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 노회에 다녀오느라 오늘 글이 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1장
골로새서는 옥중서신들(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중 하나로서 바울이 로마의 한 주택에 연금 상태로 있을 때 쓴 서신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별히 소아시아의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골로새는 에베소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4-5, 8절은 다음과 같이 보충하여 읽을 수 있겠습니다.
4-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것에 관해서는 복음의 진리의 말씀 안에서 너희가 전에 들었느니라.
8 성령 안에 있는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골로새 교회의 담임목사였다고 할 수 있는 에바브로의 신실함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바울이 목회자 모델로 제시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에바브로에게서 배운 골로새 성도들 또한 열매 맺는 삶을 산 것으로 보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애정은 본 서신에 차고 넘칩니다.
그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고(3절),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9절). 그들을 위한 바울의 기도는 주옥 같은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눈길이 가는 부분은
우리가 흔히 기도하는 지혜와 총명의 수식어로 쓰인 “신령한”(spiritual)입니다. 바울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나머지는 하나하나가 여기에서 가지를 뻗은 내용들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10a) 사람은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11b) 됩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접하면서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심이 무엇인지가 무척 궁금해집니다. 주 안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을 할 수 있는 힘은 그 근원이 하나님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지 않으셨다면 그 어떤 것도 논의 자체가 무의미했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 만물이 그를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분이 교회의 머리이심이 얼마나 든든한 일입니까? 그것을 알수록 그가 근본이심(18a)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더욱 더 그분께 모든 충만(all the fullness)이 거하십니다.
앞서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다는 언급을 했지만,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역이야말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만물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화평을 이루었기(20) 때문입니다.
그러한 화목의 궁금적인 지향점은 우리가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22)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경우 교회의 일꾼으로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합니다.
고난을 무릅쓴 삶이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에게 고난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을 계속했던 것입니다.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공개된 것이지만 볼 만한 사람만 볼 수 있고, 들을 만한 사람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마귀는 그 비밀을 쉽게 간파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겠죠!
십자가가 모든 것을 뒤집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2장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은 보화를 캐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9절)십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셨다는 것은 그분의 하나님이심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에서 인간으로 계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신비의 영역입니다. 그러므로 교리적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단적인 예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계시는 동안에도 우리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셨습니다. 그것을 조직신학에서는 조금 어려운 말로 “위격적 연합”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조금만 묵상해 봐도 이 땅에서의 그분의 풍성하심은 한이 없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과의 교통이 확고했고, 자신의 신성이 연합되어 계셨으므로 그분은 못하실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권능을 최대한 절제하시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의탁하며 사신 것은 그 자체로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목적은 오직 하나, 우리의 죄사함과 구원을 위해서. 우리를 대신한 제물 되시기 위해서 그분은 기꺼이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십자가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일평생을 통해서.
바울은 편지의 요소요소에 이와 같은 복음의 내용을 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잘못된 가르침들에 대한 경계와 방어를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들을 철학과 헛된 속임수,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 등으로(8절)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요?
이 서신이 쓰여질 당시부터 영지주의적 사고가 퍼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란 영이 중요하고 육은 의미가 없다는 사상입니다. 육체적 타락을 조장하고 정당화하게 만드는 사상입니다. 그러한 사상은 예수님의 신인(神人) 위격적 연합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마치 천사와 같은 형태로 이해하게 만들었습니다.
5절의 “질서 있게 행함”이라는 말이 조금은 어렵게 다가오는데, 훈련을 잘 받아서 훈련받은 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계속되는 내용도 복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아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믿는 자들에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대신 죽으심은 우리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물 되신 예수님이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은 것입니다. 구약의 제물은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죽음을 회피한 것 만이 아닌 것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 성령 안에서의 영적 할례, 마음의 할례요,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육의 몸을 (완전히)벗어버린다고 할 때 ‘벗어버리는;(putting off) 이미지가 할례와 닮았습니다.
이러한 영적 할례에 대한 설명은 율법주의에 대항한 변증입니다.
믿는 자들은 십자가 은혜에 의지하여 율법 조문을 벗고 새로운 영적 삶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 조문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율법주의는 잘못된 신앙 기조입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생명 안에서, 그의 죽음을 통해 율법 조문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이루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율법이 요구하는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16절)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장래 일의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꾸며낸 겸손(false humility)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딤후 3:5)하는 형태의 신앙입니다. 이것은 천사 숭배와 연관됩니다. 물론 성경이 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류들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머리를 붙들어야(holding fast to the head) 합니다.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는 것입니다(19절).
바울은 율법주의와 신비주의에 수반되는 금욕주의에 대해서도 경계합니다.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권면합니다. 철저한 단절을 말합니다.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이겠지요.
금욕주의는 자기 부인(self-denial)은 다릅니다.
오늘도 복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첫댓글 율법주의자들에게 ‘~을 붙잡지도, 맛보지도, 만지지도 말라'는 규례가 요구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도 기대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맺고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들입니다.(1:9-11, 2:16,21) 그러나 이것은 내 힘으로 이룰수 없는 것일뿐더러 맹목적인 열심은 자신의 의를 세우는 종교인의 그것과 하등 다를바가 없게됩니다.
우리가 택할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고백한 그 고백안에 사는 것입니다. 복음안에서 그리스도와 계속 연합한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와 지식이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안에 있을때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아 사람의 전통과 사탄의 속임수를 분별하는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이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2:2-8)
골로새 성도를 위한 바울의 기도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는 것,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으로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서며, 또 그런 교회를 세우는 수고를 사랑의 연합안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감당할수 있기를 바랍니다.(1:9-10,28-29, 2:2-3)
머리되신 주이심을 되새기며 오늘도 자기부인의 자리로 나아가는 복음의 소망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람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부활하여 새생명을 얻음을 믿습니다. 장래일의 그림자보다는 본질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는 주 예수님을 바로 알기를 원합니다.
머리되신 주님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할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