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일 시조집, 『시간의 무늬』, 東芳, 2008.
□ 약력
-1944년 경북 안동 솔뫼리에서 출생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 및 『시조문학』 추천
-1993년 제2회 이호우시조문학상 수상
-2001년 제7회 경북문학상 수상
-이육사문학관 관장
-시집으로 『바람 길』 『솔뫼리 사람들』 『마른 강』
지팡이
뜰에 혼자 싹 터
안쓰러이 크고 있는
완두콩 어린 줄기 맘에 걸리시는지
짚고 곤 헌 나무 짝지
곁에 세워 두셨다.
푸른 하늘 아래
목숨 소중한 일
어디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어머니 세워놓으신
지팡이가 보여준다.
분단
어느 시대에도 피붙이끼리의 싸움
땅을 갈라놓고 등 돌린 자 있느니
역사여 참담한 허망 눈여겨 볼 일이다.
이념은 구실이며 탐욕 그 자체다
시퍼런 날을 세운 광기 번뜩여 온
아파라 혼절한 역사 피 묻는 흔적이여.
우리는 알고 있어라 하늘이 가르쳐 준
통한은 하나 민족의 길이 있다는 것
허구의 이데올로기 깨우쳐 살 일이다.
삶
키가 모자라면
팔길 길게 뻗고
그래도 닿지 않으면 눈으로 따라가는
도무지 멈추지 않는 발돋움의 길이다.
벌레
불 켜면 날아와 앉은
책상 위 작은 벌레
빠르게 활자 사이 기는 몸짓에서
세상을 살아나가는 내 모습이 보인다.
그래 목숨이 어디
크고 작을 수야
안경을 낀 눈으로 곰곰이 새겨 보면
스스로 지니고 사는 삶의 연민 느낀다.
구시장 길
젖고 비좁은 길
어깨 부딪히며
구시장 생선가게 앞을 지나칠 때
한 시대 상한 비린내
온 몸에 와 꽂힌다.
잠지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보면
소금에 절어 뭉개진 푸른 고등어 한 쌍
죽어서 감지 못하는
부릅뜬 눈 만난다.
사랑 꽃
그대에게 가는 길 눈부시게 빛났다
마주 바라만 봐도 숨가쁘게 어리러운
꽃이여, 그리움으로 피어 붉은 꽃이여.
혼자서 감당치 못해 끝내 자지러지는
돋아 잠 이룰 수 없는 열정의 길
그대여, 몸이 저리어 앓아눕는 밤이여.
환한 세상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붉게 타로르는 황홀한 눈부심으로
꽃이여, 눈물이라도 좋을 사랑의 꽃이여.
흐르는 강
봄날 강이 풀려 조용히 흐르는 것은
들려줄 그 사람을 향한 혼이 살아
영하의 기온 아래서 버티어 온 한이다.
아무 생각 하나 가질 수 없는 엄동
죽은 목숨으로 이어 온 눈물겨움
따뜻한 봇물이 되어 반짝이며 가느니.
하늘 아래 단 하나 남겨진 말 그리움
춥고 긴 겨울 밤 온 몸으로 감싸
이 봄날 그대 곁으로 다가가는 혼이다.
운주사
사람이 그리운 날
운주사를 찾아가면
조금씩 모자라는 삶을 끌어안은
알 듯한 그 얼굴 모습
닳아 눈물
겨웁다.
어느 것 하나 성하지 않은
눈 코 귀 입
그래도 너그러움 잃지 않고 지니고 선
운주사 석불 앞에서
마주한 몸
저리다.
어머님
해 지는 창가에 앉아 옷깃 가다듬고
물소리 일렁이는 눈으로 내비치는 말
무리를 따라서 나는 새 소리로 들린다.
불게 물든 하늘 곱다, 곱다 하시며
자리를 뜨지 못하시고 혼자 말 잇는
날을 듯 가벼운 모습 해 보내기 하신다.
감꽃
아무리 밤이 길어도
잠이 모자랐다
그런 밤 지새고 나면 끌에 감꽃이 졌다
하얗게 내러 아프게
발에 밟혀
들었다
쑥
어머니는 늘 혼자말로
날 닮은 팔자라며
온 몸이 풀리는 봄날 치마 가득 뜯어 와
현기증 이는 가난을
막아보려
애썼다.
새
아무리
높이 날아도
새에게는
다시 돌아가 앉을 자리가
마음에 있어
이승을 못 벗어나고
펼친 날개
접는다.
사랑이여
오늘 죽고 내일 태어나
함께 살자는
목숨 바친 언약
얼굴 모르면 어쩌지
어쩌지
다시 태어나 그대 얼굴
모르면.
그리움 1
그개 가고 난 후
마음 한가운데
천길 벼랑 열고 온 몸 던지느니
뜨거운 피 흘린 자리
꽃망울이
맺혀라.
상현달
정말 잊지 못하는
그리움 깨닫고 난 뒤
세월이 오래 흐르면 되돌릴 수가 없어
해 지면 창백한 얼굴
하늘 높이
매단다.
강
강에는 늘 말없이 맑은 기운 솟았다
하늘로 되돌아 갈 사랑함 나부끼며
세상을 씻어서 고운 맘 흔들고 있었다.
가장 낮은 곳 향해 줄기차게 뻗으며
아무리 몸 부딪혀도 상처나지 않는
온전히 깨달아 얻은 물보라 일으켰다.
세월히 흐를수록 하늘 가운데 앉히고
영원히 썩지 않는 곳 바다를 향해 흘렀다.
비오는 날
봄비 내리는 풍경 한 폭 그림이다
빗물에 씻겨 드러나 짙은 무채색 고요
강 건너 마을 안까지 흰 물안개 피운다.
엷은 채색을 한 여백 속 낮은 빗소리
짙은 안개 속에서 들릴 듯 말 듯 여리게
잔잔히 그림 밖까지 삶의 울림 전한다.
들길을 걸으며
바람에 떠밀려 사는 여린 풀잎을 보라
키가 작을수록 서로 몸을 부추겨
한여름 땡볕 견디며 꿈 매달고 있어라.
굳은 땅 헤지고 갈증의 뿌리 뻗으며
곧게 몸을 세우고 파란 하늘 향해
고와라 눈이 부시는 꽃 피우며 살아라.
혼자 산을 오르며
혼자 산을 오르면
산과 하나가 된다.
나무며 풀잎이며 나는 새들까지
흐르는 땀방울 섞인
숨소리로 얽힌다.
능선을 거듭 넘어
정이 들 때쯤이면
맑은 햇살이며
바람 먼 하늘까지
굽이쳐 흐르는 푸른
산빛으로
변한다.
가끔씩 눈 마주친
짐승들 기다려지고
잎이며 꽃들이며 활짝 핀 메아리까지
사에는 철따라 모인
인연들이
쌓인다.
□ 조영일 시 읽기
36년여 시력詩歷이 튀우는 막힘없는 시의 물길
박시교(시인)
-「흐르는 강」
‘영하의 기온 아래로 일체가 마감된다’던 ‘처연한 결빙’과 ‘견고한 추위’의 시간도 흘렀다. 그러나 그 ‘빙판에 모아지던 단호한 결별의 의지’는 결코 버려지거나 잊혀진 것이 아니라 ‘하늘 아래 단 하나 남겨진 말 그리움’을 이 봄날 그대 곁으로 다가가는 ‘혼’을 싣고 봄날의 강으로 흐르고 있음을 목격할 수가 있다.
이 시를 통해 조영일 시인은 시적 해빙기의 시간에 닿아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지팡이」
저 혼자 싹을 틔워 자라난 완두콩을 줄기가 안쓰러워서 노모께서는 당신이 짚고 다니던 나무 짝지 지팡이를 받침대로 꽃아 준다. ‘푸른 하늘 아래 / 목숨 소중한 일’이 ‘어디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는 걸’ 늙은 노모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완동콩 어린 싹 넝쿨이 지팡이를 의지해서 타고 올라 마침내는 한 생명의 결실인 열매까지도 맺게 되는 자연의 숭고한 이치를 ‘어머니 세워놓으신 지팡이’가 보여준다‘고 하는 경이와 맞닥뜨리게 된다.
아주 평이한 서울을 통해 농촌 앞마당에서 일어남 직한 삽화를 생명의 소중함으로까지 확대해서 그려낸 소품인 듯하지만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시적 함의는 그 이상이다는 생각을 했다.