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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의 전설
구인환
1
강은 언제나 아름답다. 흐르는 강물에 물새가 나는 것도 멋이 있지만, 달리는 차에서 강과 산과 들을 바라보는 것은 더욱 아름답다. 그것은 달리는 풍경화요 살아 있는 삶의 파란 광장이다. 금강산 북쪽에서 발원하여 소양강과 합하여 흐르는 북한강의 꿈과 태백산과 대덕산의 북쪽에서 발원하여 양주로 흘러오는 남한강의 서정이 어울어진 양수리의 비경이 얼마나 경외스럽고 아름다운가. 충북의 천마와 천산, 경북의 60령 고개에서 발원하여 공주를 거쳐 부여로 흘러오는 금강! 그것은 푸른 강의 광장에서 춤추는 인영은 삼천궁녀가 낙화암에 수놓은 백의 현란한 꽃들이요 고란사(皐蘭寺)에서 새벽에 물을 떠 고란초를 띄워 임금님에게 바치는 궁녀의 하얀 얼굴이다. 더구나 백제의 마지막 서울인 부여를 건너 수복정을 바라보는 길목을 넘어서 조룡대의 한을 되새기는 금강은 더욱 그 파란빛을 더하고 있다. 거기에 펼쳐지는 푸른 들과 무량사(無量寺)의 정기를 담뿍 담은 홍산 들판이 펼쳐지고 철새들의 낭만이 서린 금강의 하구둑을 향해 역사의 한을 되새기며 강물은 유유히 흘러간다.
공주에서 부여를 지나 홍산을 거쳐 차는 장항쪽을 향하여 달리고 있다. 실은 부여에 내려 박물관을 보고 소나무 우거진 부소산에 올라 옛 성터와 창고터와 사자루에 올라 계백장군의 동상과 평제탑과 정림사가 천오백 년의 한을 되새기고 있는 부여 시내와 금강을 굽어 봐야 하고, 천천히 걸어서 낙화암에 올라 조룡대의 한을 되새기며 고란사에 내려가 고란초를 띄운 물을 마시고 배를 타고 삼천궁녀가 낙화의 꽃을 수놓은 낙화암을 바라보며 수복정을 향해 뱃노래를 불러야 한다. 무량사도 들르지 못하고 차는 화양들을 지나 금강을 왼쪽에 끼고 장항을 향하여 달려갔다.
언덕의 주택과 아파트의 창들, 가로수와 간판 네온싸인 교회의 십자가가 공중에서 춤을 추듯이 흘러갔다. 마구 새파랗게 일어나는 들판과 산과 푸른 하늘이 한 폭의 동양화를 채색하고 있다. 강물이 굽이치는 금강이 강경과 임포를 지나 하구둑을 향해 흐르고 있다. 하얀 뱅어를 잡는 범선(帆船)이 떠 있는 듯하고 뱅어가 황해를 거슬러 올라와 상류로 뛰어오르는 듯했다.
나는 창가에 눈을 던졌다. 창을 넘어오는 바람이 달고 시원했다.
달려가는 풍경이 망가진 영사기의 필름과 같이 흘러간다. 그 장면 중 한 장면이 멈춰져 흑백색으로 클로즈업되어 왔다. 그것은 소실댁 할머니의 초췌한 몰골이었다.
소실댁 할머니는 가끔 집에 보이지 않았다. 근래에 와서 집을 비울 때가 늘어나고 있다. 그것도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 방안에 있는가 하고 가보면 자리에 없고, 혹시 채전에라도 나가 있는가 하면 개구리 바위 산 기슭을 감도는 뒷모습이 보일 때도 있다. 그야 잠시 외출할 수도 있고 마실을 갈 수도 있으나 소실댁 할머니는 언제나 한 곳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소실댁은 무슨 놈의 소실댁이냐고 불만스러운 말로 그저 할머니라고 부르지 무슨 새색시도 아닌데 소실댁이냐고 불만을 나타내고 있지만 동네에서는 그저 소실댁 할머니라고 부르고 그저 소실댁이라고 부르고 있다. 꼿꼿한 몸매며 피부색이나 카랑카랑한 목소리만 두고 봐도 그 누구도 소실댁 할머니나 소실댁이라고 부르지 그저 할머니라고 부르거나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또 거기 간 게 아냐. 소실댁 할머니가 이상해진 것이 아닌가…….”
“나들이 간지도 모르지. 안뜸에 장마루댁이 있잖아…….”
“말하기 좋다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게 아니라구…….”
“제 입 가지고 제가 말하는데 누가 무어라구 말한데유.”
“기산댁은 그렇게 앞가슴이 넓어서 집에서는 숨도 못 쉬고 사는가.”
모산댁이 듣다못해 쐐기를 박았다.
입이 걸기로 이름난 기산댁이 주춤하더니 반격을 가해 왔다.
“아니 해가 질 무렵이나 가는 비가 오는 날이면 거기 가 먼 데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게 이상하지 않다구요. 그 무슨 기벌포라는데 무엇이 나오는 게요. 간 사람 되살려 온데요. 이건 실성이 시작된 거라구유 그렇지 않으면 왜 지벌폰지 기벌포를 간다 이거예요. 백제 때 죽어간 군사의 고혼이라고 달랠라구유…….”
“아니 이 사람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그게 어떤 소리라구 입에 담는단가.”
모산댁이 더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노인이 좀 이상한 빛이 보이더라도 속으로 걱정하면서 지켜 볼 일이지, 이상하다느니 실성이 시작되었다느니 악담을 늘어놓을 것까지는 없는 일이다. 설사 그런 빛이 보인다고 해도 좋은 일은 퍼뜨리고 흉한 일은 숨기라고 했듯이 무슨 수라도 만난 듯이 떠벌릴 것은 없다. 그야 좋은 일이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도 누구 하나 탓할 사람이 없지만 궂은 일을 가지고 떠들면 듣는 사람이 면구스럽고 기분이 언짢아져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샘터에서 아낙네들의 말이 해가 지는 황혼의 마을에 번져갔다.
붉은 댕기를 두른 아가씨가 물동이를 이고 종종 걸음으로 걸어가고, 들에 나간 촌로가 소를 몰고 돌아온다. 벌써 저녁을 짓는 연기가 여기저기에서 나기 시작하고 부엌에서 아낙네들의 손길이 바빠진다.
“그 한을 무엇으로 풀겠어유. 그저 시간이 약이라지만 이렇게 세월이 지나갔는데도 더 깊어가는 한숨을 듣기가 민망할 정도에유.”
“하도 억울해서 눈을 감지 못할지도 모르지. 그놈의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삶을 한에 가슴 치게 하는지 몰라유.”
“그러니 남편이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잖아유. 가슴에유.”
“동작에 묻힌 당매 최씨네 집은 그래두 덜하는가 보지유. 눈에 보기라도 하고 현충일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니 그래두 나을 거지유.”
“그러니 현충일이 다가오면 가슴이 더 메어지는지 모르지유. 남은 나라에서 하는 제삿밥이라도 얻어먹는데 이건 원한으로 떠돌고 있으니 어찌 가슴이 메어지지 않겠어유. 그래두 또 한자식 때문에 산다는 게 아니에유.”
“다들 전쟁을 겪은 일인데 왜 이렇게 다르대유. 소실댁 할머니도 이제 털어 버릴 때가 되었는데…….”
“글쎄 말에유. 개구리 바위에 그렇게 빌었으면 좋은 데로 갔을 텐데 요새 부쩍 더 가슴이 아픈가 봐유…….”
아낙네들의 말은 끝이 없다. 물동을 이고 일어나면서도 귀담아 들으며 웃고 가다가도 뒤돌아보면서 참여자로서의 즐거움을 느낀다. 어서 가서 배고파 돌아오는 식구들의 저녁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깜박 잊고 살아가는 재미가 소록소록 나는 샘터이 이야기를 외면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개구리 바위에 빈다고 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나유. 남양으로 징용간 사람도 있는데.”
“이 사람아! 그런 소리가 어딨어. 그건 악담이야. 험담이라구.”
역시 모산댁이 일침을 놓았다.
개구리 바위에는 만석군을 지낸 추씨와의 사연이 전해오고 있다.
개구리 바위는 추씨와 얽힌 전설을 간직하고 제련소 옆에 서 있는 바위이다. 개구리 바위에서 오 리쯤 떨어진 솔리 추씨가 개구리 바위 때문에 아주 번성하면서 잘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해 봄부터 가뭄이 계속되어 이웃 마을의 우물도 다 마르게 되었다. 그런데 추씨집의 우물만은 마르지 않아 이웃에서 많은 사람이 와서 물을 길어왔다. 한참 물을 긷는데 추씨 주인 남자가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다 길어 가느냐고 아낙네들이 길은 물을 자기 우물에 쏟아 부었다. 아낙네들은 어디를 가서 물을 길어야 할지 난감했다. 분함과 억울함에 분통이 터졌다. 그때 먹구름이 몰리어 소나기를 퍼부으며 번개불이 번쩍했다. 사람들은 다 엎드려 피하면서도 비가 오는 기쁨에 넘쳤다. 그 요란한 번갯불에 추씨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개구리 바위가 두 쪽이 났다. 그 뒤에 추씨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만석군 부자가 하루아침에 무너져갔다.
토지개혁으로 나중에는 몇 푼 안 되는 채권을 받았으나 6․25전쟁이 터져 휴지화되고, 인천 상륙 작전으로 후퇴해 가면서 서천 등기소에 불을 질러 3백 명이 학살될 때에 추 부자와 일본대학을 나온 큰아들 부자가 한꺼번에 학살당하여 하루아침에 만석군의 재산이 날라가 버렸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 먹고 살고 일어서는 집은 삼 년이 지나도 이가 서 말이라고 했다. 머슴은 일어서는 집보다 기울어지는 집에 살아야 한다고 했다. 기울어지는 부자는 살던 품이 있어서 옛날과 같이 살지만, 일어서는 집은 아끼고 검소하게 살아 풍성하지 않아 먹고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추 부자는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하고 갑자기 기둥이 무너지고 집이 무너져 식구들이 환란을 겪게 된 것이다.
“여기 서지요. 역전이 바로 여기지요.”
“여기 괜찮으시겠어요?”
“나 때문에 일부러 돈 것 아니에요.”
“아닙니다. 덕분에 즐거웠어요. 재미있는 얘기도 많이 듣고요.”
“상아다방이 바로 저기거든요. 수고했어요.”
“그럼 금요일에 또 뵙지요.”
강 대표가 다소곳하게 인사를 하고 차에 올랐다. 장항중학교에 근무하면서 서천에 산다고 했다. 이십 리 길이니 출퇴근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하기야 직장은 너무 가까워도 안 되고 너무 멀어도 안 된다. 한 삼사십 분 거리면 가장 좋은 거리이다. 서천에서 장항에 근무하기는 안성맞춤이다. 길산 들을 바라보고 마서면 면사무소 앞을 지나 여우고래를 넘어 감돌면 장항의 다스래들이 보이니 시원하게 달리는 기분이 출근 맛을 더해준다. 지금은 아파트가 많아 화장실이 실내에 있고 처가를 친가보다 더 가까이 지내는 세상이 되고 말아 그 의미가 달라지고 말았지만, 칙간과 처가는 멀리 두어야 한다는 옛말이 직장에도 적용된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구린내가 나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 좋지 않고, 너무 멀리 있으면 소원해지고 불편하다는 것이다. 직장과 가까이 있으면 출퇴근하는 긴장감도 없어지고 직장과 가정의 거리가 유지되기 쉽지 않다. 가다오다가 동료가 들릴 수도 있고 더구나 학교의 경우에는 학생들의 눈에 비쳐 자주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학생이 자꾸 줄어서 걱정이에요. 장항은 인구가 줄고 있거든요.”
그 친구의 말에 목에 무엇이 걸리는 듯했다. 서울은 말할 것 없고 대전이나 전주와 같은 도시와 공단 주변에는 인구가 늘어서 걱정인데 장항을 위시한 서천군은 인구가 감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농촌을 주로 하는 고장은 젊은이는 다 도시로 빠져나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기 어려운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된다. 초등학교가 분교로 전락되고 그나마 분교도 없어지는 판이니 농촌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장항은 농촌을 끼고 있지만 그런대로 항구와 공장이 있으면서도 군산의 그늘에 가리어 인구가 늘지 않는다.
장항은 금강의 문턱으로 백제의 기벌포의 한을 되새기고 있는 항구이다. 1931년 천안에서 144㎞의 장항선이 완결되어 도시로 변모하고 궁기농장(宮岐農場)이 간척사업을 하여 1938년 10월 1일 읍으로 승격하고 국제항으로 50년대 각광을 받았으나 지금 쇄락한 항구로 하구둑에 밀려 군사에 대안을 이루고 있을 뿐인 장항, 장군(長群) 발전 계획에 고군산열도와 개야도를 메꾸어 2010년에는 인구 30만의 중도시가 된다는 안개와 같은 꿈을 안고 금강의 하류를 지키고 있는 장항, 제련소가 있고 한솔제지와 태평양화학, 풍농비료 그리고 농공단지가 있는데도 옛 그대로 잠을 자고 있을 뿐이다. 옛날 항구의 잔교(殘橋)나 제련소로 직행하던 선로가 광석이 들어오지 않아 철로길만 골동품과 같이 남아 있는 장항이 아직도 발전의 그늘에 가려 잠을 자고 있다. 6․25 전쟁 때에 잉여농산물이 들어와 북적대던 선창가에 하구둑에 밀려 그 회수가 작아진 도선(渡船)만이 외롭게 갈매기를 벗하고 있을 뿐이다.
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나는 손을 가볍게 흔들고 발을 옮겼다.
상아다방의 아크릴이 번하게 보였다. 바로 들어가려다가 역전으로 서너 발자국을 옮겼다.
역전은 아주 고적하다. 광장 앞에 대기차들만 서 있다. 서울발 무궁화 열차 도착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차들이 발동을 걸고 있는 것이 도착 시간이 다가온 까닭이다. 서울을 출발하여 천안까지는 쾌속으로 달리다가 천안 밑에 오면 단선(單線)을 거북이 철도가 된다. 상하행선이 곡예를 하듯이 비껴가며 오르고 내리고 한다. 열차의 운행이 여의치 않으면 아침 저녁 두 편이 있는 새마을호가 무궁화호나 통일호가 지나가는 것을 작은 역에서 대기했다가 가는 형편이다. 무궁화호가 통일호를 보내기 위해 역에서 대기했다가 통일호가 통과하고 나서 30초 지난 뒤에 반대 방향으로 출발한다. 속리정에서 목포까지 단선으로 있다가 이제야 복선화한다는 말이고 보면 장항선이 복선화되기란 요원한 일이다. 조치원에서 공주 부여를 지나 홍산을 거쳐 장항에 있는 충남선이 계획되고는 있지만, 그것이 언제 실현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발을 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눈을 돌려봤다.
멀리 제련소의 연기 없는 연돌이 하늘에 떠 있고, 한솔제지 공장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성주골언덕에 서 있는 장항초등학교가 아련이 보이고 새로 지은 붉은 벽돌의 성당이 성스럽게 서 있다. 역전슈퍼나 식당도 옛날 그대로요, 길목신부락에 이르는 골목도 옛날 그대로 조용히 잠들어 있다.
오랜만의 귀향이다. 훌쩍 떠나는 기분을 맛보기가 이렇게도 어려운지 모른다.
특별히 남다르게 하는 일도 없이 보내는 나날이 그렇게 바쁘게 흘러가니 이건 도무지 세월 속에 묻혀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이 얄미울 때도 적지 않다. 까짓 것 남들과 같이 뒹굴며 세류를 타고 살아가면 되는 것을 제딴엔 그래도 하고 싶은 일에 정진하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 가소롭게 보일 것이 뻔하니 예부터 백면서생은 오줌통에 빠져도 건져줄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닌가.
공주에서의 연수 강의를 마친 김에 발길을 장항으로 돌린 것이다. 공주에서 부여를 지나 팔십 리 옛 백제의 영광을 되새기며 일로 장항으로 달려온 것이다.
사실은 공주나 부여에서 옛 역사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도 좋은 일이다. 백제의 숨을 쉬고 있는 무령왕릉과 박물관, 그리고 계룡산 자락의 갑사(甲寺)와 마곡사(麻谷寺)를 보면서 공주에서 하루 머물러도 좋고, 부여에 들러 부소사의 사자루와 백화정 고란사에서 배를 타고 낙화암을 감돌아 수복정을 거쳐 옛 그대로의 정경을 간직한 무량사에 들려서 김시습의 향훈(香薰)을 가슴에 안아도 좋을 것이다.
“교수님! 장항을 가신다구요?”
2시간 연속 강의를 하고 쉬는 시간에 대표가 다가왔다.
“예, 여기 온 김에 고향에 좀 다녀올려구요.”
나는 담뱃불을 끄면서 대표를 바라보았다.
흡연실에는 너덧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서 담소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역시 교육원도 복도 끝에 있는 휴게실을 흡연실로 하고 있었다.
-아니 담배도 피우지 않고 무슨 세상을 안다고, 그것은 실내에 기른 콩나물과 같다고…….
-그래서 담배와 술을 먹지 않은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게 아닌가요.
-그렇게 담배가 해로우면 아예 전매청을 폐쇄하면 될 것이 아닌가. 전매청은 신제품을 개발하고 또 값을 자꾸 올리면서 텔레비전에서는 엄청나게 해로우니 피우지 말라고 야단이니 이건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니…….
-그래서 오기로 이렇게 피우는 게 아닌가요. 자기 건강 자기가 알아서 하는데 이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마치 죄인 취급하고 있으니…….
교사들의 가시 돋친 말들이 자연(紫煙) 속을 난무하고 있다. 교사들이 꿈꾸는 교육의 방향과는 엉뚱하게 벌어져 가는 그 흐름에 이만저만 불만이 아니었다. 알고 실천해도 어려운데 전혀 모르고 소경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진행되는 일련의 교육적 현실에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교사들의 자격 연수이다. 한문 교사들을 국어 부전공 자격을 주기 위한 연수로 여름과 겨울방학을 꼬박 실시하고 있다고 한다. 대개 40전후의 중견 교사들로 남자가 대부분이요 40명 중 여교사가 45명이 있을 정도이다. 일반 교사의 연수 때보다 교실이 꽉 차 있는 중후감을 느끼는 분위기였다.
고향이 장항이요 6 25때에 공주사대에서 청강을 하고 장항농업중학을 나왔다고 하니 교사들이 친근하게 느껴지고 다가오는 것 같았다.
“아니 이게, 누구셔요. 서교수가 아닌가요?”
상아탑의 문을 밀자 주인 마담이 반갑게 맞이했다. 수수한 부잣집 맏며느리와 같은 주인여자의 정겨운 목소리가 고향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이 풋과일과 같이 향긋하게 안겨왔다.
“박 회장은 아직 안 오셨는데요.”
묻지도 않은 말을 언니가 먼저 대답했다.
실은 상아다방에 들어서면서 기섭이가 보이지 않아 의아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눈치 채고 하는 말이었다.
“오겠지요. 이 좁은 데서 어디를 가겠습니까.”
“늦으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연락이 된 거지요.”
“그러믄요. 차나 먼저 주세요.”
“둥굴레차지요.”
마담 언니는 잘도 기억하고 있다. 그전에 몇 번 들를 때마다 둥굴레차를 마신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장사 속은 특수한 머리가 움직인다고 하더니 일 년에 두어 서너 번을 올까 말까하는 사람의 취향을 기억할 정도니 역시 장사는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전문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자기가 관여하고 있는 분야에 대한 전문성과 직업성이 아울러 겸비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고향은 언제나 정답다. 그 누가 무어라고 해도 어머니의 품안이 편안하듯이 안온하고 평온하다. 고향은 탕아가 돌아와도 반갑게 맞이하듯이 언제 아도 옛 향기를 풍겨준다. 정지용의 시 「향수」이 그렇게 사람들이 시로 노래로 좋아하는 것도 바로 정겨운 안식을 좋아하기 때문이리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자동차 정류장에서 기다렸잖아. 공주에서 오다는 사람이 버스를 안 타고 여기에 와 앉아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기섭이 바삐 들어오면서 변명 비슷하게 말했다.
“그렇게 지레 앞서가는 것이 박 회장이 아닌가요.”
서두는 기섭이 얄미운지 마담 언니가 한 마디를 했다.
“자 일어나라구.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이건 장항에 있는 사람은 눈에 띄고 가뭄에 콩 나듯이 오는 서울 사람만 눈에 띄는 모양이지.”
“그래요. 어디 시골 사람 서러워서 살겠어요. 박 회장과 우리는 이렇게 지키고 있는데 훨훨 날아다니다가 풀썩 고개를 내밀고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니.”
마담 언니가 한 수를 더 뜨고 있다. 기섭과 손발이 척척 맞았다.
“숨이나 돌리고.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언니 얼굴도 보고 가야 할 게 아니야. 눈빛은 박 회장에게 가 있는데…….”
“그러세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좋은 거죠. 안 그래요. 서교수님, 박 회장은 입으로 야단이지 실속이 없거든요.”
다시 나온 둥굴레차엔 고향과 친구의 맛이 더하여 실내를 더욱 따스하게 했다. 부모의 손길이 산 위에 있는 탓인지 오래 살던 집인데도 한 구석이 비어 있는 듯했다.
2
“아니 무엇하고 있는 거야. 아직도 꿈 속인가.”
전화기에 울리는 소리가 귓가를 마구 후볐다. 몽롱한 의식 속에 섬광이 난무할 뿐이다.
“누가 또 야단이야. 잠 좀 자게 놓아두라구.”
“잠 좋아하네. 지금 떠나야 한단 말이야. 어서 털구 일어나라구.”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는다. 귀에서 소리가 앵앵거릴 뿐이다. 오리무중을 헤매고 있는데 무슨 말이 귀에 들려올 리가 없다. 몽롱한 기분에 푹 잠 속에 빠지고 싶을 뿐이다.
“차를 보낼 테니 어서 준비하라구.”
기섭의 단호한 목소리에 눈이 번쩍 떠졌다. 눈을 비비고 머리를 쓰다담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머리가 몽롱하고 가슴이 이상해서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도로 벌떡 누으며 정화기에 소리치듯이 말했다.
“건너 뛰면 돼. 잠이나 자구 하자구.”
“기분 난다드니 잘 되었다. 꿈나라에서라도 찾아가겠다 이거야. 아서요, 오늘이 더 중요하다구. 더 소중하단 말야.”
이 친구 제법 훈계조로 조여들고 있다. 내일은 내일이라고 술의 꽃밭 속으로 끌고 가던 기섭이 멀쩡하게 돌진해 오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그 정도 가지고 흩어지면 되느냐고 어깨를 으쓱하면서 몰아치고 있다.
“꿈 속으로 들어가야 돼. 좀 도와 달라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그대로 자리에 쓰러져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포근한 잠 속에서 또 하나의 영토를 가꾸어 가는 것이다. 간밤에 마신 술기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구찌개의 맛은 일품이었다. 누구 말대로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였다. 볼품없는 고기가 이런 맛을 가지고 있다니 놀라울 일이다. 그것은 고기맛이 아니라 고향과 우정이 가미된 애정의 맛인지도 모른다. 아귀찜은 그 매콤한 맛이 술이 입에 짝짝 붙게 한다.
“이 맛은 무정집에서만 맛볼 수 있다구. 다른 데 가 보면 이 맛이 안 나유.”
“다같은 아군데 왜 맛이 다르지.”
“그거야 당연하지. 쓰는 조미료는 비슷하지만 손끝이 다르다구.”
“손끝이 다르다구. 손으로 감치는 맛을 낼 수도 있고, 탁하고 쏘면서 입안에 딱 달라붙는 맛도 낼 수 있는 거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같은 아구에 같은 양념을 쓰는데 왜 맛이 다른지 알 수 없는 일인데.”
나는 선양 소주를 입에 털어 넣으면서 아구찜의 맛을 음미했다. 역시 서울에서 먹던 아구찜과는 다르다. 그것도 무정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맛이다.
무정집은 장항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요, 근동에서 이름난 아구찜집이다. 군산은 물론 익산이나 심지어 대전에서까지 미식가는 찾아온다는 것이다.
“무정집의 아줌마의 손길은 천의 얼굴을 가진 신비의 손이라구. 아줌마의 손이 가는 곳에 진미가 있고 진미가 있는 곳에 술의 맛이 하늘을 올라가고, 하늘을 올라가니 천지가 내 것이 되니 무정집은 이렇게 사람으로 꽉 차 있는 거야.”
기섭은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늘어놓는다.
“아줌마가 기섭의 연인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는 무정집의 선전부장이 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나의 말에 이 친구 사람을 무엇으로 보고 하는 소리야. 나는 어디까지나 미식가로서 하는 말이라구. 이래 뵈도 장항이나 서천 고을에 나만치 혀를 가진 사람이 없다구, 일장 말을 시작하면 그 어느 장소에서나 청중을 사로잡고 마음대로 주무르고, 붓을 들었다면 사람의 심금을 울려 놓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이 기섭을 당할 자가 어디 있겠느냐구, 먹었다 하면 감칠맛 나는 음식을 개발하고 쭉 밀어주니 미식가로서 장원급제할, 그래도 장항이 난 인물이 아니냐고 기염을 토했다.
-이 친구 기자의 멋이 나타나는군. 한때 그 필봉이 가슴을 찌르던 그 기백이 멋과 낭만으로 변하여 지금은 장항의 유지로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연설을 하는 거유. 박 회장의 말에 빠지지 말고 자 선양 한 잔 주어 봐요. 인심이 그게 아닌데…….”
아줌마가 정색을 하고 들어왔다. 손님이 많아 인사가 늦어 죄송하다고 깍듯이 말하고는 기섭에게 화살을 부었다.
“자 이 잔 받아요. 그리고 서박사 한 잔 주어 봐유. 서울 샌님이 고향 산천에 푹 빠지게 아줌마가 눈길을 주라구요.”
기섭이 취기가 오는 모양이다. 객지에 나가 있다가 모처럼 고향에 온 사람을 놓고 마구 떠들어댔다. 취기가 어지간히 돌아 이제 옷을 훨훨 벗은 기섭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소실댁 할머니는 어떠세요. 지금도 기벌포에 나간디면서유. 거기는 무엇하러 나가는지 황혼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대유…….”
“지금도 그러시나유?”
“술이나 들구 멀리서 온 친구의 재미있는 얘기나 듣자구. 어머니의 한을 그 누가 풀 수 있겠어유. 그러다가 세상을 떠나는 거지…….”
기섭이 한숨을 쉬듯이 말문을 돌렸다. 이 좋은 자리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아물어서 딱정이 질 때까지 그대로 놓아두는 수밖에 없다.
실은 솔리댁 할머니만 당한 일이 아니다. 전쟁 중에 가진 고초와 몹쓸 일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리만큼 전쟁은 언제나 참혹하다. 더구나 동족상쟁의 6․25 전쟁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민족의 비극이다. 반세기가 지났어도 아직도 휴전 사태로 세계의 화약고의 하나로 긴장을 더하고 있으니 역사의 흐름이 이상 기후를 이루고 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나 게리 쿠퍼와 잉그리트 버그먼이 열연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인 스페인 내란과 그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상충인 베트남전쟁 등은 다 승패가 가려진 전쟁으로 끝났는데 6․25 전쟁만 휴전 상태가 50년 반세기가 지나고 아직도 일촉즉발(一觸卽發)의 대립을 하고 있으니 연사의 운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애꿎은 장난이다.
“손을 묶어 강물에 내던졌다며유, 붉은 청년들이 그토록 잔인했어유.”
아줌마가 의심쩍은 눈으로 기섭을 바라봤다. 기섭은 선양을 한 잔 쭈욱 마시고 아줌마에게 잔을 넘기고는 그 특유한 억양으로 말했다.
“말 말아유. 서천 등기소 학살을 알지요. 우익의 유지 삼백 명을 등기소에 집어넣고 불을 지른 거예유. 그 뿐인 줄 알아요. 강 건너 옥구에서는 아 글쎄 여자의 젖을 도려서 마을 샘에 집어넣어 젓을 담고 여기 솔리에서는 추 부자 식솔을 돌로 때려죽이고 수복 후에는 역으로 부역자를 죽창으로 찔러 죽여 피로 낭자하구, 베트남 전쟁에서도 베트콩이 한국군을 제일 무서워하는데 베트콩이 있는 마을은 기어코 불사르고 쏘아버리는 거예유. 그건 이 한 민족의 잔인함을 말하는 거야. 수복 후 카페고랑이 기슭에 부역자를 구덩이를 파고 묻어버린 것이나 지금도 이웃 마을끼리 등을 돌리고 사는 한 산의 어느 마을을 보면 그놈의 사상인가 전쟁이 이 나라를 멍들고 깨지게 만들어 아직도 그 상처에 기우뚱거리고 있는 거야.”
기섭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형이 억울하게 당하여 기자가 되어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뛰어다녔던 자기가 밉기까지 했다고 토로하면서 술잔을 기울였다.
“괜한 얘기를 꺼냈나 봐유. 아픈 상처는 건드리지 말라구 했는데. 박 회장님! 이 한 잔 받아유.”
아줌마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기섭에게 선양을 공격을 했다.
“효식이가 밖에 나오지 않는 것도 주 교장의 한 때문이라구.”
기섭은 엉뚱하게 6․25 전쟁 때에 학살된 효식의 아버지 주 교장으로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자 한 잔 들고 50년을 씹어보라구.”
잔을 권하자 기섭은 단숨에 마시고는 바로 잔을 돌렸다.
“술이라면 서교수라구. 청탁불고요 주야불고니 아줌마하고 대작이 될 거야. 암 되고 말고…….”
기섭은 혀가 좀 꼬부라진 목소리로 아줌마의 공격을 나에게 넘기려고 했다.
현충일이 얼마 남지 않아 전쟁의 상흔이 되살아오는 것일까. 세월의 흐름에 따라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서러움이 한꺼번에 분출되는 것일까.
“왜 이렇게 야단이야. 선양이 보약이라도 되는 건가.”
기섭은 멀쩡했다. 간밤에 무정집에서 마신 선양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역시 기자로서 다져진 실력인지도 몰랐다.
“내 동생이라구. 야 인사해라. 서교수 알지. 장항의 영재에다가…….”
젊은이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창수입니다. 형님 이상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다부지게 어깨가 다져진 젊은 친구였다.
“잠깐만 기다려. 누가 나올거야. 이 친구가 늦잠에 들었나. 틀림이 없는 친구인데…….”
기섭이가 누구를 기다리면서 연방 성주산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데 눈이 그렇게 빠지는거야.”
나는 아직도 머리가 띵한데 이 친구는 멀쩡하게 차까지 동원하고 있으니 주야불고의 단계를 넘은 친구다.
“기섭아 웬일로 불러내는 거야. 잠도 못 자게…….”
효식이었다. 뛰어왔는지 숨이 가빠 말을 잇지 못했다.
“야 이 자식아! 밤 잠을 안 자고 무엇 한 거니. 이제 그만 밝혀라. 몸에 해롭다. 해로와…….”
기섭이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농담을 했다.
“야 넌 입 좀 고쳐라. 마개를 하던지 꿰매든지 해야지 거칠어 못 쓰겠다. 어디다 버리든지 장롱 속에 집어넣어야 되겠다.”
효식이도 만만치가 않다. 입심으로 따지자면 효식이도 빠지지 않았다. 다만 기섭이 떠들썩한데 비하여 효식은 조용하면서도 끈덕진 것이 달랐다. 둘이 맞붙으면 기섭이가 뒤로 물러서게 되어 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분거니. 아침부터 사람을 끄집어내고, 창수도 왔구나. 왜 창수를 불러내고?”
“야 잔소리 말구 따라오라구. 어른이 하는 일에 공손하게 따라올 것이지 무슨 놈의 말이 그렇게 많니.”
기섭이 또 효식이를 비위를 건드렸다.
“예 형님! 분부대로 하옵지요. 이렇게 하라는 거지. 야이 이 자식, 꿀이나 처먹어라. 그래야 벙어리가 될 게 아니야.”
두 사람의 설전은 언제나 백중지세였다. 서로 재치있게 받아넘기는 것이 배구공이 그것도 결승전에 이쪽 저쪽으로 왔다갔다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게 넘나들었다.
“도대체 무엇하려고 차까지 동원해 놓고 야단이니 야단이.”
“자식이 급하기는, 그렇다고 바늘 허리에 실을 꿰겠니……. 창수야! 가자.”
“어디야. 소두 도살장을 가는 것을 안다는데 야 넌 친구라고 하면서 죄수와 같이 따라가는 거니…….”
효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악착같이 기섭에게 달라붙었다.
“자식이 꽤나 보채네. 넌 밤마다 이렇게 보채는 거지. 자식이 그러니 저렇게 살이 안 찌지.”
차는 제련소 옆을 지나 솔리쪽으로 달려갔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쪽으로 가서 어디를 가자는 거야. 솔리에 가서 무엇을 하려고?”
나도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솔리를 거쳐 어디를 가는 것도 문제지만 그 쪽으로 길이 막혀 있으니 어떻게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앗다 서교수! 그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을 말하지 말라구. 이 길이 솔리를 지나 합전을 거쳐 충장대를 지나 도듬 마령까지 뚫렸다구.”
“도듬 마령까지?”
“세월을 붙들어 맬 수 없는 것, 열흘 피는 꽃이 없듯이 십 년이 넘는 권세가 없다구.”
기섭은 여유 있게 말하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우선 기벌포부터 가보자구……. 기벌포를 안 보고 장항을 볼 수 없고, 백제를 알 수가 없지…….”
소실댁 할머니의 야윈 얼굴이 스쳐갔다. 기섭은 형에 대한 기억을 감추면서 우리에게 어머니의 한을 같이 하게 하려는지도 모른다.
-바로 여기가 기벌포라구. 간언을 듣지 않고 간신배와 주유에 빠진 의자왕에게 간언한 성충의 한이 서려 있으면서 신라에서 당나라 수군이 패한 곳이기도 하다구.
일명 기벌포라고도 하는 기벌포! 백제의 한을 머금고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하구 장항에 이르러 전망산과 후망산 사이로 빠져 서해의 대해에 스스로를 던진 곳이요, 기벌포는 바로 장항 제련소가 있는 전망산과 섬인 후망산의 포구를 말한다. 금강물은 전망산이 막아주고, 바닷물은 후망산이 막아 주는 포구로 물이 부르면 물이 돌아 손량이라고도 한다. 소정방이 660년 신라군과 연합하여 수군 13만과 김유신의 5만 대군과의 싸움에서 백제를 공략할 때에 기벌포에 막았더라면 한산대첩과 같은 전승을 가져왔을 텐데 의자왕이 간신의 말에 기벌포를 포기하여 당나라군이 백마강으로 올라가 백제를 멸망하게 된 것이다. 의자왕 16년 3월에 왕이 궁녀와 더불어 사자루에서 술 마시고 춤을 추며 놀이를 그치지 않아 충신 좌평 성충이 간곡하게 간언하니 왕이 노하여 성충을 옥에 가두어 놓고 사자루의 주연에 취해 간다. 성충은 죽음을 앞두고 상소하기를,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않을 것이니, 한 말씀 올리고 죽고자 합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변천을 살펴보건데,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용병에는 그 자리를 택해 살펴야 할 것이니, 강의 상류에 처하여 적을 맞이한 후에야 보존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의 수군을 기포(伎浦) 연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이러한 엄해한 곳에 의하여 적을 막은 후에야 가합니다.
라고 했으나 왕이 오히려 성충을 벌하고 대비를 하지 않고 술과 여자에 빠져 백제가 망하게 된 것이다. 바다는 기벌포에서 육로는 탄현(炭峴, 지금의 논산)에서 막으라고 진언했는데 늦게야 고마미지현으로 유비 보낸 성충을 불러오고 계백으로 하여금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에 나아가 싸우게 했으나 대패하여 백제가 망하게 된다. 그 후 신라는 당나라군을 665년 내소성에서 물리치고 676년 11월에 기벌포전투에서 설인귀의 해군을 대파한 승리의 포구이기도 하다. 그 포구가 6․25 전쟁 후 수장의 처형장으로 변하여 고혼이 헤매이는 한의 포구로 변한 것이다.
소실댁 할머니도 인민군이 후퇴할 때에 부역자들에 의해 큰아들이 이곳 기벌포의 고혼이 되어 한과 슬픔을 달래면서 아픔을 삭이는 곳이기도 하다. 근래 자주 이곳에 와 저녁을 바라보고 있어서 기섭은 긴장과 초조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기벌포는 백제의 한과 도공이 일본으로 망명할 때의 한이 서리고 동족의 상쟁에서 한으로 얼룩진 곳이다.
차는 송림 사이로 솔리를 향해 달렸다. 6․25 전쟁으로 가장 피해를 입은 솔리는 아직도 그 후유증이 마을을 어둡게 하고 있다.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서천군을 점령하자 솔리 사람들이 추 부자와 그 식솔이 부역자를 몰아붙여 눈뜨고 볼 수 없는 살상이 양쪽에서 다 벌어져 원한이 지금껏 가시지 않고 있다. 비단 그것은 솔리의 경우만이 아니요, 한산이나 방방곡곡에 남아 있는 전쟁의 비극의 상처들이다.
“아직 충추장대해수욕장은 이른데 화력발전소에 갈 리도 없고, 이건 추리소설도 아니고…….”
효식이가 여전히 궁금한 모양이다.
“자식! 애들같이 성급하지 말라구. 서두는 데 만사가 어긋나는 거여. 세계 제일의 교통사고도 눈 깜짝할 사이로 끝나는 식사도 다 급한 탓이라구.”
차는 충장대를 감돌아 바닷가를 달렸다. 산을 감돌자 훤히 앞이 트이고 서해가 펼쳐졌다. 훤히 앞이 트여 가슴이 시원했다. 원만한 만이 펼쳐 푸른 바닷가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야 이건 별 천지인데. 이런 만이 있다니 서천군의 보밴데.”
나는 양팔을 높이 펼치면서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훤히 펴지는 것 같았다.
“자 저기 소나무집에 들려 탕이나 먹고 가자구.”
기섭의 말소리가 좀 흐려지는 것 같았다. 서교수도 왔으니 도듬마령에 가서 회나 먹자고 하면서도 내심 응어리진 한을 내뿜고 싶은 심정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주 교감의 학살로 두문분출하고 학교에만 나가는 효시을 불러내어 6․25를 앞둔 심정을 서로 달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나무집은 조촐하면서도 고풍스러운 횟집이다. 그 위에 새로 지은 깨끗한 횟집이 여기저기 있으나 바닷가 아주 작게 보이는 집이 마음을 끌었다.
“언니! 여기 알아서 가져와유. 우럭 한 마리도 좋고, 술은 한산 소곡주로 하고…….”
날렵한 젊은 여인이 어서 오세요 인사를 하고 서 있었다. 기섭은 구면인 듯 자유로운 표정이고 효식과 나는 흘깃 그 여인을 훔쳐보고 있었다.
“예쁜데 언제 또 숨겨 놓은 거니, 기섭 네 놈의 재주는 따를 수가 없어. 저런 미인을 어쩌자고 또 이런 구석에 처박아 놓은 거야.”
“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마음 착한 아가씨를 너 같은 놈이 욕되게 해서는 안 돼. 안 되고 말고. 나도 가까이 가지 못하는데, 너 같은 놈은 백 년 걸려도 소용이 없다구.”
“그래서 슬슬 몰아 가느라구 우리를 끌고 왔다 이거지.”
효식은 또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식아 이렇게 좋은 데에 왔으면 고마운 마음으로 먹기나 하면 됐지. 무슨 놈의 말이 그렇게 많은 거니…….”
입가의 미소 뒤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소실댁 할머니의 얼굴이 그 위에 포개졌다.
“자 부쳐내기를 듬뿍 가져와유. 스기다시는 현해탄에 버려야지.”
“아니 이렇게 많이 나오면 회는 주문할 필요가 없지.”
효식과 나는 자꾸 나오는 부쳐나오기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다른 기본적인 것은 물론이요, 산낙지, 해삼, 멍게, 바다지렁이, 농어 대가리, 생율, 심지어 인삼까지 나오니 너무 푸짐하여 한산 소곡주 맛이 기가 막혔다. 거기에 싱싱한 우럭 회가 더하니 이건 진수성찬이요 산해진미에 비길 바 아닌 성찬이었다.
-자 우리의 아픔을 승화하고 소나무집의 발전을 위하여!
건배 제청에 모두 잔을 부딪치며 위하여를 크게 부르고 잔을 비웠다.
-자 언니도 잔을 가지고 와요.
-고마워요. 마시면 안 되는데…….
슬쩍 뒤로 빼면서 잔을 받아 입에 댔다.
-이 친구 귀중한 분이니 잘 모셔야 돼요. 서울에서 날고 있으니…….
기섭의 말이 떨어지자 언니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알고 있는데요.
-뭐 미스 민이 서교수를 안다구?
-그러믄요. 글도 많이 읽었는데요.
-아니 이건 어떻게 된 거야. 또 이건 강력한 라이벌인데…….
-그것 봐. 공 드리는 사람 따로 있고 임자가 따로 있는 거라구.
-자 우리 미스 민의 소나무집의 연정을 위하여 건배!
효식의 건배에 일제히 잔을 부딪치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자 오늘은 중요한 데를 가자. 주 교장선생을 찾아뵙는 거야. 그 엄격하고도 인자한 존안을 뵙고 가자구.
거나한 기분으로 강바람을 마시는데 기섭이 재촉을 했다. 불어오는 강바람에 취기가 더 온 몸에 번져 갔다. 효식은 사연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겨우 성묘 때에 한 번 가는 정도이니 효식도 앞장설 수가 없다.
-가는 거야. 원혼을 위로해 드려야 해. 술은 선양이면 돼. 주 교장선생은 술도 별로 안 하셨는데…….
심상소학교 때에 차렷하고 호령하는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해방 후에 교감을 거쳐 명교장으로 활동하다가 6․25 전 때에 학살당한 주 교장선생의 인품은 지금도 후학의 귀감이 되고 있다.
송내리 산기슭에 있는 묘소는 그렇게 잘 다듬어져 있지는 않았다. 묘분이 그런대로 잘 되어 있고 묘비가 서 있었다.
“자식아 묘 좀 가꾸지 넌 무어하고 있는 거야.”
기섭이 조금은 의아한 눈으로 효식을 힐책했다.
-자 우선 절부터 하고 소주를 따르자.
다같이 큰 절을 하고 무릎을 구부렸다.
-이렇게 저희들이 왔습니다. 원혼을 거두시고 천상에서 고이 잠드소서.
기섭이 선양을 따라서 바치고는 목멘 소리로 고천을 했다.
“효식아! 미안하다. 너의 아픔을 그 누가 알겠니. 우리 어머니의 한을 자식인 나도 어렴풋한데……. 그동안 널 따돌린 듯한 내가 미안하다. 사실은 그게 아닌데. 너도 어려웠을 거다. 서교수는 서울에 있으니 잘 알 리 없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구. 내가 원래 소심해서 사람과 만나기를 좋아하지 않아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 거야.”
“어떻든 주 교장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제사로서 아들은 효식을 불러내서 활발하게 세상살이를 하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
가지고 온 선양을 다 마시고 자리를 일어섰다.
-교장선생님! 원혼을 풀으시고 편안히 쉬십시오.
모두 가볍게 절을 하고 산을 내려왔다.
“형님! 놀라지 마십시오. 소실 할머니…….”
“무어! 할머니가 왜?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창수는 여전히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소실댁 할머니가 기벌포에서 뛰어내렸답니다.”
“뛰어내려? 어디로…….”
기섭은 무슨 말인지 통할 수가 없었다.
“어디는요. 금강이지죠.”
창수의 말에 이쪽을 쳐다보던 기섭은 어서 가자고 창수의 손을 끌고 찻길로 내려갔다.
푸른 산은 여전히 녹색의 들판을 벗하여 하지는 여름을 가꾸고 있었다.
《조선문학》(1999.08)
첫댓글 세상은 흘러 가지만 깊은 상처는 앙금으로 우리의 삶을 가늠하게 됩니다. 6.25전쟁으로 표상되는 이념의 갈등과 상처는 지금도 곳곳에서 흩어져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지 않은가요. 상처를 어떻게 아루만지면서 새로운 전설을 창조해야 할지 모두 우리의 과업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