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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면 살리라 (암 5:4-15)
산 개가 좋겠습니까? 죽은 사자가 좋겠습니까? 전도서 9장 4절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산 사람이 낫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낫겠습니까? 물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는 죽음이 천국의 입구이기에 더 좋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큰소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생애동안 살아가야 할 사람은 마치 죽은 동태처럼 사는 것보다 팔딱팔딱 뛰면서 생생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살다’(하야)라는 단어가 그런 것을 말해줍니다. 살아 있는 상태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지시키는(sustain life) 상태도 말해줍니다. 단순히 생명을 가지고 죽지 않고 산다는 의미도 있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떤 상태로 잘 사느냐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사는 것 같이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어요? 모두가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가뭄으로 살기가 힘들 때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불러서 살만하게 해주셨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창세기 45장 7절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이때 ‘생명을 보존하고’라는 말이 ‘하야’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숨만 겨우 유지시키지 않고 살만하게 해주신 것을 말합니다.
본문 4절에 사용한 말씀 가운데서도 이 ‘하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6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14절의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라는 말씀에도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살리라’와 ‘살려면’이라는 말씀이 바로 ‘하야’입니다. “사는 것 같이 살리라”, “사는 것 같이 살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사는 것같이 살려면 어떻게 하면 된다고 하였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선을 구하면 됩니다. 본문 말씀이 해결책을 제시해줍니다. 4절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6절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14절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우리가 살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고 선을 구하면 됩니다.
이때 ‘선’은 본문의 의미로 보아 ‘정의’로 여길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정의를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NKJV 성경에서는 “Hate evil, love good; Establish justice in the gate”라고 했고, NIV 성경에서는 “ Hate evil, love good; maintain justice in the courts”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쌍반점으로 불리는 세미콜론(;)은 앞말의 예를 들어 설명하거나 앞말에 대해 추가하여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선’이라는 표현을 ‘정의’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찾다’는 말씀과 ‘구하다’는 말씀은 동일한 단어입니다. 원어로는 ‘다라쉬’인데 ‘찾다, 구하다, 자주 가다, 시도하다, 탐구하다, 발견하려고 노력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그렇게 찾고 구하면 됩니다. 정의를 그렇게 찾고 구하면 됩니다. 우리가 힘써 여호와 하나님과 정의를 찾고 구하면 우리는 마침내 사는 것 같이 살게 됩니다. 이 은혜롭고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습니다.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소득 수준이나 지적 수준, 문화 수준 등 모든 수준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사는 것이 힘들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변질된 벧엘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이 말합니다. “벧엘을 찾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벧엘을 찾는다면 벧엘은 비참하게 됩니다. 삶이 비참하게 되는 것은 벧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사용한 ‘찾지’라는 단어도 역시 ‘다라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정의를 찾는데 사용해야 할 다라쉬가 그 반대를 찾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그 결과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살기가 편하십니까? 오늘날은 질서도 없고, 예의도 없고, 치안이 불안해지고, 불법은 점점 판치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살기가 힘듭니다. 의인일수록 더 힘듭니다. 열심히 착하게 살아도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범죄율도 점점 더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혼율도 올라가고 자살율도 올라가고 살인과 폭력도 더 올라갑니다. 심지어 동성애를 합법 결혼으로 인정하는 추세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나쁜 것이 점점 퍼지고 점점 더 올라가니 세상살이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더 깨끗하고 거리가 더 깨끗해져야 하는데 왜 모든 분야가 혼탁해지고 있습니까? 더 의로워져야 하는데 세상은 왜 더 어두워져갑니까? 이 모두가 ‘다라쉬’의 문제입니다. 올바른 것을 찾고 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분별력을 가지고 ‘다라쉬’를 신성한 곳에 사용해야 합니다. 올바른 것을 찾고 구해야 합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다라쉬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벧엘은 원래 신성한 좋은 장소였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야곱이 사닥다리의 환상을 보고 잠에서 깨어난 후 그가 베고 잔 돌로 기둥을 세웠습니다. 그 기둥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면서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창 28:10-22). 이후 야곱이 돌아오면서 우상을 버리고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단을 쌓았습니다(창 35:1-7). 그때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주셨습니다. 야곱은 그곳에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과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서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습니다(창 35:9-15). 이처럼 벧엘은 하나님의 집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신성한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신성한 벧엘이 그만 타락하고 변질되어버렸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 여로보암 1세는 벧엘을 북왕국의 주요 성소로 정해 예루살렘 성전에 도전했습니다. 그곳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우상을 찾고 섬겼습니다(왕상 12:25-33).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까지 우상숭배의 중심으로 남아있었습니다(암 3:14, 4:4). 여로보암이 엉뚱한 것을 찾고 구했기에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이 죽을 것을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경고했습니다. 이 일이 여로보암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땅 위에서 끊어져 멸망하게 되었습니다(왕상 13장).
그 후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경고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도 벧엘을 ‘벧아웬’이라고 부르면서(호 4:15)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벧아웬은 ‘죄악의 집’(house of iniquity), ‘악인의 집’, ‘우상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이 이제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우상의 집이 되었기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상을 찾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벧엘은 마땅히 찾아야 할 곳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타락하고 변질되어버린 벧엘을 더 이상 찾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이 악해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본문 7절은 말합니다.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단맛나는 불의는 가까이 하고 정의는 쓴 맛이 나는 것으로 여겨서 꺼립니다. 10절도 말합니다.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올바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오히려 멸시당하고 미움을 당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선한 사람이 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에 입을 다물기 시작합니다. 13절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이런 세상이 오고 있다면 세상이 악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오늘날 역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라쉬’의 문제입니다.
‘다라쉬’가 잘못된 세상에는 어떤 일이 닥칩니까? 반드시 사로잡히는 일이 발생합니다(5절). 악한 자에게 사로잡히고, 악한 나라에 사로잡히고, 악한 영에게 사로잡힙니다. 또한 비참하게 됩니다(5절). 자기 신세가 비참해지고 하는 일도 비참해집니다. 아무도 끄지 못하는 불이 임합니다(6절). 급한 불을 꺼야 하는데 꺼줄 사람이 없습니다. 강한 자에게 갑자기 패망이 이릅니다(9절). 아무리 부귀권세가 있어도 소용없습니다. 잘 살아보려고 유럽이 연합하고 유로화를 만들어도 쇠퇴합니다. 패망이 산성에 미칩니다(9절). 만리장성을 비롯해 안 뚫린 성이 없습니다. 보안도 뚫립니다.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여도 거기에 거주하지 못합니다(11절).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합니다(11절). 수고해도 수확하지 못하고 기쁘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찾지 않고 정의를 찾지 않으면 아무리 잘 살려고 해도 잘 살수가 없습니다. ‘다라쉬’가 잘못되면 앞서 말씀드린 재앙이 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 경제, 학업, 사업을 일으키려고 아무리 힘써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정의를 찾아야 합니다. 의식이 개혁되어 도덕심이 살아나야 합니다. 도덕심 없이는 공정한 경쟁을 보장받기 어렵습니다. 보안도 어렵습니다. 기밀이 누출됩니다. 물질의 풍요만이 나라 발전과 개인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정의를 세우는 것도 발전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급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정의가 없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11절 힘 없는 자를 밟습니다. 권력과 부와 지식이 없으면 어디를 가도 천대받습니다. 부당한 세를 거두어들이기도 합니다. 노동 착취, 부당이익, 부당이윤을 취합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벌려고만 합니다. 보이스 피시 등의 피해도 얼마나 큽니까? 12절 의인을 학대합니다. 의인을 존경하고 의인을 따르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깎아내립니다.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합니다.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듣고 돌이켜야 하는데 듣지 않고 오히려 핍박합니다.
오늘날은 사면초가의 세상입니다. 물질은 풍요해지는데 왜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집니까? 시설이 좋고 좋은 것을 먹고 마시는데 그때뿐입니다. 일류 호텔 같은 집에서 살아도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 곳에서 행복하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못 살겠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불행에서 탈출해서 행복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탈출하여 사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으면 살 수 있습니다(4,6,8). 하나님을 떠나면 살 길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더 잘 될 것 같고 더 잘 살 것 같습니다. 탕자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럴 때 회복되고 살 수 있습니다. 해결책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거십니다. 세상 만물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찾으면 삽니다. 앞서 말씀드린 재앙을 만나지 않게 됩니다. 사는 것 같이 살게 됩니다.
또한 정의를 세우면 됩니다(14,15). 선을 사랑하고 악은 미워하면 됩니다. 선을 찾고 악은 찾지 말면 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잘 분별하여 따르면 됩니다. 돌이킨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십니다(15절). 살게 해주십니다(14절). 그냥 겨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잘 삽니다. 앞서 말씀드린 재앙을 만나지 않고 행복하게 삽니다. 사는 것 같이 살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여기에다가 정의로운 생활을 더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의 파탄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모든 불행의 탈출구, 모든 행복의 입구는 무엇입니까? 길이 되시고 문이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통해 살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정의를 찾고 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정의의 주님이십니다. 이사야 32장 1절에 예고했습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42장 1절도 예고했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예레미야도 33장 15절에 예고했습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하나님은 이처럼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30장 18절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89편 14절 “공의와 정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잠언 2장 8절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정의의 하나님께서 정의를 사랑하십니다. 시편 37편 2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이사야 61장 8절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사랑은 감정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를 행하지 않는 것도 사랑입니다(고전 13:6). 정의를 행하여 해를 끼치지 않는 것도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고 손해를 입히십니까? 불의를 행하십니까? 주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정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정의를 친히 행하시고 그러한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레미야 9장 24절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잠언 21장 3절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정의가 얼마나 중요한지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정의를 행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실 정도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을 찾고 그 하나님께 돌아와 정의를 찾으면 용서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정의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에스겔서입니다. 18장 21절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18장 27절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33장 16절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 33장 19절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정의와 공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해를 끼치거나 불의를 행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정의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고 정의를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변질된 벧엘을 찾지 않고 정의의 하나님을 찾고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서로 사는 것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다라쉬’의 문제를 잘 해결받아 사는 것 같이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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