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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은 5장 초반까지 이어지는 신학 논증의 본격적인 출발지점입니다. 바울은 3장에서 성경(구약)에 근거한 신학적 논증으로 복음의 진의를 밝히는 동시에 율법주의자들의 거짓된 흉계를 폭로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신자들(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을 용납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른 교인들)이 ‘어리석다’고 꾸짖습니다. 이 교인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예수의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1절).
2-5절의 논의에서 바울은 칭의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 갈라디아 신자들에게 그들의 회심과 더불어 받았던 성령을 상기시키며, 그 성령이 어떻게 주어졌던 것인지 묻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서입니까, 아니면 듣고 믿어서입니까?” 물론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뻔합니다. 갈라디아 신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듣고 믿었으며, 이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칭의, 곧 의의 소망을 성령 체험과 긴밀하게 관련시킵니다. 이는 성령이 제대로 된 칭의의 수단(5:5절)이라는 점에서 엉터리 수단인 할례(율법), 곧 ‘육체’의 영역에 속한 자랑거리들과 대조됩니다.
율법의 행위들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성령이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 주어지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주어지기 때문입니다(3:2-5, 13-14).
그러므로 바울은 성령의 역사와 무관한 율법의 행위들에 의지하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어리석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믿어 성령을 받았습니다(3:2, 5).
그 이후 성령에 의지하여 살아왔습니다(‘성령으로 시작’/3절).
그러다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되어’ 율법의 행위들이 칭의의 열쇠인 것처럼 착각했고, 그러면서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소홀히 하게 되었습니다. 즉, 이제는 육체로 끝내려 하고 있습니다(3절). 성령을 따라 계속 살아가야만 목표했던 의의 소망(종말론적인 칭의)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5:5절, 6:8절). 하지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중도에 육체로 빠지면, 이는 의의 소망이라는 목표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지금까지의 달음질은 ‘헛된’ 것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지금까지 잘 달려온 여러분의 달음질을 정말 물거품으로 만들 참이냐?’고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6-7절의 아브라함과 이신칭의에 대한 바울의 논증 자체는 매우 단순합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거기에 근거하여 지금 우리도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자손’(7절)은 이신칭의를 주장하기 위해 바울이 활용하고 있는 표현인 듯 합니다. 혹자는 거짓 교사들이 할례를 받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주장했고,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런 이유로 할례를 받으려 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할례가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반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8-9절에서 바울은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라는 창12:3절을 인용하면서 이 신탁을 아브라함에게 ‘미리 전해진 복음’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먼 훗날 바울을 통해 선포될 이 진리를 ‘미리 알고서’ 이신칭의의 원형적 사례가 되는 아브라함에게 ‘미리 복음을 전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곧 이신칭의의 진리는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고 다니기 전,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하나님이 정하신 유일한 구원의 원칙으로 확립되고 선포된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얘기합니다(9절). 여기 복은 ‘믿음으로 의롭다 해주시는 복’으로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정리하면 6-7절은 아브라함 자신의 이신칭의 체험에 근거하여, 그리고 8-9절은 아브라함에게 미리 선포된 복음의 신탁에 근거하여 이신칭의의 진리를 성경적으로 재확인합니다.
10-12절의 논의를 풀어서 정리하면, 첫째, 율법의 행위들에 의존하는 자들은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일부 특정한 규정들(할례나 안식일 준수와 같은 행위들)에 열중했지만, 이방인들도 받아들일 만한 율법의 도덕적 계명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즉, 도덕적이고 보편적인 계명들에는 무관심했다. 그 결과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계명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고, 그래서 율법이 규정한 저주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10절).
둘째, 아무도 율법(곧 할례나 절기 준수 등에 치우친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 의롭게 될 수 없다, 곧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이가 살게 될 것’이다(11-12절). 따라서 바울은 이 율법이 칭의의 수단이 아니라 저주의 계기임을 밝히고, 또한 이 율법이 칭의의 수단인 믿음과 함께 설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갈라디아인들로 하여금 율법의 행위들에 의존하는 삶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13-14절에서 바울은 율법의 저주에서의 속량, 칭의, 그리고 성령을 이야기 합니다.
율법으로 사는 삶의 결과는 저주입니다. 육체의 할례나 절기규정 등과 같은 율법의 행위들을 자랑했을 뿐, 어쩌면 더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율법의 다른 도덕적 계명들을 지키지 않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한 사건으로 해석하면서, 십자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율법 아래서의 삶과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사건의 목적을 두 가지로 기술합니다(14절).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믿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던 이신칭의의 복)이 이방에 미치는 것이고, 두 번째 목적은 우리가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십자가 죽음의 목적을 분명하게 진술함).
15-18절의 논증 역시 이신칭의의 원칙을 확증하는 성경적 논증이지만, 율법과 믿음, 율법과 성령 간의 대조를 여기서는 율법과 약속 간의 대조로 표현합니다. 곧 아브라함 이야기 속 가나안 땅을 내용으로 하는 ‘약속’과 ‘유업’이 칭의 곧 의의 소망을 가리키는 성경적 개념으로 활용되면서(율법은 언약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므로 율법이 이미 확정된 약속 언약을 무효화할 수 없다는 것), 약속(유업)이 율법보다 우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율법을 배제하는 바울의 움직임은 한 가지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바울의 말처럼 유업(칭의)이 율법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도대체 ‘율법은 왜’ 주어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언약의 기초로 율법을 주신 사건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삶에서 율법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 이래로 약속 언약이 확고히 정해진 것이라면, 굳이 율법은 주어질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19-29절의 논의에서 이 불가피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넘어 율법의 본래적 기능을 분명히 함으로써 믿음과 성령의 중요성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인가?(19-21절)
첫째, 율법은 의를 이루는(긍정적) 기능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를 다루는(부정적) 기능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 죄를 다루기 위한 것으로서 의를 이루는 기능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율법은 중재자를 거쳐 간접적으로 주어진 것으므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해 주신 약속보다 열등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율법은 ‘아브라함의 자손’ 곧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그 기능을 수행하는 일종의 ‘임시방편’이라는 것, 율법은 애초부터 의롭게 하는 역할과는 무관했고, 그나마 있는 제한된 역할도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한시적으로만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율법은 결코 약속에 ‘맞설 수’ 없다는 것, 곧 하나님이 ‘생명을 부여하는 능력’을 율법에 두지 않으셨기 때문에 율법은 약속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21절).
생명을 줄 능력이 없다는 이 ‘불가능성’이 율법이 우리를 의의 소망으로 이르게 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이 이유입니다.
바울은 22-25절에서 율법의 기능들에 대해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첫째, 율법(여기서는 성경과 동의어로 사용된 것 같음)의 본래적 기능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는 것이다. 곧 율법은 칭의와는 상관이 없고 오로지 죄를 다루는 역할만 맡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역할의 한시적 성격을 분명히 합니다.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아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 들어간다면 이는 믿음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 곧 ‘그리스도의 은혜로 불러 주신 이를 떠나 다른 복음 좇는’ 행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시대의 삶의 방식으로 회귀하려는 갈라디아인들을 향한 따끔한 질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26-28절에서 믿음의 실제적 효과를 기술합니다.
믿음으로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얻게 되었는데, 바울의 강조점은 ‘새로운 특권’ 곧 그 어떤 인간적 구분에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다’(26절)라는 진술이 결론부에서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28절)로 바뀌는 것 역시 이런 생각을 뒷받침합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에서는 인간적 구분(유대인/헬라인, 종/자유자, 남자/여자 등의 구분)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할례받은 유대인으로 살아야 하느냐?’(현재 갈라디아에 발생한 갈들의 본질) 그러면서 차별이 없다는 26-28절의 논증을 바탕으로 최종 결론을 제시합니다.
육신적 혈통과 무관하게, 이제 모든 사람이 믿음을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를 옷 입음으로써 누구나 ‘아브라함의 씨’라는 신분을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29절).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이제 우리는 ‘약속에 의한 상속자다’ 이것이 논증이 최종 결론입니다. 곧 ‘유업을 얻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다’라는 것입니다.
3장에서는 아브라함 전승에서 도출된 약속과 유업 개념을 중심으로 한 논증으로 ‘아브라함의 씨=상속자’라는 논리가 성립되었다면, 4장 1-7절에서는 아브라함 전통과 무관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양자 됨을 얻고 이로써 상속자의 신분을 얻는다는 논증, 곧 ‘하나님의 아들=상속자’라는 일반적인 논리가 전개되고, 바울은 이 논증을 바탕으로 8-12절에서 회심 이전으로 돌아가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어리석음을 꾸짖고 있습니다. 13-16절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태도 변화로부터 그 복음을 전했던 바울과의 관계 변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서로 관계가 좋았던 시절, ‘그때’에 대한 바울의 향수 어린 회고는 복음적 자태로부터 이탈하고 있는 ‘현재’에 대한 강한 꾸지람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성도들이 멀리해야 할 진정한 ‘원수’가 누구인지 말해 줍니다(17-18절). 진정한 원수는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선동자들입니다. 19-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 목적(성도들의 삶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도록 애쓰는 것)을 언급하면서 배교에 버금가는 그들로 인해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바울은 성도들을 향한 직접적인 질책을 잠시 접고, 21-31절에서 다시 아브라함 이야기에 기초한 성경적 논의로 돌아갑니다.
바울은 율법 아래 있으려 하는 이들의 주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두 여인(21-23절)을 제시하고 두 여인에 대해서 알레고리로 해석(본문에 나타난 표면적 의미 뒤에 또 다른 영적 의미가 숨어 있다는 것)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24-27절). 바울의 해석에 의하면, 이 두 어머니들은 ‘두 언약’, 곧 각각 ‘시내 산(율법) 언약’과 ‘약속 언약’을 가리키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종살이로 규정되는 ‘하갈(시내 산), 현재의 예루살렘’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로운 여자(사라), 곧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이 해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바울은 이사야54장의 말씀을 인용하여(27절), 그리스도인들이 ‘자유자-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임을 확실히 합니다. 즉, 바울은 율법 아래 있으려 하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생명의 성령을 통해 새로이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하나님의 역사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28-31절에서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성경의 선언이 확증하는 것처럼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만이 ‘상속자’가 되기 때문입니다(30절). 그러므로 율법에 얽매여 육체의 한계 속에 머무는 자들이 아니라 성령으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이 유업을 얻게 될 상속자라는 것입니다(31절).
정리하면, 3-4장에 걸친 긴 성경적 논증의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브라함 전통 속에서 우리가 읽게 되는 여러 사건들은 율법의 행위들에 의존하여 육체의 한계에 머무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성령으로 태어난 자들이 바로 이 의의 소망이라는 유업의 상속자들임을 증언합니다. 즉, 율법 자체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닌 ‘믿음(성령)’이 약속된 의의 소망에 이르는 길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이해하고 정리하는 것이 좀 어려워서 많이 늦었고, 길어졌습니다. 3장은 나름대로 좀 정리를 했는데, 4장도 길어질까봐 간략하게 정리를 했습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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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율법주의자들이 구원을 위한 할례근거를 성경에서 찾은 것처럼 바울도 말씀에 근거해 복음을 전합니다. 율법자들이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랑하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중에는 아무 유업이 없는 이스마엘도 있습니다.(4:21-31)
바르게 이해된 율법은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한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성품 또한 알려줍니다. 그런의미에서, 구원받는 수단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의와 사랑을 품은 율법의 정신을 바로 살아내려 애쓰는 마음은 여전히 중요해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을 아빠라 부를 수 있는 자, 예수의 영이 마음에 있는 자, 유업을 받을 자…현재의 우리를 설명하는 말입니다. 참으로 듣기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그랬듯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기까지는 우리의 잘못된 점에 대해 진리안에서 지속적으로 지적당하고 교정받을 필요가 있을것입니다.(4:6-7,19-20)
그리스도의 형상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길 사모하는 성도와 희석되지 않은 진리의 말씀이 사랑안에서 해산하는 수고의 심정으로 선포되는 강단이 오늘 우리교회를 자랑하는 말이 되길 바랍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율법의 정신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입니다.^^
장고의 연구 끝에 어려운 본문을 멋지게 해석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해주신 것처럼 초대교회 때 복음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논쟁이 일어났던 부분이라 우리도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단 생각이 듭니다. 율법이 때로는 우리와 무관해 보여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통치 세계를 배우기 위해서 율법(구약성경)은 여전히 우리가 연구하고 묵상해야 할 책인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자녀로써 자녀답게 행하는 것(율법)은 하나님이 기뻐하사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가시는 조건(요일3:22)도 되기에 항상 연구하고 묵상해야 되지 않나 싶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일이 없도록 복음의 본질과 믿음의 내용 그리고 심지어 율법의 행위까지도 잘 알고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본문 말씀 귀하게 설명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과 성령님의 은혜로 말씀에 순종하며 승리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