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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 강해
- 설교 : 김강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19장이다. 레위기17장부터 그 이하는 소위 레위기의 후반부가 된다. 그런데 17-20장까지는 이스라엘 집에 성결법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특별히 17장은 피는 생명이고 거룩하니까 하나님 단에만 드리고 절대로 먹지 말아라. 피에 대한 규례가 있다. 피는 하나님의 단에 드리고 백성은 먹지 않도록 했는데 17장의 피에 대한 규례는 이스라엘 집이 생명을 속하는 피를 여호와께만 드려서 피로 말미암아 죄를 속함 받은 생명으로 여호와를 봉사하며 살게 하시는 명령이다.
그 다음 18-20장까지는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언약적 살의 규례가 이어져 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그들은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족속들을 본받지 말고 그렇게 본받지 말라는데 강조점이 주어진 것이 18장이다. 18장 제일 끝에를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내 명령을 지키고 너희 있기 전에 행하던 가증한 풍속을 하나라도 쫓음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항상 하나님을 여호와로 말씀해서 언약 체결적인 문구로 말씀하시는데 18장의 강조점은 하나님이 쫓아냈던 이전 백성들의 가증한 일을 하나라도 본받지 말아라. 하는데가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그래서 18장의 여러 죄목들은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기 전에 가나안 백성들의 죄들의 항목들을 나열하는데 강조점이 있다. 그 다음에 19장에서는 여호와의 거룩한 규례를 지켜라 하면서 여호와께서 자기 규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19장이고 그 다음 20장에는 다시 경고적으로 만일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속속의 가증한 일을 행하면 그들 또한 진노로 죽이실 것이다 하는 관점에서 이러한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죽여라. 이 반드시 죽여라 하는 이야기가 반복되어 있다. 그것이 이스라엘 집에 대한 성결법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제사장에 대한 성결법이 21-22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절기와 또 안식에 대한 성결법들이 그 이하에 쭉 이어져 있다. 그리고 제일 끝에는 지키면 복을 주고 안 지키면 벌을 칠 배나 더 하리라. 하는 언약적인 경고가 뒤에 붙어 있고 27장에는 하나님 앞에 십의 일과 초태생을 전체로 헌신해 드리고 무르지 못한다는 온전한 헌신에 대한 서원이 제일 끝에 붙어 있다.
그렇게 말함으로 시내 산에서 말씀하신 여호와의 말씀이 끝났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이 레위기는 시내산 성소 중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동거하시는 삶을 사시는가? 하는 문제가 레위기의 내용이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된 자에게 언약적 삶을 명하시기 때문에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말씀이 단의 처음과 끝 또는 중요한 지점에서 반복되며 내용은 종주 언약과 유사하다. 그전에 왕과 백성의 언약 형식 구조로 되어 있다. 나는 여호와인데 너희를 위해서 이러 이러한 일을 행한 분이 아니냐? 애굽에서 건져냈고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셨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내가 명하는 이런 것을 지켜라. 너희들이 지키면 복을 받고 안 지키면 이러 이러한 벌을 받을 것이다. 나는 여호와니라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19장이다. 레위기19장은 전체적인 개념인데 출애굽기20장부터 23장에서 언약의 모법인 십계명에 이어서 명하신 시행령과 상응한다. 여기 이러 이러한 규례를 쭉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디에 병행 구절이 있냐면 출애굽기20-23장과 비교해 보라 그 말이다. 그와 비슷하다. 출애굽기는 하나님 나라로 조직하는 규례가 강조점이고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교제의 공동체를 구현하는 것이 강조점이다. 비슷한 점은 먼저 모법인 십계명을 말씀하고 이어서 시행령을 말씀했는데 여기 19장은 시행령과 상응한다. 그래도 출애굽기의 시행령과 레위기의 시행령의 차이점은 출애굽기는 하나님 나라 조직과 관계가 있다. 나는 어떻게 너희 하나님이 되는가? 너희들은 어떤 관계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라의 구성원이 될 것인가? 하는 강조점이고 레위기는 내가 너희들과 함께 하니 너희들은 이러한 삶을 살아서 함께 하는 나라를 드러내라 하는데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그 말이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보면 십계명 모법을 말씀하시고 나서 시행령을 말씀할 때 나에게 단을 쌓으려면 토단을 쌓아라 내가 그 단에 임해서 복을 주리라.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께서 단에 임하신다. 그리고 히브리 종에 대한 규례를 말씀한다. 종은 칠 년만에 해방시키고 어떻게 어떻게 해라. 하는 말씀이 나와 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조직 내가 어떻게 너희중에 임해서 함께 하는 하나님으로서 단에 임할것이니까 너희들은 어떤 구성원으로 함께 하실것인가 해서 히브리 종에 대한 규례가 앞서고 있다.
그런데 레위기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성소에 함께 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 거룩한 삶을 살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 집에 들어가서 단에다 드리고 어떻게 모든 먹고 마심을 거룩하게 하고 하나님 성소에 속한 백성으로 거룩하게 할 것인가? 거기다가 강조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여기 처음 시작에서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문제가 강조되어 있지 하나님께 단을 쌓으면 내가 거기 임하리라. 시내산에 임하신 하나님이 토단에 임하리라 하는 체결적인 구조 보다는 너희들이 나한테 예물을 드릴려면 이러이러한 예물을 드려라. 레위기 처음부터 이렇게 말씀했다 여기서도 나한테 헛것을 위하지 말고 나를 위하고 또 나한테 화목제물을 드리고 이렇게 하나님앞에 예배드리는 문제로 시작이 되고 있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비슷한 구절들이 출애굽기에서 반복된다고 해서 그대로 종합시키면 안되고 차이점들을 비교해 보는 것이 좋다.
2절은 주제적인 서론이다. 여기 보면 너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것이 주제적인 서론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계속 말씀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그 규례를 따라 살므로 거룩하게 되라는 요구다. 이 거룩을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됨 그런 문제보다도 그들 중에 계신 하나님을 따라 사는 거룩이다. 하나님이 모세 제도 안에 임했으면 모세 제도를 따라 사는 것이 거룩이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임했으면 그 빛가운데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이 거룩이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로 살면 윤리고 어른은 어른으로 살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항상 그 구원 역사적인 시점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거룩함이니라. 그들 중에 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그가 그 백성에게 그의 어떠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거룩한 규례다. 왜냐하면 교제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불러 냈다. 내가 성소에 너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 아니냐? 그러니 너희들은 이제 가나안 백성들처럼 우상에 속한 백성이 되지 말고 너희들은 내 말을 잘들어서 나를 누리고 나를 나타내라 그런 말이 거룩한 규례다 그런 말이다.
이어서 3-10절까지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규례가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11-18절까지는 그 공동체의 규례가 기록이 되어 있고 그리고 19-31절은 그것을 더 확대 해석해서 모든 삶에서 구별의 규례를 말씀하고 있고 그리고 제일 끝에는 다시 결론으로 강조를 하는데 너희는 나의 모든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해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렇게 해서 마무리가 되어 있다.
먼저 3-10절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규례에 대해서 보겠다. 3절에 보니까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고 우상의 신상을 만들지 말아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 말이 반복되어 있다. 그리고 5절에 보니까 화목제 희생을 드릴 때는 열납되도록 드리고 또 그것을 먹으려면 7절에 열납되도록 먹어라. 만일에 열납되지 못하도록 먹으면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여기 보니까 부모를 공경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 화목제을 열납되도록 드리고 열납되도록 먹고 그 다음 9절을 보니까 곡물을 벨 때 밭 모퉁이까지 거두지 말고 떨어진 것을 줍지 말라. 떨어진 것을 타국인과 가난한 자를 위해서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11절부터 보니까 그런 문제보다도 도둑질하지 말고 또 이웃을 압제하지 말고 이런 말이 쭉 나와 있다. 그러니까 내용상 보면 10절까지가 11절 이하의 내용하고 좀 다르다.
10절까지는 주로 교제하는 것이다. 하나님 단에 화목제를 드리고 또 하나님의 화목제를 열납되도록 거룩하게 먹고 그리고 자기만 먹는 것이 아니라 밭 모퉁이 이삭을 가지고 가난한 자와 고아도 먹을 수 있도록 풍성히 주고 하나님의 단에 드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그런 교제가 10절까지 강조되어 있다.
11절 이하는 그런 문제보다도 다른 문제들을 말씀하고 있다. 3-10의 주보를 읽겠다.
하나님의 대리자인 부모를 공경하며 안식일에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께서 식물을 드리고 그 상에서 먹으며 가난한 자와 타국인과 함께 하나님이 베푸신 풍성함을 나누라 하는 말이 3-10절까지 요약한 내용이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에서는 단을 쌓아라 내가 그 단에 임하리라. 시내 산에 강림하신 구조를 단에 임하리라 그렇게 말하고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성될 것인가? 히브리 종이 어떻게 하는 자유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쭉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구체적인 율례들을 쭉 언급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행령들을 말씀한다. 그런데 레위기는 언약 공동체의 삶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단에 임하리라 하는 말보다도 부모 말을 잘듣고 안식일에 나를 즐거워 해라 왜냐하면 부모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되어있거든요? 그러니까 부모 말을 잘 듣고 그리고 안식일에 나를 즐거워 해라 그 말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내 앞에 화목제를 드리라. 그리고 그 화목제을 거룩하게 먹어라. 열납되도록 먹어라. 화목제는 너희들만 먹을것이 아니다. 실은 화목제는 임자도 먹고 다른 사람도 먹을수 있는 것이다. 거기다 확대시켜서 수확 때 이야기를 한다. 밭 모퉁이를 베지 말아라. 또 돌아서서 이삭을 줍지 말아라. 그래서 고아나 객이나 그리고 가난한 자가 먹도록 해라. 그렇게 해서 풍성한 교제의 삶이 강조가 되어 있다.
이렇게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상에서 교제할 뿐만 아니라 가나안 자와 교제한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화목제로 드린다. 그런 교제의 삶이다. 주로 안실일에 교제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부모가 대리자다. 그러니까 부모를 공경하고 내 안식일을 공경해라. 그리고 화목제을 나에게 열납되도록 드리고 그리고 아무리 화목제물이어도 열납 되도록 먹어라. 그것을 다른 식품으로 먹어 버리면 부정하니까 쫓겨 날 것이다. 내 상에서 기쁘게 먹어라. 그리고 네 밭의 포두나무나 모든 열매까지라도 너도 먹고 고아나 객도 먹도록 해라. 그렇게 해서 풍성한 교제의 삶에다 강조를 주어져 있다.
3-4절을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 나의 안식일을 지켜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헛것을 위하거나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열납되도록 먹어라. 제 3일에 먹어 성물을 더럽히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쳐 지리라. 아무리 화목제물이어서 3일 이상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틀까지다. 구약의 안식일의 양식은 이틀이고 화목제도 이틀이다.
모퉁이까지 수확하지 말고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해서 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이것을 거의 요약해서 다시 반복해서 적어 놨다. 성경을 다시 강론하려고 읽어보면 성경 기록된 방식으로 읽는 것이 최고다. 단지 여러분에게 이해하도록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 성경은 하나님이 이렇게 기록한 것이 제일 알기 좋다고 해석을 해 주셨는데 나는 이것이 어렵다고 바꿔 버리면 실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다시 강론하고 요약해서 읽어보면 읽어 볼수록 딱 이식으로 기록해야 제일 효과 있게 묘사해 준다.
그러면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는 말을 우리 식으로 하면 다 빼 버리고 뒤에다 한 번 넣어도 되는데 여기는 군대 군대 중요한 분기점에서 반복해서 넣고 있다. 그러니까 성경 자체를 읽으라 그 말이다. 단지 저는 도움이 되도록 하는 길잡이 일 뿐이지 이것을 길잡이로 삼아서 다시 성경 본문을 읽으면서 제가 설명한 의미를 다시 되새겨 보면 성경 본문이 얼마큼 우리에게 효과 있게 그것을 묘사해 주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앞에다 요약을 실고 뒤에다 거의 그것을 줄여서 반복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11-18절까지는 이제 좀 성격이 다르다. 교제에 대한 규례 문제 보다는 여기 보니까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 이런 재판할 때 이런 저런 공동체 규례가 주로 강조가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시는 공동체의 규례인데 전부 내용을 보면 공의와 사랑의 규례다.
내용을 전체로 요약하면 서로 진실하고 가난한 자와 장애자를 압제하지 말고 공의로 재판하며 이웃을 죽이려고 하지 말고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내용으로 요약되어 있다. 요약해서 읽어보니까 한마디로 공동체의 사랑의 규례 그 사랑은 공의까지 포함한 사랑의 규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읽어보면 11-12절을 보면 도적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을 말고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하여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는 한마디로 도적질하지 말고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그 말이다. 가장 큰 거짓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다. 왜 나는 여호와이기 때문에 이 여호와는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서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고 나는 너희 중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냐? 그러기 때문에 너희는 이렇게 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는 서로 진실 하라는 문제다. 자 그 다음을 보면 13-14을 보면 이웃을 압제하지 말고 빼앗지 말고 품꾼의 삯을 그날에 주면 그런데 성경의 표현을 그렇게 안되어 있다. 성경은 아주 표현이 좋다. 나는 그냥 글자를 줄일려고 하니까 그날에 주며 그랬는데 성경은 13절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그러면 품꾼을 밤새도록 기다렸겠지요? 왜 하루 일당을 받아야 되겠는데 그러니까 이 표현법을 봐서는 나간이 쓰면 성경의 묘미를 다 없애 버린 것이다. 그냥 일당은 그 날에 주어라. 이렇게 하면 거래 문제만 되는데 여기서는 왜 가난한자의 품속에 있어야 할 삯을 네 품속에 두고 가난한 자가 밤새껏 애타게 너는 품속에 품고 아침까지 편안히 잠을 자냐? 그렇게 하지 말아라 이런 말이다.
그러니까 표현된 데로 읽는 것이 제일 좋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지혜롭지 못하지요? 그런데 묘하게 사람이 설명하면 쉽고 성경을 직접 읽으면 어렵다는 말인지 우리가 잘못된 것이다. 하여튼 부지런히 읽고 알아야 할 것이다. 품꾼의 삯을 그 날에 주며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앞에 장애물을 두지 말며 우리 같으면 줄일려면 이렇게 하지 말고 뭐라할까요? 장애자를 괴롭히지 말고 그럴까요 그런데 여기서는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이런 표현법이 얼마나 좋은가? 귀 먹은 자 앞에다가 장애물을 놓아봤자 눈 뜨고 있으니까 건너가 버리겠지요? 그런데 이제 저주하면 못듣는다. 귀먹은 자를 저주하지 말며 소경 앞에 장애물을 두지 말고 내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더구나 이런데서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이 꼭 나온다. 다른 데서는 노인 앞에서 일어나라 거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라 그 말이 붙어 있다. 왜 이렇게 여기서는 약한자 앞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만 이런 사람을 저주하거나 장애물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거기다만 이 말이 붙어있다. 다른데는 이 말이 안붙어있다.
그러니까 그 말을 빼 놓을 수가 업다.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서는 보니까 11-12절은 서로 진실 하라는 말이고 13-14절은 가난한 자에 대해서 압제하지 말라는 말이다. 15-16절을 보면 재판 때 불의를 행치 말며 빈부를 가리지 말고 공의로 재판하며 성경은 더 풀어서 설명을 한다. 부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동정하지 말고 이런 저런 말이 있겠지요? 빈부를 가리지 말고 공의로 재판하며 돌아다니며 논단하지 말며 돌아 다니면서 사람을 자꾸 평가하는 것이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것은 재판과 관계된 문제다. 두루 돌아나니면서 말로 재판하고 다닌 것이다.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논단하지 말고 재판을 할지라도 그를 죽일려고 하지 말아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해야지 죽일려고 하지 말아라.
여기서는 전부 재판과 관계된 공의로운 문제다. 17-18절은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하지 않도록 그를 책선 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는 사랑에 대한 말이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아라. 그리고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하지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망해 줘라. 그리고 원수를 갚지 말고 동포를 원망하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해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것은 이웃 사랑에 대한 문제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께서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강령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는 형제 사랑에 대한 문제로 공동체의 규례를 마무리 짓고 있다. 그런데 요는 문제는 단어는 똑 같아도 형제 사랑이라는 말이 구약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과 주님께서 율법의 강령이니라 하면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했을 때는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이 똑 같아서 똑 같은 것이 아니라 모세 제도 때는 가령 네 원수를 갚지 말고 해도 잘못하면 재판에 맡기는 것이다. 자기가 용서하면 안되니까. 누가 나한테 잘못했는데 용서해야지 하면 안되고 반드시 율법은 맡은 자들의 판단을 받아서 속제제물을 내든지 보상을 하던지 해야지 우리끼리만 알고 봐주지 이런 식으로 용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해도 적군이 쳐들어오면 싸워야 되는 것이지 또 적군은 열심히 싸워야 되고 성전에 들어오면 막아야 되는 것이지 사랑하라 했으니 성전에 들어오게 하면 큰일 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도 모세 제도를 시행함으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한 것이지 모세 제도를 넘어선 사랑은 없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 도안에서는 그런 방식으로는 하나님이 나라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강령이라 했을 때 까지라도 강령의 의미는 이제는 신약 교회에서는 새로운 의미로 계명이 채워지는 것이지 모세 제도를 확대해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이다. 그런 것을 꼭 구별을 해야 한다. 구원 역사에서 말씀하던 시대 어린 아이한테 너 사람되라 장가간 아들한체 사람되라 전혀 내용이 다르다. 어렸을 때 내가 숙제 잘하니까 이뻐하더라 심부름 잘하니까 이뻐하고 아버지 오늘 숙제좀 내 주시오 내가 사람될라요 그러면 안된다. 전혀 안된다. 어른 됐다는 새로운 관계로 다시 해석이 되어야지 어렸을 때 사람되라고 하면서 규례를 주었다. 몇시까지 들어오고 씻고 이렇게 하라 했더니 이뻐하시더라 그러면 커서는 어떻게 할까 발만 닦을 것이 아니라 샤워까지 하면 더 이뻐하시겠구나.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구약을 확대해서 신약으로 오면 안되고 구약은 구약이라는 관계에서 윤리고 신약은 신약은 아들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중에 오셨다는 관계에서 새로운 윤리다. 그러니까 그것을 확대해석하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관계에서 새롭게 해석을 해야한다. 말은 똑 같다.
여기서는 전부 사랑에 대한 규례가 강조되어 있다. 그러니까 앞에 요약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서로 진실하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말고 공의로으 판단을 하고 그리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 이처럼 언약 공동체를 서로 진실하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을 집행하고 그리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규례가 여기 있는 규례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것하고 성격이 좀 다르다. 앞에는 가난한 자를 위해서 밭의 모퉁이것을 거두지 말라 했을 때라도 분명히 객과 고아를 사랑하지만 그것은 그 사랑의 의미가 그저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에서 누구를 압제하냐 그런 문제보다는 어떻게 함께 나누는가? 하나님의 화목제물을 상에 먹는 것처럼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들판의 곡식을 함께 나누는가? 하는 그런 나눔 사랑의 교제가 강조고 11-18절을 그런 강조점은 아니다. 그러니까 차이점이 나니까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좋다.
그 다음19-31절은 그런 삶이 더욱 확대되어 있는데 모든 일에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와 구별을 지키라. 과실도 제 4년에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고 오년에 먹어라. 피채 먹지 말고 이방의 풍속을 본받지 말고 여호와만 섬겨라. 그들이 이처럼 여호와의 공동체로서 여호와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 앞에서 교제하고 서로를 진실하게 보살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런 삶은 그들의 전 삶의 구조에까지 확대되어야 하고 이방인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될 것이다. 하는 문제가 여기 있는 문제다. 그러니까 19-22절을 보면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니라 다시 말하고 있다. 그전에는 이런 말이 없었는데 여기서는 내 규례를 지킬지니라 하니까 분명히 형식상에도 구별이 주어져 있고 그리고 그의 규례를 말씀하고 있는데 육축을 다른 종류와 교합하지 말고 두 종류의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고 두 제료로 직제한 옷을 입지 말며 해방되지 못하고 정혼한 씨종과 행음하지 말라. 그러니까 한다미로 하면 섞으지 말라 그 말이다. 그것이 19-22절에 섞으지 말라는 말이다.
이것은 농대 다니는 사람이 호박하고 오이하고 접붙여서 뭐 하지 말라 그 말이 아니다. 이것을 과학 책으로 읽으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래서 과학의 한계점 하나님이 주신 각 종류대로만 하지 혼종을 만들면 안된다. 그것은 과학이 경계를 넘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할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여기서는 특별한 도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구별의 삶을 살라고 하면서 그런 규례를 주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옷도 혼방 옷을 입으면 안되고 또 곡식도 두 종자를 한 밭에 뿌리면 안되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주신 질서를 따라서 모든 삶에 있어서 구별된 질서를 따라서 살아라 그런 말이다. 그리고 여기 더 보면 해방되지 못한 씨종과 행음하지 말아라. 만일에 그 종이 아직 해방은 안됐는데 다른 사람과 혼인했으면 주인이라도 그 종을 건드리면 둘이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종이기 때문에 죽지를 않는다. 그러나 속건제물을 드리고 속죄해야 할 것이다. 그 주인하고 종하고도 섞으면 안된다. 왜 그 종이 이미 정혼해 버렸기 때문에 그는 자기 아내로 취할 수 없다. 만일에 이 종이 정혼을 하지 안했으면 그는 자기 아내로 취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주인과 종도 한마디로 섞으면 안된다. 그런 말이다. 한마디로 섞지 말라는 말이다.
그리고 24-25절은 과목을 심으면 3년 동안은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고 그리고 먹지 말고 그리고 제 4년에는 모든 것이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드려 찬송할것이고 5년에는 먹으면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니라 그렇게 약속하고 있다. 그러니까 곡식을 먹을 때까지라도 3년 까지는 아직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더러운 것으로 생각하라. 그리고 제 4년에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려라. 그리고 5년에는 먹으라. 그래야 가나안 땅에 곡식이 풍성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나안 땅에 풍성한 것을 거둘 때 까지라도 먼저 하나님앞에 드려야 되고 후에 먹어야되고 하나님앞에 드리기 전까지는 아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어서 드릴수가 없다. 그런 의미로 먹을수가 없다. 그러니까 과목을 거둘 때 까지라도 그런 방식으로 거둬서 먼저 하나님께 드려라. 드리기 전에는 아직 거룩한 것이 아니다. 드린 후에 네가 먹음으로 거룩하게 먹어라. 그래야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그 과목이 풍성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26-28절을 보면 모든 것을 피있는채 먹지 말고 복수를 하지 말고 또 이방의 풍속을 본받지 말아라. 한마디로 요약을 해 버렸다. 26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피채 먹지 말며 복수를 하지 말고 술수를 행하지 말고 머리가를 둥글게 깍지 말고 수염 끝을 손상하지 말고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라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서는 특별히 죽은 자를 애도하는 문제만 말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여러 풍속들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 대표적인 복술하고 점치는 일이다. 우상섬기는 것이다. 이것을 제일 앞에서는 4절을 신상을 만들지 말고 헛것을 위하지 말고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방인과 구별된 삶을 말하면서 그들은 이방인의 풍속을 따라 복술을 행해서는 안되고 이방인의 풍속을 따라 이런 저런 단장을 해서는 안되고 그리고 이방인의 풍속을 따라 죽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면 안되고 그리고 몸에 무늬를 놓지 말아라. 이것은 그 당시 하나님이 쫓아내신 가나안 땅의 풍속들이다. 그렇게 구별을 말씀하고 있다. 그 다음 29절을 보면 네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하지 말라 음풍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 보니까 딸을 더럽혀 기생이 되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하고 그리고 안식일을 지켜 성소를 공경하라는 말하고 같이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같이 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하나님이 쫓아내신 가나안 땅 백성들은 성소의 음행이 성행했었다. 왜냐하면 생산의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많이 음행을 했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고 성소를 공경하라 하는 문제하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딸을 기생 만드는 문제하고 연결시키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성전 창기가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말이다. 그냥 단순한 음행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음행으로 온 땅이 더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함께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31절에 너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고 추종하지 말라 나는 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특별히 여기서 26절에 말씀했던 그 말씀을 거의 한 번 다시 반복하면서 더럽히지 말라고 반복하고 있다. 그러니까 26절-31절까지는 실은 이방 풍속과 전부 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26하고 31절은 서로 상응한다. 서론과 결론으로 서로 상응하는 그런 구조다. 이방 풍속과 전부 관계가 있다. 그 다음 32절부터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될 규례들이다. 여기서는 이방 풍속과 관계된 그런 것이 아니다. 센머리 앞에서 일어서고 노인을 공경하라. 제일 처음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했다. 여기서는 노인을 공경하라는 말로 다시 마무리를 짓고 있는 그런 문맥들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말하고 있다. 왜 노인은 마땅히 공경할 자이니까. 권위가 있다. 노인은 힘이 없으니까 그런 의미하고는 다르다. 아까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말라 했을 때 그들은 힘이 없으니까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경외해야 되고 여기는 노인은 마땅히 공경해야 하니까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노인을 마땅히 공경해야 된다. 왜 그들이 한마디로 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 급이다. 그래야 그들이 신접한와 박수를 쫓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처음에 서론에 있었던 그런 것과 상응하는 구조로 결론이 진행되고 있다.
32-26절을 보면 센머리 앞에 일어서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타국인이 너희 가운데 함께 있거든 33절 학대하지 말아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타국인이 되었지 않느냐?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리고 35절에 보면 재판에든지 도량에든지 공의를 행해라. 그러면서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리고 37절에 너희는 나의 모든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렇게 결론을 맺고 있다.
32-36절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질서와 사랑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고 있다. 센 머리앞에서 일어서고 공경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거하는 타국인을 학대하지 말고 본국인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에서 객이 되었더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경외하는 질서는 이전에는 부모를 공경하라 했는데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공경하라 함으로 공경이 더 확대되어 있고 그리고 여기 보니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했는데 여기는 타국인에 대한 문제로 확대되어 있다. 타국인을 본국인 같이 여기라.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그네가 되었을 때 너희를 애굽에서 건지신 여호와가 아니냐?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하신 관계로 이스라엘 백성이 타국인을 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전에 네 이웃을 사랑하며 원수를 사랑하며 그런 것이 확대되어 있다. 그리고 공의로운 일을 해라. 재판이든지 도량형이든지 불의를 행치말고 공의롭게 해라.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한 여호와니라. 그렇게 해서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질서 공경하고 교제하고 그리고 그럴뿐만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공의로 행하고 그런 문제들을 세가지 규례에서 반복함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우리 같으면 여기 이런 것을 말하지 않고 앞으로 그냥 옮겨 버리면 되겠지요? 그런데 또 뒤에다 부록을 붙이는 것처럼 다시 붙이고 있다. 다시 보면 단순한 부록이 아니라 이전에 것을 더 확대하고 강화시키는 의미로 반복되어 있다. 이제는 부모만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센머리 앞에 일어서야 된다. 이웃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인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야 된다. 그리고 이제는 재판 뿐만 아니라 모든 도량형에 까지 공의를 행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전체를 묶는 방식으로 결론이 되어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라 내가 여호와니라.왜냐하면 그들은 이 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세상을 닮지 않고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을 나타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아버지가 되사 하늘에 속한 생명의 교제를 그의 교회에 주셨다. 교회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서 그의 몸과 지체로서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따라 그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야 하며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신약 구절들을 읽어보면 좋겠지요?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 중에 성소를 짓고 함께 하셨다. 그리고 레위기는 그 성소에 들어오게 하셔서 예물을 드리게 하시고 그 상에서먹고 즐거워 하게 하셨다. 그럴 뿐만 아니라 레위기를 보면 그들의 절기며 모든 땅이며 여호와의 성소적인 구조로 전부 거룩하게 했다. 이제는 레위기 제일 끝에 보면 초태생이고 십일조고 모든 것을 하나님앞에 드려진 것으로 되어 있고 무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전체가 헌신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내산애 강림하셔서 그들과 언약 체결하신 삶이다. 이 은혜으 일을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질서로 완성하셨다.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우리가 하늘 성소에 속한다. 이제는 하늘 성소에 속한 백성으로 교회를 거룩하게 하셨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것처럼 행하라 했는데 우리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 한 영으로 한 몸을 이루셨다. 그런 관계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런 관계로 우리들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고 그런 관계로 몸을 이루는 사랑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이 여기 인용된 구절들 벧전1장이나 엡5:1절 이하에서 나오는 말씀들이다.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옛날에 주신 이런 말씀이 왜 신약 교회의 말씀이 되는가? 그냥 이것을 그대로 우리한테 연결을 해서는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안되고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가 하는 관계에서 다시 이것을 읽어야 한다. 그랬을 때만 어렸을 때의 그림자는 다 벗겨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새 계명의 윤리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것이 신약에서 적용하는 윤리다.
신약에서 새로운 십계명을 선언하지를 않는다. 특별히 마5장에서 그렇게 나타나 있다. 새롭게 선언한 것이 아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했을 때 그것을 새로운 관계에서 윤리다.
지금은 신상을 만들지 말고 하는 그런 우상 숭배 정도가 아니다. 그전에는 우상 안 만들고 성소에 가면 되는데 지금은 그런 것 안 만들었으니까 우상 안 섬기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스 도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겨야 된다. 그리스도를 빼놓고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서 모든 것은 잘못하면 다 우상이된다. 더욱 확대되고 깊어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우리 집에서 우상 안 만들고 그런 정도로 우상을 안섬기고 그런 것이 아니다. 신약은 세상을 사랑하면 간음하는 여인같다. 음행한 여인이라고 막 묘사를 해버린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늘에 속한 질서가 왔기 때문에 세상에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된다. 전혀 세로운 관계로 윤리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따라 서로를 존경하고 서로를 가르치고 반드시 책선하라 했거든요? 서로를 가르쳐야 되고 그럴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앞에 화목제로 드려야 되고 또 내가 부지런히 수고해서 형제를 먹여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밭모퉁이를 베지 말라고 했으니까 이것은 랍비들은 몇%를 정한 것이다. 밭에 모퉁이라 해서 한 뼘이나 떼어놓으면 안되겠지요? 그래도 한평쯤 뗀다거나 해서 랍비들이 다 정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것은 안정한다. 모퉁이뿐만 아니다. 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몸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몸을 주신 것으로 사랑의 봉사를 해야 한다. 구약 백성은 그렇게 하지 않고 모퉁이만 나 두면 된다. 만일에 잘만 베면 이삭 안 떨어져도 된다. 다시 돌아가서 안 주우면 되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삭이 아니다. 요새 같으면 이삭 떨어뜨려 놓고 주어 먹으라고 그러면 기분 나쁘다. 그러면 안된다. 그것이 아니다. 지금은 자기가 부지런히 수고해서 고린도후서8-9장이 그것이다. 주님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었지 않냐? 그러니까 너희들도 너희에게 있는 것으로 형제를 공급해라.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일에 참여해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을 말하기를 내가 형제를 위해서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내가 제물만 소비 한 것이 아니라 내 몸까지 소비하겠다. 왜 주님께서 몸을 주셔서 너희들을 봉사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 윤리를 기독론적인 방식으로 다시 해석을 하는 것이 신약의 윤리지 그냥 이것을 확대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교회를 그런 방식으로 사랑을 해야 한다. 실은 그렇다. 우리가 부모가 자식을 키울 때 큰 아들한테 몇%로 둘째 아들 몇%로 다 정해둔다. 그리고 큰 아들 것 자기가 다 써먹고 없고 너는 네것 먹었으니까 끝이고 그러면 둘째 아들 그렇게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내 누후 대책 이것은 절대 손대면 안되 이런 식으로 사는 부모가 없다. 만일에 큰 아들이 망해버리면 둘째 아들 줄 몫이 없다. 먼저 굶은 아들이 먼저 바쁘니까 먼저 줘야되고 둘째 아들은 그 다음 볼일이다. 이젠 둘째 아들이 크서 안뒤로 큰 싸움 날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한테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당장 큰 아들이 굶으니까. 그 다음 내 노후 대책도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이것 다 주었다가는 나는 끝나겠구나 그렇게 안된다. 왜냐하면 하면 몇분의 몇으로 봉사를 안한다. 회사가 같으면 몇분의 몇 하면 끝이다. 국가도 망해도 세금 내면 끝이고 더 낼것이 없다.
그런데 가족 공동체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교회를 섬기는 방식이다. 그런데 구약에는 이런 규례로 되어 있다. 신약 때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관계에서 서로를 해석하고 봉사해 줘야 한다. 거듭 말하지만 교회는 몇 명으로 구성된 단체가 아니니까 이번 성탄절에는 내가 만원만 내면 우리 집사님들 가정이 한 20가정되니까 한 20만원 구제금이 되겠구나. 올 성탄절 때는 만원만 내자. 그런 식으로 여러분이 신앙 생활을 하면 글세 교회는 유지가 될 것이다. 교회는 그래도 폼잡아서 성탄절 때 얼마 구제하고 그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섬기는 것이겠는가? 그런데 보이는 현상으로 이 보이는 단체만 유지할려는 방식으로 여러분이 계산해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 놓고 하나님이 주시리라 해서 물론 주시기를 주시겠지요? 안 드린다고 안 주신 분은 아니니까 주시겠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기쁨으로 누리는 삶은 아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봉사하라 그 말이다. 그러면 저는 더 고약한 요구를 하고 있지요? 다른 교회는 큰 사업이나 있을 때 집팔아라 하는데 나는 사업도 없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하니까 날마다 팔아라는 말인지 이것 참 고약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전혀 고약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짐이 더 무겁구나. 다른데보다 자유를 준 듯 한데 더 무겁구나. 그럴 것이다. 가족끼리는 알아서 하시라는 것이 제일 쉽다. 남하고는 그것이 제일 어려운 계산법이다. 가족끼리는 평생을 같이 살아서 너무 너무 쉬운 이야기인데 아무리 친한 친구도 우리 평생을 같이 살자 하면 조금 놀다 자기 집에 가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기독교인만 지키는 윤리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윤리다. 이것은 여러분 것을 전부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무엇을 여러분이 최선을 다하는지 여러분이 분별할 것이고 목사도 저 사람이 최선을 다한다 안한다 하는 재판관이 아니다. 구약 때처럼 그런 감독관이 없다. 여러분이 하실 일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조금 내고 자기 자식 키우고 부자로 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가난해도 죽어라고 구제하고 항상 가난한 사람이 있고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열매는 주님 만나면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의 몸으로 산다는 질서가 무엇인지 알면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알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목사가 할 수가 없는 일이다.
지금 19장에 있는 율례들은 그런 율례들이다. 그러니까 언약 공동체로서 어떻게 교제의 공동체를 누릴 것인가? 그것은 사랑과 공의로운 통치들이다. 그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질서를 따라 공계하고 교훈을 받고 서로 고쳐 주어야 한다. 그런 문제로 언급해 주고 있다.
그리스 도안에서 새로운 언약 공동체로서 서로가 몸이 되었으니까 서로 거짓말을 않고 서로를 거짓없이 도와 주어야 되고 그리고 한몸의 속한 자로서 사랑의 수고를 잘 감당해야 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땅에 속한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단지 우상 섬김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몸의 교제를 떠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근심하고 살아서도 안된다. 왜 이미 영원한 생명이 왔으니까. 그런 식으로 살아라. 전혀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윤리를 드러내라 그 말이다. 그것이 여기 19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20장에서는 이러이러한 죄인을 둘다 죽여라. 하는 말이 강조다. 여러분이 읽어보면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 18장하고 20장하고 내용이 엇비슷하다. 그런데 18장은 항목을 쭉 나열하고 20장은 이러이러한 자는 둘다 죽여라. 그러니까 그 나라는 그런 죄인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을 것이다. 왜 이것은 가증한 죄이니까. 반복 구조로 되어 있어서 알기 쉽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구약 교훈 법이다. 반복법이다.
- 설교 : 김강호 목사
레위기 20장이다. 17장부터 20장의 한 단락의 마지막이다. 그냥 이런 저런 규례를 모아 논 것이 아니라 어떤 체계를 가지고 배열했기 때문에 그런 구조들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17장-20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집에 거룩에 대해서 말씀하신 규례다. 17장은 피를 제사는 하나님께만 드리고 피는 하나님의 단에다만 드리고 일체 먹지 말도록 한 것이 17장내용이다. 그러니까 피는 죄를 속하도록 주셨기 때문에 이 생명을 속하는 피는 하나님께만 드리고 너희는 먹지 말아라 한 것이 17장에 내용이다.
그래서 17장은 생명의 피를 속하도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고 그들은 그 피를 하나님의 단에 드리고 또 하나님의 단에다만 예배하고 그렇게 함으로 피로 속함 받은 백성으로 살라는 규례가 17장이다.
이어서 18장에서 이 피로 속함 받은 백성이 하나님께서 쫓아내신 가나안 족속을 본받지 말아라 하는 것이 강조점이 주어져 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백성들의 죄의 항목들을 나열하는 것이 강조점이다. 그들은 가나안 땅의 백성을 따라 살아서는 안될뿐만 아니라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 그 거럭한 규례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19장에서 말씀하신 내용이고 20장은 이제 이 단락의 마지막인데 만일에 가나안 땅에서 이러이러한 죄를 지은 사람은 둘다 죽여라 전부 죽여라 하는 말이 열쇠되는 말이다. 다 죽이면 그 땅에는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일에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백성들의 죄를 지으면 그런 사람들을 다 죽이고 만일에 그런 죄를 계속해서 지으면 그 땅이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은 토해 내쳐버려서 그 땅에는 그런 사람이 없게 하겠다. 그렇게 해서 가증한 죄에 대한 경고가 강조점인데 거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가나안 땅에는 그런 죄가 없게 하겠다 하는 것이 목표다. 이러이러한 죄는 너무너무 나쁘니까 하나님이 죽인다 하는 그런 형벌적인 문제보다는 핵심은 그런 자들을 다 죽임으로 가나안 땅에는 그런 자들을 없게 하겟고 만일에 있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토해내쳐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그 땅에는 그런 자가 없게 하겠다. 그렇게 해서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거룩한 나라로 완성하신 것이 이 20장의 내용이다.
20장에는 이스라엘이 거룩해야 되겠다. 특별히 가증한 죄를 멸절해서 거룩해야 되겠다. 하는 것이 20장의 내용이다. 주제는 그 결론에가 나타나 있는데 너희는 내게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너희를 내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중에서 구별하였음이라 하는 이 언약적인 언어가 결론에 나타나 있고 어덯게 거룩하게 하는가? 범죄자를 다 죽임으로 거룩하게 한다고 되어 있다.
전체를 요약해 보면 거룩한 하나님 여호와의 소유가 된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이전 여호와께서 쫓아내신 가증한 족속의 죄를 짓는 자와 그의 영향을 받은 자가 하나라도 있지 못할 것이다. 하는 내용이다.
먼저 2-5절을 보면 우상에 속한 자는 다 죽이라고 그렇게 나와 있다. 2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여라. 누가 그 지방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여라. 나도 그 백성에게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이름을 욕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려야 되는데 가장 가증한 방식으로 자식을 몰렉에게 주었으니 그는 내 이름과 내 성소를 더럽혔으니 나도 죽이겠고 그 지방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여라. 만일에 그 지방 사람들이 못본체 하고 나 두면 내가 그 사람들만 죽인 것이 아니라 나중에 보면 그 사람의 영향을 받아서 음란히 우상을 섬긴 자는 다 죽이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지방 사람보고 죽이라고 그랬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이 그 지방 사람들에게 있고 그 지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행자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그 백성이 미워하고 하나님이 죽이는 자를 그 백성이 죽여야 되고 그렇게 해서 그 땅에 우상 섬기는 자가 없도록 해라. 만일에 그 지방 사람이 못본체 하면 같이 죽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백성 삼으려고 부르셨으니 너희들은 내 소유가 되었으니 18장에 이방 백성을 본 받지 말라. 20장에 나를 대신 해서 악한 자를 진멸해라 그런 자를 없도록 하고 너도 그를 죽여야 되고 나도 너와 함께 해서 그를 죽이리라. 나와 함께 싸우자 이 나라에는 그런 자가 없도록 하라. 그렇게 해서 그 나라를 완전히 거룩한 나라로 성별시킨 내용으로 되어 있다.
주보를 읽겠다. 몰렉에게 제사하는 자는 누구나 그 지방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여라. 나도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을 욕되게 하였음이라. 그 지방 사람이 못본체 하고 그를 죽이지 아니하면 내가 진노하여 그와 그를 본 받아 몰렉을 음란히 섬기는 모든 사람들을 그 백성중에서 끊으리라. 이것이 20장을 여는 대표적인 규례다. 나머지는 이제 이 우상에게 속한 죄들을 쭉 나열하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그런 죄인과 싸워야 되고 죽여야 되는데 그런 내용으로 구체와 될 것이다.
62절부터 16절까지가 또 한 단락인데 여기6절을 보면 (레20:6)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레20:7) 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들은 그런 자들을 본 받지 말고 거룩하라 그 말이다. 그리고 나서 8절에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무릇 하면서 규례가 쭉 나온다. 다시 우상 섬긴 문제가 6절부터 7절부터 나오고 이어서 8절부터 내 규례를 지키라 하면서 거룩한 규례가 나온다. 이 규례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해야 할 규례다. 여기서 죽임 받을 대상은 음란하듯 신접한 자들이 행한 규례다. 그렇게 해서 제일 앞에는 우상 섬기는 제일 사악한 문제 아들을 몰렉에게 주어 죽이는 일 그들을 죽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속한 자로서 이러이러한 죄를 짓는 자들도 다 죽일것이라 하면서 6절에 다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몰렉에게 자식을 주는 일과 함께 그런 자들을 숨기는 선지자들 말하자면 신접한 자들 그런 사람들을 본받지 말고 죽이라 너희들은 내 소유가 아니냐? 너희들은 그들에게 속한 악한 자를 죽임으로 내 규례를 지켜라. 그것이 6절 이하에서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는 내용이다.
주보.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너희는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키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둘다 죽여서 너희중에 악행을 없게 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부모를 저주한자 간음한자 계모나 자부와 동침한자 동성 연애자 아내와 장모를 아울러 취한자 짐승과 교접한자. 반복되는 말은 이런 일을 행한자는 둘다 죽여라 다 죽여라 이런 말이다. 그 말이 반복되고 있다.
이들은 누구에게 속한 자인가? 앞에는 물렉을 섬기는 자요 거짓 선지자인 신접한자 박수 우상 선지자 그들에게 속한 자다. 그런데 너희들은 내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나에게 예물을 드리고 신접한 자를 따라서 이런 저런 죄를 지은 자를 너희들이 대신 죽여라. 너희들이 죽이면 나도 그들을 백성 중에서 끊으마 그런 이야기다. 그것이 20장에서 말하는 중심이다.
물론 이런 일에 있어서 합법한 결혼의 한계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결혼 제도를 설립하는 핵심보다는 우상에 속한 악한 죄들이 없게 하는데 강조를 하고 있다.
그 다음 17절부터 21절은 또 성적인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누구든지 자매 어미의 딸이나 아비의 딸을 취하는 자 또 경도하는 여인과 관계하는 자 이모나 고모의 하체를 범하는 자 또 백숙모와 동침하는 자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자 이런 자도 다 죽이라 그 말이다.
주보에는 성경에 있는 구절들을 요약을 해 놨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죽냐면 자식이 없이 죽으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 왜 하필이면 이것을 새로운 문단을 나누었는지 17절부터 그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앞에서는 다 죽이라 그런 말이 강조되어 있고 뒤에서는 다 죽이라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런 말보다는 죽인 이유들이 더 많이 설명이 되어 있다. 그런 죄들이 그래서 자매를 범하면 하체를 범하면 부끄러운 일인데 그렇게 해서 죄를 당하리라. 여긴 죽이라는 말은 직접 없지만 죄를 당하리라. 그리고 경도한 여인과 관계를 한자도 피의 근원을 드러냈기 때문에 둘다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또 골육지친을 범하면 그도 죄를 당할것이고 그렇게 무자하게 죽으리라. 그런 말로 되어 있다.
실은 18장에 있는 죄목들이 함께 언급되어 있다. 단지 왜 17절부터 문단을 구분을 해 놨는지 이것은 잘 모르겠다.
22-26절이다. 여기도 새로운 단락인데 22절을 보면 너희는 나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여 내가 인도하여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하여 내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서 새로운 시작을 가져오고 있다. 이 앞에 17절을 문단은 나누어져 있지만 어떤 새로운 출발점들은 가지고 있지는 않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런 말이 있다거나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그런 말이 없다. 그런데 나누어져 있고 22절은 그런 선명한 구분이 있다. 너희들이 내 규례를 지켜야 가나안 땅이 너희를 토해 내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해서 언약의 땅에 삶과 관계된 방식으로 한층 더 강화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주보.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키라. 그리 하여야 너희에게 거하게 하는 땅이 너희를 토해 내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내가 가증히 여겨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쫓지 말라. 내가 전에 너희에게 이른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리라. 나는 너희를 만 민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조금 요약해서 적어 놨는데 너희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내 규례를 잘 지켜라. 내가 쫓아 낸 백성들의 풍속을 본 받지 말아라. 내가 조상들에게 약속한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면 너희는 내가 쫓아 낸 백성을 본 받지 말아라. 내가 너희를 모든 백성중에서 구별하여 내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구별했고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준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희들이 그 땅을 받으면 그 땅에서 쫓겨난 백성들을 본 받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 내용이 23절을 보면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신 족속의 풍속을 쫓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함으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내가 전에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으로 삼게 하리라 하였노라. 내가 너희를 만민중에서 구별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것까지가 언약을 체결하는 그런 문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신 언약을 회상하고 그 언약이 성취되었을 때 하나님은 가나안 땅 백성의 죄가 관영하면 그들을 쫓아내리라 했는데 그들은 가증한 죄를 지었으니까 그들을 본 본받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한 번 더 말씀하고 나서 25절에 보면 음식물의 정하고 부정한 것으로 더럽히지 말라. 그리고 나서 26절에 결론적인 말을 또 하고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너희는 내 소유이니까. 그렇게 말씀하고 27절에 또 신접한 자 박수를 반드시 죽이라는 말이 또 나오고 있다.
이런 것이 동심원적인 물결 구조라고 그랬다. 그러니까 27절이하에서는 다시 언약적인 문제는 조상들때부터 다시 회상하고 나서 그 가나안 땅에서 가증한 죄를 짓지 아니할뿐만 아니라 음식물의 정하고 부정한 것을 잘 지켜라. 그 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볼때는 음식물의 정하고 부정한 것을 별볼일 없고 그 앞에서 가증한 죄가 너무너무 더러운데 성경은 제일 끝에다가 음식물의 정하고 부정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다가 언약 체결적인 문구를 길게 삽입하고 있다. 실은 그들이 가증한 죄를 지었는데 그들을 여기서는 언급하지않고 이 앞에 이미 언급을 했다. 이것이 더 강화된 것이다. 이런 죄를 짓지 아니할뿐만 아니라 그들의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그들은 생에 거룩을 지켜야 된다. 그들의 먹는 일상 생활에서 그렇게 해서 성화를 한층더 진행 시켜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먹고 마시는 것은 별볼일 없고 도덕적인 죄는 고약한 것이고 그렇지만 성경은 가나안 땅 백성의 가증한 죄를 쭉 열거하고 나서 그 다음에 한 번 더 언약 체결을 조상들때부터 다시 언급해서 가나안 땅을 상속한 일까지 언급하고 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음식물 까지 거룩하게 해서 완전히 거룩하게 해라. 그렇게 해서 마무리를 짓고 있다. 그 말이다.
그리고 나서 27절에 한 번더 쉽게 붙이면 우상 선지자다. 왜냐하면 술객과 박수들 그들은 자식을 몰렉에게 주도록 유혹하는 자들이다. 말하자면 우상 선지자다. 만일에 그런 사람이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돌로쳐라. 이스라엘 백성중에 만일에 이런 우상에 속한 선지자가 생기면 반드시 죽이라고 되어 있다. 제일 처음에는 그 지방 사람들이 몰수히 달려들어서 죽이라고 그랬다. 만일에 그 지방 사람들이 그 일을 못본체 하면 그 지방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리라는 그 말이다. 왜 그에게 유혹되어서 함께 음란히 우상섬김으로 죽이니까. 해 놓고 제일 끝에 다시 그 말을 반복하고 있는 식이다. 박수나 우상을 섬긴 자는 죽여라. 그렇게 해서 한 번 경고적인 문구로 제일 마지막에 언급함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가증한 자들을 완전히 죽이는가 하는 문제를 강화시켜서 마치고 있다. 이런 27절 말씀 같으면 일반 논문으로 보면 쓸데 없는 말이다. 이미 앞에 다 언급 되었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제일 뒤에 이것을 다시 붙여 놨다. 어떤 의미로 보면 기분 나쁜 말이다.
한참 좋은 말하다가 제일 끝에 가서 이말 한 번 딱 하면 이제까지 한 말이 이 말이다. 그런 표현법이다. 그래서 만일에 너희 자녀들이 박수나 술객이 되면 그를 죽여라.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소위 구약에서는 신성 모독 죄를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손을 대지 않고 죽이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죽이는 일에 있어서 그에게 아무 부정도 옮기지 않고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하니까 이것은 살인죄가 안된다. 왜 피흘린 죄가 그에게 있으니까. 그렇게 해서 그를 죽임으로 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오히려 그의 피로부터 깨끗케 되고 그리고 그런 사악한 죄를 짓지 않고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이 흐르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시면 이것까지 거룩하게 먹어서 완전히 거룩해라. 그렇게 함으로 이스라엘 집의 성화에 대한 명령들을 마무리 짓고 있다.
20장의 죄의 목록은 18장과 비슷하다. 차이점은 18장은 가나안 땅 족속의 죄의 항목에 치중하고 이러이러한 벌을 받은 다는 문제보다도 이렇게 하지 말아라고 항목들을 나열하고 있는 것이 18장이고 20장은 그러한 죄가 가증하다고 말하고 있고 그러한 가증한 죄를 지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냈기 때문에 그러한 가증한 죄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소유가 된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에게 준 가나안 땅에서는 없게 하라는 거룩을 강조한다. 20장에 열쇠되는 말은 다 죽이라 이다. 둘다 죽이라 이런 말이다. 그런 의미로 가증한 죄와 그런 사람이 가나안 땅에는 없는 것이다.
만일에 그런 사람을 그냥 두면 그 땅에 토해 내치면 가나안 족속이 쫓겨난 것처럼 그들도 쫓겨날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땅으로 옮겨간 것이 그런 이유다. 이것은 그런 죄는 너무나 더럽다 강조되지만 핵심은 더럽다는 강조보다는 다 죽이라 그렇게 해서 그 땅을 거룩한 땅으로 성화 시키는 것이 실은 핵심이다.
반드시 죽이라는 죄의 항목은 주로 우상에 속한 가나안 족속의 음행이며 전반부에서 우상 숭배의 금지와 부모를 저주한 진노를 명령하시고 후반부에서 가나안 족속의 가증한 풍속과 여호와께서 금하신 부정한 음식으로 인하여 더럽히지 말라고 말씀하심으로 여호와께 속한 자의 총체적인 거룩을 말씀하신다.
후반부에서 거룩하라는 말은 주제를 언약적으로 마무리하신 후에 맨 마지막 절에서 가나안 족속의 우상 숭배를 따르는 자들의 심판을 한 번 더 반복하심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를 강조하신다. 이 구조가 어떻게 되어있냐면 18장과 19장이 연결된 구조다. 20장은 내용이 그래도 제일 중심적인 죄의 항목들은 18장에 있는 항목들과 같다. 차이가 있으면 다 죽이라 하는 말에 강조점에 차이가 있다. 그런데 18장은 이러이러한 죄의 항목만 쭉 나열되어 있는데 20장은 그런 말이 아니라 앞에 우상 섬긴 자는 죽여라 그리고 그 뒤에는 부모를 저주 한자는 죽이라. 이런 말이 따라 있다. 그러면 부모를 저주하는 자를 죽이라 그 말은 19장과 연결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가증한 죄에 대한 심판들이 강조되었는데도 실은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 이런 가증한 죄인들 죽여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고 저주 한자를 죽여야 된다. 이런 말은 18장에는 없다. 부모를 저주 한자를 죽이라 하는 말은 19장에 나오는 말이다.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기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고 노인들을 공경하고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고 이러이러한 죄를 멀리해라. 그것이 19장이다. 왜 부모가 하나님의 대리자이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합쳐져 있기 때문에 20장에 보니까 부모를 저주한자를 죽여라 하는 것이 앞부분에 있고 가운데는 가나안 백성의 우상 범죄들을 쭉 말씀하고 있고 그리고 뒤에 다시 언약 체결에 대한 문제와 먹는 음식까지 거룩하라는 총체적인 거룩을 말씀하고 나서 제일 뒤에 가증한 자는 죽이라는 항목이 하나 더 붙어 있다. 그러니까 실은 18장과 19장이 조합된 형식 구조다.
핵심은 너희와 그 땅을 거룩하게 해라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구원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된 자들이 어떻게 이방을 본 받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살 것인가? 특별히 그들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서 어떻게 죄를 미워하고 악과 싸우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땅을 거룩하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기록 핵심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구원론적으로 읽어서는 안되고 언약 백성의 삶의 윤리로 읽어야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구약 때는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을 심으시고 그리고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고 하나님의 단에다 봉사하는 그런 거룩한 백성으로 구원하셨다. 그러니까 그들은 가나안 땅의 우상에 속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자의 행위를 본 받지 않고 여호와의 단에 드리는 백성으로 피로 속함 받은 백성으로 살고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 이방인과 싸우고 그런 죄를 지은 자들을 죽이고 그렇게 하면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다. 그것이 구약의 성화다.
이제 신약 교회에서는 그런 상황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가나안 땅 백성을 쫓아내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주 예수께 속한 자가 되도록 하셨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 세상을 본 받지 말고 주님을 본 받는 자가 되고 그것이 이제 구원 역사에서 우리가 만나고 있는 현실이다.
주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나라를 교회에 주셨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방인의 행함같이 행하지 말고 악한 것을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 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고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한다. 그것이 신약에서 윤리의 권면 방식이다. 물론 베드로서에 있지만 로마서 에베소서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구약에서는 이런 자들은 죽임으로 언약의 땅에는 그런 자가 없도록 해라. 하는 문제였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치리 문제를 단순히 다루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 신약 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나라를 주셨다. 이 세대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 나라 백성이 되게 하셨으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본 받아서는 안되고 이 세상에 속한 자의 흔적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 여호와의 거룩을 따른 것처럼 하늘에 속한 분의 거룩을 닮아서 주님을 닮고 그것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는 말이다.
여기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 하는 것은 어떤 교리적인 문제들이 아니다. 하나님을 따라 새 사람을 입으라 하는 말이고 하나님을 따른다는 말이 뒤에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다. 이렇게 설명이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와 진리 거룩함 이런 말은 도덕적인 문제를 직접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이스라엘 백성의 의인데 구약적인 그 의가 아니라 진리의 거룩함 그것이 하나님을 따라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 그것이 신약 시대 백성이 누리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라.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이다. 만일에 너희들이 저희들처럼 행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는가 에베소서에 나온 말이다. 너희들을 이상이 여기지만 놀래지 말아라. 그들의 마음이 둔해지고 그들이 생명에서 떠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너희들은 그런 것을 본 받지를 말아라. 하나님을 본받아라. 그렇게 새 사람을 입어라. 그것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모세 제도를 따른 새 사람이 아니다. 그것이 마땅한 바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몸으로 전체로 산 제사를 지내야 된다.
피를 하나님 앞에 드렸던 것처럼 속함 받은 생명을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하나님앞에 드리고 그럴뿐만 아니라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라.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로서 교회가 사는 삶이다. 그러니까 지금 가나안 땅 땅 백성이 했던 죄 이런 죄를 짓지 않도록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의 명령은 너희들은 어떻게 하라 하는 적극적인 명령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출애굽기에서는 어떻게 하라 하는 것이 더 적극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것은 언약 체결적인 문제니까. 여기서는 우상에 속하지 않고 내게 속한 백성으로 살아라.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핵심이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그전에는 우상과 교제하는 나라였다. 이제는 하나님의 성소안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에 이제는 우상과 대비된 방식으로 언급이 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적극적인 윤리의 방식으로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것을 교회에 그래도 줄긋기를 해 가지고 아 이러이러한 죄만 안 지으면 되는 구나 그러면 교회는 수준이 형편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적인 범죄만 없으면 다 살아 남을 것이니까. 그러면 여기서의 성적인 범죄를 지금 우리가 보면 너무나 형편없는 일이다. 그런데 요새도 있다. 요새 미국 연애인들 정치인들 다 이런 죄를 짓고 있는 자들이다. 전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교회는 이런 죄만 안 지으면 되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죄의 항목을 봤을 때는 지금도 동성연애자 하는자가 있고 형편없는 죄를 짓는 자들이 많이 있다. 구약때도 있고 로마서도 있다. 아하 이것은 모든 세상에 있는 똑같은 죄구하 하고 읽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가나안 땅의 죄를 언급하면서 이런 가증한 자를 쫓아 냈으니 너희들도 그런 자들을 쫓아 내고 죽이고 없도록 해라. 가나안 땅백성과 대비된 방식으로 가나안 땅의 성소를 이야기 할 때 이 문구다. 그러나 지금은 가나안 땅의 백성의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우셨기 때문에 이제는 의외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이제는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여기서 핵심은 가나안 땅의 백성과 대비된 여호와의 백성 이제는 하늘에 속한 새 백성으로서 대비된 백성 이런 구원 역사적인 새로운 관계에서 이 계명을 보고 새롭게 해석을 해야 된다 그 말이다. 이것 자체만 안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성경을 읽는 방식이다. 여기 죄 안걸린 사람은 너무너무 많다. 그러면 이정도 죄만 안지으면 교회에서 충분히 견디어 내겠는가? 그런 식으로 성경은 설명을 하지않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하늘에 속한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땅의 분깃도 없고 관계도 없다.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따라서는 안되고 그들이 우리를 이상히 여겨도 우리가 놀랠 필요가 없다. 악한 것은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고 주님게 향기로운 제사로 몸을 드려라. 그렇게 에베소서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남녀를 거룩하게 취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부르심은 하늘에 있다. 가나안 땅 백성과 싸우라는 정도가 아니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싸우는 부르심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교회는 거룩한 새 사람이다. 그런데 이것을 이런 죄가 있는가 보자 하고 보면 자기도 온전함이 없게 된다. 이런 것을 자기의 감독관으로 삼아 봤자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분 거룩한 교제로 삶으로 그 교제의 빛가운데 삶으로만 자유요 이런 죄가 보인다. 그러면서도 이 죄가 여러분을 더럽히는 감독관이 안될 것이다. 교제로 사니까. 가령 우리들이 바른 설교를 듣고 그리스도를 경배하면 거기에 우리의 새로운 결심들이 따른다. 그러나 더럽다고 막 울고 있는 따름이 아니라 완전히 깨끗함으로 누리는 결심이다. 주님 자신을 뵈므로 깨끗함이 있고 진정한 자유가 있다. 감독관으로가 아니다. 듣고는 나가서 잘해보자 하는 그런 교육용이 아니라 주님을 즐거워함으로 완전한 자유가 있다.
이것은 이런 저런 항목들을 넘어서는 참다운 교제다. 그렇게 믿음으로 깨어있으라 그 말이다. 그리고 그와 대비된 모든 것은 미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주님이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악을 미워하라 그 말이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
다음에는 21-22장이 한 단락이다. 읽어 오기 바란다.
- 설교 : 김강호 목사
레위기 21장과 22장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다. 그전에는 제사장의 거룩 이렇게 간단하게 붙였는데 그렇게 제목을 붙여서는 내용을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그래서 더 구체적으로 붙였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이 규례를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기 때문에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 그렇게 붙였다. 이제 전체적인 요약이다.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는 시체와 혼인과 성물을 드리는 것 여기까지는 21장에 있는 내용이다. 성물을 먹는 것은 22장에 있다. 그래서 제사장이 지킬 규례와 그리고 제사장과 이스라엘이 열납되도록 예물을 드리는 규례다. 이것도 22장에 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자가 제사장인데 이런 사람들은 시체와 혼인에 있어서 거룩하게 해야 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먹는 자로서 자신들을 모든 부정으로부터 깨끗케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드리고 먹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뒤에 열납되는 예물을 뒤에 붙여서 말씀했다.
핵심 되는 구절은 21장8절 너는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라 그는 네 하나님의 식물을 드림이니라. 너는 제사장을 거룩히 여기라.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는 거룩함이니라. 이 말이 22장 제일 끝에도 거의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다. 지금 모세보고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라고 했는데 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라 했는가? 하나님 앞에 식물을 드리는 자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해라. 그리고 모든 백성들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 거룩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자가 제사장이다. 21장2절부터 9절에는 제사장의 거룩이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 10-15절을 대 제사장의 거룩이 기록되어 있고 그 이하에는 여호와께 식물을 드리는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
2-9절 제사장의 거룩이다. 제사장의 거룩과 대 제사장의 거룩은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대 제사장의 거룩에서 그 거룩이 강화되어 있다. 읽겠다. 이론 자손 제사장들은 죽은 자로 인하여 더럽히지 말라. 골육지친과 처녀인 자매로 인하여는 몸을 더럽힐 수 있다. 제사장은 백성은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라. 물론 골육지친 형제나 자매 그렇게 쭉 설명이 되어 있는데 그것은 다 빼고 골육지친과 처녀인 친 자매로 이렇게 줄여서 썼다. 그런데 구약 교훈법은 반복법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요약하면 잊어버리기 쉬운데 골육지친인 형제나 부모나 이렇게 쭉 이어서 쓰고 있으면 읽어보면 그냥 안다. 그런데 자매도 골육지친이지만 결혼해 버리면 그는 아론 가문에 속한 자가 아니다. 그 결혼한 가문에 속한다. 그러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은 친 자매는 골육지친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골육지친을 위해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다. 그 시체를 만질수 있다 그 말이다.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인즉 스스로 더럽혀 욕되게 하지 말아라. 만일에 제사장이 죽은자와 접촉되면 그를 욕되게 하는것인데 무엇을 욕되게 하는가? 백성의 어른으로서 그 자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또 같은 말은 반복해서 설명을 할 것이다. 동심원적인 물결 구조가 항상 있다고 그랬는데 여기서는 골육지친을 위해서는 더럽힐수있다. 그러나 더 크게는 죽은자로 인해서 더럽히지 말아라. 골육지친을 위해서는 더럽힐수 있다. 또 다시 말하기를 백성의 어른인즉 더럽히지 말아라. 이렇게 작은 단락에서도 첫 주제와 뒤에 결론이 맞는 방식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는 설명적인 구조다.
그 다음 것은 이것을 조금더 진행시킨 방식이다. 제사장은 머리털을 밀거나 수염 양편을 깍지 말며 살을 베지 말며 하나님께서 거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그들은 화제 곧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지어다. 첫 단락에서는 백성의 어른인즉 거룩해라. 두 번째는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백성의 대표로서 여호와께서 식물을 드리는 자인데 앞에는 더럽히지 말아라. 그러나 골육지친을 위해서는 더럽힐 수 있다. 하는 기본적인 단위를 말하고 두 번째는 이제 더럽히는 구체적인 방법이 확대되고 있는데 머리를 밀어서 대머리같이 말고 수염 양편을 깍지 말고 살을 베지 말아라. 왜 하나님께 거룩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라. 그러니까 이런 일을 안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거룩한 자가 되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욕이 안되는데 만일에 이들이 머리를 깎아서 대머리 같이 하고 수염 양편을 깎고 살을 베면 하나님께 속한자가 아닌 것 같이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마 이것은 이방인이 슬퍼하는 슬픈 풍속일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들 장례법을 잘 모르니까 모르지만 그 당시 가나안과 애굽 배경을 두고 그들이 슬픔을 표현할 때 살을 벤다거나 또 이스라엘 같으면 슬프면 머리는 다 쥐어뜯어서 대머리 같게 되게 하라 그런 말도 있다. 그러니까 아마 이방인들도 머리를 밀어서 더구나 앞대머리가 되게 하던지 수염을 다 뽑는 식으로 양쪽을 다 깎던지 그런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 있을 것이다. 만일에 그들이 그런 식으로 슬픔을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속한자가 아니고 그런 일을 안하면 하나님께 속한자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 앞에 식물을 드리는 자이니까 이방인처럼 슬픔을 표현하지 말아라 그런 말이다.
제사장은 그 다음 혼인으로 인해서 깨끗해야 한다.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지니 이는 그가 여호와께 거룩함이니라. 결혼을 한 몸을 이루기 때문에 기생과 부정한 여인과 결혼하면 함께 창기가 되는 것이라고 고전에도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연합하지를 말아라. 너는 그를 거룩하라. 그는 내 하나님의 식물을 드림이니라. 지금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다. 모세에게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라. 왜 하나님 앞에 식물을 드리니까 너는 그를 거룩히 여겨라. 나 여호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거룩함이니라. 여기서 다시 거룩에 대한 문제를 첫 시작에서 강조한 만큼 한 번더 크게 강조함으로 단락을 마무리 짓고 있다.
너는 그를 거룩하게 하라. 하나님의 식물을 드림이니라. 너는 그를 거룩하게 하라. 나 여호와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자는 거룩함이라. 그렇게 해서 제일 앞에 거룩하라 한 것을 읽었던 주제적인 것을 다시 한 번 한 단락을 마무리 짓고 있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의 딸이 행음하면 그 아비를 욕되게 함이니 불살라라. 제사장만 부정한 여인과 결혼해서 함께 창기의 몸이 되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딸까지라도 그런 일이 있으면 죽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제사장 가문을 거룩하게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는 시체와 그리고 결혼으로 인한 부정으로부터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것인데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고 백성의 대표고 하나님 앞에 식물을 드리는 자이다. 그런데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한 소유로 삼으셨고 그리고 그 어른을 불러서 자기 앞에 나와서 식물을 드리도록 했기 때문에 그들은 시체에 있어서도 부정하면 안되고 결혼에 있어서도 부정하면 안되고 심지어 자기 딸까지라도 부정하면 안되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특별히 그들은 이방인처럼 슬퍼해서는 안된다.
지금 본문을 더 요약해서 제가 적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 대 제사장의 거룩에 대한 규례인데 형제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북을 입은 대 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며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성소를 더럽히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에게 있음이니라. 그는 자기 백성중 처녀로 아내로 삼아 그 자손으로 백성 중에 더럽히지 말라.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이 말이 또 끝에 결론적으로 다시 나와 있다. 언약적인 표현법이다.
그런데 대 제사장은 제사장보다 한 등급이 더 높다. 대 제사장은 어떻게 표현이 되어 있냐면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다. 하나님 앞에 식물을 드리는 자이다. 그렇게 묘사되어 있는데 대 제사장은 그렇게 묘사되어 있지 않고 기름 부음이 그에게 있고 거룩한 예복이 그에게 있다. 관유로 부은 것은 성령으로 충만케 한 것 생명으로 충만케 하는 것이고 예복을 입는 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위엄을 입고 있는 것이다. 예복은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과 같이 되어 있다. 이처럼 대 제사장은 그렇게 되어 있고 그 머리에는 거룩한 관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방인처럼 대머리 되게 한다거나 수염을 민다거나 그런 슬픈 표현 정도가 아니라 아예 슬픈 표현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기 때문에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으면 안된다. 왜 그 머리에는 거룩한 기름 부음이 있고 옷은 성소의 영광을 입고 있기 때문에 이것에 어떤 슬픔의 표시를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어떤 시체든지 대 제사장은 접촉하면 안된다. 자기 부모가 죽어도 그렇게 하고 절대로 성서에서 나오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성소에 기름을 그에게 부어서 하나님의 성소에서 봉사하도록 했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떤 슬픔도 표현되어 있으면 안되고 자기 아버지가 죽어도 그 죽음에 접촉하면 안된다. 그는 성소에 기름 부음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일체 성소에서 나와서도 안된다.
그리고 아내도 제사장의 결혼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말아라 이 정도만 되어 있는데 대 제사장도 그런 말이 함께 쭉 있다. 그런데 특별히 더 강조되기는 자기 백성 중 처녀로 아내로 삼으라 하는 말이 특별히 더 덧붙여 강조되어 있다. 다른 것은 다 빼고 그 쪽만 붙여 놓은 것이다. 자기 백성중 처녀로 아내를 삼아 그 자손으로 백성 중에 더럽히지 말라. 왜 처녀로 삼아야 되고 또 자기 백성중에 해야 되는가? 여기서는 과부나 이혼당한 여인도 안된다고 덧붙여 있다. 그러면 이혼된 여자는 여기서는 자기 죄로 이혼된 여자는 죽지 살아 남지 못한다. 단지 여기서는 수치된 일이 있는 줄 알고 이혼당한 여자지 구체적인 범죄로 이혼당하면 그는 돌에 맞아 죽지 살아 있지 못한다.
그런 항목들이 있는데 다 빼고 여기 대 제사장의 강조된 점만 썼다. 그런데 자기 백성 중에서 얻어야 된다. 여기서 자기 백성은 이스라엘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아론 지파 자기 지파 안에서만 얻어야 된다. 그리고 처녀로만 얻어야 된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대 제사장에서는 그 깨끗함이 한층더 강조되어 있다. 제사장은 자기 백성 중에 얻으라 그런 말이 안나타나 있다. 그러나 아마 제사장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러나 대 제사장은 특별히 명시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지파하고 아론의 지파하고 섞이지 않도록 해라. 만일에 섞어지면 그 백성이 더러워지는 것이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아예 대 제사장은 자기 백성 자기 가문중에 처녀하고 결혼했기 때문에 다른 지파하고도 섞이지 않는다. 뭐 부정한 여자하고 안 섞인 정도가 아니라 다른 지파하고도 안섞여진다. 그래야 그 자손이 더럽혀지지 않는다. 만일에 다른 지파하고 결혼하면 더럽혀 진다 그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이제 제사장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식물을 드리고 식물을 먹는가? 식물을 드리는 것이 21장 후반부에 있고 이제 먹는 규례는 22장에 있다. 아론의 자손중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를 말아라. 흠이 있는 자는 나와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흠이 있은 즉 나와아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요약을 했어도 그 특성을 살리느라고 요약을 했다. 거기서는 흠이 있은 즉 하는 말이 계속 반복된다. 아마 성경 본문을 읽어보면 더 많이 반복되어 있을 것이다.
흠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식물을 드리지 못한다. 요약하면 그 말이다. 그는 하나님의 성물이든지 지성물이든지 먹을 것이나 장안에 들어가거나 단에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이는 그가 흠이 있음이니라. 이와 같이 그가 나의 성소를 더럽히지 못할 것은 나는 그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그런데 그가 흠이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식물을 드리지 못하는데 먹을 수는 있다.
그러나 하나님 성소에나 단에 가까이 가면 안된다. 왜 그런가? 나의 성소를 더럽히지 못할 것은 나는 거룩한 하나님으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하기 때문에 흠이 있는 자는 내게 예물을 드리지 말아라. 먹을 수는 있지만 절대 나오지 말아라. 나오면 나를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제사장을 백성의 대표로 어른으로 그리고 시체와 부정으로부터 깨끗게 했어도 만일에 제사장 몸 자체에 흠이 있으면 그는 내 앞에 나오면 내가 더러워지니 만나지 말자 그 말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21장에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다.
이제 설명이다. 아론 자손 제사장은 여호와께서 거룩하게 하여 백성의 어른을 삼고 여호와의 화제 곧 여호와의 식물을 드리도록 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소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시체와 혼인으로 인해서 더럽혀서는 안된다. 죽음과 더러움은 성소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 성소에서 하나님의 식물을 드리는 제사장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가문 그 딸로 부정하게 되면 죽이라고 그랬다. 그 가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께 거룩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백성의 어른으로 삼으사 성소와 단에 나아와 식물을 드리는 자로 세우신 제사장에게는 백성보다 더한 규례를 주셨고 또 대 제사장에게는 제사장보다 더욱 규례를 주시어 거룩하게 하셨다. 백성은 자기 시체로 인하여 더러워질 수 있다. 그러나 제사장은 골육지친을 인해서는 더러워 져도 다른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안된다. 그런데 백성은 다른 사람의 시체를 만질 수 있다.
그러니까 백성의 거룩 제사장의 거룩 대 제사장의 거룩이 다르다. 대 제사장은 어떤 시체에도 접촉하지도 말며 슬퍼하지도 말며 항상 성소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성소에 속한 거룩한 예복을 입히시고 성소에 관유를 그에게 부으셔서 거룩한 직무를 위임하셨기 때문이다. 항상 성소를 섬기는 직무로 임했기 때문에 성소를 떠나면 안된다.
과부와 결혼하지 못하게 하신 것은 그녀에게도 남편의 죽음에서 죽음의 저주와 권세가 임하였기 때문이다. 구약적인 방식이다. 대 제사장은 자기 백성 곧 자기 지파의 처녀와 결혼하도록 하신 것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아론의 가문을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일반 백성과 혼인함으로 인하여 그 후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이다. 아론 자손은 그 성소를 봉사하지만 일반 백성은 성소밖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성소밖에 있는 일반 백성과 성소를 봉사하는 아론의 지파는 섞지 말아라 그 말이다. 같은 이스라엘인데도 그렇게 구별했다. 그러니까 자기 백성 중 처녀하고만 결혼하도록 했다. 만일에 일반 지파가 성소에 들어오면 죽지요? 그러니까 더럽히지 않도록 했다. 죽음에 접촉한 제사장 뿐만 아니라 신체적 흠이 있는 제사장도 휘장안이나 단에 가까이 못한다. 그리하면 성소를 더럽히는 것이다.
신체의 흠이 있는 제사장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몫으로 주신 식물을 먹을 수 있으나 여호와께 식물을 드리지는 못한다. 백성과 제사장과 대 제사장의 이러한 거룩의 차이는 모세 제도적인 차이 곧 하나님을 섬기면 누리는 관계의 차이다. 그러나 교회 직분자에게 평신도보다 더한 윤리적인 요구를 하신 것은 이런 질에 차이가 아니라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구약 때는 아예 거룩의 질적인 차이가 있다. 대 제사장이 누리는 것과 제사장이 누리는 것과 백성이 누리는 것 관계가 아예 다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간격을 두고 교제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 간격을 넘으면 죽는다. 그러니까 심지어 결혼할 때까지라도 대 제사장의 가문은 일반 이스라엘 백성과 섞이지 못하도록 했다. 왜 그 가문만 하나님의 성소를 봉사하고 일반 가문은 결혼을 통해서도 성소를 봉사하도록 못 들어온다. 그런 직무에로 못 들어온다. 완전히 분리했다.
그러면 이것을 우리가 그냥 신약 교회에 적용하면 막 이제 목사부터 적용하기 쉽다. 왜냐하면 목사 장로에게도 그런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불순종하는 자식이 없어야 되겠다. 감독들은 그런 말이 쭉 있다. 그러기 때문에 분명히 직분자에게는 이런 것을 신약에서도 더 요구한다. 그러니까 이것을 구약을 그런 식으로 신약에 막 적용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신약에서는 직분자와 평신도 사이에 이런 거룩의 차이가 없다. 예수 안에서 다 함께 하늘에 속한 거룩을 누리지 너는 나와 다르다. 우리 섞이지 말라 너는 저 선밖에 서있어라 하는 그런 윤리적인 간격은 없다. 그러니까 초신자나 오래 믿은 신자나 똑같은 윤리적인 관계 하나님과 교제는 그 몸의 관계지 초신자는 그쯤 살고 오래 믿은 신자는 이쯤 살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윤리가 아니다. 그런 식으로 구약을 적용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신약에서 직분자에게 더 거룩한 윤리를 요구한 것은 그것은 먼저 믿는 자들이 덕이 되게 하기위한 것이지 하나님과 누리는 그런 윤리의 질적인 차이를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니까 구약 성경은 구원의 책이어서 이 구원의 질적인 간격이 예수 안에서 여원히 없어졋다. 단순히 제거 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거룩을 완전하게 얻음으로 없어졌다 하는 이것을 말할려고 구약 제도를 말하고 있는것이지 지금도 이것을 그대로 우리 믿는 신자들에게 등급을 나눠어서 연결시키라고 그렇게 읽어서는 안된다. 구약 성경은 그렇게 도덕책으로 풀어서는 안되고 구원의 책으로 읽어야 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성소에 속한 거룩함으로 주셨다. 죽음과 더러움의 권세는 부활하사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대 제사장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끝났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그리스도의 거룩에 참여한 교회에서 모든 거룩의 관계는 없어졌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시고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셔서 자기 상에서 봉사토록 하신 은혜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시켰다. 성도끼리 결혼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연합의 비밀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지 목사 자녀들은 목사 자녀끼리 결혼하고 그런 것은 없다 그 말이다. 그러나 성도와 불신자 간격은 여전하다. 그들은 그리스도밖에 있기 때문이다.
구약은 교회안에 있는 거룩을 예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성도끼리 결혼은 거기서도 조금 봐주는 결혼이 있다거나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의 비밀이 거기서 나타나는 것이다. 교회는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며 그리스도의 상에서 먹고 마신다. 교회는 다 주의 상에서 하늘 성소에서 먹고 마시지 그 성소밖에 있는 자 따로 있는 것 아니고 신체의 흠이 있으니까 먹기는 먹어도 예배하지 말고 그런 것은 없다.
그러면 우리들은 신체적으로 완전해야 전도사도 뽑고 그럴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니다. 구약 때 신체적인 흠은 생명의 흠 죄의 권세가 그 안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 신약 교회 신체검사 기준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말하자면 전염병이 있는 사람이 목사 하기 힘들지요? 감기만 걸려서 심방 가도 다 옮겨버릴것인데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새 장애자 목사들도 장애자를 잘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런 관점에서는 많은 봉사를 한다. 아마 서양 같으면 장애자나 정상인이나 그런 의식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나라는 그런 것은 본다. 공부 못한 것은 머리 장애자일까? 아닐까?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은 별로 관계가 없는데 다른 것이 좀 불편하면 도덕적으로 취급을 해버릴려고 그런다. 그런데 우리들이 본래 눈뜨고 보니까 전기불만 나가 버리면 캄캄해서 못 보지만 본래 못보신분은 전기불 꺼져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자기 행동 영역에서 불편이 없을 것이다. 단지 우리와 어울려 행동하는데 불편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그런 식으로 봐서는 안된다.
구약에서는 이방인들의 윤리 의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는 죽음의 권세 죄의 권세가 있는 것은 어떤 것도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 그런데 대 제사장은 성소의 영광의 옷으로 덧입히고 성소의 기름으로 발라 났다. 거기는 어떤 죽음도 손대지 못하도록 해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 식탁에서 봉사하고 내 식탁에서 먹어라. 백성의 대표자인 너희가 그렇게 해라. 그것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규례를 주셔서 이 규례를 지킴으로 백성들이 죄와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구별되어서 성소에 계신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누리도록 하신 것이다. 이 일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에서 하늘에 속한 성소로 완성시키셨다. 이제 그분 안에서는 이런 백성의 어른과 백성 간에 이런 윤리적인 간격이 없다.
이제는 다 거룩하다. 우리는 다 주의 상에서 먹고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린다. 누구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무 간격이 없이 완전한 생명의 교제를 주셨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처녀 총각 결혼은 아주 거룩하고 그리고 재혼한 결혼은 아이코 나도 흠이 많은데 대충대충 그런 개념을 교인들까지 가지고 있다. 이방인들은 그런 개념을 가져도 이해를 하는데 교인들은 그런 개념을 가져서는 안된다. 그런데 교인도 똑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것만 흠이 되고 그 외예는 흠이 될것이 없다. 그러니까 가령 신약 성경은 과부라도 믿는 형제에게 결혼해라.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지만 믿는자에게만 결혼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처녀 아이들도 똑똑한 총각 만나면 시집간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와 우상의 전을 함께 합치는 것이다. 빛과 어둠이 함께 하는 것이어서 그것은 도저히 있을수 없다. 구약 같으면 만일 이방혼을 한 사람은 제사장이든 선지자든 그와 관계된 모든 것은 여호와의 장막에서 끊어라. 언약 백성으로부터 죽는 것이다. 배제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하나님께 속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혈통을 따라 속한자가 아니어도 죽어야 되는데 예수의 부활의 영을 따라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는데 그 확실한 은혜를 거절한 이방인을 자기에게 잘해 준다고 해서 좋게 생각하고 사모하는 것은 결혼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고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소위 구약 식으로 당장에 여호와의 백성으로 끊어 버리는 죽음의 벌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신약 교회는 수찬 정지함으로 그냥 교회 교제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런데 이것은 땅의 성소에서 떡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늘 성소에 있는 교제의 식탁으로부터 배제를 시키는 것인데도 당장 신체적인 재앙이 없으니까 괜찮은 줄 알고 오히려 교회 안 나오고 편안히 산다.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연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약처럼 꼭 결혼을 해야 된다는 그런 시대 가운데 있지도 안는다.
여러분이 그런 점을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고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죽으심의 권세로 깨긋게 되어서 이제는 어떤 더러움도 없이 하나님의 상에서 먹고 마시게 했다. 모세를 제도를 통한 깨끗함이 아니라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성소로 옮기셨다. 여러분이 이 은혜를 깊이 기념하시고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기념한 것처럼 우리의 먹고 마시는 모든 구체적인 삶에서도 그 주님을 기억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신령한 제사장으로 우리가 모든 것을 거룩하게 드리고 거룩하게 취하는 그런 예배의 삶을 사셔야 할 것이다. 아멘.
- 설교 : 김강호 목사
오늘은 22장이다. 21장과 22장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다. 이 규례를 주셔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먼저 22장을 요약해서 정리하고 설명은 가운데 있는 제일 끝에 거기서부터 설명이 되겠다. 22장보면 아론과 그 아들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구별하여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런 말로 시작한다. 2절이 그렇게 되어 있다. 2절 말씀이 22장 전체를 푸는 주제적인 말씀이 되겠다. 즉 아론과 그 아들들 제사장 가문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성물에 대해서 잘 구별해서 그 성물을 더럽힘을 통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 말이다.
3절부터 9절까지가 한 단락인데 거기는 몸이 부정한 제사장은 먹지 말라 그렇게 되어 있고 10절부터 16절까지는 제사장에게 속한 자만 먹어라 그렇게 명령하고 17-25절은 열납되도록 서원제와 낙헌제를 흠 없는 것으로 드려라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6-30절은 열납되도록 팔일 후에 드리고 그리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고 그리고 화목제물을 그 날에 먹어라 그런 말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31절-33절은 언약 체결적인 언어로 마지막 결론을 짓는 말이다. 너희는 나의 계명을 지켜서 나의 성호를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애굽에서 인도해낸자니 나는 여호와니라.
레위기 거룩법 17장 이하에서 제일 중요한 말인데 여기서도 결론적인 말로 마무리를 짓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서 자기 백성을 삼으셨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하나님의 소유된 이스라엘 백성도 거룩하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거룩하냐면 하나님이 거룩케 하는 법을 주셨기 때문에 그 법을 지킴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거룩하게 되기 때문에 그 법을 어기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의 성물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제사장 가문은 조심해라. 해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를 주고 있다.
3절부터9절이다. 몸이 불편한 제사장은 먹지 말라 그런 내용이다. 아론 자손 중에 몸이 부정하고도 성물을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죽인다 그 말이다. 아론 자손 중 몸이 부정한자는 정한 후에야 성물을먹으리라. 먹어라 이는 자기의 응식 즉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음식이기 때문이다. 죽은 짐승르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그리고 성물을 욕되게 하면 죽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그러니까 동심원적인 물결구조라는 말이 그 말이다. 제일 처음에 아론 자손중에 몸이 부정하고성물을 먹으면 죽여라. 제일 끝에도 성물을 욕되게 하면 죽여라 그런 말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더 설명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면 부정한 자가 먹지 못하면 어떻게 할것인가? 부정한자가 깨끗게 되면 먹어라. 왜냐하면 아론 자손이 하나님앞에 드린 예물을 제사장가문의 마땅한 몫으로 준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정한 후에야 먹어라 그런 말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앞과 뒤에 부정한 자가 먹으면 죽여라 하는 말이 끼여들어 있고 정한 자만 먹어라 하는 말이 사이에 있다. 그렇게 해서 소위 서론과 결론이 맞아 들어가는 구조로 가운데것은 그것을 더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죽은 짐슴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 이것도 정한 후에야 성물을 먹어라 하는 것과 같은 말인데 제사장 가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구별해 드리는 성물을 몫으로 주었지 죽은 짐승을 하나님이 주신적이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 들의 몫을 먹어야 되는데 깨끗한 뒤로 먹어야 되지 부정한 채로 먹으면 안된다. 그들은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을 먹어서 자기를 더럽히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상에서 먹도록 하나님의 상에 있는 것을 몫으로 주셧기 때문에 깨끗해야 먹고 그리고 깨끗한 자라도 부정한 것을 먹지 말아라 그 말이다. 이런 죽은 짐슴은 이방인에게 팔기는 팔아도 제사장 가문이 먹어서는 안된다.
가령 다른 예로 들면 우리 믿는 신자들이 우상의 상에서 먹으면 그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것을 먹는 식이 되니까 즉 하나님의 상에서 먹는 자기를 더럽혀 버리는 것이다. 그런 말과 일치될 수 있는 내용들이다.
그 다음에 10-16절은 이제 몸이 부정한 제사장은 먹지 말라 그랬는데 그러면 제사장 가문만 먹어라 그런 말은 아직 없었고 제사장에게 주신 마땅한 몫인데도 부정한 자는 먹지 말아라 이 말을 한 번 하고 나서 그 다음에 하나님의 상에 드리는 음식은 일반 백성은 못 먹고 제사장만 먹어라 해서 제사장에게 주신 특별한 관계를 강조시키고 있다. 외인은 여기서 다른 지파를 말한다. 이방인을 말하고 있지 않는다. 외인은 즉 다른 지파는 성물을 먹지 말라. 제사장의 객이나 품꾼은 먹지 못하나 종은 그것을 먹어라. 왜냐하면 객이나 품꾼은 제사장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거류민이다. 그러나 종은 그 가문에 속한 자가 되니까 먹어라. 다른 지파에 출가한 제사장의 딸은 먹지 못한다. 다른 지파에 출가해 버렸으면 그 남편에게 속한자가 되기 때문에 제사장 가문에 속한자가 아니다. 그러나 자식이 없이 돌아왔으면 먹어라. 자식이 있어서 돌아왔으면 자식이 아버지의 이름을 잇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 가문에 속해 있다. 그런데 자식이 없이 만일에 친정으로 돌아와서 어릴때와 같이 되었으면 본문은 그렇게 되어 있다. 그 아비의 응식 즉 그 아비의 몫을 먹어라.
그리고 외인은 먹지 말라 한 번더 반복하고 있다. 한마디로 여기서는 제사장 가문만 먹고 그 외에 다른 지파는 먹지 말아라. 아무리 제사장 가문의 출신이어도 다른 지파에 시집가버렸으면 먹지 못한다. 그러나 자식이 없이 친정으로 돌아와서 어렸을때와 같이 아버지에게 속하면 아버지의 몫에 참여해서 먹어라. 그리고 다시 결론에 다른 지파는 먹지 말아라. 그렇게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혹시 다른 사람이 부지중에 성물을 먹으면 어떻게 할것인가? 그 때는 성물에다가 오분의 일을 더해서 제사장에게 주어서 갚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제사장에게 주신것이기 때문이다. 만일에 그들이 성물을 먹으면 형벌을 받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니라. 이것은 제사장 가문에게만 주신것이기 때문에 다른 지파가 먹으면 벌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마땅히 오분의 일을 더해서 제사장에게 갚아야 되겠고 레위기 앞부분대로 하면 속건제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은 제사장 몫이고 다른 지파의 몫은 아니다 하는 말이 강조점이다.
그 다음 17-25절은 조금 내용이 어려운 것처럼 되어 있다. 앞에 것은 제사장만 먹어라 하니까 쉬운 것 같은데 뒤에 것은 좀 그렇지 않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실은 이것도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드리고 먹는 것과 관계된 내용들이다. 17-25절에 보면 흠 없는 열납된다. 그 말이 반복되어 있다. 19절에 보니까 흠없는 것으로 드려라. 20절에 흠있는 것은 드리지 말라. 또 21절 끝에도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할지니 전부 흠없는 것을 드려라 하는 것이 17절부터 25절까지 반복되는 말이다. 이랬을 때 반복되는 말은 이 문단의 중심이 되는 말이 된다. 그래서 여기 보면 서원제와 낙원제를 드리는데 흠없는 것을 드려야 열납된다. 그런 말이다.
서원제나 낙헌제로 번제를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우양의 흠없는 수컷으로 드려라. 번제는 수컷으로 드린다. 흠있는 것은 열납되지 못한다. 여기서는 번제로 드릴 때다. 서원제나 낙원제는 실은 감사제다. 감사제를 가져와서 드리는 방식이 번제로 드릴려면 그 말이다. 그랬을 때 실은 서원제나 낙헌제는 암컷도 드리지요? 그러나 번제나 드릴려면 수컷이라야 된다. 그러니까 감사 제물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번제의 방식으로 드리고 싶으면 흠이 없는 수컷으로 가져와야 열납이 된다. 그런 말이다.
그 다음에 서원제나 낙헌제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열납되도록 흠없는 것으로 하라. 서원제나 낙헌제를 가지고 화목제 방식으로 드릴려면 여기서는 열납되도록 흠 없는 것으로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번제는 전체를 태워 드리니까 수컷으로 드려야 한다. 그러나 화목제는 암컷도 드린다. 여러분이 레위기 7장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또 3장에도 나와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수컷으로 드려라 하는 말은 없고 흠없는 것으로 드려라 그 말만 강조되어 있다.
그 다음에 소나 양이나 양의 지체나 더하거나 덜한 것은 낙헌제로는 쓰려니와 서원제로 드리면 열납되지 못한다. 그런데 여기서 흠 없다는 말은 여기 보면 여러 말로 반복되있다. 22절을 보면 눈먼 것 상한 것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 괴혈병 이렇게 일일이 나열하고 있는데 저는 양을 줄일려고 그냥 흠없는 것 이렇게 한마디로 알기 쉽도록 줄여 놓은 것이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우양의 지체가 더한거나 덜한 것은 너희가 낙헌 예물로는 쓰려니와 서원한 것을 갚으면 열납되지 못하리라. 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화목 제물에는 레위기3장과 7장을 참고하면 몇 가지 종류가 있냐면 하나님 앞에 서원을 갚는 방식으로 드리는 화목제가 있고 또 기쁨으로 드리는 낙헌제가 있고 그리고 감사할 때 드리는 감사제가 있다. 그 중에서 서원을 갚는 예물로는 우양의 지체가 덜한 것을 드려서는 안되고 기쁨으로 드리는 것은 그것을 쓸 수가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알이 상한 것을 여호와의 식물로 드리지 말라 이는 흠있는 것이여서 열납되지 못한다. 그런데 22절부터 흠있는 것을 눈 먼 것 상한 것 지체가 베임을 당한 것 이렇게 일일이 말해 놓고 24절에 보면 느닷없는 불알 상한 것을 따로 이야기한다. 이것도 한꺼번에 22절에서 한꺼번에 쭉 묶어서 해 버리면 좋을 것인데 24절에 보면 불알이 상했거나 치었거나 터졌거나 베임을 당한 것은 그것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너희 땅에서는 이런 일을 행치도 말지며 너희는 외방인에게서 이런 것을 받아 너희 하나님의 식물로 드리지 말라 이는 결점이 있고 흠이 있는 것인즉 너희를 위하여 열납되지 못하리라. 강조점은 흠이 있으니까 드리지 말라는 말인데 특별히 불알 상한 것을 자세히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 같으면 그것은 별볼일 없겠고 왜냐하면 돼지나 소도 식용으로 쓸려면 다 거세 하는 것이니까 별볼일 없고 22절 눈 먼 것 상한 것 괴혈병 이런 것은 부정하다는 감이 드는데 거세 한 것은 별로 상관이 없고 거세야 맛은 더욱 부드럽다고 그렇지요?
그런데 여기서 보니까 그것을 굉장히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특별히 그것을 강조해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했을 때 구약에서는 그 남자라도 신이 상한 자는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가지를 못한다. 그리고 만일에 여자가 남편이 다른 남자와 싸울 때 다른 남자의 그것을 잘못 잡아 버리면 손을 베어 버리라고 되어 있다. 굉장히 중요하게 그것을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곧 출생의 방식의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진행하고 누리는 방식이기 때문에 만일에 이스라엘 백성이 남자라도 신이 상했으면 여호와의 총회에 못 들어온다. 애굽 사람은 3대가 지나면 들어올 수가 있다. 신명기 21장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신이 상한 이스라엘 백성은 못 들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 의미로 구약 때 여자가 남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저주처럼 되어 있다. 왜냐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는 구원의 약속이 단절되기 때문에 구약에서 하는 말이다.그래서 여기서도 하나님앞에 흠 없는 것을 식물로 드려야 되겠는데 하나님앞에 드릴때는 번제와 화목제로 드리는 것이 짐승을 드리는 것이다. 식물성 제사는 소제고 그런데 번제로 드릴때는 흠없는 수컷으로드려야 된다. 화목제를 드릴때도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되는데 특별히 화목제 중에 서원제는 하나님 앞에 서원을 갚는 것이어서 최상의 것으로 갚아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지체가 더한 것이나 덜한 것은 드리지 말고 네가 자원해서 기쁨으로 드리는 예물로는 쓸수가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에 불알이 상한 것은 어떤 형태로 상한 것이라도 드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서도 받아서도 안될 뿐만 아니라 너희 땅에서 그런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해라. 그렇게 말함으로 흠있다 없다 하는 것을 불알이 상했냐 안상했냐 거기다가 최강조를 해서 열거를 한다. 왜냐하면 거기는 생명이 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생명의 흠이 있는 것은 드리지 말아라. 그런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26-30절을 보면 열납되도록 드리는 날고 먹는 날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면 흠없는 것을 드려야 되는데 그냥 아무 때나 드리면 되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양의 수컷이 나거든 칠일 동안 어미와 함께 있게 하고 제 팔일 이후에 여호와께 화제로 드리면 열납이 된다. 그러나 그것까지라도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 앞에 열납이된다.
첫째는 흠이 없어야 되고 팔일 이후에 드려야 되고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아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다음에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감사의 희생을 드리려거든 열납되도록 드리라 그 말은 이제는 무슨 말이겠는가? 흠 없는 것으로 팔일 이후에 어미와 새끼를 따로따로 드리면 열납되록 드린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제물을 그 날에만 먹어라. 그렇게 나와 있다. 다른 제물을 먹으라는말은 아직 없었다. 흠없는 것을 드리라는 말만 있었는데 여기 보니까 감사제물을 그날에만 먹으라 그런 말이 나와 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특별히 하나님앞에서 먹는 것은 화목제물이다. 그런데 자원해서 즉 낙헌에물이다. 자원해서드린 예물은 이틀까지 먹을수 있고 서원해서 드린것이나 감사해서 드린 것은 그날에만 먹어야 된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그날에만 먹는 것이 예물을 먹는 기본 단위다.
이틀까지 먹는 것은 특별히 풍성히 주신 것이고 기본 단위는 하루 동안 부정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도 그 날에만 먹는다. 하는 것이 구약의 기본 단위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본 단위를 따라서 그날에만 먹어라. 그래야 열납된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31-33절은 언약적인 결론이 나와 있는데 너희는 내가 말한 이 계명을 잘 지켜서 내 이름을 욕되게 하지를 말아라. 나는 너희 중에서 거룩한 하나님이 아니냐? 나는 너희들과 함께 하려고 너희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었다. 그런데 함께 하는 것은 제사장을 어른 삼아서 자기 성소를 불러들이시고 하나님의 식탁에다가 음식을 차리게 하고 그 상에서 먹도록 하고 하는 이런 친교로 그들을 부르신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나오는 특권을 주셨기 때문에 제사장이 하나님이 여기서 명하신 규례를 질 지켜야만 그가 하나님의 상에 나와서 드리고 먹는 자로 거룩하고 만일에 이 규첵을 어겨버리면 부정한 자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해석을 하겠다. 21-22장을 함께 해석해야 내용이 잘 일치가 된다. 지난 시간에 했던 21장은 백성의 어른으로서 또 여호와의 식물을 드리는 자로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이다. 반복되는 말이 그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의 어른이 아니냐? 내 앞에 식물을 드리는 자임이니라. 그 말이 반복되어 있었다. 백성의 대표 어른으로서 여호와의 식물을 드리는 자로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가 21장의 명령이었다. 거기서는 무슨 거룩이 있었냐면 시체를 만지지 말아라. 그리고 혼인에 있어서 부정한 여인과 결혼하지 말고 아론 지파 즉 제사장 가문에서 처녀에게만 장가 자거라. 특별히 대 제사장에게 강조되어 있었다. 대 제사장은 아비의 시체도 만지지 말고 성소에서 일체 나오지를 말아라. 또 머리를 풀 거가 옷을 찢거나 하는 슬픈 흔적을 내지 말아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이 그에게 있고 하나님의 거룩한 옷이 그에게 입혀져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를 말아라. 그렇게 말씀했었다. 한마디로 제사장은 하나님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성소와 단에 나아가서 식물을 드리는 자이기 때문에 그들은 조금도 죽음과 접촉되어서는 안되고 특별히 대 제사장은 죽음의 흔적까지도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은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다.
그래서 제사장이 죽음과 접촉되면 그가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소에 나와서 드릴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제사장은 자기 가문하고만 결혼하라고 되어 있다. 또 처녀에게만 하라 했다. 처녀가 아니면 이미 죽음의 흔적이 전 남편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여자와 결혼하면 제사장이 죽음과 접촉하는 식이 된다. 그러니까 처녀하고만 결혼하되 또 자기 지파 하고만 결혼해라.
왜냐하면 다른 지파는 하나님 앞에 성물을 드리는 지파로 장자가 아니다. 레위지파 그 중에 아론의 가문만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오고 단에가 드리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지파가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소를 봉사하는 지파로 들어와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별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아론 지파를 구별하고 레위 지파다. 그중에서도 아론을 구별하고 이렇게 여러 구별된 관계에서 하나님이 교제를 허락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상에 나오는 대 제사장은 어떤 죽음의 흔적이 었어서는 안되고 그리고 다른 지파가 결혼해서 이쪽으로 섞어 들어와서도 안된다. 왜 다른 지파는 성소에 들어오면 죽기 때문이다. 레위 지파만 성소에서 봉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구약에는 첩첩산중이다. 거룩의 간격이 많이 있었다. 그것이 21장에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였다. 그런데 그것뿐만 아니라 제사장이 혹시 신체에 결함이 있으면 그런 사람도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려고 들어오면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장자로 구별했어도 그 몸에 만일에 생명이 상한 흔적이 있으면 그는 내 식탁에서 가져간 것을 먹을 수 있어도 내 식탁에 나와서 드리지는 말아라. 그러니까 제사장까지라도 몸에 어떤 사망의 흔적이 있으면 그도 하나님의 상에는 가까이 나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막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생명이요 거룩하니까. 그것이 21장에서 말했던 내용이다.
여기 22장에서는 방금 요약해서 설명을 했습니다만 여호와의 식물을 먹도록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는 규례다. 21장은 여호와의 식물을 드리는 거룩한 규례고 22장은 여호와의 식물을 먹는 거룩한 규례다. 그런데 무슨 말로 되어 있냐면 부정한 채로 먹지 말라 하는 것이 3-9절까지 있었던 말이다. 또 제사장과 그에게 속한 자만 먹어라. 하는 것이 10-16절까지 내용이었다. 그리고 흠없는 것만 여호와의 식물로서 드려라 하는 것이 17-25절까지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팔일 이후에 드려라 하는 것이 26-30절까지 내용이다. 또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라. 감사의 희생을 열납되도록 드리고 열납되도록 그 날에 먹어라. 하는 말도 같은 말이다.
이제 설명하겠다. 제사장은 여호와의 성소와 단에 나아가 여호와께 식물을 드리며 그 식물을 먹는 자이다. 이스라엘을 자기의 소유로 삼으시고 성소에 계신 여호와께서 그들의 어른으로 제사장을 구별하셔서 그들도 성소에 계신 여호와의 상을 봉사하며 먹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레위에게 평강의 언약을 세우시고 그로 여호와로 경외케 하시며 제사장은 여호와의 사자가 되어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로 백성을 가르치게 하셨다. 말2장을 인용했다. 왜냐하면 어른이 되었다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 백성의 어른으로 여호와의 식물을 드리고 여호와의 식물을 먹어라. 어떤 의미로 어른이냐면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상에서 식물을 먹고 마시는 일에 어른이다. 왜 거기에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 있으니까. 하나님의 상에 들어가서 드리고 먹는 것은 온전한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주신 것이다.
그들을 이런 큰 생명의 교제 안에서 하나님의 대표자가 되어서 백성들을 율법으로 정하고 부정한 것을 가르쳐서 정결한 백성으로 살도록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것이 21-22장에 있는 내용이다.
서원제와 자원제 여기 낙헌제라는 말이 한자로 쓰여져 있어서 알기가 어려울 것같아서 다른 말로 자원제라고 풀었다. 여기서도 그렇게 풀어서 설명되어 있다. 앞에서는 17절에서는 서원제와 낙헌제로 그렇게 했다가 그 다음에 21절에 보면 서원한 것을 갚으려 든지 자의로 예물을 드리려 든지 하여 그렇게 되어 있다. 21절에는 서원제와 낙헌제라는 말이 조금더 설명되어 있다. 서원한 것을 갚는 것은 서원제고 자의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낙헌제다. 그래서 서원제와 낙헌제와 감사제는 화목 제물이다. 화목제는 여호와와 제사장의 식탁 교제가 중심이다. 그래서 특별히 화목제를 드리면 제사장이 무엇을 주는가? 가슴과 우편 뒷다리를 준다. 식탁 교제가 중심이다.
번제는 전체를 여호와께 향내나는 음식으로 드리는 것이 번제다. 다 태워 드리면 하나님이 향내를 맡으신다. 그러니까 화목제의 기름을 이 번제위에 태우라 그렇게 되어 있다. 기름은 하나님의 몫인데 그것을 번제와 일치 시켜서 번제위에 화목제의 기름을 태우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번제는 전체를 여호와께 향내나는 음식으로 드리는 것이 번제다. 그러므로 서원제나 자원제로 번제나 화목제를 드릴때에 즉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내용은 서원을 갚거나 스스로 기뻐서 드리는 것인데 그것을 드리는 방식은 전체를 다 태워 드리는 번제로 드리든지 하나님앞에 식탁교제로 드릴때에는 열납 되도록 흠없는 것으로 드리도록 명령하시고 감사 희생을 열납되도록 흠없는 것으로 드리고 열납되도록 당일에 먹으라. 명하심으로 마무리 하신다. 이것이 여기 22장에 전체적인 내용이다. 그러니까 제사장을 백성의 어른 삼으시고 성소에 불러 들인 것은 하나님앞에 생명과 평강의언약이다. 그들은 이 생명의 교제를 누리면서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도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특별히 드리는 일에 있어서는 여기서는 번제나 화목 제물을 드리는데 무엇으로 드리냐면 서원을 갚기 위해서나 자원제로 드리거나 감사제로 드린다. 그렇게 했을 때 흠없는 것으로 드려라. 그리고 흠없는 것으로 드릴뿐만 아니라 열납되도록 그 날에 먹어라. 그러니까 열납되도록 드리고 열납되도록 먹어라. 그 말이다. 하나님의 상에 하나님이 받으심직하게 드리고 하나님앞에 기쁜 친교로 먹으라. 드리고 먹어라는 말이 여기 22장에 강조점이다.
조금 미진된 것을 설명하겠다. 제 팔 일에 드리는 것도 흠없음과 관련된다. 여기 팔 일에 드리라는 말을 여러분이 의미를 몰라도 된다. 왜 몰라도 되느냐? 22장을 보니까 흠없는 것으로 드려라 하는 것이 강조점이다. 그러니까 팔일에 드리라는것도 흠없는것과 관계가 있구나. 그냥 짐작이 갈 것이다. 그 문맥을 봐야 한다. 그러면 왜 팔일에 드리면 흠이 없는 것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남자를 낳으면 여기서도 팔일후에 드리라는 것은 수컷을 낳았을 때 하는 말이다. 물론 암컷도 팔일후에 드려야 되겠지만 수컷을 두고 그렇게 말한다. 27절에 보면 수소나 양이나 염소가 나면 칠일동안 그 어미와 같이 있게 하라 수컷을 두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칠일이 지나면 팔일에 할례를 행하고 그렇게 하면 그는 여호와의 백성으로 드려진다. 팔일에 할례를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한마디로 부정한 것이다.
그러니까 짐승의 새끼도 수컷은 팔일 후에 드려라 그런다. 이것은 암컷도 포함된 말이다. 그런데 팔일에 드리는 것은 흠없음과 관련이된다. 22장 전체가 흠없는 것을 말하니까 그렇다. 그런데 남아를 드리는 할례에 상응한다.
그 다음에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라. 이것은 암컷을 두고 설명한다. 28절 보면 암소나 암양을 몰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한 날에 잡지 말지니 그렇게 되어 있다. 이것은 어미와 새끼를 말하니까 암컷을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어미와 새끼를 같은 날에 잡지 말라는 것은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삼지 말라는 말과 상응한다. 그것은 신명기 14장21절이나 또 출애굽기 23:18-19절 34:25-26절 거기 보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데 이렇게 드려라. 드리는 삼대 절기가 나온다. 3대 절기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물을 드리는 절기다. 그리고 초태생을 이렇게 이렇게 드려라. 초태생을 드리는 문제를 말하고 나서 그 다음에 무엇을 말하냐면 빈손 들고 나오지 말아라. 초태생을 하나님 앞에 이렇게 드리되 새끼를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강조되는 흐름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앞에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드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앞에 가나안 땅에 풍성한 것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드리는데 있어서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 그렇게 했을 때 만일에 그렇게 드리면 하나님앞에 드리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는 하나님앞에 풍성한 것을 드린다는 것이 강조점이다. 풍성한 것 그러니까 그것은 생명을 멸하는 방식이 포함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미의 젖은 새끼를 기르는것이지 새끼를 삶는 것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해서 풍성함을 따라서 드리는데 그 풍성함은 어미의 젖으로 새끼를 삶아버리면 그것은 풍성함이 아니다.
어미의 젖은 새끼를 길러야 풍성한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풍성한 것 초산물로 내게 드려라. 그러나 새끼를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 그런 문맥이다. 그러니까 거기서는 드리는 문맥인데 여기서는 드리는 문맥이 아니라 흠없는 것의 문맥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흠이 없는가? 팔일 후에 드려야 흠이 없고 여기서는 같은 날에 드리지를 말아라. 같은 날에 드려버리면 어미와 새끼가 한날에 죽어버린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생명이 멸하는 방식이다. 이 앞에는 풍성한 양식으로 드리는 것이 강조점이니까 남자는 삼대 절기에 나오고 초태생을 드려라 그런 문맥이니까 젖과 새끼를 연결시켰지만 여기서는 제물드리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팔일후에 드려야 거룩하고 어미와 새끼와 같은날에 죽여버리면 그런 것은 하나님의 식탁을 풍성케 하는 방식은 아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드리지를 말아라. 그런것과 상응하는 말이다.
이제 전체적인 설명이다. 흠있는 재물은 생명의 결함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만국의 여호와께 서원을 갚는 극상품이 아니다. 이러한 것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은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식탁에는 반드시 흠없는 것으로 드려야 된다. 왜 하나님은 생명이시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생명의 흠이 있는 것은 여호와의 식탁에 나타나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들은 흠없는 것으로 드리고 흠없이 먹어야 된다. 누가 먹는가? 제사장 가문만 먹고 부정한자는 먹지 못하고 제사장일지라도 그리고 그날에 먹어야 한다. 아무리 제사장이라도 이틀지 양식을 안 주셨다. 구약 때 이틀치 양식을 주신 것은 만나는 육일에 거둔 것은 제 칠일까지 먹었다. 이틀이 지나도 안 썩었지만 다른 날에 주신 만나는 썩어서 못 먹었다. 그리고 다른 모든 제물은 당일에 먹어야 되고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만 이틀까지 먹을 수 있다. 거기가 식탁의 친교가 강화되어 있다. 나머지는 그 날에만 먹어야된다. 그러니까 구약 때 아무리 먹도록 주셨어도 그것은 그 날에 양식일 뿐이고 제사장에게만 주셨고 심지어 제사장 딸일지라도 다른 지파로 시집가버리면 제사장 가문의 것을 먹지를 못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여러 간격을 두셔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께 나갈 때 흠 없는 것을 드려야 한다. 만일에 흠이 있는 것을 드리면 그것은 서원제에는 안 맞다. 서원제는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극상품을 갚는 것이기 때문에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로는 드릴수 있어도 서원제로는 못쓴다. 만일에 그것은 서원제물로 쓰면 말라기서에서는 말하기를 여호와를 멸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흠없는 것을 드리자니 얼마나 귀찮은고 하는 식으로 나를 멸시하면 너희들이 그것을 너희 관원들에게 드려보라 차라리 갖다주지 안했으면 괜찮겠지만 갖다주면 벌받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이 내 상을 멸시하지 말아라. 말라기는 여호와의 제도를 멸시해버린 제사장의 타락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앞에 가져온것중에 특별히 흠없는 것으로 골라서 하나님의 상에 드려야 된다. 흠있는 것을 받으면 안된다.
이제 이것이 어떻게 신약에서 완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다. 교회는 자기의 몸을 화목 제물로 드리시고 하늘성소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안에서 그 몸을 향내나는 제물로 산 제사를 지내며 그의 상에서 그의 피와 살을 먹는 평강을누린다. 하나님이 옛 언약 경륜에서는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별하시고 그중에서도 제사장 가문을 구별하시고 그중에서 대 제사장을 구별하시고 그만 하나님의 상에 나와서 먹도록 했다. 안식일날 진설병을 먹는 것은 대 제사장이다. 그리고 어누 누구도 성소에 나와서 봉사하면 안된다. 이처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하는 생명의 관계를 한집에서 살고 한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에로 인치신 것이다. 그런데 일반 백성은 아직은 못들어가고 장자를 대신한 레위 지파만 성소를 봉사하는데 그중에 제사장만 단에 들어가고 성소에 들어가고 대 제사장만 성소의 진설병을 먹고 그런 방식으로 여러 간격을 두었다.
왜냐하면 아직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는 온전한 길이 열리지 안햇을 때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이처럼 여러 간격을 두고 교제했던 그 간격을 완성하셨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죄 때문에 휘장으로 가리우시고 휘장밖에 자기 대 제사장을 둔 그런 교제 방식이 아니다. 큰 아들을 밥 먹으라고 불렀는데 상하방에서 아버지만 문 닫고 방에서 잡수시고 큰 아들은 그 앞에서 먹고 다른 아들은 저 마당에서 먹고 하는 그런식으로 먹는 방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 제사장으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그는 우리의 온전한 대 제사장으로 화목제물이 되셨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안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으셨는데 그것은 구약에서처럼 휘장으로 가리운 한집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짓지 아니한 하늘 성소 하나님 보좌 앞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에로 구원하신 것이다.
이전에 휘장밖에 두고 먹도록 했던 이 관계를 하늘 보좌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그런 관계로 완성시키셨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어른으로 기른 것처럼 휘장 밖에서 먹고 마셨던 것을 하늘 보좌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관계로 완성시키셨다. 어떻게 자기 아들을 화목 제물로 삼으셔서 그렇게 하셨다. 이 일을 이루셧다. 이제 예수는 우리의 화목제물이시기 때문에 화목제물이신 예수는 하나님과 제사장의 친교의 식탁의 화목제물이기 때문에 바로 이 예수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 그분은 하나님이 사람되신 그분안에서 하나님이 이미 화목의 길을 열으셨는데 그 아들의 죽으심을 통해서 이제는 땅에 속한 성소에 먹는 관계가 아니라 이제는 예수를 부활시키셔서 하늘 보좌에 올리심으로 이제는 하늘 보좌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관계를 열으셨다. 이제 교회는 예수 안에서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데 이제는 예수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땅에 속한 것 모세에게 속한 것은 아무리 흠이 없어도 그런 것은 짐승의 흠이 없는 것 뿐이고 그리고 그 피만 하나님의 단에 드린다. 피와 기름은 하나님의 몫이다. 그러나 피와 기름을 제사장에게는 주지 안했다. 아직도 그런 친교의 간격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지 우리는 예수안에서 몸으로 향내하는 제물을 드린다. 거기는 장자와 차자의 차이가 없고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이가 없이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대표자에게 속하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성소에 속하고 이제는 하나님이 예수의 죽으심에서 휘장을 찢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제사장의 간격이 없는 것 만큼 제사장과 일반 백성의 간격도 없고 대 제사장과 일반 제사장의 간격도 없고 제사장과 레위지파의 간격도 없고 레위 지파와 일반 백성의 간격도 없고 이제 모든 간격은 제거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이 빛가운데서 생명의 교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그리고 우리로 그의 상에서 먹고 마시도록 했다. 구약 때는 어느 누구에게도 피와 기름을 주지 안했지만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시라고 그렇게 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내가 아버지와 하나인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와 하나이니라 하는 생명의 관계로 영원히 교회를 거룩하게 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으시면 그럴 것이다.
구약 때는 이런 저런 규칙을 지킴으로 그 거룩을 누렸다. 부정한 것을 안먹고 또 부정한 짐승을 안만지고 또 부정한 여자에게 장가 안가고 그런 방식으로 통해서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를 누렸지만 이제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하늘에 속한 새 백성이 되고 예수께 속한 모든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는 썩어짐의 그림자가 없다. 그 확증이 예수님게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 일반의 양식을 이스라엘 백성이 먹으면 항상 식탁에 술이 있는 식이다. 먹는 것을 주님의 살과 주님의 피 즉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소에서 먹고 마시는 방식이다. 피와 기름은 하나님께만 드렸고 고기만 일부 제사장이 먹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하는 그런 교제방식으로 우리의 먹고 마시는 삶을 거룩하게 했다. 누구든지 예수안에 있으면 우리의 전 삶의 질서로 거룩한 봉사를 하고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의 교제를 누린다. 이것이 하늘에 속한 신령한 삶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이제는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들로 취임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가 누리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대제사장적인 교제를 누린다. 이제 이것이 일단 적용되는 문구다. 단지 우리들이 이제 구약에서 하나님앞에 흠 있는 것을 드리면 하나님앞에 욕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에게 직접 적용시킬때는 구약 자체의 본문을 우리에게 직접 적용시켜 가지고 돈도 한쪽이 접어 졌으면 흠이 있고 하나님앞에 성의가 없고 그것을 다리미로 다려서 드린다거나 돈을 벌면 제일 새돈으로 골랐다가 내면 거룩하고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러분이 구겨진 돈으로 헌금을 하는 것보다는 좋게 펴서 깨끗하게 쓰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성경에 있는 말이 아니라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반 상식이다. 성경은 돈을 새 돈으로 내라는 등 그런 말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완전한 생명의 교제로 주시는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헌금할것인가? 종교적인 의식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방금 제가 했던 말은 정당한 상식적인 이야기다. 부활하신 예수안에서가 아니고는 흠없는 것은 없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면 혹 그 사람이 가난해서 다른 사람에게 얻어서 냈다고 해도 한쪽 모퉁이 찢어진 돈을 내다고 해도 그는 거룩하게 봉사한것이고 아무리 세상에서 신사여도 그가 예수를 안 믿으면 그는 부정한자요 저주받은 자다.
그러니까 신약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전한 생명의 교제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이제는 제사장과 백성의 차이가 업다. 왜 우리의 대표자인 예수와 우리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형제로 대표로 들어갔기 때문에 차이가 없다.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신약 교회에 종교 의식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일반 상식에서 보았을 때 마땅히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있다. 그런 것은 여러분이 정당한 믿음으로 살면 분별할 수 있는 이야기지 성경 본문이 우리의 종교적인 의식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려고 줄긋기를 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주의 이름으로 수고하고 이익을 모인 것은 안식 후 첫날 곧 예수의 부활의 날에 주님의 상에 함께 가지고 나오고 우리의 일상 양식 생명의 선물을 하나님의 상으로 가지고 나오고 그 상에서 생명의 친교로 먹고 우리를 위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생명의 선물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히 주신 것으로 형제를 몸으로서 구제하고 이런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그냥 토요일 되니까 아 벌써 주일이 되었냐? 일주일 내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못살고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날 달력을 보니까 빨간 날짜가 있다. 아 벌써 주일이구나 그래서 부랴부랴 나오고 그리고 마침 부자라 은행에서 바꾼 새돈이 있어서 새 돈 내고 그런다고 해서 다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산 것 외에는 다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면 구약의 제사장은 흠이 있고 휘장밖에 있어도 신약의 백성은 흠이 없다. 왜 우리의 대표는 하늘 보좌에 나가셨기 때문이다. 그 교제로 우리가 먹고 마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흠이 없다. 완전한 생명의 교제가운데 먹을수 있다. 이것은 믿는 것을 말하는것이지 종교 에식을 두고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가령 여러분이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줄 때까지라도 실은 가난한 사람 주기가 어려운 것이다. 부자 주기도 어렵겠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주면 꼴아버릴 수가 있다. 나를 무시하고 이것 준가 하고 미국 사람들이 구제를 많이 하고 욕을 먹는 것이 이 사람들이 찝차를 타고 가면서 휙 던져 준다. 우리 나라는 두 손으로 주어야 예의지 지나가다가 휙 던져 주면 이것을 불사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휙 던져 주면 받아 먹으면 그 만이다. 미국식으로 주면 한국 사람들은 아주 기분이 나쁘다. 우리가 누가 지나가는데 어이 받아 하고 주면 굉장히 기분이 나쁠 것이다. 친한 친구이면 몰라도 가난하다고 그렇게 주면 받아도 기분이 나쁘고 더구나 어른 한테는 그렇게 주는 법이 없고 그럴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 영역에서 정당한 예의를말하고 있는것이지 이것을 성경과 막 직접 연결시킨 것은 아니다. 각 나라 마다 물건을 주는 방식도 다를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방식은 윤리라는 것은 서로 관계다. 가난한 사람에게도 예의를 갖추어서 주어야 되는 것이고 더구나 자기 보다 어떤 면에서 높다고 생각하면 나이가 많던지 상관이던지 무엇이 있던지 하면 정당한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오히려 무엇을 주는 것이 실례가 되고 불쾌감을 사는 것이다. 그런 문제들은 교회에서 가르칠 것이 아니라 가정 교육에서 배울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에서 살고 있으니까. 미국은 미국식으로 배우면 된다. 성경은 우리의 구체적인 윤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완전한 새로운 관계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그 완전한 관계 아래서 마땅히 형제를 존중해야 되고 또 하나님이 주신 질서 안에서 정당한 예의를 지켜야 된다.
그런데 그런 것을 교회에서 다시 가르쳐야 될는지 그것이 좀 답답한 일이다. 어느 교회에서는 그런다고 그런다. 우리 나라 교회가 목사는 존경하고 장로는 존경하지 않는다. 목사는 신학교도 나오니까 좀 괜찮은 것 같고 장로는 신학교 나오지도 않고 오래 다니다 보니까 장로 되었으니까 나도 몇 년 다니면 되겠구나. 그래서 그런지 별로 존경을 안한다. 우리 나라 교회 형편이 거의 목사에게 들어가 버린다. 아마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장로한테는 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우리 전도사들은 그렇게 안 가르칠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설교해도 교회의 대표는 장로다. 그러니까 마땅히 존경해야 된다. 왜 직무가 그러니까. 아버지가 국민학교 나와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장로로 뽑았으면 마땅히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열심히 가르치니까 성탄절 때 장로에게 선물을 많이 한 모양이다. 얼마큼 좋은 일이다. 그런데 전도사한테는 입을 다 씻는 것이다. 왜 배우기를 장로를 존경하라고 배웠거든 그러니까 꼭 우리 아이들 비슷하게 되었다. 하나 시키면 그것만 딱 배우는 식이다. 저는 그런 예를 들어서 여러분한테 미안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연말과 연초가 되면 인사를 차릴 때가 많다. 그런데 성경은 말하기를 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를 존경하고 특별히 가르치는 자를 배나 존경하라고 했기 때문에 그 직무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목사는 생각이 나는데 전도사는 가맣게 잊어버린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사는 것이 그런 종교 의식을 배워서는 안된다. 마땅히 성도들이 서로 존경할 줄 알아야 되고 내가 연말이 되면 가난한 성도에게 선물할 것을 기억을 해야 되고 그런 일에 있어서 정당한 예의들을 갖추어야 된다.
그 은혜는 태평하게 산 것이 은혜가 아니라 서로를 존중하는데 진정한 은혜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은 허물없이 사는 것이 좋은 줄 알고 있는데 예의를 지켜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예의를 지키면 숨 못 쉬게 갑갑한 줄 아는데 그것은 타락한 본성이 그런다. 정당한 예의를 지키는 것만 상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 준 것이고 그것이 정당한 우리가 차지할 위치다. 서로가 정당한 위치 안에 있을 때만 하나님이 주신 조화와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땅히 남녀간에도 예의가 있는 것이고 조심해야 된다. 그런 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 신령한 분별력으로 사는 한 면이다.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서로 존중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흠이 있는 것을 드리면 전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고 막 그렇게 적용할 것은 아니다. 여러분이 헌 것을 목사에게 줄 수도 있다. 목사는 새것만 쓰고 제일 좋은 것만 쓰고 그런 이야기를 이 본문으로 인용하면 안된다. 헌 것을 쓰기도 헌것도 못 받으면 자기가 일해서 먹기도 하고 교회를 봉사하는 것은 월급제가 아니기 때문에 교인 없어도 혼자라도 할 것이다. 교회를 세워야 할 일이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이 삶의 질서에서 정당한 것을 분별해야 한다 그 말이다.
여러분이 집에서 못 쓸 것 교회 가지고 와서 써도 된다. 교회는 꼭 새것만 있어야 되고 그런 말은 아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당한 질서에서 이것을 교회가 쓸 수 있는지 모르는지 그것은 여러분 자신들이 분별해라 그 말이다.
그렇게 서로를 존중하고 성도를 그리스도안에서 귀히 여기고 하는 그런 관점에서 질서를 지키면 된다. 이 본문하고 그런 것하고 직접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흠이 없는 제사장이 되었다. 우리는 흠 없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고 이제는 완전한 생명의 교제로 주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영광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린다. 바로 구약에서는 제사장을 휘장밖에 두시고 교제했던 하나님이 이제는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의 교제로 우리에게 선물하셨다. 이것이 이 본문이 신약 교회에서 읽혀지는 방법이다.
구약 규례를 신약의 어떤 종교적인 의식에다 맞추어 버리면 안된다.
- 설교 : 김강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23장이다. 오늘은 문장의 양이 많다. 왜냐하면 하면 23장이 전체적으로 긴데다가 어떻든 본문을 읽는 것이 성경을 해석하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에 본문을 요약을 해도 요약하는 한계점이 있기 때문에 문장이 많다. 그래도 해석을 들어가기 전에 문장 자체를 읽을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란다.
이제 23-25장까지는 절기에 대한 거룩한 규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23장에는 오늘 공부할 것인데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다. 그렇게 말씀하고 24장은 성소의 등불을 켜고 떡을 진설하는 규례를 말씀하고 있고 그리고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에 백성이 어떻게 해방될 것인가 하는 그런 규례를 말씀하고 있다.
오늘 23장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다. 23장 2절의 말씀은 3절까지의 말씀의 서론도 되면서도 전체적인 서론으로 이해를 하면 좋겠다. 제일 끝에를 보면 44절에 모세가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다. 그러니까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다. 하는 말씀이 된다. 항상 처음과 마지막 처음은 주제적인 서론이고 뒤에는 결론이면 그 가운데는 구체적으로 풀어서 강화시키는 내용이다. 그것은 한 장이나 한 문단들도 거의 그렇게 되어 있다. 먼저 주보에 성경을 요약했다. 실은 요약을 안하고 성경 본문을 그대로 읽고 배워야 하나님의 지혜로 배운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들을려고 하지 말고 성경을 직접 읽고 성경 자체의 표현법 또 전체적인 구조 그런 것을 본문의 메시지를 잡는 방법을 자꾸 훈련해야 될 것이다.
3절에 안식일이다. 엿새 동안은 일하고 체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라. 일하지 말라. 이는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다. 먼저 결론부터 한 군대보고 하자. 37절을 보면 이것들은 여호와의 절기라. 너희는 공포하여 성회로 삼고 번제와 소제와 희생과 전제를 그 날에 각각 여호와께 드리며 이 화제는 여호와의 안식일 외에 서원예물 외에 너희 헌물외에 너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공포하여 성회로 삼는다 하는 말을 그렇게 하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39절 이하는 33절에 있는 초막절을 또 풀어서 설명하는 구조다. 그러니까 일단계 결론은 37절부터38절이고 그리고 전체를 마무리하는 결론은 44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용상 마무리하는 37-38절 보면 절기는 성회로 모이고 그 성호는 여호와께 많은 예물을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성회의 내용이다. 그런 설명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부터 읽겠다. 엿새 동안에는 일하고 일곱째 날은 쉬어야 한다. 그런데 그 쉴 안식일인데 그 때는 성회로 모여야 한다. 이는 너희 각처에서 지킬 너희 안식일이다. 그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일인데 그들이 거하는 각처에서 지켜야 한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본문을 다 읽고 한꺼번에 설명하겠다.
그 다음 4-8절부터 유월절과 무교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1월14일은 유월절이요 15일은 무교절이다.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첫날도 안식하고 성회로 모이고 안식하고 제 일곱째 날도 성회로 모이고 안식해라. 칠일동안 화제를 드리라. 그런 내용이다. 14-15일에 지키는데 첫날도 마지막 날로 하나님앞에 예배로 모여 예물을 드리고 그리고 백성들은 그동안에 무교병을 먹는다. 그러니까 유월절에 강조점은 무교병을 먹고 하나님앞에 화제를 드린다는 것이 핵심이다.
9-14절은 초실절이다. 내가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가 곡물을 거둘 때에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 주어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라. 그리고 번제와 소제를 향기로운 화제로 하나님 앞에 드리고 또 전제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앞에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백성은 어떤 곡물을 입에 대도 안된다. 그러니까 초실절에 강조점은 하나님앞에 수확에 첫단을 드리고 그것과 함께 많은 예물을 향기롭게 드린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첫 음식을 드린 것이다. 그리고 백성도 먹는다. 그 전에는 백성이 먹으면 안된다. 초실절은 수확의 첫 것을 드리고 먹는 첫 곡식을 하나님앞에서 먹는 것이다.
15-22절은 오순절에 대한 말씀인데 이처럼 초실절에 수확한 첫단을 하나님 앞에 요제로 드린날 그 때로부터 칠 안식일을 계산하고 안식일 이튿날 까지 오십일을 계산해서 그 때에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첫 수확을 끝내고 드리는 것이다. 수확할 때 한단을 드리고 그 수확을 다 끝내고 나서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 보면 안식일을 일곱 번 채워야 한다. 그 때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는데 그 때는 누룩섞은 떡 두덩이를 구워서 하나님앞에 흔들어서 드린다. 그리고 그 떡과 함께 소제와 전제를 드리는데 그 때 향기로운 번제를 드려야 된다. 그리고 속죄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요제로 드리는데 이 요제로 드린 화목제는 성물이기 때문에 제사장 몫이다. 그리고 그 날은 성회로 모이고 일해서는 안된다. 대대로 지키라는 말로 끝마치고 나서 또 뒷말이 붙어 있다. 곡물을 벨 때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남기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 설명은 이렇게는 안되어 있다. 곡물을 벨 때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고 떨어진 이삭을 주울려고 뒤돌아 보지 말고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저는 그냥 문장을 줄이기 위해서 내용만 쓴 것이다. 곡물을 벨 때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남겨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을 말함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 오순절은 대대로 지키라 하는 말에서 오순절 지킨 이야기를 쭉 하고 나서 그 다음에 또 덧붙이기를 가난한 자를 위해서 곡물을 남겨라. 그리고 나서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을 말씀하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런 구조가 오순절과 속죄일과 초막절의 구조다.
칠월1일을 나팔절인데 안식해야 한다. 그 날은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일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 다음 26-32절은 속죄일 인데 칠월 십일을 속죄일 인데 그 날도 성회고 스스로 괴롭게 하고 하나님앞에 화제를 드리고 일해서는 안된다. 그 날은 여호와 앞에 속죄하는 속죄일이기 때문이다. 그 날 만일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않고 일하는 자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중에서 끊으실 것이다. 그리고 대대로 지키라 말하고 나서 또 뒤에 말이 덧붙여 있다. 이는 너희의 쉴 안식일이다. 스스로 괴롭게하고 9일저녁부터 10일 저녁까지 안식해라. 그런 말이 붙어 있다.
그 다음 초막절인데 15일이다. 칠일 동안 지켜야 된다. 첫날도 성회로 지키고 일해서는 안되고 칠일동안 화제를 드리고 제 팔일에도 성회가 될 것이다. 그 때도 화제를 여호와께 드리며 거룩한 대회이기 때문에 체 팔일에도 일해서는 안된다.
그 다음 37-38절은 결론적인 성격이다. 이것들이 여호와의 절기인데 그 때는 공포해서 성회로 모이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려야 되는데 이 화제는 안식일 외에 다른 이런저런 예물 외에 따로 드리는 것이다. 그 다음 초막절에 대한 부록이 또 붙어 있다. 그런데 수확을 마치고 칠월십오일부터 칠일 동안 절기를 지키는데 첫날과 제 팔일에 안식해야 한다.
첫날에는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가지와 무성한 가지 버드나무 가지를 취하고 하나님 앞에 칠일동안 즐거워해야 한다. 매년 대대로 지키라 하는 말이 있고 그 다음 부록 말이 붙어 있다. 이것은 문단이 이렇게 안나누져 있다. 칠월에 지키라는 말 칠일동안 누구나 다 초막절에 거하라. 이는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던 것을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언약의 하나님의 이름을 말함으로 끝나고 있다.
해석이다. 이 절기는 레위기 23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23장에도 있고 민수기 28장에도 있고 신명기 16장에도 있다. 물론 이런 절기가 자세하게 언급된 것은 민수기다. 출애굽기나 신명기는 이런 절기들이 아니라 오히려 삼대 절기들이 있다. 물론 출애굽기 23장에는 안식년과 안식일의 말도 있지만 주로 삼대 절기에 내 앞에 나와라. 신명기도 그런 언어고 민수기28장은 여기 있는 절기보다 더한 절기들이 있다. 초하루에 드린 절기도 있고 월삭이다. 여기는 월삭절기는 없다. 월삭절기까지 있다. 그런데 이런 절기들은 상호 비교해서 차이점을 알아야 되고 또 각 본문의 문맥과 구조에서 차이점을 강조하는 표현법들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 거기 주제를 파악하고 거기 비추어서 해석을 해야 바른 해석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각 모세 율법마다 기록한 목표점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출애굽기는 언약 체결이 목표다. 시내산에 강림하셨는데 그분이 친히 성소에 강림하셔서 언약 체결 레위기는 언약 체결의 교제의 삶이 핵심이다. 성소에서 부르시고 내 성소에서 드려라. 성소에서 교제하는 것이 핵심이다. 민수기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고 군대로 계수 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런 봉사를 감당하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이 봉사를 감당하게 해주실 것이다. 거기 보면 하나님 앞에 많은 예물들을 드린다. 그렇게 해서 점점 예물들이 많아 진다. 제일 마지막이 초막절인데 그 첫날은 숫송아지 15마리 이틑날에는 14마리 해가지고 굉장이 많다. 아마 그정도 제사 지내는 예배는 다른데는 없을 것이다. 그것이 민수기다.
그러나 신명기는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안식과 풍성함을 누리는가가 핵심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만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과 가난한 자 객까지 함께 먹고 즐거워해라. 너희 성읍에서 함께 먹고 즐거워해라 그런 말이다. 함께 나눠라 하는 것이 신명기 강조점이다.
그러니까 각 모세 율법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주제를 따라서 표현법들이 강조법들을 표현해 주고 있다. 그러니까 레위기도 그런 표현법을 따라서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그 말이다. 레위기에서 핵심은 성소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고 나한테 예물을 드리려거든 이러이러한 예물을 드려라. 하나님이 친히 성소에 함께 강림하신다 하기까지가 출애굽기면 그 성소에서 어떻게 함께 먹고 마시고 교제하는가 그것이 온 가나안 땅에서 교제하는가 교제의 삶이 레위기의 핵심이다. 물론 출애굽기나 레위기는 시내산 말씀이지만 출애굽기는 언약 체결이 강조면 레위기는 언약체결의 삶이 강조다.
그러니까 여기 레위기는 일곱 절기가 있는데 안식일부터 초막절 연중 절기가 있다. 그러면 레위기에서 이 절기를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문장에서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절기는 이러하니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 그 성회는 무엇인가? 보니까 각처에서 대대로 지켜라 하고 끝나고 있다. 여러분들이 표현법들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는 말은 처음 있고 그 다음에는 주로 칠월 달에 있는 절기에서 반복된다. 칠월 일일 나팔절에도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속죄일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렇고 초막절도 그렇다. 그 앞에는 제일 앞에만 그렇게 나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똑 같은 말도 칠월 절기가 강조되어 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는 말이 앞에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대대로 지키라 하는 말은 큰 절기들에 강조되어 있다. 첫 절기는 오순절 절기에 강조되어 있고 칠월달 절기는 속죄일과 초막절에 그 말이 나와 있다. 그래서 대대로 지키라 하는 말이 있고 또 그 다음에 다른 말이 붙어 있다. 다른 절기는 그런 말이 없는데 대대로 지키라는 말이 붙어 있다. 그래서 주로 마지막 절기 강조된 절기들 일월 달의 절기는 오순절이 완성이면 칠월 달의 절기는 초막절이 완성이다. 그 완성된 절기에다는 대대로 지키라는 말이 있고 뒤에 무엇이 더 붙어 있다. 그런 구조들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절기인데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키라 그 말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그들의 거처로 주셨을 때 그들의 거처에서 대대로 이것을 지키면 이것을 대대로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규례를 주심으로 그들을 교제하는 백성으로 거룩하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 규례를 지킴으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고 이 규례를 안 지키면 하나님과 교제를 못 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거룩케 하는 규레다.
가령 아버지가 아들한테 너 날마다 내 상에서 먹어라. 말 안 듣는 자식도 그렇게 말했으면 억지로라도 일찍 들어와서 먹으면 그 아버지 말을 들을 때마다 그 아버지의 상에서 먹을 수가 있다. 그러나 예라 가지 말자 하고 먹으면 아버지의 얼굴도 못보고 아버지의 상에서 먹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친구들끼리 라면을 먹고 재미있게는 먹을지는 몰라도 아버지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방식으로는 그는 살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레위기는 이 규례를 주심으로 제사장과 백성을 하나님앞에 예물 드리고 즐거워하는 백성으로 거룩하게 했는데 레위기는 하나님앞에 예배로 모여 하나님께 드리고 백성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의 절기로 바꿔주는 것이다. 이것이 23장의 절기다. 그것이 레위기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공포해서 공적으로 예배 회로 모이는 날인데 너희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누리고 지킬 것이다. 그런데 이 성회는 향기로운 예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 성회의 핵심이다. 그러면 하나님앞에 드리는것이냐 그것만 아니라 여호와앞에서 백성들이 함께 먹고 즐거워하는 모임이다. 그것이 성회다. 그리고 이 성회를 위해서는 안식을 해야한다. 그런데 이 안식은 이 성회의 문맥에서는 성회의 전념하기 위한 안식이다. 이 성회외에 다른 일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로 안식이다.
그러니까 안식이라는 말이 단어가 똑 같다고 해서 교리적으로 풀면 안되고 만일에 이 날에 다른 것을 해 버리면 그 성회에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안식이다. 항상 그 문장에 있는 의미를 뛰어 넘어서 해석을 해 버리면 안된다. 일단 그 문장에 구체적으로 그 역사에서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을 그 문장에서 읽고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완성된 질서로 우리에게 선물되는가를 우리가 읽어야 한다. 이것을 뛰어 넘어서 읽으면 절대로 안된다. 그것은 역사를 뛰어 넘은 종교 철학이지 구체적인 생명의 선물은 안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 구체적으로 그들의 거룩함이다. 그들은 이 규레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상에 나가고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상에서 받아서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이런 거룩한 축제를 누릴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 이 문맥에서는 어떤 의미로 안식이냐면 안식은 성회를 위한 안식인데 절기에서 주시는 것을 누리는데 전념하는 쉼이다.
만일에 그 날에 다른 일을 하면 성회에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모독하는 것이고 그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레위기에서 절기는 성회로 사는 가나안 땅의 안식이 곧 절기의 핵심이다. 가나안 땅에서 성회로 즐거워하는 것이다.
지금 방금 설명한 것은 이 성회에 대한 근본적인 것을 설명한 것이다. 성회는 무엇인가? 지금 이스라엘의 삶을 축제적인 삶으로 거룩하게 해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상에 드리고 백성이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또 그 성회를 완전히 누리기 위해서 다른 일을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 성회를 완벽하게 누리도록 그렇게 해주고 있다. 핵심은 절기는 가나안 땅을 완전히 성회의 삶 하나님 앞에 예배의 삶 축제의 삶으로 성화시킨 그런 규례다 그런 말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면 안식일은 그러면 어떤 의미로 복인가?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을 누리는 것인데 그것은 칠일 주기의 예배일이다. 그 연중 절기는 아니다. 그러니까 기한에 미쳐서 그런 말은 아니고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절기는 이러하니라 그런 말만 있지 기한이 미쳐서 그런 말은 없다. 왜냐하면 칠일 주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6일 동안 일하시고 칠일에 쉬셨다. 여호와의 안식일에 참여하는 안식일이다.
그 다음 기한이 미쳐서 지키는 연중 절기는 일월 달에 지키는 칠일 절기는 유월절과 무교절이 시작이고 일월 달의 완성은 오순절이다. 물론 오순절은 일월달은 아니다. 칠칠사십구 하면 한달이 훨신 넘어가버린다. 그런데도 초수절의 완성이 오순절이다. 첫 단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리고 수확하고 그리고 수확하고 나면 칠칠은 사십구 오십일에 누룩 섞은 떡을 드린다. 누룩을 섞은 것은 이럴때는 안식이다. 편안히 누룩을 섞어서 부풀려서 떡 두 개를 드린 것이다. 그러니까 일월달에 속한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월달에 기한에 미쳐서 지키는 연중절기에 처음 나오는 것은 유월절과 무교절이다. 그리고 그 완성은 오순절이다.
그리고 칠월에 절기가 강조되는데 모세에게 이르셨다 하는 말이 칠월 절기에는 항상 앞에 붙어 있다. 칠일 절기인 초막절이 칠월 절기의 완성일뿐만 아니라 모든 절기의 완성이다. 그런데 오순절과 속죄일과 초마절은 말씀하신 형식이 비슷하다. 대대로 지키라 하는 말이 있고 뒤에 부과적인 언급이 따라 있다. 해석하기 전에 구조를 보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23장에 절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구체적인 설명에 들어가서 이제 어떤 형식으로 이 본질을 설명하는가? 먼저 구조 파악을 했다. 이제 해석을 하겠다. 그러면 안식일은 여호와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안식일의 안식이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무교병을 먹는 것이 핵심이다. 물론 자기들만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되지만 거기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뒤로 돌려져 있고 먹으라는 말이 항상 강조되어 있다. 그래서 무교병을 먹는 것이 유월절과 무교절 성회의 본질이다. 초실절은 안식후 첫날 첫단을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이 새 양식을 먹는 것이 초실절이다. 그 날은 그것 먹는 재미로 흠뻑 젖기 위해서 다른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초실절에는 안식하라는 말은 없지만 전체적인 문맥으로 봐서는 그럴 것이다. 그 다음에 오순절은 이 안식으로부터 일곱 안식일을 계산해야 된다. 그리고 안 식후 첫날이기 때문에 초실절이 안식후 첫날 첫단을 드렸던 것처럼 일곱 안식후 첫날 새 소제를 드린다. 그러니까 이것은 실은 초실절의 완성이다. 오순절은 새 소제로 누룩섞은 떡과 함께 여호와께 많은 화제를 드려야 된다. 본문을 보면 암양 일곱 마리를 하나님께 드리고 숫소 하나를 드리고 드린 예물이 많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도 다른데는 소제나 전제 이런 말인데 여기서는 누룩섞은 떡 두덩어리를 구워서 드려라. 다른데서는 누룩섞은 떡을 못드린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누룩섞은 떡 두 덩어리를 드린다.이것은 새 소제를 하나님앞에 드리고 백성도 먹는것인데 이것은 안식의 완성이다. 편안히 먹는 것이다.
나팔절은 칠월을 하나님이 함께 하신 절기의 날로 기념하는 것이 나팔절이다. 여기서 직접 월삭절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달의 첫날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은 민수기에 나와 있지만 여기 레위기서는 직접 언급은 안한다. 그런데 칠월 1일 그 달 일일 여기서 표현은 칠월 일일 곧 그 달 일일로 해서 칠월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칠월 달을 그들에게 거룩한 달이다. 일월달이 구속 때문에 하나님 앞에 첫달로 되었지만 그런 의미로 칠월달과 일월달이 서로 상응하는 구조다. 칠월달이 일반 달력으로는 거룩한 설날이다. 그러니까 모든 월삭을 기념 했던 것처럼 칠월일일은 그런 의미로 모든 월삭의 머리다. 그러기 때문에 칠월 일일 곧 그 달 일일을 나팔을 불어서 기념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절기에 예물에 나팔은 분다. 그 나팔 부는 것은 시내산 나팔 부는 것이 항상 모델인데 나팔 부는 것은 하나님이 항상 강림하시고 함께 계신다.
그들이 제물위에 나팔을 불면 하나님이 거기 강림해 계신 것이다. 그런데 첫달에 그러니까 그들의 일반 달력으로 새해 첫날 일월 일일에 그런 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칠월 일일 곧 그 달 일일에 나팔을 불어서 기념해라. 이것은 모든 달의 시작의 달로 기념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달의 시작에 그들의 예물위에 임하신 것을 기념해서 나팔을 불고 화제를 드려야 된다.
그리고 속죄일은 스스로 괴롭게 하고 속죄함을 받는 것이 핵심이다. 그 날은 굶어라 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괴롭게 해야 한다. 괴롭게 하기 위해서 그들은 하루종일 안식해야 한다. 괴롭게 하는데만 모든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날은 속죄일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속죄일에 어떻게 제사하는가 여기는 안 나와 있다. 그것은 16장에 나와 있었다. 여거서는 어떻게 하나님의 축제의 절기인가 하는 것인데 실은 속죄일도 축제다. 왜 그들이 속죄함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성소에서 예배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날은 전적으로 굶어야 한다. 만일에 그 날에 굶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다른데서는 그날 안식을 범하면 죽인다는 말이 직접 없다. 그런데 그날 안식을 범하면 죽인다는 말은 어디가 나오냐면 이 속죄일에 있겠지요? 다른데는 그날안식을 범하면 죽인다는 말은 없다. 왜냐하면 속죄일에는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길을 위한 속죄일이었기 때문에 만일에 그날 그 일을 위해서 전념하지 안했으면 그는 그 교제로부터 끊어지기 때문에 죽인다는 말이 반복되어 있다. 핵심은 그 날에 속죄하는 일이 핵심이다.
그 다음에 초막절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는 것이 중심이다. 칠일 동안 지켜야 되는데 36절에 보니까 화제를 드려라. 많은 예물을 드리는 것을 앞세워 놓고 그 다음 39절 이하에서는 초막에서 함께 즐거워해라 그런 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초막절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며 애굽에서 그들을 구원한 것을 즐거워하며 매년 칠일동안 초막에 거하며 대대로 기념하는 것이다. 다른 절기는 매년 지켜라 이런 말은 없다. 매년 절기인데도 그런데 여기서는 매년 지켜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초막에 일주일 동안 거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그 완성을 소망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신약에서도 절기의 완성을 초막절에다 두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모든 것을 하늘에 속한 안식과 교제와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온전히 주셨다. 교회는 주의 상에서 주의 몸에 참여하며 그 몸의 지체를 봉사한다. 여기 22절에 오순절을 보면 곡물벨 때 하는 이야기가 있고 26절에 속죄일도 32절에 보면 쉴안식일이니 덧붙여 있는 말이고 그리고 초막절은 무엇인 덧붙여져 있냐면 전체적으로 39절 이하도 덧붙여진 말이 된다. 왜냐하면 37절에 절기는 이러하니라 결론은 내려버리니까 그렇다. 그런데도 41절 너희를 칠월달에 이 절기를 대대로 지키라 하고 나서 칠월에 지키라 그리고 이스라엘에서 난자마다 초막에 거하라 하는 말이 덧붙어 있다.
이 덧붙어 있는 말이 절기들을 강조하는 말들이 된다. 여러분 부모들도 말씀하실 때 그런다. 말 다해서 문 열고 갈려고 하니까 야 너 잘 알았지? 정신 똑똑히 차려라 그 말이 강조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대대로 지키라는 말이 있어 놓고 뒷말이 덧붙여져 있다. 그러면 오순절에는 실은 첫 수확을 마치고 누룩을 섞어서 편안히 부풀린 떡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이다. 이것은 떡 두덩어리를 드리는 것은 항상 증거의 떡이다. 열두덛어리 떡을 안식일에 드린 것은 24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의 완성을 나타내 보인것이고 여기서는 그런 의미보다는 증거의 떡인데 두덩이를 드리는데 누룩 섞은 떡을 드린다. 그것도 어떤 의미로 안식을 일곱 번 채우고 난 안식후 첫날에 드린다.
안 식후 첫날 하는 것은 항상 새로운 시대의 양식을 말하는데 새 소제인데 안식이 지나면 항상 새로운 날이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첫 이삭은 안식후 첫날 드리고 그리고 오순절은 칠 안식일을 계수하고 나서 안식후 첫날 드리고 그런 의미로 안식의 완성이기 때문에 누룩섞은 두덩어리를 드린다. 그렇게 해서 수확을 그들에게 주신 안식 새 곡식 그런 의미로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하나님 앞에서 드린 것을 말해놓고 나서 그 다음에 강조점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오순절에도 하나님 앞에 새 곡식을 드리고 그리고 백성들이 자기만 풍성히 먹는 것이 아니라 고아나 객이나 과부까지라도 자기 밭에서 즉 하나님의 밭에서 먹을수 있도록 남겨라. 즉 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새로운 곡식을 풍성히 주는 것이 오순절에 핵심이다.
그런데 속죄일을 보니까 31절에 대대로 지키라 해 놓고 이날을 쉬어야 한다. 이날은 괴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제까지 쉬어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이날은 괴롭힘을 위해서 쉬는 날이다. 그 괴롭힘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를 속하기 위한 괴롭힘이라고 16장에서 말씀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그 날 그들은 하루종일 굶음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그 교제를 누릴 수 있도록 쉬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초막절이 완성인데 35-36절 보면 풍성히 드린다. 첫날만 칠일 동안 한 것이 아니라 칠일후 팔일 까지 한다. 유월절은 칠일절기인데 초막절은 팔일절기다. 칠일을 다 끝마치고 나서 팔일 이것은 실은 안식후 첫날과 관계된 날이다. 칠일이 끝나고 나면 팔일도 큰 축제로 지내야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축제의 완성이면서도 새 시대의 축제를 여전히 예상하고 있다.
백성들은 일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많은 예물을 드려야 한다. 37절에 전체적인 결론이 되면서도 특별히 초막절에 결론으로 하는 말이 많은 예물을 드려라 하는 말이 37-8절에 강조해 놨다. 그렇게 되어 있다. 안 식후 무엇에 무엇을 드려라. 그런 말로 전체적인 말로 결론이 되면서도 초막절에 결론을 그렇게 해놓고 나서 그 다음 39절에 초막절을 또 다시 언급한다. 오순절이 속죄일보터 훨신 길게 덧붙이는 말이 있다. 그런데 무슨 말을 더하고 있냐면 칠일동안 지키는테 첫날도 안식하고 팔일도 안식해라. 첫과 마지막을 안식하며 전체가 안식의 의미다. 그리고 첫날에 초막을 지어야 된다. 아름다운 나무 실과 그러니까 주렁주렁 과실이 붙은 나무다. 종려가지 무성한 가지 버드나무 가지 그런 것으로 집을 지어놓고 여호와 앞에서 칠일동안 즐거워 해야 한다. 우리들은 이것을 그전에는 즐거움으로 알지를 못하고 괴로움으로 알았다. 첫막에 사니까 얼마큼 괴롭겠냐? 언제나 집으로 돌아갈꼬 그렇게 해서 초막은 임시 처소고 자기 집은 영원한 처소고 그래서 땅에서는 나그네요 집으로 들어갈날을 기다려라 했는데 그런 말이 아니라 여기서는 초막에서 즐거워하라 그랫다.
왜 광야에서 하나님이 초막에서 자기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셨다. 그들을 광야로 인도할 때 초막에서 그들을 즐거워하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칠일동안 즐거워 해라 칠일동안 즐거워하는 것은 완전하게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팔일에 한 번 더 쉬고 즐거워해야 한다.
매년 칠일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키는데 대대로 지키라. 그리고 나서 42절에 또 강조점이 붙어 있는데 칠일동안 칠월에 지켜라. 칠월에 이를 지키되 칠일동안 지켜라. 이스라엘에 난자는 다 초막에 거할지니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할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줄을 알게함이니라. 즉 가나안 땅에서 애굽에서 구원을 함께 기념하고 즐거워하는 절기로 기뻐해라 그 말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애굽에서 건져내서 함께 초막에 거하게 하시고 즐거워하게 했는데 그것을 가나안 땅에서 함께 기념하면서 매년에 기념하면서 대대로 기념될 수 있도록 그렇게 해라. 그런데 여기 보니까 팔일 절기여서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 칠로 완성만 되지 않는다. 항상 새 날이 되면 시 시대가 창세기 원리다. 그래서 팔 일에도 안식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시고 가나안 땅애 들어가서 새로운 곡식을 주시고 첫 곡식을 거둘때도 그는 즐거워해야 되고 그리고 연말에 곡식을 다 거두고 나서도 하나님앞에 즐거워해야 되고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주신 선물로 하나님의 식탁에 드려야 되고 자기도 먹고 함께 즐거워 해야 되고 그런 축제의 삶을 살아라 하는 것이 레위기 23장의 일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에게는 가나안 땅의 수확과 연결이 되어 있다. 처음 그들이 무교병을 먹었을 때 그들은 바로의 종으로 먹지 않고 여호와의 종으로 먹는 것이고 그것의 완성이 가나안 땅의 안식의 양식이다. 그래서 첫 수확과 수확의 마지막에 큰 축제의 절기가 있다. 칠월 달에는 이것이 완벽하게 셋트로 있어서 일일날은 달의 기념일로 기념하고 십일은 하나님의 성소를 속하는 날로 기념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소에서 함께 계신 것을 성소의 축제로 기념하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소에서만 기념한 것이 아니라 초막에서 기뻐한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의 성소에서만 예배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있는 땅에서도 십일조를 객들과 함께 먹도록 하셨다. 성소에서 먹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들이 거하는 각처에서 초막을 짓고 거할 수 있으면 이것은 성소가 온 땅에 확대된 의미로 즐거워한 것이다. 왜 광야에서 초막에 계셨던 분이 가나안 땅에 성소에 계신다. 이제는 성소에서만 이 축제는 지낸 것이 아니라 칠월 십일에 대속함이 있었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온 가나안 땅에서 즐거워하도록 각처에서 초막을 짓고 즐거워해라 이렇게 되어 있다. 그것이 축제의 완성이다.
그런데 구약 때는 이 축제가 이 절기에 맞추어져 있다. 반복적인 칠일주기인 안식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쉬심을 그들의 삶의 모델로 삼아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그 일하신 목표에서 하나님과 함께 쉬고 만일에 그 날 쉬지 않으면 하나님의 안식을 방해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러면 안되고 다른 데서는 죽인다고 그랫다. 그렇게 즐거워해야 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새 양식을 주셨으면 그것을 먹는 일에 전념하고 다른 일은 잊어 버려야 된다. 왜 완벽한 안식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부 새 양식 주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은 가나안 땅의 수확의 절기와 일치되어 있다. 모든 날에 드렇게 한 것은 아니다. 하늘에 만나를 그치시고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땅에 산물을 주신 것이 구약 경륜에서 구원의 완성이다. 가나안 땅을 젖과 흐름으로 복주신 것이 구약 경륜에서 구원의 완성이다. 그런데도 이것은 땅에서 수확하는 절기에 맞추어져 있고 다른 날은 이런 축제를 못 누린다. 그것이 구약에서 누리는 축제다. 그들은 이 기념일에 하나님의 성소에서 함께 즐거워함으로 하나님상에 드리고 하나님의 상에서 먹는다. 이렇게 교제함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을 누렸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일은 일체 하지 말고 그 일에만 전념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곧 그들의 생명의 완성이고 그들의 안식이다.
그런데 이 일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교회에 완성적으로 주셨다. 이것은 구약 때는 완성될수 없는 것이다. 구약 때는 모세 제도이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이것을 완전하게 지켜봤자 그것을 그만 지켜라 하는 법은 없는 것이다. 특별히 대속죄일에는 다 굶어라 그런다. 하나님앞에 속함을 얻었는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었던 것이 구약의 교제의 본질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나갔을때도 굶었다. 아무런 교제의 떡을 주지 않았다. 왜 나아가는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부 축제로 되어 있다. 그러나 죄를 속하는 십일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구약의 교제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절기들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안식은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이 누리는 안식이다.
구약 때는 모세를 대표로 세우고 모세 제도 안에 있는 복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우시고 아들안에서 누리는 교제다. 구약 때는 모세가 누린 것을 백성이 누리는 것이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 누린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 아들은 가나안 땅의 성소의 교제가 아니라 그 아들 자신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영광의 보좌 우편에 앉았다. 그분은 우리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떡과 포도주를 자기 백성의 교제의 식탁으로 주신 것이다. 이것은 반복되는 칠일 주기로 누리는 그런 안식이 아니라 역사의 완성에서 누리는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안식이요 우리들은 먹으면 뒤로 나오는 가나안 땅의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우리가 받는 것은 내 살과 피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과 교제하는 생명의 것을 우리는 하나님께 받았고 우리는 그것으로 하나님의 상에 드리고 그것을 주님의 상으로부터 받고 그것으로 형제를 먹이고 그런 교제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은 성찬 예배다.
천주교가 항상 반복되는 제사 의식으로 성찬을 설명해 버려서 우리들은 그런 의식을 뺄려고 그러지만 구약 예배는 항상 하나님의 성소에 가져다 그리고 그 성소에 있는 것으로 제사장이 먹는 것이 오순절이다. 특별히 화목제물을 그렇게 되어 있다.(20절) 화목제물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려야 되는데 그것은 여호와께 드린 성물이기 때문에 제사장 몫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 제사장 몫이다. 구약에서도 성소 교제 가나안 땅의 산물로 함께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불렀을 때도 죄인과 함께 먹는 신랑으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그 제사를 반복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주님께서 살과 피 구약 때는 그런 것을 주신 적이 없다. 그것으로 우리들은 우리의 먹고 마심을 복받았다. 여러분이 먹고 마시는 식탁이 그런 식탁이다. 우리는 그런 산물로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주님께서 생명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나이다. 주의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고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주님의 몸이 바로 그 몸의 교제에 참여 할 수 있도록 구제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이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배의 본질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이 핍절함이 없고 풍성히 먹었다.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었다. 이것이 오순절에 나타나 있다. 가난한 자를 먹여라. 거기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초막절에서는 온 땅이 초막 성소가 되어 있다. 그렇게 풍성히 누려라 그렇게 되어 있다. 더 완성적으로 되어 있다. 이제 신약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그의 살과 피 그것은 자신의 몸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어서 구약적인 개념이다. 다른 문제가 아니라 구약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주시는 생명의 선물을 최상품으로 골라서 그것을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단에 드리면 그 피가 나아가는 곳까지가 그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누리는 교제다. 그러니까 먹는 것과 생명이 일치되어 있는데 아무리 좋은 것을 주셨어도 그것은 죽음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단에까지는 못 들어간다. 일단 죽고 나면 뿌려지고 뿌려진 거기 까지가 제사장이 나가는 곳이다. 이처럼 죽음을 통한 새로운 생명의 헌신 죽지 않고는 못나간다. 휘장은 죽음의 가리움이다. 죽으면은 들어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데도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죽음을 맛보시고 그는 성령으로 흠 없게 된 자기 피를 하나님 앞에 드렸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하신 분으로 성소에 나아 가셨거든요? 바로 새로운 생명이 헌신된 거기까지 자기 백성을 대신한 생명이 헌신된 거기까지 그의 백성이 나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안에서 우리는 그가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그런 교제로 주님의 살과 피에 교제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가나안 땅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새 양식을 받았다. 이것은 완전한 안식의 떡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분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하고 먹지 못하고 먹으면 부정하게 먹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방인은 다 부정하게 먹는 자요 만일에 구약식으로만 먹어도 다 부정하게 먹는 자이다. 우리는 먹을 때마다 성찬에서 기도했던 것처럼 나를 위해 몸을 주신 주님께서 이것을 양식으로 주셔서 주님의 몸의 교제를 누리도록 주셨다고 주의 몸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이지 교회에서 먹는 것은 거룩하고 집에서 먹는 것은 대충 먹고 그런 식으로 먹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것은 주님의 상으로 가지고 나와서 주님의 몸으로 삶으로 주신 것을 우리가 풍성히 누리고 우리가 이 삶을 하나님 앞에 교제하기 위해서 모였나이다. 주님이 그의 몸을 주셔서 그의 부요에 참여시킨 이 주님의 몸으로 가난한 자도 부자가 가지고 그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그리고 자기 집에 가서 까지 먹을 수 있도록 풍성히 주어서 하나님 집에서 먹는 부족함이 없는 교제가 자기 집에서도 누려야 될 것이다. 아버지 상에서 먹을 때는 야 닭다리 먹어라 주어 놓고 집에 갈 때는 너는 네것 먹고 나는 내것 먹고 그리고 가난한 집 옆에서 날마다 고기 구워 먹고 그러면 안될 것이다. 자기 아버지 앞에서는 효자인척 너도 먹고 나도 먹고 너 얼마큼 배고팠냐 많이 먹어라. 그래 놓고 자기 집에 가서는 안주면 안된다. 성소의 교제가 일반 식탁 교제에 나타나야 한다 그런 말이다.
초대 교회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와 구제와 항상 일치되었다. 오순절 예배가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 앞에 풍성이 드리고 제사장만 먹는 것이 아니라 고아나 과부나 객도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밭에서 함께 거둬서 먹도록 해라. 그런데 거기서는 이삭 밭에 모퉁이것만 먹었다. 구약 때는 모퉁이만 베지 않으면 100점 짜리다. 이삭을 하나도 떨치지 아니하고 조심해서 베어버렸다. 그리고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안했다. 이 사람은 율법 지킨 사람이다. 깨끗이 베어 버렸다. 그런데 마치 보아스가 룻이 이삭을 주울 때 종들에게 대충 대충 베라고 명했었다. 그리고 나서 보리를 더 줬다. 그렇게 해서 가난한 소녀로 먹도록 해라. 그렇게 했다.
그래서 내 풍성한 수확에 그도 걷도록 해라. 오순절 예배다. 그런 예배가 이제 부활하신 주님의 몸의 교제에 참여한다. 그가 나를 사랑해서 부요하신 자가 가난하게 되어 자기 몸을 주셨으니 우리들도 우리의 부요한 것으로 형제와 나눠서 우리에게 몸을 주신 주님의 부요함에 참여토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자나 부족함이 없는 평균을 이루게 함이니라. 그것이 고후8-9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이다. 돌아봐야 한다. 그러니까 일년에 한 번 라면 박스 들고 어디 갔다 와서 일년내내 양심의 위로를 받으면 안된다 그 말이다. 여러분 친족한테는 절대로 그렇지 않는다.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일반 가정에서도 형제로 사는 방식이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 행사를 치르는 집은 머리가 무거워도 그 가난한 친족은 그날에 풍성이 먹는다. 일반 연합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한데 왜 주님의 몸으로 사는 완전한 생명의 교제를 나누면서도 우리에게 그런 의식이 부족해서 되겠는가? 단순히 조직을 위해서 헌금을 많이 하라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여러분이 나를 위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일상에 생활에서 감사한 생활을 살뿐만 아니라 예배의 모임에서 그것이 충분이 드러나줘야 한다.
그렇게 해서 주의 몸의 교회가 주님께서 몸을 주신 그 부요함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여기 참여한 백성뿐만 아니라 밖에 있는 백성들도 누릴 수 있도록 손을 펼쳐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제의 의미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들어오더라 사도행전은 그렇게 전도를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늘에 속한 교제 주의 피와 살에 참여하는 교제를 누리고 이제는 하늘에 속한 주님의 몸의 교제로 서로를 봉사하는 완전한 봉헌을 받았다. 우리들은 예수 안에서 향기로운 예배를 드리고 예수안에서 예수님 대리자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봉사한다. 왜 우리가 그의 몸의 지체가 되었으니까. 그것이 이 레위기에서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우리안에서 성취된 것이다. 이 일에 전념하는 것이 실은 안식일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주의 상에 앉은 예배일로 모이는데 만일에 이 모임보다 필연적인 다른 할 일을 빼 놓고는 만일에 이 모임을 멸시하고 다른 일로 모여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그것이 신약에서 주일을 지키는 방식이다. 구약에서 주일을 지키는 방식 그대로 가져와서는 안된다. 구약에는 강제력으로 쉬게 해서 강제력으로 주는 의미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의 몸에 참여하는 교제의 즐거움 안에서 우리들이 그 일을 완벽하게 누리고 그 완전한 소망 때문에 우리들이 전날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누리라 그 말이다. 이것이 예수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성찬 예배다. 우리는 주의 몸의 참여 할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의 지체로 형제를 봉사한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 몸은 우리를 사랑해서 자신의 몸을 주신 주님의 몸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은 썩은 가나안 땅의 양식이 아니라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교제의 떡이다. 왜 주님께서 영원히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기 때문이다.
설명을 듣고 성경 본문을 읽기 바란다. 그리고 제가 말한 설명이 어떻게 그 문장에서 그렇게 조직화되어서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저는 문장을 읽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도 여러분 자신들이 읽어서 아하! 비교해 보니까 여기는 축제가 강조구나. 한상에 먹고 마시는 교제가 강조구나. 이 교제가 어떻게 많은 절기가 있는데도 똑 같은 절기가 아니라 연중 절기의 발전에서 어떻게 그 축제를 강화시켜 났는지 봐야 되고 마지막 절기는 팔일 절기여서 새 시대를 소망하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절기로 말씀하셨을 때도 항상 초막절의 완성자로 말씀하신 이유가 그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첫절기와 마지막 절기가 칠일 절기로 배열되어 있다. 일과 칠을 첫과 마지막 칠은 완성이다. 성경이 쉬워야 되는데 제가 쓰는 것이 성경보다 더 어려워 있다. 성경이 원조인데 우리를 사람을 의지하니까 안된다 그 말이다. 물론 교회 목사를 주셔서 우리로 장성한 분량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사자를 주신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각자 은사가 다르니까. 그러나 목사를 통하지 않고는 모른다는 의미로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지나면 여러분이 충분이 읽을수 있도록 차분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선지서들을 보면 이제는 회복된 새로운 다윗 왕국을 말한다. 북과 남은 망하고 남은 자를 구원한다 했을 때 그것은 이스라엘 유다 했을 때 그것은 북쪽만을 말하는지 남쪽만을 말하는지 아니면 새로운 회복의 연합체를 말하고 있는지 그 문맥을 따라서 읽어야 한다. 본래를 그들이 자기 조상들의 이름으로 칭하니까. 가령 우리가 서울이라는 말을 쓸 때라도 내용에 따라서 범위가 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우리들은 다른 절기 없다. 지금도 유월절 지켜야 되고 그런 일은 없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항상 하늘에 속한 잔치의 떡을 먹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 모일 때뿐만 아니라 모든 삶에서 그런다. 그런 의미로 예수는 절기의 완성자시다. 단지 우리들이 지금도 맥추 추수 감사절 하고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이 풍성히 주신 것을 감사하는 것은 정상적인 질서다. 하나님이 풍성히 수박을 주셨는데 그것으로는 감사하지 않고 아 수박이 맛없다. 딸기가 생겼으면 좋을 것인데 하면 그것은 감사도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절기를 더 많이 지켜야 될란가 모르겠다. 구약 때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확이 두 번에 집중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달마다 수확을 하고 있으니까 그런 의미로 여러분이 풍성한 수확이 있으면 교회가 함께 참여하고 누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한다. 구약의 절기를 그대로 도입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 있는 절기의 정신 때문에 우리 일상적인 삶에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감사 절기를 지킨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는 삼대 절기를 지켜라 그 절기를 안 지키면 비 성경적이라고 우리를 공격하면 제대로 하자면 그들은 이단이다. 단지 모르고 그런가 보다 하고 정상참작 해서 우리가 참으니까 그러지 이론 그대로 하면 그 사람들은 이단이 된다. 왜 예수께서 절기의 완성자이신데 구약 백성들처럼 지금도 다른 절기를 통해서 완성된 절기를 맛이나 봐야 되는 것처럼 가나안 땅의 질서로 맛이나 봐야 되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축제의 떡을 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 구약은 아무리 축제여도 먹으면 뒤로 나오는 떡이다.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에 참여하니까 썩지 않는 양식이다. 지금 우리가 절기를 지키는 것은 구약 절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삶에서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날마다 감사하면서도 풍성한 수확이 있으면 풍성함을 표현해야 되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추수감사절이 언제가 보자 그것 가지고 여러분이 계산을 해도 마누라 생일을 위해서 일년 동안 저축한 남편보다 정성이 없을란가 몰라도 정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새는 월급을 받으니까 보너스 나올 때 다 써 버렸다가 마침 추수 감사절이 있는 달에 보너스가 안 나온 달이다. 돈이 없다. 목사님 말씀이 있는 은사대로 봉사한다 하더라. 하고 이제 조금만 한다 그 말이다. 나는 아주 성경적이다 하고 나머지 일은 일년 내내 계산하다. 계획을 세우고 여러분이 지금은 수확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들이 아직도 하나님이 주신 수확의 절기에서 살고 있는 그런 농경 문화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미리 예비하던지 하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런 절기 아니 더러도 가령 보너스 받을 때는 더 많은 감사가 있어야 상식이다. 더 잘 믿어라 그 말이 아니라 정상적인 상식이다 그 말이다. 여러분 보너스 철에 돈을 더 많이 쓰지요? 더 생겼다고 그것은 정당한 상식이다. 그리고 돈 떨어지면 언제 보너스 나오는가 그 때 돈을 쓸려고 그런다. 그런데 왜 그런데 하나님 앞에 감사는 그런 생활이 안되는지 정상적인 삶의 질서로서 주의 교회를 세운다는 개념이 안서는지 그런데 그것을 빼버리고 보너스철에는 헌금을 더할 것 그런 규칙을 내가 여기서 다시 세울것인가?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도 풍성함을 따라서 가족을 해석하는것처럼 그 일을 위해서 세로운 질서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여러분 마음이 모아져 있어야 한다.
- 설교 : 김강호 목사
레위기 24장에는 성소의 등불을 아침저녁으로 켜서 꺼지지 않게 하라는 규례와 안식일에는 열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고 그것을 제사장이 먹으라는 이야기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 한자를 돌로 쳐죽이고 그래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갚아서 이스라엘 중에 그런 악한 죄를 제거하라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다.
먼저 2-4절은 성소의 등불에 대한 규례가 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을 찢어 낸 순결한 기름을 켜기 위하여 내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고 등잔불을 켤 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장밖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대 위에 등잔불을 끊이지 않고 정리할지니라. 여기서도 영원한 규례니라 하고 한마디씩 더 붙여서 그것을 강조하는 표현법들을 쓰고 있다. 그래서 순결한 등대 위에 등잔불을 끊이지 않게 정리해라. 처음에는 모세에게 가져오게 했고 다음에는 대 제사장 아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순결한 기름 또 순결한 등대 등잔불을 켜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꺼지지 않도록 해라.
5-9절부터 성소에 떡을 진설하라는 내용이다. 너는 고운 가루를 취하여 떡 열둘을 굽되 매 덩어리를 에바 십분의 이로 하여 여호와앞 순결한 상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또 정결한 유향을 그 매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로 삼을 것이며 항상 매 안식일에 여호와 앞에 이 떡을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라. 이 떡은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중에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여기서는 에바 십분의 이로 만든 떡은 하루 분량의 식량이다. 그래서 한 덩어리를 에바 십분의 이로 하여 열둘을 구워야 되는데 그렇게 구워서 순결한 상 금상이다. 여기서 순결한 상 순결한 등대 순결한 기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순결한 상위에 두 줄로 놓는다. 그리고 각 줄에다가 유향을 기념물로 두어서 그것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로 올라가게 해야한다. 그리고 이 떡은 안식일마다 진설하고 그것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떡은 아론과 그 아들들이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 성소에서 먹어라 그 말이다. 화목제처럼 이틀치 양식이 아니기 때문에 성소에서만 먹어야 된다.
10-23절은 여호와를 저주 한자를 죽이라 한 것이 길게 말하고 있고 이어서 몇가지 규례가 붙어있다. 이스라엘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애굽 사람된자가 한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다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하므로 무리가 끌고 모세에게로 가니라. 그 어미는 단 지파 디브리의 딸이었더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저주한자를 진밖에 끌어내어 그 말을 들은 모든 자로 그 머리에 안수하게 하고 온 회중이 그를 돌로 치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구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자기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당할것이요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는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에 돌로 그를 칠것이라.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죽이라. 사람을 죽인자는 반드시 죽일것이요 짐승을 죽인자는 짐승으로 짐승을 갚을 것이요 이웃을 상하였으면 그 상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외국인에게나 본토인에게나 그 법을 동일히 할 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여기서 절기의 거룩이니까 23장에 거룩한 절기가 일곱 개 있고 또 25장에도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절기들이 있는데 그 사이에 느닷없이 성소에 불키고 떡을 진설하는 이야기 또 그것은 그럴 듯 한데 눈을 상했으면 눈으로 갚고 그런 이야기가 끼워져 있는 것 같다. 항상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하라고 그랬다.
23-25장은 절기에 대한 거룩을 말하고 있는데 24장은 그런 의미에서 해석을 해야 한다. 무슨 말이냐면 읽겠다. 성회는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하나님 단에 드리며 제사장과 백성이 함께 즐거워하며 먹는 것이었다. 23장에 그렇게 되어 있다. 성회 때는 다 쉬어야 되는데 무엇 때문에 쉬어야 되냐면 성회에 속한 것에 전념하기 위해서다. 만일에 다른 일을 하면 성회에 속한 것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 아니다. 다 쉬는데 무슨 일을 하려고 쉬냐면 하나님앞에 많은 예물을 드리고 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양식을 먹고 초수절에는 첫 양식을 먹기 시작하고 오순절에는 풍성이 거둬서 가난한 자도 먹고 그렇게 먹어야 된다. 그렇게 함께 즐거워하는 것 그 즐거움이 초막절에서는 일주일동안 초막에서 즐거워하고 그것이 곧 성회고 예배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수확의 절기들을 생명의 절기로 복주셔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회로 삼을 절기에 이어서 이제 24장에서는 성소안에서 제사장이 등불을 밝히며 하나님께 식물을 드리며 먹는 규례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앞에 성소는 하나님의 상에 드린 문제는 언급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 단에 드리고 즐거워하는 그런 문제만 언급되어 있는데 24장에는 한단계 더 진행시켜서 하나님의 성소안에서 어떻게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가 하는 성회를 더 심화시켜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회로 삼을 절기에 이어서 성소안에서 제사장이 등불을 밝히며 식물을 드리며 먹는 규례를 말씀하신다.
순결한 등대 위에 등잔불을 끊이지 않도록 백성은 순결한 감람 기름을 가져오고 제사장은 끊이지 않고 등불을 관리하라는 규례는 여호와께서 생명의 빛으로 항상 휘장밖에 등잔으로 임하시어 계시다는 언약이다. 이 등잔불을 켜라는 데는 언약이라는 말은 없고 떡을 진설하라는 말에 영원한 언약이라 그런 말이 있다. 같은 것을 점점 강화시켜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역기서 언약적으로 설명을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금등대 그런 문제보다는 순결한 등대 순결한 감람 순결한 상 순결하다 거룩하다 거기다가 강조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서 교제하고 있는 순결함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소 단에서 순결한 백성들이 하나님앞에 드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그런 문제들 그 앞에 22장에는순결한 제사장들이었다. 그런 문제를말슴했는데 여기서는 성소안 휘장밖 즉 하나님의 보좌 바로밖에 있는 거기서 하나님앞에 끊이지 않고 등불을 밝혀야 되는데 이 일을 위해서 백성은 순결한 기름을 가져와야 되고 제사장은 이 등불을 잘 관리해서 꺼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하는 것은 이 본문에서 직접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계시록에서 교회를 일곱 등잔으로 말했을 때 거기서는 세상의 빛으로는 말할 수 있어도 여기서는 그런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은 휘장 안에 계신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캄캄한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다. 그런데 아무도 휘장 안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 하나님이 친히 일곱 촛대가운데 임하셔서 빛가운데 그들중에 임하시고 그 빛가운데서 제사장은 떡을 진설하고 먹는다. 바로 이런 것 때문에 하나님은 빛이요 생명이다 그렇게 요한복음 1장에서도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에 일곱 촛대에 등불이 없으면 제사장은 캄캄한 암흑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휘장으로 가리우시고 캄캄한 가운데 계시는데 그는 생명의 빛을 비추는 일곱 촛대 가운데 임하시고 그 촛대는 떡 상을 비치도록 되어 있다. 그 떡상에 제사장이 떡을 진설하고 먹는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친밀한 친교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이 이처럼 깨끗한 기름을 가져오고 제사장이 이 등잔불을 끊이지 않고 관리하면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임하신 일곱 촛대가운데 임하신 빛은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행함에 대한 규례가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백성중에 빛으로 임하신다는 생명의 교제 언약을 백성들에 삶의 규례로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순결한 상위에 떡 열두 덩이를 진설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함께 한상에 앉은 언약이다. 한마디로 하면 각 지파가 한 덩어리씩 내는 식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 열 두덩어리를 떡을 하나님 앞에 진설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의 상에 가지고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 차려 드리는 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떡은 그냥 떡이 아니라 떡과 함께 유향을 화제로 드려야 한다. 유향을 그 위에 놓고 그 휴향이 하나님 앞에 화제로 드리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마치 단에다가 태워드리면 화제가 되는것처럼 떡상위에 향이 불타면 그것이 하나님앞에 향기로운 화제 향기로운 음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떡은 지극히 거룩한 성소의 양식으로 제사장에게 주시고 매 안식일 마다 떡을 진설하게 하신다. 이것을 아론과 그 후손들이 먹는다. 그러니까 특별히 대 제사장 가문에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성소밖에서는 못먹고 거룩한 양식은 성소 뜰 안에서 먹는다. 지극히 거룩한 양식이다.
그리고 이 떡은 항상 안식일마다 진설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 떡이 다음 안식일까지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안식일에 새 떡을 낼 때 일주일전에 그 떡을 내서 그 가족이 먹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빼빼 말라서 맛이 없겠지요? 그러니까 제사장이 순 고기만 먹은 것도 영양학적으로 안 좋다. 채소를 많이 먹어야 되는데 여기서도 보니까 빳빳 마른 떡을 다음주에 먹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그 떡이 거기 있다. 그래서 떡을 안식일날 진설하고 안식일날 먹는다. 안식의 떡 다른 날 보다 안식일에는 열두 덩어리를 떡 열두지파가 하나님앞에 각자 식물을 차려 놓은 식이고 그것은 그 위에다가 향을 사르기 때문에 진짜 향기로운 음식이 되는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이 향기롭게 취할뿐만 아니라 대 제사장 가문이 성소에서 먹는 떡이다. 이런 친밀한 친교를 주셨다. 이것이 영원한 언약이다. 너는 내 상에서 영원히 먹고 마셔라. 그런 말이다.
그러니까 안식일에 드린 것은 안식의 완성 생명의 교제의 완성을 그렇게 새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상에서 앉으신 언약이다. 순결한 상위에 열두 덩어리를 떡을 진설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함게 한 상에 앉으신 언약이다. 이 언약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냐면 떡과 함께 유향을 놓고 그것을 화제로드리고 떡은 지극히 거룩한곳에서 대제사장 아론의 가문이 먹고 또 안식일마다 이 떡을 진설하도록 해서 거기에서 언약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그 다음에 있는 이야기는 저주 한자를 죽이라는 이야기가 있고 또 백성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생명이 되셔서 함께 하시는 회중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렇게 결론 짓고 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그런 백성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24장에서는 생명의 빛 생명의 떡으로 계신 분이다. 빛을 비추게 하시고 그 앞에 떡을 진설하게 하셨으니까. 그런 생명의 교제로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한 자는 돌로 쳐서 죽여야 된다. 왜냐하면 그는 여호와의 회중에서 제거되어야 되기 때문이다.
그는 생명으로부터 제거되는 것이다. 왜 여호와의 이름을 저주했으니까. 그리고 저주한 말을 들은 자들이 저주 한자의 머리에 안수한 것은 그 죄를 그에게 돌리는 행동이다. 들은 자들이 안수해야 한다. 들은 자들이 죄를 그에게 다시 돌리고 그렇게 함으로 증인이 되는 안수다. 그러니까 안수한다 할지라도 그 문맥에서 그 안수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된다. 번제를 드릴 때 안수한 것은 제사장과 제물을 일치시키는 안수지 무슨 죄는 번제물에 옮겨가고 번제물의 의는 내게 옮겨오고 그런 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제물과 자기를 일치시켜서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죄인과 안수함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옮기는 안수다. 마치 속죄제물을 드렸을 때는 죄를 고백함으로 안수한다. 그 때는 죄를 옮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맥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안수한 자와 훼방 한자를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귀로 들었던 죄를 그에게 옮기는 안수다. 그래서 다 안수하고 온 백성이 다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 돌로 쳐서 죽인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는 대리 행동이다. 왜 돌로서 죽이면 죽음과 죽이는 사람이 전혀 연결이 안되고 돌로 쳐죽이니까 부정이 옮기지 않는다. 그래서 신성 모독 죄와 아비를 훼방하는 이런 죄들에 대해서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온 백성이 돌로 쳐서 죽여야 된다. 왜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생명의 하나님으로 그들 중에 계신다. 이 하나님을 저주하면 그들은 죽여야 된다. 그런데 온 백성이 생명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언약 백성이기 때문에 그런 자들을 여호와의 회중으로부터 제거시켜야 된다.
그리고 이어서 여러 법이 있다. 그것도 저주한 자를 죽이라는 법을 여러 상황에 구체화시킨 문제들이다. 이어서 말씀하신 동일 상해법은 즉 눈을 다치면 눈으로 하고 짐승을 죽이면 짐승으로 하고 그런 말이다. 그냥 여기서는 줄여서 동일 상해법 이렇게 했다. 사람을 죽인 자는 그를 죽여야 되고 짐승을 죽였으면 갚아야 되고 이런 이야기다.
동일 상해법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생명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여호와의 백성이나 짐승이나 그 생명을 상하게 한자를 제거하시고 보상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 중에 생명의 상함이 없게하신 것이다. 그런데 짐승을 죽여서 보상할려면 그 집 짐승도 죽여 버려야 되겠지요? 그런데 갚으라고 그랬다. 사람을 죽이면 갚을 방법이 없다. 마땅히 죽여야 된다. 그리고 눈을 상하면 눈을 상하게 하고 귀를 상하면 귀를 상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법적인 형식으로는 동일 상해법처럼 되어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중에 하나님을 저주한자도 죽여야 될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죽인 사람도 죽어야 되고 만일에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조금이라도 상하면 그는 마땅히 자기 생명으로 보상을 해야한다.
그래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상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무슨 말인가? 여호와의 회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저주한자도 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이스라엘을 상하게 하는 자도 있어서는 안된다. 왜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기 때문이다고 말씀하고 있다 항상 그 문맥을 봐야 한다. 법 조문을 따라서 여기저기 보지 말고 문맥을 봐야한다. 그것이 24장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23장에서는 안식 성회의 절기 하나님의 성소의 단에 드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즐거운 절기가 있었고 이절기를 한 단계 더 심화 시켜서 성소안에서 등불이 꺼지지 않게 하고 그리고 떡상을 안식일에 차려라. 그리고 제사장 가문이 먹어라. 그것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의 생명의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나를 저주하거나 내 백성을 저주한자는 내 회중에서 없도록 해라. 그렇게 해서 생명의 친교를 확증하고 있다. 그것이 24장의 내용이다.
그리고 25장에서는 안식년과 희년으로 이것을 한 단계 더 축제의 절기로 높인다. 그래서 24장에 성소안에 등불을 꺼지지 않게 하고 떡을 차려 놓으라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이제 기독론적인 해석이다. 교회가 어떻게 이것을 읽을 것인가 그 말이다. 바로 이 은혜의 일 바로 하나님께서 이 모세 규례를 통해서 자기 백성의 생명이 되셨다. 끊이지 않고 등불을 켜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 중에 빛이 되시고 그런 하나님앞에 일용할 양식을 가져옴으로 하나님의 친교의 식탁에서 먹을수 있도록 되었다. 만일에 이들이 이 규례를 안지키면 하나님의 성소의 불을 꺼져 버리고 하나님의 상은 빈 상이 되어서 하나님도 잡수실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백성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을것이 없다. 그러니까 이 규례를 지킴으로 생명되신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다. 이 규례를 지켜라. 너희 영원한 언약이니라 하는 말씀이 그런 말씀이다. 이것은 행위를 지켜야만 천당간다 그런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얼굴에 비치는 영광의 빛가운데서 교회에 임하사 성소에 속한 생명의 교제 질서를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의 질서로 완성하셨다. 구약 때는 하나님께서 성소에 비치는데 하나님은 생명이신데 일곱 촛대에 비추는 빛이다. 하나님은 빽빽한 구름과 불기둥 가운데 계시는데 그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한 장막에 거하셨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제사장을 만나시는가? 일곱 촛대 가운데 나타나신 빛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명이신 데 어떤 생명이신가? 순결한 상에 차려 놓은 음식물을 대제사장에게 주는 분으로 생명이다. 그것이 구약에서 가장 친밀한 생명의 교제 언약이다. 그런데 이 일을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늘에 속한 영광의 빛 예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받는다.
구약 때는 일곱 촛대 가운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고 또 하나님을 볼 때는 하나님의 성소에 옷을 입은 아론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만일 아론이 나와서 백성을 축복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다. 왜 성소에 속한 영광을 입은 자이기 때문이다. 성소에 기름 부음이 그에게 있는 자이다. 그 외에는 하나님을 볼 방법이 없다. 왜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시니까 그런데 첫 언약에서 아론과 백성들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범죄해 버렸다. 하나님이 언약을 새롭게 했을 때 모세가 기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처음에 언약을 체결했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그렇게 보지를 못했다. 그런데 언약을 새롭게 갱신했을 때는 하나님이 등을 보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모세의 얼굴이 빛났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빛났다. 백성들은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언약은 중보자 안에서 갱신되었는데도 아직 백성은 그 영광을 볼 수 없었다. 그 당시 백성이 하나님을 보면 누구를 본가? 모세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굴이 빛나는 영광을 백성들이 볼 수가 없었다. 왜 아직 그 언약이 완성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모세의 얼굴에 빛나는 영광 그런데도 휘장으로 가리워서 백성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그런 영광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이 그 언약을 완성하셨을때는 예수의 얼굴에 비치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다. 그는 영원히 우리중에 오신 하나님시다. 우리는 그 영광의 빛가운데서 하나님을 본다. 그는 참 빛이시다. 일곱 촛대에 비치는 빛이 아니라 그림자적인 아론과 모세의 그런 빛이 아니다. 그는 참 빛이고 하늘에 속한 영원한 빛이다. 그가 오셨다. 우리들은 그 앞에서 먹고 마시는데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그런 방식으로 먹는다. 가나안 땅에 양식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짐승의 죽음을 통해서 나타난 그런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몸의 죽으심을 통해서 영원히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간격 죄된 간격을 제거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급하신 것은 가나안 땅의 양식이 아니라 친히 자기 백성을 위해서 자기 몸을 주신 주님의 살과 피 그것이 교회가 누리는 생명의 양식이다. 그것은 열두 지파가 열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고 먹는 정도가 아니라 천하 만민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어서 우리가 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몸의 교제로 주의 상에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나올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손으로부터 그의 살과 피에 참여하는 영원한 생명의 떡을 먹는다. 대 제사장만 거룩한 뜰에서 먹는 정도가 아니라 그의 모든 백성이 모든 곳에서 먹는다. 그것이 완성이다.
이제는 거룩하고 그렇지 않는 영역이 없고 이제는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믿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제는 주의 상에 앉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를 누린다.그리고 여기 구약 때는 보니까 하나님을 저주한 자는 죽여야 되고 이는 이는 눈은 눈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상한자는 전부다 그대로 갚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을 상한자가 없도록 했다. 물론 예수의 이름을 저주한자가 있을수는 없겠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냥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보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대리자로 형제를 사랑해서 몸의 헌신을 감당함으로 영원히 형제의 생명을 상하는 저주를 제거해버렷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산다 그 말이다. 그것이 성소에 있는 즉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완전한 생명의 교제다. 그렇게 완성하셨다. 그것이 24장에서 교회에 주신 말씀이다. 어떻게 성경을 풀어야 하는지 알겠지요? 그 당시 구체적인 역사의 구원의 의미를 말하고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완성됐는가를 다시 설명해야 되지 구약을 확대해서 올라오면 못 올라온다. 왜냐하면 지금은 원수를 사랑해서 자기 몸을 주신 사랑의 봉사니까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이것을 확대해서 못 올라온다. 이제는 몸의 봉사로 사랑할 수 있다. 그 몸은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일으키신 몸이다. 그런 몸으로 봉사하도록 했다. 주님의 교회안에 형제의 이를 상하고 눈을 상하게 하는 저주는 없다.
그것이 주님께서 새로운 인류인 교회와 함께 하시는 빛과 생명의 교제와 사랑의 봉사다.
구약이 다 그리스도의 책인데 우리가 못 읽어서 휘장 밖에서 더듬고 있어서 못 읽은 것인데 얼마큼 어린아이에게 주신 규례로 정확하게 주시고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성했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구약 법을 신약 백성에게 정신적으로 적용하면 안된다. 새로운 관계에서 적용을 해야 한다. 신약 시대는 구약 법을 더 세분화 시켜서 올라오는 것이아니라 주님의 몸의 질서로 새로 창조된 관점에서 새로운 윤리를 설정해야 한다. 그러니까 죽음의 그림자 형제를 훼방하는 저주의 그림자는 영원히 끝난 것이다.
- 설교 : 김강호 목사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는 우리 한국 말 어법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에 대해서 기도할 때는 가령 우리 나라 말이 무슨 말이냐면 우리 할아버지한테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하시데요 하고 전달 할 때까지라도 내가 말하는 분이 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를 최고의 존칭어로 말해 버리면 할아버지한테 실례가 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나한테는 우리 아버지가 높은 분이지만 아버지 이야기를 할아버지한테 옮길 때는 할아버지를 중심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할아버지 앞에 아버지가 낮아지는 방식으로 표현을 해야 그것이 우리 나라 어법이 맞다. 우리 장로님이나 집사님이 기도해서 설명하기 좋은 것이다. 교인들이 하면 내가 기도 못한가 하고 낙심할까바 말을 안하는데 가령 목사를 귀하게 생각하면 귀한 목사를 이렇게 하면 되지 귀하신 그렇게 최존칭어를 안 써도 되고 가령 우리 양용석 전도사가 선교 잘하라고 기도하면 되는데 우리 양용석 전도사께서 그래 버리면 하나님 앞에는 최 존칭어를 쓰게 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 어법상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한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무리 귀하게 생각하고 기도한 분이라도 하나님 앞에 이분을 높인 칭호를 붙여서는 안 들어가도록 표현을 해야 한다 그런 말이다. 그 어법이 맞지요?
지금 강론한 레위기 25장은 23-24-25장 한 단위를 이루고 있는 부분에 마지막 부분이다. 항상 성경 해석은 그 책 전체 또 작은 단락들의 전체 어떤 큰 것을 보고 작은 것을 풀어내야 한다. 그러면 23장에서는 무엇이 있었는가? 연중 절기가 있었다. 그 절기는 공포해서 거룩한 예배로 모이는 그런 연중 절기였다. 그것은 전부 안식의 절기였다. 그래서 안식일부터 시작해서 연중 절기로 유월절부터 시작해서 수장절까지 갔다.
그것은 성소 뜰에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또 거기서 먹고 하는 그런 교제가 성회 곧 구약 예배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깊은 것은 하나님의 성소 안에 들어가 드리고 먹는 것이다 그것이 24장에 제사장은 아침저녁으로 등불을 관리하고 안식일에는 진설병 열두 덩어리를 떡을 놓아라. 하는 등불과 진설병에 대한 이야기가 24장에 있었다. 그것은 성소 뜰에서 드리고 먹는 것이 아니라 성소 안에서 항상 드리고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 25장에는 일년 안에 든 그런 절기가 아니라 칠년 오십년 그 안식의 완성으로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절기들을 2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드리는 절기가 아니라 칠년 오십년 이렇게 든 절기들이다. 그래서 안식에 대한 문제들을 마무리 짓고 있다. 안식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함께 하는 안식이다. 이것을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이 25장이다.
자 여기 25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안식년에 대한 문제와 그리고 희년에 대한 문제 두 가지 문제를 말씀하고 있다. 먼저는 전체적인 본문 순서를 따라서 전체적인 개략을 읽고 그리고 나서 해석하는 방법대로 강론하겠다.
2-7절까지는 안식년에 대한 문제인데 여기서 이름 붙이기를 땅에 안식년이라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있다. 2절을 보면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이것을 반복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3절부터다. 보니까 어떻게 안식하냐? 6년동안은 뿌리되 7년은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하라. 그리고 특별히 5절을 보면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아라.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3-4절은 뿌리거나 가꾸지 말아라 그런 말이고 5절은 스스로 난 것도 거두지 말아라 한 번더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끝에서 말하기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안식년의 소출은 누가 먹을것인가로 되어 있다.
이렇게 항상 동심원적인 물결 구조로 진행이 된다. 처음에는 주제적인 서론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그 의미를 설명한다. 6년은 뿌리되 7년은 거두지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안식하게 하라. 또 한 번더 강화시키기를 그 해에는 스스로 난 것도 먹지를 말아라. 왜 땅의 안식년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해 소출은 그해 다 함께 먹어라 그렇게 설명되어 있다.
제가 요약해서 쓰기는 내가 주는 땅으로 여호와앞에 안식하게 하라. 수확하지도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이다. 줄일려고 하니까 강조법만 쓴 것이다. 안식년의 소출을 사람과 짐승이 함께 먹어라. 여기서는 그렇게 설명되어 있지를 않고 너희 네 남종과 여종과 품꾼과 함께 거하는 객과 육축과 들짐승이 다 먹어라 해서 하나도 빠짐이 없이 다 먹도록 일일이 세고 있다. 그것이 안식년에 대한 규례다. 그러니까 제가 요약해 놓은 것은 아주 매력이 없는 요약이지요? 단지 이 내용을 알기 쉽게 강조해 버린 것뿐이지 실은 본문 자체를 읽으면 그 표현법 자체가 그 안식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가장 알기 쉽도록 기록해 준 것인데 우리들이 그것을 읽으면 모르고 그것을 좀 요약해 놓으면 알기 쉽고 해서 그것은 좀 좋은 방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요약해서 내용만 짤막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음성을 구체적으로 듣는 훈련을 자주 해야 여러분이 성경을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항상 먼저는 주제적인 서론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진행적인 방식들 그리고 제일 끝에는 그것의 결론적인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쉬기는 쉬는데 땅만 쉬는 것이 아니라 그해에 모든 사람들이 다 공짜로 먹는다. 아무 수고 없이 그것이 안식년이다.
이제 8절 이하에는 희년에 대한 문제다. 그런데 그 희년에 대한 것도 성경 본문이 여러 단락으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기 때문에 그 나누어진 단락대로 요약해서 중심되는 것을 제목으로 붙이고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희년은 그냥 희년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일곱 안식년후 다음해 그런 의미로 희년이 쓰여져 있다. 그래서 희년은 일곱 안식년과 관계된 의미다. 그래서 여기 책을 보면 7년 안식을 계수하라. 일부러 7자를 종이 지면도 줄여야 되겠지만 시각적인 효과도 거두기 위해서 숫자로 썼다. 그래서 7 안식년을 계수 한다. 실은 안식하면 7의 숫자인데 7 안식년을 셈하고 이는 7년이 일곱 번이다. 이것은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49년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안식이 얼마큼 강조되어 버렸는가? 7 안식년을 세어라. 7년이 일곱 번이다. 안식년이 일곱 번이다. 49년이다. 그래서 7 이라는 말을 굉장히 강조해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 같으면 이렇게 설명하지 않고 7.7은 49하면 간단한데 성경은 그렇게 안했다. 그러니까 이런 표현법들이 그것의 내용을 강조하는 표현법들이기 때문에 성경 문장 자체로 읽는 것이 제일 좋다.
49년이다. 그런데 그 해에는 무슨 일을 하라는 말이 없고 그 다음에 50년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50년은 7.7은 49 그것을 완성시킨 다음해의 일이다. 그런 의미로 50년의 의미가 있지 숫자적인 의미가 아니다. 안식년을 일곱 번 완성시킨 7년이 땅의 안식이다. 이 안식을 일곱 번 반복하고 그리고 나서 7월10일에 나팔을 불어라 그 날은 속죄일이다. 그러니까 속죄일로부터 새로운 희년을 알리고 있는 나팔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일반적인 달력을 7월1일부터 시작한다. 항상 첫날이 그 달의 시작이어서 나팔을 분다. 그리고 그들의 거룩한 달력으로는 유월절, 유월절을 첫해로 삼고 있다. 바꿔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안식년을 계산할 때는 7월1일로 계산하지 않고 7월10일에 나팔을 불어서 계산하고 있다.
7월10일은 속죄일인데 나팔을 전국에 크게 불어라. 제 50년을 거룩하게 하여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라. 희년이니 수확하지 말라.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 여기서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왜 우리에게 희년이니까 그냥 희년이니 그런 말이 아니다. 너희에게 희년이니 하는 것은 줄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대로 넣어 논 것이다. 그냥 달력상 희년이 아니라 너희에게 준 희년이다 그런 말이다. 그래서 실은 이 안식년은 나팔절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이 레위기 문맥을 보면 7월달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희년은 7월10일에 나팔을 불어야 한다. 나팔을 전국에 크게 부는데 속죄일로서 나팔을 크게 불어야 한다.
그러면 이것이 제 50년을 시작하는 날이다. 그렇게 해서 제 50년을 거룩하게 구별을 해야 한다. 이 거룩하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희년으로서 거룩한 것이다. 그러면 7월10일에 나팔을 부는 것은 무슨 날인가? 하나님의 지성소를 거룩하게 하고 그런 의미로 시내산에 나팔 소리 가운데 강림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중에 임해 계신다는 그런 의미로 나팔을 부는 것이다. 그것이 희년을 공포하는 나팔 소리다.
50년 대속죄일에 나팔을 불면 이것은 그 해가 희년 복된 해다. 그런데 그 때는 무슨 일을 해야하냐면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줘야 한다. 이 해는 이스라엘 백성의 희년이기 때문에 그 자유는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자유다. 항상 점진적으로 설명해 주는 구조다. 자유가 무엇이냐? 하면 여기서는 다른 자유가 아니라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자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희년을 알리려 오셨으며 그 때는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자유가 아니다. 갇힌 자가 놓이면 병자가 낳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며 그런 의미로 주님께서 희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교리적인 설명을 하지 말고 일단은 그 문장과 그 역사적인 사건에서 희년에 의미가 무엇인지를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복된 해는 무엇이냐? 그들이 다 자기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종들이 해방된다. 그럴 뿐만 아니라 희년에는 수확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밭의 소산을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식년에도 수확하지 않는 것처럼 희년에도 수확하지 않는다.
그러면 왜 희년이 49년이 아니고 50년인가? 우리 같으면 안식의 완성이 7.7은 49, 49년에 큰 복된 해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성경은 49년째가 아니고 49년도 분명히 안식년이다. 안식년인데 그 다음 50년은 희년으로서 거룩하게 해라. 그렇게 되어 있다. 항상 구약에는 칠일 절기 다음에 팔일 절기가 있다. 그러면 창세기에서도 하루에 날이 지나면 새로운 날이 오고 특별히 레위기는 해가 지면 그 동안 있었던 부정은 깨끗케 되고 해가 지면 정결하게 되어서 다음날에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해가 지면 하루 동안의 부정이 끝난다. 진밖에 있다가 진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그것이 하루의 의미다. 우리처럼 똑 같은 해가 지고 뜬다는 자연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해가 지면 이전의 부정은 끝나고 새로운 생명이 오고 또 그 날 부정이 있으면 해가 지면 오늘 입은 부정은 끝나고 새로운 날에 참여하고 그렇게 해서 완전한 생명을 향해서 날들이 진행되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칠 안식년을 세고 50년을 거룩한 해로 구별하면 이제는 칠 안식년이 끝나는 새로운 출발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안식은 항상 칠이 안식인데 그 안식을 마치는 다음해 안식년을 새로운 날이고 복된 해인데 이것은 땅만 쉬는 정도가 아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 기업을 회복해라. 그런 의미로 이전의 안식을 완성시키는 새 시대의 완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구약에서 희년 50년의 복된 해다. 이렇게 자기 종들까지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는 안식은 구약 때는 없다. 다 칠년의 안식은 땅을 쉬게 하는 것이지 각기 종들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간다 하는 것은 아직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희년은 안식의 완성과 함께 그 다음 시대의 새로운 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 구약의 희년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희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보자. 13-17절에 보면 희년에는 자유다. 희년에는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라. 여기서는 본문에는 그렇게 된 것보다는 희년에는 그 사람과 그 가족이 전부 돌아가라 이런 의미들로 반복되어 있다. 희년 후에 연수 곧 열매를 얻을 연수다. 희년 후의 연수 곧 열매를 얻을 연수를 따라서 값을 정해야 한다. 희년에는 각기 기업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희년에는 자유한다. 그러니까 모든 종들을 계산할 때 지금부터 희년까지 몇 년 남았냐 그것을 가지고 값을 계산해야 한다. 밭을 계산하던지 종을 계산하던지 앞으로 몇 년동안 더 써먹을 수가 있는지 계산해야 한다. 왜냐하면 희년에는 다 공짜로 놓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따라 계산하라 그 말이다.
18-22절은 규례를 지키라는 한 번더 말하고 있다.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배불리 먹고 완전히 거하리라. 제 6년에 내 복을 너희에게 내려 제 9년 추수하기까지 묶은 곡식을 먹으리라. 여기서 느닷없이 규례를 왜 반복하시는가? 차라리 이 규례를 앞에다가 돌리고 연속해서 희년에 대한 문제들을 쭉 설명하면 좋겠는데 여기서는 규례를 잘 지키라는 말을 여기다가 끼우고 있다. 그런데 단순히 경고하기 위해서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희년에 복을 말하려고 여기서 삽입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언약적인 경고문 같으면 앞에나 뒤로 돌려야 할 것인데 여기서는 그 희년에 복을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희년 상황에 넣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규례를 지키면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게 하고 안식을 주실 것이다. 어느 정도 배불리 먹게 하냐면? 제 6년에 복을 내리는데 9년까지 먹게 하신다.
그러니까 이것은 마지막 7 안식년의 6년일 것이다. 그러면 안식년에는 뿌리지 않고 거두지 않으니까 못한다. 그러면 6년에 몇 년동안 먹을 것을 주냐면? 안식년 그 다음해 안식년 다음해 8년 그 다음에 9년 가을까지 준다. 그런데 그것도 그 표현법은 묶은 곡식을 먹으리라. 즉 남아돌게 먹게 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염려 없이 지켜라.
그 다음에 이 희년에 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그러면 희년에 의미는 무엇이냐? 토지는 영원히 팔지를 말아라. 토지는 다 내것임이니라. 너희는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다. 또 토지 무르기를 허락하라. 처음에는 토지를 영원히 팔지 말라 하셨고 그 다음에 토지를 무르라고 그랬어도 그 무르는 방법은 가까운 친족이 와서 물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부자가 되면 물러야 한다. 그리고 기업으로 돌아가면 된다.
만일에 무를 힘이 없으면 희년이 되면 공짜로 그 기업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왜 땅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이다. 땅이 그들의 기업이다. 여호와가 그들의 기업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데 땅을 통해서 공급하신다. 하나님이 생명이신데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고 땅이 그들의 기업이다. 그러니까 그들을 땅을 자기 권리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속한 백성으로서 기업으로 소유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그 기업을 빼앗기거나 옮겨서는 안된다. 만일에 가난해서 옮겨지게 되면 50년이 되면 전부 원상 복귀해야 한다. 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돌아가야 되고 하나님의 땅에서 안식을 누려야 된다. 그런데 이 안식의 제도는 희년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에게 풍성한 힘을 주시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갈 수가 있고 또 친척이 부자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갈 수가 있다. 왜냐하면 친척은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만 자기 백성의 기업을 돌려준 것이 아니라 그 친척도 돌려주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구약에서 말하는 은혜의 제도이다.
그런데 땅은 이렇게 되는데 가옥은 어떻게 되느냐? 이제 땅 가옥 종을 돌아가면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성내에 가옥은 일년 안에는 무를 수 있다. 일년 안에만 무를 수 있다. 성경은 일년이 지나면 무르지 못한다. 희년이 되어도 돌려보내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성벽 없는 촌락의 가옥은 땅처럼 그렇게 무르기도 하고 희년에는 돌려보낸다. 그러나 성으로 둘러 쌓여 있는 가옥은 일년이 지나면 안된다.
레위 기업의 성읍의 기옥은 언제든지 무를 수 있다. 또 희년에는 돌려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레위 성읍의 기업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얻은 기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밭은 영원한 기업이기 때문에 팔지 못한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다. 집에 대한 문제 레위의 기업에 대한 문제다. 집은 촌락 없는 집 즉 들판에 있는 집은 땅하고 똑 같이 취급하면 된다. 그런데 성곽으로 둘러 쌓여 있는 집은 일년 안에는 무를 수 있지만 일년이 지나면 무르지 못한다. 그러니까 집도 성곽으로 둘러 쌓여 있지 않으면 땅처럼 취급해 버리고 성곽으로 둘러 쌓여 있으면 땅처럼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곽으로 둘러싸인 것은 땅에다가 무엇인가 작업을 많이 했다. 경계가 그어져 있고 자기 소유라는 울타리가 있다. 그런 문제 때문에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레위 기업은 땅이나 집이나 항상 무를 수 있고 특별히 땅은 팔지를 못한다. 그러면 왜 그러냐?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받은 기업이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소유로서 십분의 일씩 떼어서 레위 지파에게 주었거든.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다. 레위 지파는 장자로 하나님의 것을 받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것을 받았지만 레위 지파는 그 중에서 구별한 것을 하나님의 소유로 받아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떼어서 준 것이다. 그것을 다시 빼앗아 가면 안되겠지요? 아무리 가난하다 해도 그러니까 절대로 땅은 팔면 안되고 집은 땅하고는 다르지만 언제든지 무를 수 있다. 왜 그들을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것으로 주어서 먹게 했기 때문에 그것을 그들이 다시 돌려 받아 가면 안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영원히 레위 지파의 기업으로 준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보면 일반 백성에게 준 것보다는 레위 지파에게 준 것이 훨씬 더 강화되어 있다. 왜 팔지도 못하고 영원히 소유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 백성에게 준 것은 가난하면 팔 수가 있다. 그러나 형제가 물러 주거나 자기가 부자가 되면 무를 수 있고 희년이 되면 돌려 받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일반 백성의 땅 그 다음에는 성곽 있는 가옥 그 다음 가장 강력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이 레위 지파의 소유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장자로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을 누린 것을 드렸기 때문에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린 것 보다 더 강력한 기업이 곧 레위 지파의 기업이다. 왜 레위 지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장자로 삼으셨고 다른 지파는 성소밖에 두었다. 레위 지파는 성소안에서 봉사하면 일반 지파는 성소밖에가 있다. 이방 백성은 가나안 땅밖에 있다. 그런 의미로 장자인 레위 지파는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됨이 더 강조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 다음에35-38절을 보면 이제는 땅이나 가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팔리는 문제다. 그래서 빈한한 형제에 대해서 희년에는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 어떻게 하므로 하냐면 만일에 동족이 가난해서 빈손으로 있으면 함께 잇게 하고 그에게 이자를 취하면 안된다. 그리고 나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했다.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 말이 붙어 있고 그 다음 제일 끝에 너희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이 붙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문단에도 그 말이 붙어 있다. 여기서 항상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 노인에 대한 문제가 나올 때마다 너희는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니라. 소경이나 귀머거리를 저주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런 말들이 붙어 있었다.
여기 가난한 형제는 함께 살게 해야 되고 그에게 이자를 취하면 안된다. 왜 그런가? 이유가 있는데 나는 너희 하나님이 아니냐? 어떻게 너희 하나님인가?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줄려고 애굽의 종으로부터 자유케한 하나님이 아니냐? 그렇게 해서 너희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도 가난한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아라.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된 것처럼 너도 네 형제에게 이자를 받지 말아라. 네가 너희들을 자유케 해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준 것처럼 너도 네 형제에게 너와 함께 그 복을 누리도록 해라. 왜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었으니까. 그것이 구약에서 윤리다. 그래서 이자를 취하지 말도록 한 것이다.
그 다음 종으로 팔린 형제가 있으면 그 종을 엄하게 부리면 안된다. 그리고 품꾼처럼 함께 잇게 하고 희년까지 섬기게 하면 된다. 희년이 되면 그와 그 자녀가 주인을 떠나서 조상의 기업을 회복하고 돌아갈 것이다. 그 다음 또 이유가 붙어 있다.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나의 품꾼인즉 종으로 팔리지 말고 엄히 부리지 말고 너희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데 내 품꾼으로 그들을 구원했으니까 너희 품꾼처럼 부리지를 말아라. 그러니까 너에게 팔렸으면 엄하게 부리지 말고 일하러 온 사람처럼 부리고 희년이 되면 돌아가게 해라. 그러면 그도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다. 왜 그는 내 일꾼이니까 너의 종처럼 부리지를 말아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47-55절은 이방인에게 형제가 팔리면 이방인은 부자가 되고 너의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팔리게 되면 그 가까운 친족이 속량하고 만일에 그가 부자가 되면 스스로 속량하면 된다. 희년까지 연수를 따라서 값을 정한다. 주인을 그를 삯꾼과 같이 부리고 네 앞에서 엄히 부리지 못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서 그를 천하게 부려서는 안된다. 왜 이스라엘 백성의 감독자가 되어 있으니까. 만일에 속하지 못하면 희년이 되면 자유하라. 이스라엘 자손은 내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꾼이다. 그러기 때문에 형제의 종이 되어서도 안되고 이방인의 종이 되어서도 안된다. 더구나 이방인은 그를 부릴 때 조심해야 한다. 왜 이스라엘 땅에 우거하고 있거든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감독관이나 된 것처럼 그들의 눈앞에 있기 때문에 엄히 부리지 못하리라. 왜 그들은 내 품꾼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희년에서는 무슨 말이 있는가? 근본적인 문제가 기업으로 돌아가라 하는 것이 희년에 자유다. 그러면서 이 희년을 지키면 복을 많이 주리라. 희년에 풍성한 복을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그 복은 그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 땅이 팔린 자 집이 팔린 자 종으로 팔린 자 이 모두가 여호와의 풍성함에로 돌아갈 것이다. 왜 땅은 내것이고 너희는 내 땅에 거하는 내 백성이니까. 너희들은 내 품꾼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 여기 문단의 내용이다.
해석이다. 먼저는 방금처럼 그 문장의 구조에서 말하는 문법적인 내용들 그리고 이것이 당시 하나님의 이스라엘 중에서 의미하는 복을 해석하고 나서 이것이 그리스도안에서는 어떻게 하늘에 질서로 완성되어서 교회안에 주어졌는가? 이것을 해석을 해야만 드디어 구약의 휘장이 벗겨지고 구약이 이스라엘 백성의 책으로 읽혀지지 아니하고 그것이 하늘에 질서로 소유한 교회의 책으로 읽어지고 선물되는 것이다. 반드시 기독론적인 해석을 마지막에 해야 한다. 그것을 가하지 않으면 구약 문장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처럼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는 것처럼 알고 있는 것이지 예수안에서 완성된 책으로 읽지 못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희년에 대한 규례는 레위기 25장에만 있다. 물론 다른데도 잇기는 있다. 겔36장에도 있고 또 여기 레27장에도 나올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는 희년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명령하면서 희년에는 자유하라 붙어 있는 것이고 희년에 대한 규레를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희년에 대한 규례를 직접 말씀하고 있는 것은 레위기25장에만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의 종과 가난한 자에 대하 규례는 출21장 신15장 23장에도 있다. 희년에는 무슨 말이 포함되어 있냐면 이스라엘 사람의 가난한 사람 또는 종 그런 말들이 있다. 그런 내용은 실은 출21장 신15장 23장에도 있다.
그리고 희년에 대한 문제는 안식년에 대한 문제가 있었다. 이것을 서로 비교해서 각각의 문맥에서 그 강조점을 잡아서 해석을 해야 한다. 먼저는 비교해 봐야 한다. 여기 있는 것이 왜 저기 있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가? 차이를 비교해 보면 문맥 잡기가 좋다. 이것은 이것을 강조하고 저것을 저것을 강조하는구나! 그 강조점이 있다. 그 강조점을 따라서 읽어보면 그 문맥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비교하고 그 문맥에서 어떻게 강조점을 표현하고 있는가 그런 표현법들을 알고 해석을 해야 한다. 출애굽기는 어떤 것을 강조하냐면 언약 체결이 출애굽기의 주제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풍성함이 주제다. 레위기는 언약 백성의 교제의 삶이 주제다. 그 주제를 따라서 거기 있는 기록들이 조절되어 있다.
조금더 설명을 하자면 출애굽기는 가령 가난한 자에 대한 말이 21장에 있는데 여기 레위기는 친족이 물러 주고 희년이 되면 자유케 해라 이런 말이 언급이 되어 있다. 그런데 출21장에는 그런 말이 없고 너희들이 히브리 사람을 종으로 사면 6년은 종으로 부리되 7년에는 자유케 해라. 그가 혼자 왔으면 혼자 떠나게 하고 만일에 종으로 팔린 뒤로 장가갔으면 혼자 떠나게 하고 만일에 자기 처자식을 사랑해서 주인과 함께 있기를 원하면 귀에 못으로 구멍을 뚫고 평생 그 집 종으로 살아라. 그 말이 있다. 그런데 레위기는 평생 종으로 살아라 는 말은 없다. 누구든지 돌아가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지 평생 종으로 살아라 그런 말은 없다. 그리고 혼자 왔으면 혼자 가라 그런 말도 없다.
여기서는 팔렸으면 그 조상의 기업을 회복하라는 의미로 자유를 말하지 그 신분에 대한 문제가 강조점이 아니라 기업 회복이 강조다. 기업은 풍성한 복이다. 제대로 하자면 6년부터 9년 가을까지 주는 복이 여기 나타난 복이다. 그것을 누리도록 해라 그런 말이다. 그런데 출애굽기는 언약 체결이 강조이기 때문에 누가 여호와의 백성인가? 종과 자유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런 문제들을 놓고 쭉 언급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는 그렇게 언급을 안한다. 여기서는 땅의 안식년을 설명할 때도 그것을 땅의 안식년 그렇게 언급을 하지 않고 면제년 그렇게 말한다. 여기 레위기서는 땅의 안식은 전부 다 쉬고 풍성한 것을 누리는 것이다. 아무런 수고 없이 땅도 쉬고 짐승도 쉬고 전부 놀고먹는다. 풍성히 먹는데 신명기에서는 면제 년에는 면제해라 그것이 강조다. 빚을 다 면제하고 이런 말이다. 그리고 면제할 때는 본전만 주지 말고 풍성히 주어서 돌려보내라. 그리고 면제년에는 어떻게 하느냐? 가령 십일조를 각 성에다가 모아 두었다가 고아나 과부나 함께 먹어라. 그렇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풍성한 안식 가나안 땅의 풍성함을 누리는 율례이기 때문에 면제하되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한 살림 풍성히 주어서 종을 보내라고 이런 말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각 책의 주제를 따라서 어떻게 그것이 강조점을 잡아서 묘사되어 있는지 그것을 서로를 비교해 보면 알기가 좋다.
그런데 여기 레위기에서는 기업으로 돌아가라. 내가 주인이고 너희들은 내 백성이 아니냐? 내가 너희들을 애굽에서 왜 이쪽으로 옮겼느냐? 내 품꾼 내 일군 삼을려고 옮겼지 않냐? 내가 먹이리라. 그러니까 만일에 팔렸는가 전부 돌아와라. 내가 주인이니까. 어느 누구도 종으로 매이지를 말아라. 내가 주인이니까. 그렇게 해서 풍성한 교제의 삶에다 강조를 두고 있다. 특성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칼빈이 했던 것처럼 이런 율법들을 서로 조화시키고 조직해 가지고 그 안식년은 어떻게 한다고 풀면은 못 푸는 것이다. 오히려 각 책의 특성을 따라서 풀어야 문장을 해석하고 그 문장을 설교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법규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을 읽도록 부르심을 입은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마태복음과 요한 복음을 기록한 목표가 다른데 서로 섞어 버리면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마치 부족해서 일부분 일부분 하신 것처럼 우리는 종합하는 능력이나 있는 것처럼 종합시켜 버리면 각 본문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다. 각 본문을 두고 서로 비교하면서 각 본문의 강조점을 따라서 그 메시지를 해석해야 마태복음은 마태복음의 메시지가 있는 것이고 누가는 누가로서 말씀하고자 하는 주님의 증거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모세 오경도 그와 같이 해석을 해야 되지 조화적인 방식으로 서로 섞어서 그것을 법규를 세로 짜 맞추는 것처럼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비교하고 차이점을 따라서 문장을 해석해야 한다.
이제 해석하겠다. 땅은 여호와의 것이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안식년과 희년 실은 땅의 안식년의 완성은 희년에서 잘 나타나 있다. 7.7은 49 지나고는 새해의 안식에서 모든 안식이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잘 나타나 있다. 땅은 여호와의 것이요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품꾼으로 구원됐다. 땅의 안식이 완성되는 희년에는 이스라엘 모두가 여호와께 속한 자유와 안식과 풍성을 누린다. 이스라엘은 안식년과 희년에 규례를 지킴으로 이 은혜를 누리며 형제에게 공급한다. 이 규례를 왜 그들이 지키는가? 이스라엘은 안식년과 희년에 규례를 지킴으로 이 은혜를 누리며 형제에게 공급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안식년과 희년에 새기신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약의 율법은 너희들은 너무 나하고 거리가 멀고 수준이 안 맞다 하는 죄의 책망의 용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으로 상급으로 주신 것이다. 단지 그것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반복적이고 제한적이다.
그런 의미로 완성을 보도록 했다. 이제 드디어 예수 안에서 구약의 한계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희년도 50년마다 반복되는 희년이지 영원한 자유는 아니다. 50년이 돼서 다시 원상 복귀가 다 됐는데 또 가난해 져 버리면 또 팔려야 한다. 그리고 6년하고 7년되면 쉬고 7.7은 49 또 50년에는 안식의 완성이 되는 새로운 해를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 반복적이다. 그러나 이제 예수안에서 완성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로 완성을 바라보도록 하신 것이지 너희들은 한참 나와 멀다. 너희들이 율법을 못 지킨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들은 이 율법을 지킴으로 율법에서 약속하신 것을 누리며 그 약속하신 것을 누릴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품꾼으로 구원한 것처럼 그들의 품꾼으로 가나안 땅의 모든 복의 땅으로 심어준것처럼 그들도 그 복의 땅에서 형제에게 그 풍성한 것을 공급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 그들이 면제해 주니까. 하나님이 면제할 때 이스라엘이 면제해 준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형제를 공급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이다.
땅의 안식년에는 땅이 여호와 앞에서 안식을 누린다. 안식년의 소출은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과 짐승의 식물이다. 풍성히 먹는다. 여호와의 땅과 거기 거하는 모든 것이 여호와 앞에서 안식을 누리며 그 땅의 소출로 배불림을 받는다.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면제년으로 이야기한다. 여기서는 풍성한 양식 풍성한 것 너희들이 절대로 종으로 있지 말고 내 땅에 거하라. 너희들은 내 성소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냐? 너희들은 내 땅에 사는 사람이 아니냐? 이 땅으로부터 쫓겨나지 아니하리라. 이 땅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팔렸는가 돌아 오라. 너희들은 먹여 주마. 삼년을 풍성히 먹여 주마 그런 것이 희년에 나타난 것이 그런 말이다.
7안식년을 채우고 7월10일에 속죄일에 부는 나팔은 희년 곧 복된 해를 알리는 해이다. 제 50년은 거민에게 자기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자유를 공포하는 복된 해로서 거룩하다. 다른 의미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자유의 해로서 거룩하다. 안식의 떡을 먹으며 양식을 먹는데 이 양식은 제 9년 수확할 때까지 미친다. 기업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풍성한 양식을 먹는다. 수고 없이 먹고 삼년까지 먹는다. 그것이 희년이다.
이 은혜를 해를 예수께서 선포하셨다. 눅4:18절 이하에 회당에서 사61장을 읽으시면서 이것이 너희 귀에 응했느니라. 즉 희년에 약속이 너희에게 성취되었느니라. 그러니까 회당 사람들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인데 놀래 버렸다. 그런데 성소에 계신 여호와께서 아들안에서 이스라엘 중에 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유와 생명과 기쁨이 세상에 임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속한 생명과 기쁨을 그의 교회에 주시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서로 봉사케 하셨다. 그것이 교회 안에 희년에 완성이다. 예수께서 희년을 선포하신 것은 자기 자신이 임마누엘로서 그들 중에 임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제는 옛 언약의 완성 자로 오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희년을 선포하셨을 때는 단순히 땅으로 돌아가는 그런 회복이 아니었다. 그런 희년은 모세 제도가 주는 희년이다. 예수는 그런 희년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메임과 모든 병의 메임으로부터 자유를 선언해 주셨다. 단순히 가나안 땅의 생명의 부요함을 이룬다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자유 자로 말씀하셨다. 왜 구약 때는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셨는데 그 때는 아직도 가리운 원수된 것이 있었다. 아직도 죄의 권세와 반복되는 죽음 아래서 나와야 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그런 휘장을 거두시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나를 너희에게 이르노니 친히 하나님으로 그들 중에 임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그전보다 더 큰 안식으로 그들 중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병든 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신 그런 일에서 안식의 성취 희년 새로운 해 새 시대의 옴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루셨는가? 예수님도 죽으셔 버렸다. 그러면 희년은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까지 죽음의 권세에 갇혀 버리면 이스라엘 백성이 종으로 팔린 정도가 아니다. 그 왕이 죽음의 권세에 갇혀 버리면 이것은 희년에 소망은 없는 것이다. 자유의 소망 생명의 소망은 끊어진 것이다. 그래서 엠마오로 내려간 제자들이 구원의 소망이 끊어졌다고 운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살리셔서 보좌 우편에 오르게 하셨는데 이분이 우리의 대표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부르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것으로 준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살과 피로 먹이신다.
구약 때는 어느 누구도 피를 먹은 적이 없다. 짐승의 제물은 제사장은 먹어도 평민에게는 주어지지 안했다. 심지어 화목제물 까지 의미상으로 확대하자면 임자에게까지 확대될 수 있어도 구약 본문의 내용은 제사장까지고 임자에게는 안 준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제물은 성소 뜰에 잇는 제사장의 양식 외에 백성들은 먹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거룩의 간격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휘장은 찢어졌고 심지어 무덤까지 열려서 무덤도 경건한 백성들을 가두어 둘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로서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거기 올라 가셨고 그는 자신의 살과 피를 교회의 양식으로 주셨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먹지 못하는 생명이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온전한 일체의 생명을 주셨다.
가나안 땅은 산물은 먹으면 뒤로 나오고 썩는다. 또 안식년도 아무리 놀고먹어도 그 다음에는 또 일을 해야 되고 아직 안식의 완성은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목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수고해야 된다. 그 안식의 성취는 아니다. 마치 하나님이 엿새 동안 일한 것처럼 사람도 일해야 된다. 아직은 아니다. 그것은 먹어 봤자 썩고 또 일해야 된다. 희년은 삼년까지 먹어도 그 다음에 또 일해야 되고 또 종으로 팔리면 50년이 지나면 해방이 된다. 반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부른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영광의 처소로 부르셨고 이제는 영원히 빼앗기지 아니할 주님의 몸에로 우리를 지었다. 한 영은 한 몸이고 그의 성령은 사랑의 영이신 데 영원히 우리 안에 임하셔서 한 몸의 교제를 나누게 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아들의 영을 우리 가운데 부으셔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런 영원한 교제로 우리 안에 계신다.
그것이 우리의 먹고 마시는 삶에서 우리들이 먹고 마시는 일상의 양식이 주님의 살과 피로 선물되어 있는 것이다. 관계가 그렇다 그 말이다.
내가 여러 번 말했지만 내가 약혼한 사람끼리 만나서 짜장면 먹고 결혼 기념일 해 놓고 우동 먹고 그러면 얼마큼 재미없을까요? 불고기도 많고 그런데 그래도 처음 본 사람하고 소고기 먹은 것하고 약혼한 사람하고 짜장면 먹고 입가에 까맣게 묻은 것하고 질이 전혀 다른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우리가 먹는 것은 형편없는 것을 먹는가 모른다. 그러나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내 살이요 내 피다. 이제는 거룩하고 거룩하지 안한 영역이 없다. 왜 주님께서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로 자신의 살과 자신의 피를 선언했다. 구약 때는 성소안에 있는 것만 거룩하고 성소밖에 있는 것은 거룩하지 안했다. 성소밖에 것은 아무리 하나님이 주셨어도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상에 못 올라온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의 부활안에서 우리의 먹고 마시는 모든 삶이 주님의 살과 주의 피에 참여하는 거룩한 관계고 여러분은 그런 의미로 아들이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여러분은 그런 관계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그의 일군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수고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대리자로 가난한 자에게 이런 은혜를 공급해야 한다. 마치 희년에 자유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는 것처럼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의 몸을 주셔서 하늘에 생명으로 부요케 한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신 선물을 펴서 주님께서 몸을 주신 사랑의 교제로 봉사해라. 그렇게 해서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몸의 평균을 이루게 해라.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다.
우리가 주님의 몸에 참여하며 몸이 교제로 먹는다. 그러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에 참여한 예배로 모이고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것으로 주의 상에 함께 진설하고 우리가 주님의 피와 살에 참여하는 교제의 감사로 먹고 그리고 그것으로 가난한 자가 먹을 수 있도록 공급해야 한다. 그러니까 성찬식과 구제가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이 초대 교회 예배다.
여러분이 먹을 때마다 주님의 몸에 참여하고 그런 의미로 가난한 자의 몸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주셔서 그의 백성들을 먹이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라. 그것이 주님의 은혜의 일에 참여한 것이다. 고후8-9장에서도 그렇게 말씀하고 사도행전의 교회 설립 사건에서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구약에서도 만나를 거뒀을 때도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주의 몸에 참여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 우리의 주님의 일군이다. 우리 주일 학생이 그런 질문을 했다고 그랬다. 하나님이 왕인데 왜 사람을 왕을 만들었을까요? 이스라엘에 왕이 많찮아요? 하나님이 왕인데 왜 사람을 왕을 만들어 가지고 그것이 성경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대리자다. 왜 하나님처럼 누리게 할려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모두 우리에게 위탁하셔서 같이하신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믿음이다. 구약 때는 구약대로 살면은 그들은 하나님의 품꾼이고 하나님의 안식의 누리고 그 안식을 백성에게 선물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다. 우리들은 그런 방식이 아니라 주님의 몸의 지체에 참여함으로 주님의 몸을 공급하시는 주님처럼 그렇게 삶으로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로 주님의 일군 품꾼으로 사는 것이다. 왜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주셔서 우리를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 몸에 심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희년에 완성으로서 주님 안에 있는 영원한 자유다.
이 자유는 끝이 없다. 날짜가 반복된 것도 아니다. 여전히 죽음이 권세를 시행하고 있고 모든 것이 탄식하고 있지만 주님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시면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누리는 모든 것을 온 우주에서 누리게 되고 그것이 주님께서 만유의 만유가 되신다는 역사의 완성점이다. 지금 여러분들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교제를 누리고 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리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수고해도 나는 헛되이 수고했다 그런 말이 없다. 왜 우리를 사랑하사 몸을 주시는 주님께서 영원한 사랑의 영으로 우리 안에 계셔서 나는 너에게 속했고 너는 나에게 속했고 한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성령은 그런 의미로 사랑의 영이시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교회에 주신 희년이다.
이제 레위기 26-27장을 하면 레위기 강론도 끝난다. 조금씩 하는 것이 대단하다. 그러니까 레위기는 일년 못 걸렸다. 52주가 일년인데 한 주에 한 장씩을 했으니까 빨리 갔다. 다음에는 민수기 신명기 하면 모세 오경이 끝날 것이다. 처음 창세기를 풀 때는 구속사가 정립이 안돼서 잘 안 풀어진 조항이 있다. 1-4장까지는 손을 좀 보아야 할 것이다. 그 뒤로는 그렇게 많은 잘못을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그전에 잇는 주보도 열심히 읽고 성경도 열심히 읽기를 바란다. 모세 오경만 잘 풀어도 성경 전체를 잘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회당에서 같으면 성경 한 권을 다 읽으면 회당을 빙빙도는 의식이 있다. 무슨 의식 인줄을 잘 모르지만 책에 보면 그런 의식이 있다. 성경을 그들을 정기적으로 쭉 돌아가면서 읽는다. 한 번 다 읽고 나면 그런 의식이 있다. 레위기를 배워 보니까 예수의 구 속의 언어는 전부 레위기 언어로 되어 있다. 신령한 교제의 삶이니까. 얼마큼 감사한지 모르겠다. 더욱 주님을 사모하고 기도해 주면 앞으로 본문을 강론할 때도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목사 실력 자랑하라는 성경이 아니라 여러분을 먹이는 성경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혹시 내가 맘에 맞지 않을지라도 여러분이 열심히 밥을 달라고 하면 아무리 식모가 미워도 자기 자식이 우는데 반찬값 안줄 주인이 없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많이 사모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하나님이 그 풍성한 은혜를 더 밝히 나타내실 것이다. 여러분이 더 사모하시기를 바란다.
- 설교 : 김강호 목사
먼저 본문의 의미를 요약적으로 살펴보고 해석하는 순서로 강론하겠다.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은 공부하기 전에 읽어 와야 되고 또 공부하고 나서 읽어보고 그렇게 해서 성경 본문을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복을 받아야 된다. 꼭 누구를 의지해서 배울려는 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점을 유의해 주기 바란다.
내용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문제가 1-2절까지 있고 그것을 지키는 복이 3-13절까지 말씀하시고 만일에 어기면은 벌주리라는 경고가 39절까지 있고 그 외에는 회개하면 고쳐 주리라 하는 회복의 약속이 있다.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제 먼저 1-2절을 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목상이나 주상을 만들지 말고 땅에 조각한 신상을 세우고 거기에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의 성소를 공경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이제 마지막 레위기는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그들 중에 함께 하셔서 그들을 나라로 조직하는 언약 체결이 핵심이다. 그러기 때문에 언약의 법과 친히 하나님이 동거하시는 언약의 성소를 짓는 것이 출애굽기의 내용이었다. 레위기는 그 성소에서 하나님이 내 앞에 예물을 드려라. 성소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교제하는 것이 레위기의 핵심이다. 그래서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기와 레위기인데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교제의 삶 그것이 중심적인 내용이다.
이런 내용들을 25장까지 말씀하시고 나서 이제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들으면 복을 주고 듣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 하는 언약 체결을 마무리하고 있는 내용이 26장이다. 그리고 27장에 보면 십일조를 내고 서원 예물을 내고 많이 나와 있다. 지금 언약 체결에 대한 마무리를 짓고 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그 축복을 보증하는 방식으로 덧붙여진 것이 마지막 27장이다.
언약의 내용은 1-2절에 있다. 즉 우상을 만들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며 성소를 공경하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다. 즉 이스라엘 땅밖에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는가? 성소에 계시면서 함께 하시고 특별히 안식일의 교제에서 함께 하신다. 그래서 모든 절기는 안식하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 언약에 대한 문제를 핵심적으로 요약하기를 우상을 섬기지 말고 나를 섬겨라. 어떻게 내 안식일을 즐거워하고 지키고 성소를 공경하라. 즉 내가 그 성소에 잇기 때문에 나를 공경해라. 그런 말로 언약의 삶이 요약되어 있다.
그 다음에 이제 잘 지키면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너희가 나의 규례를 지키면 비를 때를 따라 줄 것이고 일년 내내 수확이 그치지 아니하고 그런데 성경은 비를 때를 따라 줄 것이고 때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이고 너희가 타작하는 타작은 포도 딸 때까지 미치고 포도 따는 것은 파종할 때까지 미치리니 한마디로 일년 내내 수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수확을 타작하는 것과 포도 따는 것에 맞췄다. 그리고 너희가 음식을 배불리 먹고 땅에 완전히 거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항상 본문을 읽어야 한다.
때를 비를 주시고 연중 수확이 그치지 않도록 하시고 배불리 먹고 완전하리라 이것이 복이다. 그러니까 그 땅에 풍성한 산물을 주고 안식을 주겠다. 그 말이다. 그 다음에 그 땅에 평화를 주리니 사나운 짐승을 제거하고 너희들이 누우나 괴롭게 하는 자가 없고 칼이 없을 것이고 대적들이 너희들 앞에서 엎드러지게 하리라. 이것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가나안 땅에 풍성한 산물을 준다는 말이었고 그 다음에는 모든 적들로부터 완전케 하리라 그 말이다. 그렇게 해서 그 풍성함과 안식을 주겠다.
또 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며 창대케 하며 풍성케 하리라. 그리고 그 언약을 이행해서 그들을 번성케 하고 하나님은 그들 중에 장막을 세우시고 함께 행해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그들이 말을 잘 들으면 주는 복이다. 첫째 가나안 땅의 풍성함 모든 적들로부터 안식 그리고 모든 언약을 이루셔서 그들로 번성케 하고 또 하나님은 그들 중에 영원히 함께 계셔서 집을 짓고 함께 하시겠다. 그렇게 해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렇게 복을 주겠다 하는 것이 복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이전에는 애굽 땅에서는 바로를 섬겼다. 그 때는 바로를 섬기고 우상의 권세 아래 있었다. 지금은 여호와를 섬긴다. 왜 거기서 건져내서 여호와의 백성을 삼으셨으니까. 안식일 제사장이 성소에다가 열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고 그것을 먹는다. 내가 그렇게 했다. 그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축복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하면 언약의 축복이다. 가나안 땅의 풍성함 가나안 땅의 안식 그리고 하나님이 영원히 그들의 성소가 되셔서 함께 하시고 그들을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신다. 다시는 애굽의 멍에를 메지 않고 나를 섬기도록 복을 주겠다. 그런 말이다. 이것이 이 문장안에 있는 내용이다. 일단을 그 문장안에 잇는 것을 풀고 그 다음에 그것이 어떻게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됐는가를 이야기 해줘야 한다.
만일에 나의 규례를 멸시하면 이 멸시한다는 말이 7배나 벌을 준다는 말이 다섯 번 나와 있어도 전체적으로 합치면 7번 나와 있는 식이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에서는 문단이 나누어져 있지만 내용은 벌주겠다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잇기 때문에 이렇게 풀었다. 그러나 나의 규례를 멸시하며 나의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놀라운 재앙을 내려 병으로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성경에서는 너희 눈이 쇠하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생명이 쇠약할 것이다. 그리고 파종한 것을 적이 먹기 때문에 너희 수고한 것이 헛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쳐서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실은 가나안 땅의 복 언약의 복을 다 잃는 것이다. 왜냐하면 놀라운 재앙을 내려서 생명을 쇠약하고 하고 번성하고 번성한 것이 아니라 생명이 쇠약하고 또 파종한 것을 일년 내내 먹으리라고 그랬는데 적이 먹어 버리고 그들은 적군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치니까 안식이 없고 이렇게 해서 가나안 땅의 모든 복을 잃으리라. 이 말을 강조해서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그리하여도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칠 배나 더 징치할지라. 이 칠배나 하는 것은 벌을 완전케 하리라 그런 말이다. 일곱 하는 것은 완성 수이니까 벌을 완전하게 주겠다. 내가 너희 세력을 인한 교만을 꺾고 하늘과 땅을 철과 놋같게 하리니 땅은 산물을 내지 아니하리라. 그 다음 벌은 칠배나 벌을 더 주실 것인데 왜 벌을 주느냐? 그들의 죄 때문에 벌을 주는데 그 죄는 세력을 인한 교만이다. 그들이 먹을 것이 풍성하고 살찌니까 발로 하나님을 찬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철과 놋처럼 해 버리니까 비가 내리지 않고 땅은 산물을 내지 아니하리라. 그러니까 하늘도 땅도 그가 지으신 모든 세계가 놋처럼 되어서 아무것도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리라.
그래도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또 칠 배나 벌을 내리는데 들짐승을 자녀와 육축을 멸하여 수가 적어 길이 황폐하리라. 들짐승을 보내서 자녀와 육축을 멸하기 때문에 땅이 완전히 황무지가 될 만큼 사람이 안 지나간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먹을 것을 다 주지 않겠다고 이야기했고 그 다음에는 재앙을 내려 즉 사나운 짐승을 내려 너희를 죽이겠다. 그런 말이다. 그래도 대항할진대 여기서 이 말을 계속 쓰는 이유는 성경 본문이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나를 배반하고 하는 말은 같은 가치의 말이다.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말이나 언약을 배반한단 말이나 하나님을 대항한다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이다.
죄 그러면 목표를 맞추지 못한 것 그런 단어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을 배반하고 대항한다 하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이다. 그래도 안 들으면 나곧 나도 너희를 대항하여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강조 시킨 것이다. 나 곧 나도 너희를 대항하여 칠 배나 더 칠지라 칼로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성읍에 모일지라도 열병을 보내고 대적에 손에 붙이며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라. 여기서는 양식을 끊는 것과 질병과 원수를 보내리라는 것을 한꺼번에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도 내게 대항하면 내가 진노로 너희를 대항하며 나 곧 나도 그 말이 아니라 진노로 너희를 대항하리니 점점 강조시키고 있다. 칠배나 더 징책하리니 너희가 자식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내가 너희 산당을 헐며 너희 시체를 파상한 우상 위에 던지고 너희 성소와 성읍으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양치 아니하고 내가 너희를 열방중에 흩을 것이요 너희의 땅과 성읍이 황폐하리라. 대적이 이것을 보고 놀래리라. 여기서는 심판이 더 강화되어 있는데 어떤 심판을 말하냐면 이제는 배고픈 정도가 아니라 자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그 정도가 아니라 너와 너희 신이 함께 심판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우상을 부서뜨리고 부서뜨린 우상에 그들의 시체를 던져 버리니까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 그럴 뿐만 아니라 너희 성소까지 황폐하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던 성소까지 함께 파괴시켜 버리고 너희의 예물을 다시는 받지 않겠다. 완전히 언약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그 땅에서 배고픈 정도가 아니라 그 땅에서 적군의 칼에 죽는 정도가 아니라 원수의 땅에 흩어 버리겠다. 대적들도 보고 놀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언약의 복들을 끊겠다는 것이 점점 강화되어 있다. 내용으로 묶으면 앞에 있는 축복을 없애겠다는 말과 똑 같다. 가나안 땅의 풍성함 가나안 땅의 안식 그리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어서 너희 중에 행하고 성소 중에 함께 하면서 너희들의 생명을 번성케 하리라. 이 약속을 없애겠다는 말을 점점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하는 동안에서 너의 안식시에 쉬지 못하던 땅에 황무할 동안에는 쉬리라. 너희 남은 자에게는 대적의 땅에서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릴 것이라. 그 앞에 다른 말이 더 있다. 바람에 나는 잎사귀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랠 것이고 또 신명기 같으면 밤이 되면 언제나 아침이 올까 아침이 되면 언제나 밤이 올까 쉴 틈이 없다. 너희 대적의 땅에 너희를 삼키리라. 남은 자가 대적의 땅에서 자기와 열조의 죄로 인하여 쇠잔하리라. 이것도 성경 표현법은 아주 강조되어 있다.
자기 죄 열조의 죄 그 말을 강조시키면서 쇠잔하리라 하는 말을 강조시키면서 하고 있다. 단지 저는 내용을 알게 하려고 줄여 버린 것이어서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표현법은 잘 살리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성경 자체를 읽도록 하시라.
그러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신 것만 만족하시냐? 그 말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수의 땅에까지 쫓아가서 그들을 벌할 것이다. 남은 자들을 그런데 어떻게 벌하냐하면 그 땅은 그들을 토해 내버려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안식하고 즐거워해야 하는데 그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범죄 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난 동안에는 안식할 것이다. 다시는 죄인들을 먹이려고 수고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땅은 쉴 것이고 그리고 너희들은 원수의 땅에서 쉬지 못할 것이다. 바람에 나는 잎사귀 소리에도 깜짝 깜짝 놀래고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치다가 넘어질 것이다. 쉬지 못하고 너희 생명이 쇠잔한데 너희 죄와 조상들의 죄 때문에 쇠잔할 것이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언약의 땅에서 쫓겨날 뿐만 아니라 언약 땅 밖에서 까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는데 하나님의 땅은 그들을 토해 내버리고 이방 땅은 삼켜버리고 그렇게 그들이 열국에서 망하리라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 때문에 그대로 끝내 버리는가? 이제 회개와 회복에 대한 약속이 그들이 자기의 죄와 열조의 죄를 자복하고 또 자기들이 나를 대항하였음으로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대적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깨닫고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이 할례 받지 아니한다 그 말은 성경에서는 할례 받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 할례는 죽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출생을 의미한다. 그래서 할례 받지 아니한 그런 것은 아직 하나님의 것이 아닌 대항한 옛질서에 속한 마음이 될 것이다.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조상들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그런데 끝까지 대항하냐면 이제 대적의 땅에서는 왜 우리가 이곳으로 끌려 왔던고 바벨론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 왜 버렸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버렸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버리신 것이 아니냐? 그렇게 하고 하나님 앞에 매를 순수히 맞으면 하나님께서 다시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조상들과 맺은 언약 그렇게 하지 않고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이삭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일일이 따로 따로 조상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것도 거꾸로 불러 나가고 있다. 아브라함까지 이것은 그 성경의 묘사법을 읽어야 되지 이런 이론으로 해 가지고는 이런 묘사하는 의미를 못 드러낸다. 저는 신학적으로 표현하니까 조상들과 맺은 언약 이렇게 되었지만 성경은 조상들의 이름을 아브라함까지 일일이 불러 나간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시는 살뜰한 표현법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을 읽으면 잘 모르고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하면 신학적으로는 빨리 알아듣고 그런데 어머니가 자식한테 편지를 쓰면 신학적인 말이 아닐 것이다. 일상적인 언어가 되기 쉽다. 그런데 그런 것은 별로 힘이 없다고 느끼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표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성경 자체를 열심히 읽어야 한다. 목사를 세운 것은 교회를 도울려는 것이지 목사를 통하지 않고는 모른다는 의미로 그렇게 하지 않게 때문에 여러분들이 목사직을 존중한 것은 좋지만 우리 목사님이 설명해 주기 전에는 모르겠다고 눈감고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고 눈을 뜨고 열심히 읽어야 한다.
그들이 나의 법도를 멸시하였음으로 그 땅에 사람이 없을 때에 땅에 황폐하여 안식을 누릴 것이요 그들은 형벌을 순히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대적의 땅에 거할 때에 아주 멸하지 아니하여 그들과 세운 언약을 폐하지 아니하리니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라. 처음에는 회개를 언급하고 조상들의 언약을 말하고 다시 회개를 언급하고 그리고 그들에 대한 회복 약속을 언급하고 있다. 이런 동심원적인 물결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는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고 열방의 목전에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했는가 출애굽을 다시 말하고 있다.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고 열국에 권세에서 건져냈다.
다시 열국에서 모욕을 받지 않도록 건져 낼 것이다. 왜 나는 여호와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제일 끝에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다. 그런 말로 끝맺고 있다.
그런데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율법이다 하는 말은 26장 끝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27장 맨 끝에도 있다. 같은 말이 반복되어 있다. 시내산 말씀은 레위기에서 끝맺고 있는 것이다.
해석이다.
이제 이 전체를 해석하는 것이다. 언약 백성의 삶은 우상을 섬기지 아니하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을 즐거워하며 성소에서 여호와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것이 레위기에서 삶이다. 하나님은 성소에서 모세야 나한테 예물을 드릴려면 이렇게 드려라. 너희 부정한 자들아 이렇게 이렇게 하고 내 성소에 들어와라. 그 모든 정결 예식을 주어서 성소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지막 25장까지 절기를 보면 그것은 안식의 절기다. 모든 절기는 성회 하나님의 전에 모여야 되고 안식해야 되고 특별히 안식일은 열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고 안식일에 교제에다 강조를 하고 있다. 그러니까 너희들을 우상을 섬기지 말고 나를 섬기되 내 안식일을 즐거워하고 내 성소에서 나를 섬겨라. 그렇게 말씀했다.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법도를 지키면 바로 이 성소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 하나님을 따라 봉사하면 가나안 땅의 풍성함과 안식을 주시며 그들을 창대케 하시며 번성케 하신다. 하나님은 성소 중에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행하신다. 성소에 함께 계시고 그들을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셔서 풍성히 먹게 하시고 안식을 주신다 그것이 언약의 내용이다.
그들이 여호와를 대항하여 언약을 배반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거듭 거듭 온전한 진노로 벌하신다. 그런데 여기서는 한 번 벌주면 끝하면 모르겠는데 칠 배나 더하리라 하면서 그 벌이 여기 보니까 여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우리 같으면 삼세번 참으면 그만일까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칠 배나 벌을 주리라 하는 것은 완전한 진노로 쏟아 부으리라는 말인데도 그런데도 이것은 계속해서 반복하고 반복해서 그래도 안 들으면 하는 이런 오래 참으심이 있다. 구약 역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킬 때도 솔로몬 때부터 범죄가 시작되지만 마지막 멸망시킬 때도 3차로 망했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시야 근 20년 간격에 세 번에 걸쳐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 옮기셨다. 오래 참으신 분이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그래도 안 들으면 근 여섯 번에 유예가 있는데 그 때마다 일곱 배가 징치하리라. 그런 말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진노를 쏟아 부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과 싸우신다. 특별히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은 가나안 백성을 완전히 진멸하도록 싸울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 대항하며 광야에서 몰살시킬 정도로 싸우신다. 언약을 배반하면 그런데도 거듭 거듭 많은 유예와 함께 하나님의 온전한 진노로 쏟아 붓는다.
그들은 언약의 모든 복을 잃을 것이다. 언약의 복은 풍성한 안식 번성함과 창대함이다.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 함께 파멸되고 신명기에서는 이 정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우상을 파괴하고 파괴된 우상에 그들의 시체를 던져 버린 정도가 아니라 너희들이 사모하는 우상의 종이 되리라. 그래서 바벨론에 가서 원없이 우상 섬기고 종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섬겼던 신과 함께 그들의 생명을 멸망시키고 더럽게 할 것이다. 그리고 언약의 땅에서 쫓겨나며 대적에 땅에서도 안식이 없으며 조롱 거리가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내용이다. 그러나 땅은 그들의 죄로부터 안식하고 백성은 이전의 교만을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의 땅에 황무지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황무할 동안에 쉰다. 다시는 죄인들을 먹일려고 경작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안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땅을 하나님의 안식을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안식년을 즐거워하지 아니하고 먹고 마심을 추구해서 쉬지 아니했다. 그렇게 했을 때 그들을 쫓아내면 하나님의 땅은 70년 동안 안식하리라. 역대기 끝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 때가 하나님의 땅에 안식의 해고 백성들은 원수의 땅에서 쉬지 못할 것이지만 거기서 그들이 자기들을 낮추어서 회개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또 그 언약을 기억하셔서 그들을 싫어하지 않고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이다.
이것이 언약의 축복과 그리고 배교자에 대한 벌이었다. 이상의 기록된 사실은 이스라엘의 배교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듣지 않고 만일에 그들이 제 7년에 쉬면 먹을 것이 줄여들 줄 알지 않겠는가? 지금 50년이 되어서 땅을 백성에게 공짜로 나눠줘버리면 자기 소득이 줄어들 것이다. 실은 이런 식으로 대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봉사하고 하나님에 드린 자로서 백성과 함께 그 부요함을 나눠야 되는데 실은 그렇게 되지를 안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 땅에 포로 잡혀갔다. 그들이 사모했던 이방의 권세의 종이 되었고 그들이 사모했던 우상의 종이 되었고 그들은 세상에서도 조롱거리가 되어 버렸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를 구원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합에게서 바알의 신전을 세우신 방식으로 완전히 바알화 되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고 남은 자를 위한 구원을 엘리야에게 약속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전을 지음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왕국이 되었던 것처럼 북 열지파가 아합 때 사마리아에다가 아합의 전을 지음으로 완전히 아합의 왕국이 된 것이다. 그 때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하나님 앞에 고소했고 그들은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자들을 위한 구원 약속을 했다. 범죄한 이스라엘과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싸우시고 예후를 통해서 싸우시고 이방왕 베나다를 통해서 싸우실 것이다. 그러나 남은 자를 구원하실 것이다. 그것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신 약속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언약에 신실하셔서 70년이 차매 배교의 심판의 기간이 차니까 그들을 바벨론에서 구원해 내셨다. 그리고 다시 성소를 짓고 봉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전 영광과는 달랐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따라 마지막에 아들을 보내셨는데도 계속해서 그들은 배교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순종하신 아들로 말미암아 하늘 처소에 영광으로 교회와 함께 하시고 하늘에 속한 생명으로 먹이시고 만민 중에 함께 계신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범죄 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마지막 왕으로 보내셨는데 이 왕은 기원이 혈통을 따라서는 다윗의 혈통이어서 고린도전에서는 기원이 하늘에 있는 둘째 아담이다. 그는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마지막 왕으로 자기 백성의 대표로 세우셨고 이 왕은 하나님 앞에 언약에 신실하게 걸었다. 네가 언약을 잘 지키면 이런 복을 주리라 했는데 구약의 백성들을 그렇게 신실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 아들은 어떻게 순종했는가? 자기 몸에 저주받은 죽음에 이르도록 까지 순종의 길을 걸었다. 그것은 40일 시험에서도 나타났고 죽음에 이르도록 어찌해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 그 때도 자기 하나님으로 부른다. 그러면 왜 그랬는가? 그것은 백성들이 범죄한 단순한 벌을 받으라 그런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죄 값은 사망이어서 죄인을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 반드시 죄는 죽음으로 끝나야 되고 새로운 생명만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구약에서 반복되는 제물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상에서 봉사했던 것이다. 그냥 가나안 땅의 생명은 안된다. 죽음을 통해서만 들어온다.
그러니까 그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 새롭게 된 생명인데 피가 뿌려지면 거기까지 제사장이 나가서 봉사하는 자리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지막 왕을 세우셨는데 이 아들은 자기 몸에 죽음에서 하나님께서 죄의 세력을 정복하시는 그 일을 저주받은 죽음에 이르도록 까지 순종하심으로 함께 걸으셨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자기 백성과 함께 동거하고 동행하는 것이다. 아담은 역사의 처음에서 순종하지 못함으로 온 인류에게 사망의 권세 아래 매이게 했다. 그것은 모세 언어로 하면 아담은 온 인류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항상 모세 언어로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새로운 대표자로 세우셨는데 항상 그 대표자가 이룬 것이 그 백성이 얻는 것이다. 자기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끝내시기를 원했을 때에 아들은 그 저주의 잔을 그대로 받으신 것이다. 아담 같으면 먹지 말라고 한 것 한가지만 있어도 시험에 들었는데 예수님은 자기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질 때까지라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을 불렀고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렇게 완전한 신뢰로 그 길을 걸었다. 그것이 마태와 누가복음의 시험 기사들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죽음의 권세 아래서도 순종하신 아들 안에서 다시는 죽음은 사람을 미혹하는 권세를 상실했다. 왜냐하면 죽음이 그 아들을 유혹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음에 이르도록 하나님을 신뢰했다. 그러면 사탄의 권세는 죽음의 권세다.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를 파멸시키는 것이 사탄의 권세다. 그래서 모든 인생들은 아브라함의 후손까지라도 죽을까 무서워 일생에 매여 종노릇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저주받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가 그에게 맡기신 길 자기 몸의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죽음의 권세를 끝내는 그 일에 기꺼이 동참했고 예수님은 원해서 그의 생명을 드렸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들의 순종안에서 죽음의 시대를 끝내 버리신 것이다. 그리고 이 아들은 다시는 죽음이 손댈 수 없는 거처에 있는 아들이시다. 땅에 있는 아담처럼 무엇이 부족한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생명으로 거기 계신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교회는 새로운 대표자를 얻은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끝에서 나타난 것이다. 왜 역사가 완성되니까. 여러분 요새 낳은 아이들은 휴대폰 가지고 전화 건다. 옛날 같으면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다. 왜 역사가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다.
구약 때는 모세를 통해서 말씀했으니까 모세도 휘장 밖에서 누리는데 이제는 보좌에 오르신 아들안에서 그의 백성을 대면하니까 이제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에게 가리움이 없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교제로 계신 그분인 것처럼 교회는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다. 완전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 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교제 가운데 있다.
지금은 아들은 통해서 하나님은 죽음의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셔서 자기 약속을 완성하셨다. 네가 순종하면 내가 가나안 땅의 복을 주고 풍성한 안식의 복을 주고 나는 영원히 너와 함께 하는 약속을 예수의 순종을 통해서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과 교제와 영광을 준 것이다. 이제는 가나안 땅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양식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라 즉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인데 그런 영원한 복으로 교회를 인도하셨고 그리고 교회가 누리는 하늘 처소에 있는 안식은 음부에 권세가 이기 지 못하리라. 이방의 권세가 아니라 죽음의 권세가 손댈 수 없는 완전한 생명의 자유다. 그리고 내가 너를 번성케 하고 창대케 하리라 했는데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생명을 얻고 온 우주에 충만하게 온 이방 세계에 교회가 확대될 뿐만 아니라 참으로 그 이름은 높아지고 높아져서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권세로 높은 그런 이름을 얻으셨다.
누가 그랬는가? 하나님이 순종하신 아들안에서 그에게 속한 교회를 하늘에 속한 처소의 영광과 함께 거기 있는 생명의 풍성함과 함께 거기 있는 안식과 함께 거기에 있는 존귀와 함께 완성케 하셨다. 이것이 교회가 누리는 복이다. 이제 교회는 이 복을 누리기 때문에 항상 대표자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백성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구약 때는 아무리 백성이 거룩해도 모세는 휘장 밖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밖에 다른 능력이 없다. 그것이 최고의 능력이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교제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골로세서 말대로 하면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기 때문에 이제 교회도 믿음의 신실한 백성으로 걸을 수가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깨어 있을 때 그렇다.
약혼 했을 때는 취소할 수 있다. 가짜로 사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약혼이란 관계가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은 혹시 부부 싸움을 날마다 할지라도 취소 될 수 없는 것이다. 관계가 그렇다. 그 말이다. 이제 교회는 그런 의미로 하늘에 속한 능력을 얻었다.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믿으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면 거기는 완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방인이 부요하면 하나님이 이방인의 신보다 큰가 의심도 되고 그들이 범죄해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비를 주지 않으면 아 이방신은 훨씬 좋은가 보다. 하고 그 신을 사모 할 수도 있다. 하늘에서 만나를 안주면 다음 날을 위해서 염려하고 근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가 죄인 되고 원수되었을때 자기 아들을 우리의 대표로 보내셔서 아들의 죽으심 안에서 영원히 생명의 약속을 성취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런 교회는 사탄이 죽음까지라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시는가? 질문 할 수 없다.
왜 사랑의 확증이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영원히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성령은 사랑의 영이시다.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교제의 영이시다. 영원한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에 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죽을 때까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 그렇게 질문이 불가능하다. 오히려 바울처럼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하고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롭지 흔들리지 아니한다. 그것이 신약 교회가 걷는 믿음의 능력이다. 우리가 이처럼 큰 복 애굽에서 건져내서 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봉사한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셔서 하늘 처소에 계신 주님을 봉사하도록 완전한 생명의 빛가운데 두셨기 때문에 교회는 어둠이 없고 그런 의미로 언약에 신실하게 걸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의 안식에서 동행하지 못하고 넘어진 것도 비참한 심판이지만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마지막에서 아들을 주심으로 하늘에 영광의 처소로 옮기시고 영원한 생명의 빛과 교제를 주셨는데도 이것을 누리지 못하고 동행하지 못하고 조금만 이해 타산을 따라서 무엇을 마실까 먹을까 이런 식으로 우리가 넘어 질 것 같으면 하나님은 오래 참으셔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지만 만일에 그 판결이 완결되면 일곱 배를 더한 문제가 아니라 다시는 회개하는 제사가 없는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야 될 것이다.
이것은 여러분은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승리를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는데 그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자유지 언제나 쫓겨날까 하는 불안이 아니다. 그것은 날마다 생명을 누리는 교제지 불안이 아니다. 이제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영원히 우리의 왕이 되시고 영원한 생명의 교제와 능력과 빛을 주셨기 때문에 만일에 여기서 깨어 있지 못하고 넘어지면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도 없고 이전에 있었던 일곱배 했던 바벨론 땅의 심판이 아니라 영원한 진노의 불못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레위기 26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가나안 땅의 언약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그러지요? 여호와란 이름은 이름 풀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에서 자기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부활하신 아들안에서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아버지시요 그 아들 안에서 함께 하신다. 이전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서 함께 하셨던 것은 그림자 적인 교제인데 이제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함께 하시는데 구약의 모세는 종이지 자유하는 아들이 아니다. 그는 휘장밖에 있는 어린아이요 쫓겨난 종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마지막 세우신 중보자는 그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다. 왜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교제하신 분이고 그분 안에는 자유함이 있지 가리움이 없다. 완전한 빛이시다.
이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부활하신 예수안에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우리의 주 하나님 구약이 여호와의 칭호를 그대로 예수님께 붙이는 것이 사도들의 증거다. 이것은 구원 역사에서 나타난 이야기다. 만일에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조그만 간격이 있으면 그것은 완전한 빛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누리고 잇는 구원이다.
우리가 어떻게 안식일을 지킬 것인가? 구약이 안식일을 그대로 신약에 가져오지를 않는다. 어린 아이때 살았던 법을 어른이 되었을 때 그대로 옮기면 안된다. 휘장밖에서 종으로 섬겼던 것을 휘장안에 있는 자유하는 아들이 그것을 가져와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구약을 신약에 가져와서는 안된다. 그것은 성경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 아닌 대로 섬기는 것이다. 여러분이 숙제 잘하고 심부름 잘하니까 아버지가 이뻐하셨다고 커서도 아버지 나 숙제 내주고 심부름 시켜 줘 하고 아빠 나 이뻐 하면 그것은 진짜 정신 나간 아들이다. 그것은 참으로 정신 나간 아들이다. 어렸을 때 살았던 방식을 절대로 가져와서는 안된다. 어렸을 때를 가져오면 가져올수록 성경대로 살지 않는 것이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새로운 관계로 사는데 그 새로운 관계로 이전에 일기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다 큰아들로서 일기책을 다시 읽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안에서 구약을 다시 읽을 때만 구약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예수의 책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을 그대로 가져와서는 안되다. 우리가 성소에서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꼭 예배당에서만 섬긴다는 이런 것이 아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일단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일을 즐거워하고 지키고 성소에서 하나님을 즐거워 할 것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셨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주를 섬겨야 된다. 거룩하고 거룩하지 않는 영역이 있어서는 안된다. 항상 주의 상에서 앉아서 먹고 마시는 교제가 여러분 밥상에서 먹는 식이 되어야 한다. 왜 우리는 그분 앞에 감사 기도를 하니까. 그렇게 살아야지 어떤 영역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특별히 주일날을 교회가 주의 상의 교제에로 모이기 때문에 만일에 이 모임에 위배된 방식으로 하늘에 속한 새로운 교제의 방식에 위배된 방식으로 그 날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항상 교회가 주의 상에 하늘에 속한 교제로 모인다. 그리고 이제는 먹고 마심으로 염려하는 시대는 끝났다. 왜 부활의 시대가 왔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이날에 이런 저런 일을 뒤로 미루고 주의 교회가 몸의 교제로 모이고 우리를 사랑해서 몸을 주신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선물을 형제를 부양하는 몸이 지체로 살고 그런 하늘에 속한 새로운 생명의 기쁨으로 누려야 된다. 그러니까 앞으로 테으프 가져다가 예배하는 그런 시대는 없어지겠지요?
요새 아무리 신식 아들도 서울에서 나는 여기 식당에서 먹을 것이니까 아버지는 거기서 잡수세요 그런 식으로는 생일 잔치가 안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찬을 중심한 예배가 안되면 앞으로 비디오 예배고 녹음 예배고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변적인 종교적인 교훈을 될란가 몰라도 주의 상에서 함께 먹고 마시는 구체적인 삶의 능력을 나누는 그런 예배는 안된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모인 그 자리에서 주의 몸의 참여한 교제를 누려야 되지 그냥 얘기 없고 와서 아이 달래느라고 한참 정신없다가 아이구 오늘은 무슨 설교했는가 기억이 안 나니까 테이프 가져다 듣자. 아이 잠 잘 때 들으니까 이 말이구나. 은혜 받았구나 하고 그 때 찬송 부르고 은혜 받았다고 해서는 자기 아버지 생일날 가서 아이 보고 정신없다가 무엇을 좀 싸 주니까 이제 마음 차분히 밥 먹는구나 그것하고 똑 같은 식이 되어서 별로 좋은 일이 못된다.
예배는 모임으로 예배지 가서 설교 듣고 감동 받는 그 자체를 예배로 삼아서는 안된다. 여러분 식탁에서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는 것처럼 교회는 그런 식탁 교제로 모인 것이다. 그러니까 매주 성찬식을 행하고 그리고 예찬과 연결이 되고 그것이 구제와 연결이 되어서 마치 아버지의 기쁜 잔치에 가난한 자식들도 풍성히 먹을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옳다. 그것이 하나님의 안식일을 즐거워하고 성소를 공경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이다.
그런데 우리는 안 지켜도 벌을 칠 배나 더하는 이러 험악한 꼴을 본 사람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매를 실컷 맞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이 없다. 장성한 아들 취급하니까. 어렸을 때는 매 때려서 고친 식으로 이런 식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데 그 진노가 마무리 될 때는 이전에 매 맞는 것하고는 다르다. 그것을 명심하고 부활의 빛가운데서 신실한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
- 설교 : 김강호 목사
레위기 27장이다. 먼저 본문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그 다음에 해석하는 순서로 하겠다. 2절부터 8절까지는 서원하여 드리는 사람의 값에 대한 문제다. 사람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서원 하였으면 성소의 세겔대로 정가 해야 한다. 이 일을 제사장이 한다. 은 세겔로 한다. 20세부터 60세 까지는 얼마 이렇게 쭉 값이 있다. 그래서 60세 이상 남녀의 값을 각각 정해라. 값이 전부 다르다. 제일 비싼 사람이 20세부터 60세다. 그리고 가난한 자는 그의 형세대로 제사장이 값을 정하면 된다. 그 다음 9-14절에는 생축으로 드리는 서원물에 대한 규례다. 서원물로 드리는 생축은 거룩하기 때문에 바꾸지 못하고 바꾸면 둘다 거룩하다. 부정한 생축을 드릴려면 정가를 하고 무르려면 오분의 일을 더한다. 부정한 생축은 나귀 같은 것은 부정한 것이다. 14-15절은 집을 서원물로 드리는 경우다. 집을 드리려면 제사장은 정가하고 무르려면 오분의 일을 더해서 무른다. 16-25절은 밭을 서원물로 드리는 경우다. 자기 기업의 밭을 드리면 제사장은 정가하고 무르려면 오분의 일을 더한다. 만일에 무르지 않고 팔았으면 다시는 무르지 못하고 희년에는 여호와께 바친 성물이 되어서 제사장의 기업이 된다. 자기 기업의 밭이 아니라 사서 드린 밭은 희년에 본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26-27절은 생축의 첫 새끼와 부정한 짐승을 드리는 경우다. 생축의 첫 새끼는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서원물로 구별하여 드리지 못한다. 본래 여호와의 몫이다. 그리고 부정한 짐승이면 오분의 일을 더해서 속량하고 속량하지 않으려면 정가 해서 팔아야 되고 판 값을 드리면 된다.
28-29절에는 아주 바친 물건에 대한 규례다. 여호와께 아주 바친 것은 팔지도 속하지도 못한다. 바친 것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아주 바친 사람은 속하지 못하고 반드시 죽여야 된다. 죽이기 전에는 속량하는 방법이 없다 그 말이다.
30-33절은 산물의 십분의 일 (그러니까 곡식이나 과일)과 우양의 십분의 일에 대한 규례다. 땅의 산물의 십분의 일은 본래 여호와의 것이다. 그래서 십분의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면 된다. 그리고 우양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바꾸지 못하고 바꾸면 둘다 거룩하고 속하지 못한다. 결론적인 언어가 34절에 있다. 34절은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이라. 그 말로 끝맺고 있다.
해석이다. 그런데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가 요약한 글은 성경 본문의 맛이 없다. 알기 쉽게 내용만 요약해 버린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 내용을 이해하고 다시 본문을 읽어야 좋을 것이다.
해석이다. 언약의 대한 복과 심판에 말씀 후에 이르신 서원에 대한 규례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헌신케 하시는 언약을 확정하는 규례이다. 그러므로 26장과 같이 이상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이르신 계명이다 하는 말로 끝난다.
자 일반적으로 언약 체결의 방식은 나는 여호와다 이런 말씀을 쭉하고 그러니까 너희들이 이렇게 살아라 언약의 내용들을 말씀하고 제일 끝에 잘 들으면 복주고 안 들으면 벌준다. 그렇게 하면 끝난다. 그렇게 하고 끝난다고 하면 26장이 끝이다. 26장에 언약에 대한 복과 저주가 쭉 나와 있다. 만일 안 들으면 칠배 그래도 안 들으면 칠배 그 말이 나왔거든요? 그리고 잘 들으면 내 언약을 항상 너희와 함께 하고 너희를 성소 삼으셔서 함께 하시겠다.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러면 26장이 끝나는 말이다. 그래서 26장 제일 끝에 이상은 시내산에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모세와 세우신 규례와 율법이니라. 그런 말로 끝나고 있다. 그런데 27장에 덧붙여 놨다. 덧붙여 놓고 제일 끝에는 이상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이다. 이 말이 똑 같이 붙어 있다. 그리고 왜 이것이 언약 체결의 복과 저주가 나오면 끝인데 뒤에 더 덧붙여 있는가? 본래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는 교제의 삶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레위기다. 하나님이 성소에서 모세를 부르시면서 너희들이 나에게 예물을 드릴려면 이렇게 드려라. 너희가 부정을 입었으면 이렇게 하고 들어와라. 이런 여러 교제의 법칙을 주셨거든요? 그런데 제일 끝에다가 헌신에 대한 규례를 덧붙여 놨다.
그러니까 언약 체결을 마무리 짓고 나서 다시 한 번 언약의 헌신 문제를 확증하기 위해서 한 번 더 붙여 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자식에게 여러말 쭉 하고 나서 자식이 일어나서 갈려고 하는데 다시 불러서 알았냐? 그것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미 끝난 말인데 다시 한 번 더한 식이다. 그것에 해당하는 말이다.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보자. 제사장이 값을 정하는 이유는 백성이 여호와께 드린 것은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것을 제사장의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 그 중에 제일 특산물을 하나님의 상으로 가지고 나오도록 했다. 그것도 그냥은 가지고 나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여 피흘려서 가지고 나와야 했다. 그러니까 가나안 땅의 자기 백성의 삶은 아직도 저주 가운데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하나님 상에 바치려면 반드시 죽여서 드려야 되고 기름을 쳐서 드려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향기를 맡으시고 자기 제사장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그래서 값을 정한 것이다.
무를 때 오분의 일을 더하는 이유는 서원물은 온전히 드려진 것이어서 무를 때는 손해를 배상하라는 의미이다. 이전에 속건 제물을 보면 오분의 일을 더하라고 그랬다. 속건제물을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나 피해를 보상하는 규례인데 반드시 정가에 오분의 일을 더해야 하고 그리고 제물을 드려야 한다. 그것은 손해를 배상하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가지고 싶으면 제사장이 값을 정한다. 제사장의 것이니까 그래서 오분의 일을 더하면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제일 처음에 2-8절에 사람에 대한 서원을 보면 가난해서 서원 못할 사람이 없다. 하여튼 일 개월부터 60세 이상 조그만 갓난애부터 60살까지 또 그것을 정가를 제사장이 정한 값을 감당 못할 가난한 사람까지 모두가 헌신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남녀 노소 누구나 여호와께 서원하여 자신을 여호와께 드리며 드릴 때는 노동력을 따라 정가하고 가난한 자라도 형편대로 자신을 여호와께 드린다. 여기서 노동력을 따라 정가 한다는 말은 읽어보니까 20세부터 60세 까지는 힘이 제일 쌔고 그냥 단순히 해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가령 밭을 무를 때는 희년까지 몇 년남았는가? 그 때까지 얼마나 수확이 나겠는가? 그것을 계산해서 그에 맞춰서 값을 정한다. 그렇게 봤을 때 여기서 사람의 대한 값을 정할 때는 노동력을 따라 값을 정한다. 생산력을 따른 값이다. 그리고 생축의 서원물은 여호와의 것으로 거룩하기 때문에 바꾸지 못하며 바꾸면 둘다 거룩하다. 그런데 못 바꿀 것이 있다. 초태생은 바꾸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소나 양 그런 것을 드리면 그것은 못 바꾼다. 만일에 바꾸면 바꾼 것까지 거룩하기 때문에 둘다 그래야 된다. 그리고 아주 바친 것은 무르지 못한다. 아주 바친 사람은 속하지 못하고 반드시 죽인다. 그는 죽도록 봉사하며 죽음을 통해서 온전히 드린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 그러니까 느닷없이 가서 죽여 버리는가? 살인하라 그런 말이 아니라 무르지 못한다. 죽기 전에는 못 무른다.
그 다음에 정가하고 무를 수 있는 것은 어떤 경우냐면 사람도 드렸다가 무르고 어느 일정 기간 드리면 무르고 또 부정한 생축도 오분의 일을 더하면 무른다. 집 자기 기업의 밭 사서 드린 밭 부정한 짐승의 첫 새끼 땅의 소산의 십분의 일 이것은 드리고 오분의 일만 더 보태면 자기 것으로 다시 삼을 수가 있다. 그러나 바꾸거나 무르지 못할 것은 생축 우양의 십분의 일 무르지 않는 기업의 밭과 드린 밭을 다른 사람에게 판 경우 그리고 아주 바친 물건과 사람은 무르지 못한다. 그 의미들을 설명하겠다.
생축의 첫 새끼는 이미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서원물로 드리지 못한다. 아주 바친 사람은 속하지 못하며 반드시 죽인다. 이중에서 무르지 못한 것이 특징인데 첫째는 생축의 첫 새끼 그것은 본래 여호와의 것이니까 서원물로 드리지 못한다. 왜 본래 여호와의 것이다. 서원물로 드리지 못하고 그리고 아주 바친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된다. 서원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것은 온전한 헌신을 말한다. 다른 것도 드리는 것이지만 서원 해서 드리는 것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바쳐야 한다. 그러나 서원하여 바친 것도 오분의 일을 배상하면 무를 수 있고 무르면 다시 자기의 소유가 된다. 그러나 초생물과 아주 바친 것은 온전히 여호와의 것이며 무를 수 없다.
이러한 헌신의 복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온전케 하셨다. 자신의 몸을 온전히 헌신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교회는 몸으로 산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 교회는 살든지 죽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 몸의 지체로 살며 온전히 헌신되지 아니한 그런 영역이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규례는 하나님이 너희들 내 말을 잘 들으면 복주고 안 들으면 벌을 칠 배를 더할란다. 이 말로만 끝나서는 좀 불안하다. 그 뒤에다가 헌신에 규례를 붙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헌신을 받으신다는 확증을 붙여 주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것도 드린 것도 드린 것이지만 서원물은 서원을 갚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서원하고 그것이 성취되면 드리고 하기 때문에 여기서 온전한 헌신이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헌신의 규례를 마지막에 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자기를 서원케 하시는 보장이다.
그러면 구약 때는 서원해서 드리고도 만일에 그것이 욕심이 나던지 만일에 오분의 일만 배상하면 자기 것으로 다시 삼을 수가 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는 초생물이나 아주 바친 것이나 우양의 십분의 일 생축의 거룩한 것 그런 것은 바꾸지 못한다. 바꾸지 못할 것이 몇 가지 잇고 거의다 오분이 일만 더하면 바꿀 수 있다. 그러면 이것은 완전히 드린 것인가 드리지 못한 것인가? 완전히 드린 것은 무르지 못할 것에서 나타나 있다. 초생물 우양의 거룩한 것 아주 바친 것은 절대로 무르지 못한다. 거기서 온전한 헌신은 나와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오분의 일만 더하면 무를 수 있다. 그러면 다시 자기의 것이 된다. 그것이 구약에서 헌신하는 한계점이다. 심지어 나실인 서원도 일정 기간이 끝나면 자유하다. 제사장은 자유할 수 없다. 왜 평생 나실인이기 때문이다. 대 제사장 같으면 더구나 그렇다. 그는 일반 평민으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 그러나 백성이 나실인 서원을 하면 그 서원 기간이 끝나면 자유다. 그러니까 아직은 온전한 헌신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온전한 헌신은 초생물 첫 것은 항상 여호와의 것이다.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다. 그것으로 서원물을 삼으면 안된다.
그리고 아주 바친 것 그것도 하나님의 것이니까 다시 물러서는 안된다. 그러나 어느 일정 기간 바치면 제사장이 값을 정해서 무를 수가 잇고 또 오분의 일을 더하면 바꿀 수가 있다. 이것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헌신하는 규례다. 그런데 신약 때는 무를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의 초태생이요 모든 제물의 완성이시다. 그는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서원물로 드리셨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자기 몸을 드리셨고 예수님의 드리심 안에서 구약의 드림은 끝난 것이다. 예수님의 드리심에서 새로운 헌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구약 때는 제사장을 헌신함으로 백성들을 헌신하고 장자를 헌신함으로 남은 자를 헌신하고 십분의 일을 여호와의 것으로 삼음으로 나머지 십분의 구를 하나님께 드릴 때를 소망했다. 만일에 차자가 하나님 섬기겠다고 성전에 들어가면 죽는다. 장자만 들어가고 자기 마음대로 못한다. 그러면 차자는 절대 아닌가? 차자도 서원 예물을 드릴 수가 있다. 아주 드릴 수도 있다. 그러면 평생 무르지 못하고 거기서 살다가 죽어야 한다. 그러나 일정 기간 드리면 돈으로 계산하면 되고 오분의 일을 더하면 무를 수 잇고 그런다. 사람 대신에 돈을 드린 것이다.
이런 것이 잘못하면 중세 때 면죄부로 올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양 사람들은 감옥에 가는 대신에 돈 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식으로 돈 내서 풀면 난처하다. 그러니까 일반 법개념이 교회에 들어오면 난처한 것이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 때는 장자는 드려져도 차자는 아직 아니다.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어서 완전히 드려져도 나머지를 드리면 무를 수가 있다. 그러니까 구약 때는 아직 온전한 헌신을 주어져 있지 않고 제사장의 헌신에서 장자의 헌신에서 초태생의 헌신에서 그리고 아주 바친 것에서 하나님 앞에 드림이 약속되어 잇고 다른 것은 무를 수 있고 서원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에 대한 복과 저주를 말씀하고 나서 서원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에 백성으로 헌신케 하시는 보장이다. 그런데 구약 때는 아직 온전한 헌신은 아니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 십분의 구는 내것 그런 계산이 아니라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아직 그렇게 못 드린다. 장자만 하나님의 성소를 봉사하지 차자는 아직 아니다. 제사장만 성소에서 봉사하지 일반 백성은 아직은 아니다. 그렇게 처음 것을 드림으로 나머지 것을 드리는 소망 중에서 진행된 것이 구약의 헌신의 규례다. 그런데도 아직 제사장도 휘장밖에 있음으로 하나님의 지성소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이 죄의 질서 가운데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은혜의 제도였다. 그들은 이런 헌신의 규례를 통해서 꾸준히 하나님 앞에 서원 예물로 자기를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 때는 무를 수가 있다. 오분의 일만 배상하면 자기 것으로 가져갈 수가 있다.
그런데 신약 때는 그런 법이 없다. 예수님은 우리의 초태생으로 하나님 앞에 들어가셨고 그분의 헌신에서 새로운 헌신의 시대가 열렸다. 구약이 제사장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대 제사장안에서 새로운 헌신의 시대가 열렸고 새로운 교제의 시대가 열렸다. 구약 때는 대표 것으로 헌신했고 모세의 제도를 따라 헌신했지만 이제는 그런 규례가 없고 대표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전체로 다 드려져 있다. 여러분이 먹고 마시는 모든 삶에서 거룩하지 않는 영역이 없고 어느 때는 하나님 앞에 드렸다가 어느 때는 내 자유로 살았다가 그런 모세 규례적인 그런 방법이 없다. 먹든지 마시든지 앉든지 서든지 모든 것이 주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약의 서원의 규례가 완성된 것이다. 이제는 여러분이 십분의 일이 아니라 전체로 봉사해야 된다. 여러분 삶의 영역에서 거룩치 않는 영역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성찬식 예물은 떡과 포도주를 우리의 일상의 양식으로 주셨을 때 그것은 우리의 일상 양식을 축복하신 것이다. 구약 때는 성소에서 먹는 것과 성소밖에서 먹는 것이 다르다. 제사장이 먹는 것과 백성이 먹는 것이 다르다. 왜 아직 죄 때문에 거룩의 여러 간격이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좌에 오르심을 통해서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간격이 없고 그러기 때문에 제사장이 먹는 것과 백성이 먹는 간격이 없고 제사장이 백성이든 그런 간격도 없고 거룩하고 그렇지 않는 간격이 없다. 이제는 무를 수 없는 완전한 헌신이 주어졌다. 다 바친 것을 죽여라 한 것처럼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다. 무를 방법이 없다. 완전한 헌신으로 우리를 복주셨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식사할 때도 주의 몸에 피에 참여하는 의미로 감사 기도를 드려야 여러분이 신약 백성으로 먹는 것이지 교회에서 먹는 것은 거룩하고 집에서 먹는 것은 별것 없고 이런 식으로 기도해서는 그것은 구약보다도 못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교회에 낸 것은 거룩하고 그리고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은 거룩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여러분의 삶의 영역에서 주님을 떠나서 해석될 수 있는 영역이 하나도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 예수안에서 완전한 헌신 우리의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완전한 헌신의 복을 주셨다.
구약 때는 모세라도 이런 복이 없었다. 처녀가 형제를 사랑하면 어서 빨리 결혼하고 싶다. 그냥 만나고 헤어진 시간도 아쉽고 그런다. 그리고 꽉 매이고 싶고 그런데 처음에 시집가서는 그것이 자유다. 아무 염려가 없고 그런데 사랑이 식어지면 감독관이 집안에 하나 있다. 그래 가지고 왜 나는 자유가 없냐? 처음에 시집와서는 완전히 매인 것이 자유였다. 그리고 약혼 했을 때는 빨리 시집가서 매이고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무슨 철이 잘못 들었는지 왜 나는 자유가 없냐? 사랑의 능력이 없어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체를 자기의 것으로 서원의 예물로 맹세의 예물로 우리의 모든 것으로 봉사하게 한 것이 복이지 그것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떠나 있으면 그것은 온전한 복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의 몸으로 봉사하도록 그렇게 복을 받았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부부 싸움을 할 때도 내 개인적으로는 할말이 많소 그런 말을 하지 말라 그 말이다. 그런 개인적인 영역이 없어서 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서 보시는 관점에서 주님과의 관계에서 봉사해 줘야 한다. 그것만 성도의 거룩이고 자유다. 그것이 스트레스 해소고. 개인적인 영역이 많으면 많을수록 스트레스가 쌓일 것이다. 왜 성질 나는데 참고 있거든. 그런데 그리스도안에서는 그런 영역이 없으니까 자유롭다.
어떻게 성경을 읽어야 하는지 알겠지요?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서원 예물은 헌금 작정한 것만 서원 예물이다. 그것만 안내면 벌받을 것이다. 새벽 기도하고 일어나면 다 잊어버린다. 새벽 기도도 헌신이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겠나이다. 해 놓고 일어나서는 다 잊어버린다. 지금은 서원하고 않는 영역이 따로 있어서는 안된다. 전체가 서원적인 삶이어야 한다.
질문에 대한 답
시내산 언약은 출애굽기와 레위기기다. 출애굽기는 언약 체결 언약을 맺는 그런 내용이고 그 언약의 하나님이 성소에 계시기 때문에 성소를 짓도록 했다. 그리고 성소안에서 교제의 삶을 말하고 있는 것이 레위기다. 그 교통의 삶 그래서 시내산 말씀은 일단은 레위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십분의 일을 내야만 하나님 앞에 맞고 하는 말은 옳지 않다. 물론 십분의 일도 못 내니까 목사들이 갑갑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이고 우리는 감독관이 아니다.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내것이라고 해석해서는 전혀 안된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구제하든지 심지어 이방인에게 주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가 쓸 것이다. 우리는 감독자기 아니다.
그러나 구약 때는 모세 제도를 따라 헌신하고 더 이상은 못한다. 지금은 자기가 하나님의 대리자로 그 일을 해내야 한다.
만일에 아내에게 당신 알아서 하소 이것이 쉽고도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 친한 사람끼리는 계산이 제일 정확한 말이다. 알아서 하라는 말이 제일 좋은 말이다. 그런데 그런 가족 공동체가 아니면 알아서 하라는 말이 제일 갑갑한 계산법이다.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라는 말은 믿는 신자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말이고 아직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까지 해야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을 것인지 계산하고 있는 사람은 모를 이야기다. 여러분은 전체로 하나님의 대리자로 움직여 줘야 한다. 더구나 교회가 함께 모이고 복음을 위해서 수고 하니까 교회 봉사는 더 많은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교회 낸 것만 거룩하고 나머지는 급이 떨어지고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신약 시대의 삶이 아니다.
마누라에게 당신 일 한데로 월급을 주겠다 하면 그 때부터 마누라는 식모가 된 것이고 남편은 주인이 된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교회를 가르쳐서는 안되고 복음을 가르쳐서 복음적인 능력을 발휘하도록 해야 되지 감독관이 되어서 종교의식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만일에 누가 온다고 해서 자식을 훈련시키면 그것은 군대지 가족은 아니다. 만일에 자식이 인사를 잘 못하면 부모가 창피를 당할 것이다. 그래도 감사를 받듯이 그렇게 훈련해서는 못한다. 그러니까 교회를 어떤 목표 때문에 그것을 만들어 낼려고 해서는 안되고 자신들이 생을 헌신하도록 가르쳐 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다 안해도 자기는 해야 한다. 아들 열 명이 있는데 아홉 명은 아무것도 안 가져다 주면 막내가 아버지 생활을 책임져야 해야 되는 것이다. 나는 십분의 일 냈으니까 나는 괜찮고 아홉이 나쁘지요 그것은 못된 자식이다. 세금을 내면 그렇게 내면 된다. 자기 것만 내면 되니까 그러나 아들은 그렇게 내면 안된다. 왜 자기가 전부 책임을 져야 하니까. 누구하고 비교한 것이 아니니까.
이제 우리는 구약의 그런 어린아이의 멍에 모세 제도의 감독관을 따라 이런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자유 자로 온전히 헌신하는 완전한 자유 완전한 서원의 삶 맹세적인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예수님의 헌신 때문에 이 복을 주셨다. 새로운 헌신의 시대를 열어 주신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이제는 장자와 차자가 없다. 십분의 일과 십분의 구가 없고 전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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