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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법기사에서는 화두를 드는 것과 같은 유형(類型)의 수행을 ‘의심법(疑心法) 수행’이라고 하는데, 이는 반드시 숙면일여(熟眠一如) 검증을 통과한 제자에게 눈 밝은 스승이 주체와 관련된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게 되는 수행이다. 제자 수행자는 스승의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하여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하고 궁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산냐가 오온 중의 하나로서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아니라고 누누히 가르치셨다. 그래서 부처님의 수행 체계를 따르는 제자들 중에서도 오온이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고 나 자신도 아니라면 ‘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나’ 혹은 ‘나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것을 ‘산냐’라고 명칭하시고, 처음부터 ‘산냐’를 ‘내’가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대체 나는 무엇일까? 지금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산냐라고 하시고, 가르침의 출발에서부터 산냐는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아니라고 하시니, 그렇다면 지금의 나에게는 무엇이 나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 전략 -
그러자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물질은 무상하고 감수는 무상하고 산냐는 무상하고 상카라는 무상하고 인식은 무상합니다. 물질은 내가 아니고, 감수는 내가 아니고 산냐는 내가 아니고 상카라는 내가 아니고 인식은 내가 아닙니다. 모든 유위의 것들은 무상이고 모든 법들은 내가 아닙니다. 모든 유위의 것들은 무상이고 모든 법들은 내가 아닙니다'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모든 유위의 것들이 끊어짐, 모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탐욕의 사라짐, 소멸,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고 청정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확신하지 못한다. 오히려 산만함에 기인한 집착이 생겨서 나의 마음은 ‘그런데 도대체 누가 나의 자아인가?’라는 것으로 다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다. 그러나 법은 본 사람에게는 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누가 나로 하여금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것인가?’라고.
그러자 나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스승께서 칭찬하셨고 지혜로운 동료 비구들이 존중한다. 지금 아난다 존자는 꼬삼비에서 고시따 숲에 머물고 있다. 아난다 존자는 나로 하여금 법을 볼 수 있도록 나에게 법을 설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난다 존자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다. 나는 아난다 존자에게 가야겠다.’라고.
아난다 존자께서는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아난다 존자께서는 제가 법을 볼 수 있도록 제게 가르침을 설해 주십시오.”
“도반 찬나여, 나는 찬나 존자의 말을 듣고 이치에 맞는 의문과 질문 때문에 기쁩니다. 그리고 찬나 존자는 이제 스스로를 활짝 열었고 자신의 의심을 부수었습니다. 도반 찬나여,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대는 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찬나 존자에게는 ‘내가 법을 알 수 있다고 하는구나!’라는 커다란 희열과 환희가 생겼다.
“도반 찬나여, 나는 세존의 면전에서 깟짜나곳따 비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그것을 받아 지녔습니다.
‘깟짜야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다. 그것은 있다는 관념과 없다는 관념이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한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세상은 대부분 집착과 분별과 갈애에 묶여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집착과 분별과 갈애에 속박되지 않기 때문에 ‘나의 자아’라고 가까이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속박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괴로움이 일어날 뿐이고, 단지 괴로움이 소멸할 뿐이다.’라는데 대해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그의 지혜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 깟짜야나여, 이렇게 해서 바른 견해가 있게 된다.
깟짜야나여, ‘모든 것은 있다.’는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고 ‘모든 것은 없다.’는 이것이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이러한 양 극단을 벗어나서 중도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작용이이, 형성작용을 조건으로 식별작용이, 식별작용을조건으로 정신∙물질(명색)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이 있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기 때문에 형성작용이 소멸하고, 형성작용이 소멸하기 때문에 식별작용이 소멸하고, 식별작용이 소멸하기 때문에 정신∙물질(명색)이 소멸하고, 정신∙물질이 소멸하기 때문에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고, 여섯 감각장소가 소멸하기 때문에 감각접촉이 소멸하고, 감각접촉이 소멸하기 때문에 느낌이 소멸하고, 느낌이 소멸하기 때문에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집착이 소멸하고, 취착이 소멸하기 때문에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기 때문에 태어남이 소멸하고, 태어남이 소멸하기 때문에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가 소멸한다.’라고.”
“도반 아난다여, 참으로 그러합니다. 참으로 존자들은 이처럼 동료 비구를 연민하고 그의 이로움을 원하여 충고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그런 분들입니다. 저는 아난다 존자가 베푸신 이러한 설법을 듣고 바른 법을 알고 보았습니다.”
찬나경(S22:90)
그러나 ‘오온이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아니라면 무엇이 혹은 누가 나의 자아인가?’라는 사념적(思念的) 논리적(論理的) 접근은 불교수행에서는 수행자 누구에게든 허용되는 사안(事案)이 아니다. 본경에서 보이듯이 어떤 수행자에게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생각이다. 그래서 경전 어디에도 이런 형태의 질문에 대해서 ‘무엇이 혹은 누가 나의 자아이다.’라고 일반적인 법문으로 답한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는 오온설의 산냐, 선정에서의 참되고 미묘한 산냐의 생멸, 산냐의 구경에 이어서 경전 도처에서 삼매 수행에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던 산냐 관련 수행을 하라고 가르치신다.
금강법기사의 주체 법문을 듣지 못한 이들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산냐가 중생의 주체인 인식자(認識者)라는 의미의 용어라는 사실을 알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수행과 법문의 전체적인 이론 체계를 세워서 제자들을 가르치지 않으셨기 때문에 산냐라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신 상이(相異)한 법문들의 연결성이나 수행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나 수행의 순차 등을 결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주체에 대한 실천 수행과 가르침은 완전한 열반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수적이고 핵심적인 것이다. 이를 모르고서는 올바른 수행을 할 수도 없고 궁극적인 목표인 완전한 열반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당연히 산냐에 대한 수행과 가르침을 다른 수행과 더불어 순차적으로 설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경전만으로는 어느 누구도 이런 사실과 내용을 알아낼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필자처럼 금강법기사의 주체 법문을 숙지하고 부처님 법문을 찾아보아야만 알아낼 수가 있다.
당연히 부처님께서도 금강법기사의 가르침과 꼭 같은 순서와 내용으로 제자들에게 수행 지도를 하셨다. 더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事實)로 환언(換言)하자면, 부처님의 제자로 부처님 재세 시에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을 수승하게 잘 하셨던 법기 대아라한 스님께서 부처님께 배운 바 그대로 꼭 같은 순서와 내용으로 금강법기사에서 불교 이론과 수행을 이론 체계를 세워 가르치신 것이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이론(異論)이 분분한 가운데 그나마 경전에 씌어진 그대로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는 수행은 계·정·혜 수행이다. 즉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면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계율을 준수하고, 삼매를 닦는 수행을 하고, 선정에 들어서 신통 공부를 하여서 귀로 들었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사실로서 확인하고 경험적 반야 지혜로 증득(證得)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계행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하여 바른 수행을 할 수 없는 지경으로 지내왔다. ‘산냐’가 무엇인지를 몰랐고, ‘사띠’가 무엇인지를 몰랐고, ‘감각대문지키기’가 무엇인지를 몰랐고, 수행자가 어떤 방식의 호흡을 왜 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삼매를 성취할 수 없었고, 반야지혜를 증득할 수도 없었다.
계·정·혜 수행에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주체인 산냐는 오온 중 하나로서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아니라는 것으로만 가르치신다. 그러던 부처님께서는 선정(禪定)에서 미묘하고 참된 산냐가 생멸한다는 가르침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산냐 관련 수행과 법문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뽓타빠다 바라문 같은 이들이 생멸(生滅)하는 산냐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논란도 벌이고 부처님께 산냐에 대해 질문도 하게 된 것이다.
"뽓타빠다여, 그대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모였는가? 그리고 그대들이 하다만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렇게 말씀하시자 뽓타빠다 유행승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한 이야기는 그냥 두십시오. 그 이야기는 세존께서 나중에 들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근래에 며칠간 여러 외도 사문 · 바라문들이 토론 장소에 모여서 함께 자리를 했는데 그때 '존자들이여, 어떻게 해서 산냐의 소멸은 있게 됩니까?'라고 산냐의 소멸에 대한 이야기가 생겼습니다. 거기서 어떤 자들은 '존자들이여, 원인도 조건도 없이 인간의 산냐는 일어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합니다. 일어날 때에는 산냐가 되고, 멸할 때에는 무산냐가 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자들은 이렇게 산냐의 소멸을 천명하였습니다.
그것을 두고 다른 자는 '존자들이여,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산냐야말로 인간의 자아입니다. 그것은 다가오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합니다. 다가올 때에는 산냐가 되고, 물러갈 때는 무산냐 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자들은 이렇게 산냐의 소멸을 천명하였습니다.
그것을 두고 다른 자는 '존자들이여,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큰 신통과 큰 위력을 가진 사문 · 바라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산냐을 집어넣기도 하고 빼내기도 합니다. 집어넣을 때에는 산냐가 되고, 빼낼 때에는 무산냐가 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자들은 이렇게 산냐의 소멸을 천명하였습니다.
그것을 두고 다른 자는 '존자들이여, 내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큰 신통과 큰 위력을 가진 신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산냐를 집어넣기도 하고 빼내기도 합니다. 집어넣을 때에는 산냐가 되고, 빼낼 때에는 무산냐가 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떤 자들은 이렇게 산냐의 소멸을 천명하였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제게는 세존께 대한 기억이 일어났습니다.
'오, 참으로 세존이 계시는구나. 참으로 선서(善逝)께서 계시는구나. 그분이야말로 이러한 법들에 아주 능통한 분이시지.'라고. 세존께서는 산냐의 소멸에 대해서 능숙하시고 그 본성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어떻게 해서 산냐는 소멸합니까?
"뽓타빠다여, 여기서 '원인도 조건도 없이 인간의 산냐는 일어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문 · 바라문은 처음부터 틀렸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뽓타빠다여, 원인과 더불어, 조건과 더불어 인간의 산냐는 일어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사라진다. 뽓타빠다여, 그러면 수행이란 무엇인가?
뽓타빠다 경 『디가니까야 제1권』각묵스님(2007) 초기불전연구원
그러나 인간의 주체에 대한 가르침 역시 계·정·혜 수행처럼 실천 수행으로 증득 요해(了解)하여야 할 과제(課題)이고, 불교수행은 전부가 순차적(順次的)으로 이행하여야만 한다.
부처님께서도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 사라진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그 수행을 정형화(定型化)된 순차적인 실천수행, 즉 계·정·혜 수행이라고 여러 경에서 말씀하신다. 선정에서 생겨나는 산냐를 체득하려면 삼매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떤 산냐는 수행에 의해서 사라진다. 뽓타빠다여, 그러면 수행이란 무엇인가?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뽓타빠다여, 여기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한다. 그는 아라한(應供)이며, 바르게 깨달은 분(正等覺, 正遍智)이며, 영지(靈智)와 실천이 구족하신 분이시며(明行足)이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며, 가장 높은 분(無上士)이며,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며, 깨달은 분(佛)이며, 세존(世尊)이다.
그는 신을 포함하고, 마라를 포함하고, 범천을 포함한 이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낸다. 그는 법을 설한다. 그는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게 의미와 표현을 구족하여 법을 설하며,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낸다.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서 태어난 자가 듣는다.
그는 이 법을 듣고서 여래에게 믿음을 가진다. 그는 이런 믿음을 구족하여 이렇게 숙고한다. '재가의 삶이란 막혀있고 때가 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소라고동처럼 빛나는 청정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하리라.'라고. 그는 나중에 재산이 적건 많건 간에 모두 다 버리고, 일가친척도 적건 많건 간에 다 버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한다.
그는 이와 같이 출가하여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면서 머문다. 바른 행실과 행동의 영역을 갖추고,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보며, 학습계목들을 받아지녀 공부짓는다. 유익한 몸의 업과 말의 업을 잘 갖추고, 생계를 청정히 하고, 계를 구족하고,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고, 사띠와 삼빠쟈나(正念正知)를 잘 갖추고, 만족한다.
뽓타빠다여, 그러면 비구는 어떻게 계를 구족하는가?
- 중략 -
뽓타빠다여, 이와 같이 계를 구족한 비구는 계로써 잘 단속하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한다. 도반들이여, 예를 들면 관정(灌頂)한 끄샤뜨리야 왕은 적을 정복하였기 때문에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도반들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계를 구족한 비구는 계로서 잘 단속하기 때문에 어는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한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戒蘊)을 구족하여 안으로 비난받지 않는 행복을 경험한다. 뽓타빠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계를 구족한다.
"뽓타빠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감각의 대문을 잘 지키는가?
- 중략 -
뽓타빠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사띠-삼빠쟈나를 잘 갖추는가?
뽓타빠다여, 여기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갈 때도 삼빠쟈나행이 있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삼빠쟈나행이 있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삼빠쟈나행이 있다. 가사·의복·발우를 지닐 때도 삼빠쟈나행이 있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삼빠쟈나행이 있다. 대소변을 볼 때도 삼빠쟈나행이 있다. 걸으면서·서면서·앉으면서·잠들면서·잠을 깨면서·말하면서·침묵하면서도 삼빠쟈나행이 있다.
뽓타빠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사띠-삼빠쟈나를 잘 갖춘다.
뽓타빠다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만족하는가?
뽓타빠다여, 여기 비구는 몸을 보호하기 위한 옷과 위장을 지탱하기 위한 음식으로 만족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이것을 지키며 살아간다. 뽓타빠다여,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는 몸을 보호하기 위한 옷과 위장을 지탱하기 위한 음식으로 만족한다. 어디를 가더라도 이것을 지키며 간다. 뽓타빠다여, 이와 같이 비구는 만족한다.
그는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기능의 단속을 잘 갖추고, 이러한 사띠-삼빠쟈나를 잘 갖추어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밀림이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한다.
그는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돌아와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 세우며 입 주위에 사띠를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머문다. 욕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악의의 오점을 제거하여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머문다.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여 악의의 오점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해태와 혼침이 없이 머문다. 광명-산냐를 가져 사띠 삼빠쟌나하며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들뜨지 않고 머문다.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의심을 제거하여 의심을 건너서 머문다. 유익한 법들에 아무런 의문이 없어서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 중략 -
뽓타빠다여,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서 다섯가지 장애가 제거되었음을 관찰할 때 환희가 생겨난다. 환희로운 자에게는 희열이 생긴다. 희열을 느끼는 자의 몸은 경안(輕安)하다. 몸이 경안한 자는 행복을 느낀다. 행복한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든다.
후략 -
이와 같이 위에서 인용한 ‘정형화된 순차적인 실천수행’ 법문[이하 ‘정순실’로 약칭함]에서는 산냐가 수행 방편이나 수행 과제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오직 ‘광명(光明)-산냐’ 한 가지가 수행과제가 아니고 수행자가 경험하는 바로서 언급된다.
그리고 산냐가 수행 과제로 언급될 때에는 항상 오온의 하나로서 나머지 네 가지 요소와 동일한 수행의 과제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수행의 방법이나 과정, 구경(究竟)은 한결 같이 계·정·혜 수행이다.
“비구들이여, 꿰뚫음의 방법에 대한 법문을 설할 것이다.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설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그 꿰뚫음의 방법에 대한 법문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쾌락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과보를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감각적 쾌락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느낌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느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산냐를 알아야 한다. 산냐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산냐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산냐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산냐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산냐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번뇌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업을 알아야 한다. 업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업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업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업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업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인연과 기원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과보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
중략 -
“‘비구들이여, 산냐(saññā)]를 알아야 한다. 산냐들의 원인과 근원을 알아야 한다. 산냐들의 차이점을 알아야 한다. 산냐의 과보를 알아야 한다. 산냐의 소멸을 알아야 한다. 산냐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반연하여 말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산냐가 있나니 형상산냐, 소리산냐, 냄새산냐, 맛산냐, 감촉산냐, 법산냐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산냐들의 원인과 근원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접촉[觸]이 산냐들의 원인과 근원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산냐들의 차이점인가? 비구들이여, 형상산냐가 다르고, 소리-산냐가 다르고, 냄새-산냐가 다르고, 맛-산냐가 다르고, 감촉-산냐가 다르고, 법-산냐가 다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산냐들의 차이점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산냐의 과보인가? 비구들이여, 산냐가 있을 때는 늘 그것에 어울리는 인습적 표현이라는 과보가 생긴다고 나는 말한다. 인식할 때마다 항상 인습적 표현을 하나니, 인식하는 자는 항상 이와 같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인식의 과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산냐의 소멸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접촉이 소멸하면 산냐도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여덟 가지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가 산냐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니, 그것은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사띠,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이 산냐를 잘 알고, 그들의 원인과 근원을 잘 알고, 그들의 차이점을 잘 알고, 그들의 과보를 잘 알고, 그들의 소멸을 잘 알고, 그들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잘 알 때 그는 이 꿰뚫는 청정범행이 산냐의 소멸이라고 잘 안다.
‘비구들이여, 산냐를 알아야 한다. … 산냐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후략 -
- 꿰뚫음 경(A6:63) : 앙굿따라니까야 4권(대림스님, 2007년) p.254
이와 같이 산냐의 소멸로 가는 수행은 팔정도 수행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와는 확연하게 다른 산냐 수행을 여러 경에서 추가로 가르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