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4:13-16 “성숙한 신앙인” 2025. 1. 19
어처구니 없는 해외뉴스를 살펴 보다가 우즈베키스탄 파르켄트의 한 사립 동물원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는 이리스쿨로프(44)라는 남자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물의를 일으켰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동물원에 있는 사자 우리에 로프를 타고 내려갑니다.
당시 동물원에는 관람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 남자는 사자우리에게 접근하며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저를 구해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외치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말을 하고 있는 그 순간, 사자가 달려들어 허벅지를 물어뜯어 버립니다. 이에 경동맥이 순식간에 끊어지고, 거의 죽음 직전에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놓고 해외 언론들은 <현대판 다니엘>이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저는 이 기사 내용을 보면서 ‘참으로 현대에는 신앙의 참된 진짜 의미와 본질을 모르고, 이상주의에 빠져 성경의 참된 메시지를 왜곡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나 성경에 기초한 올바른 성도의 생활이 무엇이에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가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앞에 소개되었던 남자처럼 사자우리에 들어가면 죽는데도 불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것이다’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높은 건물에서 뛰어 내리면 무조건 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높은 건물에서 뛰어 내려도 괜찮고, 독을 먹어도 믿음만 좋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외치며 가르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신앙을 가르치는 올바른 신앙을 가진 분이 아닙니다.
‘무조건 하나님만 같다 붙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을 두고 ‘티켓 신앙’입니다. <티켓>이 머에요?
입장권 아닙니까? 영화를 잘 만들어 크게 흥행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극장 입구에서 몇 시간이고 줄을 서야 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하지만 나에게 입장 할 수 있는 티켓이 있다면 어떨까요?
굳이 밖에서 고생하면서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미리 가서 기다리며 표를 살 필요도 없고, 시간에 맞추어 가서 당당하게 티켓을 내밀고 관람하면 됩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나는 여유롭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바로 티켓이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티켓의 효력을 신앙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분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일부의 신앙인들 중에 ‘교회에 출석하면서 천국 가는 티켓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도로써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가?’를 무시합니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잃지 않는다는 말을 이상하게 해석합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이래 살아도, 저래 엉망으로 살아도 천국갈 수 있다’고 이상한 논리를 펼칩니다.
그러다 보니 <티켓 신앙인>들의 ‘모든 관심과 목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로지 내가 어떻게 즐겁게 살아갈까?’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신앙형태가 왜 잘못되었을까요? 티켓 신앙은 성도의 삶을 가볍게 보게 만듭니다.
13절 보세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어떤 사람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온전한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온전한 사람 또는 온전한 성도란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성도, 세상에서의 모습과 교회 안에서 모습이 일치하는 성도, 불신자들의 앞에서와 성도들의 앞에서 일치하는 성도가 바로 <온전한 성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지만 행동으로는 날카로운 칼을 품고 다니면서 사람을 해칠 준비를 항상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모일 때에 천사의 모습처럼 살갑게 다가서다가, 세상에서는 무지비한 모습의 폭군으로 군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교인은 <온전한 성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몇 해 전 미국에서 “철로의 살인자(Railroad Killer)”로 알려진 엔젤 매튜리노 리센디즈(Angel Maturino Resendiz)라는 사람의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23명의 사람들을 죽인 연쇄 살인범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형 언도를 받고 사형당하기 직전에 어떻게 기도하였느냐 하면, ‘주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저를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한 거에요. 그리고 창문 너머로 사형 집행을 지켜보고 있던 희생자 가족들을 향해서 ‘저를 용서해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희생자들에게 전혀 자비를 베풀지 않고 잔인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인 잔인한 연쇄살인범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전기의자에 앉게 되자 자비를 구하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두고 미국 언론에서는 ‘악어의 눈물’이란 제목으로 이 사람의 뻔뻔스러움을 비난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뻔뻔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비록 사람을 죽이는 살인범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마구잡이로 살아갑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죽을 때에는 천국 티켓만을 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모습으로 살아 갈 것인지는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어떻게 천국에만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서는 이런 어리석고 추한 모습은 드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믿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왜 신앙생활에 있어서 티켓 신앙의 모습이 문제가 되는가 하면, “신앙이 성장하는 성숙됨을 가볍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13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가진 완벽한 인격까지”라는 말뜻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모습을 닮을 때까지 예수님을 목표로 성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의 입에서 항상 ‘신앙, 신앙’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한문 ‘신앙(信仰)’이란 말은 한글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이란, ‘오로지 하나님만 믿고 따르며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고백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믿음과 신앙을 가진 분이라면, 현실 생활에서 올바르고 정직한 생활을 뒷전으로 돌려 버리고 ‘오로지 천국만 가면 그만이라’는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현실도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한 부자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는 갑부입니다. 이 사람이 항상 하는 말이 ‘하늘로 가는 길에는 여러 길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부자가 하는 이 말은 돈으로 천국 입장 티켓을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랍비가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은 할 수 있지만, 그 중에 정확하게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지요’부자는 돈 가지고 천국까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랍비는 천국은 오로지 하나님 한분으로만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에 조금 다니면 다들 성숙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도대체 성숙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나이가 들면 어른이 되듯이 그저 교회에 다니는 연수만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성숙한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요?
이런 착각을 버리기 바랍니다.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단순히 ‘교회에 잘 출석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진짜 성숙한 신앙인은 ‘교회 출석 도장을 잘 찍는 단계를 뛰어 넘어 현실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실천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살아 갈 때,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법입니다.
1. 목표가 분명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13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성장되어야 하는 목표를 어떻게 말합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라’고 말합니다. 15절 말씀에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고 말합니다. <그>가 누구에요?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까지 자라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들보고 ‘넌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는 질문을 던지면, 예전에는 상당수 아이들이 말하기를 ‘아빠와 엄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엄마 아빠처럼 되겠다고 말하지 않고, 연예인 누구처럼 잘생기고 멋지고 돈 많이 버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가치관의 판단 기준이 달라져 버린 안타까운 현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예수님을 닮는 모습에서 변함이 없어야 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 목표는 누구입니까? 누구를 닮아 가야 합니까? 바로 예수님 한 분인 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전 대한민국에는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목사님, 조만식장로님처럼 존경받는 신앙인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존경 받는 신앙인으로 인정은 하지만, 그 분들이 내가 닮아야 하는 신앙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충만하며,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2.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14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절에 보면 두 가지 유혹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①“사람의 궤술”이란, 인간의 헛된 교리와 학설을 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지금 한국교계를 어지럽히고 여러 이단들의 헛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자신의 학식에 사로잡혀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를 많이 흔들었던 도올 김00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본인의 사견에 사로 잡혀 정말로 성경을 많이 왜곡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사람의 궤술로 신앙을 흔드는 모습입니다.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내용이라도 이것은 신앙을 흔드는 사악한 목소리인 것을 알고 사람의 궤술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②“간사한 유혹”이란,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속임수를 말합니다. 분명히 그 길로 계속 가면 망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망하지 않는다고 간사한 목소리로 꼬시며 유혹합니다. ‘그저 주일 오전 한번만 예배드리면 되지, 왜 그렇게 하루 종일 교회에 매달리느냐? 오전에 잠깐 예배참석하고, 나머지 시간은 너 자신을 위해 소중한 공휴일을 사용해라, 그것이 진짜 쉬는 것이 아니냐?’라는 속삭임 또한 간사한 유혹입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면, 주일에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합니다. 예배가 소홀히 되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마저 소홀해 집니다.
사탄이 등장해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모습을 보세요. 선악과를 먹으면 분명히 죽는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지만, 사탄은 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먹도록 유혹하고 꼬드깁니다. 이것이 바로 간사한 유혹입니다. 결국 사탄의 간사한 유혹에 넘어간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됩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영생하는 몸에서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몸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간사한 유혹,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청년실업이 사회문제가 되고 있지만, 바다 건너 미국 땅에도 취업전쟁이 심각한 모양입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대기업인 엘텍에 한 청년이 면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면접관이 ‘당신은 몇 번째 면접시험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청년은 솔직하게 대답하기를 ‘110번째 시험입니다’라고 답합니다. 대부분 110번이나 면접을 볼 것 같으면 ‘이 청년에게 무슨 하자가 있겠구나’하고 생각해서 떨어뜨릴 텐데, 의외로 면접에 합격해서 마침내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면접관의 얘기에 의하면 두 가지가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또 하나는 그렇게 많이 실패해도 당당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여러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고 주님만 부여 잡고 굳세게 버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성숙된 신앙으로, 더 나은 믿음의 상황으로 이끌고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15-16절 보세요. 두 구절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16절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성도는 항상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생각하고 사랑 안에서 행동해야 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올바른 모습입니다. 특별히 자기만 생각하던 태도를 버리고, 남을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주로 사랑을 받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철이 들면서 받기만 하는 사랑에서 주는 사랑으로 바뀌어 집니다. 내 것만 챙기는 모습에서 남에게 주는 사랑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된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타인을 사랑하고 사랑을 베푸는 것을 보면, 그 분이 가진 신앙이 얼마나 성숙된 신앙인지 바로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 영화중에 “찬란한 문 저편(Beyond the Gates of Splendor)”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짐 엘리엇, 네이트 세인트, 피트 플래밍, 에드 맥컬리, 로저 유더리안이란 미국 선교사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선교사들은 1956년 1월에 <와오다니 인디안>에 의해서 에콰도르 정글에서 창에 찔려 잔인하게 살해됩니다. 그리고 시체는 강에 버려져 부패한 상태로 강하구에서 발견되어 가족들에게 인도됩니다.
미국정부는 미국민의 살해라는 사안에 초점을 맞추고 국가 차원으로 강경하게 접근하고자합니다. 이때에 놀라운 일이 하나 벌어지는데, 그것은 살해당한 선교사 가족 몇 명이 와오다니 인디언과 함께 살려고 에콰도르 정글로 자진해서 들어갑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남편을 죽인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죽음의 땅으로 자진해서 들어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와오다니 인디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살해당한 네이트 세인트 선교사의 자녀들인 캐씨와 스티브(Kathy and Steve)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던 살인범이지만, 나중에 예수님를 믿고 목사가 된 와오다니 인디언에 의해 세례를 받게 됩니다.
영화에서 네이트 세인트 선교사의 딸인 캐씨 세인트는 ‘저는 저의 아빠의 시체가 던져진 바로 그 강물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양쪽에는 젊었을 때 저의 아버지를 죽인 두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제가 세례를 받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때 저의 마음에는 아버지를 죽였던 그 두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만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때에 잔잔한 감동이 흘러 나오는 것을 경험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런 마음과 행동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라는 사랑의 마음과 행동이고, 성도라면 당연히 보여 주어야 하는 사랑의 모습이 아닐까요? 어떤 목사님이 시가 2억짜리 벤즈 차량(S500)을 몰고 다니시는 분이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고가의 벤츠 차량을 가지게 되었는지 잘 모르지만, 목회자로서 본 받을 처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설령 자신이 금수저 집안이라서 본인의 돈으로 구입한 것이라도 그런 모습은 덕이 되지 않습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가난하고 궁상스럽게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범이 되고 덕이 되어야 하는 모습에 있어서 흠결 사항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서 모범이 되는 모습을 지적하였습니다. 가치 기준이 쉽게 변하는 세상에서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만 바라보고 세상 사람들에게 덕을 드러내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늘 성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