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리아 (BC 912~609)
유래>
메소포타미아 북부 티그리스 지역에 존재하던 나라로 앗수르 또는 앗시리아라고도 한다. '아시리아'라는 이름은 처음으로 티그리스강 상류 지역을 부르는 지명地名에서 유래하였다. 이후 BC 2,000년경 세워진 고대 도시이자 수도였던 ‘아수르’에서, 또한 그들의 수호신 ‘아슈르(Assur)’라는 신명神名과 티그리스 강 상류 신전이 있던 신전 도시를 ‘아슈르’라고 하였다. 즉 지명地名에서 시작하여 신명神名,국명國名으로 다양하게 이용되며 기원되었다.
역사>
아시리아의 역사는 크게 초기 아시리아(2500–2025 BC), 구 아시리아(2025–1378 BC), 중아시리아(1392–934 BC), 신)아시리아 제국(BC 934/912–605 )으로 구분한다. 그중에서 제국으로 형성되고 가장 강력하고 잘 알려진 것이 신아시리아로 구약성경에 많이 회자된다. 아시리아는 기원전 10세기인 BC 912년에 일어나, 609년 바빌론에 멸망하기까지 400여 년간 세력을 유지하였다. 648년경 바빌론과 이집트령 일부를 정복해 고대 근동 최초의 통일 제국이 됐다. 후에 북부 메소포타미아 전체, 이집트, 아나톨리아까지 지배하는 큰 나라로 성장했다. 아시리아 본토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전체(남부는 바빌로니아)에 해당하며, 니네베(오늘날 이라크 모술)를 수도로 삼았다. 아시리아인들은 북쪽과 동쪽은 강이 자연적인 방어를 해주고 있어 남쪽과 서쪽에 방어벽을 구축해 도시를 방어했다.
팔레스티나*이스라엘 관계>
아시리아는 B.C 853년경 오른테스 강변 카르카르에서 전쟁 이후 100여 년간 지중해 연안의 팔레스티나를 넘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시리아 왕 티글랏 필에세르 3세(=풀.재위 BC 745 - 727)가 통치하면서 세력이 강화되었다. 그는 왕권을 찬탈한 후, 팔레스틴 소국들은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일차적 정복지는 팔레스티나 서남쪽이었다. 강력한 전차부대를 앞세워 메소포타미아, 북부 시리아를 장악했고 북쪽에 있는 지중해 연안 도시를 정복했다. 남쪽의 최종 지경은 이집트 정복이었다. 국제정세가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북 왕국 이스라엘은 마지막 황금시대를 보낸 여로보암 2세 이후, 5-6 대代에 걸쳐 왕권 찬탈이 반복되면서 급속도로 국력이 약화되고 있었다. 아시리아의 팔레스틴 침공과 이스라엘 침공과 멸망을 연대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1차 원정: 시리아 정벌(BC 854년) 시리아 북쪽 오른테스 강변 카르카르 전투,
아시리아왕 살만에세르 3세(BC 재위,859-825/4).
2차 원정:아람과 시리아 정벌( BC 745~732)/ 티글랏 필 에세르 3세(BC 재위 745-727)
3차 원정: 북 이스라엘 정벌
1) 이스라엘 므나헴 ( 재위 BC 743~747;2열왕 15,19), 티글라트-필에세르 3세(=풀'/재위 BC 745 - 727)가 침공하였다. 므나헴은 조공을 바치며 가까스로 정복을 피했다(2열왕 15,19-20).
2)이스라엘 임금 페카는(재위 BC 736~730,2열왕 15,29~) 반아시리아 정책을 폈다. 티글랏 필에세르 3세가 또다시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여러 성읍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아시리아 포로로 끌고 갔다(2열왕 15,29-30). 페카는 아시리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람국 르친과 동맹을 맺고, 이어 유다 임금 아하즈에게도 동맹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아하즈는 거부하고 친 아시리아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에 이스라엘와 아람이 연합하여 남유다를 침략하였으나, 아하즈는 친아시리아 지원군과 정책으로 선회하였다(2열왕 16장).
3)이스라엘 호세아 임금때(재위 BC 730~722; 2열왕17,1~6), 아시리아 왕 살만에세르 5세가(제위 BC 727-709) 1차 침공하였으나 조공을 바치며 멸망을 모면하였다. 그런데 호세아는 돌아서서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에 반역을 시도하였다. 아시리아가 재침하여 3년의 전쟁 끝에 722년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 살만에세르 5세는 이스라엘 포로들을 끌고 가 하라와 고잔 강 가하보르와 메디아의 성읍들에 이주시켰다(2열왕 17,3~6) 마침내 기원전 722년 사마리아는 함락되고 북이스라엘은 사라진다.(이스라엘을 망시킨 왕은 산헤립이라고도 한다)
<사마리아의 기원>
아시라아는 수많은 북이스라엘 포로들을 티그리스 강 북쪽 황무지로 이주시키고 다른 국가의 정복민을 사마리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것으로 사마리아가 정통성을 잃게 되었다. 사마리아로 옮겨온 이방인들은 정착해 원주민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동화될 수밖에 없었으며,이방인들은 이주해 올 때 자신들의 이교 신앙도 함께 가지고 왔기에 사마리아에는 혼합 종교가 생겼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 유다 사람들이 사마리아인을 경멸했던 것이다.
4차 원정:유다 정벌:
아시리아 왕 산헤립(재위 BC 704~681)이 히즈키야 왕 때인 713년경 유다를 침공하여 예루살렘 포위했으나, 이사야 예언자의 맹활약으로 위기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이사야는 아시리아를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의 도구로 보았다. 이점은 이사야의 보편적 신관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막대기는 나의 분노이다.”(이사10,5)
아시리아는 722년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여세를 몰아 사르곤 2세는(재위 BC 722~705), 아르메니아와 키프로스 섬까지 정복했으며 바빌론을 제압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705년 수메르와 전투에서 전사하여 그의 아들 산헤립이 뒤를 이었다(2열왕 18,13). 그 역시 정복 전쟁을 계속했고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종주국으로 행세하였다. 당시 유다의 임금은 히즈키야였고 예언자 이사야는 바람 같이 성쇠盛衰하는 강대국에게 의지하지 말고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예언으로 돕고 있었다. 기원전 681년경 산헤립은 자기 아들에게 암살당한다(2열왕 19,37). 이후 아시리아 급하게 내리막을 걷게 된다. 기원전 612년에 메디아와 바빌론 연합군이 수도 니네베를 함락하였고, 이어 기원전 610년 바빌론과 그 동맹국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라크·시리아·터키·이란에 옛 영토가 남아 있다.
참조
인터넷:위키백과 사전
굿뉴스;성경주석서;이병렬,이스라엘 왕정 망국사 p, 165~166 편집
입력: 최마리 에스텔 수녀,2024년 5월 12일 AM04:26
수정:2024년 7월 15일 PM 2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