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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14장1-7절 이고니온 선교01 240917 원주희목사
2024.09.17 화 오전 6:23 ・ 21분 35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 충만하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하고 소망합니다.
1차 전도여행은 곳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씨앗을 막 뿌리는 전도 여행이에요.
2차 전도여행은 주로 1차 전도 여행 때 다녔던 지역을 돌아보았습니다.
다녔던 지역을 돌아보고서 그렇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근데 1차 전도여행 때 드디어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이런 표현을 쓰고 있어요.
사도라는 말은 아포스톨로스 보냄을 받았다 보낸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보낸다라는 뜻, 선교사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초대교회 교회 역사를 구분할 때 사도 시대, 속사적 시대, 교부 시대 이렇게 시대적 구분으로 나중에 사용되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12 제자들이 사도라고 이렇게 칭을 받았어요.
그 사도들이 이제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다음 세대 사도들의 제자인 디모데 마가 이런 분들이 활동하던 데를 속사도 시대라고 합니다.
사도들의 제자들의 시대라는 뜻이에요. 그다음에 속사도 시대가 납신하고 난 뒤에 속 사도들의 제자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때를 교부 시대라고 합니다.
교회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 교부 시대에 이제 로마의 10대 황제의 핍박이 있었고 이랬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이렇게 그 사도 시대부터 해서 속 사도 시대 교부 시대까지 이어지는 여정 안에서 교회가 굉장한 어려움을 겪었어요.
교부 시대가 끝나고 난 뒤부터는 이제 기독교가 공인이 되고 심지어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로마가 보호해 주는 그러한 시대로 이렇게 넘어갔습니다.
시대가 넘어갈 때 사도시대 때는 유대인 교회, 예루살렘 교회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방인 교회,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곳곳에 소아시아 지역의 이방인 교회들이 세워졌어요.
이방인 교회들이 세워졌는데 예루살렘 교회는 언제 모이냐 안식일날 모이고 주일날 모이고 안식일날은 유대인의 의식을 따라서 성전에서 모이고 그다음 주일날입니다.
안식일 첫날 주일날은 이제 각 집에서 떡을 떼는 모임을 또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대교인이면서 기독교인이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이 전통이 이방 땅에 전파되어지면서 안식일날 모이고 주일날 모이는 교회도 있고 그러다가 주일만 이방인 중심의 교회로 전환되어지면서 안식일날은 유대인들이 모이고 주일날은 기독교인들이 모이고 이 두 개 같이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어 주일만 오신 분도 있고 막 이러다가 점점 더 주일날 모이는 형태로 교회가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교부 시대가 되면 거의 다 이제 주일날 모이는 교회가 됐어요.
근데 카타콤에 있을 때 카타콤에 순조당할 그런 위기에 있을 때는 주일날 모이고 안식일 개념이 없습니다.
매일 모입니다. 공동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매일 거기서 예배하고 매일 기도하고 그래서 매일 모이는 모임이 됐어요.
매일이 뭡니까? 하루 24시간을 그냥 계속 예배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이렇게도 모였을 거예요.
그래서 안식일이냐 안식일날 뭐 있냐 주일날 모이느냐 이것이 뭐 대단한 쟁점이냐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다 창조하시고 일곱째는 안식하셨어요.
그리고 그 창조의 그 안식은 파괴되었습니다. 안식일은 어디서 파괴되냐 아니고 죄를 지어서 파괴됐습니다.
그 안식은 창조의 안식은 하루 쉬는 안식이 아니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 있는 안식일이에요.
세상이 창세되고 제 8일째도 역시 안식일, 세상의 창조 제9일째도 여전히 안식입니다.
그래서 이 창조의 안식을 기억하게 하시고 다가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안식을 소망하게 하시고자 구약시대의 심벌로 안식일의 규정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어요. 그래서 안식일날 왜 이걸 고치냐고.
근데 바리새인 트집을 잡으니까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나님이 일하신 나도 지금 일한다 하면서 안식일이 의식의 안식일이 아니라 진정한 안식은 예수님 안에서 회복되어지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그 안식을 이야기한 겁니다.
그 안식일이 진정한 안식일이 토요일 저녁에 금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토요일 저녁에 끝나는 유대인의 원력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느냐 그것도 유대인의 원력을 따라 지키지도 않아요.
유대인은 원력을 씁니다. 태양력이 아니에요. 그래서 유대 달력 유대 권력을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느냐 태양역을 따라서 우리 태양역을 쓰잖아요.
태양역을 따라서 주의를 지키느냐 날짜가 뭐 중요합니까?
주 월요일날 시차에 따라 전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때는 우리가 주일 지키는 날에 다른 데는 안식일이고 토요일이고 금요일이고 날짜가 다 달라요.
심지어 알래스카 알래스카와 한 발자 넘어가면 소련입니다.
러시아 땅입니다. 미국과 러시아 땅에 시간 구분선이 있습니다.
그게 전 세계에서 5분 10분 이렇게 바뀌는데 15분 바뀌었는데 거기서는 그거는 30kg밖에 안 돼요.
그걸 지나가면서 24시간에 바뀝니다. 여기서 저녁에 찍어서 그다음 날이에요.
시차가 달라요.
그래서 전 세계가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날짜에 예배드리며 어떤 데는 밤에 드려야 어떤 데는 낮에 드려야 되고 그러니까 시간은 다 다르게 돼 있어요.
미국 교회에서 아침에 주일 아침에 소가 젖을 이렇게 짜야 되는데 젖을 하루도 안 자면 젖이 불어요.
그래서 소가 병이 납니다. 저 소가 아침에 소젖을 짜주고 모이는 시간을 정하다 보니까 11시에 하면 좋겠다 해서 주일날 11시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게 한국교회에도 전파돼서 주일날 11시에 예배드려요.
예배 딱 드리고 나면 딱 밥 먹는 시간입니다. 예배드리고 난 뒤에 밥 먹는 거죠.
오후 예배드리고 이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의성과 하나님의 그 뜻과 섭리 안에서 주일날 우리가 그렇게 예배드려요.
근데 그런 의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라 갑시다.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입니다.
앤 크라이스도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진정한 안식 내가 주는 평강은 세상에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다는 그 평강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돼요.
할렐루야 그게 진짜 안심입니다. 그 안식을 의식으로 토요일날 저녁에 해서 주일 저녁까지 하든지 금요일에 가지 하든지 뭐 그거는 주일 아침에 시작해서 토요일 월요일주일까지 그 안식을 위해서 주일 예배 제대로 드리면 앤크라이즈도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운행합니다.
그 평강으로 우리의 삶을 승리로 살아내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이 말이 좀 뭐냐 같습니다. 사도 시대, 속사도 시대, 교부 시대 이렇게 이어지는 시대의 흐름들의 징표가 되는데, 사도시대에서 한 가장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는 곳곳에 복음을 전한 일들과 성경 사도들의 산물인 이 성경 원전이 완성되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요한 사도가 마지막 요한계시록을 기술하면서 신약 성경에 온전히 완성되었습니다.
사도들이 남긴 전성을 그냥 이 교회에서 저 교회에서 읽고 또 읽고 나누어서 읽고 돌아가면서 읽고 하다가 이것은 성경이다라고 인정되어진 것이 오늘날의 성경이에요.
그래서 사도 시대가 시대의 산물로 성경이 완성됐다.
근데 오늘날 있어서 이제 신사도 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났습니다.
신사도 운동은 새로운 사도가 있다 이거예요. 신사도 운동의 핵심은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입니다.
초대 교회로 교회가 너무 제도화되어졌으니까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데 초대교회의 시스템은 어땠느냐 연구해 보니까 초대교회 시점은 사도적 교회였다는 겁니다.
사도적 교회 교회가 남전도회 여전도회 당에 재직해 그리고 시찰회 노회 이렇게 있는 조직이 아니고 초대교회의 조직은 사도적 교회였다는 거죠.
그래서 그 사도적 교회로 돌아가려고 연구해서 내놓은 게 피트 와그너 박사님이 신사교 교회로서의 혁명이라는 책이고 그 책을 제가 정독을 했어요.
거기서 말하는 신사도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초대 교회로 돌아가려고 하는 운동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교회 꿈꾸는 거 아닙니까? 초대 교회로 돌아가는 것 초대교회로 돌아가려고 하니까 초대교회 때는 베드로 마가 이렇게 이어지는 사도적 계보들에 의해서 교회가 형성됐다는 겁니다.
사도바울 그 밑에 디모데 디도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방인 교회가 형성이 됐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적 권위를 가진 지도자에 의해서 그 밑에 함께 동역하는 팀들이 이렇게 함께 섬기면서 사도적 교회가 되었다는 겁니다.
한국교회는 개교회주의예요.
개교회주의는 교회가 교회대로 자생력을 가지고 열심히 열심히 하는 것 장점이에요.
단점은요. 교회와 교육계를 지나치게 경쟁해요.
그리고 큰 교회 목사님은 행정이 바빠요. 작은 교회 목사님은 다 그런 건 아닌데 기도를 많이 하는 분들이 계실 수 있어요.
왜 상황이 그러니까 열심히 기도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에겐 영권 영력이 주어지고요.
목양의 은세를 가져서 이렇게 목회를 참 잘하시는 분들은 많이 성도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들은 사람들의 성품이 온화하고 설교를 이렇게 하고 이런 그런 대중적인 어떤 목회 스타일이 강해요.
케돌릭 교회는 신학교에 들어가면 사제가 될 분들을 나누어요.
나눠서 너는 보니까 수도사의 길을 걸으면 좋겠다 해서 따로 뺍니다.
그다음에 너는 대중적 사역을 잘하는 것 같으니까 이렇게 주임 신부의 길을 걸으면 좋겠다 해서 신학교에서부터 길을 나눠요.
둘 다 공통 과목을 들을 게 있고 공통된 경건 생활을 해야지만은 부르심이 다르다라고 해서 따로 떼요.
그래서 수도사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수도원으로 갑니다.
불교도 이판성과 사판성을 나눕니다. 행정을 담당하는 스님들과 그리고 암자에 들어가서 자신을 정진하고 영성을 깊이 추구해가는 스님들로 나눠요.
한국교회는 어떻게 돼 있냐 이게 뒤섞여 있습니다.
이판사판입니다. 그래서 근데 목회자마다 부르심이 달라서 어떤 사람은 기도의 골방처럼 교회를 섬기게 하셔서 아주 적은 성도만 주시고 열심히 기도하도록 시간을 주십니다.
근데 그 시간에 땡땡이 치면 곤란하지요. 어떤 목사님은 성품이 원하시고 대중적인 사역을 드러내셔서 그렇게 들었습니다.
사실은 이 두 사역이 함께 만나야 되는 겁니다. 캐톨릭 교회의 장점은 이 두 사이를 자연스럽게 만나게 한다는 겁니다.
성령 쇄신 이런 거 할 때도 수도사가 나서요. 그리고 피정 그런 거 봐도 수도사가 낫습니다.
성령 쇄신을 하면 방언하고 병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안수기도 기름부음 사역하고 축사 사용하고 찬양도 개신교 찬양을 갖다 놓아서 아주 막 게들릭의 느린 찬양을 부르지 않고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 힘을 주리니 할렐루야 이러니다. 우리 부흥회를 닦았습니다.
그거는 전통 패돌리 게 아니에요. 개신교 것을 따서 모양 그대로 가져가서 자기들의 사역으로 압니다.
근데 수도사로서 오랫동안 하나님 앞에 깊이 머무는데 머물면서 묵상의 영성이 강해진 사람들이 있고 머물면서 영적 전쟁을 통과하면서 영권이 세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나와서 앞에 나서서 사람들한테 찬양하고 사역하고 그래요.
이 두 가지가 이렇게 어우러지는 거예요. 그게 장점이죠.
개신교는 그게 안 돼요. 그래서 교인들이 알아서 가야 돼.
이게 필요한 사람은 저리 가야 되고 이게 필요하면 이리 와야 돼.
그래서 기도 사역이 필요한 사람들은 개척교회를 가야 돼.
야 되고 그냥 교회 안에서 그냥 대중적인 목회 안에 이렇게 영혼의 양식을 받을 사람들은 그리 가야 됩니다.
그래서 이게 지금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게 이것을 극복해서 교회를 초대교회의 모델로 다시 되돌아가자라고 하는 부분부터가 신사도 운동의 원래 목적입니다.
히트 와그너는 그걸 하려고 한 거였어요. 교회와 교회끼리 네트워크를 하고 목회자와 목회자들끼리 네트워크를 해서 각자의 부르심을 따라 사도적 부르심이 있는 사람, 선지자의 부르심이 있는 사람, 교사의 부르심이 있는 사람, 그다음에 목양 양떼를 잘 돌보는 부르심이 있는 사람, 전도자의 부르심이 있는 사람 그들을 이렇게 모아서 원팀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 상을 한번 만들어보자.
그 운동이 신자도 운동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실행해 나가는 사람들이 변질되어지는 데 내부에 문제가 있고 바깥에서 그걸 보면서 사도 시대가 끝나서 사도시대 때 성경 다 썼는데 무슨 사도시대냐라고 비난하는 데서 외부의 비난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거는 역사를 구분하는 얘기고 사도 시대라는 역사를 구분하는 얘기고 신사도 운동은 초대교회의 원형적 모델을 찾아가려고 하는 모먼트입니다.
근데 내부의 문제 사도 운동 신사도 운동했던 사람들의 내부의 문제는 같은 목사인데 내가 영권이 더 세니까 사도다 하면서 격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계급적 구도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각각 지교회에 헌금을 거두어 가지고 그걸로 사도적인 어떤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에 각각 교회에서 돈 내놔라 이런 거였습니다.
미친 짓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나 세계 교회에 더러 누를 끼치기도 하고 더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저는 초대교의 원형을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신사도 운덕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부작용은 최소화해야 되겠죠. 우리 창곡교회는 사도라는 말을 쓰지 않고 요즘은 주로 자기 이름에다가 베드로, 바울 이런 초대교회 사도들 이름을 붙입니다.
장바울 바울, 김바울 바울도 참 많아요.
베드로 저는 원 피터 이렇게 하고 싶어요. 피터 영어로 피터는 베드로입니다.
원 베드로 하면 말이 너무 길어지니까 원피터, 필립스, 요한 이런 두 글자 이름을 우리가 한국 사람 딸기를 좋아하니까 원 피터 이렇게 해서 만약에 제가 그런 거 한다면 제 이름 원피트고 생각합니다.
근데 조다윗 이러는데 성경 속에 위대한 인물을 호처럼 따서 그걸 사용합니다.
그러면서 이제 자기가 그분들을 닮아가려고 한다 이런 의미로 사용하는데 그거 참 좋은 모습이지 어쨌든 교회는 초대교회의 영성도 배워야 되고 초대교회의 정신도 배워야 되고 초대교회 시스템도 배워야 합니다.
시스템은 배워왔는데 그 정신을 배우고자 하는 신사들 운동 아닙니다.
초대교회의 정신이 먼저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초대교회를 세우신 그 정신이 먼저예요.
그 정신 안에서 사도 운동하든지 신사도 운동하든지 이름에도 박박을 김밥을 붙이든지 어쨌든 간에 그 정신이 살아있는 을이 살아있는 우리 내남제일교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축복을 함께 만들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은 1절 말씀을 가지고 나눕시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시대가 잠으로 어두워지고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다.
정말 예루살렘 초대교회, 안디옥 초대교회, 에베소의 초대교회처럼 교회들의 본질을 회복하는 우리 내담자, 인류의 이기를 원합니다.
어설픈 시스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그 을이 살아있고 그 영성이 살아있고, 영혼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충만한 교회로 우리가 세워져 가게 하나님 역사해 주옵소서 저는 저희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은 영혼들을 붙여주시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섬져내고 세워가기를 소망하오니 주님이 축복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안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행14장1-7절 이고니온 선교02 240918 원주희목사
2024.09.18 수 오후 4:55 ・ 14분 7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서도 충만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사도가 14절부터 본격적으로 사도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어요.
어제 사도에기했습니다. 두 사도 아포스톨로스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보냄을 받았다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되어졌다 이런 의미로 쓰여진 사도가 이게 시대가 지나면서 사도 시대를 표현하는 그런 직분으로 이렇게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냄 받은 사람이다라는 뜻이에요. 사도라는 말이 그래서 그것이 마치 직분이 되어지고 대표 명사가 되면서부터 이 용어를 쓰는 것들이 이단이 되어버리는 이상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사도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 그래서 좀 오늘 시대에 사도라는 용어를 쓰면 신사도 시대 운동이냐 이런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제 말해서 구현되어 말하면 피트 와그너 박사님께서 사도라는 용어를 쓴 것은 신사도라는 말을 쓴 것은 사실은 오늘 시대에만 한정해서 쓴 말이 아니에요.
디엘 무디나 차이스필드나 이런 부흥운동의 초기의 사람들도 사도적인 사람이다.
심지어 마틴 루터나 존 칼빈 같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인물 중심으로 교회를 끌고 나갈 때 사도적인 사람들이 일어난다라는 겁니다.
그리고 또 사도적인 사람이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 그 일을 독력하는 조력하는 사람들이 함께 등장해서 네트워크 한다는 거.
그래서 띠 무디의 부흥 운동에도 무디의 부흥 운동이 연결된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부흥 운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무디 신학교라는 걸 세워서 그렇게 일꾼들을 길러내고 사역자를 길러내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고 요한예슬레 뭐 이런 분들도 사실은 사도인 거죠.
사도 와그너 박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어쨌든 이 제도 초대교회의 제도를 재현하자라고 하는 운동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귀한 운동일 수도 있는데 여기에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내부에도 부작용이 있었고 외부에 비판이 일어나면서 아주 이단시에 크게 이렇게 말려들었다 그 얘기했습니다.
저는 그 정신을 존중합니다.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파송받은 두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하는 2명이 사도로 이렇게 정한 것 같습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말하였는데 유대인과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음을 받아들이게 됐다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의 악한 마음을 품게 했다.
이것은 앞에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나 똑같이 유대 율법주의와의 싸움이 막 펼쳐지게 된 겁니다.
초대교회가 확산되어지면서 유대 율법주의 안식일을 지키면서 당시에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유대교에 입교한 이방인들처럼 그렇게 교회로 들어온 사람들을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처럼 신앙생활을 하게 해서 유대인화시켜야 된다.
이런 민족주의라는 것을 교회가 떠나지 말아야 된다라고 하는 운동이 교회 안에서 강력하게 일어났고 그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계속 쟁론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우주적 기독교, 전 지구적 기독교, 모든 민족을 아우르는 기독교로 이렇게 탈바꿈한 사람은 사도바울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의 평가입니다.
근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이 원래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너와 내 자손을 위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라고 하는 하나님이 원래 디자인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 민족의 포지션은 뭡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포지션은 그렇게 모든 민족을 주의 백성 삼을 때 그때 제사장적 민족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제사장 나라가 되고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고 오히려 이 일을 지금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왜? 민족주의적 유대교의 카운테고리 안에 예수가 있기를 원하고 민족주의적 카테고리 안에 다윗의 자손을 기려고 기다리는 유대민족주의 민족 종교 안에 모든 이방인들 들어와야 된다.
아니면 그 배척해야 된다. 이게 회당에 있는 사람들의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적 의식이었고 그들의 신앙이었고 그들의 민족애였습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해서 그들이 본인이 직접 할 때도 있고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기도 하면서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했다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두 사도가 그 핍박을 견디면서 오래 있었다 했어요.
오래 있고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니까 주님이 여기 선물을 주십니다.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주사라.
어 표적과 기사는 누가 하십니까? 주님이 하시는 거고 복음을 전하는 건요.
주를 힘입어서 역시 성령을 힘입어서 복음을 전하지만 그 일의 중심에 두 사도가 서서 그 일을 하고 하나님이 하신 초자연적인 사역들은 주님이 하시는 것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표적과 기사 행하여 주셔서 자기 은혜의 말씀 같이 읽어보자.
시작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할렐루야 우리 교회에도 이 은혜가 풀어지게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을 힘입어서 말씀을 전하고 그 전한 말씀에 대해서 우리 주님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하셔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셔서 은혜의 말씀을 확정하여 주신 은혜 이 두 가지가 아우러질 때 마치 손발이 마주쳐야 함도 도둑질 손발이 마주쳐야 맞아야 하지 하듯이, 하나님의 종과 성령이 또 혹은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동역하면서 이곳에서 놀랍게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 시내에 이제 사람들이 이 복음을 받아들인 무리가 많아지니까 그 시내에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또 누구도 있고 두 사로를 따르는 자도 있고 또 어떤 분은요 양다리도 있고 이쪽 다리 저쪽 다리만 있는 게 아니고 양다리도 있고 주로 양다리는 누구겠습니까?
유대인으로서 바울 사도의 말씀에 호감을 가진 분들이 양다리일 수 있습니다.
또는 경건한 자들로서 유대교의 이미 마음에 심취해 있는데 사도바울과 또 마음을 또 함께할 때 양다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근데 이 양다리가 되는 과정들이 있는데 이런 상황이 되니까 이방인과 유대인과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하여 모욕하여 뭘로 치려 하였다 돌로 치려 했다 했습니다.
여러분 돌로 치료하는 풍섭은 누구의 풍석입니까?
유대인의 풍속입니다. 그래서 이 주동에 지금 누가 서 있다는 겁니까?
유대인들이 있다는 것이지, 이방인과 그 관리들이 권력을 가진 관리들하고 이방인들도 있고 근데 그 중심에 누가 유대인들이 있어서 그들이 이방인들을 모욕하고 사도 바울을 모욕하고 돌로 치려 했다 입니다.
근데 그때 그것을 알고 도망쳤다. 두 사도가 도망쳤습니다.
루가오니아의 두 손 루스드라와 드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보세요.
그렇게 핍박을 받으면 움츠러들어서 골방에 숨어서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 주님의 일을 하면 왜 이렇게 고난이 많은지 왜 이렇게 두드려 맞는지, 내가 뭘 잘못했는지 자신을 막 돌아보고 한탄하고 세월을 한탄하고 막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합니까? 핍박을 거부해야 되겠습니다.
핍박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위축되지 아니하고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금방으로 가서 거기서도 역시 무엇을 전하더라 복음을 전하더라.
복음을 전해가는 과정에 계속 지금 뭐 하고 부딪히냐 회당주의자들하고 바리새파의 사람들하고 부딪히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었겠어요? 이렇게 부딪히다가 그들이 에베소에 갔을 때 아예 땅 따로 세웁니다.
두란도 서원이라는 것을 따로 세워서 이방인 중심의 교회를 아예 만들어버려요.
복음 전파를 그래서 아예 또 구역을 나누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오.
나는 이방인들에게 전하겠소 이렇게 하면서 정리를 해버려요.
근데 지금 유대인들 중에 한 사람 예수 믿으면요. 이방인 한 사람 예수 믿게 하는 거 양육의 폭이 달라요.
수 유대인들로서 예수를 믿게 되면 경건 생활 습관 그대로 가져가면 돼요.
그들이 알고 있던 믿고 있는 교리에서 몇 가지만 수정하면 돼요.
수정해서 오면 돼요. 잡히면요. 잡혀지면 정말 교회의 큰 일꾼이 되어집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부르심이 제사장 민족의 부르심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걸 준비시켜 놨다는 거예요.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민족주의, 유대인 율법주의 그런 것들이 뛰어넘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을 뛰어넘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이고 자기와 똑같이 이것만 뛰어넘으면 저들은 정말 위대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이게 바울 사도와 바나바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길을 쓰고 회당에서 전략적으로 복음을 먼저 전해 나갑니다.
근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게 있습니다. 핍박이 오는 중에도 어떤 때는 주님 바울 사도와 바나바가 오래 있어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것들, 주를 이미 담대히 말하는 것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표적과 기사로 함께해 준 은혜가 거기에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4장부터 해서 사도바울의 선조 바나바의 선교에서 표적 사역, 이적 사역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나님 교회를 섬기는 저와 여러분들 안에 이 동일한 은혜가 풀어지게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그 사랑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그 은혜를 바라봅니다. 이곳 이안에서 선교에서 펼어졌던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사역들 속에 함께하셨던 주의 역사들을 봅니다.
주님 우리는 이것을 구합니다. 이 땅 이 조리에서 복음을 전해 나갈 때 표적과 기사도 주시고 영혼을 사랑하는 극렬의 마음도 저희에게 더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이곳에 교회를 이전하고 이전 세대의 목회자들과 아버지, 또 장로님들이 이 이두 땅에 극렬의 씨앗을 많이 뿌렸습니다.
교회 이미지가 좋아지고 교회에 대한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이제 아버지 하나님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대로 풀어져서 영혼을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은혜가 있기에 하나님 주장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우리의 그 기회와 때를 허락해 주셔서 주님의 영광 이루어내게 역사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행14장6-19절 사랑으로 승리하라 240919 원주희목사
2024.09.19 목 오전 8:13 ・ 21분 5초
사도바울이 루스다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 비시디아 안디옥을 지나서 루스드라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전하는 중에 듣는 사람 중에 발을 서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더라 했습니다.
앉은뱅이 지시 다리를 못 쓰는 사람이다 말이죠. 그런데 걷는데 불편하고 무슨 문제가 있는 이분을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다.
다리를 못 쓰는 경우가 후천적으로 그 사고에 그럴 수도 있고, 나면서부터 그럴 수 있는데 이분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이 사람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듣는데 그의 마음 안에 완악한 마음이 아니라 열려진 마음으로 복음을 듣고 반응하고 있는 것들을 바울이 보니까 저 사람한테 속된 말로 말이 먹힌단 말이죠.
그래서 말씀을 전하는데 설교가 그 영혼 속에 들려지는 겁니다.
성령이 감동하시고 그 영혼을 만지고 있는 것들을 보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구원받을 마음의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말하기를 내 발로 바로 일어서라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듣게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때도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들을 고치는 일들은 여러 번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적이 일어났을 때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누가 오냐 그 지역 방언으로 소리 질러 말하기를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했어요.
신들이 다 됐습니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을 입어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신이 사람의 형상을 입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계십니다.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이죠.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루가오니아 사람들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럴 때 그럴 때 바울과 바나바, 예수님과의 치명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찬송받으신 그분이십니다. 할렐루야 찬송 받으신 그분이십니다.
그래 신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그래 맞다 는 그리스도입니다. 근데 바울과 바나바는 찬송받을 그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때 이렇게 얘기합니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바울은 말하는 자로 헤르메스라 그렇게 직책을 나누어서 바나바는 좀 더 높아 보이고 최고 신의 이름을 붙여서 저우서다.
바울은 헤르메스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대 사회 그리스 신화 이런데 가끔씩 신들의 아들들이 나옵니다.
신의 아들들 헤라클레스는 신과 인간이 결혼해서 낳은 아이 이렇게 봐요.
근데 그 신의 아들이니까 신의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주 힘이 센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근데 상상해 볼 수 있어요. 왜 그들은 신의 헤라크르 신의 아들이 했을까?
실존 인물이라면 인물이라면 그들은 신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거기서 남창 여창이 있어요.
신천 창녀가 있습니다. 거기서 몸을 드립니다. 근데 신전 창만 직업적인 신전 창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절기가 되면 그냥 정상적인 가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이때는 내가 신에게 봉사한다 할 때 자기 몸을 내어주는 신전 장르로서 일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때 만약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것은 신이 준 아들이다 해서 신의 아들로 이름 붙여지는 겁니다.
세라페스는 그래서는 신전에서 관계 속에서 태어난 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태어나면 신이 준 아들이니까 집에 가서 잘 길러내야 된다.
그게 그 당시 시대의 사고 현상이에요. 그런 사람들 신인 신의 아들들이 된 사람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서 그들은 제우스다 또 바울은 헤르메스다 이렇게 외치면서 신의 형상을 입은 사람들이다라고 외쳐댔습니다.
그리고는 시외에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들이 소를 끌고서는 하환 꽃바구니를 해가지고 꽃 목걸이를 해서는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바울과 바나바에게 재물을 드리고 제사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뛰어들어서 옷을 찍고 무리 가운데 뛰어들어서 소리를 질렀다 했어요.
소리를 질러서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적을 갖춘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벌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함이라 할렐루야.
이게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 땅에서 수많은 이적과 기사가 일어나는 중에도 하나님 앞에 가졌던 한 마음이고 또 이 마음으로 그들 자신을 지켜내는 아름다운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이 중심이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하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적과 기사가 일어날 때 사람들은 몇 가지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핍박하는 사람들은 이단이다 바을 세부를 덧입혀서 한다 이렇게 이단시하는 사람도 있어요.
또 하나의 그룹은 이렇게 그 이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마치 신의 형상이나 신의 아들이나 그렇게 존중을 넘어서 그냥 그분을 교주처럼 섬기는 그러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그때 두 손 사이에서 겸비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핍박도 일어날 수 있고 거기에 대해서 경배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근데 경배받으신 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런 이적과 기사가 루스다라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바울이 좀 설명해서 제사를 못하게 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제대로 전하려고 하는 그때에 유대인들이 쫓아왔습니다.
안디옥 이고니온에서 와서 이게 비시디아 안디옥인지 그냥 안디옥인지 모르겠어요.
바울이 1차 전도여행 여중에서 복음을 전했던 지역에서 회당에서 바울과 논쟁하고 복음 때문에 이렇게 막 씨름했던 그 사람들 그들이 핍박해서 도망왔는데 도망온 그들이 쫓아와서는 무리를 충동해서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내쳤다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중심이 돼서 돌로 쳤으니 죽이려 했으니까 돌로 친 겁니다.
만약 이방인들이었으면 돌로 치지 않고 칼로 하든지 그 관리들에게 고소를 하든지 이렇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율법의 규정을 따라서 돌로 친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돌로 바울을 치는데 바나바는 어디 갔습니까?
하나만 없어요.
잡혔을 때 바울만 있었을 수도 있고,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밉보인 사람이 바울이었다는 겁니다.
둘 중에 하나를 돌로 친다면 바울을 쳐야지 저게 더 미워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바나바는 상상해 보자면 예루살렘 교회에서 오랫동안 양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는 이방 땅에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은 유대인으로서의 지켜야 되는 선들에 대해서 엄격한 훈련들이 받아져 있고, 그것은 너를 지키는 사람으로 그렇게 복음을 전했을 수 있어.
근데 나 바울은 달라요.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 때 봤던 들었던 복음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둘러서 이방인 중심의 기독교로 그렇게 전환하는 데 사용하셨기 때문에 복음의 주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이지만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 만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유대인의 나라가 회복되어지는 다윗의 나라가 회복되어지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온 인류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셔서 우리 안에 성령 안에 이루어지는 진정한 하나님 나라 포인트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절기를 대하는 태도도 바울과 바나바가 달랐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돌로 침의 대상이었던 것 같아요.
어쨌든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내었더라 했습니다.
보세요. 루스다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병자를 고친 사람이었고, 악한 일을 행한 일이 없었고 진리의 복음을 전했는데 두 가지 상반되는 반응이 루스트라에 일어납니다.
경비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돌로 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어떤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까? 어떤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합니까?
핍박받는 자들에게서 너들이 나를 핍박하는 말이야.
내가 이래봬도 말이야. 안전먹이를 기른 사람이야.
이적과 기사로 자신의 그것을 높여서 핍박을 도망할 수 있고, 또는 충동하는 무리들 속에서 말이야.
어제는 너희들 중에서 앉은뱅이를 걷는 것을 본 사람이 있지 않느냔 말이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근데 바울은 돌로 침을 당합니다. 바울이 이 돌로 침을 당한 순간에 로마의 시민권, 나는 로마의 시민권자다.
그랬으면 돌로 치한 사람들이 다 도망갑니다. 근데 왜 이렇게 두들겨 맞습니까?
바보입니까? 등신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승리해야 될 것은 두 가지 승리가 있습니다.
한번 따라 합시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되는 다.
두 번째, 또 하나의 승리는 따라합시다. 사랑으로 승리하라.
사랑으로 승리하라. 사랑으로 승리하라. 안에 도덕적인 우위도 필요합니다.
사랑으로 승리하라. 안에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도 필요합니다.
바울은 두 가지 면에서 승리해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하니까 그 하늘의 능력을 가진 사람, 마치 신의 아들들이다라고 여겨졌던 그 사람이 한쪽에서는 소를 가져와서 제사를 드리려 하고 한쪽에서는 돌로 침을 당하는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펼쳐지는데, 그 여정 안에서 사도바울은 주님을 바라보고 자기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그게 이 땅에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당신의 종들이 걸어가야 될 믿음의 여정이에요.
그럴 때 그 여정을 지나서 하나님이 교회를 살려내는 은혜의 역사들을 이루어 갑니다.
그 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서도 아름답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핍박이 일어날 수도 있고요. 어려움이 올 수도 있고요.
그 속에서 영적 전쟁에 승리해야 됩니다. 영적 증거를 정리하면 그런 상황 속에서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이 내 안에 주는 평강으로 이렇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어요.
그리고는요. 그 모진 핍박 안에서 사랑의 승리를 합니다.
찬양하라고 마칠까요? 가시밭에 백카파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가시밭에 베카파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이걸 지금 말로 하기는 쉽지만요.
그 상황 속에 가서 이 말씀을 붙들고 견뎌내는 것은 쉬운 것은 아닙니다.
쉬운 것은 아니었고, 그 속에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온갖 감정들이 다 일어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붙들고 그 길을 걷는 자에게, 그 사람이 그 길을 걷는 자에게 그것이 가정의 핍박이든지 교회 안의 핍박이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들 속에 핍박이든지 그 사랑의 승리를 하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과 은혜가 펼쳐지고, 십자가의 승리, 부활의 승리가 그렇게 주어지게 됩니다.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은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는 교리적인 승리 구원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승리해야 되는지를 보여준 모델 케이스이기도 합니다.
흑암의 권세 속에서 핍박하는 사람들 속에서 수치를 빨가벗고 수치를 당하는 그런 여정 속에서도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면서도 그 자기를 찌르는 자들을 향해서도 주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 사랑의 섭리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찬양과 영광을 돌립니다.
그분의 승리 안에서 온 인류의 구원의 문이라고 하는 놀라운 은혜들이 열렸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 안에 지금도 핍박 중에서 이 믿음의 거리정을 걷고 있는 수많은 선교사님들도 계시고요.
또 그 여정을 걸어가는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도 지금도 있습니다.
인도 같은 데나 이슬람 지역이나 힌두교 지역이나 아직도 공산주의, 북한 같은 지역에는 복음 때비 핍박받는 수많은 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종들을 통해서 위대한 승리, 사랑의 승리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속에서 겪는 고난 중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갚으셔서 복으로 채우시기를 소망하고 그 고난들이 이제 그만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이슬람의 핍박도 너무나 오래되었고요. 힌드위즈의 핍박도 너무 오래됐고요.
북한 공산주의의 핍박도 7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것을 끝내시고 새로운 주님의 역사가 이 땅 가운데서 핍박받는 지역 안에서 펼쳐지기를 소망하고, 핍박 없이 예수 믿는 오늘 시대, 한국교회 너무 나약해진 이 시대 속에서 다시금 복음 정신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이 길은 고난의 길이고, 이 길은 희생의 길이고, 이 길은 핍박을 각오해야 되는 길인데, 주님 목회생활 오래 하면서 달아 빠진 저희의 모습들을 주 앞에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첫 믿음을 다시 회복하기를 소망합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옵시고 이 땅 가운데서도 사도 바울이 제1차 선교 여행 가운데 복음의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어 내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이 지역 안에서 이 복음의 역사를 이루어내는 은혜가 있기에 축복하여 주옵시고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치시는 이적과 기사를 아버지 허락하셨듯이 저희에게도 성령의 능력과 은혜들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영혼을 분별하며 영혼을 세우며 영혼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 성령의 능력은 영적 존재가 승리하여서 복음의 사람들을 길러내고, 복음을 풀어내고, 복음의 권세로 아버지의 이적과 기사가 동반하는 그러한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게 주장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이곳에 임하여 주시길 원하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행14장19-28절 1차 선교여행마무리 240920 원주희목사
2024.09.20 금 오후 12:08 ・ 18분 3초
이 말씀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바울은 제2차 성도 여행을 떠났고 이제 그 마무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마지막 선교 여정 안에서 이렇게 돌로 두들겨 맞는 그런 일들이 있었어요.
죽은 줄로 알았다 였습니다. 어쩌면 죽었을지 모릅니다.
죽은 줄로 알고 내쳤다. 시계로 끌어내쳤다. 숨이 끊어진 것 같아서 내쳤다.
정말 죽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뭐 있을 때 둘러섰을 때, 제자들이 뭐 있을 때 왜 둘러썼겠어요?
장례라도 치러주려고 장례라도 치러주려고 둘러싸서 장례 예배를 드렸겠죠.
이제 찬송을 하고 염을 할 준비를 하고 예배를 기도를 하고 안타까워서 울기도 하고 막 그런 시간 그런 시간에 하나님은 아마 형식을 갖춘 장례예식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장례예식을 준비하는 데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을 받으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그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돌아보시고, 또 바울 사도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부활의 영광을 허락하셨을 거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배는 묵자 기찬, 설기찬 교회에서 공적으로 들여지는 그런 예배만이 예배가 아닙니다.
삶의 어느 자리에서나 하나님 앞에 그 일을 일으켰을 때 그때 그것이 예배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제자들 이제 복음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분들입니다.
그중에는 못 걷게 되었다 걷게 되는 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하지만 그분들은 신앙을 받아들인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입니다.
루스드라 지방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벌떡 일어섰다는 겁니다.
벌떡 일어서서 그 성에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하룻밤을 자고 바나바와 함께 더 배로 돌아갑니다.
더베로 돌아가서 복음을 더베에서도 전하고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
루스드라 이고이온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여러분 바울 사도가 아마 죽었다가 돌로 쳐서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돌아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간증이 부활에 관한 얘기였을 겁니다.
죽음과 부활, 그리고 사후 세계 갔다 온 경험들 이런 간증이 있을 수 있고요.
어쨌든 그렇게 다시 부활의 권능이 눕혀져서 다시 두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 전할 때 많은 사람을 무엇으로 삼고 제자로 삼고 할렐루야 삶의 모든 고비들 속에서 주님을 악망하는 자들은 그 삶 자체가 예배입니다.
예배 시간이 따로 있고 기도 시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삶이 예배입니다.
그의 삶의 예배를 위해서 우리가 새벽 기도도 하고 낮에 기도회도 하고 주일날 예배도 드리고 공적인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공적 예배를 통해서 그래도 은혜를 받으면 젖은 장작도 같이 불이 이렇게 당겨 붙으면 그때부터 자기 삶의 불씨가 되어서 그의 삶의 자리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핍박과 어려움 중에 이때 믿음의 태도를 가지느냐 움츠려드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가는 외부의 핍박이 아니고 자신 안에 일어난 열병 풍토병이 발생했을 때 그만 돌아가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이 그 시대의 선교사들은 평균 선교지에서 6개월 내지 1년에 돌아가셨습니다.
풍토병이 심해서 의학이 발달되지 않았고 면역력이 이렇게 타지에 가면 그 지역에 있는 병균들에 대한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동남아 선교하러 갔다가 여러 명이 가슴에 가면 큰일 나는 성이 있습니다.
반드시 말라리아 예방주사를 맞고 가야 합니다. 현지인들은 괜찮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말라리아하고 싸우고 그 피 아래 현지인들 피 안에 말라리아를 견뎌낼 수 있는 능력이 우리보다 4~5배가 많아요.
그런데 우리는 가면 그 풍토병 말라리아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근데 의학이 좋으니까 예방주사 맞고 가면 되고 걸려와도 한국병원에 입원해서 한 주간 두 주간 치료하면 된다.
그래서 여름철 동남아 선교 하는 거는 그런 부분을 주의해야 되죠.
어쨌든 19세기 선교운동이 일어날 때 그때 제국주의 선교다 비판도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선교사님들은 1년 내지 2년 그렇게 복음을 불꽃같이 전하다가 대부분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현지 선교지에 퇴원한 아이들은 더 일찍 죽었습니다.
퇴원하자마자 열악한 의료 환경 안에서 애들이 태어나다 보니까 그렇게 많이 죽었습니다.
그 묘지가 서울 양화진에 있습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그 상황 환경 속에서 오는 어려움도 있고 언어에 어려움도 있고 음식 문제의 어려움도 있고, 복음을 받는 사람들 속에 역사하는 영들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어려움도 있고 수많은 어려움들을 함께 지나가는 겁니다.
국내에서 전하든지 국외에서 전하든지 그 어려움을 뚫고서 복음을 그 속에 전하였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게 하시는 은혜였습니다.
할렐루야 바울과 바나바에게 돈을 억만금을 준 건 아니에요.
그러나 그 성조의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은혜들을 베풀어 주셨고요.
그 핍박받고 어려움을 겪고 죽을 고비를 넘어서서 다시 루스 돌아 이고니온 요 안디옥이 아마 미시디 안디옥인지 그냥 안디옥인지 몰라요.
근데 어쨌든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오 이렇게 돌아가서 이렇게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지역을 뒤돌아가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권하는데,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뭐 하라 머무나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무엇을 견뎌야 하리라 많은 환란을 견뎌야 하리라 이랬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안에서 시작합니다.
믿을 때 회심 마음을 돌이켜 잊는다. 회심 회심한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 십자가의 은총에 부딪히게 하는 사건 중생입니다.
따라서 회심 중생 성화 영화 천국 이게 구원 서정이에요.
회심 마음을 돌이켜 예수를 믿겠다 작정하는 것 내가 믿습니다.
불교라는 종교는 믿는 종교가 아니에요. 믿는다라고 하는 것은 대상이 있는 겁니다.
불교는 자신을 수양하는 종교예요. 그래서 믿는다 하면 안 돼요.
불교는 나는 불교에 귀의해서 불교의 도리를 따르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근데 그건 이제 그 종교에 귀의하는 것 종교 속에 가르침에 들어가는 것을 우리 그냥 통칭 믿는다라고 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 살아계신 거 믿고 예수님을 믿겠습니다 할 때 회심 마음을 이렇게 회심 돌이켜서 믿겠다라는 겁니다.
회심 회심한 사람들에게 거듭나야 된다라고 강조하는 교단이 선결조단입니다.
그래서 성결교단은 예수 믿겠다 회신 말고 더 강조하는 주제가 중생이에요.
거듭난 중생 그다음에 성화 그다음에 신유 재림 성결교단의 4가지 중요한 교리예요.
근데 여기에 회심 회심이 먼저입니다. 회심이 먼저고 그다음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고 거듭난 사람들이 성화 그다음에 성결교는 여기에 뭘 넣냐 신리운을 넣습니다.
신의 병 고침 신유 그다음에 이제 천국 가는 거죠.
근데 신유는 안 아픈 사람도 있으니까 그것도 아픈 사람 다 낫는 것도 아니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일하게 걸어야 될 믿음의 여정은 한번 따라 갑시다.
회심 중생, 성화 영화 이 구원 사전입니다. 천국 가는 겁니다.
이 여정 가운데 천국 가는 거예요. 근데 장로교회는 중생을 강조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회심 이꼴 곧 중생으로 봤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회심 이골 중생일 수 있어요. 그러나 회심은 했다고 하는데 믿겠다고 작성해서 교회에 소속이 되고 회심은 했는데 거듭나지 않은 영혼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의 구원을 목사로서 확정해 줄 수는 없어요.
그냥 실제로 거듭난 사람은 성화에 의해서 걷게 돼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이 없으면 사생 가짜다 거듭난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했고, 심지어 고난이 없으면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다 이렇게 해서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라고 얘기했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마음을 더럽게 회심하고 이제 믿음이 어린 성도들이 핍박을 받아서 그렇게 유대인들의 핍박과 사도바울을 핍박했는데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핍박하지 않겠습니까?
그들도 아마 경건한 사람들 중에 나온 사람들, 또 유대인 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그런 어려움들을 겪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무엇을 찍어야 하리라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이 말 앞에 돌이켜서 그냥 믿음을 떠난 사람도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정확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어라.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환란이 일어났는데 환란 중에 겪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가면요. 따라 합시다. 그 환란 중에서 사랑의 승리를 하십시오.
그 환란 중에서 사랑의 승리를 하십시오. 이 말은 했을지 안 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바울 사도는 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돌로 맞을 때 핍박을 받을 때 살리기 위해서 또 다른 데 복음을 전한 사명이 있기 때문에 먼지를 털어버리고 다른 데 도망가기도 하지만은 그 속에서 대적하지 아니하고 사랑의 승리를 하려고 몸부림친 사건들을 사람들은 보았습니다.
눈으로 본 것만큼 더 큰 전도지는 없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변정해야 할 때는 정확하게 변증했습니다.
그게 사도바울이 많은 환난 가운데 행했던 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은 이것을 보았고, 또 그들도 그렇게 살아낸 사람도 있고 때로는 넘어졌다가 다시 돌이킨 사람도 있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믿음의 여정을 많은 환란 중에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1차 전도여행을 끝을 내고 사도바울은 되돌아갑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고 그들을 믿는 주께 의탁했다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물게 하지만 또 주님도 또한 우리 안에 머무십니다.
그래서 믿는 주께 의탁하고 반빌리아, 피스티아 반빌리아를 지나서 버가에 전하고 아탈리아로 내려가서 배 타고 안디오.
원래 그들이 사역했던 이방인 선교의 중심지인 안디옥 교회에 와서 안식을 취합니다.
그리고 모든 선교 보고 여행을 보고를 하고 난 뒤에 모든 1차 선교의 끝을 내고 안티에서 다시 5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그렇게 교회를 섬기는 그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차 선교 여행을 하고 난 뒤에 안디옥교회가 굉장히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사선을 넘어온 종들이 생겼거든요. 그리고 복음의 야전성이 엄청나게 강해졌습니다.
그리고는 안디옥교회는 또 다른 사역들을 펼쳐서 2차 선교까지 그렇게 감당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 축복과 은혜가 이 안디옥교의 축복과 은혜가 우리 교회 가운데서도 충만하게 되기를 소망하고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그렇게 복음의 역사를 일으켜내며 복음으로 살아내는 믿음의 역사들이 하나님의 종들에게 우리 교회 중직자들에게 그렇게 이루어지게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합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승리하는 은혜가 있게 축복하여 주시고 그리스도의 그 충만함 가운데 온전함의 역사 이루어내는 은혜가 있게 우리 하나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한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시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