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곡집 제12권 / 비(碑)
우암 수명 유허비(尤菴受命遺墟碑) -
아아! 이곳은 우암 송 선생(宋先生)이 후명(後命=死藥)을 받은 곳이다.
기사년(1689, 숙종 15)에 여러 간흉들이 장차 큰일을 저지르고자 하면서, 선생이 도덕으로 세상의 종사(宗師)가 된다고 여겨 흉계를 꾸며 독수(毒手)를 드러내어 이해 2월에 제주(濟州)로 귀양 가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다시 번갈아 글을 올려 선생을 서울로 압송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이 올라오다가 이 고을에 이르렀을 때에 마침내 후명이 내렸으니, 이때가 6월 8일이었다.
아! 옛날 공자(孔子)와 주자(朱子) 같은 성인도 환퇴(桓魋)와 여철(余嚞)의 화에서 벗어났는데, 지금 선생은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는 우리 사문(斯文)에 닥친 어려움이 옷소매를 당겨 눈물을 닦았던 때나 주역점을 쳐서 둔괘(遯卦)를 만났던 때보다 더 심하여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 슬프도다.
선생은 올라오는 도중에 곤전(坤殿 인현왕후(仁顯王后)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면서 곡기를 끊고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에게 영결(永訣)하여 말하기를,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위주로 하고, 사업은 효종(孝宗)의 유지를 따라야 한다. ‘애통함을 누르고 원한을 머금은 채로 절박하여 어쩔 수 없이 때를 기다린다[忍痛含寃迫不得已]’는 8자를 전수하여 잊지 말아야 한다.
주자가 임종할 때 문인에게 ‘직(直)’ 자 한 글자를 일러주셨는데, 내 말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이때 선생은 곡기를 끊은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난 이후여서 기운은 점점 약해졌으나 더욱 스스로 몸가짐을 단정히 하였으며 누차 사약을 내릴 것을 재촉하며 말하기를, “이 한 목숨이 끊어질 듯하니, 미처 명을 받들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후명을 받기 하루 전에 흰 기운이 하늘에 걸쳐 있더니, 이날 밤에는 규성(奎星)이 떨어지고 붉은 빛이 지붕을 꿰뚫었다.
6년이 지난 갑술년(1694, 숙종 20)에 성상이 크게 뉘우치고 특별히 선생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생은 휘(諱)가 시열(時烈)이고 자가 영보(英甫)이며 은진인(恩津人)이니,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 40)에 태어났다.
효종이 큰 뜻이 있어 훌륭한 학자들을 맞이하여 등용할 때에 가장 먼저 정초(旌招)하니 군주와 뜻이 서로 부합하였다. 성상이 승하하자 조정에서 물러나서 여러 번 재상직에 제수되어도 끝내 나가지 않았다. 숙종(肅宗) 초년에는 아첨하는 사람의 말 때문에 바닷가로 유배당하기도 했으나,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어서는 높이고 예우함이 더욱 지극해졌다.
그러나 얼마 후에 세도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져서 온갖 괴이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선생이 끝내 큰 화를 입게 되었으니, 아! 차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 고을에 선생의 원우(院宇)가 있는 것은 선생의 행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남쪽의 선비들이 이 옛터에도 기록이 없을 수 없다 하여 마침내 뜻을 모아 비석을 마련하고 나에게 글을 지어 이를 기록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나는 식견이 어둡고 글재주가 졸렬하여 감히 함부로 장황하게 서술할 수 없으니 삼가 선생이 후명을 받았던 때의 일을 기록하여 이 땅을 지나는 후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다. 이 고을 사람인 임한일(任漢一)과 이후진(李厚眞)이 처음부터 끝까지 선생의 비를 세우는 일을 주관하였으니 그 뜻을 높일 만하다. 이에 아래에 함께 기록하여 민멸되지 않도록 한다. <끝>
[註解]
[주01] 후명(後命) :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죄인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는 것을 이른다.
[주02] 환퇴(桓魋) : 춘추시대 송(宋)나라의 대부(大夫)이다. 공자(孔子)가 송나라를 지나면서 큰 나무 아래서 제자(弟子)들에게 습례(習
禮)하게 하였는데 환퇴가 사람을 시켜 그 나무를 베도록 하여 습례하는 일을 방해하였다. 이에 공자는 환퇴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미복(微服)차림으로 송나라를 지나가기도 하였다.
[주03] 여철(余嚞) : 송 영종(宋寧宗) 때의 사람이다. 상소를 올려 주희(朱熹)를 참(斬)하고 위학(僞學)을 끊을 것을 청한 일이 있다.
《宋史卷394 謝深甫傳》
[주04] 옷소매를 …… 때 : 공자(孔子)가 옷소매를 당겨 눈물을 닦으며 슬퍼했던 때를 이른다. 춘추시대 노(盧)나라 애공(哀公) 14년 봄에
서쪽 사냥터에서 기린이 붙잡힌 일이 있었다. 이에 공자는 본디 성왕(聖王)의 시대에 나온다는 기린이 성왕이 없는 시대에 잘못 나
왔다가 잡혀 죽은 것이라고 슬퍼하면서 “누구를 위해서 왔느냐, 누구를 위해서 왔느냐.”라고 탄식하고는 옷소매를 당겨 흐르는 눈
물을 닦았는데, 눈물이 소매를 적실 정도였다고 한다. 《春秋公羊傳 哀公 14年》
[주05] 주역점을 …… 때 : 주희(朱熹)가 간흉을 논핵하는 상소문을 올리려다가 주역점을 쳐서 둔괘(屯卦)가 나오자 단념하고 초고를 불태
웠던 때를 이른다. 송(宋)나라 영종(寧宗) 경원(慶元) 연간에 한탁주(韓侂冑)가 승상 조여우(趙汝愚) 등을 무함하여 축출하고 도
학(道學)을 위학(僞學)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주희가 봉사(封事)를 올려 한탁주의 간사함을 밝히고 조여우의 억울함을 변호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문인 채원정(蔡元定)이 점을 쳐보니 둔괘(遯卦)가 동인괘(同人卦)로 변하였으므로 봉사의 초고를 불태우고 호를 둔옹(遯
翁)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周易筮述 卷8 推騐》 《吹劍錄外集》
[주06] 정초(旌招) : 학덕이 높은 선비를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림(儒林)의 천거로 벼슬에 부르는 일을 이르던 말이다.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이정은 사경화 류재성 김창효 (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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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尤菴受命遺墟碑
嗚呼。是爲尤菴宋先生受命之地也。歲己巳。羣兇將行大事。以先生道德爲世宗師。先逞毒手。是年二月。謫濟州。已又交章請拿。至是縣而後命至。六月八日也。嗚呼。在昔孔朱之聖。猶脫於魋嚞之禍。今先生不免焉。豈斯道之戹。有甚於反袂筮遯之世而然歟。嗚呼痛哉。先生在途。聞坤極之傾。痛哭絶食。告訣權遂菴尙夏曰。學問當主朱子。事業遵孝廟遺志。而忍痛含寃迫不得已八字。傳授勿失可也。朱子臨終。詔門人一直字。吾言亦不外此。時先生不食已累日。氣漸微。愈自整飭。屢促宣藥曰。一息垂絶。恐未及受命。前一日。白氣經天。是夜奎星隕。赤光貫屋。越六年甲戌。上大悟。特復官。賜諡文正。先生諱時烈。字英甫。恩津人。萬曆丁未生。孝廟有大志。延登儒碩。首加旌招。契合昭融。上薨退去。屢拜相職。終不起。肅宗初元。以壬人言。竄于海。及還。尊禮益至。已而世道壞亂。百怪騈作。而先生卒被大禍。嗚呼。尙忍言哉。是縣有先生院宇。以遺躅之在也。南之人士謂此舊址。亦不可無識。遂合謀具石。而要宜顯文以叙之。識昧文拙。不敢曼衍爲說。謹記先生臨命時事。以奉告後之過此地者。縣人任漢一,李厚眞始終先生事甚勤。其義俱可尙。並記下方。俾不至泯滅云。<끝>
한국문집총간 | 1996~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