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기억/이정순
요즈음 유튜브 채널에 수십 가지의 치매예방에 좋다는 운동과 음식을 세세하게 전해주고 있다. 그대로 따라 하면 절대 치매에 걸리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치매환자 수는 늘어만 간다. 꼭 수치를 나열하지 않더라도 주변을 살펴보면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오늘 아침에도 한의학 박사의 채널에 내 시선이 고정되었다. 남의 일이 아니라 곧 나에게 닥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 의지대로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노력은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치매를 생각하면 수십 년 전 일이 빛바랜 사진처럼 지나간다.
"이 손 놔! 이 손 놓지 못 할겨?"
치매 병동 사돈 할머니 방에서 아비규환이 일어나고 있었다. 실례를 하고 냄새나는 몸을 씻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바람에 그 오물을 씻어내려는 간호사와의 한판 전쟁 중이었다. 나는 차마 볼 수 없어 눈을 꼭 감아버렸다.
봄방학을 이용해서 두 아들을 데리고 캐나다로 어머니를 뵈러 갔다. 한국은 봄이라 남쪽에서부터 꽃들이 다투어 핀다는 소식을 듣고 비행기를 탔는데, 캐나다 에드먼톤 공항에 도착하니 로키는 눈으로 덮여 있었다.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은 겨울이라 해봐야 산간 지방으로 가지 않는 이상 겨우내 저렇게 많은 눈이 쌓인 것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몇 년 만에 보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만나는 아이들은 시차에도 불구하고 캐나다란 낯선 땅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어느 정도 여독이 풀리자 언니의 시어머니가 입원해 있는 치매 병원을 방문했던 참이었다.
그 당시 형부는 아직 신혼인 우리 부부에게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외동아들인 형부는 딱히 누구에게 부탁할 만한 곳이 마땅찮았던 것이다. 남편처럼 의지하던 아들을 보내는 어미의 눈에는 서운함과 원망스러움이 교차했다. 그때의 그 애절한 눈동자가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있었다. 몇 년 뒤 형부가 캐나다에서 자리를 잡고 어머니를 초청해서 모셔갔다. 그 후 십여 년 만에 만난 그분의 곱디곱던 얼굴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지나온 세월을 대변해 주었다. 그 아비규환의 전쟁은 진정제를 맞고서야 끝이 났다.
사돈 할머니는 한국 전쟁 때 남편을 전쟁터에 내 주고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전쟁은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뿐만 아니라 한 가정을 쑥대밭처럼 할퀴어 놓았다. 부유했던 형부의 가정은 가장의 부재로 혹독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날은 혼수상태인 사돈 할머니와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다음 날 다시 방문했을 때 사돈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방실방실 웃으며 말했다.
"이녁 어데 갔다 이제 왔소? 내가 을매나 기다린 줄 알아요?"
그 목소리는 새신랑을 맞는 새색시처럼 해맑았다. 얼굴에는 살짝 홍조까지 띠고,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모습이 수많은 생채기를 덮고 버틸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돈 할머니 손을 맞잡고 어루만졌다. 평생을 그리워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극적으로 만난 것처럼 쉼 없이 눈물을 흘리며 내 품에 꼭 안겼다. 나는 잠깐이나마 새신랑이 되어 새색시를 품에 안듯이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손등은 온통 고단한 삶의 꽃인 검버섯이 피어있었다. 가슴속에도 수많은 검버섯이 피어 있었으리라.
내 가슴에 한참 동안 얼굴을 묻고 있던 사돈 할머니는 갑자기 내 손을 뿌리치며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어데서 기집 질하다 이제야 왔노? 아이고 분하고 원통해라!" 하며 목 놓아 우셨다.
수십 년의 기다림이 얼마나 억울했을까? 지금까지도 그분의 가슴속에 전쟁의 생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10년 후, 우리는 캐나다행 이민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날 비보를 받았다. 사돈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우리가 캐나다에 도착하는 날이 장례식이라 바로 행선지를 바꿔 에드몬톤 공항으로 갔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사스캐츠완 이었다. 나를 새신랑으로 아시던 그분을 그냥 보내드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새신랑 새 신부 그대로만 기억하며 해후할 것을 기도하며.
우리 집 단골손님 중, 보행 보조기에 의지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가게로 나들이를 나오는 백인 할머니가 있었다. 가게에 나오는 걸 낙으로 삼는지도 모른다. 내가 단지 한국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도 그 할머니의 애잔한 그리움을 달래드렸을 것이다. 그 할머니는 백인치고는(백인들은 거의 덩치가 크다) 작은 몸매에 곱디고운 얼굴과 해맑은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밀고 다니는 보조 워커에는 소지품을 담을 수 있는 작은 바구니가 있었다. 그 바구니에는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중에는 땟국이 절절 흐르는 조화 장미와 양귀비, 새빨간 퍼피 꽃(poppy)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녀는 장미꽃은 머리에 꽂고, 퍼피 꽃은 가슴에 달았다. 본인 이름이 ‘로즈’라며 가게에 올 때마다 수차례 소개했다. 그녀는 닿고 달아 얼굴조차 알아보기 어려운 장교 계급장이 어깨에 달린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 계급장이 유독 더 많이 닿아있었다. 처음에는 비닐에 곱게 쌌을 그 사진의 비닐조차 너절너절해져 있었다. 그녀는 수줍은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그 사진의 얼굴을 볼에 비비고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는 그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사진의 주인공은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멋졌다. 할머니도 젊었을 적 무척 아름다운 여인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녀 남편이 한국전(Korean War)에서 전사했단다. 품속에서 훈장을 꺼내 보여줄 때는 강한 자부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장미꽃을 준다며 그 땟국이 흐르는 꽃을 굳이 내 머리에 꽂아 주었다. 나는 그녀가 하는 대로 내 머리를 맡겨두었고, 장미꽃을 머리에 꽂은 채 문밖까지 배웅했다. 그녀는 두어 발자국 힘들게 걸음을 떼다가 무언가를 분주하게 찾으며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소리소리 질렀다.
“내 장미꽃을 네년이 훔쳐 갔네. 도둑년아!”(You stole my rose. You thief!)
내 머리에 꽂혀있는 장미꽃을 보더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내 머리채를 잡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하여 그 장미꽃을 뽑아 할머니 손에 꼭 쥐여 주었더니 얼마나 환하게 웃던지, 그 미소는 장미꽃보다 더 예뻤다.
그녀의 얼굴에서 사돈 할머니의 얼굴이 겹쳤다. 두 분은 한국전쟁에서 남편을 떠나보냈다. 수많은 여인은 남편을 혹은 아들을 전쟁터로 내보내고 평생 한을 안고 살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전쟁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은 슬픔보다 더 지독한 병을 앓다가 그분들은 역사 속으로 묻히고 있다. 어쩌면 전쟁 상처를 까마득히 잊게 하는 치매가 오히려 그 여인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았을까?
올해는 한국전 73주년과 해방 78주년을 맞는 해였다. 한국 곳곳에서 광복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에서 많은 젊은이가 희생되고 있다. 그 전쟁에서는 또 다른 미망인을 만들어내고 있다. 북한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헤집으려고 하고 있다.
현대인은 스트레스로 인한 치매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온갖 것을 다 누리고 치매와 싸우는 그들, 온갖 고생과 서러움을 다 당하고 가장 아름다웠던 부분만 기억하고 있는 그분들!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오면서 나의 시곗바늘을 돌려놓고 싶은 부분들이 있다. 그들이 기억하는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장면! 그 장면을 말이다. (원고지 200⨯20.8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