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드의 노래》
《나의 시드의 노래》(Cantar de mio Cid)는 카스티야의 기사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 곧 ‘엘 캄페아도르’의 말년을 자유롭게 각색하여 영웅적 위업을 노래한 작자 미상의 무훈시다. 오늘날 전하는 판본은 현대 학계의 다수 견해에 따르면 1200년 무렵에 성립했다.[1][2]
이 작품은 스페인 문학 최초의 장편 운문 작품이며, 거의 완전하게 보존된 유일한 카스티야 서사시다. 원본 첫 장과 고문서 내부의 두 장만 소실되었고, 그 공백의 내용도 특히 《스무 왕의 연대기》 같은 연대기의 산문화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같은 장르에서 남은 다른 작품은 약 1360년의 《젊은 로드리고》 1,700행, 약 1270년의 《론세스바예스의 노래》 약 100행, 그리고 1400년경으로 추정되는 로마네스크 성당의 짧은 비문 《시드의 서사시적 묘비명》뿐이다.
이 작품은 문학뿐 아니라 지성사에서도 중요하다. 19세기 말 라몬 메넨데스 피달이 이 시를 연구하면서 당시 문헌학의 가장 강력한 방법인 역사비평적 방법을 처음 적용했고, 이를 계기로 스페인에서 근대 과학으로서의 문헌학이 출발했기 때문이다.[3]
시는 길이가 일정하지 않은 3,735행으로 이루어졌다. 14~16음절 시행이 많고, 각 시행은 카에수라를 사이에 둔 두 반행으로 나뉜다. 반행은 보통 3~11음절이며 작품 운율의 최소 단위다. 시행은 연이 아니라 하나의 모음운을 공유하는 길이 불정의 연속행으로 묶인다.
원래 제목은 알 수 없지만, 작가는 1085행에서 “여기 비바르의 나의 시드의 게스타가 시작된다”, 2276행에서 “이 칸타르의 시행은 여기서 끝난다”고 했으므로 아마 gesta 또는 cantar라고 불렀을 것이다.
줄거리와 구조내부 구조
작품의 중심 주제는 영웅이 잃은 명예를 되찾아 출발점보다 더 높은 명예에 이르는 복합적인 과정이다. 혈통과 궁정에 기대는 레온의 대귀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 세습이 아니라 자신의 공로와 전투로 지위와 명예를 얻은 하급귀족을 찬양한다.
시는 왕의 분노(ira regia)로 인한 시드의 추방에서 시작된다. 거짓 중상모략 때문에 내려진 부당한 처벌로, 비바르의 영지와 재산을 빼앗고 가족에 대한 친권마저 박탈한다. 시드는 카스테혼과 알코세르를 정복하고 돈 레몬트 백작을 무찌른 뒤 발렌시아 타이파 왕국과 도시를 얻는다. 용기·지략·신중함만으로 왕의 용서를 받고, 회복된 옛 영지에 새 영지인 발렌시아 영주령까지 더한다. 봉신을 거느린 영주라는 새 지위를 굳히기 위해 딸들을 명문 카리온 왕자들과 혼인시킨다.
그러나 카리온 왕자들이 두 딸을 모욕하고 채찍질하여 중상을 입힌 뒤 코르페스 참나무숲에 버리면서 시드의 명예는 다시 추락한다. 중세법상 이는 사실상의 아내 유기였다. 시드는 왕이 주재하는 재판에서 혼인 무효를 주장하고, 왕자들은 공개적으로 불명예를 입어 왕실 측근의 특권을 잃는다. 반대로 딸들은 스페인의 왕가와 다시 혼인하여 시드는 가능한 최고의 사회적 상승을 이룬다.
따라서 내부 구조는 명예의 획득―상실―회복―재상실―재회복이라는 두 곡선으로 이루어진다. 첫 곡선은 추방에서 왕의 용서와 대귀족과의 혼인까지이며, 두 번째는 딸들의 치욕에서 재판과 왕가와의 혼인까지다. 두 번째 회복은 첫 번째보다 훨씬 높은 곳에 이른다.
외부 구조
1913년 메넨데스 피달 판본 이래 편집자들은 작품을 세 노래로 나눈다. 이는 후글라르가 서사시를 세 차례에 걸쳐 낭송하기에 적절한 구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작품 속 1085행과 2276행의 경계 문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제1가: 추방의 노래(1~1084행)
세비야에서 징수한 조공을 횡령했다는 거짓 고발을 받은 시드는 알폰소 6세에게 카스티야에서 추방된다. 알바르 파녜스, 페드로 안수레스, 마르틴 안톨리네스, 페드로 베르무데스 등이 그를 따른다. 안톨리네스는 식량을 대고, 로드리고가 조공을 가로챘다는 소문을 이용해 유대인 라켈과 비다스에게서 여비를 빌린다. 실제로는 모래를 채운 상자 두 개를 담보로 맡기면서 내용물은 말하지 않는다.
왕은 부르고스를 비롯한 길목에서 누구도 시드 일행을 재우지 못하게 한다. 시드는 힘으로 숙소를 빼앗기를 거부하고 성 밖에 진을 친다. 아내와 딸들을 산페드로데카르데냐 수도원의 산초 수도원장에게 맡긴 뒤 충성스러운 부하들과 비그리스도교 지역으로 원정을 떠난다. 카스테혼과 알코세르를 정복하고 테바르 전투에서 돈 레몬트 백작을 격파한다. 포로가 된 백작은 ‘신발도 변변찮은 자들’에게 잡혔다는 모욕감에 단식하지만 시드의 친절에 마음을 바꾼다. 시드는 추방자라 전리품을 바칠 의무가 없는데도 승리 때마다 왕에게 왕실 몫을 보내 용서를 구한다.
제2가: 시드의 딸들의 혼인 노래(1085~2277행)
시드 캄페아도르는 무어인이 지배하던 발렌시아를 정복한다. 오른팔 알바르 파녜스를 새 선물과 함께 카스티야 궁정에 보내 가족이 발렌시아로 오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마침내 시드와 부하들을 용서한다. 시드는 높은 탑에서 가족에게 도시와 평야를 자랑스럽게 보여 준다. 그의 성공을 본 카리온 왕자들은 도냐 엘비라와 도냐 솔에게 청혼한다. 시드는 그들을 믿지 않지만 왕의 청을 받아들인다. 혼례는 성대하게 열리고 잔치는 15일 동안 계속된다.
제3가: 코르페스의 치욕 노래(2278~3730행)
카리온 왕자들은 우리에서 나온 사자 앞에서 겁에 질려 달아나고, 발렌시아를 되찾으려는 부카르 왕과 싸울 때도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 시드의 부대장들은 그 사실을 시드에게 숨기면서 왕자들을 조롱한다. 모욕감을 느낀 왕자들은 복수하려고 아내들과 카리온데로스콘데스로 떠난다. 코르페스 참나무숲에서 아내들을 채찍질하고 혼절한 채 버려 늑대의 먹이가 되게 한다.
시드는 왕에게 정의를 요구한다. 왕은 톨레도에 코르테스를 소집한다. 재판에서는 먼저 시드가 혼수로 준 검 티소나와 콜라다를 돌려받는다. 이어 시드 측 대표 페드로 베르무데스와 마르틴 안톨리네스가 왕자들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그들을 반죽음 상태로 패배시키고 불명예에 빠뜨린다. 혼인은 무효가 되고, 시드의 딸들이 나바라와 아라곤의 왕자들과 혼인할 계획이 발표되면서 시드의 명예는 절정에 이른다.
특징과 주제
이 작품은 프랑스 서사시와 달리 초자연적 요소가 거의 없다. 예외라면 성 가브리엘 대천사의 꿈속 출현, 캄페아도르에게 굴복하는 사자, 검 콜라다와 티소나의 광채, 명마 바비에카의 비범함 정도다.[5] 영웅은 절제(mesura)와 신중함, 균형을 갖춘 인물이며 그의 위업도 비교적 그럴듯하다. 딸들이 학대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즉시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하지 않고 오래 숙고하여 장엄한 사법 절차로 배상을 구한다. 전략가답게 상황이 불리하면 성급히 싸우지 않는다.
시드는 무슬림과도 우호적으로 지낸다. 동맹이자 봉신인 아벵갈본은 작품 속 ‘평화의 무어인’, 곧 무데하르의 지위와 할론·힐로카 계곡에서 흔했던 히스파노아랍 공동체와의 관용적 공존을 반영한다.[6]
무슬림 영토와 맞닿은 변경에서 무력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다는 요소가 매우 강하다. 이 ‘변경 정신’과 하급기사 인판손의 상승은 1140년경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작품이 그때 지어졌다는 설을 반박하는 중요한 근거다.
시드는 백작과 대귀족보다 낮은 인판손에 지나지 않았지만 노력으로 명성과 부를 쌓고, 왕의 임시 위임지가 아닌 세습 영주령 발렌시아를 얻는다. 작품의 진정한 주제는 영웅의 명예가 상승하여 마침내 봉신을 거느린 영주가 되고 발렌시아를 본거지로 한 독자적 가문을 세우는 과정이다. 딸들이 나바라와 아라곤 왕자들에게 시집감으로써 그의 위상은 왕에 가까워진다. 그럼에도 시드 자신은 끝까지 카스티야 군주의 봉신임을 인정한다.
작품 말미는 “오늘 스페인의 왕들이 그의 친척이 되었고, 좋은 때 태어난 그로 말미암아 모두가 명예를 얻는다”고 노래한다. 시드의 가문이 왕실과 연결될 뿐 아니라 왕들까지 그의 후손이라는 사실로 더 큰 명예를 얻는다는 뜻이다.[7]
프랑스 무훈시보다 영웅의 인간적인 면도 두드러진다. 시드는 말에서 떨어지거나 공격에 실패하기도 하지만 영웅성은 손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승리를 불확실하게 보이게 하여 최종 성공을 돋보이게 하는 서사 전략이다. 추방된 군대의 생존 문제도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무어인과 싸우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에게 빵을 주지 않는다”는 알바르 파녜스의 말처럼 전투는 생존 수단이며, 작품은 전리품과 12세기 말 변경법에 따른 분배를 자세히 기록한다.
운율
각 시행은 카에수라에 의해 두 반행으로 나뉜다. 프랑스 서사시의 10음절 규칙시와 달리 시행과 반행의 음절수가 크게 달라지는 음절수 불규칙(anisosilabismo)이 특징이다. 예외를 제외하면 시행은 9~20음절, 반행은 3~11음절이며 대다수는 14~16음절이다.[9]
여러 학자는 스페인 중세 서사시 운율에서 음절수보다 강세의 받침이 중요하며, 반행마다 두 개의 주강세가 있다고 설명했다. 몬타네르 프루토스는 고정된 단일 규칙보다 시행 길이와 무강세 간격에 따라 반행의 강세 수가 달라지는 가변적 리듬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한다. 강세가 중요하더라도 음절수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10][22]
모든 시행은 원칙적으로 모음운이지만 완전히 규칙적이지는 않고, 사용된 모음운 유형도 열한 가지뿐이다. 마지막 강세 음절의 모음이 핵심이며, 그 뒤의 첨가모음 e는 운 계산에서 제외된다. 시행은 3행에서 190행까지 길이가 다양한 연속행으로 묶인다. 각 연속행은 같은 운을 공유하고 내용 단위를 이루지만, 장소 이동·사건의 상세화·화법 변화·화자 교체·삽입 설명 등에 따라 운이 바뀐다.
자료
1190년경의 라틴어 전기 《로드리고의 역사》는 특히 테바르 전투에서 실제 콰르테 전투를 반영하는 유세프와의 싸움까지 역사 정보를 제공한 중요한 자료로 보인다. 작품은 많은 역사적 사실을 무훈시 장르와 영웅상에 맞게 변형하고, 카리온 왕자들의 치욕처럼 완전히 허구인 사건도 만들었다.
앞선 시드 서사시의 존재는 입증되지 않았고, 이른바 ‘뉴스 노래’도 증거가 없다. 주된 원천은 구전 역사였으며 일부는 궁극적으로 《로드리고의 역사》에 닿는다. 법률 문서와 역사 자료에서 인물 이름 등을 얻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오늘날처럼 시드를 조사하려고 문서고를 찾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12세기 구전 역사의 생명력은 오늘날의 상상보다 강했고, 1270년에도 알폰소 10세의 《스페인사》 편찬자들은 시드 시대의 구전 정보를 이용했다.
가장 뚜렷한 외국 영향은 12세기 프랑스 서사시, 특히 《롤랑의 노래》에서 왔다. 관용구 체계, “훌륭한 주군만 있었다면 얼마나 좋은 봉신인가!”라는 20행, 성 가브리엘의 등장, 전투의 서사 구조와 무기·전술, 프랑스의 투르팽에 대응하는 전사 주교 헤로니모 등이 그 예다.[29]
문체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절제된 수사, 사실주의, 무훈시 고유의 의식적인 고어체다. 이 고어체는 14세기까지 장르를 표시하는 인공 언어로 기능했다. 카를 포슬러는 프랑스 모델에서 벗어난 “매우 독창적이고 카스티야적이며 인간적인 모습”을, 에드먼드 데 차스카는 구체적 사물의 정밀성과 구조적 의미를 강조했다.[30]
사실주의와 수사적 절제는 이후 《라 셀레스티나》·피카레스크 소설·《돈키호테》로 이어질 스페인 문학의 인장을 미리 찍었다. 전리품을 은 마르코와 말의 수로 계산하고, 혼례 음식과 식후 얼굴빛까지 적으며, 등장인물의 몸짓을 세세히 묘사한다.
고어체는 영웅시대의 장엄함을 부여하지만 작품 연대 추정을 어렵게 했다. 라틴어 학술어와 아랍어 호격사 ya도 나타난다. 음성 면에서는 두운·내부운·음향 효과를 활용한다. 어휘에는 법률·교회 용어, 동의어 이중어, 반의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같은 뜻인 이중어, 전체를 가리키는 짝말이 많다. 문법적으로는 “눈으로 울다”, “입으로 말하다” 같은 신체 표현, 병행법·수구법·열거법, 시작을 뜻하는 동사구가 풍부하다. 행 걸침은 드물지만 쓰일 때 효과가 크다. 비유는 대체로 단순하고 구전 전통에 뿌리를 두며, 시드와 가족의 이별을 “손톱과 살처럼”이라고 표현한 직유가 유명하다.
관용구
서사 전통에서는 후글라르의 낭송과 즉흥을 돕는 정형구가 고유한 문체 표지가 되었다. 《나의 시드의 노래》의 정형구 체계는 12세기 북프랑스·옥시타니의 무훈시에서 큰 영향을 받았지만 1200년경 이베리아의 시공간에 맞게 새롭게 고쳐졌다. 정형구는 대개 반행 하나를 채우고 운자까지 제공했다. 자주 쓰인 예는 “나의 시드가 말에 박차를 가했다”, “검에 손을 댔다”, “팔꿈치 아래 갑옷으로 피가 흘렀다”, “나의 훌륭한 봉신” 등이다.
서사적 수식어
주인공을 긍정적으로 꾸미고 개별화하는 고정된 수식어 또는 우회표현이다. 시드에게는 ‘캄페아도르’, ‘숱 많은 수염의 사나이’, ‘좋은 때 태어난 이’, ‘좋은 때 검을 찬 이’가 쓰인다. 알폰소 왕은 ‘좋은 왕’, ‘명예로운 왕’, ‘나의 타고난 주군’, ‘카스티야인’, ‘레온의 왕’이며, 히메나는 ‘명예로운 여인’, 마르틴 안톨리네스는 ‘훌륭하고 완전하며 충성스러운 부르고스인’, 알바르 파녜스는 ‘능숙한 오른팔’이다. 바비에카는 ‘잘 달리는 말’과 ‘준마’, 발렌시아는 ‘빛나는 도시’와 ‘큰 도시’로 불린다.
서술자의 목소리
전지적 서술자는 문체 효과를 위해 시제를 자유롭게 사용하며, 등장인물보다 많은 정보를 주어 극적 아이러니를 만든다. 청중은 카리온 왕자들이 시드의 딸들을 해칠 계획을 알지만 시드는 모른다. 모래 상자 대출 장면에서도 청중과 시드는 진실을 알지만 탐욕스러운 대금업자들은 보물로 믿는다.
서술자는 언제나 시드 편에 서고 적대자들을 깎아내린다. 때때로 3인칭을 버리고 2인칭으로 청중에게 말하거나 1인칭으로 자신을 드러내 공모감을 만든다. 발렌시아의 혼례 장면에서 “그 궁전에 있어 함께 먹고 싶었을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이 그 예다.
필사본
현재 마드리드 스페인 국립도서관에는 첫머리가 없는 유일본이 보존되어 있으며, 히스패닉 디지털 도서관과 미겔 데 세르반테스 가상도서관에서도 볼 수 있다. 첫 장 외에 2337행과 3507행 뒤의 두 장, 각각 약 50행이 소실되었다. 세 공백은 《스페인사》와 《카스티야 연대기》의 산문화 자료로 복원할 수 있다. 첫 공백에는 추방 통보를 받은 시드가 친척과 봉신을 불러 누가 함께 갈지 묻고, 알바르 파녜스가 모두 충성스럽게 따르겠다고 답하는 내용이 들어간다. 두 번째에는 부카르 왕과의 전투에서 페르난도가 겁을 먹고 달아나자 페드로 베르무데스가 대신 무어 전사를 죽이고 그 공을 페르난도에게 양보하는 장면이 있다. 세 번째에는 왕과 작별하는 시드가 바비에카를 달려 보이고 왕이 감탄하는 장면이 포함된다.
16세기에는 비바르 평의회 문서고에 보관되었고, 1596년 루이스 데 울리바리가 필사본을 만들었다. 1779년 카를로스 3세의 국무회의 서기관 에우헤니오 데 야구노 이 아미롤라가 토마스 안토니오 산체스의 출판을 위해 반출했다. 이후 여러 소유자를 거쳐 피달 가문에 들어갔다. 1913년 25만 페세타로 평가되어 스페인 은행 금고로 옮겨졌고, 내전 중 다른 예술품과 함께 제네바로 보내졌다가 종전 뒤 귀환했다. 영국박물관과 미국의 아처 밀턴 헌팅턴을 비롯한 외국의 거액 구매 제의를 피달 가문은 오랫동안 거절했다. 1960년 12월 20일 후안 마르치 재단이 천만 페세타에 구입하여 같은 달 30일 문화부에 기증했고, 국립도서관 소장품이 되었다.[33][34]
두꺼운 양피지 74장으로 된 책이며 보호지 두 장이 더 있다. 노래·시행·연속행 사이를 나누지 않은 연속 텍스트이고, 각 시행은 관례대로 대문자로 시작한다. 16세기부터 흐려진 글씨를 읽으려고 사용한 시약 때문에 여러 장에 짙은 갈색 얼룩이 남았다. 완전히 판독 불가능한 곳은 많지 않으며 피달의 고문자학 판본, 울리바리 필사본, 피달 이전 판본으로 대조할 수 있다. 15세기의 가죽 씌운 나무판 제본이며, 11개 책첩으로 구성된다. 글씨는 분명하고 간혹 장식 머리글자가 있다. 최근 연구는 고문서가 14세기 전반, 구체적으로 1320~1330년, 특히 1320년대 후반에 산페드로데카르데냐 수도원이 빌린 선행본을 바탕으로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35][36]
필사본의 연대
현존본은 14세기 필사본이며, 1207년에 페르 아바트가 베낀 선행본을 다시 필사한 것이다. 그 선행본 또한 몇 해 앞서 성립한 원작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말미 기록의 히스패닉 연대 1245년에서 38년을 빼면 서기 1207년이 된다.
이 책을 쓴 이에게 하느님의 낙원이 있기를, 아멘.
페르 아바트가 히스패닉력 1245년 5월에 이 책을 썼다.
중세의 ‘쓰다’는 오늘날의 저작이 아니라 필사를 뜻했다. 필경사는 필사를 마치며 이름과 완료일을 적었다.
작가와 창작 연대
대다수 연구자는 현존 텍스트를 12세기 말~13세기 초의 법률을 정확히 아는 교양 있는 단일 작가의 작품으로 본다. 작가는 부르고스·메디나셀리·카스티야와 아라곤 변경·알카리아·힐로카 계곡의 미세지명을 알았고, 상서원 서기·공증인·법률가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일부 문헌학자는 12세기 중엽의 더 오래된 선행본이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후기 연대를 지지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메넨데스 피달은 말미 연대에 지워진 C가 하나 더 있어 1307년이라고 보았지만, 적외선 조사에서도 잉크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양피지의 흠이나 필경사의 망설임으로 공간이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피달은 한때 1140년 원작을 상정했지만, 시드가 모든 스페인 왕조와 혈연으로 연결된 것은 1201년 이후였다는 점, 고어가 실제 연대가 아니라 영웅시의 인공 고어체일 수 있다는 점이 그 설을 약화한다.
피달은 처음에 산에스테반데고르마스를 아는 메디나셀리 시인을, 나중에는 산에스테반의 사실주의적 초고 작가와 메디나셀리의 개작자라는 두 시인을 상정했다. 안토니오 우비에토 아르테타는 작가가 두에로 강변 지리를 부정확하게 아는 반면 할론 계곡과 테루엘 지명을 자세히 알고 아라곤어 특유의 단어를 썼으므로 남부 아라곤 출신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콜린 스미스는 처음에 페르 아바트를 작가로 보고 1207년을 창작 연대로 보았으며, 프랑스 무훈시를 잘 아는 법률가가 스페인 서사시를 창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뒤에는 페르 아바트가 필경사일 가능성과 1207년 이전 창작설을 인정했다. 오늘날의 종합적 결론은 교양과 깊은 법률 지식을 갖춘 한 작가가 대략 1195~1207년에 작품을 지었다는 것이다.
주요 인물의 대부분은 실존했다.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 알폰소 6세, 카리온 왕자 디에고와 페르난도 곤살레스, 가르시아 오르도녜스, 유수프 이븐 타슈핀, 미나야 알바르 파녜스가 그들이다. 히메나 디아스, 돈 레몬트 백작, 아벵갈본, 헤로니모 주교 등 조연도 실존 인물이다. 페드로 베르무데스·마르틴 안톨리네스·펠레스 무뇨스·라켈과 비다스는 실재 여부가 불분명하고, 타민·파리스·갈베는 허구다. 시드의 딸 엘비라와 솔의 실제 이름은 크리스티나와 마리아였으며, 카르데냐 수도원장 산초는 실제로 시세부토였다. 모로코 왕 부카르는 알모라비드 장군 시르 벤 아부베케르에 해당한다.[39]
시드의 외모에서 강조되는 것은 크고 숱 많은 수염과 강인함뿐이다. 궁정으로 돌아갈 때까지 애도의 뜻으로 수염을 자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뛰어난 전사이자 경건한 아버지이며, 굴욕을 감수할 만큼 왕에게 충성한다. 무슬림 친구에게도 신의를 지킨다. 아벵갈본은 왕자들이 자신을 살해하고 재물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알면서도 시드를 존중해 그들을 용서함으로써 진정한 귀족성이 무엇인지 보여 준다.
시드를 가장 잘 규정하는 덕목은 mesura, 곧 침착·균형·절제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자신과 미래를 믿고 불길한 징조를 거부한다. 복수도 폭력이 아니라 법으로 한다. 왕에게 코르테스를 요구하고 혼수 반환을 청하며, 명예 결투는 부하들에게 맡긴다. 사자가 풀려났을 때 힘을 과시하려 죽이지 않고 우리로 돌려보낸다. 이는 자신도 자기 자리를 지키는 위대한 기사임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돈키호테》 제2부 17장에서 패러디되었다.
알바르 파녜스는 시드의 덕목을 공유하는 훌륭한 부관이자 외교관이다. 마르틴 안톨리네스는 충성스럽고 관대하지만 유대인들을 속이는 상자 계략을 고안한 영리한 인물이며 뛰어난 전사다. 시드의 조카 페드로 베르무데스는 말을 더듬지만 성급하고 열정적이다. 동료들은 그를 ‘말 없는 페로’라 놀리지만, 제3가의 결투 도전에서 유창하게 말하며 스페인 문학 최초의 속담으로 전하는 “손도 없는 혀여, 어찌 감히 말하느냐”로 연설을 시작한다.
펠레스 무뇨스는 보잘것없는 전리품으로 산 모자를 물그릇으로 망가뜨리면서까지 버려진 사촌들에게 물을 먹인다. 이 행동은 그의 고귀함과 시드 가문의 관대함을 보여 준다. 히메나는 경건한 어머니이자 강한 자존심을 지닌 여성이다. 반면 카리온 왕자들은 아내를 때리면서 누가 더 세게 치는지 경쟁할 만큼 잔혹하고 비열하다. 프랑스 서사시의 가늘롱과 달리 아무런 고귀함·위대함·인간성도 없다. 돈 레몬트 백작은 허영심 강한 궁정인으로, 초라한 카스티야인들에게 패한 수치를 견디지 못하지만 시드의 너그러움에 마음을 돌린다.
최초의 주요 간행은 토마스 안토니오 산체스의 1779년 판본이다. 이후 다마스 이나르(1858), 플로렌시오 하네르(1864), 안드레스 베요(1881), 라몬 메넨데스 피달의 여러 판본(1911~1971), 이언 마이클(1976), 콜린 스미스(1972·1976), 미겔 가르시고메스(1977), 마리아 에우헤니아 라카라(1982), 쥘 오랑(1982), 부스토스 토바르(1983), 페드로 마누엘 카테드라(1985), 알베르토 몬타네르 프루토스(1993·2007·2011), 훌리오 로드리게스 푸에르톨라스(1996), 에우케네 라카라 란스(2002·2015) 등의 교정·주석 판본이 나왔다.
알폰소 레예스 오초아는 1919년 현대 산문판을 만들었고, 27세대 시인 페드로 살리나스는 1926년 현대 카스티야어 운문으로 고쳤다. 루이스 과르네르, 프란시스코 로페스 에스트라다, 후스토 페레스 데 우르벨, 마티아스 마르티네스 부르고스, 카밀로 호세 셀라, 알베르토 마넨트가 후속 운문판을 냈다. 리카르도 바에사, 앙헬레스 비야르타, 페르난도 구티에레스, 카를로스 오라시오 마히스, 엔리케 룰은 산문판을 만들었다.[40]
영상 각색에는 영화 《엘 시드》(1961), 《나의 시드의 시》, 《성난 시드》, 《엘 시드, 전설》, 텔레비전 시리즈 《루이, 어린 시드》(1980)와 《엘 시드》(2020)가 있다.
원문의 주석·참고문헌 1~40은 학술서·논문·판본에 관한 서지정보이므로 저자명, 원제, 권호, 쪽수와 링크를 원문 표기대로 따른다. 주요 근거는 알베르토 몬타네르 프루토스의 2011년 스페인 왕립학술원 고전총서 판본, 카초 블레쿠아·라카라 두카이의 《스페인 문학사》, 스페인 국립도서관 자료, 메넨데스 피달·콜린 스미스·에드문도 데 차스카·프란시스코 로페스 에스트라다·이네스 페르난데스 오르도녜스 등의 연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