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송지희 기자의 보살의 길 / 불교설화 속 여성 불자 욱면
치열한 수행으로 현신성불한 ‘용맹정진’ 대명사
차별·고통 없는 극락정토 염원
불교, 괴로운 삶 위로하는 희망
만일결사 동참한 주인과 참배
법당 밖서 손 꿰어 묶고 염불
“허황되고 기이하다 여겨지는 이야기 속에 진리가 숨어있다.”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 스님이 서문에서 밝힌 바다.
이 같은 역사의식에 기반하여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집필함에 있어 야사와 설화까지 모아 고증하고 기록하는 방식을 택했다.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이 철저한 유학자의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검증된 사실만을 취사선택한 것과 대조적이다.
일연 스님의 이 같은 방식은
설화를 통해 나타난 당시 여성 불자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도록 한다.
불교설화 속 여성의 모습이 유교적 사관(史觀)에 입각한 취사선택에서는
우선순위로 탈락 위기에 처했을 것임은 쉬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저잣거리에서 회자됐던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이 이야기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또 그 이야기 주인공이 실존인물인지 여부는 확인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존 여부를 따지며 무작정 외면해 버릴 수만은 없는 일이다.
특히 ‘삼국유사’는 불교 설화의 집대성이다.
일연 스님은 불교적 관점에서 수많은 설화들을 기록에 남겼고, 그 속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존재한다.
‘삼국유사’의 불교설화 속 여인들은 다양한 연령과 계층,
모습으로 불보살의 영험담이나 사찰 연기설화, 고승들의 수행담 등
각양각색의 이야기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깊은 신심을 바탕으로 수행에 전념하거나 불교 확산에 기여하는 주체적인 여인이 있는가 하면,
주인공과의 인연 혹은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조연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감통(感通)편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조에 나오는 욱면(郁面)도 그 중 하나다.
욱면은 아간 귀진의 계집종으로, 치열한 염불수행을 통해 현신성불(現身成佛)해
정토신앙을 대변하는 인물이자 용맹정진의 대명사로도 일컬어진다.
때는 신라 경덕왕(724~765)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주(康州, 지금의 순안)의 남자신도 수십 명이 극락왕생을 서원하며
약 27년 4개월간 만일염불 결사에 나선다. 결사에 동참한 신도 중 아간 귀진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욱면은 바로 그의 집에서 일하는 계집종이다.
욱면은 불심 깊은 여인이었다.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하루하루 고된 나날을 보내는
그에게 불교는 든든한 정신적 의지처에 다름없었다.
신분의 제약에 매여 배우지 못하고 무지한 까닭에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서방정토’에 대한 무한한 기대감은 확고한 신심의 토대가 됐다.
부처님이 계신다는 서방정토는 어떠한 고통도 번뇌도 없는 지극한 즐거움이 머무는 곳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신분의 차별 없이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곳이라 했다.
빈부와 귀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열심히 정진하여 깨달음을 얻는다면
누구나 좋은 세상에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욱면은 가슴이 벅찼다.
언젠가는 서방정토에 왕생하리란 염원은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을 위로해주는 한줄기 빛이었다.
욱면은 태어난 순간부터 그를 옭아매고 속박해 온 신분의 벽을 당연한 듯 받아들여 살아 왔다.
하지만 그러려니 하면서도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면 평생을 그리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슬프게 했다.
일이 고되고 힘들거나 억울한 일을 당한 날에는 유독 그랬다.
이런 그에게 불교는 말 그대로 새로운 세계였다.
누구나 차별 없는 부처님의 세상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종교가 바로 불교였다.
한낱 천한 계집종인 그조차도 말이다. 신심이 깊어질 수록 고민도 커져갔다.
정작 서방정토로 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막했기 때문이다.
사실 욱면은 귀동냥으로 들은 불교에 대한 막연한 신심만이 가득했을 뿐,
그 갈증을 해소할 방법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저 우연히 빨래터에서 “‘나무아미타불’을 거듭 거듭 부르면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더라”는
아낙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생각이 날 때마다 이유도 모른 채
입안에서 ‘나무아미타불’을 굴려볼 뿐이었다.
집안일부터 농사일까지 해야할 일이 많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을 떨어도
하루가 부족한 현실에서, 이를 욕심내는 것도 사치일 뿐이다.
그러던 중 욱면에게 삶을 송두리째 바꿀 계기가 찾아왔다.
바로 욱면의 주인 아간 귀진이 뜻 맞는 향도들과 함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만일결사를 주창한 것.
당시 신라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세력이 힘을 불리면서
백성에 대한 억압과 착취는 더욱 심해졌다. 왕실은 서서히 쇠락하고 있었고
백성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국가주도로 불사가 진행됐으며,
왕실에서 민간까지 불교신앙이 폭발적으로 확대됐다.
귀진이 동참한 만일결사 역시 지역 향토세력이 주축이 된 신앙결사의 일환이었다.
귀진과 결사동참자들은 마을 경계에 ‘미타사’를 세우고
이곳에서 매일 왕생정토를 발원하며 염불수행을 이어가기로 했다.
마침내 욱면에게도 기회가 왔다. 귀진을 모신다는 명목으로 매일 미타사를 찾게 된 것이다.
주인을 따라 사찰을 다니며 스님의 법문을 듣고, 수행자들이 정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욱면은 그제야 ‘나무아미타불’의 참 의미를 깨치게 됐다. 그리고 굳게 발원했다.
“일념으로 정진하여 반드시 서방정토로 가리라.
천한 신분과 억압된 속박에서 자유롭게 풀려나 고통 없는 행복한 세상에서 살아가리라.”
그때부터 욱면은 낮이나 밤이나 수행에 매진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다보면 어느새 삼매에 빠져들어
부처님 세상에 가까이 다가온 듯한 환희심마저 들었다.
법당 안에서 정진하는 주인 귀진과 달리 욱면은 법당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맨땅에 무릎을 꿇고 않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철저한 수행을 이어가는 욱면의 모습에는,
결사에 동참한 누구보다도 결연함과 간절함이 묻어났다.
주인 아간 귀진은 그런 욱면이 못마땅했다.
천한 신분으로 불교를 간절히 신앙하는 모습도 괘씸할뿐더러
염불에 정신이 팔려 응당 해야 할 일에도 소홀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을 따르며 결사에 동참한 수행자로서 염불을 금하는 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머리를 굴린 끝에 귀진은 욱면에게 매일 곡식 두 섬을 찧어 놓으라고 명했다.
아무리 집안일에 잔뼈가 굵었다 해도
여인의 힘으로 곡식 두 섬을 하루 만에 찧는 것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한데 따른 조치였다.
해결하기 힘들고 벅찬 일거리를 주어 욱면이 미타사에 따라와 기도하는 것을
원천봉쇄함은 물론 염불할 시간조차 만들어주지 않겠다는 계획인 것이다.
그러나 웬 걸. 욱면은 하루라도 정진을 쉬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곡식 두 섬을 초저녁에 다 찧어버리고는 여전히 사찰을 찾았다.
시간이 늦고 아무리 피로해도 단 한번 빠뜨리지 않았다. 욱면의 수행력을 나날이 높아져갔다.
간혹 심신의 피로로 합장한 손이 흐트러질 때면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노끈으로 꿰어,
마당에 박아둔 말뚝 위에 얹어 기도를 이어갔다.
지극한 신심으로 수행에 임하는 욱면의 모습은 다른 이의 귀감이 됐다. 그렇게 9년이 흘렀다.
‘삼국유사’ ‘욱면비염불서승’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어느 날 하늘에서 “욱면을 법당에 들게 하여 염불하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스님들이 나와 욱면을 법당으로 인도했고, 욱면은 평소와 같이 염불을 시작했다.
그가 일념으로 정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서쪽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오더니 욱면의 몸이 일시에 솟구쳐 법당의 대들보를 뚫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일순간 부처의 몸으로 변해 연화대에 앉은 채 큰 광명을 발산하며 서서히 가버렸다.”
현신성불(現身成佛). 사회적 지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신이한 혈통이나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닌,
천한 신분의 계집종 욱면이 오직 지극한 발원과 정진으로 결국 정토로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죽은 후가 아닌 현재의 몸으로 말이다.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욱면은 불교설화에 등장하는 무수한 여성들 가운데서도
수행에 대한 남다른 노력과 신심으로 도를 이뤘다는 점에서 후세 사람들의 롤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매일 벅찬 일과에 시달리면서도 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두 손에 구멍을 뚫어 노끈을 꿰는 극단적인 처방까지 내려가며
지독하리만치 치열한 수행을 통해 보살의 길을 걸어간 입지전적 인물인 셈이다.
이는 선재동자가 게송 반쪽을 구하려 천길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린 것이나,
무외삼장의 제자가 되기 위해 혜통 스님이 불화로를 머리에 인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욱면이 서쪽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배경으로
하늘로 솟구쳐 대들보를 뚫고 날아갔다는 사실을 오늘날 곧이 곧대로 믿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욱면의 이야기가 당시의 여인들, 특히 천한 신분의 여성들에게 구전되며
전해졌을 희망의 크기를 상상했을 때 이러한 설화적 요소는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부분이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욱면이 염불에 심취한 대가로
주인인 아간 귀진에 의해 처벌 받고 사망한 것을,
후대 사람들이 그 수행력을 존경하여 미화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없는 것은 아니다.
한편 ‘삼국유사’에 기록되진 않았지만 ‘허황되고 기이하다 여겨지는’ 불교 설화 속에서 또 한 사람,
극단적인 여성이 등장한다. 바로 부설거사의 딸 월명이다.
부설거사는 본인과 아내, 아들과 딸 일가족이 모두 깨달은 ‘엘리트 가족’이다.
이 중 특히 딸 월명과 아들 등운은 용맹정진 중 살인까지 저지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등운과 월명 남매가 출가해 불도를 닦는 중에 절의 부목이 월명에게 욕정을 품었다.
월명이 오빠 등운에게 이를 상의하자 등운은 부목을 위한 자비로운 마음으로 이를 허락하라고 조언한다.
‘화엄경’에서 관세음보살이 바수밀다라로 화현해 성(性)으로 중생을 제도했듯,
그러한 보살의 길을 가라는 의도에서였다.
이에 월명은 부목에게 세 차례 몸을 허락했다.
그럼에도 부목은 그 참 뜻은 알지 못한 채 끝도 없이 월명을 졸라댔다.
마침내 월명 역시 인간의 욕망 앞에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철저한 수행자라도 인간이면 누구나 당면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근원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이에 월명과 등운은 부목을 아궁이에 가둬 죽이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다.
수행을 방해하는 걸림돌을 지독하리만치 철저하게 배제한 것이다.
그리고 죽을 각오로 정진해 마침내 일주일 만에 깨달음을 얻는다.
이 시점에서 살인을 하면서까지 깨달음을 얻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살생은 어떤 이유로도 납득할 수 없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명이 설화적 인물임을 다시금 떠올리고,
부목의 실체를 구도를 방해하는 훼방꾼이 아닌 월명의 확고한 구도 의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조연배우라고 보면 어떨까. ‘살인도 불사할 만큼의 확고한 열정’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월명은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을 활인검으로 단칼에 베어버리고 깨달음에 이른 셈이다.
2012. 02. 23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