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신과 같이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니까 시에도 대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방론의 관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모방론은 대상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것인데, 얼마나 본질을 잘 드러내느냐가 관건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다 같이 모방론적 입장에서 시를 보았지만, 플라톤은 시가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것으로 부정적 측면으로 파악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개연성 있는 허구라는 관점에서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입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 시가 역사보다 더 본질에 닿아 있는 것이, 역사는 이미 있던 세계, 일어나고 있는 세계를 그려내지만, 시는 있을 수 있는 세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모방론의 관점에서 시를 본다는 것은 세계를 반영, 재현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렇더라도 아무렇게나 세계를 모방한다고 그것이 다 시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먼저 중요한 것은 시적 진실을 얼마나 잘 드러내느냐에 달려 있다.
모방론이라는 것을 좀더 극단적으로 끌고 가면, 시라는 것은 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세계에서가 아니라 시인이 시적 감흥을 느낀 대상에서 나온다. 이런 경우 대상(사물)은 전경화되고, 시인이나 독자 같은 나머지 것들은 모두 후경화된다.
일반 문자시에서의 모방은 문자로만 하는 것이지만 디카시는 시적 형상을 디카로 찍어 이미지로 가져와서 문자로 다시 옮기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시적 형상을 거의 손상 없이 그대로 재현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디카시의 재현 능력은 문자시보다 우세하다 할 것이다.
시인에게 포착된 세계가 완벽한 시적 형상으로 드러나는 경우, 거기에 시인의 생각이 개입할 틈은 없고 단지 시인은 그걸 시로 명명하는 에이전트의 역할로 머무는 것이다.
“디카시의 화자는 사물의 말, 신의 말씀을 대언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디카시는 사물의 말, 신의 말씀을 읽고 전달하는 것이라고 단정해도 좋다. 이것이 디카시의 본질적 국면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넓은 의미의 디카시는 이것만으로 제한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디카시는 사물, 자연, 아니면 그 외의 사건 등 외부세계에 투영되어 있는 삶의 진실, 존재의 본질, 신의 의지 등을 읽어내는 것이다. 사물, 혹은 자연, 혹은 사건에 내재한 의미를 대언하는 기능이 디카시의 주 기능으로 부각되는 셈이다.
사물이나 자연은 입이 없다. 그것은 신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래서 신은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을 하셨고, 바람소리나 뇌성 나아가 만물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 아닌가.
디카시의 화자는 사물의 입이다.
자연의 입이다.
때로는 신의 입일 수도 있다.
아, 이것이 디카시의 주기능이다.
물론, 그 외의 기능도 없지 않을 터이지만...”
디카시에 있어서 에이전트라는 의미에 대해 내 생각을 2005년 메모해 두었던 것이다. 이 말은 결국 대상 사물이 주체가 되고 시인은 객체가 된다는 것이다. 시의 주도권이 시인에게서 사물에게로 옮겨진 것이라 해도 좋다.
글 : 이상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