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주정사〉는 1776년 목천현감으로 부임하여 1779년 물러날 때까지 근무하는 동안 중요문건들을 기록한 것으로, 각 면에 내린 유문(諭文)·첩문(帖文)·전령(傳令)·고목(告目)·절목(節目) 등을 모아놓은 것이다. 당시 지방행정의 실상, 특히 저자가 향촌사회의 교화·안정을 위해 시행한 방역소(防役所)·동약(洞約)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목천에서의 정사[木州政事]
향청(鄕廳)에 내린 체문(帖文) 병신년(1776 . 英祖52)
향소(鄕所)의 직임은, 우리 성조(聖朝)께서 나라를 세운 뒤로 경내(境內)의 현능(賢能)한 선비를 정선하여 맡겨서 수령을 도와 경내를 다스리게 한 것인바, 모든 것이 백성을 위한 일이다.
본읍(本邑)이 비록 잔열(殘劣)하고 척박하나, 이미 현감을 두고 또 향소를 설치하였으니,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폐단을 혁파하는 도리를 힘을 다해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을 사랑하는 성상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고 단지 백성을 수탈해서 자신만 살찌우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인바, 그것은 의리상 당연한 일이다.
본읍의 폐정(弊政)이 무엇인지를 관(官)에서는 알지 못하지만, 향소는 본읍의 토인(土人)이니 민폐가 있는 곳 및 관가의 폐정에 대하여 절대로 모를 리가 없다. 그러니 우선 제반 폐정을 논열(論列)해서 본고하고, 또 시급히 각 면(面)의 풍헌(風憲)들에게 지시해서 본면(本面)의 부로들을 모아놓고 해당 면 안의 폐정을 일일이 자세히 물어서 치보(馳報)토록 하되, 본관이 부임하기 전에 성화(星火)같이 달려와서 고하도록 하라.
처음 부임하여 각 면에 유고(諭告)하는 글 병신년
정치의 근본은 전적으로 교화(敎化)를 도타이하고 명분을 바로잡는 데 있는 것이니, 이 두 가지가 행하여진다면 나머지 소소한 절목(節目)들은 저절로 두서가 잡혀 다스리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성왕(聖王)으로부터 국조(國朝)의 전헌(典憲)에 이르기까지 이 두 가지로써 급선무를 삼지 않음이 없었던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당직(當職)이 고을에 도착한 지 아직 열흘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답지(沓至)하는 백성들의 송사가 모두 풍속을 무너뜨리고 명분을 범하는 부류이며, 간간이 음란하고 추악한 말로써 마음을 놀라게 하고 듣기에 해괴한 일들이 많이 끼어 있었으니, 이는 실로 교화가 밝지 않고 명분이 바로잡히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만약 이대로 나간다면 세도(世道)가 더욱 떨어지고 인심이 더욱 야박해질 것이니, 옛날에 이른바 ‘급속도로 금수(禽獸)의 세계에 빠져 들어간다.’는 말에 불행하게도 가깝게 될 것이다. 이것은 관장(官長)된 자의 근심일 뿐만 아니라, 그 사민(士民)된 자 또한 어찌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민망해 하지 않겠는가.
당직(當職)이 잘못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이곳에 와서 지키게 되었으니, 비록 재능도 없고 능력도 없으며 늙고 병들고 어리석고 용렬하나, 성교(聖敎)를 잘 받들어 교화를 펴서 위임하신 성상의 뜻에 부응토록 함에 있어서야 어찌 조금이나마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 방도는 또한 교화를 도타이하고 명분을 바로잡는 것에 불과하다.
듣건대 이곳에는 모두 동계(洞契)가 있다고 하는데, 무릇 한 동네 안에서 선을 표창하고 악을 미워하는 일이 있다면 그 동네의 정사가 닦여져서 교화가 밝아지고 명분이 바르게 되는 것이 이로부터 가능해질 것이다. 이는 실로 옛사람이 행한 향약(鄕約)의 뜻이며, 향리(鄕里)의 비(比)ㆍ여(閭)ㆍ족(族)ㆍ당(黨)의 운영도 이를 통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각 마을의 군자들은 동헌(洞憲)을 잘 다듬어서 실시하되,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실천해야 할 급무(急務)로 삼기 바란다. 만일 이 두 가지에 관계된 죄를 짓고서도 끝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면 관에서도 또한 징계하는 방도가 있을 것이다. 이는 비록 예로부터 관장(官長)된 자가 의례적으로 한 말이지만, 만일 제대로 시행하기만 한다면 그 효과는 금방 나타날 것이다. 이에 대한 각 건의 절목(節目)을 후록(後錄)으로 기록하니, 하임배(下任輩)들로 하여금 각각 한 통씩 베껴 쓰게 하여 각 이(里)의 두목(頭目)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의리가 있는 바를 분명히 깨달아 알게 한다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뒤[後]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하며, 어른과 윗사람을 높이고 공경하며, 이웃과 화목하며, 자손을 가르치며, 각자의 생활을 편안히 여기며,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는다.
이상 6개 조항은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천하에 효유(曉諭)하여, 각 이(里)의 두목으로 하여금 백성들을 모아놓고 날마다 이른 아침에 먼저 이 6개 조항을 강(講)한 다음에 각자 자기 일터로 나가도록 했던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한 시대의 다스림을 이룩하여 천하 후세가 법받을 수 있게 된 까닭이다. 우리 나라는 명 나라를 받들어 섬겨왔었다. 그리하여 중화(中華)가 망한 뒤의 유민(遺民)으로서 모두 그 시절을 생각하고 있으니, 명 나라에서 백성을 교도하고 교화를 일으켰던 조목들을 감히 준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매일 약조(約條)를 읽는 것은 너무 번거로울 듯하므로, 매달 초하루에 각 마을의 상원(上員)이 하임(下任)에게 분부하여 각 이의 두목들로 하여금 모여서 약조를 읽도록 하고, 거듭 다짐하여 깨우쳐서 타이르도록 한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형제간에 화목하지 않는 것, 이웃간에 화목하지 않는 것, 어른이나 윗사람을 능멸하여 범하는 것, 술에 취하여 난동을 부리는 것, 도둑질하거나 간사한 짓을 하는 것.
이상 6개 조항은 모두 풍속과 교화를 위하여 의당 엄히 금하고 통렬히 다스려야 할 일들이다. 매달 초하루에 약조를 강할 때에 위에서 말한 6개조와 더불어 효유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조심하고 경계할 바를 알게 한다면, 반드시 조금이나마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풍교(風敎)가 밝아지지 않고 명분이 바로잡히지 않는 것은 모두 사대부들이 그 권위를 잃어서 그런 것이다. 대개 근래에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여 아랫사람은 기어오르고 윗사람은 제 권위를 지키지 못한다. 그래서 무식한 상한(常漢)들이 사대부에게 대드는가 하면 심지어 능욕하고 욕지거리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은 모두 동헌(洞憲)이 분명하지 않고 풍교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은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관장(官長)이 이 동헌을 다시 정비하여 시행하려고 하는바, 만약 각 동네마다 위반함이 없이 동헌을 준행한다면 변화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동임(洞任)의 무리들이 관의 근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일을 핑계로 무단(武斷)하는 처사가 있다면, 나라에는 일정한 법이 있으니 관이 기필코 다스릴 것이다. 지금 이 일은 동약을 실시하여 풍교가 시행되도록 하려는 것인바, 관에서 응당 속속 염문(廉問)할 것이다. 만일 이를 형식적인 일로 여겨 선을 가리우고 악을 은폐하는 행위가 있다면 동임(洞任) 이하를 엄중히 다스릴 것이니, 서로서로 알려주어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이를 모르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위에서 말한 매달 초하루에 6개 조항의 약조를 읽는 법을 각 이(里)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거행하도록 하여 죄책이 없도록 하라.
길청[作廳]에 유고(諭告)하는 글 병신년
우리 나라의 외방 고을 아전 제도에는 호장(戶長) 이하 육방(六房)의 직임(職任)이 있는데, 대개 조정에서 관서를 설치한 뜻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니, 그 법이 지극히 중하고 그 호칭 또한 영화롭다.
그러나 다만 늠록(廩祿)에 관한 규정이 없어서 제 것을 먹고 입으면서 관문(官門)에 입역(立役)하느라고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기를 겨를도 없이 노상 분주하게 수고해야 하니, 이것은 인정상 감내하기 어려운 바이며 나라의 법제상으로도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다. 비록 얼마간 복호(復戶)의 지급이 있기는 하지만 창해(滄海)의 좁쌀 한 알과 다를 바 없으니, 이것으로 어찌 생계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미 직임을 나누어 맡아서 관장을 보좌하여 민사(民事)를 관장하고 있는 이상 응당 공변되고 염결하며 근실하고 조심하여 위로는 나라에서 설치한 본 뜻을 저버리지 말고 아래로는 스스로 자신의 양심에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창리(倉吏)가 곡식을 빼앗는 행위, 서원(書員)이 결복(結卜)을 농간하여 누락시키는 행위, 아전이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서 백성을 수탈하는 행위, 형리(刑吏)가 관장의 생각을 엿보아 송옥(訟獄)을 도와주거나 억제하는 행위 등 폐단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런 것들은 모든 고을들의 고금에 걸친 폐단이다.
본현은 고을이 탄알이나 바둑알 정도에 불과한 좁은 땅이니 실로 말할 것이 못 되지만, 그렇더라도 백성이 있고 토지가 있는데 그 중에 어찌 농간할 단서가 없겠는가. 본관이 비록 늙고 병들어 총명이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일찍부터 옛사람이 위에 있으면서 관대하고 어질게 했던 도리로써 정치를 해 왔으니, 사소한 것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너무 심하게 추궁하지 않겠다. 만일 이런 것까지 까다롭게 살핀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운신을 할 수 있겠느냐. 이런 뜻을 너희들이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본관이 금하고자 하는 것은 큰 것에 있다. 만일 엄중한 금령을 무시하고 백성을 좀먹는 자가 있다면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내가 작은 것을 살피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서 큰 것을 범하여 스스로 화를 부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세상에서 관리(官吏)를 일컬을 때 반드시 ‘간사하다[奸]’고 하고 ‘교활[猾]하다’고 한다. 이 ‘간활(奸猾)’ 두 글자가 어떠한 악명인데 너희들이 이를 범한단 말인가. 국가의 법제에 원악향리(元惡鄕吏)에 관한 조항이 있는데, 관령(官令)을 조작하고 농간하여 권력을 휘둘러 작폐를 짓는 것, 비밀히 뇌물을 받고 차역(差役)을 불공평하게 하는 것, 세금을 거둘 때에 멋대로 거두고 지나치게 받는 것, 권세에 빌붙어서 본역(本役)을 회피하는 것, 관장의 위엄을 사칭하여 백성을 침탈ㆍ학대하는 것, 민간에 횡행하면서 침탈하거나 사욕을 채우는 것, 광대한 전장(田庄)을 두고 백성들을 부려 농사를 짓는 것 등이 있으니, 이것이 그 대략이다.
지금 위와 같이 조목조목 나열하는 바이니, 너희들은 두려워하며 깨달아서 스스로 수양하는 방도로 삼도록 하라. 그리고 관장이 혹 알지 못하고서 법을 무시한 채 사적인 행위를 하거나 백성들을 어지럽히고 공공(公共)을 해치는 일이 있으면 또한 그 즉시 지적하여 말해줌으로써 보좌하는 책임을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각 면에 동약(洞約)을 결성하도록 유고(諭告)하는 글 정유년
본관은 부임한 뒤 고을의 풍속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근원적으로 다스려야겠다는 생각을 망녕되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화를 도타이하고 명분을 바로잡는 두 가지를 우선으로 삼아 12개 조항을 나열해 보여 동임(洞任)들로 하여금 매달 초하루에 약문(約文)을 읽게 함으로써 선을 권장하고 악을 응징하는 방도로 삼았다.
그런데 영을 내린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그 효과가 보이지 않고 이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들리지 않으며, 사송(詞訟)이 날로 많아지고 민습(民習)이 날로 각박해지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관장으로 있는 자가 덕이 부족하고 재주가 용렬하며 성의가 미덥지 않은 소치이다.
금년은 성명께서 즉위한 원년인데다가 해가 또한 새로이 바뀌었다. 그러니 대소(大小) 백성들은 묵은 습속을 혁파하여 제거하고 유신(維新)의 치화(治化)를 따르기를 바란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백성들에게 권유하는 글에 말하기를,
“인보(隣保)를 같이하는 사람들은 서로 권면하고 경계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하며, 어른과 윗사람을 공경하며, 종족과 인척 간에 화목하며, 이웃의 어려움을 도와주며, 각자 자신의 본분을 따르며, 각자 자신의 본업(本業)을 수행하며, 간사한 짓과 도둑질을 하지 말며, 함부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지 말며, 서로 때리고 싸우지 말며, 서로 시비하고 소송하지 말며, 서로 침탈하지 말며, 몸을 사랑하고 일을 인내하며, 나라의 법을 두려워하여 지키도록 하라. 만일 효자나 순손(順孫), 의부(義夫)와 절부(節婦)가 있거든 즉시 갖추어서 보고토록 하고,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도 또한 신고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아, 사람의 마음이란 고금의 차이가 없으니, 가르치는 방법 또한 어찌 고금이 다르겠는가. 이 가르침을 잘 따르는 자는 선인이 되고, 이를 거스르는 자는 악인이 되는 것이다. 한 생각의 차이로 인해서 선과 악이 갈라지는데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르침을 펴는 도리는 실제로 관대함에 있다. 그래서 전일 수 차례에 걸쳐 염문(廉問)하여 경내의 불효하고 공손하지 않으며 윗사람을 범하고 자기 본분을 망각한 무리들을 대강 알아내었으나, 사전에 거듭하여 주의를 주지 않고 가벼이 먼저 죄를 다스려서 악명을 씌우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기에 우선 이런 행동을 고치도록 하였는데, 만일 그래도 준행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응당 율(律)에 따라 죄를 줄 것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풍속을 이끌고 교화를 일으킴은 반드시 한 마을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주관(周官)》의 다스림도 모두 비(比)ㆍ여(閭)ㆍ족(族)ㆍ당(黨)에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여기에 의거하여 동계(洞契)를 다듬어서 밝히려고 하는데, 이미 깨뜨려진 동은 다시 조직하고 이미 나뉘어진 동은 서로 다시 합쳐서 반드시 모두 1백 호가 차도록 해야 하며, 잗다랗고 소소한 촌락들을 각자 동(洞)이라고 일컫도록 해서는 안 된다. 옛날 수당(隋唐)의 제도는 1백 호를 1사(社)로 하였고, 명 나라의 법은 1백 호를 1리(里)로 하였으니, 대개 1백 호가 차지 않으면 모양이 되지 않아서 법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각 면의 상호(上戶)와 사대부 집에서 이 일을 주관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을 인도하고 이끌어서 서로 단결하여 동계를 결성하고 독법(讀法)하도록 함으로써 향약(鄕約)이 점차 정착되도록 한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동계가 결성된 뒤에는 각 건에 대한 조목을 당연히 별도로 갖추어야 할 것인바, 이는 다시 고을 안의 여러 군자들과 함께 의논하여 조처할 생각이다.
읍내 풍약(風約)에 대하여 각 이(里)의 소임에게 내린 전령(傳令)
본읍은 작은 고을이다.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마는, 이미 구중(九重)의 걱정을 나누어 맡아 백 리의 책임을 전적으로 맡았으니, 백성들의 이로움과 폐해가 무엇인지를 관장으로서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관문(官門)이 여항(閭巷)과 서로 격절(隔絶)하여 민간의 질고(疾苦)를 자세히 알 방법이 없다.
그래서 지금 나무 궤 하나를 관문에 달아놓고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운 말들을 그때마다 써서 넣도록 함으로써 상하간의 정의(情意)가 막히는 일이 없도록 하려 한다. 그러니 너희 백성들은, 이웃의 양반이 이치에 닿지 않게 침책(侵責)하는데도 그 세력이 두려워서 감히 말을 하지 못하거나, 면임(面任)이나 서리(胥吏)들이 제멋대로 갉아먹고 해를 끼쳐도 그 권력이 두려워서 감히 말을 못하거나, 또는 간사한 소인배들이 같은 고장에 살면서 술에 취해 싸움을 하고 즐겨 나쁜 짓을 해도 그 행패가 두려워서 말을 못하는 등의 일이 있으면, 너희들이 시장에 왕래하거나 환자(還子)를 바치러 드나들 때에 다른 사람이 모르게 글을 써서 궤에 집어넣도록 하라. 그리고 또 혹시 관의 행정이 불편한데도 감히 말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거든 또한 그 불편한 점들을 적어서 통에 집어넣도록 하라. 그리하여 아랫사람들의 생각이 위에 통하도록 하는 것이 본관의 소망이다. 그러니 다음 장(場)부터 어떤 소회가 있거든 일일이 써가지고 오도록 하라.
방역소(防役所) 창설에 관한 전령(傳令)
본관이 도임한 지 이미 몇 달이 되었다. 매양 조금이나마 백성들을 구제할 방책을 생각하지만, 관의 힘이 잔열하고 척박하여 실로 손을 쓸 길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은 마침 호적(戶籍)을 성책(成冊)하는 해이다. 그래서 그 서사(書寫) 일절(一節)을 관에서 담당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마련된 수조(收祖)가 거의 백 석이고 또 별비조(別備租)가 거의 50석이나 된다. 만일 때를 기다려서 판다면 2백 냥의 돈은 넉넉히 될 것이니, 이 돈을 8개 면에 나누어 준다면 1개 면당 25냥씩 돌아갈 것이다. 이를 각 동(洞)이 분장(分掌)하여 장리(長利)로 실호(實戶)를 골라 나누어주어 봄에 내주었다가 가을에 받아들인다면 3년 후에는 80냥이 될 것이다. 이것으로 본전을 삼는다면 그 이듬해에 받아들일 이자가 40냥이 될 것이니, 8개 면을 합치면 3백 20냥이 된다. 그 뒤로는 신구 수령이 교체할 때의 쇄마전(刷馬錢)을 모두 이것으로 충당할 것이며, 신구 수령의 교체가 반드시 해마다 있는 것도 아니니 매년 받아들이는 이자를 각 동에 저축하도록 한다. 그리고는 국가가 불행하거나 관장이 불행한 일이 있을 경우에 백성들이 부담해야 할 조부(助賻)와 백성들을 위한 방역(防役)의 일체를 모두 여기에서 판출(辦出)하도록 하고, 그 이름을 방역전(防役錢)이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써 준행할 제도로 만들고자 하는데, 다만 민간에서 편리하게 여길지를 모르겠다. 만약 해마다 이자를 늘리는 것을 곤란하게 여긴다면 이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다. 각 면이 모두 3, 4백 호가 되는데 3, 4백 호 중에 80냥의 본전을 선처할 길이 어찌 없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큰 일을 어정쩡한 채로 시행할 수 없다. 그래서 먼저 이처럼 고시(告示)하는 것이니, 그대 백성들은 서로 상의하여 편리함과 불편함에 대해 각자 논보(論報)하도록 하라. 만일 민심이 원하지 않는다면 억지로 하지는 않을테니, 이런 뜻을 각 마을의 대소(大小) 백성들에게 알려서 한 사람도 이를 모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소년 이인갑(李仁甲)의 효행을 논보(論報)하는 서장(書狀)
본현(本縣)의 남면(南面) 우산리(雨山里)에 사는 사인(士人) 이윤걸(李允傑)의 아들인 소년 인갑(仁甲)이 효행이 뛰어나다 하여 이번 1월 11일에 본동(本洞)의 존위(尊位)들이 논보하였고, 다시 13일에는 본면의 면임(面任)이 논보하였고, 또 16일에는 본면의 백성 50여 명이 등장(等狀)하여 내고(來告)하였으며, 또 20일에는 경내의 사림(士林) 김한민(金漢民) 등 127인이 연명으로 정서(呈書)하였습니다. 어찌 완악하고 못되어 송사를 좋아하는 고장에서 이처럼 뛰어난 행실이 있으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일신(一新)되고 고장의 풍속이 고무되었으니, 그 가상함을 어찌 말로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전후의 정문(呈文)을 살펴보면,
“인갑(仁甲)은 가난한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굶주림과 가난에 쪼들려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여, 나이가 18세인데도 10여 세의 어린이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품이 단아하고 깨끗하여 평소에 하루종일 글을 읽으면서 또래들과 어울려 놀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어린 아이 때부터 천성적으로 부모를 사랑하였으므로 온 동네가 효성스러운 아이라고 지목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 경씨(慶氏)는 바로 효자로서 부름을 받은 선비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지난 겨울부터 담병(痰病)이 심해져서 몇 달 동안 위독한 상태에 있으면서 몇 차례나 사경을 헤매었는데, 인갑은 밤낮으로 간호하며 죽 등을 직접 쑤어서 올렸습니다. 눈이 쌓인 몹시 추운 겨울에 밤이 새도록 잠을 자지 않고서 한밤중이면 밖에 나가서 얼음물에 목욕하고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하늘에 빌기를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달 3일에 경씨의 병이 악화되어 운명하였는데, 인갑은 비통하게 울면서 손발을 주무르고 자신의 침을 어머니 입 속에 흘려 넣었으나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입가로 흘러나왔습니다. 옆 사람이 안아서 자리 구석으로 옮겨 놓고는 바야흐로 수시(收屍)를 하려고 하는데 인갑이 벽을 향해 칼을 뽑아서 왼손의 손가락을 잘라서 줄줄 흐르는 피를 어머니의 입속에 흘려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시체에 혈기가 차츰 돌더니 곧이어 회생하여 마침내 완전히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 어찌 세상에서 보기 힘든 희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부디 낱낱이 영문(營門)에 보고하여 나라에 전문(轉聞)해서 정려(旌閭)를 내려주도록 하여 주소서…….”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뛰어난 행실을 일각이라도 덮어 두어서는 안 되겠기에 감히 이처럼 낱낱이 들어서 보고하는 바입니다.
근래에 효열(孝烈)로 정문(旌門)한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더러 허실(虛實)이 서로 가리워서 진위(眞僞)를 분간할 수 없는 일이 있기 때문에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은 경우가 간간이 있었으니, 이것은 형세상 실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인갑의 일로 말하면 명명백백하여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세상에 더러 손가락을 자르고 다리살을 베는 사례가 있지만, 이미 끊어진 목숨을 다시 소생시켜 완전히 살아나게 한 자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순수한 효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않고서야 어찌 이럴 수 있었겠습니까. 사또께서는 위와 같은 뛰어난 행실을 참작하여 헤아려 보신 후에 속히 나라에 보고하여 정표의 은전이 내려지게 함으로써 한 세상의 사민(士民)들로 하여금 보고 감동하여 흥기할 바가 있도록 하소서…….
각 면의 도윤(都尹)과 예리(禮吏)에 대한 고목(告目)
안전주(案前主)는 분부하노라. 나라에서 관아를 설치하여 직책을 분담시킨 뜻은 큰 것으로써 작은 것을 통솔하고 작은 것이 큰 것에 통솔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관(周官)》의 법에 비(比)ㆍ여(閭)ㆍ족(族)ㆍ당(黨)의 제도를 두고 향사(鄕師)와 향대부(鄕大夫)를 설치하여 이들을 통솔했던 것이다. 대개 한 사람의 총명은 두루 미칠 수 없고 민서(民庶)의 사무는 지극히 번잡하기 때문에 그 제도가 반드시 가깝고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만 그 큰 것이 문란한 데에 이르지 않는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본읍(本邑)은 탄알이나 바둑알같이 작은 땅에 불과하니 다스리는 일에 대하여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민호(民戶)가 많고 전결(田結)의 수도 거의 4천이나 되니, 또한 작다고 하여 소홀히 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지금 국조(國朝)의 구제(舊制)에 따라 각 면에 도집강(都執綱) 한 사람씩을 두어서 면에서 모든 일들을 관장토록 하는바, 첫번째는 교화를 도타이하고 풍속을 바로잡도록 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관사(官事)를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화를 도타이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은 본래부터 한 면에서 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이지만, 관사를 처리하는 문제는 관임(官任)이 아닐 경우에는 거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사대부의 신분으로서 관령(官令)을 받들어 행하도록 하는 것이 또한 고을 수령이 사대부를 예대(禮待)하는 도리가 아니겠지만, 관사 가운데 백성들에게 불편한 점이 있는 것을 각 동의 부존위(副尊位)로 하여금 조목조목 관가에 보고하고 그 편부(便否)를 논품(論禀)하게 해서 시행하는 것일 뿐이니, 실로 혐의할 것이 없다.
사대부가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자라서 시행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발신(拔身)하여 조정에 나가서 세상을 구제하는 계책을 시험하지 못하더라도 또한 내가 배운 것을 얼마간 시험해 볼 수는 있는 것이다. 부디 여러 군자들은 이것을 혐의쩍어하지 말고 면내의 일들을 검찰함으로써 백성들을 사랑하고 돌보아 주려는 성조(聖朝)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않기 바란다. 그렇다면 매우 다행한 일일 것이다…….
방역소(防役所)의 절목(節目) 정유년
국제(國制)에, 수령이 교체되어 맞이하고 전송할 때의 쇄마전(刷馬錢)을 백성들의 전결(田結)에서 부담시켜 거두기 때문에 그 폐단이 매우 많다. 그래서 여러 고을들이 고마청(雇馬廳)을 설치했는데, 당초의 본전(本錢)은 역시 민결(民結)에서 나온 것으로, 말을 사서 고마청을 설치하여 맞이하고 전송하는 방편을 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몇 년도 채 안 되어 말이 점차 줄어들고 다시 충당하기도 어려워서, 이 때문에 폐지하고 다시 민결에서 거두어 들이는 것이 열에 여덟, 아홉인 실정이다. 그렇다면 고마청의 설치가 비록 한때 급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영구히 준행할 방도가 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지금 보건대, 본읍에는 고마청이 설치된 적도 없어서 수령이 교체될 때에 매번 민결에서 수납해 왔으니, 소요가 일어날 단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본관이 새로 부임한 초기에 민폐를 구제하고자 하였지만 폐단을 구제하려면 반드시 재물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어서 이런 작은 고을로서는 다시 어떻게 조처할 길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에 마침 호적 정리를 하는 식년(式年)을 만났는데, 이른바 서사조(書寫租)가 8개 면을 합하면 거의 백 석이 되고, 또 별도로 마련하여 얻은 쌀이 3백여 두가 된다. 이것을 밑천으로 삼아서 수령 교체시의 비용에 충당하고자 하는바, 이름을 방역전(防役錢)이라 하고, 이와 관련한 조목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1. 서사조(書寫租)는 백 석이지만 그 중 8석은 관가에서 서사(書寫)할 때의 양비(粮費)로 쓰이니 실제로는 90여 석이 된다. 여기에다 다시 스스로 마련한 쌀 3백여 두를 합쳐서 봄이 되면 내어다 팔아서 2백 냥을 만든다.
1. 2백 냥을 마련한 뒤 8개 면의 각 동에 나누어 준다. 동이 모두 40개이므로 매 동당 5냥씩 분장(分掌)시키고 이름을 방역전이라 한다. 그리고 이를 장리(長利)로 실호(實戶)에 나누어주었다가 가을에 가서 받아들이되, 각 동의 상존위(上尊位) 및 여러 소임(所任)들이 맡아서 내어 주고 받아들인다.
1. 지금 이 방역소(防役所)를 관가에 설치하고, 향소(鄕所)의 아전들로 하여금 맡아서 관리하게 하고자 하나, 만일 관가에 설치한다면 그 수가 방대하여 거두고 내는 때에 반드시 한 가지 폐단이 생길 것이다. 또 관리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게 된다면 누가 이를 막겠는가. 그래서 관가에 설치하지 않고 각 면과 각 동에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니 대소 백성들은 이런 뜻을 부디 깊이 체득하여 오래도록 시행할 수 있게 해 주기 바란다.
1. 본읍의 신구(新舊) 쇄마가(刷馬價)를 합치면 3백여 냥이 된다. 그런데 지금 본전이 2백 냥이므로, 이를 매년 이자로 불리면 3년 후에는 670여 냥이 된다. 이것으로 본전을 삼는다면 매년 이자가 3백여 냥은 족히 될 것이어서, 그 뒤로는 맞이하고 전송하는 비용을 충당할 수 있을 것이니, 이로써 수용(收用)하면 될 것이다.
1. 본읍은 수령의 임기가 6년이므로 교체되는 일이 잦지 않다. 따라서 뜻밖의 일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전(利錢) 3백여 냥은 해마다 지출되는 것이 아니니, 본동에 저축해 두고서 민간의 일체 역사(役事)를 이 돈으로 방역(防役)하도록 한다.
1. 이 법을 설행한 뒤에는 각 면에 저축되는 돈이 또한 많아질 것이니, 관가에서 혹 추용(推用)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에 손댈 수 없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등장(等狀)하여 침용(侵用)하지 못하도록 한다.
1. 이 돈이 이미 동(洞)의 물건이 되고 나면 동네의 상계(上契) 및 소임들이 이를 침용하는 경우가 필시 많을 것이니, 이럴 경우 완의(完議)를 통해 논벌(論罰)해서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다.
1. 이 돈은 그 근본이 민간에서 나온 것이니 민간에 맡겨서 거두고 내도록 하는 것이 옳다. 혹시라도 관리들이 관장을 종용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체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민원을 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방역소의 추후(追後) 절목
1. 이 돈은 정유년(1777) 봄에 나누어 주었다가 경자년(1780) 가을에 받아들인 뒤에는 쓸 수 있다. 일이란 것이 빨리 이룰수록 좋을 뿐만 아니라 민심은 오래 되면 느슨해지는 것이다. 무술년(1778) 봄에 본읍의 3천여 호에서 호당 1전씩 3백 냥을 거두고 가을에 가서 받아들이면 전일의 급리전(給利錢)과 합쳐서 딱 9백 냥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 뒤로는 6백 냥은 본전으로 하여 이자를 주고, 3백 냥은 유재전(留財錢)으로 하여 용도에 대비한다.
1. 각 동에 있는 본전을 거두고 내어 이자를 불려서 쓰되, 그 원정일(元定日)은 11월 보름날로 정한다.
1. 돈을 나누어주는 규정은, 굳이 균등하게 나눌 필요는 없고 부실(富實)한 가호(家戶)를 택하여서 준다. 불행하게도 도망하여 징수할 곳이 없는 경우에는 그 친족에게서 징수하고, 친족이 없으면 이(里)나 동(洞)에서 징수한다. 원정일에 반드시 납부하도록 하되, 위약(違約)하는 자는 배로 징수한다.
1. 돈을 주는 규례는 한 냥씩 나누어주는 것을 넘지 않는다.
1. 각 이의 백성으로서 동을 이루지 못하여 통괄하는 곳이 없는 자들은, 부근의 동에 분속시켜서 규례에 따라 거두고 낸다.
1. 이 돈은 사채(私債)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사고가 있다고 핑계대어 받기 어려운 자가 있으면, 관에 알려서 면임(面任)으로 하여금 징수해 주게 한다.
1. 매년 추회(秋會)를 마친 후에 각 동에서는 나누어주고 받아들인 문서 한 통을 면유사(面有司)에게 바쳐서 증빙 자료로 삼는다.
1. 이 법이 완정(完定)된 뒤에 어떤 괴론(怪論)을 일으켜서 이를 거부하거나 훼방을 놓은 자가 있다면, 그 동에서 면유사에게 고발하여 각별히 죄를 다스린다. 그래도 순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관에 알려서 엄중히 치죄한다.
1. 추회(秋會)를 열어 강신(講信)할 때에는 반드시 약조(約條)를 읽어서 권면하고 징계한다.
1. 경내 8개 면이 모두 40개 동이니, 각 동은 15냥을 본전으로 해서 이자돈을 주고, 7냥 5전을 동궤(洞櫃)에 보관해 두어 용도에 대비한다. 가을이 되어 받아들인 뒤 신리전(新利錢)이 나가게 되면 유재전(留財錢)은 의논하여 처리한다.
1. 한 해 동안 불행하게도 수령의 교체가 잦거나 부득이하게 대동(大同)의 역사가 있어서 유재전으로 부족할 경우에는 전결(田結)이나 인호(人戶)에 대해 상의하여 거두어서 용도에 보충하며, 본전 15냥은 손대지 않는다.
1.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가을에 받아들이기 전에 방역(防役)할 일이 있으면 장리(長利)로는 받을 수 없으니, 매달 5푼 이자로 받아야 된다.” 하는데, 이 말이 그럴 듯하다. 그러나 가을에 받아들이기 전에 함부로 손을 댄다면 반드시 뒷 폐단이 있을 것이다. 약법(約法)이 이미 정해진 다음에는 변동할 수 없다. 설사 가을에 받아들이기 전에 방역할 일이 있는데 유재전은 이미 바닥이 났다 하더라도, 위에서 말한 것처럼 거두어서 용도에 보탤 일이요, 절대로 가을의 것을 당겨 써서는 안 된다.
1. 돈은 유한하고 역(役)은 무수하니, 역사가 있을 때마다 방역한다면 말류(末流)의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의당 방역할 역사의 종류를 획정(畫定)해서 백성들의 생각이 정해지도록 해야 한다. 소소한 각종 역사로서 고을 전체의 대동의 역사가 아닐 경우에는 가벼이 허락하여 백성들의 요행심을 열어 주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1. 의당 방역해야 할 역사는, 신구 수령이 교체할 때의 쇄마전(刷馬錢), 국가에 불행한 일이 있을 때의 부조전(扶助錢), 관가에 불행한 일이 있을 때의 민부전(民賻錢), 국마(國馬)가 죽거나 달아났을 때의 수렴전(收斂錢)이다. 그리고 진하(陳賀) 때의 활치(活雉) 세 마리, 감사가 갈리어 도계(到界)할 때에 바치는 생장(生獐) 한 마리 따위는 모두 연호(煙戶)가 나가서 잡아야 하는 것이므로, 그때마다 헤아려 정해서 20냥이나 30냥으로 하되 많더라도 이 숫자를 넘지 않을 것이며, 정채(情債)도 함께 할 일이다. 이 다섯 가지 부담 이외에는 절대로 허급(許給)하지 않는다.
1. 도유사(都有司)가 사는 마을에는 따로 사환(使喚) 두 사람을 두고, 면유사(面有司)가 사는 마을에도 각각 한 사람씩 두어서 이를 맡아하도록 하되, 사노(私奴) 중에서 부지런하고 재간 있는 자를 골라서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고 특별히 정해서 쓴다.
1. 대동의 역사를 당하여 관가에서 구례(舊例)에 따라 전령(傳令)하여 도유사에게 알려주기만 하면, 도유사가 각 면의 존위(尊位)에게 통고한다. 그리하여 각 면별로 거두어 면유사의 집에 모으게 하고, 각 동의 신실한 하소임(下所任)을 시켜서 문서를 갖추어 관에 바치도록 한다.
1. 이 돈은 매해의 유재전(留財錢)이 3백 냥인데, 다행히 그 해에 방역할 일이 없을 경우에는 이 돈을 본전(本錢)으로 삼아서 각 동에서 따로 관리하여 이자를 놓으면 150냥이 될 것이다. 이로써 인부미(人夫米)의 용도에 대용하면 참으로 편리하고 좋겠으니, 잘 의논해서 할 일이다.
1. 이 법이 이미 정해져서 각 동이 분장하게 되면 동계(洞契) 또한 완전히 결성되어 필시 전일처럼 폐지되기도 하고 체결되기도 하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동계가 완결되면 동약(洞約)을 통해서 권면하고 징계하는 도리가 없을 수 없다.
1. 동약의 절목(節目)은 특별히 시행하기 쉬운 것을 들어서 아래에 대략 갖추어 놓음으로써 기필코 시행될 수 있도록 한다.
1. 선비가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자라서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조정에 나가서 시행하지는 못하더라도 집에서 행하고 마을에서 행한다면 또한 그 효과인 것이다. 만일 방역(防役)이나 동약(洞約)의 법이 폐지되지 않고 계속 시행된다면 민력(民力)이 신장되고 민속(民俗)이 착해질 것이니, 어찌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여기에서 면존위(面尊位)란 칭호는 사우(士友)들이 함께 추대한 데서 나와 본래부터 관가에서 간여한 것이 아니니 조금도 혐의쩍어할 것이 없다.
1. 동약의 조항들은 모두 선을 실천하고 악을 제거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런데 명색이 상계(上契)이면서 소행이 착하지 못하거나 이를 빙자하여 무단(武斷)의 기이한 술수를 부리는 자가 있다면, 여러 사람들이 서로 지적하고 질책하여 소민(小民)들의 구실거리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들으니 전에 서면(西面)의 이씨(李氏) 성을 가진 자는 사림(士林)의 수치였다고 하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1. 이번 무술년 겨울에 6백 냥의 본전을 이미 나누어주었는데, 3백 냥의 이자는 혹시 미수(未收)가 있더라도 당초의 생각으로는 남겨두어서 용도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대부분 나누어 주었다고 하니 가을에 거두어들이면 1,350냥이 된다. 그렇게 되면 1,000냥을 본전으로 하고 350냥을 유재전(留財錢)으로 하면 된다. 그러면 40개 동의 본전은 각 동마다 25냥이고 이자는 12냥 2전 5푼이다. 경자년 가을에 받아들이면 1,500냥이 되니, 이 뒤로는 매양 1,000냥을 본전으로 하고 500냥을 남겨두면 쓰기에 여유가 있을 것이다. 제공(諸公)들이 상의하여 처리할 일이다.
1. 이 돈은 백성의 것이니 비록 탐욕스러운 관장이라 하더라도 생짜로 백성의 재물을 빼앗을 리는 필시 없을 것이다. 다만 각 동의 상하의 계원(契員)들이 끝까지 신중을 기하지 못하여서 많이 끌어다 쓰고서 제때에 갚지 못한다면 필시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부실(富實)한 집을 골라서 한 집에 한 냥씩만 주고, 상계(上契)와 당시의 소임(所任)은 절대로 이 돈을 써서는 안 되며, 이것을 범한 자는 면존위(面尊位)가 적발하여 벌을 준다.
ⓒ 한국고전번역원 | 홍승균 (역) |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