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려 상쾌하고 상큼한 아침입니다. 신선하고 따뜻한 아침 되시길 바랍니다.
5장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닮아야(본받는 자, imitator) 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희생제물이 되셨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파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것에 대한 묵상이 깊어질 수록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실천 부분은 어렵지 않게 다가올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는 그러한 것들이 의무가 됩니다.
음행(sexual immorality)과 온갖 더러운 것(any kind of impurity)과 탐욕(greed/covetousness)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행했던 일들이나 그리스도인이 된 후로는 가당치 않은 것들입니다. 누추함(obscenity)과 어리석은 말(foolish talk)과 희롱의 말(coarse joking)은 앞서 언급한 것들에서 파생되는 말과 행동들입니다. 모두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Obscenity는 음란한 말과 행동을 말합니다.
바울은 특히 탐욕을 우상 숭배와 동일시합니다. 골로새서 3장 5절과 같습니다. 한번 탐욕에 빠져들면 끝 모를 탐욕의 길을 걷게 되고, 그것은 마귀의 꾀임에 빠진 상태를 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웬만해서 빠져나오기 힘들어집니다.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영향력이 점점 더 줄어들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에 대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5장 8절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라는 것, 그 증거는 모든 착함(goodness)과 의로움(righteousness)과 진실함(truth)에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러한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사는 것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그릇된 행동을 억제하는 파급 효과를 일으킵니다. 그릇된 행동을 하며 사는 사람이 빛의 자녀로서의 길을 걷는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서 비추이는 빛으로 자신의 죄와 허물을 보게 되고, 찔림을 받아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 자체가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고 정도를 걷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반면 어둠의 일에는 열매가 없습니다(11절).
15-21절은 앞서 지적한 것들을 토대로 믿음의 길을 성실하게 걸어가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칫 곁길로 가다가는 세월이 아깝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17절 이후로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충만해야 할 것은 술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아닌 다른 것으로의 충만함은 성령의 충만함을 방해합니다. 돈 욕구와 성적 욕구와 권력 욕구 등이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각종 형태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피차 복종’이라는 덕목은 이후(5:22-6:9)에도 바울의 중요한 논점이 됩니다. 이 같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그리스도인이 갖춰야 할 아주 중요한 덕목이고, 이 시대 대한민국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22~33절에서 바울은 질서를 이야기하면서도 균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주께 하듯,”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하라고, 남편은 아내에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을 이야기하면서도 남편에게 보다 어려운 과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보통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은 사랑(25절)입니다.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고, 실제로 죽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하면서 교회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복종과 사랑으로 세워진다는 메시지가 함의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교회의 토대가 되고, 성도 간의 복종이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부부 만으로도 교회는 시작되고, 거기에 자녀들이 더해지고, 거기에 다른 부부와 자녀들이 더해지고, 계속해서 더 많은 가족이 더해져서 확대된 교회가 만들어집니다. 그리스도처럼 누군가는 사랑으로, 신부처럼 누군가는 복종으로, 또한 누군가에게는 사랑으로, 누군가에게는 복종으로, 이런 다양한 조합을 통해 교회는 세워져 갈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28절) 것이라는 말씀은 큰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결국 아내 사랑은 자기 사랑이므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내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도 사랑하고 있지 않은 사람인 것입니다.
6장
6장 들어 부모와 자식에 대한 조언에서, 바울이 자식에게는 3개의 절을, 부모에게는 1개의 절을 사용한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렇지만 내용상으로는 부모에게 한 권면이 훨씬 어려워 보입니다.
자녀에게는 단순하게 순종, 공경을 이야기했지만, 부모에게는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한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쉽지 않은 주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하라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차라리 단순하게 순종, 공경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녀들에게 그들이 잘 하면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Reward를 바라기 이전에 잘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무한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깨닫기 전까지는 잘 모르지만…
종과 상전의 관계에서도 바울은 종들에게 4개 구절로, 상전들에게는 단 1개 구절로 권면/명령합니다. 상전들에게 그들이 상전 만은 아니고 그들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충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과 상전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바울은 현실의 제도를 부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도 아무리 민주사회라고는 하지만 종과 상전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정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회사에서도 오너와 고용인의 관계가 그것입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어느 자리, 어느 위치에서 일을 하건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겸손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입니다.
10-20절은 흐름상으로 다소 어색해 보이기까지 하는 부분입니다.
바울은 아마도 앞부분에서의 자신의 권면들이 단순히 도덕적, 윤리적인 증진이나 개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은 영적인 전쟁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것은 전쟁이 한창 진행중일 때 내리는 명령입니다. 성도들이 처한 현실이 어떤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하나님이 지시하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야 할 무장을 가리킵니다.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영적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처지는 바울을 무척이나 노심초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진짜 상대는 두 말 할 것 없이 악의 영들입니다.
‘통치자들(머리가 되는 존재들), 권세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세상에 영향을 주고 그 흐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이들의 서열을 따지는 것보다 그들이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두 육체적 존재가 아닌 영적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을 입으라/취하라’가 두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강조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귀의 공격에 대해 방어(믿음의 방패)와 공격(성령의 검)을 병행해야 합니다.
18절을 통해 마귀에 대한 최고의 대응은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네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로 대응할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중구난방으로 기도할 수도 있지만 성령 안에서 기도하면, 나름 정돈된 상태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됩니다. 그것은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는 것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또한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공격하는 전략입니다. 이길 수 있는 최고의 전략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생각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전략과 전투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19절을 통해 그러한 싸움의 궁극적인 이유와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는 데 있습니다.
바울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항상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았습니다. 숭고한 삶입니다.
20절은 바울이 황제 앞에서의 재판을 기다리는 장소가 한 주택이었을지라도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23절,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
이 표현보다는 NIV 번역이 더 좋습니다.
Peace to the brothers and sisters, and love with faith from God the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성도들을 향한 평화/평안/평강과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평강이 함께 하시길 바라고, 또한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믿음과 어우러진 사랑이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첫댓글 주를 기쁘시게 할것이 무엇인가 어텋게 행할지 잘 분별하기를 원하며 지혜를 간구합니다
평화로워보이는 우리의 일상도 사탄이 호시탐탐 우리를 넘어뜨릴 기회를 엿보고 있는 영적 전쟁터입니다.(6:12) 하나님은 이 영적전쟁에 맞서 우리가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실뿐 아니라 그에 필요한 것들도 준비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진리와 복음, 구원의 말씀은 우리를 겁주고 흔드는 사탄앞에 우리의 마음이 약해지고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를 굳건히 지켜줄 것입니다.(6:13-17)
하지만 전신갑주도 입는 사람이 그 무게를 견뎌낼만큼 튼튼하고 무기에도 익숙해야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안에 거하고 자기힘대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에 의지할수록 강해집니다. 성령안에서 조명받으며 읽은 말씀이라야 그 검날이 날카로울 것입니다.(6:10,17)
오늘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며, 아내로, 남편으로, 자녀로, 부모로, 종으로, 상전으로…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자리에서 잘 설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기도합니다.(6:13,18)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과 나의 위치에서 역할을 감당하며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일에 대하여 생각해봅니다.
미디어를 통해서 또한 우리가 접하는 세상속에서 뿌려지는 물질과 세상적인 욕망에 대한 자극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성령안에서 기도하며 깨어 구하기를 항상 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피차간의 복종'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교회를 꿈꿔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