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이전에는 사람의 힘으로 땅을 갈았다. 그러나 이후 사람의 힘 보다는 축력을 이용했다. 소를 묶어 사용하는 농기구, 쟁기를 사용한 것이다. 덕분에 작업량은 늘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난 후 조선시대에 와서 국가 정책도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정책을 펼쳤지만, 기술, 농사 규모 같은 면에서 농사가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휴경농법(비옥도가 낮아진 농경지를 일정한 기간 동안 묵혔다가 비옥도가 회복된 후 다시 농경지로 쓰는 원시적인 농사 방법)이 대세였던 고려시대의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때 농업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휴경농법을 극복한 것이다. 바로 토양이나 작물에 비료성분을 공급해 농작물의 생육을 촉진하는 방법인 시비법이다. 농사직설은 조선 세종 11년에 정초, 변효문 등이 지은 농서인데, 전국에 배포되었다.
“봄, 여름 사이 연한 버들가지를 썰어 외양간에 펴 두었다가 5~6일마다 거두어 거름으로 쌓아 둔 후 보리재배에 쓰면 심히 좋다”
-농사직설 종맥-
농사직설은 농민 개개인에 대한 지식보다는 가르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었다. 세종은 농사직설의 배포를 통해 조선시대 농업의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조선시대 농사를 장려하는 행사를 진행하였다. 그 중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 임금이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몸소 농사를 짓던 친경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앙법과 직파법이 유행하였다. 이양법은 노동력은 절감되지만 물이 많이 필요했다. 따라서 왕이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는데, 농민들은 이를 기다리지 않고 물이 부족한 상황을 막기 위해 맞두레, 용두레, 물풍구, 홈통 등 여러 장비를 이용했다. 여기서 용두레는 낮은 곳의 물을 높은 곳의 논이나 밭으로 퍼 올리는 데 쓰는 농기구였다. 맞두레는 함지나 되의 네 귀퉁이에 줄을 매어 두 사람이 마주 서서 물을 푸는 농기구이다. 맞두레는 두 사람 이상이 해야 되고, 용두레는 한 사람도 할 수 있었고, 용두레는 1~2m밖에 못 푸지만, 맞두레는 5~10m까지 풀 수 있었다.
현대에 오면서 우리나라 쌀 소비량이 1인당 80.7kg에서 62.9 kg으로 22%가 감소하였다. 이를 통해 논 면적의 감소는 쌀 소비량의 직접적인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쌀 대신 다른 음식으로 대체하는 식사 문화의 변화와, 수입으로 인한 이유 때문이다.
현대까지 남아있는 세시풍속 중 하나는 강강술래다. 강강술래는 여자만 참여하는데, 농업도 자식을 낳는 것과 똑같고, 여자는 아이를 낳고 농사는 남자만 짓는 것처럼,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여성이 강강술래를 춤을 통해 주술성이 강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추석에 먹는 송편도 세시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세시풍속이나 과거의 흔적이 사라지고 중요해지지 않고 있는 현대, 더욱 발전될 미래를 위해서는 잊혀지면 안 되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세시풍속이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더욱 더 관심을 가지고 이어 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