 음담을 그리 심하게 합니까?”
부씨 말하기를 “내가 네 덕택에 성양(聖陽)을 모셔서 쾌미(快味)를 맛볼 수 있었으니 잊을 수가 없다.”
초랑은 귀가 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이윽고 고백하였다.
“왕의 양미(陽味)인즉 맛있었습니다.”
부씨는 웃으며 초랑에게 입맞추고 말했다.
“대웅(大雄) 복자(伏雌)를 즐거워하지 않을 여자는 없다. 너 또한 여자이다.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 은공을 생각하고 성왕(聖王)을 구왕(仇王)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초랑은 혼란하여 떠듬 떠듬 말했다.
“성왕(聖王)..!성왕(聖王)..! 그렇다면 을불(乙弗)은 버려야하는가? 성왕(聖王)을 사모해야 하는가?”
부씨는 이에 초랑을 안고 탕에 들어가 몸을 씻고나서 현씨(玄氏)와 상루(尙婁)를 배견하고 사은하였다.
“부모님의 은혜가 무거워 이러한 영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상루는 왕을 전송하고 돌아와서 아직 조복을 벗지 않은 채 앉아있었다. 부씨와 초랑을 좌우로 끌어당겨 어루만지고 입맞추며 말했다.
“우리 선군(先君)께서 다년간 적덕(積德)하시며 늘 우리 형제에게 이르기를 ‘우리 가문이 三世에 상(相)이 일어나고 반드시 후비(后妃)를 낳으리라’했는데 과연 너희들이 그러하다. 이로부터 입궁하면 우리 부부를 효(孝)로써 대함이 불가하니, 집에 있을때 진열(盡悅) 진효(盡孝)함으로써 늙은 애비를 위로해야 할 것이다.”
이에 초랑을 안고 그 아버지 음우(陰友)의 묘(廟)에 들어가서 고하기를 “손녀 초랑(草娘)이 이제 주상의 총행(寵幸)을 입었으니 곧 우리 아버지의 덕(德)입니다.”하고는 묘실안에서 춤을추고 또 현씨와 부씨에게도 명하여 춤을 추게했다.
초랑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주상을 안고 누우면서 그 양물을 보니 지푸라기 같았는데 할아버지는 어찌 기뻐함이 이와같이 심합니까?”
상루는 자세를 바꿔앉아 부복하며 “우리 딸은 다른 날의 후(后)인고로 교오(驕傲)함이 이와같으니, 노신(老臣)은 비록 할아비(祖)이로되, 또한 신하(臣)입니다.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초랑이 상루를 안아 일으키며 “그대는 미쳤음인가? 어찌 이런 꼴을 하오?”하자 상루는 크게 기뻐하며 다시 초랑을 안고 춤을 추다가 묘(廟)에서 나왔다. 종(奴)에게 명하여 소를 잡고 술을 준비하여 집안(宅中)의 신(臣) 노(奴) 처(妻) 녀(女)에게 하사하고 다함께 경축했다.
왕이 궁중으로부터 비단(帛緞) 50필, 포단(布緞) 3백필과, 초랑(草娘)과 부씨(芙氏)의 차마(車馬)와 자의(紫衣), 금관(金冠)을 내려보냈다. 상루는 가인(家人)들을 모아 공수(共壽)하고 그 포(布)를 친척과 오랜 친구(故舊)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왕이 이로부터 혹은 매일밤으로 혹은 사,오일밤 간격으로 와서 행(幸)하니 초랑의 총애가 높아지고 은사가 깊어졌다. 초랑 역시 운명의 거역할 수 없음을 알고 곱디 곱게 진정을 다했다.
이 때에 왕후(王后) 연안씨?(緣眼氏?)는 부마 연나(椽那)의 딸이었다. 나이 30으로 연태자(椽太子)와 안태자(顔太子)를 낳았고, 또 왕녀 2인을 낳았는데 성품이 유순하고 투기하지 않았다.
우탁의 딸 산씨(山氏)와 왕매(王妹) 다씨(多氏)는 모두 나이 이십 육,칠세로 총애가 처음과 같지 않았다.
왕모 우태후는 나이 51세로 색(色)이 한창 왕성한지라 왕이 매일밤으로 증(烝)하며 총애가 가장 많았다. 서모 해포씨(解蒲氏)는 나이 29세로 왕이 태자때부터 통정하여 총애가 쇠하지 않고 이에 이르렀으나 초랑이 새로 총애를 받자 모든 방이 다 공허해졌다.
우태후는 왕에게 아부하려는 뜻에서 속히 궁중으로 맞아들일 것을 권하였다. 왕은 거처할만한 궁이 없으므로 장작령(匠作令)에게 명하여 신궁(新宮)을 크게 일으켰는데 사치가 극심하였다. 초랑을 맞아들여 택일하고 책립하여 차비(次妃)로 삼으니 지위가 연씨(緣氏)의 다음이요, 제후(諸后)의 위(上)였다.
우태후(于太后)는 “초후(草后)는 내 딸이다.”하며 매번 초후(草后)와 함께 같은 이불에서 왕의 총행을 받았다. 이에 초후(草后)의 총권(總權)이 내외(內外)를 기울어지게 했다. 왕은 다시 상루의 정원에 부씨궁(芙氏宮)을 짓고 전택(田宅)과 노비(奴婢)를 하사했다. 부씨(芙氏)와 음씨(陰氏)의 자제들을 발탁해서 모두 추요(樞要)에 늘여 세우고 부씨의 아비 포(布)를 남부패자(南部沛者)로 삼았다.
상루(尙婁)는 상주하여 말했다. “노신의 영예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원컨대 치사(致仕)하고 병을 요양코자 합니다.” 왕이 말했다. “경은 바로 나의 할아버지(祖)요. 스스로 태공(太公)이 되어도 가할것이나 상국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오?”
상루가 말했다. “신(臣)의 처 현씨(玄氏)는 두 살때 어머니를 따라 창협(倉夾)의 집으로 개가(改嫁)하여 자랐습니다. 창협의 아들 조리(助利)는 곧 신처(臣妻)의 포제(胞弟)입니다. 충직하고 재주가 있어 신이 일찌기 남부대사자(南部大使者)로 삼았는데 훌륭한 치적이 많습니다. 국상(國相)을 맡음에는 이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합니다.”
왕이 말했다 “내 할머니(祖母)의 포제(胞弟)요. 먼저 대주부(大主簿)로 진작(進爵)시켜 입조(入朝)케 함이 가할 것이오.”
창조리(倉助利)가 명을 받들고 나아와 알현하자 왕은 상루의 장원(尙婁庄) 옆에 새 집(新宅)을 하사하고 그를 권려하였다. “이른 새벽 마땅히 상(相)이 됨으로써 짐의 몸을 보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