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제별 요약은 원문과 함께 읽어야 좋습니다.>
제 121 편
미가엘이 자신을 수여했던 시대
121:0.1 예수 삶의 기록에 기록 배경
이 글은 유란시아 중도자 연합회 12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감독 하에서 한때 사도 안드레에서 부속되었던 2차 중도자가 나사렛 예수의 삶에 대한 사건들을 기록할 권한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글로 남기는 일을 의도적으로 피했고, 이를 알던 안드레가 자신의 기록을 여러 부의 사본으로 만드는 것을 또한 완강하게 거부했으며, 다른 사도들 역시 같은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복음서 기록이 크게 지연되었다.
1. 그리스도 이후 1세기의 서양
121:1.1 예수 탄생시의 유란시아 종교적 배경
예수는 영적으로 쇠퇴한 시대가 아니라, 유란시아 역사상 전례 없이 높은 영적 사상과 종교적 부흥이 이루어진 시기에 태어났다. 미가엘이 육신화했을 당시 세계는 창조 아들의 수여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그리스 문화와 언어의 확산은 새로운 종교가 서양과 근동 전반에 전파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또한 동서적 성격을 함께 지닌 유대 민족의 위치와, 지중해 세계를 비교적 관대하게 통치한 로마의 정치적 질서는 이러한 종교적 확산에 더욱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
121:1.2 바울의 영향력
모든 세계적 영향의 결합은 바울의 활동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종교적 교양 면에서 뛰어난 히브리인이었고, 또한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그리스어로 유대인의 메시아 복음을 선포하였다.
121:1.3 예수 시대의 유럽 문명 상황
예수가 살던 유럽의 문명은 특별한 세 가지 영향 밑에서 통일되고 조정되었다:
1. 로마의 정치 및 사회 제도.
2. 그리스 언어와 문화―그리고 어느 정도의 철학.
3. 급속히 퍼져나가는 유대인의 종교적ㆍ도덕적 가르침의 영향.
121:1.7 유럽의 해상 조건
예수 탄생 시, 지중해는 통일된 제국으로, 역사상 정비된 도로망이 주요 도시를 연결했다. 해적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무역과 여행이 급속히 발전하는 대규모 교류 시대가 열렸다. 이러한 조건은 이후 유럽이 19세기까지 누리지 못한 것이었다.
121:1.8 그리스·로마 제국의 불균형한 사회 구조
그리스ㆍ로마 세계는 평화롭고 번영했지만, 부는 소수 상류층에 집중되었고 대다수 민중은 빈곤에 시달렸다. 안정된 중간 계층은 거의 없었으며,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한 단계였다.
121:1.9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의 첫 충돌이 마무리되며 시리아가 로마의 지배에 들어갔고, 그 결과 예수 시대의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는 동서 교역이 활발한 번영과 평화의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2. 유대 민족
121:2.1 유대인의 위치
유대인은 바빌로니아인·페니키아인·카르타고인을 포함하는 셈족의 한 분파였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 초, 유대인은 셈족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이 되었고, 무역과 행정 면에서 전략적으로 매우 유리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했다.
121:2.2 팔레스타인의 교차로 역할
팔레스타인은 고대 국가들을 잇는 주요 도로들이 지나가는 곳으로, 세 대륙이 만나는 교차로였다. 수많은 군대와 상인, 여행자들이 이 땅을 통과했으며, 동방에서 온 카라반들은 지중해 항구로 이어졌다. 이 교통의 상당 부분이 갈릴리와 나사렛 인근을 지나갔다.
121:2.3 유대인의 세계 분산
팔레스타인은 유대 종교 문화의 중심지이자 기독교의 발상지였지만,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로 흩어져 로마와 파르티아 전역에서 무역 활동을 하며 살아갔다.
121:2.4 복음 확산의 기반
그리스는 언어와 문화를 제공했고, 로마는 도로와 제국 통합을 이루었다. 여기에 더해 유대인의 분산은 로마 세계 곳곳에 회당과 조직된 종교 공동체를 형성하게 했고, 이곳들이 복음이 세계로 퍼지는 출발점이 되었다.
121:2.5 초기 기독교
유대인 회당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소수의 이방인 신도들이 있었고, 바울은 이들 가운데서 초기 기독교 개종자들을 많이 얻었다. 예루살렘과 안디옥에서는 상업·문화·예배가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안디옥에서 바울의 제자들은 처음으로 “기독교인”으로 불렸다.
121:2.6 성전과 유대 일신교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를 집중한 것은 유대 일신교를 보존하는 핵심 요인이었다. 이는 만인의 아버지라는 하나님 개념을 유지·확장하는 기반이 되었고, 외세 지배와 박해 속에서도 종교 문화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21:2.7 메시아 기대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유대인은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마카비 가문의 구국 활동에 대한 기억은 민족적 자부심을 키웠고, 곧 더 위대한 구원자, 즉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를 고조시켰다.
121:2.8 팔레스타인의 우월 의식
팔레스타인이 반독립 유대 왕국으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동서 교통과 교역의 요충지를 장악하려는 로마의 대외정책 덕분이었다. 로마는 레반트 지역에서 잠재적 경쟁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실루시드 시리아와 프톨레미 이집트를 서로 견제하게 했고, 팔레스타인은 완충적 성격의 독립 국가로 유지되었다. 이집트의 몰락과 파르티아의 부상 속에서 실루시드 왕조가 약화된 것도, 소규모 유대 민족이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립을 지킬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자유를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선택된 민족’으로 여겼고, 이 우월의식은 훗날 로마의 직접 지배가 시작되었을 때 큰 저항과 혼란을 낳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사명을 정치적인 것으로 이해했고, 영적인 의미는 인식하지 못했다.
121:2.9 헤롯에 대한 불신
예수 시대의 유대인은 이두미아 출신 헤롯의 통치로 인해 더욱 경계심이 강했다. 헤롯은 로마에 아첨해 권력을 유지했으며, 유대 관습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이방 신들을 위한 신전들을 건설했다.
121:2.10 이동과 사상의 혼합
헤롯과 로마의 긴밀한 관계는 유대인의 세계 여행을 안전하게 만들었고, 이는 복음이 제국 전역으로 퍼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그의 통치는 히브리 사상과 헬라 철학이 더욱 깊이 섞이게 했다.
121:2.11 갈릴리를 포함한 헤롯이 건축한 여러 도시
헤롯은 가이사랴 항구를 건설해 팔레스타인의 국제적 중요성을 높였다. 그가 죽은 뒤,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예수의 성장기와 활동기 동안 갈릴리를 다스렸으며, 세포리스를 포함한 여러 도시를 재건했다.
121:2.12 갈릴리에 대한 불신
갈릴리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정통 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예수가 태어날 무렵 갈릴리는 유대인보다 이방인이 더 많은 지역이었다.
3. 이방인의 형편
121:3.1 미가엘 수여에 적합한 사회적, 경제적 조건
비록 로마 국가의 사회적, 경제적 조건에 의한 팔레스타인의 평화와 번영은 미가엘의 수여에 적합하였다.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 지중해 세계의 사회는 분명히 다섯 계층으로 구분되어 이루어졌다:
1. 귀족 계급. 돈과 공식 권력을 가진 상류 계급, 특권을 가진 통치 집단.
2. 상업 집단. 거상과 은행가, 무역상―큰 수입ㆍ수출상―국제 상인들.
3. 소규모의 중산층 계급. 이 집단은 규모는 작았지만, 초대 기독교 교회의 정신적 뼈대를 마련해 주었으며, 유대인 가운데 많은 바리새인이 이 상인 계급에 속했다.
4. 자유로운 노동자 계급. 이 집단은 아무런 사회적 지위가 없었다. 상류 계급은 그들을 경멸하였고, “번식” 목적 외에는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5. 노예. 로마국가 인구의 절반은 노예였고, 많은 우수한 노예들은 빨리 진출해서 자유 노동자들 계급이나, 무역상인들 계열에도 끼었다. 대다수는 평범하거나 아주 열등했다.
121:3.7 군사 정복의 특징인 노예 제도
노예 제도는 로마의 군사 정복의 특징이었다. 노예에 대한 주인의 권한은 무제한이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하층 계급과 이 노예들로 구성되었다.
121:3.8 능력 있는 노예들의 특징
우수한 노예들은 흔히 임금을 받았고, 소득을 저축해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해방된 많은 그런 노예는 국가ㆍ교회ㆍ상업계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다.
121:3.9 로마 제국의 사회 제도에 대한 인식
서기 1세기의 로마 제국에는 광범위한 사회 불만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난 사회 계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유능한 사람에게는 신분 상승의 길도 열려 있었다. 사람들은 계급 차별을 부당하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기독교 역시 억압 계층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 개혁 운동은 아니었다.
121:3.10 여성 인식에 대한 로마 제국과 유대인
비록 여성은 팔레스타인 보다 로마 제국 전역에서 더 많은 자유를 누렸지만, 유대인들의 가족적인 헌신과 자연스러운 애정은 이방 세계보다 훨씬 뛰어났다.
4. 이방인의 철학
121:4.1 이방 세계의 4대 철학
이방인들은 유대인보다 도덕적 면에서 다소 부족했지만, 기독교가 싹트고 영적 성취를 이루기에 충분한 인간적 선함과 애정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이방 세계에는 4대 철학이 유행했으며, 모두 플라톤 사상에서 어느 정도 유래했다.
1. 쾌락주의자(Epicurean 에피큐리언).
쾌락주의자들은 행복 추구에 전념했지만, 상급자들은 지나친 육욕에 빠지지 않았다. 이 사상은 인간이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음을 가르쳤고, 무지한 미신을 효과적으로 퇴치하였다.
2. 금욕주의자(Stoic 스토익).
금욕주의는 상류층이 주로 따른 철학으로, 인간의 혼은 신성하며 육체에 갇혀 있다고 보았다. 혼은 자연과 조화된 삶으로 자유를 얻으며, 미덕은 그 자체로 보상이었다. 그러나 금욕주의는 종교가 될 수 없었고, 하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바울도 이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족하기를 배웠노라”하고 기록했을 때, 금욕주의에 깊이 젖어 있었다.
3. 견유학파(Cynic, 시니크).
견유학파는 단순과 미덕을 강조하며, “사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교리를 전파했다. 이들은 민중 속에서 활동하며, 후일 기독교 선교사들이 전파할 메시지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들의 설교 방식은 바울 편지와 유사했다.
4. 회의주의자(Skeptic, 스켑틱).
회의주의는 지식은 불확실하고 확신은 불가능하다고 가르쳤으며, 순전히 부정적 태도로 인해 널리 퍼지지 않았다.
121:4.6 4대 철학의 문제점
이 철학들은 대체로 종교적 기능을 하며 사람들에게 윤리적 활력을 주었지만, 서민에게 구원을 제공하지는 못했다. 견유학파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강자와 지혜로운 자를 위한 철학이었다.
5. 이방인의 종교
121:5.1 종교의 중심
이전 시대의 종교는 개인이 아니라, 주로 부족이나 국가 중심이었고, 그러한 종교는 개인의 영적 갈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121:5.2 예수의 시절에 서양의 종교
1. 이교 종파: 헬라인과 라틴족 신화와 전통이 혼합된 신앙.
2. 황제 숭배: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불쾌감을 주며 박해의 원인이 됨.
3. 점성술: 바빌로니아에서 유래, 20세기까지 영향.
4. 신비 종파: 개인적 구원을 약속하며 하류 계층에게 받아들여짐. 이러한 신비교는 기독교가 퍼지도록 길을 준비했다.
121:5.7 신비교의 영향
신비교는 민족적 제약이 없고, 개인 중심의 다양한 종파를 만들었다.
1. 어떤 신화 같은 전설, 즉 신비―여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한다. 신화적 이야기(죽음·부활 등)를 중심으로 삼았다. 이 미트라교는 한동안 바울이 세운, 팽창하는 기독교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고, 함께 자리를 다투었다.
2. 신비교들은 종족을 초월하였고, 종교적 형제애를 나누는 종파였고, 종교적 친목 사회와 수 많은 종파들이 생겨났다.
3. 이들의 예배는 정교한 입회 예식, 인상적인 성찬식의 특징을 가졌다. 이들의 비밀 의식과 예식은 때때로 섬뜩하고 혐오스러웠다.
4. 그러나 이 신비교들은 변함없이 신도들에게 구원, “악으로부터 구원받고, 사후에 살아남아 행복한 나라에서 오래오래 살 것”을 약속했다.
121:5.12 신비교와 예수 복음의 차이점
신비교와 예수의 가르침을 혼동하면 안 된다. 신비교는 인간의 생존적 욕구를 반영했을 뿐, 진정한 영적 만족을 주지 못했다. 대신 예수의 출현을 위한 길을 예비했으며, 그는 생명의 빵과 물을 가져왔다.
121:5.13 바울의 종교 타협
바울은 신비교에 익숙한 이방인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예수의 가르침을 일부 조정했다. 그러한 타협안도 신비교보다 우수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도덕과 윤리적 삶을 강조하고, 마법적 예식 행위를 제거했다.
2. 인간 문제에 대한 궁극적 구원과 죄 사함을 제공했다.
3. 신화를 넘어 역사적 사실(미가엘, 하나님의 아들)에 근거했다.
121:5.17 종교와 도덕성
이방 사회에서 도덕은 철학이나 종교와 항상 연결되지 않았다. 유대교와 이후 기독교는 최초로 도덕과 윤리를 모두 강조하며, 종교인이 이를 실천하도록 요구했다.
121:5.18 예수의 복음
복잡한 철학과 종교가 혼재한 시대에, 예수는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개인적 종교, 즉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가르치는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6. 히브리 종교
121:6.1 헬라화된 유대 사상의 확산
기원전 1세기 말, 예루살렘의 종교 사상은 그리스 문화와 철학의 큰 영향을 받아 변화했고, 히브리 사상 내부의 동·서 학파 갈등 끝에 예루살렘과 서양·레반트 지역은 헬라화된 서부 유대 관점을 받아들였다.
121:6.2 그리스어가 이끈 기독교의 서방 확산
예수 시대 팔레스타인에서는 서민은 아람어, 종교 지도층은 히브리어, 교육받은 유대 상류층은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일로 그리스파 유대 사상이 우세해졌고, 기독교 문헌도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이는 바울의 기독교가 동양이 아닌 서양으로 확산되는 데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121:6.3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의 결합
헬라화된 유대인들은 쾌락주의보다는 플라톤 철학과 금욕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이는 「마카비 4서」와 「솔로몬의 지혜서」에 드러난다. 그들은 히브리 성서를 우화적으로 해석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조화시키려 했고, 이 과정의 혼란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그리스 철학과 히브리 신학을 하나의 체계로 종합함으로써 정리되었다. 이러한 결합 사상은 예수 시대 팔레스타인에서 유행했으며, 바울은 이를 바탕으로 보다 발전된 기독교를 형성했다.
121:6.4 사상 통합자로서의 필로
필로는 모세 이후 서양의 윤리와 종교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위대한 스승이었으며, 당대의 윤리·종교 사상에서 핵심 요소들을 통합한 뛰어난 인물로 세타드, 모세, 조로아스터, 노자, 부다, 바울과 함께 일곱 명의 위대한 인간 선생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121:6.5 바울과 필로의 신학의 다른 점
바울은 그리스 신비주의·로마 금욕주의와 히브리 율법 신학을 결합하려다 생긴 필로의 사상적 부조리를 상당 부분 인식하고 이를 자신의 기독교 이전 신학에서 제거했다. 필로는 바울이 유대 신학에 잠재해 있던 삼위일체 개념을 회복하도록 이끌었으나, 바울은 속죄 교리에서는 필로를 넘어서지 못했다. 필로는 피의 희생 없이도 용서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생각 조절자의 실재도 더 명확히 인식했다. 반면 바울의 원죄·속죄 교리는 일부가 미트라교에서 기원했으며, 히브리 신학·필로 철학·예수의 가르침과는 공통점이 적고, 그중 일부는 바울이 독자적으로 구성한 사상이었다.
121:6.6 요한복음에 필로가 끼친 영향
요한복음은 예수의 지상 생애 후반을 다루며 서양 민족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고, 알렉산드리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관점, 특히 필로의 가르침을 지지하던 이들의 사상이 크게 반영되어 편집되었다.
121:6.7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박해와 회복
그리스도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며 박해가 로마까지 확산되어 많은 유대인이 추방되었으나, 이러한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고 제국 정부는 곧 유대인의 제한된 자유를 전 제국에 걸쳐 회복시켰다.
121:6.8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 신앙
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어디에 있든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신앙적 일체감을 유지했으며, 바빌로니아 학자들의 위기 대응에도 불구하고 유대 신학은 예루살렘에서 해석되고 실천된 형태를 기준으로 보존되었다.
121:6.9 예루살렘의 메시아 신앙
약 250만 명에 이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동서의 신학·철학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교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고, 예루살렘을 예배의 중심으로 삼으며 메시아의 도래를 한결같이 기다렸다.
7. 유대인과 이방인
121:7.1 예수 시대 유대 신학의 교리화
예수 시대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방인과 철저히 구분하며 배타적 태도를 보였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숭배하고 혈통적 우월감에 근거한 독선에 빠졌으며, 민족적·역사적 틀 안에서 메시아를 기대했다. 이로 인해 당시 유대 신학은 이미 고정되고 경직된 체계가 되었다.
121:7.2 유대인의 배타성
예수의 관용과 친절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배타적 태도와 정반대였다. 유대인들은 여러 세대 동안 이방인을 영적 형제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방인과 동등하게 야훼를 섬기는 것을 꺼렸으며, 그런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121:7.3 율법과 전통에 얽힌 유대 사회
서기관, 바리새파, 성직자들은 유대인을 로마 통치보다 더 엄격한 율법과 전통적 규율 속에 가두었다. 예수 시대 유대인은 율법과 전통적 사회 규범에 철저히 묶여 있어, 이를 위반하는 사람은 즉시 배척되었고, 아브라함과 모세로부터 이어진 교리와 충돌하는 가르침은 용납되지 않았다.
121:7.4 율법 해석 권위와 복음 저항
그리스도 이후 1세기에는 유명한 선생과 서기관들의 율법 해석이 기록된 율법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대 지도자들은 새로운 복음을 거부하도록 사람들을 쉽게 결집시킬 수 있었다.
121:7.5 전통에 갇힌 유대 종교와 종교적 진화의 서구 확산
유대인들은 전통의 구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이로 인해 종교적 자유와 영적 해방을 이룰 수 없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 시편 저자는 내면에서 율법과 영의 변화를 기도했으나, 유대 종교는 전통에 갇혀 침체되었고, 결국 종교적 진화는 서양 유럽 민족들에게 넘어갔다.
121:7.6 바울이 형성한 복음 확산
진보적인 신학을 전하는 새로운 민족이 부름을 받았고, 그들은 그리스 철학, 로마 법, 히브리 도덕, 예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바울이 형성한 복음을 전파했다. 이 복음은 인간의 성격과 영적 해방의 신성을 주장하는 메시지였다.
121:7.7 유대·그리스 철학의 융합한 바울의 교리
바울의 기독교 교리는 유대교의 도덕성을 기반으로 했으며, 유대인들은 역사를 하나님의 섭리로 보았다. 그리스인들은 영생에 대한 더 명확한 개념을 가졌고, 바울의 교리는 예수의 가르침뿐 아니라 플라톤과 필로의 영향을 받았다. 윤리적으로는 그리스도와 금욕주의자들의 가르침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121:7.8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다음 가르침들과 혼합했다:
1. 유대교로 전향한 그리스인들의 철학 논리 : 영생 개념을 어느 정도 포함.
2. 신비주의 종파들의 가르침: 대속, 속죄, 구원을 이루는 미트라교의 교리.
3. 자리 잡힌 유대 종교의 탄탄한 도덕성.
121:7.9 예수 시대의 신비적 세계관
예수 시대의 로마 제국과 파르티아 왕국 등 주변 민족들은 지리, 천문, 건강, 질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원시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사렛 예수의 선언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은 모든 사물에 영이 깃들어 있다고 믿으며, 마법과 기적이 흔한 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8. 이전에 쓰여진 기록들
121:8.1 예수의 삶과 복음서의 활용
우리는 유란시아에서 예수의 삶에 대한 기존 기록을 가능한 한 의무와 일치하도록 활용하고 조정하려고 노력해 왔다. 사도 안드레의 잃어버린 기록에 접근할 기회를 가졌으며, 예수의 성격을 조절하는 하늘 존재들의 협조를 받으면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등 복음서도 함께 활용하고자 했다.
121:8.2 신약 기록들의 기원은 다음과 같다.
1. 마가복음의 기원과 형성 과정
마가복음은 예수의 생애에 대한 가장 짧고 단순한 기록으로, 마가가 시몬 베드로의 요청을 받아 로마 교회를 위해 쓴 것이다. 마가는 초기에는 글로 예수의 가르침을 기록하는 것에 주저했으나, 베드로의 부추김과 교회의 필요로 인해 이를 맡게 되었다. 마가복음은 67년, 베드로가 죽기 전에 초안이 작성되고, 68년 말에 완성되었다. 마가는 자신의 기억과 베드로의 기억을 바탕으로 기록했으며, 이 복음은 후에 수정되고 구절들이 삭제되었다. 마가복음은 후속 복음서들에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2. 마태복음.
마태복음은 유대인 기독교 신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예수의 일생을 기록한 것이다. 저자는 예수의 많은 행적이 "선지자들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며,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묘사하고 율법과 선지자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121:8.5 마태복음의 실제 저자와 그 기원
마태복음은 실제로 사도 마태가 쓴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 이사돌이 쓴 것이다. 이사돌은 마태의 기억과,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마태가 아람어로 쓴 기록을 바탕으로 복음을 작성했다. 마태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당시 제자들이 스승에게 명예를 돌리는 관습에 따른 것이었으며, 속임수의 의도는 없었다.
121:8.6 마태의 초기 기록 소실
마태가 처음 쓴 기록은 서기 40년에 예루살렘을 떠나기 직전에 편집되었으며, 이 기록은 나중에 다른 내용들이 첨가되었다. 초기의 마태 기록은 사사적인 성격이었으며, 그 마지막 사본은 서기 416년 시리아의 한 수도원이 불타면서 사라졌다.
121:8.7 이사돌의 마태복음
이사돌은 서기 70년 디도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한 뒤 도시를 떠나 마태의 기록 사본을 펠라로 가지고 갔다. 71년에 펠라에서 살며, 이사돌은 마태복음을 작성했으며, 마가복음의 처음 5분의 4를 참고하여 이를 바탕으로 복음을 썼다.
3. 누가복음의 저자와 그의 복음서 작성 과정
누가는 피시디아 안티옥에서 살던 의사로, 바울에게 개종한 이방인이다. 서기 47년에 바울을 따르며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을 듣고 기록을 시작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 많은 부분을 기록했다. 그는 예수를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 묘사하며, 바울이 죽을 때까지 복음서를 완성하지 않았다. 누가는 82년에 복음서를 썼고,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역사를 다루는 세 권의 책을 계획했으나, "사도들의 행적"을 마치기 전인 서기 90년에 사망했다.
121:8.9 누가 복음. 누가복음의 자료와 그 근원들
누가는 복음을 편집하는 데 바울이 전한 예수의 일생 이야기를 주요 자료로 사용했으며, 이로 인해 누가복음은 바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복음이다. 그러나 누가는 또한 예수의 일생에 대한 여러 증인들의 진술을 수집하고, 마가복음, 이사돌의 이야기, 세데스의 기록, 그리고 안드레가 썼다고 주장되는 편집된 기록들을 포함한 다양한 자료를 활용했다.
4. 요한복음. 요한복음의 작성 과정과 요한의 역할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없는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며, 주로 예루살렘과 그 주변에서의 사건들을 다룬다. 이 복음서는 비록 요한이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요한이 그 기록을 독려하고 여러 번 편집하여 마치 그가 쓴 것처럼 만들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를 참고하고, 101년에 그리스계 유대인 동료 나단에게 글을 쓰도록 격려했다. 요한 1서는 요한의 지도를 받은 나단이 작성한 것이다.
121:8.11 역사적 변화를 이끈 복음서의 영향
복음서의 저자들은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보고 기억하거나 알게 된 대로 진솔하게 기록했으며, 이 기록들은 바울의 기독교 신학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비록 어설픈 부분도 있었지만, 이 기록들은 거의 2천 년 동안 유란시아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1:8.12 인정하는 말씀: 예수의 가르침 기록을 위한 정보 출처와 조정 노력
나는 나사렛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아, 가능한 한 인간의 기록과 정보를 우선 사용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초인간적 기록을 참고했다.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을 전하기 위해 인간적인 개념과 표현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며, 필요한 정보가 부족할 때는 중도자들의 기억 자료와 외부 행성의 정보를 사용했다.
121:8.13 예수의 가르침 기록을 위한 인간적 정보와 계시의 사용
나는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사도 안드레의 기록을 제외한 많은 메모들을 수집하여 예수의 가르침에 관한 보석 같은 생각과 우수한 개념을 담았다. 이 메모들은 2000명이 넘는 인간들로부터 수집된 정보로, 인간의 기록과 개념이 부족할 때 계시를 사용했다. 계시 위원회는 가능한 한 인간의 개념 표현을 사용하려 했으며, 그 범위를 넘는 정보나 표현은 사용하지 않도록 제한했다.
121:8.14 예수의 삶 기록을 위한 수집과 편집 작업, 중도자들의 기여
[나는 중도자 11명과 함께 일하면서 멜기세덱의 감독 아래 예수의 일생을 기록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세대와 다양한 종족의 사람들의 생각에서 기원을 가졌으며, 저자는 독창적인 이야기꾼보다는 수집하고 편집하는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가장 효과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인간다운 생각과 표현을 사용하며, 이 과정에서 유란시아 연합 중도자들에게 빚진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