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 사람이오 (1543)
티치아노
티치아노(Tiziano, 1488-1576)는
16세기 베네치아 미술계를 이끈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이다.
그는 조반니 벨리니의 공방에 들어가 조르조네와 함께 그림을 배웠고,
유화 물감을 사용한 새로운 실험으로 자유롭고 표현적인 화풍과
색채를 통한 형태의 묘사를 발전시켜 당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16년에 산타 마리아 데이 프라리 교회의 대형 제단화 <성모 승천>을 그려
큰 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명성도 절정에 달했고, 그 해 조반니 벨리니가 사망하자,
그는 베네치아 미술계의 독보적인 화가가 되었다.
화가로서 굉장한 성공을 거두고 있을 무렵인 1530년에,
티치아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맞게 되고, 그는 비탄에 잠겼으며,
이날 이후 그의 작품은 고요하고 묵상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티치아노는 1530년 이후 <자, 이 사람이오. Ecce Homo>를 여러 차례 그렸고,
이 장면은 군사들이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 빌라도가 법정에서
군중에게 가시관을 쓰고 자주색 망토를 걸친 예수님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들 작품에서 예수님은 혼자 있거나 혹은 주변 사람들과 함께 등장하는데,
티치아노는 적어도 6개 이상 이 작품을 직접 그렸으며,
비엔나의 자연사 박물관,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 미주리의 세인트루이스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슈 미술관, 더블린의 아일랜드 국립미술관,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은 티치아노가 직접 그린 것이 확실한 작품이고,
그 외의 작품들도 티치아노와 그의 제자들이 공동 작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는 두 개의 <에체 호모>가 걸려 있는데,
이 작품은 베네치아에 정착한 플랑드르의 상인
조반니 단나(Giovanni d'Anna)가 주문하여 1543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미술가 열전』을 쓴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그를 ‘티치아노의 대부’라고 불렀다.
1580년에도 여전히 이 작품을 그의 가족들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프랑스의 헨리 3세가 1574년에 이 작품을 사려고 했지만 사지 못했고,
17세기 초에 헨리 워튼 경이 구입해 1621년에 버킹엄 공작의 손에 넘겨주었으며,
1648년 안트베르펜에서 경매되어 프라하의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이
그의 형제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를 위해 구입했고,
1723년에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에 이전되었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가 그린 <에체 호모>의 다른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티치아노는 이 주제에서 홀로 있거나 셋이 있는 <에체 호모>를 즐겨 그렸으나,
이 작품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마치 수난극의 장면처럼 여럿이 나온다.
또 다른 작품에서는 배경도 어둡게 단색으로 처리되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베네치아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밝고 푸른 색채와 함께
견고한 기둥과 조각상이 있는 고전 건축물이 배경으로 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예수님을 데려다가 군사들에게 채찍질을 하게 하였다.
군사들은 또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 머리에 씌우고 자주색 옷을 입히고 나서,
그분께 다가가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그분의 뺨을 쳐 댔다.
빌라도가 다시 나와 그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내가 저 사람을 여러분 앞으로 데리고 나오겠소.
내가 저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는 것을 여러분도 알라는 것이오.”
이윽고 예수님께서 가시나무 관을 쓰시고 자주색 옷을 입으신 채 밖으로 나오셨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자,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19,1-5)
티치아노는 바로 이 장면을 그림에 담았다.
왼쪽 위 총독 관저 현관에는 세 사람이 서 있다.
한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주색 망토를 두르고,
무기력하게 갈대 나무를 들고 허리까지 드러낸 채 피를 흘리며 서 있다.
오른쪽에 허리에 칼을 차고 파란색 로마 의상을 입은 본시오 빌라도 총독이
그분을 군중에게 보여주며, “자, 이 사람이오.” 하고 말하고 있다.
월터 그로나우(Walter Gronau)에 따르면,
“그의 얼굴에 오만함과 냉소주의가 끔찍하게 뒤섞여 있는” 빌라도의 모습은
티치아노의 친구 피에트로 아레티노(Pietro Aretino)의 초상화란다.
왼쪽에는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로마 군사 한 명이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빌라도 앞으로 데려 나오고 있다.
계단을 경계로 계단 아래에는 군사들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고발하는 수석 사제와 군중들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흰옷을 입은 젊은 금발 여인이 소년을 끌어당기며 관람객들을 바라보는데,
그녀는 티치아노의 딸 라비니아(Lavinia)로 밝혀졌다.
그 앞에는 붉은 옷을 입은 뚱뚱한 수석 사제가 어떤 사내에게 사주하는데,
수석 사제들은 군중을 부추겨 그분이 아니라
바라빠를 풀어 달라고 청하게 하였기 때문이다.(마르 15,11)
오른쪽에는 터번을 두른 동양인과 검은 금속 재질의 로마 갑옷을 입은 기병이 있으며
펄럭이는 깃발을 든 로마 군사가 있는데,
깃발에는 S.R. 이라는 글자와 함께 로마군단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있는데,
S.R.은 ‘SPOR’이란 글자의 약자로 로마 원로원과 시민이란 뜻을 지닌다.
수석 사제들이 사주한 군중들은 계단을 반쯤 올라가 손짓으로 예수님을 가리키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치고 있다.
군중들 사이에는 칼과 창을 들고 있는 군사들이 섞여 있고,
왼쪽 계단 아래에는 합스부르크가의 쌍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방패에 기댄
갑옷을 입은 군사가 등을 보이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는 관람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방패 앞에 있는 서명 “TITIANUS EQUES CES 1533”은
티치아노가 1533년에 합스부르크 황실의 궁정 화가가 공적으로 되었다는 문서다.
이 작품은 구도가 눈에 띄게 사선으로 옮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모습은 화려한 구도 덕분에 여전히 눈길을 끈다. (2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