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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婦人)과 함께 충의(忠義)를 이룬 김수리(金秀理)
Ⅰ. 머리말
Ⅱ. 가계(家系)와 생애(生涯)
Ⅲ. 임란시 활동사항
1) 하늘과 산신에게 제사 지냄.
2) 창의
3) 우산 전투
4) 석읍 전투
5) 부족한 사료(史料)
6) 부인 박씨의 활약
Ⅳ. 맺음말 (공신녹훈)
Ⅰ. 머리말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약 20만의 왜군(倭軍)이 부산포로 들어와 부산진 전투가 발발(勃發)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왜군의 침략에 대한 방비책을 특별히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급작스런 침략을 받은 조선은 동래성 전투, 김해성 전투(戰鬪) 등에서 거듭 패(敗)하였고, 결국 왜군이 한반도에 상륙(上陸)한 지 일주일 만에 신라(新羅)의 고도(古都)인 경주성까지 함락(陷落)되고 말았다. 그 후 승승장구하던 왜군이 서울을 향해 북상(北上)하자 선조(宣祖)는 4월 30일 도성(都城)을 떠나 의주로 파천(播遷)하였다. 그로인해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한 달도 못되어 왜군은 아무런 저항(抵抗)도 받지 않고 서울까지 점령(占領)하게 되었다. 그런데 왜군의 침략소식을 접한 조정의 관료(官僚) 및 지방(地方) 고을 수령(首領)들은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에 내 고장 慶州를 내 손으로 지키겠다며 민초(民草)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김수리(金秀理)이다.
임진왜란이 발발(勃發)하자 김수리(金秀理)는 고을의 청년들을 모아 창의(創意)한 후 우산을 거점(據點)으로 동해안 지역(地域)에서 경주로 진격(進擊)하려는 왜군을 격퇴(擊退)시키기 위해 우산, 석읍 등의 초기 경주 방어전(防禦戰)에 참전(參戰)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그의 부인은 남장(男裝)을 하고 왜장(倭將)의 목을 베어다 바쳤다. 김수리(金秀理)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1605년(선조 38) 조정으로 부터 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김수리(金秀理)의 임진왜란 때의 행적이나 그의 부인도 함께 충의를 이룬 일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이는 김수리(金秀理)의 생몰년(生沒年)이 정확(正確)하게 확인(確認)되지 않고 있는 것처럼 그의 행적이 확인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00년이란 세월이 이미 흘렀고, 그 사이 수차례의 병란(兵亂)으로 그와 관련된 사료(史料)들이 많이 소실되었기 때문으로 추측(推測)되고 있다.
혼자 이루기도 힘든 어려운 충의(忠義)를 부인과 함께 이루었다는 것은 평소 김수리(金秀理)가 부인에게 보여준 행의가 어떠하였는지 또한 추측(推測)할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부족한 사료를 통해 부인과 함께 충의를 이룬 김수리(金秀理)의 임진왜란 때의 행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가계와 생애
1. 가계
김수리(金秀理. 1557 ~ ?)의 자(字)는 효언(孝彦)이고, 호(號)는 난재(蘭齋)이다.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출신지는 경주군 남도면 하서리 망정촌(慶州郡 南道面 下西里 望亭村)이시다. 金寧은 경상남도 김해(金海) 일대의 옛 지명(地名)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河口) 남서쪽에 위치(位置)하고 있으며,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며 고려 말 지명 김녕이 김해로 개칭된 후 관을 김해로 일컫게 되었다.
그런데 김수로왕(金首露王)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混沌)이 일어남에 따라 김해김씨는 선김(先金),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칭하였다. 그 후 1849년(헌종 15)경상도 유생 김주성(金周聲), 김근학(金根學), 김성현(金成鉉), 김치수(金致秀), 김홍환(金鴻煥) 등이 본관 이름의 혼동이 야기(惹起)되는 문제에 대해 예조(禮曺)에 상소(上訴)하여, 1865년(고종 2) 본래의 김녕을 본관으로 확정(確定)지은 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김녕김씨의 비조(鼻祖)iii)는 계림(鷄林)의 금함(金函 : 금상자)에서 태어나신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이다. 그 후손은 그 후 경순왕 김전(金傳)으로 이어졌고,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8세손이자 김봉기(金鳳麒)의 아들인 김시흥(金時興)을 김녕김씨의 관조(貫祖)로 삼고 있다. 김시흥은 경상북도 의성(義城)에서 출생(出生)하였으며, 고려 인종 때 문과에 급제(及第)한 뒤 관직(官職)은 한림(翰林)을 거쳐 외관(外官)으로 치적을 쌓고 예부낭중(禮部郎中) 겸 김녕대도호부사(金寧大都護府使), 총랑(摠郞), 전라도부부사(全羅道部夫使), 양주부사(襄州副使),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하정사(賀正使), 밀직학사(密直學士), 춘궁시독관(春宮侍讀官) 등을 역임한 후 병마사(兵馬使)로 출장(出裝)하였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입상(入相) 후 수년 동안 재상(宰相)직을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주국상낙군개국남식읍일천호(柱國上洛郡開國男食邑一千戶)가 되었다가 1135년(고려 인종 13) 요승(妖僧)인 묘청(妙淸)의 난(亂)을 평정한 공로로 김녕군(金寧君)에 봉군(封君)되었다. 72세에 벽상삼한중대광정승(壁上三韓重大匡政丞)에 증직(贈職)되었다. 그 후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토벌(討伐)하는데 공을 세워 식읍(食邑)을 하사받고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고, 그로 인하여 금주(金州)는 김녕대도호부(金寧大都護府)로 승격(昇格)되었다. 시호(諡號)는 문열공(文烈公)이다. 이후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삼고, 김녕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김수리(金秀理)의 직계 김녕김씨 2세 김순(金珣)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내고, 찬성사(贊成事)에 증직되었다. 3세 김극주(金克柱)는 고려 고종 때 태사중서령(太史中書令) 광록대부 평장사를 지냈으며, 4세 김중후(金重後)는 고려 원종 때 승선공조시랑(承宣工曺侍郞)을 지냈고, 봉선대부(奉善大夫)에 봉해졌으며, 5세 김문희(金文熙)는 고려 충숙왕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고 정순대부(正順大夫)에 봉해졌다. 6세 김일막(金鎰塻)은 성균관생원(成均館生員)을 지내고 자의대부(資義大夫)로 행현감(行縣監)을 지냈으며, 7세 김천중(金天重)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행목사(行牧使)를 지냈고, 8세 김여숙(金汝淑)은 자헌대부 한성좌윤(漢城左尹)이다.
김수리(金秀理)는 김알지의 46대손이자 경순왕의 19세손이며, 김녕김씨 시조 김시흥(金詩興)의 13세손이며, 이부 상서를 지낸 김문희(金文熙)를 파조(派祖)로 삼고 있는 이부 상서공 파(派)의 9세손이다. 고조 김경우(金慶宇)는 무과 급제 후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증조 김달경(金達卿)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조부 김맹재(金孟才)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부친 김덕봉(金德鳳)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위의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김녕김씨는 고려 때부터 재상(宰相) 등 높은 관직(官職)을 지낸 인물들을 많이 배출해내면서 명문가의 기틀을 잡았으며, 조선조에 들어서는 고려 때의 명성(名聲)을 이어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을 갖춘 인물을 많이 배출하면서 명문가로써의 자리를 확고하게 굳힌 가문(家門)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문에서 나고 자란 김수리(金秀理)가 임진왜란을 당하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한 상태에서 慶州로 진입하려는 왜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수차례 전투에 참전하여 慶州 지역을 무사히 지켜내도록 한 것은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행동임을 알 수 있다.
2. 생애(生涯)
김수리는(金秀理)태어날 때부터 남들과 다른 기상을 가졌으며, 힘이 장사여서 7세 때 이미 몇 십 킬로그램에 달하는 돌을 들었는가 하면, 높은 담장을 가뿐히 뛰어넘는 등 체질(體質)과 근력(筋力)에 있어 특히 뛰어났다.
평소에 병서(兵書)를 많이 읽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전쟁에 나가 싸워 忠誠을 다하려는 뜻이 일찍부터 드러났다. 그리고 조정에서 국사(國事)를 논할만한 자질과 재능(才能) 또한 갖추고 있어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칭해졌다. 이에 더해 아량(雅量)도 넓고 치밀했으며 생각이 깊고 뜻이 원대하여 뭇 무리 중에서 아름답고 장대함을 보였다. 부모에 대한 효성 또한 지극하여 살아계실 때는 봉양의 효를 다하였으며, 상(喪)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마을의 청년들을 모아 창의하여 의병(義兵)을 결성한 뒤 전장(戰場)에 참여하였다. 이때 부족한 군량(軍糧)을 많은 것처럼 위장술을 펼치거나 화살이 떨어진 군사(軍士)들을 살리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그 후 아들에게 본진을 지키게 하고 자신의 의병들을 데리고 왜군 진영으로 진격하여 왜군을 사살하고 군량미를 빼앗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부인 박씨 또한 남자 의상을 입고 패주하는 적진으로 돌입(突入)하여 달아나는 왜장(倭將)의 머리를 베어 옷 속에 싸들고 와 김수리(金秀理)에게 바쳤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5년(선조 38) 4월 16일 김수리(金秀理)의 임진왜란 때의 공적을 인정한 선조(宣祖)는 도승지(都承旨) 신흠(申欽)에게 명(命)하여 다음과 같은 전지(傳旨)를 받들도록 하였다.
“나라가 어지러움이 많아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 너희들은 이미 힘을 펼쳐 중흥(中興)의 공(功)이 적지 않았음에도 아직껏 보은(報恩)을 못했다. 내 이에 원후(原後)에 추은(追恩)한다.”
이로 인해 김수리는(金秀理)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으며, 관직은 주부 훈련원판관(主簿 訓練院判官)에 올랐다. 그 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충근정양호성 이등공신 녹훈(忠勤貞亮扈聖 二等公臣 錄勳)하셨다. 김수리(金秀理)의 묘소는 현 경주시 양북면 용동리 380-2 유좌(酉坐) 큰 들 방영골 연못 옆에 자리하고 있다.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묘소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酉坐라고 하나 墓는 失傳이다. 슬하에 3남으로 김몽실(金夢實), 김응실(金應實), 김몽석(金夢碩)을 두었다.
현재 1864년(고종 1) 김수리(金秀理)의 16세손 현릉참봉(顯陵參奉) 겸 가선대부 호조판서 판의금부사(兼嘉善大夫 戶曹判書 判義禁府事) 송포(松圃) 김치영(金致榮)이 지은 선무원종공신록 주부 훈련원 판관(主簿 訓練院 判官) 병조참판(兵曹參判) 김수리(金秀理)의 유적서문(遺蹟序文)이 전한다.
김수리의(金秀理) 유적서문(遺蹟序文)에는 다음과 같이 김치영이 지은 시도 함께 전한다.
“慟哭祭天牛叱山 통곡제천우질산
皇靈感佑掃危難 황령감우소위난
奮義勵忠蹈刃白 분의려충도인백
救宗扶社誓沈丹 구종부사서침단
三軍東起鷄林國 삼군동기계림국
千里西驅鳥嶺關 천리서구조령관
宣祖特降原從錄 선조특강원종록
樹勳榮名萬世間 수훈영명만세간“
“우질산상에서 통곡하며 하늘에 제(祭)지내니
하늘이 감격해 도우사 위난(危難)을 쓸었네
의(義)와 충(忠)에 떨쳐서 일어나 칼날을 밟으며
종묘사직 지키려 단심으로 맹세하여
동쪽 계림국에서 삼군(三軍)을 일으키고
서쪽 천리(千里) 조령(鳥嶺)에서 병마(兵馬) 이끌었네
선조(宣祖)께서 특별히 원종녹권(原從錄券) 내리시니
세우신 공훈 영예로운 이름 세간(世間)에 꽉 찼도다“
김수리(金秀理)의 후손 12세손 김진권(金進權)이 孔夫子年 二千四百八十年
(西紀 一千九百三十 年)에 찬양문을(讚楊文) 모성공회(慕聖公會)에서 김수리(金秀理)의 뜻을 이어 받고자 노력하여 편찬하였다.
Ⅲ. 임란시 활동사항
1) 하늘과 산신에게 제사 지냄.
김수리(金秀理)의 나이 3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시국은 어수선하고 온 나라의 운수(運數)가 꽉 막혀 팔도(八道)의 민심은 가마솥에 물 끓듯 들끓었다.
그러자 김수리(金秀理)는 본래 계림인(鷄林人)으로서 나라가 위급(危急)한 어려움에 처하자 부인 밀양박씨와 장남 김몽실과 함께 慶州郡에 있는 우산(牛山:일명 우질산,牛叱山) 꼭대기로 올라가 큰 바위 밑에 기거하며 북쪽 왕실(王室)을 바라보고 하늘을 향해 통곡하며 바위 위에 칠성단(七星壇)을 만들어 하늘에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그 축문(祝文)에 이르기를 “조선국 慶尙北道 慶州郡 남도면 하서리 망정촌(南道面 下西里 望亭村)에 사는 소신(小臣) 김녕후인(金寧后人) 김수리(金秀理)가 황천후토(皇千后土)의 영(靈)에 감히 고(告)하나이다. 우리나라가 임진의 왜란으로 비색한 운수가 매우 혹심합니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황령(皇靈)께서 위에서 굽어 살피시고 북극성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귀 기울여 감응(感應)하려니 반드시 저! 남쪽 왜구들을 빨리 벌을 내려 우리 동국(東國)을 구원하사 천만년 종사(宗社)를 돕고 억조 백성을 구제하소서.”라고 하였다.
이같이 빌기를 7일째 되던 날 밤에 하늘에서 “내가 장차 너를 도울 것이니 너는 빨리 세상에 나가 군사(軍士)를 일으켜 적을 평정하라.”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또 산신제(山神祭)를 지내자 갑자기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바위 위에 웅크리고 앉아 무슨 말을 할 듯 하며, 눈물을 흘려 울 듯 하다가 거처(去處)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이상한 징조가 나타난 것은 오직 김수리(金秀理)의 지성(至誠)에 하늘과 산신(山神)이 감동(感動)한 것이라 생각하고, 김수리(金秀理)는 처자(妻子)와 함께 홀연히 우산(牛山)에서 세상밖으로 나왔다.
2) 창의
慶尙道 慶州郡 양남면(陽南面) 수렴리(水念里) 땅끝 마을에 위치한 공암(孔岩 : 일명 굼바위)은 경주와 울산의 경계지역 해안(海岸)에 있으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사이에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 처진 틈에 큰 굴이 뚫어져 있는 곳이 바로 공암(孔岩)이다. 이곳은 동대령(東大嶺)에서 발원(發源)된 수렴천(水念川)의 맑은 물과 어우러져 있어 천혜(天惠)의 절경으로 이름난 곳이다.
그곳으로 왜군이 침공(侵攻)해 올 것이란 소문이 돌자 민심(民心)이 흉흉(恟恟)해졌다. 1592년 4월 마침내 왜군이 대군(大軍)을 이끌고 침공해 오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문과 함께 부산포와 동래성이 이미 왜군에게 함락되었고, 4월 21일 慶州省까지 왜군에게 함락당하면서 천년 고도 慶州가 화염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즈음 왜군은 慶州府 동해안으로 대거 침입하였는데, 이는 동대산맥(東大山脈)을 넘어 경주로 침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경주부 동해안은왜군들에게 의해 끊임없는 공격이 이어졌다. 한 편 慶州府 동해안에 정박해 있던 왜군은 慶州府 동해안의 공암, 나산리(羅山里)의 나아(羅兒), 대본리(大本里)의 대왕암(大王岩) 등지에 자주 정박하고 있으면서 경주로 들어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왜군이 경주로 가기 위해서는 나아천(羅兒川)을 따라 약 8 km 를 거슬러 오르고 우산을 돌아서 수렴천에서 올라오는 석촌(石村), 석읍(石邑), 중산(中山)을 거쳐 조산(鳥山)에 있는 바디재(무령:茂嶺)를 넘어야 했다. 이러한 만큼 공암(孔岩) 근처인 상서(上西), 하서(下西), 수렴(水念), 나아(羅兒), 석읍(石邑), 등지에 수시로 출몰하던 왜군은 백성들을 상대로 끊임없이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김수리(金秀理)는 하늘에서 들려온 말대로 군사를 일으켜 왜군을 평정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와 우산 동쪽 계림에서 고을 청년들을 모아 창의하였다.
3) 우산 전투
우산은 경주의 양북(陽北)에 소재한 산이다. 바위가 많은 우산은 산등성이가 높아 동해안(東海岸)의 험준한 곳으로 이름난 곳이었기 때문에 복병(伏兵)해서 왜군(倭軍)을 막기에 그곳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특히 산의 동북쪽에는 10여m 길이의 자연 동굴(洞窟)까지 있어서 양곡(糧穀)과 무기(武器) 등을 저장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이에 더해 우산의 앞쪽에는 돌이 쌓여 있고, 뒤쪽 산 속에는 뽕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게 펼쳐져 있어 활과 화살을 만들 재료를 구하기도 수월한데다 바위 사이에서 샘물까지 솟아나고 있으므로 물을 길어오는 수고로움까지 덜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동해(東海)에서 효령(孝嶺)을 넘는 요로(要路)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 지형(地形)을 슬기롭게 이용하면 왜군을 격퇴(擊退)시키기에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울 만큼 의병활동을 펼치는데 있어 적격지이다.
그곳에서 1592년 6월 2일 제1차 우산 전투가 벌어졌다. 왜군은 서생포(西生浦)로부터 목선(木船)을 타고 공암으로 상륙한 뒤 효령을 넘어 경주부(慶州府)로 진입하려고 하서천(下西川)을 따라 석촌을 지나 한밤중에 우산으로 침입(侵入)하였다.
이때 김수리(金秀理)는 김응하(金應河), 김응생(金應生), 이응벽(李應璧) 등과 함께 방공호(防空壕)를 만들고 곡식 80석(石)을 비축(備蓄)해 놓고 왜군과 싸워 왜군 28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의병군이 승리(勝利)하였으나 의병군도 11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당시 김수리 등이 우산 전투에서 왜군을 격투시킬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잘 알고 있던 우산 지형의 험준(險峻)함을 적극 활용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성과이다.
4) 석읍 전투
석읍(石邑)은 경주의 우산아래 있는 비좁은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서는 임진왜란 중 2차례의 전투가 벌어졌다. 첫 번째 전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오래지 않은 1592년 6월 14일에 있었고, 두 번째 전투는 1593년 (선조 26) 5월 2일에 있었다. 그런데 김수리는 임진왜란 발발 후 초기 慶州 방어전에 참여(參與)한 것으로 확인되는 만큼 김수리는 첫 번째 전투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의병장 김수리(金秀理)가 첫 번째 전투에 참여하였다면 김응하, 이눌(李訥), 김득복(金得福), 김홍위(金弘偉), 김택연(金宅淵), 김복(金福) 등이 이끄는 의병군과 함께 왜군을 통쾌하게 격파시키며 승리를 거두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이들 의병장들이 이끄는 의병군이 석읍으로 들어오는 왜군을 멀리 쫒아내면서 고을 주변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5) 부족한 사료
현재 김수리는(金秀理) 임진왜란이 발발(勃發)하고 부산과 서생의 적(敵)이 동해안을 통해 경주를 향해 침투(浸透)할 때, 공암(孔岩), 하서(下西), 석읍, 우산 등지의 요로(要路)에 복병한 뒤 왜군을 기습하며 초기 경주방어전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경주 근방에서 전개된 격렬했던 항전지(抗戰地)로 동해안 지구에는 공암(孔岩), 이견대(利見臺), 우산(牛山), 중산, 나아, 죽전포(竹田浦), 망정촌(望亭村), 상서, 유포(柳浦), 달현(達峴) 등이 있고, 영지(影池) 지구에는 개곡(開谷), 모화(毛火), 영지(影池) 등이 있으며, 노곡(蘆谷) 지구에는 노곡(蘆谷), 연박산(烟薄山), 휴향퇴, 양천교(楊川郊), 곽천(藿川) 등이 있다.
경주부 서편 서령 지구에는 선도산(仙桃山), 모량(毛良), 부산성(富山城), 창암(蒼岩) 등이 있다. 그리고 형산강 지구는 형산강 전투를 비롯하여 금장대, 백률산 전투 등 크고 작은 항전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초기 경주 방어전에 참전한 김수리(金秀理)는 모래를 채워 넣은 가마니를 병사들에게 줄지어 짊어지고 가게 하여 왜군에게 군량(軍糧)이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 위장하는 전술을 써서 왜군이 쉽게 진격해오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쟁을 하다가 화살이 떨어진 군사(軍士)들이 무사(無事)하도록 하늘에 통곡하고 비는 등 자신의 사졸(士卒)을 애양(愛養)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장남 김몽실에게 본진(本陣)을 지키도록 명(命)을 한 뒤 자신은 정예 의병들과 함께 왜군 진영(陣營)으로 돌격(突擊)하여 왜군을 사살한 뒤 군량미를 빼앗고, 왜군을 교란(攪亂)시키며 무참(誣譖)하게 무너뜨리는 등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난 후 김수리(金秀理)는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錄勳)되었다. 이는 김수리(金秀理)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의(忠義)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 분발(奮發)하며 종묘사직을 지켜내기 위해 힘썼음을 뜻한다.
따라서 현재 김수리(金秀理)는 참전(參戰)한 것으로 알려진 전투 이외에 경주 근방에서 일어난 격렬한 전투에도 수차례 참전(參戰)하였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현재 부족한 사료로 인해 더 이상 김수리(金秀理)의 활약이 확인되지 않고 있음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6) 부인 박씨의 활약
부인 박씨는 임진왜란을 당해 창의한 남편을 돕기 위해 남자 의상(衣裳)을 입고 패(敗)하여 달아나는 왜군(倭軍) 진영(陣營)으로 돌입(突入)하여 왜장의 머리를 벤 뒤 옷 속에 싸들고 와서 김수리(金秀理)에게 바쳤다. 이에 김수리(金秀理)는 부인을 칭찬(稱讚)하며 말하기를 “가히 우리 동방의 여중(女中) 충신(忠臣)이로다.”하고 “아 ! 풍진(風塵)의 남자(男子)로서 내 부인(婦人)을 대하고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으랴”라는 시(詩)를 한 수 읊어주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갈충보국(竭忠報國)한 충신은 있었으나 이처럼 부부(夫婦)가 함께 한 충신(忠臣)은 찾아보기 어렵다.
Ⅳ. 맺음말 (공신녹훈)
1592년 중국 침략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발판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豊臣秀吉 1536 ~ 1598)가 1598년(선조 31) 왜군에게 조선(朝鮮)에서 물러날 것을 유언(遺言)으로 남기고 병사(病死)하면서 7년간의 임진왜란은 끝이 났다. 두 차례의 왜란이 끝나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조정에서는 1604년(선조 37) 6월 25일,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공신(功臣)들에게 공적의 대소(大小)에 따라 대대적으로 시상을 하였다.
이때 선조가 파천을 할 때 어가(御駕)를 뒤따르던 사람들에게는 호성공신(扈聖功臣)을, 왜군을 친 제장(諸將)과 군사 및 군량미 등을 댄 사신들에게는 선무공신을, 임진왜란 중이던 1596년(선조 29) 7월 충청도에서 왕실의 서얼인 이몽학(李夢鶴)이 일으킨 난을 평정한 공신들에게는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호칭하고 각각 3등급으로 나누어 시)상(施賞하였다.
그 가운데 18명을 선무공신 1, 2, 3등으로 책봉(冊封)할 때 빠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정에서는 1605년(선조 38) 4월 9,060명을 선무원종공신 1, 2, 3등으로 나누어 녹훈(錄勳)하였다. 이때 김수리(金秀理)는 임진왜란 때 세운 전공(戰功)을 인정(認定)받아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다. 그로 인해 김수리(金秀理는) 관작을 부여받았고, 그의 자손들은 음직에 봉해지는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국란(國亂)을 책임져야 할 조정의 관료 및 지방 수령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달아나기에 급급했지만, 김수리(金秀理)는 의병(義兵)을 일으켜 초기 慶州 방어전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며 부인과 함께 충의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김수리(金秀理)는 물론 부인의 행적에 대해서도 아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따라서 본고를 통해 김수리(金秀理) 가 부인과 함께 忠義를 이룬 일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후인들에게 귀감이 되기를 바란다.
* 참고문헌
경주동해안 공암구국맹약기념회, 동해안 임란구국 추진위원회, 2013.
『경주지사』 1권, 경주시사편찬위원, 경주시사편찬위원회, 2006.
『김녕김씨대동보』김녕김씨대동보편찬위원회, 회상사, 1977.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최효식, 국학자료원, 2004.
『충의사지』울산임란공신 숭모회, 2002.
i) 『김녕김씨대동보(金寧金氏大同譜)』(김녕김씨대동보편찬위원회, 1977).
김녕김씨 중앙종친회 홈페이지
(http://www.kyoungk.com/) 한국역대인물통합정보시스템 (http://pepple.aks.ac.kr/)
<김녕김씨> 등을 기저로 서술하였음
ii) 생년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수리의 나이가 35세였다는 기록에 따라 미루어 추측 한 연도로 오차가 있을 수 있음
iii) 비조(鼻祖) : 어떤 일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
iv) 『경주동해안(慶州東海岸) 공암 구국맹약 기념비(孔岩 救國盟約 記念碑)』
동해안 임란구국 맹약 기념비 추진위원회 2013년
『충의사지(忠義祠誌』.울산임란공신 숭모회, 2002. 470~471쪽 등을 기저로 서술하였음
v)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최효식, 국학자료원, 2004. 9월 발행을 기저로 서술하였 음. 경주읍성 탈환 51~129 456~463 477~478 488~510 쪽참조.
vi) 『동경통지』1990년 2월 발행 발행인 李永植 발행처 慶州文化院 247쪽 419쪽 서술.
vii) 『경주시사』1권.경주시 사편찬위원,경주시사 편찬위원회, 2006. 12월 302~307쪽 서술.
2권.경주시 사편찬위원,경주시사 편찬위원회, 2006. 12월 759쪽 서술.
⑧ 『折衝 朴春石 公遺事』 2001년 12월 20일 발행 경주부의 의병 지도자 김수리121쪽 서술.
⑨ 『경주부의 임란항쟁사』최효식 1993년 12월 발행 107 ~ 160 378 385 424 쪽 서술.
⑩ 『임진왜란기 영남의병연구』최효식 2003년 9월 발행 419 436 454 쪽 서술.
⑪ 『경주임란의사 창의록』1998년 5월 발행 228 쪽 서술.
⑫ 『양남 향토사』2008년 5월 발행 동해안지구 임란사 274 ~ 289 쪽 서술.
⑬ 『한국향토사 연구』최효식 2002년 10월 발행 209~215 / 128~133 쪽 서술.
⑭ 『조선후기 군제사 연구』 (朝鮮後期 軍制史 硏究) 崔孝軾 지음 1995년 5월9일 발행.
⑮ 『임진왜란』전 풍신수길 (豊臣秀吉 1536 ~ 1598 행적) 月灘 朴鐘和 著 1966년 10월 5일 乙酉文化社 第1券 초판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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