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5월입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타이틀 답게 거리에는 벌써 라일락 향기가 가득하고, 산은 신선함이 넘치고 있습니다. 가끔 맑은 공기를 마시러 가까운 야산이라도 산책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5장
바울은 디모데에게 나이 드신 어르신들을 아버지, 어머니처럼 대하라고 말합니다.
과거 우리 한국인의 정서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한 좋은 분위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특히 며느리와 시어머니 관계는 많이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시어머니들 며느리 눈치 많이 보지요.
바울은 5장에서 특히 과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5:2-16에서 그의 관심의 초점은 과부입니다. 과부라고 하면 공동체에서 고아와 더불어 대표적인 약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 과부는 홀로 된 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5:5)는 사람들로 정의됩니다.
5:10은 추가적으로 다음과 같은 요건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60세 이상일 것.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일 것. 그리고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을 것.
선한 행실의 증거란, 자녀를 양육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한 것을 말합니다.
너무 젊을 경우 다시 결혼을 하게 되면 서약을 어기게 되므로 사전에 제외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기로 한) 일을 게을리할 가능성이 있고, (아직 그럴 만한 에너지가 있어서?)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적격이라고 충고합니다.
반면 참 과부는 기도와 선한 행실(good works)로 교회 공동체를 건전하게 세워 나가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위해 기여한 과부에 대해서는 교회의 재정으로 지원해 주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해야 할 것은 과거 과부의 사회적 지위는 오늘날과 많이 달랐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정말 경제적으로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만큼 고대 경제는 취약했습니다. 요즘엔 70-80대도 마음만 먹으면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만 말입니다.
가족·친척이 있는 경우에는 교회에 부담을 지우지 말고 가족들이 스스로 그 짐을 맡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합니다.
5:8에서는 매우 강하게 그 의무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장로의 직임을 가진 사람에게는 존경을 표하고, 말씀과 가르침(preaching and teaching)을 담당하는 장로에게는 더한 존경을 표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만큼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역은 교회 사역의 핵심이고,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5:18은 레위기 19:13, 신명기 24:15, 신약에서는 마태복음 10:10, 누가복음 10:7 등을 근거로 합니다. 교회는 그러한 장로들에게 사례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그러한 사례를 받지 않았으면서 그러한 사례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대목입니다.
더불어 장로에 대한 고발은 보다 엄격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장로들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면 교회 근간이 흔들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그런 권면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치리에 있어서 편견이나 불공평(partiality, favorism)이 없이 임해야 한다고 강하게 충고합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교회는 큰 분란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치리자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 대한 치리일수록 더 엄격한 잣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능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안 하면 처음에는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문제가 됩니다.
22절에서의 임직에 대한 충고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임직은 교회를 위한 것인데, 이 임직에 원망과 시비가 생기면 교회는 한동안 홍역을 앓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담임 목회자는 기도 가운데 성령과의 깊은 교통 속에서 임직자를 선정해야 하고, 그들에게 안수해서 직임을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불편부당함이 없습니다. 결국 담임 목회자의 정결함이 이 일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do not share in the sins of others)라는 말은 성급하게 안수하지/직임을 맡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제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사람에게 안수하여 교회의 직임을 맡길 경우 그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23절은 약용에 한하여 포도주 사용을 허용하는 구절입니다.
24-25절은 다시 한번 신중한 안수를 당부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적임자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죄가 드러나면 낭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6장
성경은 노예 제도를 인정합니다. 물론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입장이 아닌 현실적인 측면을 받아들이는 입장입니다.
종은 주인을 잘 섬겨야 합니다. 질서를 위한 것입니다.
특히 상전이 믿는 사람일 경우에는 더 잘 섬겨야 합니다. 그 상전의 유익을 받는 사람들이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고, 그 상전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는 자들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 대해서는 항상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6:3-10에서는 이단적인 움직임과 욕심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의를 기울여야 세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잘못된 교훈/교리를 가르치는 자들,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건전한 가르침/지시(sound instruction)를 따르지 않는 자들, 셋째, 경건한 가르침(godly teaching)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 근본에는 욕심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6:5)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자족하는 사람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만족스럽습니다.
6:9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주입을 해서라도 무장해야 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집니다. 그 욕심은 사람을 “파멸과 멸망(ruin and destruction)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자족하는 사람에게는 시험과 올무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평강으로 인도됩니다.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욕심부리다가 결국 파멸과 멸망에 빠질 일을 사람들은 무던히도 추구합니다.
더욱이 그 욕심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게 합니다. 남는 것은 근심입니다. 결국 파멸과 멸망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결국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 합니다. ‘그 사람이?...’
자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다 보면, 처음에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지만 결국에는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빨리 끊어내지 않으면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서술 다음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을 권면(6:11-19)하는 것으로 그의 서신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자족하는 삶은 결국 영적 싸움을 통해서입니다. 힘으로, 능으로, 결심으로, 교육으로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Fight the good fight of faith)
운동 경기에서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헬라어 현재형의 의미를 살리자면, ‘계속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나가라’는 말입니다.
또한 “영생을 취하라”는 말은 ‘영생을 붙들어라’(take hold of the eternal life)는 말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할 때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어떻게?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without stain and reproach/blame)
6:15-16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묘사는 풍부합니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바울은 그의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물질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고 고민하며 싸우고 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물질은 우리의 영적인 자산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만한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을 경계, 또 경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재물을 “정함이 없는 재물”(wealth, which is so uncertain)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물질은 오늘 있다가 내일은 한 푼도 없을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분이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물질에 마음을 두거나, 물질을 모으는 데 온통 마음을 뺏기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6:18)어야 합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든든한 것입니다.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a firm foundation for the future)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may take hold of the life that is truly life)”입니다.
오늘도 말씀이 생명 되는 하루 살아 가시길 빕니다~
첫댓글 하나님이 비방받지 않기 위해 종들이 상전에게 존경을 보이고 자신의 일에 충실할 것이 기대되듯(6:1-2), 오늘의 직장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가지는 태도와 일하는 방식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가까이 이끌기도 하고 멀어지게도 하기 때문입니다.
정직과 성실함으로 이루는 성공, 건강하고 안정된 가정, 좋은 인간관계 등, 하나님을 믿고 경건을 연습할 때 모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선물처럼 주시는 것들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의 본질은 영원의 관점에서 참된 생명을 소망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에, 더 많은 명예와 재물 등 우리의 욕심을 부추기고 미혹하는 세상을 이기는 선한 싸움이 필요한 전쟁터이기도 합니다. 선한 싸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이 이 싸움을 더 어렵게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과 이 세상의 부를 향한 욕심에 대항한 이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으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6:3-19) 현재 우리가 가진 물질은 죽을 때 아무 유익도 없을테지만, 지금 나누고 베풂으로 영원의 삶을 준비하는데는 훌륭한 재료가 됨을 깨닫습니다.
두마음을 품지 않도록 하나님을 바라는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자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바울의 권면대로 선을 행하고 선한사업을 많이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많이 받아서가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족한줄을 알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볼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욕심을 내려놓고 자족하는 삶이 영적 싸움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 아멘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는 자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