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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작품 입니다.
소왕국(小王國)을 향하는 쌍두마차
흔히 세상은 자기 멋에 산다고 한다. 문제는 자기 멋이 무엇인가에 있다. 아마 자기 멋이란 오랜 몸부림 끝에 설정된 그날의 성취를 위해 전력투구하는 삶의 자세를 말할 것이다.
소설을 쓰는 것도 예외는 아니다. 소설을 통해 그날을 성취하려는 피어린 도정을 겪으며 가능한 한 전력투구하려는 것이 작가의 자세이니 말이다.
소설을 쓰는 것은 중학[6년제] 때부터의 나의 꿈이었다. 해방 후의 일이지만, 소설이 있다면 십리도 단숨에 뛰어가 하루 저녁에 돌파하고, 공부 시간에 노트 사이에 책을 끼고 읽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 번은 화학시간에 암파문고판(岩波文庫版)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다가 단단히 혼난 적이 있다. 잔느가 베니스에 신혼여행을 가는 장면인데, 복자(伏字)에 말을 넣어 보다가 눈에 거슬려 교무실에 불려가서 야단을 맞았다. 그 뒤 그 선생님―봉천대학(奉天大學) 출신―이 산적한 책을 빌려 주어 소설지망의 꿈을 더욱 키우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대망을 품고 대학[서울대 사대]에 들어왔던 기쁨은 2주간이 지난 일요일에 터진 6․25로 해서 산산조각이 났다. 학생증도 받지 못한 채 그만 전란의 틈바구니를 헤매며 소설에 대한 욕구는 안으로 안으로 칩거해 갔다. 공주사대, 대전전시연합대학, 부산 대신동에 있는 판잣집 본교를 찾아 전전하고, 부두체커로 올빼미 생활을 하면서, 붓을 마음 속으로 가다듬었다. 이 시절의 생활을 토대로 장편 움트는 겨울이 나온 것은 소설에 대한 집념의 한 결실이었다.
이렇게 하여 1960년 정한숙 선생의 추천으로 ≪문예≫에 「동굴주변」과 「절박」을 발표하고 이어서 ≪중앙문학≫에 「습지기상」을 ‘구문옥’이란 필명(筆名)으로 발표하여 백철 선생의 <동아일보> 월평 이달의 소설 ‘베스트 텐’에서, 3인칭이면서 주관적인 서술과 작품의 구성이 참신하여 또 하나의 신인을 얻은 것 같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땐 대학원과정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뵙는 가까운 사이였으나 「동굴주변」의 작가가 자기임을 밝히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선생님의 인정을 받았으니, 떳떳하게 나서서 선생님의 편달 속에서 작품활동을 전개하면 길이 훤히 비칠 것을 알면서도 왠지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자 ≪문예≫가 나오지 못하여 모지(母誌)가 없어지는 비운을 맞았다. 길을 찾으면 ≪자유문학≫에 계속해서 발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길도 택하지 못했다.
원래 남에게 구차한 부탁을 하거나 비위를 맞추면서 자기의 일을 성취하는 재주가 없는 터인데, 은사를 통해 발표를 부탁하는 것은 더군다나 안 될 말이다. 다만 무엇인가 새로운 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 무렵 박종화 선생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지금은 도로가 되어 버리고, 원형 그대로 평창동 산기슭에 옮긴, 충신동의 조수루(釣水樓)에서 매주 금요일, 5~6명이 선생님을 모시고 경해에 접하는 영광된 때였다.
지금은 고전시가를 연구하는 시인 김상억[淸州大]과 시조론의 김동준[東國大], 교장인 배현종[祥明女高] 등 벌써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몇 사람과 같이 매주 금요일 저녁 때 가끔 사모님과 자부(子婦, 玄鎭健의 딸)가 정성스럽게 차려오는 술상 가운데에 문학의 강의와 선생님의 해박한 문학이면사(文學裏面史)의 얘기를 듣는, 박종화 선생님의 문학적 향취에 젖는 시간을 가졌다.
또 한편 뒤에 「凍土」를 발표한 박경수 형, 「하모니카의 계절」로 김동리 선생의 찬사를 받은 이문희, 「쑈리킴」의 송병수, 「사회봉」의 남정현, 「수난2대」의 하근찬 그리고 군복을 입은 「철조망」의 강용준 등, 이미 문단에 데뷔한 여러 작가들과 무교동에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박경수, 강용준은 ≪사상계≫에 근무하면서 필봉을 날리기 시작하고, 이문희의 요설체, 하근찬의 민족사를 투시하는 그 작가의식이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박종화 선생님에게 강의를 받으면서 ≪현대문학≫에 다시 추천을 받기로 작정하고 1959년 가을에 「사진」이란 작품을 선생님께 보였다. 얼마 후 ≪현대문학≫에 넘겼다고 말씀하여 뛰는 마음으로 현대문학사에 들러 편집을 맡아보던 오영수 선생을 만났다.
오 선생은 만나자 반가워하면서, 짜임새와 표현은 좋은데 내용이 좀 안이한 듯하니, 다시 한 편을 월탄 선생님에게 뵈면 어떠냐는 말이었다. 천자에 의해 초천이 넘어왔으니 그대로 발표해도 좋으니, 알아서 하라는 얘기였다. 결국 그래서 그 해 겨울에 「판자집 그늘」을 탈고하여 월탄 선생에게 드렸더니, 추천으로 ≪현대문학≫(1962. 8)에 발표되었다.
당시 재직하고 있던 성동공고 뒤 청계천변을 무대로 상이군인의 절규를 그린 작품이다. 월탄 선생이 <소설추천기>에서 ‘사회의 냉대를 받는 상이군인인 주인공의 절규…… 이 기막힌 울부짖음은 창작 이전의 우리의 현실이다. 작자는 이 현실적 괴로운 문제를 독자에게 해결하라고 육박한다. 모두 다 고개를 숙여서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이렇게 해서 「판자집 그늘」을 추천한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이 작품은 사회고발소설이다.
1961년의 겨울에 「황야에 서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 무렵 난 문학비평에도 관심이 있어서 이미 「춘원의 처녀작」(<조선일보>), 「문예비평의 방향」(<대학신문>), 「문체론의 방향」(≪현대문학≫) 등 일련의 글을 발표하고 특히 문체론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리하여 30대 초의 여러 비평가와 만나 문학비평을 말하고 문학의 진로에 대해 말하는 기회가 잦았다.
그러다가 1962년 2월에 소공동에 있는 ‘상의’다방에서 김사목, 김상일, 김양수, 김우정, 김우종, 김윤식, 문덕수, 송영택, 신동한, 신동욱, 신봉수, 원형갑, 윤병로, 이형기, 장백일, 천상병(정창범, 박철희 뒤에 참가) 등 17인의 소장문학비평가가 모여 계간 동인지 ≪에세이스 클럽≫을 내기로 하였고, 매월 발표를 두 번하여 비평문학을 진작시키자고 ≪에세이스 클럽≫의 출범을 보게 되어, 그해 봄부터 월 2회의 세미나를 조선호텔 앞에 있는 공보원에서 개최하여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문학비평가로서의 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러는 사이 현대인의 고민을 그린 「황야에 서서」가 ≪현대문학≫(1962. 10)에 발표되었다. 월탄 선생의 추천으로 또 한번 작가로서 데뷔하게 된 것이다.
그때 ‘올챙이의 변’이라는 천료소감 중에서 ‘이 어두운 광야를 뚫을 방향을 모색하여야겠습니다. 힘껏 두드리고 달려, 빛을 찾자. 그리고 훨훨 푸른 하늘을 비약할 수 있는 우리의 광장을 마련하자’라고 현실을 투시하고 그날을 위한 빛을 찾을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소설과 문학비평을 두 손에 들고 데뷔한 셈이다. 그리하여 소설과 비평의 쌍두마차를 끌고 30여 년 동안 소설집 '산정의 신화' '뒹구는 자화상', '벽에 갇힌 절규', '촛불 결혼식' 등에 수록된 중, 단 100여 편과 장편 '움트는 겨울' '일어서는 산' '문학개론' '한국근대소설연구' '이광수 소설 연구' '근대문학의 형성과 현실인식' '소설 쓰는 법' 등 10여 종의 저서를 가지고 모교인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문학강의를 하면서 창작을 하고 있다.
문학이란 상황 때문에 저서가 중지된 것을 아쉬워하며, 이제부터 창작에 주력을 다하려고 다짐하며 그 열매를 거두려고 한다.
<새교육>, 1984.2.
다독과 습작의 외로운 광야
문단에의 등단! 그것은 꿈에도 그리던 소원이요 거쳐야 할 관문이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도 나오지 않았고 고달플 때이니 우리의 소원은 등단이라고 노래부를 수도 없으니 등단으로 가는 길은 어려운 길목이다. 그 길은 가까운 듯 하면서도 먼 지평의 동경으로 아지랑이와 같이 손에 쉽게 잡혀질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만, 사람이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의 심정으로 다가가면 문단의 문턱도 넘어갈 수 있다.
어차피 인생은 “하루가 아침과 밤 사이를 지나가듯이, 나의 생활도 여행에의 충동과 고향에의 동경 사이를 지나간다.”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과 같이 우리는 여행과 같은 미지의 인생을 앞으로 달려가고, 그 길목에서 뒹굴고 좌절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여 안식의 낙원을 동경하는 것이니, 모험과 충동으로 앞으로 내닫고 고향에의 동경으로 안식을 축적해 가면 등단의 태산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창작에 의한 등단은 독서로 시작되었다. 그때는 중․고등학교가 분리되지 않은 때로, 당시 나는 6년제 장항농업중학교를 다니며 소설을 비롯한 동서 고전의 독서로 문학에 입문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8, 15 해방 후로 책을 구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은 시절이다. 출판도 되지 않고 책을 가진 사람도 별로 없으니 책이 있다면 십리도 멀다 하지 않고 책을 빌려다 하룻밤에 독파를 하고는 또 책을 구해 읽었다.
이광수의 「무정」과 「사랑」, 이기영의 「고향」과 「어머니」, 이태준의 「제2의 운명」과 「복덕방」, 톨스토이의 「부활」과 「인생론」, 김말봉의 「찔레꽃」, 다눈치오의 「죽음의 승리」, 입센의 「인형의집」 토마스 하디의 「테스」, 지드의 「좁은 문」 등 닥치는 대로 읽었다. 외국작품은 일어로 된 신조사(新潮社)의 세계문학전집과 암파문고(巖波文庫)를 주로 읽고, 국내 것은 책이 있다면 어디고 가서 빌려보았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가 장항어업 조합장인 장희태와 아버지가 유식한 김경태의 책을 많이 빌려보았다. 물론 독일어선생이나 화학선생을 비롯한 선생님들의 도움이 많았다.
화학시간에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보다가 신공우 담임선생님에게 되게 혼나 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수도원에서 나온 자누가 라마르 자작과 결혼하여 베니스로 신혼여행을 간 낭만적인 장면에서 ○○으로 되어 있는 복자(伏字)에 접문(接吻-키스)이란 말을 메우다가 교무실에 끌려가 꾸중을 듣는데, 책을 좀 보면 어떠냐고 말하다가 담임선생에게 반항한다고 혼난 경우도 있다. 그 미움을 받지 않으려고 우선 화학을 백 점 맞고 공부를 먼저 하고 책을 보았다. 그 바람에 반에서 일이 등을 하고 서울대 사대에 들어올 수가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는 소설을 그대로 읽지 않았다. 삶의 뒤안길이 조금씩 눈떠지는 재미에 밤새 읽으면서 좋은 말이나 대목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지나치기에 아깝고 또 근사한 표현을 모방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요, 가도 가도 황토길이라고 박목월과 한하운은 노래하고 있지만, 대학 입학으로 문학을 꽃피울 꿈도 6, 25전쟁의 발발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을지로 6가에 있던 사대에는 주로 고전문학을 전공한 고정옥, 정형용, 정학모, 손락범 교수들과 김기림․김억 시인들이 출강을 해서 기대에 부풀었으나, 전쟁의 발발로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고향인 장항에 내려가서 주로 진학서림을 드나들면서 소설을 읽고 다락에서 소설을 쓰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 뒤에 대전, 전주, 광주, 대구, 부산에 전시 연합대학이 생겨서 숨을 돌리기 시작할 때 나는 공주사대(당시는 2년제)에 가서 청강을 하면서 곰나루와 토성산의 정기에 문학의 꿈을 키우면서 부여를 거쳐 공주에 드나들었다. 중편소설 「살아있는 날들」에 나타나 있듯이 공주에서는 무교회파인 유희세 교수와 불도인 이재복 교수가 같이 기거하는 집에 살면서 장덕순․김구용 선생의 강의를 임강빈 시인과 같이 들으면서 창작의 열을 키우고 있었다. 1951년 2학기에 대전 전시 연합대에 가서 강의를 듣다가 1952년 신학기부터 부산 구덕체육관 자리에 천막을 친 가교사에 가서 수업을 받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특단으로 징병 해당자에게는 전시 연합대 학생증이 나와 학생을 보호하고 있었다. 부산 가교사에는 해외문학파인 이하윤 교수가 주로 문학을 강의하고 김형규 교수가 대구에 있는 고대에서 겸임교수로 출강을 했다. 대부분 납치되고 카프계의 문인은 넘어갔으니 중견 문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부산에서의 대학생활은 비참했다. 장편 「움트는 겨울」이나 중편 「새는 날개를 펴고 울지 않는다」에 나타나 있듯이 식료품 하역을 하는 제2부두에 야간 체커로 나가면서 낮에는 강의를 듣는 암울한 시기였다. 「밀다원시대」(김동리)나 「제삼인간형」(안수길), 「곡예사」(황순원) 등에 잘 표출되어 있듯이 월남민으로 부산은 어떻게 굶지 않는가 하는 생존을 위한 처참한 현실이었다. 손창섭이 「공휴일」로 '문단'에 등단하고 밀다원 다방이 문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대구 근처와 마산 근처까지 진주한 북한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패퇴하여 국군이 압록강의 초산(楚山)에 이르고 평양에서 해방시민 대회가 열려 통일의 지평이 열리는 듯 했으나 중공군의 참여로 전선은 오르고 내리는 동족 상잔의 비극!
「흥남철수」(김동리), 「학마을 사람들」(이범선) 등과 같이 전쟁의 상처는 처참했다. 소련 외상 마르크의 제의로 동해의 함정상에서 휴전회담을 하여 1953년 7월 27일 전문 5조 3항의 휴전협정을 하게 된다.
휴전이 되자 그해 10월에 졸업반을 전부 군에 입영시켰으나 사대만은 전후의 교육을 담당시키기 위하여 보류하고, 1954년 3월 28일 지금 한국문예진흥원 자리에서 따로 졸업식을 하고 바로 교직에 나갔다. 명동성당만 뾰족이 남고 전부 폐허가 된 서울, 명동성당 근처의 판잣집 길에서 응향(凝香) 사건으로 월남한 구상 시인과 서정주 시인이 우연히 해후하여 서로 껴안다가 그 만남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혀를 내밀어 설왕설래(舌往舌來)했다는 일화가 탄생되던 시기이다.
그 폐허 속에서 광주 숭일고에 잠시 있다가 지금은 성동기계공고인 신당동의 성동공고 국어과 교사로 부임하여 등단의 꿈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하여 발의 추적, 체험과 손으로 노트를 메우는 열정에 빠져들어 갔다.
꿈은 그걸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만 실현된다. 헤르만 헤세는 「대리석 석재 공장」에서 “인생은 한 마리의 말이다. 경쾌하고도 늠름한 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기수처럼 대담하게 또한 세심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인생은 한 마리의 말을 모는 기수와 같은 것이다. 기수가 어떻게 모느냐에 따라 그 방향이나 달리는 자세가 달라진다.
20대 중반인 당시, 명문장인 ‘기미독립선언서’, 문일평의 ‘예술의 성적’, 이희승의 ‘은근한 끈기’ 등 명문장과 시․소설을 가르치며 문학의 열망을 더해 갔다. 성동공고 뒤는 판잣집이 늘어선 청계천이요, 앞은 지금은 유명한 벼룩시장이 되어 있지만 당시는 고물상이 늘어서고 판잣집이 즐비한 후미진 곳이다. 영미교를 건너가면 최서해의 「탈출기」, 「기아와 살육」에 나온 동묘가 있고, 광교로 가는 청계천은 판잣집이 늘어선 윤락가이기도 했다. 그때는 광교까지만 복개가 되고 청계천은 바닥에서 삼층 목조의 목로주점이 6가까지 늘어서 있었다. 5가 뒤 시장에는 꿀꿀이죽이 유명하고 종로 3가 종묘 주변은 만인의 처가인 종삼이 유가(遊家)를 이루고 있었다. 문인들은 ‘돌체’와 ‘문예회관’이나 ‘마돈나’에 모이고, 신세계 4층의 동화살롱이 최고의 음악감상실이 되고, 다동의 삼희정(三喜亭)은 하루에 소 3마리 소비하는 불고기가 유명하고 호수 그릴과 외교구락부가 최고 그릴이었다. 진고개(충무로)는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낭만’은 종로의 가장 인기 있는 맥주집이었다. ‘양지’ 다방에 들렀다가 바로 맥주집에 모이는데, 조지훈․이동주 등 시인들이 많이 드나들고 자유문학측은 조선일보 옆의 아리수 다방에 진을 쳤다.
나도 명동에도 가끔 나갔으나 주로 양지다방과 낭만에 드나들었다. 55년에 <현대문학>이 창간되고, 56년에 <자유문학>이 창간되어 문단은 전후의 폐허에서 활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소설을 습작하면서 나는 「황혼」, 「정와(井蛙)의 사념」, 「초추의 감각」, 「부지런한 사람들」, 「중추단상」, 「네온싸인」, 「비오는 날에」 등의 수필을 <국도신문>, <자유문학>, <연합신문> 등에 발표하고 있었으나 소설로 나가는 것이 정도로 「사진」을 투고했으나 오영수 선생의 더 분발하라는 단서를 붙이고 돌아왔다.
그 당시 나는 대학원에서 박종화, 이병기, 양주동, 백철 선생들 밑에서 시인 김상억과 동대 교수로 간 김동준, 상명여고의 배현종과 같이 동국대 대학원에서 연찬을 하고 있었다. 창작과 학문을 동시에 해보겠다는 야심에 대학원을 들어간 것이다. 대가들의 경해(謦咳)에 접하여 충신동의 조수루에서 현진건의 외동딸인 며느리가 차려 주는 술상을 놓고 월탄 선생의 향훈을 맞고, 청수동의 이층집 책으로 쌓인 방에서 무애 선생의 그 해박한 강의를 듣고, 가회동 한옥의 난의 향기 속에 가람 선생의 시가를 같이 음미하고, 흑석동의 산중턱 집의 서재에서 백철 선생의 문단사를 들으며 문학적인 감흥을 더해간 것이다.
이 무렵 임수일 작가가 주재한 <문예>에 구문옥(丘文鈺)이란 필명으로 정한숙 선생의 추천으로 「동굴주변」이 발표되어 백철 선생이 <동아일보>에 ‘베스트 텐’에서 그 간결한 문체에 1인칭으로 서사화한 것이 뛰어나 또 하나의 신인이 나온 것 같다고 칭찬을 했으나 그 문옥이 저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해 「절박」을 발표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다시 도전하기로 하고 몇 편을 쓰고 나서 「판자집 그늘」을 박종화 선생의 추천으로 <현대문학>(1961. 8)에 발표했다. 월탄 선생은,
“이것이 자유를 위한 대가란 말인가. 훈장! 그 따위 훈장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당장 일자리도 없지 않은가 이 자식들아. 이 거지같은 새끼들아. 너희들만 포식하고 살아라.” 그는 또 이렇게 부르짖는다. “이유야 좋다 살기 위해서라고. 어느 놈은 자식을 죽이고 어느 년은 살기 위해, 살기 위해서 밤마다 사내를 바꾸고…. 체! 더러운 세상 같으니” 판자집을 쫓겨나는 주인공은 또 이렇게 부르짖는다. “안 된다. 나무 하나 꼼짝 못한다. 이 자식들아, 너희들만 살란 법은 없단 말야.…이 새끼들아 안 돼! 못 뜯는다 말이다. 우리도 살아야 하겠다. 살 권리가 있단 말야. 이 새끼들아. 철거? 이것도 사는 거라고 쫓아내는 거야…. 숫제 나를 철거해서 인간 축에 끼지 못하는 이 병신을 철거해라!”
이 기막힌 울부짖음은 창작 이전의 우리의 현실이다. 작가는 이 현실적 괴로운 문제를 독자에게 해결하라고 육박한다. 모두 고개를 숙여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이렇게 해서 구인환군의 「판자집 그늘」을 추천한다. 구문옥이란 이름으로 4293년 문예에 「동굴주변」, 「절박」을 발표한 일이 있다.
박종화(朴鍾和)
라고 ‘소설천기(小說薦記)’를 쓰고 있다. 나중에는 타지에서 추천받은 것을 1회 추천으로 간주했으나 그때는 그런 제도가 없어서 「광야에 서서」를 발표하여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한 것이다.
‘소설천기’는 다음과 같이 격려를 더하고 있다.
구인환 군의 「판자집 그늘」의 뒤를 이어 「광야에 서서」를 천한다. 문장과 사건 구성이 이만하면 짜임새가 짜여졌다고 볼 수 있다. 구 군은 1회 추천 이후에 여러 편을 꾸준히 작품해 왔다. 그러나 나는 냉혹하도록 질정해 왔다. 너무 지나친 인색이었다. 그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했다. 문학하는 길에 있어 꾸준한 노력은 반짝하다가 슬어지는 섬광보다 좋은 결과를 갖는다. 이제 구군의 추천을 완료시킨다. 앞으로 활보를 내딛기 바란다.
박종화(朴鍾和)
나는 “꾸준한 노력은 반짝하다가 슬어지는 섬광보다 좋은 결과를 갖는다.”라는 월탄 선생의 경종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올챙이의 변’으로 천료소감을 쓴 것이다.
<천료소감>
꼬리가 끊어진다고요. 이제 마음껏 헤엄치고 기웃거리며 참견할 수도 있겠군요. 때로는 폭소(爆笑)하고 파헤치기도 하여 나의 소왕국을 찾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탁류나 진흙탕에 끌리는 것은 올챙이의 습성인지 또는 그 속에 깃든 깊은 삶의 뿌리가 눈에 띄는 탓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인간이 있는 곳이면 어디고 좋습니다. 어디고 우리의 고향이요, 누구든 벗이니까요. 다만 그곳에서 울부짖는 현실이 문제니까요.
이건 광야. 이정표도 없구요. 이대로 미치거나 질식하고 말 것입니다. 빛! 이 광야를 비칠 빛이 그립습니다.
이 어두운 황야(荒野)를 뚫은 방향을 모색하여야겠습니다. 힘껏 두드리고 달려 빛을 찾자. 그리고 푸른 하늘을 훨훨 비상할 수 있는 우리의 광장을 마련하자. 험준한 여로이지만 숙명적으로 택해진 길이니 힘껏 해야지요. 이 출발의 꿈을 지니고 오늘을 땅을 딛고 산다고 로맨티스적이면 리얼리스트라고 호를 운당(雲堂)으로 지어준 모양이다.
이렇게 창작과 학문을 양손에 쥐고 “두 토끼를 쫓는 자는 하나도 못 잡는다.”라는 선인들의 말을 명심하면서 살아와 「산정의 신화」, 「숨쉬는 영정」, 「기벌포의 전설」 등 단편 150편과 「살아있는 날들」, 「프라하의 겨울」, 「모래성의 열쇠」 등 중편 13편, 「움트는 겨울」, 「일어서는 산」, 「동트는 여명」, 「산밑 사람들」 등 장편 8편, 「가을에 온 여인」, 「한 번 사는 세상인데」 등 수필 450여 편, 「한국문학의 전통성」, 「분단문학의 양상」, 「이기영의 두만강」 등 문학비평 140여 편, 그리고 「이광수소설연구」, 「한국근대소설연구」, 「근대작가의 삶과 문학」 등 30여 권의 연구서 등 많은 저서를 창출하게 된 것이다. 문단에서나 학계에서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펜이사, 한국소설가협회 대표위원,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한국현대소설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고 주요섭문학상, 서울시문학상, 월탄문학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 상도 받으면서 40년 가까이 봉직하던 서울대의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문학과 문학교육연구소 소장으로서 창작과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문화탐방을 좋아하여 아프리카를 제외한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남미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을 탐방하여 중편 「프라하의 겨울」 같은 작품이 나오기도 했다.
이제 길이 보이고 문학적 정열을 더 불태울 것 같다. 험준한 산일수록 오르는 맛이 있는 법이다. 바벨탑을 쌓듯이 창조의 불꽃을 태워야 하고 또 태울 것이다. 빛을 찾아 나의 소왕국의 유토피아를 구축하기 위하여 가도 가도 먼 길을 가고 문학적 문화를 고양시켜 문학이 생활화되고 너와 나, 그리고 우리가 어기찬 삶을 누리는 그날을 누려야 할 것이 아닌가.
등단에 출발하듯이 작가는 언제나 출발의 자세로 신부를 맞이하듯이 긴장 속에서 창작에 전력을 다할 때에 자기의 소왕국을 이루고 문학적 광산을 축조하게 될 것이다. 인생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가장 소중한 일에 전력을 다하는 값진 여로이다. 그 여로에서 우리는 문학적 창조의 불길을 태우는 작가를 필두로 하는 문학인이다.
<서울문학>, 2000. 봄
첫댓글 문학 청년으로서 방황하며 창작의 사실은 고난의 길을 걸어온 자그만한 발자취입니다. 그 높은 창작의 절경을 달려온 길, 그 수확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더 하늘을 향하여 꿈을 꾸어야 하지요. 건필들 하세요.
늘 젊음과 희망을 주시는 교수님, 숙독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꼬리글부터 먼저 다는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올챙이 등단기! 하! 너무 재미있지않습니까. 누가 감히 운당님에께 올챙이 등단기라고 하겠습니까. 스스로에게 되물으시는 위트에 한참 웃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